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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 |
본명 | 롤랑 제라르 바르트 Roland Gérard Barthes |
출생 | 1915년 11월 12일 |
프랑스 셰르부르 | |
사망 | 1980년 3월 26일 (향년 65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파리 대학교 |
학파 |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기호학 |
경력 |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콜레주드프랑스 교수 |
직업 | 철학자, 작가, 문예비평가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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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기호학자, 비평가, 문학이론가. 구조주의 비평과 해체비평,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횡단하는 사상적 발자취를 남겼다.초반에는 장폴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글쓰기의 영도』로 학계에 알려졌으며, 이후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적 비평으로 기호학에 기여하였다. 68혁명 이후에는 구조주의 분석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에 영향을 받은 '텍스트론'에 몰두했다. 이때 발표한 「저자의 죽음」이라는 저술로 유명하다. 말년에는 자신의 욕망으로서의 글쓰기에 집중하며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소설적 텍스트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비록 그의 사유 체계가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현기증 나는 이동 작업'을 통해 현대 프랑스의 거의 모든 문학적 움직임을 주도해 온 "하나의 시선ㆍ목소리ㆍ스타일"이었다.
2. 생애
2.1. 초년기
롤랑 바르트는 1915년 11월 12일 프랑스 북서부의 항구도시 셰르부르에서 태어났다. 해군 장교였던 그의 아버지 루이 바르트(Louis Barthes)는 롤랑 바르트가 1살 때, 제1차 세계 대전 중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Henriette Binger)는 외가 쪽 가족들을 데리고 프랑스 남서부에 위치한 바욘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책을 제본하여 번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바르트를 키웠는데, 어린 바르트가 보기에 그 일은 어머니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바르트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집에 먹을 것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생활은 집세를 내는 달의 첫 번째 리듬에 맞춰 살았다. 학기가 시작되어도 학용품 살 돈이 없었고, 교과서 값을 지불할 돈조차 부족했다.[1] 그럼에도 바르트는 바욘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어린 시절에 깊은 애착을 느꼈고,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과거를 기억하며 자신의 작품 속에 이를 녹여 내었다.바르트의 가족은 1924년 9살 때 파리로 올라왔고, 바르트는 몽테뉴 고교와 루이르그랑 고교에서 공부했다. 대부분의 과목에서 1등상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학업 성취를 드러냈던 바르트는 언제나 스스로 그 자신의 미래를 상상할 때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고 교수자격시험에 통과하여 대학 교수가 되기를 바랐고, 실제로 1933년인 18세 가을에는 바칼로레아의 첫 번째 파트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바르트는 바칼로레아를 끝까지 응시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시험의 두 번째 파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1934년 3월 폐결핵이 발병하여 그로부터 10년 이상을 요양원을 오가면서 투병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투병 중 사르트르와 트로츠키의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함). 물론 발병 이후에도 바르트는 바칼로레아 시험 준비를 하였고, 두 번째 파트에 응시하여 통과할 정도로 원래 그가 계획하던 진로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투병이 장기화됨에 따라 그는 고등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가 원하고 꿈꿔왔던 고등사범학교 대신, 1936년 소르본 대학에서 고전문학사를 공부하며 학사ㆍ석사 자격증을 얻는다. 하지만 폐결핵이 계속해서 재발하는 바람에 바르트는 끝내 대학교수가 될 수 있는 교수자격시험에는 응시하지 못했다.
