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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cec,#fff><colcolor=#0d1635> | |||
출생 | 1868년 11월 22일 | ||
미국 텍사스 레드 리버 카운티 | |||
사망 | 1967년 11월 7일 (향년 98세) | ||
미국 텍사스 유밸디 | |||
재임기간 | 제32대 부통령 | ||
1933년 3월 4일 ~ 1941년 1월 20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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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매리어트 라이너 가너 | ||
자녀 | 툴리 가너 | ||
학력 | 밴더빌트 대학교 (중퇴) | ||
종교 | 개신교 (감리교회) | ||
신장 | 183cm | ||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 16 (하원) | ||
의원 대수 | 58,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 72, 73 | ||
별명 | 선인장 잭 Cactus Jack | }}}}}}}}} |
연방 하원 의장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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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32대 부통령.2. 약력
- 1899.1. 텍사스주 하원의원 (1899.1.10 ~ 1903.1.13.)
- 1903.3. 제58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05.3. 제59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07.3. 제60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09.3. 제61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11.3. 제62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13.3. 제63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15.3. 제64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17.3. 제65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19.3. 제66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21.3. 제67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23.3. 제68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25.3. 제69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27.3. 제70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29.3. 제71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31.3. 제72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29.3. 하원 소수당 대표 (1929.3.4. ~ 1931.3.3.)
- 1929.3. 하원 민주당 전당대회 의장 (1929.3.4. ~ 1933.3.3.)
- 1931.12. 제39대 하원의장 (1931.12.7. ~ 1933.3.3.)
- 1933.3. 제73대 하원의원 (텍사스 제15선거구 / 민주당)
- 1933.3. 제32대 미국 부통령
3. 생애
3.1. 초기 생애
텍사스주 래드리버 카운티 블라섬 프레이리의 부유한 집에서 전 남부연합군 기병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네시주의 명문사립 밴더빌트 대학교를 1886년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1890년 변호사가 되었고 이후 1893년부터 3년간 유밸디 카운티의 판사로 선출되어 지방판사로 살았다. 당시 그곳의 판사는 선출직으로 행정도 담당했으며, 선거에서 그의 경쟁자는 메리엇 라이너라는 여성이었는데, 후에 두 사람은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이후 1898년부터 텍사스 주의회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다가 1902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1903년부터 약 30년간을 하원의원으로 보냈다.3.2. 하원의원
가너가 처음 하원에 입성했을 때 민주당의 상황은 암울했다. 조 캐논은 하원에서 독재적인 권력을 구축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너는 위원회 배정을 좋게 받지는 못했으나 천천히 포커를 쳐가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1910년에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고 챔프 클라크가 하원의장에 등극하자 가너도 오스카 언더우드 원내대표 밑에서 원내총무 자리를 맡게 되었다. 정치인생 초기에도 가너는 굉장히 유능한 하원의원이었다. 사소한 지출에 대한 전문가로 유명했고 자신의 지역구에도 재깍재깍 사업을 유치하는 데에 능숙했다.그러나 본격적으로 존 낸스 가너가 명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의회의 세입위원회에 들어가게 된 이후였다. 세입위원회의 가너는 소득세 문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소득세 문제에 있어 여타 남부인들과 다르지 않게 적극적으로 찬성했는데, 관세를 크게 낮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다른 남부인의 차이점은 누진세 문제에서 왔다. 코델 헐을 비롯한 주류는 1% 균일세를 주장했으나 존 낸스 가너의 완강함으로 인해 언더우드 관세법에서 소득세는 누진세의 형태로 제정되었다.
