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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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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일성1997년 10월 대표자회 김정일
1997년에 조선로동당 총비서로 직함 변경
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colcolor=#FED11E> 가나 <colbgcolor=#fff,#222>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정일·김중린·김영남·김환·연형묵·윤기복·홍시학·황장엽·박수동
1981년 10월 6기 4차 전원회의 허정숙
1982년 4월 6기 5차 전원회의 현무광
1983년 6월 6기 7차 전원회의 안승학·채희정
1983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허담·김용순
1984년 12월 6기 10차 전원회의 박남기
1986년 2월 6기 11차 전원회의 리근모·김환(재임명)·계응태
1986년 12월 6기 12차 전원회의 강성산·연형묵(재임명)·전병호·최태복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박남기(재임명)·김중린(재임명)
1988년 12월 6기 15차 전원회의 한성룡
1990년 1월 6기 17차 전원회의 윤기복 (재임명)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김용순 (재임명)
1992년 12월 6기 20차 전원회의 김국태·김기남
2001년? 정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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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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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김달현리영 최원택 백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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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황장엽양형섭 양형섭
제9기
제10기 제11기 제12기
양형섭 최태복
제13기
제14기
최태복 박태성 박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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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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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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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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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黃長燁 | Hwang Jang Yop
파일:external/www.dailynk.com/DNKF00014471.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출생 1923년 2월 17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
(現 황해북도 승호군 광정리 삼청동)
사망 2010년 10월 10일 (항년 87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26호
본관 제안 황씨(齊安 黃氏)[1]
가족 아버지 황병덕(黃秉德, 1887년~1941년), 어머니 이덕화
형 황승엽(黃承燁, 1917년~1983년)
전처, 슬하 1남 3녀(이북 가족, 탈북 직후 숙청)
장인 엄씨(1981년 7월 사망)
장모(1987년 8월 사망)
처남 엄씨(1938년[2])
처형 엄씨(1952년생)
처남 엄씨(1955년생)
내연녀 엄씨(1961년생)
혼외아들 엄씨(1998년 10월생)[3]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평양상업학교 (졸업)
주오대학 (법학 / 중퇴)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 / 학사)
모스크바 대학교 (철학 / 석사·박사)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0년 수훈)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조선로동당 입당과 모스크바 유학2.3. 숙청 위협과 탈북2.4.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증언2.5. 1997년 기자회견 당시 밝힌 남북통일에 대한 견해2.6. 한국에서의 생활2.7. 사망
3. 가족4. 논란
4.1. 현충원 안장 논란4.2. 북한 망명정부 논란
5. 대중매체에서6. 기타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과학교육비서, 국제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을 역임한 이후 탈북한 역사상 가장 최고위급 탈북자이다. 단순 의전상의 지위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 해당하는 김영남이나 최룡해과 같은 지위이니, 이들이 탈북하지 않는 이상 전무후무한 인사일 것이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란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유사한 직책인데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에서는 최고 의결기구의 의장이 국가원수로 대우받기는 하나 당이 국가보다 우선하므로 로동당의 하부기관이나 다름없다. 대외적으로 민주국가 체제를 표방하기 때문에 설치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지위는 시기에 따라 좀 달랐는데 1972년부터 1983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재직한 황장엽의 경우, 북한이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김일성을 그 자리에 앉혔으므로 이 당시에는 상임위원장이 아닌 상설회의 의장[4]으로 불렸으며 명목상으로도 국가원수로 대우받지는 못하였다.
북한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비서는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중요한 직책이지만, 외국에서는 오히려 국회의장직과 비슷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더 높게 인식했다. 그래서 나는 중앙 당 비서가 된 다음에도 당대표단이 아닌 경우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 자격으로 외국을 방문하곤 했다.
-황장엽 회고록 234페이지