2.2. 구조주의의 시기
이제 대학 제도에서 벗어난 길을 걷게 된 바르트는 해외로 나가 프랑스어 강사 일을 하면서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1937년 헝가리의 데브레젠 대학에서 여름방학 동안 강의를 했고, 폐결핵으로 요양원에서 지내다 나온 이후에는 1948년부터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 다음 해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이곳에서 당시 전임강사로 있었던 그레마스를 만났다. 바르트는 그레마스를 통해 소쉬르의 기호학을 알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기호학을 자신의 작업에 적용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1952년 파리로 돌아와 외무부에서 일하면서 「에스피릿」지와 「컴벳」지에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문화를 기호로 분석한 글들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1957년에 53편의 글들을 한 권으로 묶은 『신화론』을 펴내서 호평을 받지만, 그가 비평계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보다 앞선 1953년 『글쓰기의 영도』의 성공 덕분이다. 사르트르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이 책은 작가의 글쓰기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잡지에서의 지속적인 글쓰기는 바르트에게 자그마한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1953년부터 1959년까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연구보조원 생활을 하였고, 1960년에는 고등연구원 제6분과의 연구 책임자, 1962년에는 연구 부장으로 임명되었다.[2] 그러면서 바르트의 기호학에 대한 관심은 극에 달했다. 소쉬르가 기의보다 기표를 중시했던 것과는 달리, 바르트의 기호학은 기표보다 기의를 더 중시했다. 바르트는 의미작용과 관련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호로 간주함으로써 기호의 개념을 매우 폭넓게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사회문화의 잠재된 의미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사회심리학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3] 비록 전문적 언어학자들의 이론과는 차이가 있지만, 바르트가 제시한 확장된 비전을 통해 구조주의 프로그램은 프랑스 지성계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60년대 초에 바르트는 다시금 교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국가 박사 학위 논문으로 집필하고자 『모드의 체계』에 매달렸다. 그리고 바르트는 레비스트로스를 찾아가서 자신의 작업을 지도해 주기를 부탁했다. 바르트가 레비스트로스와 면담하고 있을 때, 스승이자 친구인 그레마스는 이웃 카페에서 불안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면담의 결과를 기다렸다. "그 후 바르트는 반 시간 후에 나와서 레비스트로스가 거절했다고 말했다."[4]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바르트의 작업은 유행 일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글로 쓰여진 유행'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이로써 대학에서 인정받고자 했던 희망은 다시 한번 좌절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길은 우연한 곳에서 열렸다. 1963년 바르트가 장 라신의 문학작품을 구조주의적 독해로 분석한 『라신에 관하여』를 출간하자, 제멋대로의 독해에 분노한 라신 전문가 레이몽 피카르가 2년 뒤 『신비평 혹은 새로운 협잡』이라는 책으로 바르트를 비판했다. 곧 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바르트는 그 논쟁을 통해 한순간에 신비평의 우상이 되었던 것이다. 오랜 전통을 대변하는 대학 교수들의 보편적인 해석에 대항해, 구조주의를 신봉하는 세대 전체가 바르트의 편에 섰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건을 극화시키는 작업은 절정에 달했고, 1966년 바르트가 피카르를 반박한 책 『비평과 진실』이 출간되었을 때, 출판사는 그들에 호응하여 그 책의 바깥에 "바르트를 화형시켜야 하는가?"라고 쓰여진 띠를 둘러 씌웠다. 이를 통해 바르트는 일약 비주류를 대변하는 구조주의 스타로 올라서게 된다.
2.3. 구조주의에서 벗어나기
구조주의의 열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1960년 중반부터 구조주의의 문제점이 하나 둘씩 지적되기 시작했다. 구조주의는 멈춰있는 구조 내부를 분석할 뿐, 그 구조의 변화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었다. 그런 문제의식은 68혁명에 이르러 폭발한다. 억압된 구조 자체를 행동으로 부수어 버리자는 학생들의 직접적인 실천은 사회가 고정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던 구조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바르트는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낙인 찍힌다. 교실의 문 앞, 학생들이 걸어논 플랜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 "바르트는 구조들이 거리에 내려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바르트 또한 그렇다고 말한다."[5]교실이 학생들에 의해 말 그대로 부숴지자 바르트는 파리에서 잠시 멀어지기로 결심한다. 1970년 모로코의 대학 교수인 자그로울 모르시가 그에게 라바트에서 가르칠 생각이 없냐고 제안하자 바르트는 지체없이 그 기회를 잡았다. 1년 뒤 파리로 돌아와 고등연구원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하긴 하지만 말이다.