1920년의 산사태는 가너를 한발짝 지도부에 가깝게 만든 듯 보였다. 코델 헐과 챔프 클라크를 비롯한 저명한 민주당원들마저 의석을 잃게 되었고, 이제 민주당 원내대표는 클로드 키친이 되었으며 가너는 세입위에서 2등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키친은 떠나면서 가너가 아닌 피니스 개럿을 후임으로 지명하는 빅엿을 남겨놓고 떠났다. 키친의 제자였던 제임스 F. 번즈를 세출위원회에 임명하는 것을 막고 자신의 제자를 꽂아넣었으며 관세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였던 짐 웰스도 자신의 세력이 약해지며 차라리 상원에 출마하라고 가너를 설득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너는 1922년 선거 이후에 자신이 하원의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못 됐다. 민주당은 하원에서 다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피니스 개럿은 1928년 상원 선거에 출마할 때까지 계속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원의장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면서도 가너는 항상 은퇴하길 원했다. 가너는 샘 레이번에게 은퇴하고 싶지만 "주민들이 나를 놔주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부통령은 정치를 은퇴할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당시 가너의 초점은 경제 분야였다. 공화당의 수많은 의석으로 인해 법안을 부결시키긴 힘들었지만 충분한 수의 Insurgent Republican[1]과 함께 법안을 약화시킬 순 있었다. 이 당시 중요한 법안이라 한다면 관세법이 있었다. 관세를 극적으로 인상시키는 포드니-맥컴버 관세법에 있어서 관세 계산법을 바꾸는 것은 반대했지만 어느 정도의 인상은 찬성했다.[2] 그러나 스무트-홀리 관세법에선 그다지 힘을 쓸 수 없었다.
물론 가너가 관세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멜런 재무장관이 소득세를 65%에서 25%까지 낮추려 하자 50%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1924년에도 같은 시도가 있었으나 40%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 가너는 본질적으로 감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찬성했으나 그와 동시에 타협을 중시했고 민주당을 국민의 편에 놓으려 했다.
3.3. 하원의장
1930년 선거가 다가오자 가너의 꿈이 드디어 이뤄지는 듯 보였다. 자신은 원내대표였고 마침내 오랜 공화당 우위가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1930년 선거에선 공화당이 승리했다. 그럼에도 회기가 시작하기 전에 공화당 의원이 민주당 의원보다 많이 죽었기에 하원의장 직을 어떻게 차지할 수 있었다.하원의장이 된 가너의 목표는 균형재정의 달성이었다. 그렇기에 하원의장의 요구는 후버랑 별로 상충하지 않았다. 둘 다 어느 정도의 증세와 함께 균형재정의 달성을 이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너는 후버 행정부보다 더 국민에 대한 지원을 중요시했다.
가너의 임기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어느 정도의 분열이 있었다. 정당의 주도권은 분명히 남부가 잡고 있었으며 가너도 이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헨리 T. 라이니가 원내대표를 차지했으나 북부인이란 이유로 자신의 서클에 끼워주지 않았을 정도다.
상술했듯이 가너의 정책은 후버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목할 만한 사건도 별로 없다. 딱 2개만 살펴보면 된다. 바로 전국적 판매세와 공공사업 문제이다. 가너는 평소에 판매세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공황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시도는 공화당 내의 동료였던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반대로 인해 빠르게 무너지고 말았다.
공공사업 문제는 조금 시간차를 두고 생겨난 문제다. 1932년이 되자 가너는 대규모 지출의 필요를 실감하게 되었고, 이에 가너는 공공사업 법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가 제안한 법안은 후버에게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선심성 지출"이라 불릴 지경이었다. 가너는 성공적으로 법안을 가결시켰으나 거부권을 행사당하고 만다.
3.4. 부통령
1932년의 당내 대통령 경선에는 남부의 지지를 받았으나 당시 정치적으로는 젊은 나이였던 쉰 살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패하여 64살의 나이로 부통령 후보로 나섰고 여기서 당선되었다. 지금도 대체적으로 그렇지만 부통령 (겸 미국 상원의장)은 사실상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자리에 불만이 많았는지 부통령에 대한 독설을 남겼다. 이 독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미국 부통령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부통령으로서 가너는 루즈벨트의 여러 정책 통과에 기여하기도 했고 국무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당시의 부통령 치고는 많은 목소리를 냈지만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임기 초반엔 루즈벨트와 그럭저럭 사이가 괜찮았지만 루즈벨트가 재선한 이후 뉴딜 정책과 대법원 확장[3] 등 여러 안건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충돌하여 갈등이 커진다.