황장엽 본인도 위원장 자리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한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라고 쳐도, 스탈린시대 국가원수는 칼리닌이고, 김정일시대 국가원수는 김영남이지만 존재감이 제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에선 72년 김일성이 주석이 되기전에 내각총리였음에도 조선인민군과 로동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일성 장군 만세는 외칠지언정 김두봉 최용건 따위는 실세축에도 못 들었다. 그저 그럴듯한 바지직위.
"황장엽이란 사람이 북한의 새 상임위원장이랍니다!"
"그런가? 그런데 황장엽이 누구야?"
"모릅니다. 아까 기자 클럽 다 뒤져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대요!"[5]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북한에서 사는 동안 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행적은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장엽 본인은 상임위원장 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상비서를 역임 하였다. 실제권력은 조직비서(김일성 생존시 조직비서가 김정일)에게 있지만 사상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한 자리이다. 북한이 아무리 동문이나 동창 학연을 종파주의자로 엄중히 금지해도 알음알음 인맥이나 사제관계란건 중요시 여기는데 황장엽이 로동당내 대부분의 간부들의 스승이고, 더군다나 로동당 중앙위원회 사상비서직은 로동당 간부 뿐만 아니라 전사회의 사상통제와 교육을 지탱하는 자리인 만큼 황장엽의 북한에서 상징적인 위치였다. 그리고 여기에 주체사상연구소장도 시기적으로 겸임하거나 단독으로 맡고 있었다.

황장엽의 아들 경모가 김일성의 사위 장성택의 맏누이 딸과 결혼하였다. 즉 황장엽은 장성택을 거쳐 김일성과 사돈 관계.[6]

2. 생애

2.1. 어린 시절

황장엽은 1923년 1월 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7]에서 황병덕(黃秉德, 1887~1941)과 이덕화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황장엽의 회고에 따르면 중산층 정도의 집안으로 아버지는 마을 훈장에 2,000평 정도의 밭과 고향집에도 빌려주는 밭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덕분에 무학력자가 넘치던 시절 황장엽과 형 황승엽(黃承燁, 1917~1983)은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평양고보 졸업후 원래는 사범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적록색맹으로 탈락하고 1937년 평양상업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주산실력을 인정받아 4학년 때는 조선식산은행에서 열리는 전 조선 주산 대회까지 나가서 우승을 했는데 황장엽의 회고록에서 따르면 이때 식중독에 걸려서 몸고생을 했음에도 운좋게 우승을 했고, 이 요행을 두고 황장엽은 정신을 강화시키려면 육체를 약화시켜야 한다라고 마음을 고처먹었고 이 생각에 따라 단식이나 냉방에서 자는 등 육체를 굴려먹었다. (출처:황장엽 회고록, 1장)

그리고 1941년 12월[8]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2월 27일에 도쿄로 유학, 주오대학 야간 전문부 법과에 입학시험을 합격하고 입학한다. 그러나 불과 2년만인 1944년 1월 일본이 황장엽을 비롯한 재일 조선인 100여 명을 송환하여 징용노동에 처했다.[9]

2.2. 조선로동당 입당과 모스크바 유학

1년 반 동안 삼척에서 징용살이를 하던 황장엽은 광복을 맞이하게되고 45년 8월 20일 고향 평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황장엽은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부지를 옮겼다가 김일성 종합대학에 부지를 빼앗기고 평양상업학교가 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는 등 여러 과정을 지켜보다가. 1946년 11월 15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다. 그뒤 황장엽은 대학생 출신 때문인지 석달만인 47년 2월에는 세포위원장으로 승진하고, 1년뒤인 48년 2월에는 조선로동당 핵심간부를 양성하던 중앙당학교 이론반에 입학한 뒤, 그 해 8월에는 김일성 대학교 예비과에 입학하는 등 당의 참모 교육을 착실히 받는다. 그러던 중 49년에는 모스크바대학교의 유학생으로 낙점을 받는다. 그렇게 황장엽은 49년 10월부터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 입학했고 53년 11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다. 여기서 훗날 아내가 되는 박승옥도 만났고 52년에는 헬싱키 올림픽에 대령의 통역병으로 참여했다.

53년 11월에 황장엽은 평양으로 귀국한다. 이때 한국전쟁으로 인해 평양이 토굴만 즐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황장엽은 김일성 대학 철학 강좌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이후 명강의로 인기를 얻었으나 이후 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를 거쳐 1957년,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과장에 배치되었다. 1958년, 이론, 교양 담당 부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아부도 하지 않고 욕도 하지 않고 감정표현도 잘 하지 않아서 당내에서 부처님, 목석으로 불렸다. 1959년에 평양시 삼석구역 철봉리 당원 휴양소 근처의 저수지에서 중앙위원회 지도원 한명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황장엽이 그를 재빨리 건져왔지만 끝내 지도원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황장엽처럼 솔직담백하게 일을 하라고 그를 수차례 추켜세우기도 했다. 김일성도 그를 이론가라고 부르면서 일처리를 칭찬했다.

