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1 23:54:13

가라타니 고진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からたに こうじん
파일:가라타니 고진.jpg
본명 [ruby(柄谷善男, ruby=からたに よしお)] (가라타니 요시오, Yoshio Karatani)
출생 1941년 8월 6일([age(1941-08-06)]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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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도쿄대학 경제학부학사
도쿄대학 대학원 영문과석사
직업 작가

1. 개요2. 행적
2.1. 1960년대2.2. 1970년2.3. 1980년2.4. 1990년2.5. 2000년
3. 평가4. 여담5.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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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문학비평가, 작가. 호세이대학 교수, 킨키대학 교수, 컬럼비아 대학교 객원교수, 코넬 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일본의 대형서점에 가라타니 고진 코너가 별도로 마련돼 있을 정도로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1960~1970년대에 일본의 인문학계를 이끈 인물이 요시모토 다카아키[1]였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는 가라타니 고진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에서의 영향력도 만만찮다. 일례로 1991~2011년에 <상허학보>와 <민족문학사연구>에 게재된 논문들을 대상으로 수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국문학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외국 학자는 가라타니였다. 그 뒤를 죄르지 루카치발터 벤야민이 이었다..셋 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다양한 분야들을 넘나들며 무수한 사유적 업적을 남긴 점을 인정받아, 2022년에 '철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르그루엔 철학문화상[2]의 수상자로 지명됐다.아사히신문 기사

2. 행적

2.1. 1960년대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도쿄대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학부 시절에 여러 경제학 서적을 탐독했지만, 마르크스의 저작을 깊게 다룰 기회는 갖지 못했다. 이즈음의 가라타니는 경제학보다 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66년에 그가 작성한 『사상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가 도쿄대신문에 평론 부문 가작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1967년, 가라타니는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과학부에서 석사논문인 「알렉산드리아 사중주의 변증법」을 제출했다. 그는 박사과정까지 이어갈 생각이 없었는데, 엘리트주의에 염증을 느껴서였다.

1969년, 가라타니는 「소세키 시론, 의식과 자연」으로 제12회 군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때부터 그의 문예비평가 경력이 시작된다. 20대의 고진은 요시모토 타카아키와 에토 준의 저서를 탐독하고 필사하는 데 많은 노력을 들였다. 평론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다룬 것도 소세키의 논객으로 알려진 에토 준의 영향 때문이었다.

2.2. 1970년

1970년, 가라타니는 호세이대학 교양학부 전임강사로 취임했다. 1973년에 <맥베스론>을 「문예」에 발표한 것을 기점으로, 그는 단순한 문학비평을 넘어 사상과 이론을 중심으로 작품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즈음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제시된 가치형태론을 재해석하는 작업도 진행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관점을 비판하고 대안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을 모색하고자 한 가라타니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군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 요지는 자본가의 부를 증식시켜주는 잉여가치는 단순히 상품교환에서 발생한다기보다는 공간적인 가치체계에 의해 전개되며 시간이 흐르며 산업자본의 잉여가치체계도 변화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저서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마르크스 이론에 접목시키는 독창적인 시도를 했다.

1975년, 호세이대학에 정식교수로 취임했다. 동시에 예일대학교 동아시아학과의 객원교수로 초빙되어 일본문학을 가르쳤다. 1977년까지 미국 동해안의 뉴헤이븐에 체류하면서, 가라티는 폴드만과 교류했으며 폴드만을 통해 자크 데리다를 소개받기도 했다.

1975년에 <의미라는 병>이 제7회 카메상 후보작으로 선정됐지만 낙선했다. 대신 1978년의 제10회 카메상에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 수상했다. 1977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가라타니는 도쿄신문에 문예시평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1978년에는 <풍경의 발견>과 <내면의 발견>을 「계간 미술」에 발표했다.

