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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당 Federalist Party | |
<colbgcolor=#ea9978><colcolor=#373a3c> 창당 | 1789년 |
해체 | 1824년 |
후계 정당 | 휘그당 |
이념 | 보수주의 (미국) 전통적 보수주의 (미국)[1] 보수자유주의[2] 연방주의 해밀턴주의 보호무역주의 친영 |
스펙트럼 | 우익 |
주요 인물 | 존 애덤스, 알렉산더 해밀턴 찰스 C. 핑크니, 존 제이, 루퍼스 킹, 존 마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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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방당(Federalist Party)은 과거 존재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미국 최초의 정당으로, 당 이름답게 강한 연방정부를 주장했다.2. 창당 배경
미국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이 승리하면서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미합중국의 독립을 영국이 승인했다. 1789년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유명한 알렉산더 해밀턴이 재무장관으로 취임하는데, 해밀턴은 독립전쟁 와중 누적된 국가 부채 해결을 위해 연방 정부의 힘을 강화하고 국립 은행을 설립하기를 희망했다. 해밀턴의 계획은 존 애덤스처럼 이제 막 건립되어 취약한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 한 연방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주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던 반연방주의자인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이런 정치적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해밀턴이 본격적으로 재무부 관료 및 미국 각지의 상인, 은행가 등 자본가들을 묶어 정치적 연합체를 구성하기 시작했고 이 정치적 연합체가 연방당이 되었다. 존 애덤스로 대표되는 연방주의자들은 미국의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추구했으며 국립 은행 설립 및 국가 보조금 지급 등 해밀턴의 재정 개혁에 대해 강력한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반면 이런 흐름에 반대하던 토마스 제퍼슨 등 반연방파들은 별도로 1792년,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미국 정치가 처음으로 양당제(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3. 행적
독립 전쟁의 영웅으로 미국 국민들의 강한 지지를 받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하지 않기로 하면서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의 대결이라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양당 구도가 되었다. 당시 연방당 내부에서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서 두 번 연속으로 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가 자연스럽게 다음 대선 후보로 출마하는 것으로 내정되어 있었고 실제로 출마하게 됐다.결국 대선에서 존 애덤스가 53.4%, 선거인단 71명을 확보하면서 승리, 1797년 미국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당시 선거인단이 많이 배정된 미국 북동부 도시 지역이 연방주의자들의 정치적 본거지였기 때문. 그런데 아직 완전하게 정비되지 않았던 당시 미국의 선거 시스템 때문에 재밌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 대선 시스템은 정당에서 대통령 - 부통령을 각각 따로 입후보해 개별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 당에서 대통령, 부통령 후보를 내되 선거인단이 1인당 2표씩 하나의 명단으로 정리된 정, 부통령 후보들에게 투표해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한마디로 선거인단의 배반 투표가 발생할 경우 서로 소속 정당이 다른 대통령 - 부통령이 나올 수 있었다는 소리인데 이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연방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핑크니가 연방당 몫의 선거인단이었던 71명 중 59명[3]을 확보하는 데 그치면서, 선거인단 68명을 확보한 민주공화당 토마스 제퍼슨 후보가 2위를 차지, 존 애덤스 대통령 - 토마스 제퍼슨 부통령이라는 체제가 되어버린 것.
어찌됐건 집권 여당이 된 애덤스와 연방당에게 당면한 과제는 프랑스와의 외교 갈등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현실화되자 프랑스는 제이 조약[4]에 반발해 미국을 거진 영국의 반 속국으로 간주하고 있었고, 무단으로 미국 선박을 나포하거나 무역 행위를 방해하는 등 도발을 일삼았다.
