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9 16:21:17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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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시대~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 대영제국에 충성하던 친영 왕당파 세력. 현대 미국 보수주의에는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 중도우파적 사회관(온건 사회보수주의) 한정. 고전적 자유주의/재정보수주의 요소까지 포함된 일반적인 미국의 보수주의 그 자체라기 보다는 미국의 사회보수주의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파일:파란색 깃발.svg 보수주의/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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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프랭크[1] 버클리 주니어
William Frank Buckley Jr.
파일:William F Buckley Jr.jpg
<colcolor=#fff><colbgcolor=#000> 출생 1925년 11월 24일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
사망 2008년 2월 27일 (향년 82세)
미국 코네티컷 주 스탬포드
부모 아버지 윌리엄 F. 버클리 시니어
어머니 알로이스 조세핀 안토니아
형제 제임스 L. 버클리, 퍼거스 R. 버클리
배우자 패트리샤 버클리 (결혼: 1950년, 사별: 2007년)
자녀 아들 크리스토퍼 버클리
학력 예일 대학교 (B.A.)
종교 가톨릭
사상 융합주의
소속 정당

약력 미합중국 육군 복무 (1944~1946)
예일 대학교 스페인어 강사 (1947~1951)
CIA 근무 (1951~1952)
The American Mercury 편집자 (1952~1954)
National Review 편집장 (1955~1990)
1965년 뉴욕시장 선거 후보
1. 개요2. 생애3. 성향4. 선거 이력5. 여담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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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William Buckley TIME.jpg
타임지의 만평
미국의 언론인, 보수주의 정치 철학자. 현대 미국 보수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미국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로 평가받고 있다.

"빌 버클리"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2. 생애

뉴욕시 맨해튼에서 아일랜드계 사업가 집안의 10자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부모는 중남미에서 정유사업을 했기 때문에 버클리도 멕시코에서 자랐고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먼저 배웠다. 7살 때 멕시코의 정치가 불안정해지자 영국으로 이민가 그곳에서 영어를 배웠고, 특유의 미드 아틀란틱 억양을 구사하게 된다.

부모가 지식인은 아니었지만 버클리는 어릴 때부터 지식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고급진 어휘와 다양한 클래식 악기 연주, 문예 비평 등을 배웠다. 멕시코 시티에서 잠깐 대학을 다니다가, 예일 대학교로 편입해 정치학미국사를 공부했다. 예일 대학교에서 버클리는 친구들의 논문 문법을 교정해주는 것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글쓰기 실력도 늘렸으며, 예일 대학교 교수 밑에서 웅변술과 설득의 글쓰기 기술도 배웠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4년간 스페인어 강사로 재직했다.

하지만 그는 예일 대학교가 지나치게 좌파 사상과 무신론에 빠져있다고 생각해 대학교 생활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고, 1951년 <God and Man at Yale: The Superstitions of Academic Freedom>이라는 책을 저술해 자신의 가톨릭 사상을 변호하고 예일 대학교의 무신론적 경향성을 비판해 주목을 받게 된다. 예일 대학교 학장인 맥조지 번디(McGeorge Bundy)[2]는 이 책을 "매우 괴상하고 기괴한 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버클리는 그해 예일 대학교에서 나와 CIA로 직장을 옮겼다. CIA에서 2년 남짓 근무했고 E.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3]를 직속 상사로 두어 반공주의 업무를 맡았다.

1952년 CIA에서 퇴사한 후 <The American Mercury>라는 보수주의 잡지사에 입사해 편집장으로 일했다. 여기서도 2년간 근무했지만 잡지가 반유대주의 성향을 띄게 되자 즉시 퇴사하였고, 이후 1년간 야인으로 지내며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을 옹호하는 책을 써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1955년, 아버지에게 받은 10억 달러와 매카시 지지자들에게 받은 29억 달러를 합쳐 <National Review>라는 자신만의 보수주의 시사지를 창간한다.