1961년, 참사에 임명되어 김일성의 연설 작가가 되었고 1965년, 하앙천의 후임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다. 황장엽은 이에 대해서 전임 총장 하앙천을 싫어했던 김정일이 김경희의 대학 입학을 앞두고 총장 교체를 건의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설명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참가하여 중국과 소련의 노선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그런데 1966년, 김일성종합대학 설립 20주년 기념논문집에 실린 황장엽의 논문 <사회발전의 동력>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직지도부장 김영주와 중앙당학교 교장 양형섭이 황장엽의 논문이 반당 수정주의 논문이라고 공격하였다. 김일성은 황장엽을 매우 강력히 비판했고 1967년 5.25 교시가 발표되면서 황장엽의 서기실 동료들은 모두 숙청당했다. 설상가상으로 황장엽의 장인이 중국으로 탈출하려다 체포되면서 황장엽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김일성은 황장엽을 남의 글을 마구 도적질해서 글을 쓴 수정주의자, 조립식 박사라고 비난했고 황장엽은 식물총장이 되고 제1부총장이 사실상 대행하는 상황이었는데, 1968년이 되어 김일성이 황장엽을 용서해주면서 다시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대외문헌편집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는 한편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국가주석제가 도입되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이후 1977년, 1982년까지 3차례 당선되지만 1983년 3월에 양형섭에게 상설회의 의장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게 된다. 3번째 임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교체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1982년 선출에 대해서는 없었던 것처럼 치우는 일이 많은데 엄밀히 말해서 의장으로서 3선을 했다. 여튼 이것 때문에 역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상설회의 의장을 합쳐서 임기 중에 소환된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1979년 10월 15일, 정치위원회 회의 결정에 따라 당 부장에 해당하는 당중앙위원회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11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일성의 제의로 과학교육비서로 파격승진하였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비서국 비서에 유임되었다. 1983년에 양형섭에게 상설회의 의장 자리를 물려준 것은 비서 업무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양형섭은 사회과학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의 직함을 가지게 되었는데, 황장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사회과학원이 선전선동부와 연합하여 황장엽에게 맞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3년 아웅산 테러의 영향으로 대남비서 김중린이 철직되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면서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이었던 허담이 신임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으로 조동되었다. 이에 국제비서 김영남이 다시 외교부장으로 조동되었고, 국제비서에는 국제부 부부장 김용순이 임명된다. 하지만 김용순이 지나친 전횡을 부리다가 김일성의 미움을 사서 1984년에 철직되면서 후임 국제비서를 맡았으나 황장엽은 권력이 많은 만큼 적도 많고 위험한 국제비서 자리를 너무 부담스러워하였고 결국 1988년 허담에게 국제비서 자리를 물려주고 당력사연구소장 겸 문서정리실장으로 옮겼다. 이후 허담이 사망한 후 1993년 말에 최태복의 후임으로 다시 국제비서에 임명되었다.

2.3. 숙청 위협과 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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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증언

1997년에 망명한 황장엽은 1997년 7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자신은 핵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 확산 방지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로동당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고 이미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했다는 것(1997년 당시)으로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렇게 알고(믿고) 있다"고 폭로하여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KBS, 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 하에 있던 특정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북한이 그러한 핵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련도 19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실제로 북한의 핵개발은 소련에서 원자로를 들여오면서부터 시작했다. 핵무기라는 게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맨하탄 프로젝트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탄생한 것이다. 훗날 보수세력들중 일부는 국민의 정부햇볕정책 때문에 현금 지원이 핵개발에 일조 했다며 김대중을 비판하는데, 황장엽에 의하면 북한 핵프로그램은 국민의 정부 집권 전후로 중단된 적이 없고, 국민의 정부 출범(1998년) 이전에도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했기 때문에 그런 비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햇볕정책이후 핵무기 실험이 노골적으로 가시화되고, 가속화 된 것이 사실이다. 즉, 햇볕정책 이전에는 고난의 행군 등으로 유지도 어려웠던 핵무기 개발 사업은 거진 페이퍼 플랜에 불과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으로 북한에 유동성 자산을 투입하게 되었고, 이것이 정식으로 개발하고 또 가속화를 이루게 해준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비판하거나 그에 대한 실책에 대해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주의하는 것이 좋다.