이에 연방당은 혁명정부에 의해 양국의 외교 상황이 점차적으로 악화되자 크게 분노했고, 대통령에게 전쟁도 불사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존 애덤스는 대통령 취임 후 야당인 민주공화당의 눈치도 있어 전쟁 불개입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다. 실제로 이때문에 대통령인 애덤스와 해밀턴이 공개적으로 갈등하기도 했다. 이때 나온 것이 바로 애덤스 소책자라고 하는 것인데, 이는 해밀턴이 애덤스를 극도로 까기 위해 만든 문서이다.이 소책자를 통해 해밀턴과 애덤스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연방당이 해밀턴파와 애덤스파로 나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5]
애덤스와 해밀턴의 갈등은 대통령 선거까지 이어졌고 연방당에서 각기 다른 후보를 지지하면서[6] 존 애덤스가 재선에 실패하고[7] 1801년 토마스 제퍼슨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턴 급격하게 당세가 기울어 만년 야당 신세를 면치 못한다. 특히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 임기 중 터진 미영전쟁 당시 연방당이 친영 기류를 보인 탓에 미국인들에게 거의 반역 비슷하게 찍혀버리게 된 것이 치명타였다.
이후에는 민주공화당 내 접점이 맞는 계파들과 협력하는 수준에 머물다가 1824년 민주공화당이 해산하던 해, 같이 해산하였고 민주당과 휘그당으로 흩어진다.
4. 역대 선거 결과
4.1. 역대 대통령 선거
연방당의 역대 대통령 선거 결과 | |||||
연도 | 결과 | 후보자 | 득표수(득표율) | 선거인단 | |
대통령 | 부통령 | ||||
1796년 | 당선 | 존 애덤스 | -[8] | 35,726표(53.4%) | 71/138명 |
1800년 | 낙선 | 찰스 핑크니 | 25,952표(38.6%) | 65/138명 | |
1804년 | 낙선 | 찰스 핑크니 | 루퍼스 킹 | 38,919표(27.2%) | 14/176명 |
1808년 | 낙선 | 62,431표(32.4%) | 47/175명 | ||
1812년 | 낙선 | 드윗 클린턴[9] | 재러드 잉거솔 | 132,781표(47.6%) | 89/217명 |
1816년 | 낙선 | 루퍼스 킹[10] | 존 E. 하워드 | 34,740표(30.9%) | 34/217명 |
4.2. 연방당 출신 정치인
4.2.1. 대통령
- 존 애덤스 - 2대 대통령
4.2.2. 부통령
볼드체는 대통령이 된 인물.- 존 애덤스 - 초대 부통령
4.2.3. 기타
5. 둘러보기
[1] classical conservatism. 고보수주의와는 의미가 다르다.[2] "JOHN ADAMS, THOMAS PAINE, AND THE CONFLICT BETWEEN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LIBERALISM IN AMERICA | Starting Points | School of Civic and Economic Thought and Leadership | Arizona State University". 10 November 2023.[3] 배반표만 무려 12표였다는 말이다.[4] 1794년 미국 특사 '존 제이'에 의해 영국과 체결된 조약으로 독립 전쟁 이후 양국 경제 교류 복구 및 관계 개선 등을 약조한 협정이다. 즉, 미국이 다시 친영 노선으로 복귀한다는 신호라 미국 독립을 도운 프랑스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당연히 반발했다. 참고로 당시 민주공화당은 친프랑스 노선을 취했다.[5] 재밌는 건 소책자 마지막에는 애덤스를 그래도 지지해달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얘기를 한다.다 까놓고 마지막에 손을 내밀어버리니 이후에 애덤스는 더더욱 해밀턴을 혐오하게 된다.[6] 존 애덤스는 본인 지지,해밀턴=찰스 핑크니 지지[7] 애덤스는 이때 재선에 실패한 것을 두고두고 해밀턴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8] 당시 선거는 득표수 1위가 대통령, 2위가 부통령이 되는 방식이었다.[9] 연방당 자체 후보를 내지 못하고 민주공화당에서 출마한 후보 중 한명인 드윗 클린턴을 지지했다.[10] 당원들의 개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당의 공식 후보 지명은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