윌리엄 버클리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 의해 좌파적인 사상으로 발전한 미국의 자유주의의 경향성을 비판하고, 본래 자유주의가 속했던 보수적인 자유주의와 고전적 자유주의의 원칙을 옹호했다. 그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원칙이 미국 보수주의의 동력임을 주장하며 우파 자유지상주의를 주창하였다. 여기에는 기독교적인 전통과 미국 내셔널리즘, 포퓰리즘에 대한 거부, 인종 평등의 수용 등이 포함되었다.[4] 동시에 이 원칙에서 어긋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 버클리는 인종분리를 옹호한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조지 링컨 록웰미국 나치당, 194~50년대 미국 극우운동의 동력이었던 존 버치 협회(JBS)를 비판하며 미국 보수주의가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극우 포퓰리즘과 선을 그어야 진정으로 주류 사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가 온건 보수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버클리는 "상식적인 보수주의"를 표방해야 진정으로 공화당이 우경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버클리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충분히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보고 공화당 예비선거 후보자 중 가장 보수적인 사람을 전략적으로 밀어주자는 "버클리 규칙"(Buckley Rule)을 제정함과 함께 풀뿌리 보수주의 캠페인을 벌여 보수적 중산층을 조직화했다. 1964년 대선에서 버클리는 배리 골드워터 지명운동을 주도하였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넬슨 록펠러의 입후보를 좌절시키고 골드워터를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게 만들었다. 비록 골드워터는 엄청난 표차로 낙선했지만, 미국 보수운동은 처음 주목을 받았고 <내셔널 리뷰>의 발행 부수는 1957년 1만부에서 1964년 7만부로 7배나 늘어났다. 또 로널드 레이건 같은 노골적인 보수 지지자도 늘어났다.

버클리가 활동하던 뉴욕 지역은 록펠러 공화당원들의 세가 강력해 제이콥 재비츠 같은 진보 성향 공화당원들이 많았는데, 버클리는 뉴욕 보수당 창당에 도움을 주고 스스로 입당하기까지 해 록펠러 공화당원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을 벌였다.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 골드워터 지명 반대운동을 벌인 좌파 공화당원 존 린지가 출마하자, 버클리는 린지를 막겠다며 뉴욕 보수당에 입당해 출마를 선언했다. 린지와 민주당 후보 에이브러햄 빔, 버클리가 참석한 3자 토론회에서 버클리는 가장 논리정연한 주장을 펼쳤으며, 린지나 빔이 당선되면 뉴욕이 좌익 포퓰리즘으로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버클리는 3당 후보였기 때문에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미국 진보의 아성인 뉴욕시에서 13.4%나 얻는 쾌거를 거둔다.[5]

1966년 버클리는 "Firing Line"라는 프로그램의 호스트로 인지도를 높였다. 처음에는 케이블 TV로만 방영되었지만 이후 공영방송에서도 방영되었고, 버클리는 1999년까지 무려 33년간 쇼를 진행하며 미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단일 TV 프로그램을 맡은 호스트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버클리는 보수주의자였지만 무하마드 알리 같은 진보 성향 인사를 초대해 토론을 나누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차분한 스타일과 고급진 어휘 선택으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정치 활동 이외에도 여러 활동을 벌였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대상으로 한 소설을 쓰기도 하고, 문예 평론이나 영화 평론가로도 호평을 받았으며 1970년대에는 미식 칼럼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70년 뉴욕 상원의원 선거 때 형 제임스 L. 버클리가 베트남 전쟁 반대파 상원의원인 찰스 구델에 맞서 출마하자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베트남 전쟁을 옹호해 조지 맥거번, 고어 비달, 게일로드 넬슨, 노엄 촘스키, 제인 폰다 같은 반전 인사와 노골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동생의 지지에 힘입어 제임스 버클리는 2% 차이로 민주당의 리처드 오팅어 후보와 공화당 찰스 구델을 꺾고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80년대 이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버클리는 보수적인 칼럼을 쓰며 레이건을 옹호했으며 여전히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제리 팔웰, 팻 로버트슨 등 TV 목사들이 등장하면서 버클리의 영향력은 점차 감소했으며, 1990년 내셔널 리뷰의 편집장 직위에서 사임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1999년까지 TV에 출연하고, 대중연설을 하고, 내셔널 리뷰 경영에 참여하는 활동을 했지만 1주일에 2번 내셔널 리뷰에 기고하는 칼럼을 쓰는 것 이외에는 활동을 줄여나갔다.