2001년 7월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을 통해 미국으로 재망명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자신과 함께 한국에 온 김덕홍 전 로동당 자료실 부실장과의 서한이 발견되었다.#

2.5. 1997년 기자회견 당시 밝힌 남북통일에 대한 견해

황장엽은 전쟁을 막고 평화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서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황 씨는 북한 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북한은 따로 발전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독특한 논리를 제시했다. 통일의 첫째 단계는 결국 북한 체제가 허물어지고 개혁 개방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 후 통일 과정에 대해서는 매우 특이한 의견을 제시했다. 북한이 개혁 개방이 되더라도 남북 간의 교류는 인정하되 거주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밝혔고 왜 그런가 하게 되면 남한이 계속 앞으로 자꾸 발전해야지, 북한을 위해서 지금 독일이 겪는 것처럼 그 많은 그런 통일 비용을 낼 필요가 없다고 했으며 남한이 북한에 밥만 먹을 수 있을 만큼 약간의 식량을 주고 자본을 투자하면 북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기 때문에 10년 안에 바짝 따라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통일론이 1국가 2체제같은 연방제를 의미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황씨는 그것은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북한이 남한 동포들에 신세만 지지 말고 그들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남북이 사상과 문화, 경제 등, 생활 수준이 비슷해야지 그 격차가 커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깔보면 통일 안 한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10]

2.6. 한국에서의 생활

망명한 뒤 처음 6년동안은 국가정보원의 특별 보호 대상으로 있었다. 아무래도 역대 귀순한 인물들 중에서 서열로는 제일 높아서 암살 위험이 컸고, 남북한관계에 어떤 쪽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이라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정보원에서 제공한 안가에서 생활했는데, 당시 몇 차례 방미 의사를 전하기도 했으나 정부에서 신변상의 이유로 난색을 표하면서 계속 방미가 늦춰졌다.

한편 2002년 장성택이 서울에 방문했을 때 장성택에게 주 이탈리아 북한대사를 지냈으며 장성택과 안면이 있는 김동수 박사를 통해서 역사적 결단을 하라는 내용의 메세지를 보내려 했는데, 남북 경호팀이 겹겹이 둘러싼 장성택에게 김동수가 접근할 방법은 당연히 없었고 이 메세지는 끝내 장성택에게 닿지 못했다.

북한에서 황장엽의 재월북을 종용하는 시도를 좀 했었다는데, 황장엽이 나중에 김현식 교수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북측에서 한밤중에 황장엽에게 전화를 해서 황장엽 아들, 황경모를 바꿔준 다음에 "황장엽 비서 동지, 아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비서 동지께서 마음 바로잡고 이쪽으로 넘어오시면 아들도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답하십시오, 얼른 말씀하셔야 합니다"라고 협박했고, 황장엽은 대답도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국가정보원의 특별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었을 당시에는, 외출을 할 때도 기관원이 늘 따라붙었다고 한다. 2003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황장엽을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만찬을 대접했을 때도 자택 안까지 기관원이 따라들어와서 대화 내용을 받아적으려 했는데, YS가 이걸 보고 "우리 집에는 기관원이 들어온 역사가 없다"고 역정을 내며 쫓아냈다고 한다.[11][12] 이때 황장엽은 처음으로 기관원 없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고, YS의 회고에 따르면 제일 편하게 대화했다고.

참여정부가 출범하고 5개월 뒤인 2003년 7월 18일, 국가정보원은 황장엽을 특별 보호 대상에서 해제시켰고 대신 일반 관리로 전환해 경찰 경호를 붙혀줬다. 따라서 국가정보원 안가에서 퇴거한 황장엽은 논현동에 또 다른 안가를 만들어 사망할 때까지 생활했는데, 황장엽의 안가는 입구부터 몇 중의 보안장치가 설치되어 동네 주민들조차 황장엽의 집인 줄 전혀 몰랐을 정도로 보안에 신중을 가했다. 경호원들 역시 특수부대나 대통령 경호부대 출신들 중 엄선해서 뽑았다고.