루즈벨트의 임기가 끝나가는 1940년 대선 경선에서 가너는 고령의 나이로 출마를 선언하고, 민주당 전국위원장 제임스 팔리와 함께 유력한 후보로 여겨졌지만 루즈벨트가 민주당 전당대회 첫날에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거나, 대통령 후보자가 되거나, 전당대회에서 후보자로 지명되려는 소망이나 목적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현재도 없습니다. 그는 이 전당대회의 모든 대의원이 어떤 후보자에게든 자유롭게 투표할 수 있다는 점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밝히고자 합니다."라는 메세지를 보내며 사실상 3선 선언을 한다.[4] 결과는 압도적이었고 루즈벨트는 900표 넘는 대의원을 획득한데 비해 가너는 61표에 그쳤다. 이후 부통령직은 헨리 월리스에게 넘어간다.
3.5. 은퇴
8년간 부통령을 했으나 대통령직에 욕심이 생겨 72세의 나이에 1940년 다시 경선에 도전했다. 하지만 상대는 미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4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였다. 결국 그는 당내 경선에서 패배하고 루스벨트는 그 대신 헨리 월리스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하고 가너는 다음해 1월 20일에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5]미국 권력서열 3위인 하원의장에 이어 권력서열 2위인 상원의장 겸 부통령을 지내 미국에서 19세기 스카일러 콜팩스 부통령과 함께 상원과 하원 양원의 의장을 모두 지낸 인물이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텍사스 주에서 여생을 보내며 조용히 살았고, 텍사스 주의 정계 원로 중 하나로서 린든 B. 존슨 같은 텍사스 정계 신인들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은퇴 이후 무려 27년간 더 살다 99세 생일 보름 전에 사망하여 미국 역대 부통령 중 가장 오래 살았다. 뿐만 아니라, 2023년 9월 15일까지는 역대 미국 대통령, 부통령 모두 통틀어서 가장 장수한 인물이었지만, 9월 16일에 39대 대통령인 지미 카터가 이 기록을 깨게 되었다.
4. 선거 이력
5. 여담
개인적으로는 꽤 특이한 사람이었다. 굉장한 구두쇠였고 거친 말을 난사하며 사람의 배짱을 시험하길 즐겼고 친구를 만드는 데도 능숙했지만 진정한 친구는 그의 제자 샘 레이번을 비롯한 소수에 불과했다. 오랜 하원의원 경력에 걸맞지 않게 눈치도 없었던 듯 하다.[6]그는 뉴딜 정책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정책 간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만고불변의 제퍼슨주의자(반연방주의자)였는데, 대공황 3년째 되는 해 이렇게 말했다.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오늘날 우리에게는 법률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정부가 오직 시민의 생명과 사유 재산권을 보호하는 두 가지 기능만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부가 그보다 더 많은 기능을 가질 때 정부는 국민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 후 1937년 4월, 그는 내각 회의에서 도시 거주자들을 설득하여 한꺼번에 시골로 이주시킬 수만 있다면 국가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 <만약에 2 일반 역사편> (빅터 데이비스 핸슨 외 지음, 이종인 옮김, 세종연구원, 2004년) p 330에서 발췌.
- <만약에 2 일반 역사편> (빅터 데이비스 핸슨 외 지음, 이종인 옮김, 세종연구원, 2004년) p 330에서 발췌.
그러나 정작 이런 말을 남기면서도 임기 초 적극적으로 뉴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도와 제임스 팔리 체신장관은 그를 "뉴딜 정책의 통과에 있어 1등공신"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후 루즈벨트가 재선한 후 2기임기부터는 루즈벨트와 사이가 틀어져 뉴딜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보였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위스키를 마시는 것은 가너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루에 위스키를 1리터씩 마셔댔다는 말도 전해지고, 그의 정적이었던 AFL-CIO 위원장 존 L. 루이스도 그를 "노조를 공격하고 위스키를 마시며 포커를 치는 나쁜 노인네"라고 불렀을 지경이니 그의 술 사랑은 알만 하다. 부통령 시절 바도 세웠으나 헨리 A. 월리스가 철폐했다.