68혁명에서 강한 충격을 받은 이후부터 바르트는 달라졌다.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구조주의의 변화와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 개념을 받아들인 것도 이시기다. 1968년 발표한 「저자의 죽음」에서는 구조주의의 억압에서 조금씩 벗어나 텍스트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텍스트는 직물을 의미하는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기표들이 뒤엉킨 짜임 속에서 이제 어떤 실을 뽑아낼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독자의 일이다. 뽑은 그 실로 어떤 새로운 직물을 짜낼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인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강요함으로써, 텍스트에 대한 적극적인 재해석에서 얻는 독자의 즐거움을 방해해선 안 된다. 저자가 독자의 해석을 마음대로 휘두르게 된다면, 저자의 자리만 남아 있을 뿐 독자의 자리는 결코 없을 것이다.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비로소 '독자의 탄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고정된 의미만 제시하는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문학으로 풀려는 시도로 볼 수 있고, 1970년에 출간한 『S/Z』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발자크가 쓴 중편 소설 《사라진 Sarasine》을 분석하는 『S/Z』에서 바르트는 저자의 관점에서 글을 쓰다가도 갑자기 독자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에서 텍스트의 멈춤은 결코 없다. 저자 시점과 독자 시점을 넘나드는 파격적인 문학 기법을 통해 텍스트는 무한하게 재해석된다. 1973년 작품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바르트는 텍스트를 아예 하나의 즐거움으로 선언한다. 독자를 개인적이고도 개별체적인 주체로 정의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사상이나 심리가 아닌 바로 하나의 육체이다. 텍스트를 즐기고 해석하고 그것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주어' 나 '자아'가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 바르트는 육체가 인도하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통해 구조주의의 이론주의적인 딱딱함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로써 바르트는 자신의 육체가 욕망하는 글쓰기 쪽으로 더 나아간다. 자신에 대한 반성, 자신의 정서 및 추억의 진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이미지에 대해, 즉 자기 자신의 육체(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자신의 몸'이야말로 사회의 구조가 재해석되는 장소이며, 사회의 억압 구조가 바뀌어 나가는 지점은 바로 자기 자신의 변화된 해석과 즐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테다. 1975년에 발표한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는 바로 그러한 것을 의미했다.
2.4. 말년
1976년 3월 14일, 푸코의 도움을 받아 바르트는 드디어 콜레주드프랑스 대학의 교수가 된다. 몇몇 심사위원들은 바르트의 대학 경력이 없다는 점을 우려했지만 푸코는 이렇게 설득했다. "대학을 넘어서 현재 우리에게 들리고 있고, 우리가 귀담아 듣고 있는 이 음성들, 이 몇몇 목소리들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에는 속하면서도, 우리의 목소리에는 속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6] 푸코는 결정을 밀어붙였고, 이로써 바르트는 가장 영광스러운 지식의 사원에 들어올 수 있었다. 1년 뒤, 1977년 1월 7일 바르트는 물밀듯이 사람들이 밀려드는 강의실에서 취임 강의를 한다. "모든 언어 활동의 성과로서 랑그는 반동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그저 단순히 파시스트적이다. 왜냐하면 파시즘은 말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7] 변방에서 길을 개척했던 이 인물이 마침내 이뤄낸 취임식을 보면서 사람들은 즐거워하면서 감동에 빠졌다. "몇몇은 눈물을 흘렸고, 사람들은 무언가 비상한 현장을 목격한다는 매우 강렬한 느낌이 받았다. 그리고 친구들의 감동은 이 인물이 지닌 대단한 자질을 웅변해 주는 듯 보였다. 바르트가 감동적인 연설을 하지 않았건만 사람들은 그와 기쁨을 함께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다."[8]그러나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해(1977년) 10월 25일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었다. 바르트는 극도의 상실감에 빠졌다. 어머니에 대한 바르트의 애착은 특별했다. 그녀는 바르트의 진정한 동반자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그는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의 특별한 결속은 바르트가 콜레주드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할 때, 맨 앞자리에 어머니를 앉혀 놓고 취임 강연을 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 무렵 『사랑의 단상』[9]의 대중적인 성공으로 얻은 절정의 명성도 그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10] 이때부터 그의 삶은 점점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1980년, 훗날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사진에 관한 에세이 『밝은 방』을 출간했지만, 평론가들의 평가는 그닥 좋지 못했다. 그 해 2월 25일 월요일, 바르트는 미래의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되는 자크 랑(Jack Lang)의 초청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이 주최하는 오찬에 참석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나온 뒤 길을 건너다가 세탁소 트럭을 미처 보지 못하고 치였고 바로 쓰러졌다. 바르트는 의식을 잃은 상태로 살페트리에르 병원에 옮겨졌다. 다음날 그의 출판사인 쇠이유는 64세의 작가의 상태가 안정적이며 걱정할 이유가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삶의 의지를 상실한 것 같았다. "그는 대단한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그는 병원에서 죽고 말았다."[11] 죽음을 확인한 법의학자의 결론에 따르면, 사고는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이런 측면에서 오랫동안 쇠약해진 환자에게 폐와 관련된 합병증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의학적 이유인가? 심리적 이유인가?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유들로 인해 구조주의의 서사적 장정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영웅은 1980년 3월 26일, 사고가 난 지 정확히 한 달 만에 죽음을 맞이했다. 바르트라는 인간, 그의 감정, 세계에 대한 그의 시선의 특이함은 80년대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상실이었다.[12]