일반 관리로 전환된 이후에는 개인활동이 자유로워져 이때부터는 대외 활동을 했다. 2003년 10월 방미를 시작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자유북한방송 등 탈북자 관련 매체 인터뷰에 자주 출연하며 대외활동을 했다.[13] 탈북자들 관련된 모임 같은데 가면 본인이 꼭 음식값을 내주고 왔는데, 경호원이 카드를 써보라며 만들어준 신용카드를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썼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때부터 대중매체 노출이 잦아지면서 북한의 암살 위협이 극에 달했다. 특히 2004년 3월에는 자유북한방송 사무실 앞으로 황장엽을 죽이겠다는 협박 소포가 와서 그에 대한 경호가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황장엽은 자유북한방송에 정기적으로 고정 출연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암살 위협이 높아지자 경호처 측에서 고정출연은 위협하다며 비정기 출연으로 전환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자유북한방송 대표단이 직접 모처로 녹음장비를 가지고 가서 녹음을 했다고...

참고로 이만갑에 고정으로 나오고 있는 탈북자 신은희 씨가 자유북한방송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을 당시 스튜디오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이미 대표로부터 신은희에 대한 정보를 전해들은 황장엽은 스튜디오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 특히 "남자 잘 만나야 된다" 라는 조언이 기억에 남았다고(...) 이후에 황장엽은 신은희 씨에게 족발을 대접한다며 신촌 식당으로 초대했는데, 정작 그 날 가보니 황장엽은 없고 경호원만 있었다...

참고로 함께 망명한 김덕홍 전 비서와는 국가정보원 안가에서 함께 생활하며 망명 후에도 친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2002년 방미 건 관련하여 의견 차이를 보이며 사이가 급격히 틀어져 두 사람 다 국정원 안가에서 나온 뒤로는 관계가 끊어졌다고 한다.

이 외에는 각종 강연 활동과 집필, 방송 출연등을 하며 생활했다. 80이 넘는 고령의 나이에도 꽤나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말년까지 직접 반신욕을 하며 반신욕 할 때 들어가는 숫자까지 직접 셌다고 경호원이 밝혔다. 2010년 4월,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하였으며, 이때 우리민족끼리는 "산송장의 역겨운 행각 놀음"이라는 논평을 발표하여 그를 마구 비난하였다.
추악한 민족반역자 황가가 도적고양이처럼 뒤골목으로 미국과 일본을 싸다니며 미친소리를 늘어놓아 조소를 자아내고 있다.
가장 너절한 변절과 배신으로 현대판 유다로 저주받는 황가놈은 비공개《초청강연》이니 뭐니 하는데서 우리의 존엄과 체제를 악랄하게 헐뜯으며 기염을 토하였는가 하면 상전들에게 그 무슨《조언》을 한답시고 얼토당토않는 얼빠진 넉두리를 늘어놓아 사람들을 웃기고있다.
하늘에 대고 삿대질하는격으로 무엄하게 지껄이는 놈이나 그러한 늙다리정신병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자들이나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꼴불견으로서 그것은 실로 한장의 정치만화이다.
황가로 말하면 일신의 영달과 안락을 위해 어지러운 과거를 불문하고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조국과 혈육마저 버린 희세의 반역자, 매국역적이고 더러운 변절자, 인간쓰레기이다.
지은 죄가 너무도 커서 밝은 세상을 피하여 괴뢰들의 비호속에 뒤골방에 숨어 미친개처럼 아무 소리나 마구 짖어대는 인간추물 황가놈에게 사람들은 이미 침을 뱉은지 오래다.

2.7. 사망

2010년 10월 1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사망 당시 따뜻한 욕조 안에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정황상 노환에 따른 자연사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로부터 몇 달 전에 암살 미수 사건[14][15]도 있었기에 혹시나 하여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했다. 같은 날 북한에서는 로동당 65주년에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3대 세습이 확정되고 가도에 오르게 된다.[16]

황장엽의 경호는 국무총리 이상급이었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직속으로 경호하였다.[17]