2004년, 내셔널 리뷰의 모든 지분을 처분하면서 내셔널 리뷰에 대한 경영에도 손을 떼고 완전히 은퇴한다. 2006년에는 이라크 전쟁이 실패한 전쟁이라고 비판해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7년 아내가 죽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2008년 사망했다. 그의 형인 제임스 버클리는 2023년 100세의 나이로 사망해 미국 보수주의의 역사를 바꾼 버클리 형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성향

그는 미국 보수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한 보수주의 칼럼니스트는 "윌리엄 버클리가 없었다면 진지한 미국 보수운동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보수주의자인 동시에 우파 자유지상주의자로서 두 사상간의 보완과 연대를 지향한 융합주의자였으며, 더 많은 경제적 자유기독교에 기반한 사회적 가치가 미국 보수의 진정한 지향점이라고 생각하였다. 페미니즘, 흑인 우월주의, 공산주의 등에 부정적이었고 고전적 자유주의기독교 기반 보수주의를 옹호했다.

자유지상주의자 답게 마리화나 합법화를 일찍이 지지했고, 동성결혼에는 반대했지만 동성애를 불법으로 만드는 것에는 더욱 반대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였으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존경한 흑역사도 있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 보수운동이 점차 극우화됨에 따라 버클리 역시 중도우파적인 성향을 취할 때도 많았다. 가령 그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지만 동시에 부시가 이라크에서 실패했음을 비판했고, 1991년에는 팻 뷰캐넌을 비판하는 4만 단어짜리 칼럼을 쓰기도 했다. 또 신보수주의를 지지했지만 네오콘들이 미국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1965년 뉴욕시장 캠페인 때에는 소수자를 차별하는 노동조합을 규제하고, 어퍼머티브 액션을 지지하고, 복지제도를 개혁하는 등 보수와 진보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약들을 제시했다. 인종 문제에 관해서도 상식적이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고쳐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으며 말년에는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6] 이 때문에 조지 월리스와 같은 극우 정치가들은 그가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현대 미국 보수주의에 미친 그의 또다른 영향은 TV 쇼 호스트를 맡으며 보수주의적 가치를 옹호한 것이었다. 빌 오라일리, 러시 림보, 터커 칼슨, 로라 잉그레이엄 등 많은 후대의 보수주의 호스트들이 그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다만 버클리는 공격적인 스타일은 아니었고 유머와 재치를 곁들인 차분한 진행 방식을 선호했다면, 터커 칼슨과 같은 호스트는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진행 스타일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5 뉴욕시장 선거 뉴욕시

341,226 (13.4%) 낙선 (3위)

5. 여담

  • 또다른 미국 보수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아인 랜드와는 의외로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아인 랜드는 윌리엄 버클리의 가톨릭 신앙을 두고 "버클리가 가톨릭을 믿기에 그는 너무 똑똑하다"라고 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버클리는 이를 신앙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버클리는 움츠린 아틀라스를 보수주의가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3류 판타지라고 평가했으며, 1982년 아인 랜드가 사망하자 그를 "신도 신념도 믿지 않고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뻔뻔한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죽기 직전인 2004년에도 움츠린 아틀라스를 읽는건 고문이나 다름 없다며 아인 랜드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6. 같이 보기



[1] 어릴 적 미들네임은 프랜시스(Francis)였지만 5살 때 자진해 미들네임을 프랭크로 바꿨다.[2] 후일 케네디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그분이 맞다.[3]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이다.[4] 버클리는 1950년대 중반에는 흑인 민권운동에 부정적이었지만, 변화한 사회 현실을 받아들이고 1960년대에는 인종평등을 지지하면서 극단적인 인종평등주의자들에 반대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꿨다.[5] 스태튼 아일랜드에서는 25.2%나 득표했다. 반면 맨해튼에서는 7.2%밖에 못얻었다.[6] 하지만 미국 흑인의 빈곤이 구조적 문제라는 좌익의 주장에는 반대했으며 흑인 빈곤 문제는 흑인 게토가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