3. 사상
3.1. 신화론
나는 이발소에 있다. 이발사가 〈파리 마치〉 한 권을 내게 내민다. 책표지 위에 프랑스 군복을 입은 한 흑인 청년이 눈을 들어 펄럭이는 삼색기를 바라보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 이미지의 의미이다. 그러나 순진하건 아니건 나는 이 이미지가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즉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라는 것, 모든 프랑스의 아들들은 피부색의 구분 없이 그 국기 아래 충심으로 봉사한다는 것,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해 비방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른바 압제자들에게 충성하는 이 흑인의 열정보다 더 훌륭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확정된 기호학적 체계를 앞에 두게 된다. 즉 선행하는 체계로 이미 형성된 하나의 기표가 있다(한 흑인 병사가 프랑스식 거수경례를 한다). 하나의 기의가 있다(여기서는 프랑스적인 특성과 군대적인 특성의 의도적인 혼합이다). 마지막으로 기표를 통한 기의의 현존이 있다.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13]
소쉬르의 이론에서는 기의보다 기표가 강조되지만, 바르트는 기표보다 기의를 강조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기호는 표면적인 의미(외시)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적 의미 자체가 하나의 기표로 작동하여 문화ㆍ사회ㆍ심리ㆍ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는 2차적 숨겨진 의미(공시)를 만들어낸다. 이 숨겨진 메세지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데올로기로서 은밀하게 사람들을 조종하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사람의 행동과 생각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신화'와 같다.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13]
이에 대해 바르트는 <파리마치(Paris Match)>라는 잡지에 실린 사진을 예로 든다. 이 잡지의 표지에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흑인 병사가 프랑스 국기를 올려다 보며 경례를 하는 사진을 담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의미(외시)는 단순하다. 여기에 프랑스 국기에 경례하는 흑인 병사가 있다는 것. 그러나 단순한 진술을 넘어서면, 이 기표는 흑인들이 그들의 조국 프랑스에 충성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프랑스 제국주의는 정당한 것이라는 내포적 의미(공시)를 생산한다. 즉, 그 겉표지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 알제리 - 프랑스 통합 정책의 성공을 선전하려는 지배층의 간교한 계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내포적 의미 또는 숨겨진 메세지의 이데올로기적 유도를 '신화'라고 부르며, 이 '신화적 효과'가 특정한 세계 인식을 자연스러운 것인 양 가장함으로써(자연화 효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정한 물질적 조건들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이 사진의 '신화적 효과'가 알제리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숨겨 주고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화적 효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르트에 따르면 그 방법은 숨겨진 메세지를 파악한 사람이 '신화 자체를 재신화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숨겨진 메세지에 다른 사람들이 무의식적인 유도를 당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즉, 2차적 의미에 3차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2차적 의미의 신화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끔 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위의 예시에서 '순진한 흑인 병사를 이용하는 비열한 프랑스 제국주의'라는 의미(3차적 의미)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2차적 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제서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참혹한 알제리 전쟁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것이다.[14]
3.2. 텍스트
'권력에 의해 작업되는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폭로하는 것이 바르트의 초기 사상이었다면, 후기 사상에서 바르트는 그 자체가 탈권력의 지표로 간주되는 '텍스트(Texte)'의 실천에 관심을 가진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작가는 자신이 새로운 무언가를 창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다만 이전의 인용들을 모방하여 뒤섞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작가를 필사자(scripteur)라고 부른다.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ㆍ감정ㆍ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서,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이나 문화 또한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따름이다.이러한 텍스트는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자신을 변형시켜 나가는 유희이자 실천으로써 재생산된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서, 서로 다른 근원들이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하므로써 계속해서 덧붙여지거나 삭제되는 변화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에게 있다. 독자는 이렇게 씌어진 모든 흔적들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은다. 그러한 독자는 그 텍스트를 자신의 욕망에 따라 해석하고 변형시키는 육체의 즐거움을 가진다. 하지만 단일 근원의 권력으로서 '저자의 의도'가 글의 모든 의미를 고정시켜 버린다면, 그것은 다양한 재해석의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독자의 즐거움을 뺏어가는 것일테다. 바르트는 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텍스트'의 다중 근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독자의 글쓰기와 그 글쓰기에 대한 즐거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것도 바로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서 저자의 의도가 강요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망테이아 (1968)》에 수록된 「저자의 죽음」 중에서..