사후 한국에서 일반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추서받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과연 그를 이렇게까지 대우할 이유가 있는가를 놓고 말들이 많았었다. 단,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북한에서 망명하면 이 정도로 대접해 준다는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사망 이후 10월 14일, 우리민족끼리는 "배신자의 운명"이라는 논평을 발표해 황장엽에 대한 저주를 퍼붓다가 이를 20분 만에 삭제했고 다음날인 10월 15일에 앞서 삭제한 논평을 보강하여 "천벌을 받은 인간추물의 비참한 종말"라는 새로운 제목의 논평을 올렸다.
황가놈이 지난 10일 급사하였다고 한다.
황가놈의 급사는 하늘이 내린 천벌이다.
천추에 용납 못할 만고역적 황가놈은 천벌을 받아 청청 하늘에서 마른 벼락 맞듯이 누구도 모르게 알몸뚱이로 욕조에서 더럽게 뒈졌다.
죽어서도 상주하나 똑똑한것 없어 그야말로 무주고혼의 가련한 신세가 되였다.
황가놈의 급사야말로 이 세상 가장 추악한 배신자, 변절자의 가장 비참한 개죽음이다. 황가놈의 개죽음은 자기를 키워준 품을 배반하고 조국과 인민, 민족을 반역한 변절자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지금 괴뢰보수패당과 인간쓰레기들은 북에서 당창건 65돐을 성대히 경축하는 잔치날에 황가놈이 급사하였다고 하면서 그것이 불길한 징조일수 있다는데서 커다란 심리적충격과 불안에 싸여있다. 괴뢰패당의 반공화국악선전의 돌격대가 되여 온갖 나발을 다 불어대던 어중이떠중이 인간쓰레기들은 저들의 운명도 황가놈과 같이 될수 있다는 공포와 절망, 허탈감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하여 허우적거리고있다.
아마 황가놈은 세계를 진감시킨 평양에서의 지난 9월의 력사적사변과 10월의 우렁찬 발걸음소리,폭퐁같은 만세환호성에 복통이 터지고 심장발작을 일으켜 황천객이 되였을것이다.
태양과 하늘을 배반한자는 언제 어디서도 천벌을 받기마련이다.
그것은 력사의 철리이다.
지은 죄가 너무도 커서 세상눈을 피하여 절망속에서 뒤골방에 숨어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더럽게 뒈진 황가놈이다.
살아서도 산송장이고 죽어서도 묻힐곳 없으며 세상사람들의 저주를 받는 황가놈의 말로는 배반과 배신, 반역의 대가가 얼마나 처참하고 혹독한가 하는것을 잘 보여준다.
괴뢰보수패당과 어중이떠중이들이 조국과 인민, 가족까지 버린 가장 너절한 인간추물을 분칠해보려고《조문》이요 《훈장추서》요 《현충원안장》이요 하는것이야말로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꼴불견의 광대극이다.
괴뢰들의 훈패와《현충원》이라는것이 만고역적 인간쓰레기 황가놈한테까지 차례지는것을 보면 얼마나 너절하고 한심한것인가 하는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이 세상 가장 추악한 변절자, 배신자이고 인간추물인 황가놈의 개죽음에 분칠을 하면 할수록 더 큰 망신과 조소거리로 될뿐이다.
괴뢰보수패당과 인간쓰레기들은 황가놈의 비참한 종말이 자신들의 불길한 전도와 수치스러운 말로를 예고하는 징조라는것을 알아야 한다.
[18]

2010년 10월 15일에는 "부당한 차별"이라는 만평을 게재하였는데, 내용은 웬 들개들이 몰려와 죽은 자기 동료를 현충원에 묻으려 하자 한국 보수세력들이 막으려 하는데 개들이 "뭐라구? 우리처럼 살다가 욕조통에서 죽은 그 황가인지 황개인지에게는 <훈장>까지 달아주어 여기에 묻으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왜 우리만 차별하는거요."라고 따지는 내용이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북한은 이런 '민족의 반역자'가 정립한 '반동사상'인 주체사상은 금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김일성이 만든 것마냥 날조하고는 이를 '인류사상사의 최고봉' '우리는 불패의 사상강국이며, 사상강국이야말로 이 행성의 최강국' '그 모든 기적들을 다 합쳐도 비길 수 없는 거대한 위력으로 이 세상을 변모시켰다'는 등의 온갖 과장된 찬사들을 내놓으며 주체사상의 단물만큼은 남김없이 빨아먹고 있으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19] 자신들이 사실상 토사구팽한거나 다를 바 없고 그들이 진짜로 죽이려 한 대상이 남긴 유산의 단물만큼은 계속 빨아먹는다는 게 북한 수뇌부가 얼마나 파렴치한 성품을 가졌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3. 가족

  • 황병덕 (1887 ~ 1941) / 이덕화
    • 1녀
    • 2녀
    • 황승엽 (1917 ~ 1983)
    • 황장엽 (1923 ~ 2010) / 박승옥 (1922 ~ 1999?)
      • 황선희
      • 황노선
      • 황선옥
      • 황경모 (1952 ~ 1999?)
      • 엄○○ (1998 ~ )

망명할 때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두고 왔다. 부인 박승옥씨는 북한 유수의 출판사이자 외국 책을 북한에 번역하는 외국문출판사에서 일했으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들은 외교관, 큰딸 황선희는 외국문학을 전공한 학자, 둘째딸 황노선은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다.