2.3. 1980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 『은유로서의 건축』(1983), 『반성과 역행』(1985), 『탐구Ⅰ』(1986), 『탐구II』(1989)를 발표했다. 이른바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의 이론적 음미와 마르크스 『자본론』의 가치형태론을 동시에 분석했다. 또한 『은유로서의 건축』(1995) 영어로 번역되어 간행되었다. 일본의 80년대 소비사회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고 「비평과 포스트 모던」(1985)과 함께 80년대를 풍미했다. 또한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이 간행되면서 예일대학 비교문학과 객원 연구원으로 이듬해에 미국에 체류한다. 테이프와 미디어를 활용해서, 자신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1984년에 와세다 대학에서 연구회의 강연인 「바흐친과 비트겐슈타인」를 발표했다. 1982년부터 와세다 대학에 재적하면서 당시 문학 연구회에 소속된 여러 사회학자들과 교류하며 가라타니 고진에게 영향을 받는다. 정작 이 당시에 가라타니는 『탐구』를 쓰기 이전부터 상당히 우울 했으며 비평적으로도 침묵을 유지했다. 1985년에 『내성과 역행』을 간행. 1987년에는 군상 신인 문학상에서 동상의 심사위원에 취임하고 1988년에 제 10회 노마문예 신인상에서 심사위원으로 취임한다.

1989년에는 횡단적인 비평 잡지인 『계간 사조』(1990)와 『비평 공간』(1991)을 창간하고 아사다 아키라와 함께 편집 위원을 맡았다. 아사다 아키라의 편집능력으로 당시에 이 잡지에 슬라보예 지젝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여기에는 에드워드 사이드,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은 명망있는 비평가들도 포함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은 90년대에 잡지를 중심으로 구조에서 실존, 그리고 개별성과 단독성, 일반과 보편성의 구분에 대한 논의를 칸트로부터 음미하기 시작했다.

2.4. 1990년

또한 1990년대는 포스트모던의 건축과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적 작가인 이소자키 아라타, 피터 아이젠만, 모랄레스 등 건축가들이 주최한 건축과 다영역 대화의 장으로 국제회의인 ‘Any conference’(1991, 2001)에 참가. 디자인이나 건축 분야에서도 해체적으로 읽는다. L.A에서 열린 ANY의 제1차 회의에서 첫번째 패널로 데리다와 단상에 올랐다. 발언들은 『사상적 지진』(2020)에서 소개되었으며 당시 ‘Any’라는 주제답게 참석자들은 발표주제가 당일에 즉각적으로 정해졌으며 일본에 일어난 ‘지진’에 관해 가라타니는 발언한다. 1991년에는 걸프 전쟁에 반대하는 「문학가 성명」을 발표했다. 1991년에는 일본의 걸프 전쟁 참여에 반대하고 호소하는 문학자들을 중심으로 운동을 주도했다. 1998년에 앤디워홀에 대해서도 강연했다. 하지만 1999년 군상신인문학상과 노마문예신인상의 심사위원은 사임했다.

2.5. 2000년

2000년대부터 가라타니는 '국가와 자본에 대한 대항운동'인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을 시작한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저명한 사회운동가들이 합류했다.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NAM은 '테러도 보복전쟁에도 모두 반대한다'는 취지의 성명을 냈다.

2003년, MIT출판을 통해 『트랜스크리틱』을 간행했다.

2004년, 킨키대학에서의 강의를 통해 '근대문학의 종말'을 논했다. 근대문학을 읽지 않고 해리포터를 위시한 판타지 장르를 읽는 젊은 세대가 문학비평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실에 대한 진단이었다.
2006년, 킨키대학의 운영에 불만을 가지고 사임했다.

2010년, 『세계사의 구조』를 간행했다.

2014년, 듀크대학 출판부가 『세계사의 구조』를 영어로 번역했다.

