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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포레스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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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A7299> 미합중국 제48대 해군장관
<colcolor=#fff> 미합중국 초대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
James Forrestal
파일:제임스 빈센트 포레스탈.jpg
본명 제임스 빈센트 포레스탈
James Vincent Forrestal
출생 1892년 2월 15일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비컨
사망 1949년 5월 22일 (향년 57세)
메릴랜드주 베데스다
묘소 알링턴 국립묘지
재임기간 제48대 해군장관
1944년 5월 19일 ~ 1947년 9월 17일
초대 국방장관
1947년 9월 17일 ~ 1949년 3월 28일
서명
파일:제임스 포레스탈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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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A7299><colcolor=#fff> 배우자 조세핀 오그덴 스토발
자녀 2명
학력 다트머스 칼리지
프린스턴 대학교
복무 미합중국 해군
1917년 ~ 1918년
최종 계급 중위 (미합중국 해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

1. 개요2. 생애3. 여담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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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맨해튼에서 아일랜드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이후 다트머스 칼리지,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부터 월스트리트의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1차대전 당시 군에 입대해 해군 항공대 조종사가 되었다. 전후 다시 금융업으로 돌아와 1920~1930년동안 활동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대통령의 지지자였고 루스벨트에 의해 기용되었다.

해군 조종 중위 출신으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포레스탈은, 1944년 해군장관프랭크 녹스(Frank Knox)가 심장마비로 타계하자 후임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임명 이전인 1942년에는 남서태평양 전선에 있었고, 1944년 콰잘린 전투(Battle of Kwajalein) 때는 물론 장관이 된 후인 1945년 이오지마 전투에도 전장에 있으면서 역사적인 해전을 직접 지켜보았다. 그리고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후 유나이티드 스테이츠급 초대형 항공모함을 바탕으로 하는 함대의 건설에 정열을 쏟았다.[1]

포레스탈의 정치적 관심은 가장 치열한 교전상대인 일본이 아니라, 당시에는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소련이었고, 따라서 후일 소련의 위협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퍼질 것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일본을 무력으로 항복시키기보다는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쪽으로 연착륙시키고 소련의 대일참전 저지를 주장했으나 당시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매우 강했기에 묵살되었다.[2] 포레스탈의 소련에 대한 시각은 후일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으로 중앙정계에 입문한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에게 큰 영향을 준 한편, 소련의 대외 팽창을 대양까지 뻗어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하는 봉쇄 전략의 수립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포레스탈의 해군부 장관 재임도중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고, 전쟁을 마친 미군은 급속도의 구조개혁에 직면했는데, 여전히 써먹을 수 있는 장비들이 해체되어 고철로 매각되거나 그냥 버려지는 일이 횡행하였다. 특히 태평양 전선에서 쓰이던 많은 군수물자들은 회수되지도 않은채 현장에 버려지고 있었다. 이 버려진 물자들의 대부분은 나중에 6.25 전쟁이 터지고 나서 급격한 군축의 여파로 한반도로 보낼 군사물자가 부족해진 미군이 부랴부랴 회수해서 써먹는다.

포레스탈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항의했으나 주장은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결국 미군의 구조조정은 그냥 무기수의 감축뿐만 아니라 즉시반응 태세도 대폭 줄이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핵무기라는 혁신적인 무기가 등장하자 트루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무기의 패러다임이 공군 위주로 바뀔 것이라고 믿었고 해군 무용론과 함께 해군의 예산을 대부분 삭감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포레스탈을 비롯한 해군성 장관들은 제독들의 반란을 일으키고 트루먼 행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과정에서 포레스탈의 우울증은 깊어졌다.

포레스탈의 선견지명은 곧 드러났다. 체코슬로바키아중국이 슬슬 공산화됐고,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가 노골화되는 한편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이 건국되자마자 주변 아랍 국가들과 중동전쟁을 벌이는 상황이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감소해버린 것은 큰 패착이었다. 이러한 소련의 영향력 증대는 훗날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도 동의하고 있었다.

