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3 01:10:35

존 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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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대회 대의원 확보만을 위해 홈스테이트에만 출마한 "Favorite Son"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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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3대 뉴욕주 뉴욕시장
존 블릿 린지
John Vliet Lindsay
파일:mayor-john-lindsay-11-1.jpg
<colbgcolor=#003585><colcolor=#ffffff> 출생 1921년 11월 24일
미국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사망 2000년 12월 19일 (향년 79세)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힐튼 헤드 아일랜드
재임기간 제103대 뉴욕시장
1966년 1월 1일 ~ 1973년 12월 31일
연방하원의원(뉴욕 17구)
1959년 1월 3일 ~ 1965년 12월 31일
학력 예일 대학교 (B.A./L.L.B.)
가족 배우자 메리 해리슨
종교 성공회
정당

(1971년 이후)


(1971년 이전)
서명
파일:존린지서명수정.jpg
군사 경력
복무 미국 해군
1943년 ~ 1946년
최종 계급 중위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1. 개요2. 생애3. 소속 정당4. 선거 이력5.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제103대 뉴욕시장을 역임했으며, 공화당 소속 답지 않게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다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에이브러햄 빔과 함께 뉴욕 역사상 최악의 시장으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로, 사실상 1970년대 무법천지인 뉴욕의 이미지는 이 사람이 반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능한 시정을 펼쳤다.

2. 생애

17세기 뉴암스테르담에 정착한 네덜란드 이민자의 후손으로, 중산층의 자녀로 유복하게 자랐고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무공 훈장도 딴 바 있다.

법조인으로 지내다가 1955년 법무부에서 잠깐 일하고 1956년 하원의원 선거의 뉴욕주 제17구[1]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원의원 시절 진보적 표결 기록을 보였으며, 내리 4선에 성공했다. 하원의원으로서 1964년 대선 때 골드워터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는 네버 골드워터(Never Goldwater) 운동을 이끌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얻었고 당내 진보파의 기수로 떠올랐다.

이후 상원의원이나 뉴욕 주지사로 출마하려고 했지만 196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뉴욕에 로버트 F. 케네디가 나와 승산이 없었고 넬슨 록펠러 주지사나 제이컵 재비츠 상원의원이 은퇴 의사가 전혀 없어서 방향을 틀어 뉴욕 시장에 출마했다.[2] 1965년 뉴욕시장 선거는 3파전이었는데 공화당 진보파의 존 린지, 민주당의 에이브 빔, 보수당윌리엄 F. 버클리였다. 유명 보수 언론 "내셔널 리뷰"의 사주였던 윌리엄 버클리는 록펠러 공화당원의 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출마했다. 같은 날 치러진 뉴욕주 감사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이겼지만, 린지는 민주당의 진보표를 빼와 45%로 당선되었다. 특히 할렘 지역 유세로 흑인 표를 40%나 얻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시장으로 재직하며 여러 좌충우돌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뉴욕시를 파탄 상태로 몰고갔다. 당시 뉴욕 시의회나 다른 시 단위 선출직 공무원들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고 린지는 공화당 내 비주류이기까지 했기에 제대로 시정을 할 수 없어서 자신의 정책 자문을 시 공무원이 아닌 외부 업체에 맡겼다. 그러다보니 탁상공론, 이상론에 치우친 정책이 다수 나왔다. 1966년 1월 취임날에 맞추어 대중교통 운전수들이 대거 파업을 일으키며 린지는 곤경에 처했는데, 외부 업체의 조언대로 공공 운송 노조의 제안을 거의 다 맞춘 합의안을 통과시켜서 뉴욕시 공무원들의 원성을 샀다.

또 1967년부터 이어진 인종, 학생 폭동에 부적절하게 대처했다. 유화론을 넘어 시위대를 지지하고 격려했는데, 신이 난 대학생 시위대는 아예 센트럴파크에 죽을 치고 시위를 벌였고 이는 대다수 뉴욕시민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사건 당시 할렘에서 흑인들을 달래는 연설을 해 인종폭동을 극적으로 막아내며 그의 능력이 재평가되기도 했고, 동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의 러닝메이트로 고려되기도 했다. 닉슨은 록펠러 공화당원들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록펠러 공화당원을 부통령 후보로 정하려 했는데, 제럴드 포드가 린지 시장을 추천했다. 그러나 스트롬 서먼드 등 당내 남부파가 반발해 볼티모어 폭동을 강경하게 처리한 스피로 애그뉴가 대신 부통령 후보로 꼽혔다.

1968년 혁명 때 린지는 학생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며 전국 보수파의 어그로를 엄청나게 끌었으며, 각종 파업에 미숙하게 대처하며 뉴욕시의 삶의 질을 떨어트렸다. 노조의 요구를 거의 다 맞추면서 여러 복지 정책을 추진하다보니 막대한 예산 적자가 생겼고 이는 1975년 뉴욕시 구제금융 요청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9년 시장 선거를 앞두고는 공화당으로부터 공천도 못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뉴욕 자유당(New York Liberal Party)라는 지역 정당이 린지 지지를 결정하면서 린지는 자유당 소속으로 1969년 뉴욕 시장 재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에서는 뜻밖에도 5선 재출마를 선언한 와그너 전 시장을 재치고 보수파 마리오 프로카치노(Mario Procaccino)가 후보로 선출되었다. 공화당도 보수파 존 마키(John Marchi)를 후보로 내보냈는데, 이 때문에 반(反) 린지 표가 분열되고 맨해튼에서 70%에 달하는 린지 몰표가 쏟아지며 린지는 여유롭게 재선에 성공하게 된다.

