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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제52대 뉴욕 주지사 마리오 매튜 쿠오모 Mario Matthew Cuomo | |
출생 | 1932년 6월 15일 |
뉴욕주 뉴욕시 퀸스 브라이어우드 | |
사망 | 2015년 1월 1일 (향년 82세) |
뉴욕주 뉴욕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재임 기간 | 뉴욕 부지사 |
1979년 1월 1일 ~ 1982년 12월 31일 | |
제52대 뉴욕 주지사 | |
1983년 1월 1일 ~ 1994년 12월 31일 | |
학력 | 세인트 존스 대학교 (B.A./L.L.B.) |
정당 | |
배우자 | 마틸다 라파 (1954년 결혼) |
자녀 | 마가렛 I. 쿠오모(1955년생) 앤드루 M. 쿠오모(1957년생) 마리아 쿠오모(1960년생) 마델린 쿠오모(1964년생) 크리스 쿠오모(1970년생) |
종교 | 가톨릭 |
서명 |
뉴욕 주지사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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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3선 뉴욕 주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전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와 CNN 앵커 크리스 쿠오모의 아버지다. 성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1980년대에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32년 6월 15일, 뉴욕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릴 때는 야구를 좋아했고, 프로선수 제의까지 받을 정도로 야구를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머리 뒤쪽에 맞고 6일간 입원하며 야구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법학을 공부해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1960년대 후반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뉴욕시 내에서 인지도를 쌓았다. 고객 중에 프레드 트럼프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유명해진건 존 린지 뉴욕시장의 공공주택 건설 정책에 반대하는 주민들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린지 시장이 흑인들을 위한 공공 임대 아파트를 유대계와 이탈리아계 주민들이 거주하는 코로나 지역에 건설하겠다고 하자, 이탈리아계 주민들은 쿠오모를 변호사로 선임해 린지와 맞서 싸웠다.[1] 이후 포레스트힐스 공공주택 건설 분쟁 때도 쿠오모는 린지와 이탈리아계/유대계 주민들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 존 린지의 정치적 적수로 떠올랐다.
이런 사건으로 인기를 얻은 쿠오모는 1974년 뉴욕주 부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경선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 당선된 휴 캐리에 의해 뉴욕주 국무장관으로 선임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에드 카치와 마리오 쿠오모
1977년,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현직 시장 에이브러햄 빔의 인기가 하락했기에 쿠오모는 유력 주자로 여겨졌다. 본선에서 맞붙은 상대는 에드 카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시 존 린지 시장의 공공주택 건설 정책에 반대하며 유명세를 얻은 인물이었다. 카치와 쿠오모의 정책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각각 유대계와 이탈리아계 주민의 지지를 받았기에 선거전은 치열했다. 경선에서는 카치가 이겼지만, 쿠오모가 경선을 불복하고 뉴욕자유당 소속 후보로 출마하며 다시 선거는 백중세로 흘러갔다. 선거 결과 카치가 49%로 40%의 쿠오모를 꺾었다. 이 과정에서 쿠오모는 에드 카치의 동성애 의혹에 대해 "Vote Cuomo, not homo"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호모포비아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2. 뉴욕주지사 시절
뉴욕시장에서 낙선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1978년 인기없는 뉴욕부지사를 대체하고 재수 끝에 뉴욕주 부지사로 선출되는데 성공했다. 1982년 휴 캐리 주지사가 3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쿠오모는 즉각적으로 뉴욕주지사 후보군으로 올라섰고, 또다시 에드 카치와 경쟁했다. 카치는 뉴욕시에 대한 애정이 너무 많아서 업스테이트 뉴욕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것이 쿠오모에게 호재로 작용해 쿠오모가 이번에는 근소한 표차로 카치를 꺾고 뉴욕주지사 후보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본선에서 쿠오모는 공화당 후보인 루이스 리먼을 51% 대 47%로 꺾고 뉴욕주지사로 당선되었다.열흘 전, 레이건 대통령은 이 나라의 어떤 사람들은 요즘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불행하고 심지어 자신과 가족, 미래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걱정한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은 그 두려움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걸까요. 레이건 대통령은 "이 나라는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님의 말씀은 맞습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고 할만 합니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이 빛나는 도시의 화려함과 영광을 공유하고 있는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빛나는 도시는 아마도 백악관 베란다에서 보이는, 모두가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도시가 있습니다. 빛나는 도시에는 이면이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주택담보대출을 갚을 수 없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더욱이 그러합니다. 학생들은 필요한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고 중산층 부모들은 자녀의 꿈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합니다. 도시의 "이 지역"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많고, 곤경에 처한 가족이 많으며, 도움이 필요하지만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나쁜건 그 도시에는 지하실이 있고, 그곳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도시의 거리, 배수구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대통령님, 당신의 빛나는 도시에서 당신이 보지 못하는 얼굴들, 방문하지 않는 장소에는 절망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오늘날 처한 상태입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가 단순한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기보다는 "두 도시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쿠오모의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2] 전문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이 빛나는 도시의 화려함과 영광을 공유하고 있는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빛나는 도시는 아마도 백악관 베란다에서 보이는, 모두가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도시가 있습니다. 빛나는 도시에는 이면이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주택담보대출을 갚을 수 없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더욱이 그러합니다. 학생들은 필요한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고 중산층 부모들은 자녀의 꿈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만 보아야합니다. 도시의 "이 지역"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가난한 사람이 많고, 곤경에 처한 가족이 많으며, 도움이 필요하지만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 나쁜건 그 도시에는 지하실이 있고, 그곳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노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도시의 거리, 배수구에서 잠을 자는 노숙자들도 있다는 점입니다.