1947년 9월 17일, 포레스탈은 육군부해군부 위에 설치되어 이를 총괄하는 국방부가 설립되자, 첫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국방부로의 통합이, 해군을 그들에 비해 정치적인 파워가 더 컸던 육군에 먹히게 만들 것이라는 해군 내 분위기를 고려해 트루먼 대통령이 초대 장관으로 해군장관 출신인 그를 기용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각군의 통합 지휘 필요성으로 신설된, 제복 군인들 중 최선임 직책이자 현 합동참모의장 격인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에 해군 원수인 윌리엄 리히 제독을 앉힌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취임 후에도 통합을 반대하는 포레스탈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러면서도 그 해의 국가안전보장법을 제정하는 등 오늘날의 미군의 기초를 닦았다. 포레스탈은 1948년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뉴욕 주지사 출신인 토머스 E. 듀이(Thomas E. Dewey)가 당선될 것으로 보고, 듀이에 협력하고 차기 국방부 장관의 지위를 보장받기로 상호합의했다. 그런데 비밀리에 있었던 이 합의가 선거 몇 주 전에 피어슨(Pearson)에 의해 공개되면서, 트루먼은 격분했다. 그렇지 않아도 포레스탈은 건강 문제로 언론의 구설수에 오르고 있었는데다 트루먼 행정부가 주도하는 군의 구조조정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있었기 때에, 재선에 성공한 트루먼은 2기 행정부를 시작하자마자 이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포레스탈에게 사임을 권고했다.[3] 그리고 1949년 3월 31일, 루이스 존슨이 포레스탈의 자리를 이어받았고 포레스탈은 치료를 위해 입원한다.

해임된후 포레스탈은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윌리엄 메닝거(William C. Menninger)의 진단으로는 포레스탈은 과로와 더불어, 후임자로 임명된 육군 대위 출신의 루이스 존슨 장관의 친공군적 행보들로 인한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부인 조세핀과 포레스탈의 친구 퍼디낸드 에버스타트(Ferdinand Eberstadt)는 그 진단결과를 무시하고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소재 해군병원으로 포레스탈을 보내고 말았다. 포레스탈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에 나오는 시로 유서를 대신하고 1949년 5월 22일, 베데스다 해군 병원 16층에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57세.
Fair Salamis, the billows' roar,
Wander around thee yet,
And sailors gaze upon thy shore
Firm in the Ocean set.
Thy son is in a foreign clime
Where Ida feeds her countless flocks,
Far from thy dear, remembered rocks,
Worn by the waste of time–
Comfortless, nameless, hopeless save
In the dark prospect of the yawning grave....
Woe to the mother in her close of day,
Woe to her desolate heart and temples gray,
When she shall hear
Her loved one's story whispered in her ear!
"Woe, woe!" will be the cry–
No quiet murmur like the tremulous wail
Of the lone bird, the querulous nightingale–
살라미스여, 거센 파도가
여전히 너를 둘러싸고,
뱃사람들은 바다에 굳건히 서 있는
네 해안을 바라본다.
너의 아들은 무수한 양떼를 기르는
이다 산의 이국 땅에 있으며,
소중히 기억되는 너의 바위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세월의 소모로 닳아지고 있다.
위안도, 이름도, 희망도 없이
그저 암울한 무덤의 전망 속에서 살아간다....
늙어가는 날의 어머니에게 화가 있으리라,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를 귓가에 들을 때,
그녀의 쓸쓸한 마음과 회색 머리카락에 화가 있으리라.
"화, 화로다!" 그 소리 들리리니–
외로운 새, 불평 많은 나이팅게일의
떨리는 탄식 같은 조용한 신음이 아니리라.

3. 여담

  •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 전쟁 전 갈등을 겪었다. 당시 소장 계급으로 해군의 인사 총괄 부서인 항해국의 국장을 지내던 니미츠 제독에게, 포레스털이 전과가 있는 지인이 해군 장교를 지원하자 이를 합격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니미츠에게 "해군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전과자를 장교로 임관시킬 수 없도록 법에 정해져 있습니다"라며 거절당해, 약간의 앙금이 생겼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전후 니미츠 제독이 해군참모총장 자리를 희망했을 때 한 차례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감정을 공무에 반영한 적은 해참 임명 반대 표명 말고는 없었으며, 재임 중 니미츠 제독의 행동에 아무 제약도 걸지 않고 해군장관으로써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주었고, 니미츠 제독에 대한 악담이나 홀대 등도 그리 하지 않는 등 선을 지켰다.
  • 해군 내의 인종통합 추진 및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이용한 전략적 우위확보의 양대 업적을 이룩한 포레스탈의 선견지명은 6.25 전쟁에서 잘 드러났으며 오늘날의 미 해군의 전략적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포레스탈의 이름은 세계최초의 슈퍼 항공모함인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의 1번함은 물론, 미 해군사관학교의 소위들을 위한 강연 프로그램인 포레스탈 강좌 시리즈(Forrestal Lecture Series) 및 뉴저지 주 플레인스버러 소재 프린스턴 대학교의 제임스 포레스탈 캠퍼스 등에도 남아있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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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거대함인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는 핵 폭격기들을 운용하며 적국 소련에 대한 핵타격 임무를 맡을 계획이었다.[2] 독일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있었으며, 실제 독일은 대전 후반기 서방과 강화 후 소련과는 계속 싸워 패망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3] 포레스탈은 자신이 신경쇠약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이 트루먼에게 6월 1일자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그가 6월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3월 1일에 전화를 걸어 사직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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