더 나아가 바르트는 '언어 자체의 권력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권력은 '저자의 의도를 강요하는 해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언어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언어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언어의 권력성, 지배 견해의 폭력, 상투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언어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인간은 언어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15] 따라서 "우리에게는 언어체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일, 언어체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다." 바로 이것이 언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바르트가 제시한 전략이다. 이 속임수를 그는 '글쓰기(écriture)'라 부른다. 언어 안에서 언어와 투쟁하는 작업을 보여주는 글쓰기, 한 언어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다른 언어를 억압하지 않으며, 미래의 주체가 '어떤 후회도 억압도 없이' '욕망의 수만큼이나 많은 언어를' 구사하며 즐기는 글쓰기, '법칙이 아닌 변태'에 의해 이런저런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글쓰기, 하나의 언어가 권력에 의해 수렴되면 곧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동 작업, 총체성의 괴물을 깨부수는 단편적인 글쓰기 또는 단상, 대립항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통합의 항이 아닌 그것과는 전혀 엉뚱한 제3의 항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대립항의 빗금을 들어올리는 '중성(neutre)'의 언어. 이러한 글쓰기는 철학적이기 보다는 문학적이며 소설적이다.《망테이아 (1968)》에 수록된 「저자의 죽음」 중에서..
소설적인 것이란 바로 주인공도 플롯도 없는 불연속적인 언어의 나열, "단순한 비구조적인 절단, 형태의 분산, 즉 마야[16]이다." 이미지와 사유와 형태의 분산을 통해 삶의 불연속적이고 부단한 움직임을 무대화하고, 시니피에를 추방하고 시니피앙의 관능적인 유희에 몸을 내맡기고, 표면의 억압으로부터 매몰되어 갇혀 있는 저 육체의 언어를 복원시키고, 자아의 완전한 해체를 꾀하는 글쓰기, 바로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소설적 텍스트이다. 이런 '텍스트'를 통해서야 '언어 자체의 권력성'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리하여 자유를 가진 '독자'가 비로소 탄생한다.
4. 주요 저술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글쓰기의 영도 Le Degré zéro de l'écriture | <colbgcolor=#fff,#1f2023> 1953년 |
미슐레 Michelet par lui-même | 1954년 |
신화론[17] Mythologies | 1957년[18] |
모드의 체계 Système de la mode | 1967년 |
S/Z S/Z essai sur Sarrasine d'Honoré de Balzac | 1970년 |
기호의 제국[19] L'Empire des signes | |
텍스트의 즐거움 Le Plaisir du texte | 1973년 |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 | 1975년 |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 1977년 |
밝은 방 La Chambre claire : Note sur la photographie | 1980년 |
소소한 사건들 Incidents | 1987년[20] |
애도 일기 Mourning diary | 2009년[21] |
5. 여담
-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인터뷰에서 바르트에게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적이 있냐고 물어보자, 바르트는 "소중한 친구가 읽어보라고 부추겨서 뒤늦게 마르크스주의를 검토(went over)한 적은 있다"고 말했다.[24] 마르크스 전문가 에드가 모린이 보기에 바르트의 마르크스주의는 관련된 책 몇 페이지만 읽은 진부한 이해에 불과했다.[25] 다른 증언들을 참조해 볼 때, 비록 그의 초기 경력에서 마르크스주의 비평에 기반한 쁘띠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바르트의 마르크스주의는 전문적인 학술 탐구였다기 보다는 젊었을 때 매우 피상적으로 얻은 단편적인 지식 수준에서 작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1974년 그는 잡지사 <텔 켈>의 지원으로 마오주의를 지지하던 친구들과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가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마오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구 대중문화의 대안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갔던 것이었다.[26] 하지만 직접 가서 중국의 단조로운 현실을 목격하고는 실망한다.