대통령님, 당신의 빛나는 도시에서 당신이 보지 못하는 얼굴들, 방문하지 않는 장소에는 절망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미국이 오늘날 처한 상태입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가 단순한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기보다는 "두 도시 이야기"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쿠오모의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2] 전문
뉴욕주지사 시절 실용적인 진보좌파적 정책을 펼쳐 뉴욕주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1986년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하며 자신의 인기를 입증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했고 레이건의 예산 삭감에 저항해 뉴욕주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그는 사형제도에 반대했으며, 가톨릭 신념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낙태에 반대했지만 주정부가 이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보고 낙태에 마지못해 찬성하는 입장을 보이는 등, 사회적으로도 진보적인 식견을 드러냈다. 또 쿠오모의 에이즈 방지 정책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는다.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인 "두 도시 이야기"는 지금도 명연설로 회자된다.[3]
마피아에 대해서도 강경했고, 악명을 떨치던 이탈리아계 마피아를 탄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탈리아인인 자신 뿐이라는 뚝심으로 마피아를 강하게 수사했다. 1992년에는 이탈리아를 방문하던 중 시칠리아 마피아에 의해 암살 시도까지 당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마피아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에게 나쁜 인식을 심어준다고 생각해 "마피아"라는 말을 언론이 쓰거나 미디어화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영화 대부도 무척 싫어해서 보지 않았는데, 죽기 2년 전인 2013년 결국 영화를 보고 걸작이라는 말을 남겼다.뉴욕타임즈 기사
때문에 1984년에는 부통령 후보로 고려되고, 1988년과 1992년 모두 대선 프론트러너였는데, 정작 자신은 출마를 거절했다.[4] 그 이유에 대해서 여러 추측이 있는데 1988년과 1992년은 여론조사상 부시가 너무 압도적이라 자신이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1996년을 노렸다고 추측된다.[5] 1992년에는 실제 출마 시 압도적으로 경선에서 이길거라는 관측도 나왔지만, 뉴햄프셔 경선 바로 전날에 출마를 부인하며 지지자들을 미치게 만들기도 했다. 정작 92년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깜짝 승리를 거두며 자충수가 되고 만다.
4선을 노리는 마리오 쿠오모[6]
1994년 넬슨 록펠러 이후 첫 4선 주지사를 노리며 출마했지만, 놀랍게도 정치 신인 조지 퍼타키에게 패배했다. 그의 3연임에 뉴욕주민들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고, 퍼타키는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꽤 진보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사형제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높은 범죄에 신음하던 뉴욕의 정서에 알맞는 후보였다. 비슷한 시기 당선된 루디 줄리아니 뉴욕시장과 함께 퍼타키는 뉴욕주의 범죄를 때려잡는 정책을 펼쳤다.
비록 4선 주지사의 꿈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지만, 쿠오모는 깔끔하게 패배를 승복하고 슈퍼볼 때 방영된 도리토스 광고에 출연해 셀프디스를 하기까지 하며[7]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3. 퇴임 이후와 별세
말년의 쿠오모.
1993년 퇴임 1년 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연방 대법관 자리를 제의받았는데, 4선을 노리고 있던 쿠오모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때 쿠오모 대신 임명된 사람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쿠오모가 2015년 사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쿠오모가 대법관 직을 수락했다면 미국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퇴임 후에는 변호사 일을 계속하고 아들 앤드루 쿠오모의 주지사 출마를 도왔다.