그가 집권할 기회는 딱 한 번 확실하게 있었다. 1932년 부통령 당선 직후 취임 직전에 루스벨트 암살 미수[7]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6. 매체에서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정계 거물이지만 매체에서의 취급은 루즈벨트의 그림자에 가려 그야말로 처참하다. 대부분의 매체에서 그의 집권은 미국이 실제 루즈벨트 통치하의 영광에서 벗어나 막장 루트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진다.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Joe Steele[8]에서는 강철의 대통령 가카와 함께 6번이나 부통령을 해먹는다. 1953년 강철의 대통령 가카가 사망하자 곧바로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후 권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경쟁자인 존 에드거 후버를 제거하려고 하나 오히려 후버에게 역관광당한다음 후버한테 대통령직을 빼앗겨버린다. 이후엔 당연하게도 가너 본인은 당연히 후버에 의해서 숙청 당하게 된다.
만약에(대체역사)에서는 주세페 장가라에게 루즈벨트가 암살당해 대통령이 되고 대체역사 작가들의 유구한 가너 까기가 시작된다. 대체역사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가 이 가정을 토대로 집필되었다.
루스벨트의 암살 및 가너의 집권을 가정하여 최종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승리한 평행우주를 상상한 작품이 바로 필립 K. 딕의 대체역사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와 겁스 무한세계의 라이히-5 평행계이다.이작품들이 너무 흥하는 바람에 졸지에 가너는 다른 대체역사물에서도 뉴딜을 흐지부지시키고 미국을 말아먹는 1등공신으로 취급받는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늦게 일어난 대공황으로 허버트 후버는 암살당하고 찰스 커티스는 과로로 급사하는 덕분에 당시 대통령 유고시 승계 2순위인 미국 하원의장인 가너가 대통령이 된다. 근데 가너는 민주당원이고 하필이면 후버 암살범이 텍사스 출신이라 가너가 대통령들의 암살을 주도했다[9]는 음모론이 돈다. 가너는 내심 미국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민주당이라서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미움받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미 인기가 바닥인 가너 대신에 떠오르는 신예인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밀고 개노답 KKK단과 윌리엄 더들리 펠리 같은 인간들만 그를 지지하는 바람에[10]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퇴직하고 그뒤는 알프 랜던이 차지한다.
Hearts of Iron II에서는 법인의 유력가라는 특성을 달고 나온다. 이걸 들고 나오는 다른 인물로는 말레이시아의 툰쿠 압둘 라만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루즈벨트 암살 이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다. 현실보다 극대화된 미국의 좌, 우익 극단주의 세력둘 협상시키려다가 개판을 벌어지는데 이걸 막겠답시고 한쪽 편을 들면 다른 한쪽이 문제를 더 크게 벌이고, 그렇다고 둘 중재시키려고 군대를 보내면 정작 둘이서 군대를 공격하거나 군대가 발포해버리고 그걸 피하겠답시고 최대한 온건하고 유화적인 식으로 대응하려 하면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무능력한 대통령이라면서 좌익,우익 양쪽 세력이 등을 돌리는 식의 막장 상황이 벌어져서 어떻게 되든 내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답이 없다.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중 하나로 등장.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보수파와 자본가들의 지지를 받기에 루스벨트의 뉴딜[11]을 지지하지 않고 루스벨트를 몰아내고 자신이 대권에 도전하려 한다. 그러나 그는 당내 정쟁에서 별 호응이 없자 대선 직전에 FDR의 소아마비 장애까지 공론화시켜서 루즈벨트를 대선에서 패배시키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미국 정계에서 매장된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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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 <colbgcolor=#fff,#1f2024> 존 낸스 가너 → 헨리 A. 월리스 → 해리 S. 트루먼 | |