재임 2기 임기는 더욱 막장으로, 린지는 할렘가와 컬럼비아 대학교 캠퍼스 교정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비난받았으며 "도시의 망명자"(an exile in his own city)라는 악평도 얻었다. 재임 2기 도중 퀸스에 공공 임대주택을 지으려는 계획이 특히 비판에 직면했다. 린지는 공공 임대주택을 지어야 서민층이 노숙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대대적인 주택 건설 프로젝트를 계획했는데, 이것이 이탈리아계와 유대계가 많이 사는 중산층 거주지에 지어지게 되면서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인 이들이 반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후일 각각 뉴욕주지사와 뉴욕시장이 되는 마리오 쿠오모에드 카치가 "상식적인 진보파"를 자처하며 이탈리아계, 유대계 주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인기를 끌고, 린지가 정치적으로 패배하게 된다.

또 1970년 5월 월스트리트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펼치던 대학생들이 세계무역센터 건설에 투입된 AFL-CIO 소속 노동자들과 충돌하는 "하드 햇 폭동"(Hard Hat riot) 사건이 터졌다. 처음에는 200명 정도의 노동자들만이 시위에 나섰지만 이내 수 만명 규모에 달하는 시민들이 반전좌파의 시위에 반대하는 농성을 벌였고, 뉴욕시민 절대 다수가 이 시위를 지지하였다.[3] 이들은 뉴욕시청까지 행진해 존 린지가 베트남 전쟁 반대의 의미로 게양한 조기를 다시 올려버렸다. 이 시점에서 존 린지는 자기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격분한 뉴욕시민들을 피해 시청에서 한동한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4]

분위기를 뒤집는다고 1972년 대선에 출마하지만 결과는 폭망. 프라이머리 참패 후 조지 맥거번을 지지했으며, 시장 3선 불출마도 선언한다. 1973년 뉴욕시장 선거의 당선자는 1965년 선거에서 자신이 낙선시켰던 에이브 빔이었다. 에이브 빔은 존 린지의 예산 폭탄을 수습하지 못하고 뉴욕시 재정을 파탄내고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장본인이 된다. 린지와 빔은 각각 역사학자들이 꼽은 미국 역대 최악의 시장 15위, 17위에 나란히 선정되었다.

뉴욕시장 은퇴 이후에는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로펌을 열었다. 1980년 뉴욕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출마하려고 했지만 민주당 경선에서 3위로 탈락했다. 말년의 삶은 비참했는데, 자신이 일하고 있던 로펌이 파산하며 의료보험을 얻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전재산을 치료 비용에 써야했다. 경악한 루디 줄리아니 시장이 그가 돈을 받을 수 있도록 명예 직책을 2개 줘서 그나마 죽기 전에는 궁핍하지는 않게 지냈다고 한다. 1999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부인과 함께 요양하던 도중 사망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 1971 입당


1971 ~ 2000 입당
정계 은퇴
사망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뉴욕주 제17구

54,459 (53.90%) 당선 (1위) 초선
196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1,006 (60.19%) 재선
1962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98,024 (68.67%) 3선
1964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35,807 (71.54%) 4선
1965 뉴욕시장 선거 뉴욕시 1,149,106 (44.99%) 초선
1969 뉴욕시장 선거 [5] 1,012,633 (42.35%) 재선[6]

5. 여담

  • "강남좌파"라는 말의 어원이 된 인물이다. 1969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마리오 프로카치노(Mario Procaccino)가 경쟁자 린지를 비판하기 위해 "록펠러 공화당원들은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에 살고 리무진 타고 다니면서 진보 행세를 한다"라며 "리무진 리버럴"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이것이 한국으로 수입되면서 "강남좌파"라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강남좌파라는 말에는 갑론을박이 많지만, 존 린지 본인은 욕 먹을만한 일을 꽤 많이 했다. 경찰의 과도한 폭력을 줄인다면서 경찰 예산을 싹둑내고, 이슬람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에 의해 희생당한 경찰의 장례식에 불참하고[7] 유타 주의 고급 스키장에서 휴가를 즐기는 등 일반적인 뉴욕 시민들의 정서에 동떨어진 귀족적인 성격으로 악명을 떨쳤다. 본인은 이미지 개선을 한다며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고 화단에 물 주는 장면을 찍으며 자신의 귀족 이미지를 떨쳐내려 노력했지만 어설픈 서민 코스프레 한다는 욕만 먹으며 본전도 못건졌다.

[1]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 지역 관할[2] 4선 시장이자 1956년 대선에서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러닝메이트 후보군으로도 꼽혔던 로버트 와그너 주니어가 1965년 시장 선거에는 불출마한 상태였다.[3] 고층 건물에서 근무하는 사무직 직원들은 색종이를 뿌리며 반-반전좌파 시위대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4] 이는 조지 맥거번 등의 민주당 진보파가 전통적인 노동자-중산층의 지지에서 벗어나 청년, 유색인종, 여성, 반전파의 지지를 받게 되는 전조로 해석되기도 한다.[5] 공화당 당적,뉴욕 자유당 지지[6] 1971. 공화당 탈당 및 민주당 입당[7] 그 이전까지 모든 뉴욕시장은 희생당한 경찰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관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