새해 첫날인 2015년 1월 1일 숨을 거뒀다. 그때는 아들 앤드루 쿠오모의 뉴욕 주지사 임기중이었다. 1월 5일, 경야(經夜, Wake)의식이 열렸고, 1월 6일 장례식이 열렸다. 유튜브에 장례식 영상이 올라와 있다.#,#,#
이후 유해는 퀸스 미들빌리지의 세인트 존 묘지에 묻혔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7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587,913 (40.97%) | 낙선 (2위) | [8] | |
1978 | 미국 부지사 선거 | 뉴욕 | | 2,429,272 (50.95%) | 당선 (1위) | 초선 |
1982 | 미국 주지사 선거 | 2,675,213 (50.91%) | 초선 | |||
1986 | 미국 주지사 선거 | 2,775,045 (64.63%) | 재선 | |||
1990 | 미국 주지사 선거 | 2,157,087 (53.17%) | 3선 | |||
1994 | 미국 주지사 선거 | 2,364,904 (45.45%) | 낙선 (2위) |
4. 여담
- 자신의 이탈리아계 혈통에 자부심이 남달랐다. 선거 유세 중에 미국 국기와 함께 이탈리아 국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 뉴욕시장 에드 카치와 라이벌 관계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카치와 쿠오모는 각각 유대인과 이탈리아인 이민자 2세대로, 뉴욕시 인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대계/이탈리아계를 대표했다. 둘은 성격도 정 반대였는데 카치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호전적인 스타일로 유명했다면 쿠오모는 보다 진중한 스타일이었다. 1977년 시장선거 때, 쿠오모가 카치의 성적 지향성을 공격한 것 때문에 카치는 쿠오모를 매우 혐오했으며 죽을때까지 쿠오모를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명은 공통점도 많았는데, 존 린지와 맞서 싸우면서 유명세를 얻었고[9], 각자의 직위인 뉴욕시장과 뉴욕주지사에서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결국 좌절되었고, 4선에도 도전했지만 실패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 마리오 쿠오모의 이름을 딴 다리가 뉴욕에 있다. 하지만 이 다리는 예전에 공화당 소속 부지사이자 넬슨 록펠러의 최측근이었던 맬컴 윌슨의 이름을 딴 다리였기에 공화당 일각에서는 당파적인 리네이밍이라고 항의했고, 다리 이름을 바꾼 주지사가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앤드루 쿠오모였기에 더 논란이 되었다.[10]
[1] 당시 유대계가 자신들의 대변자로 내세운 에드 카치도 마이로 쿠오모와 함께 린지에 맞서 싸우면서 명성을 쌓았고, 이후 12년간 뉴욕시장을 역임하게 된다.[2] 한 기관이 선정한 "20세기 미국 최고의 연설"에서 11위에 랭크되었다. 특정 정당의 기조연설로 치면 버바라 조던의 1976년 민주당 기조연설 다음으로 높은 순위이다. 여담으로 1984년 전당대회의 또다른 연설자였던 제시 잭슨의 "무지개 연합" 연설이 바로 아래인 12위에 랭크되어있다.[3] 레이건의 도시 정책 때문에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4] 대통령 출마를 계속 거절한 점을 들어 "허드슨 강의 햄릿"이라는 별명이 붙었다.[5]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통념과 달리 1988년 대선에서 부시는 꾸준한 여론조사상 우세를 기록했다.[6] 쿠오모 뒤에 있는 사람은 루디 줄리아니 맞다. 줄리아니는 1994년 주지사 선거 때 의외로 자당 후보인 조지 퍼타키가 아니라 마리오 쿠오모를 지지했다.#[7] 94년 중간선거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낙선한 앤 리처즈 텍사스 주지사와 함께 출연했다. 광고 내용은 쿠오모와 리처즈가 낙선을 술회하며 "비록 낙선은 슬프지만 이런식으로 변화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다"라고 하고 도리토스의 신상품을 홍보하는 것이다.#[8] 민주당 당적,뉴욕 자유당 공천[9] 둘이 맞붙은 1977년 뉴욕시장 선거와 1982년 주지사 선거 때는 서로가 서로를 존 린지의 수하이자 졸개라고 비난했다. 쿠오모는 카치가 존 린지 같은 정체성 모호한 몽상가라고 욕했고, 카치는 쿠오모를 린지와 타협한 부동산 중개꾼이라고 욕했다.[10] 공교롭게도, 그의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에드 카치도 동성애 혐오 논란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딴 다리에서 카치의 흔적을 지워버려야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