국무장관 | 코델 헐→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주니어 | |
재무장관 | 윌리엄 H. 우딘 → 헨리 모겐소 주니어 | |
전쟁장관 | 조지 던 → 해리 하인스 우드링 → 헨리 L. 스팀슨 | |
법무장관 | 호머 스틸 커밍스 → 프랭크 머피 → 로버트 H. 잭슨 → 프랜시스 비들 | |
체신장관 | 제임스 팔리 → 프랭크 C. 워커 | |
해군장관 | 클로드 A. 스완슨 → 찰스 에디슨 → 프랭크 녹스 → 제임스 포레스탈 | |
내무장관 | 해럴드 L. 이커스 | |
농무장관 | 헨리 A. 월리스 → 클로드 R. 위커드 | |
상무장관 | 다니엘 C. 로퍼 → 해리 홉킨스 → 제시 H. 존스 → 헨리 A. 월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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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파를 일컫는 말[2] 가너는 완전한 자유무역주의자와 거리가 있었다.[3] 대법원에서 뉴딜 정책에 부정적인 판결을 여럿 내리자 루즈벨트는 대법원 정원을 늘려서 진보 성향 판사를 다수로 만들려고했고 가너는 이에 반대했다.[4] 당연히 정말로 재출마 의지가 없었다면 저렇게 긴 메세지를 보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건국이래 계속된 3선 금지의 관례를 자기 입으로 깨는 것이 부담되어 추대받는 형태를 취한 것. 물론 메세지를 전해들은 전당대회의 민주당원들은 "우리는 루즈벨트를 원한다!"고 외쳐댔다. 당시 메세지를 대독한 사람은 당시 켄터키 주 상원의원이자 훗날 트루먼의 부통령이 되는 앨번 W. 바클리였다.[5] 이후 미국 부통령은 취임일이 1월 20일이 되었는데, 가너의 임기 만료부터가 연초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한 수정헌법 20조를 따른 것이다(부통령 항목 참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경우 수정헌법 통과 이전에 당선되어 적용받지 않았는데, 가너가 일부러 이를 근거로 사임한 것. 1945년 루스벨트 사후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을 승계하면서 그 임기를 1월 20일에 마무리하였고, 이후 미국 대통령의 공식 취임일도 3월 4일이 아닌 한 달 보름 앞당겨진 1월 20일이 되었다.[6] 1939년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이 미국을 방문한 조지 6세 부부를 위해 백악관 이스트 룸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가 끝나자 이스트 룸에 모인 손님들 중 유일하게 박수를 치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센스가 없는 거다. 사실 더 큰 이유는 가너가 인종차별주의 성향이 강해서 흑인 성악가인 마리안 앤더슨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행적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는 사회적 분위기도 그렇지만 정치 하던 초창기의 시절부터 인종차별 성향을 내세웠다고 알려져 있다.[7] 시카고 갱단이 이탈리아계 살인청부업자 주세페 장가라를 고용하여 시킨 일이다. 그 이유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일부에서는 그들의 목표가 루스벨트가 아닌 당시 시카고 시장인 앤턴 서맥(Anton Cermak)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서맥은 루스벨트와 같은 자동차에 타고 있다가 장가라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 때문에 주세페 장가라가 나치에서 보낸 스파이라는 음모론도 있다.[8] 스탈린의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와서 스탈린을 낳아 스탈린이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내용. 제목은 스탈린의 작중 이름이다.[9] 커티스는 가너가 독을 먹였다는 음모론이 돈다.[10] 이 미친놈들은 커티스가 인디언인게 맘에 안들었는데 그를 죽여서 미국의 순수성을 지킨 가너를 예찬한다. 물론 가너는 커티스를 죽이지 안았기에 미칠노릇.[11] 실제로 가너는 초기 뉴딜 통과에 기여했지만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뉴딜에 부정적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