- 아브젝시옹 이론으로 저명한 사회학자 겸 철학자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바르트의 제자이다.
- 바르트는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총 30여 개의 곡을 남겼다.
[1] My childhood and adolescence were spent in poverty. There was often no food in the house. We had to go buy a bit of pâté or a few potatoes at a little grocery on the rue de Seine, and this would be all we’d have to eat. Life was actually lived to the rhythm of the first of the month, when the rent was due. (중략) I remember, for example, the small crises at the start of each school year. I didn’t have the proper clothes. No money for school supplies. No money to pay for schoolbooks.#[2]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은 교수자격증 없어도 가르칠 수 있다.[3] 바르트와 함께 그리고 그의 영향 덕분에 구조주의의 프로그램은 비상하게 된다. 비록 그가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쉬르주의와 언어학의 규범을 상당히 자유롭게 해석하여 사용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구조주의의 인사이더라기보다는 아웃사이더 쪽에 더 가까웠으며, 근본적으로 수사학자였다." 그리하여 조르주 무냉은 바르트의 기호학을 일탈한 기호학으로 규정지으며, 소쉬르가 커뮤니케이션의 기호학의 규칙들을 정립했던 데 반해 바르트는 의미작용의 기호학 밖에는 하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바르트가 항상 하려고 했던 바는 부르주아 세계의 징후학이었다." 조르주 무냉이 보기에 바르트는 기호, 상징, 지표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바르트가 의미작용과 관련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기호로 간주함으로써 기호의 개념에 매우 폭넓은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의미작용의 잠재된 내용을 추구하였으며, 그런 이유로 해서 조르주 무냉은 기호학이라기보다는 사회심리학 혹은 심리사회학에 대해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Ⅰ』 이봉지, 송기정 옮김, 동문선, 1998, p.132~133)[4] 60년대 초기에 바르트는 자신의 국가 박사 학위 논문으로 집필하고자 했던 연구인 《모드의 체계》에 매달렸다. 그는 논문을 지도할 인물을 찾으며, 그레마스를 동반하고 앙드레 마르티네의 집을 방문한다. "나는 《모드의 체계》를 학위 논문으로 지도할 뻔 했다. 나는 이건 언어학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동의를 해주었다." 마르티네가 별로 열성을 보이지 않자, 바르트는 레비스트로스를 만나려 가 자신의 작업을 지도해 주기를 부탁한다. 이번에도 그레마스가 그를 동반했고, 불안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웃 카페에서 면담의 결과를 기다렸다. "바르트는 반 시간 후에 나와서 레비스트로스가 거절했다고 말했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Ⅱ』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2, p.43)[5]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Ⅲ』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3, p.161[6]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Ⅲ』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3, p.191 (이 책에 1975년이라고 되어 있지만, 『바르트의 편지들』의 연표에서는 1976년 3월 14일이라고 나옴. 더 최근의 책의 근거를 반영하여 년도 수정)[7]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Ⅳ』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3, p.95[8]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Ⅳ』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3, p.96 (L.-J. 칼베, 《롤랑 바르트》 p.262)[9] 1977년에 발표한 『사랑의 단상』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만 같은 해 어머니 죽음으로 깊은 상심에 빠진다.[10] 이 무렵부터 어머니를 그리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 일기는 바르트 사후에 『애도 일기』라는 책으로 출판된다.[11]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Ⅳ』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3, p.156 (루이 장 칼베, 필자와의 대화)[12]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Ⅳ』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3, p.156~157[13] Je suis chez le coiffeur, on me tend un numéro de Paris-Match. Sur la couverture, un jeune nègre vêtu d'un uniforme français fait le salut militaire, les yeux levés, fixés sans doute sur un pli du drapeau tricolore. Cela, c'est le sens de l'image. Mais, naïf ou pas, je vois bien ce qu'elle me signifie : que la France est un grand Empire, que tous ses fils, sans distinction de couleur, servent fidèlement sous son drapeau, et qu'il n'est de meilleure réponse aux détracteurs d'un colonialisme prétendu, que le zèle de ce noir à servir ses pretendus oppresseurs. Je me trouve donc, ici encore, devant un système sémiologique majoré : il y a un signifiant, formé lui-même, déjà, d'un système préalable (un soldat noir fait le salut militaire français) ; il y a un signifié (c'est ici un mélange intentionnel de francité et de militarité) ; il y a enfin une présence du signifié à travers le signifiant. (Mythologies, p.201.)