3. 평가

현대 자본 제국에 대한 대항의 철학적·정치적 기초를 다시 주조하는 가장 독창적인 시도 가운데 하나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평가.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을 새롭게 종합함과 동시에 맑스와 칸트를 새롭게 연결시킨 지극히 야심적인 이론적 대작
프레데릭 제임슨,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평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천재다. 그와 비교하기에 아주 적절한 가라타니 고진은 수재다. 가라타니에게는 배울 수 있어도 하스미에게는 배울 수 없다. ~ 여기서 말하는 천재와 수재는 지능이나 지식의 차이가 아니라 지적 태도의 차이로 구분된다.
영화평론가 허문영, 가라타니를 일본의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와 비교하며.
그는 베르그루엔 철학문화상의 동양인 최초수상자로서, 철학·문학이론·미학·언어학·경제학·정치 등에서, 동서양을 아우르면서 ~ 문제투성이인 지구자본주의(global capitalism), 민주주의 국가들 안의 위기, 자기비판이 빈약한 네이션주의(nationalism)들의 기승부림 속에서 가치있는 비판작업을 해왔다.
2022년 베르그루엔상 심사위원단.
가라타니의 사유는 서구에서 발달한 근현대사상의 개념과 논리구조를 사용해 비서구인들 특유의 주변부적 문제의식을 풀이함으로써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한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 준 저서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1978)의 경우, 고전 마르크스주의 식의 노동운동은 소비자운동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폈다.

또한, 가라타니는 노동운동이 힘을 잃어가듯이 문학 역시 힘을 잃고 있다고 판단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까지 시도했음에도 문학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이 건재함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고, 따라서 21세기에는 '초비평'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비평이란 문단에서 이루어지는 협소하고 자족적인 활동이 아니라, 근현대에 축적되어온 철학 사상들과 끝없이 투쟁하면서 '자본주의=민족(Nation)=국가(State)' 관념체를 극복할 담론을 생산하는 활동이다.

4. 여담

가라타니는 서구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코소보 전쟁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개입에는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것을 문제 삼은 바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그는 무려 하버마스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하버마스는 서구가 코소보에 감행하는 공습은 공공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므로 지지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3]

2022년에 베르그루엔 철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자로 호명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고 한다. 100만 달러를 수여받았는데, 일부는 지역협동조합에 기부했고 나머지는 어디에 쓸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구약성경을 탐독하고 있다고 한다.

사카모토 류이치가 임종을 앞둔 시기에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라타니 고진의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음이 그의 회고록에서 언급됐다..

5.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

이와나미 문고판(B 컬렉션)

1. 『세계공화국으로』
2. 『역사와 반복』
3. 『네이션과 미학』
4.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5. 『근대문학의 종언』
6. 『정치를 말하다』
7. 미간(未刊), 혹은 『탐구』
8. 『문자와 국가』
9. 『세계사의 구조』(대표작)
10. 『자연과 인간』
11. 『트랜스크리틱』(대표작)
12.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다』
13. 『철학의 기원』
14. 『제국의 구조』
15. 『헌법의 무의식』
16. 『윤리21』(정치비평집)
17. 『유동론』
18. 『사상적 지진』(강의록)
19. 『문학론집』(문학비평집)
20. 『나쓰메 소세키론 집성』

이외

1. 『은유로서의 건축』, 한나래, 1998
2.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 1999
3. 『근대 일본의 비평』, 소명출판, 2002
4. 『현대 일본의 비평』, 소명출판, 2002
5. 『유머로서의 유물론』, 문화과학사, 2002
6. 『언어와 비극』, B, 2004
7. 『일본정신의 기원』, 이매진, 2006
8. 『탐구Ⅰ·Ⅱ』, 새물결, 2010
9. 『가능성의 중심』, 궁리, 2015 (대담집)
10. 『세계사의 실험』, 비고, 2021
11. 『하루키의 풍경』, 비고, 2022
[1] 한국에서는 소설 <키친>을 쓴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로 유명하다.[2] '집 없는 억만장자'로 알려진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에 의해 2016년에 제정.[3] 하버마스는 합의의 산물이라면 뭐든지 옳다는 식으로 맹목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이 아니다. 서구 지성사를 통틀어, 하버마스만큼 합리적 의사소통의 본질과 특성을 깊게 탐구한 학자도 드물다. 그런 그조차 '비서구'를 '타자'인 양 간주한다는 점이 가라타니가 비판하는 지점이었다. 하버마스의 논의에서 의사소통을 수행하는 합리적 주체는 서구인들로 한정돼 있고, 비서구는 서구인들이 합의된 조치를 가할 '대상'으로만 치부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