[14] 신화에 대항하는 최고의 무기는 실제로 신화 자체를 신화화하는 것, 다시 말해 인위적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낸 신화는 곧 진정한 신화학이 될 것이다. 신화가 언어를 도용하는데 신화를 도용하지 못할 까닭이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신화 자체를 세번째 기호학적 연쇄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신화의 의미를 두 번째 신화의 제1항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Roland Barthes, Mythen des Alltags, Frankfurt a. M.:Suhrkamp 1996, p.121)[15] 바르트에 따르면 언어의 권력으로부터의 전복적인 양상은 기존의 문화나 언어의 파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하고 재분배하는 데 있다. 언어의 재분배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게 마련이며, 이 틈새가 즐거움을 생산한다. 그러나 말그대로 언어를 파괴해버린다면 그러한 즐거움을 찾을 길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를 쳐부수고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자 했던 초현실주의자의 시도는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위반이란 파괴가 아닌 인정하고 전도하는 것이다." (김희영 『텍스트ㆍ즐거움ㆍ권력ㆍ도덕성』 참조)[16] 산스크리트어로 '환영', '기만'이라는 뜻이다. 고대 베단타 종교는 '현실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연극과 같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환영'이라는 것이다.[17] 한국에서는 『현대의 신화』로 번역되어 있다.[18] 1954년 부터 1956년까지 바르트가 쓴 53개의 텍스트 모음으로 1957년에 출간됐다.[19] 바르트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당시 도쿄의 프랑스 문화원장이었던 모리스 펭게(Maurice Pinguet)의 초청으로 한 달 씩 3번에 걸쳐 일본에 체류했다.(1966.05.02~06.02, 1967.03.05~04.05, 1967.12.13~1968.01.10) 그는 일본에 머무는 동안 낯선 사회와 문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기록했고, 이것을 발전시켜 1970년 《기호의 제국》을 발표했다. 《기호의 제국》은 그를 초청했던 모르스 펭게에게 헌정되었다.[20] 에세이 모음집으로서 사후에 출간.[21]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에 쓰기 시작한 일기들을 모아서 사후에 출간.[22] 친한 사이인 것은 맞으나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는 증거는 부족하다. 사실, 애인이라는 말 자체가 애매하긴 하다. 여행도 같이 가고 파티도 같이 즐기기도 했으나 서로 '사랑'을 느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푸코의 경우 몇 명의 연인 관계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있으나 그 중에 바르트는 없었다.[23] 다양한 구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정말로 다정다감했던 바르트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인물이었는데, 그 까닭은 그에게서 방법론적 프로그램 이상의 것이 표현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대의 집적소, 가치들의 복수적 변주에 민감한 지표였다. 기호의 제국은 그에게서 의미의 제국으로 연장되었으며, 그가 구현한 어머니상은 그의 이원적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 구조주의의 준엄한 아버지상 자크 라캉에 효과적으로 대조될 수 있었다. (프랑수아 도스 『구조주의의 역사 Ⅰ』 이봉지, 송기정 옮김, 동문선, 1998, p.124)[24] Bernard-Henri Lévy: Were you ever a Marxist? Roland Barthes: “To be a Marxist”: what does the verb “to be” mean in this expression? I’ve already explained my position here. I “went over” to Marxism rather late, encouraged by a dear friend who has since died, and who was a Trotskyist. So that I joined up without ever having been a militant, and via a dissident group having nothing to do with what was already being called Stalinism. Let’s just say that I’ve read Marx, Lenin, Trotsky. Not all their works, of course, but I’ve read some of them. I haven’t reread them for a while now, except here and there a text by Marx. (Roland Barthes & B-H Lévy, Le Nouvel Observateur (January 10, 1977))[25] Edgar Morin, who had been expelled from the Communist party in 1951, and who did possess a genuine Marxist culture, considered that Barthes’ Marxism was the vulgar sort adopted by intellectuals who had perhaps read a few pages of Marx or, more likely, of Sartre. (Louis-Jean Calvet 『Roland Barthes: A Biography (1990)』)[26] Barthes’s entire career can be seen as a quest to find alternatives to Western bourgeois mass culture, which must have been a factor leading him to join Tel Quel’s jau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