탈북 이후 그의 가족들의 안위에 대해서는 '숙청되었다', '자살했다', '그래도 살아있다' 등등의 다양한 설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부인은 그의 탈북 직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식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탈북자인 김현식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맏사위는 이혼을 강요당했으나 이혼하지 않고 같이 수용소에 들어갔고, 둘째 사위는 이혼당했으며 며느리 또한 이혼당해 아이(황장엽의 손자들)들을 빼앗기고 추방되었다고 한다.

탈북자인 전 국가안전보위부 중좌 출신의 목사 김용[20]이 남에게 전해듣기로는 황장엽의 조카는 개천 제18호 관리소에 끌려온 다음날 자살했다고 한다.

그의 친척들 또한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촌까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등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피해자의 수만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측근들의 일가족까지 포함한 수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정말 먼 친척들은 오지로 추방되거나 적대계층으로 강등되는 수순에 그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민경부대에 있다가 비무장지대를 넘어 탈북한 주성일씨의 회고에 따르면 황장엽의 먼 친척 되는 어떤 군인은 "당에 충성하던 내가 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황장엽 비서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 가야 하느냐"고 저항하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2009년에는 먼 친척 3명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탈북한 이후 교수 출신인 김숙향[21]이란 여성을 양녀로 삼았으며, 비서로 두고 있던 엄씨와 결혼없이 슬하에 아들을 두었다. 당시 70대였던 황장엽과 30대 후반이었던(1961년생) 엄씨의 나이차는 자그만치 38세에 달한다. 현재 남한의 처 엄씨와 아들은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엄씨는 논현동 대도식당과 대도식당이 위치한 빌딩을 소유중이다.

수양딸은 사실혼 관계에 있는 여자에게 아버지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탈북자들에게 100억원 이상 돈을 사기친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 구속되었다.

황장엽의 수양딸은 2015년 3월 27일 징역 5년이 확정됐다.

2017년에는 황장엽의 친척이 북한에서 내란모의를 하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있다.황장엽 친척 처형

장성택과는 인척 관계였다. 황장엽의 큰아들이 장성택의 누이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황장엽의 큰아들은 황장엽의 흔적 말살 과정에서 살아남았지만 훗날 장성택이 처형되자 처형당했다.

4. 논란

4.1. 현충원 안장 논란

황장엽은 국립묘지법상 훈장을 받거나 한국전쟁 등에서 이룬 업적 등이 없어 현충원에 안장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후 이틀 뒤인 10월 12일 이명박 정부가 훈장 추서 등을 추진하면서 일반 민간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인 1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고, 국가보훈처는 그 다음날 현충원 안장을 결정해 2010년 10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청와대 임태희 비서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황장엽 선생은 역사의 아픔이나 고인에 대해 생전과 사후 모두 국가가 책임지고 지켜야 한다. 안전하게 영면하실 수 있게 조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사실을 전하였으며, 맹형규 행자부 장관은 "북한의 실상을 세계에 알려 안보 태세 확립에 기여하고, 북한 민주화 발전과 개혁개방에 헌신한 것을 인정해 무궁화장을 추서했다며 국무회의에서도 이의 없이 훈장 추서가 결정됐다"고 밝혔다.#

10월 11일 김무성 원내대표는 최고 위원회의에서 "황장엽 선생의 영면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며, 북한 권력의 거짓과 잔혹함, 폭정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면서 결단을 감행한 황 선생의 희생정신은 오늘날 우리 정치권의 리더십이 꼭 귀감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라고 평가하며 장례에 최고의 예우를 다해야 되겠다"고 덧붙였다. 나경원 최고위원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10년 동안 (황장엽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며, 활발하게 행동하려 했으나, (지난) 정부의 압력 때문에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라며 전 정권을 비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의 네티즌과 정치인들 사이에 과연 그를 이렇게까지 대우할 이유가 있는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안장에 대해 좌우를 막론하고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 등 야당 측에 의해 현충원 안장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다. 민주당 정세균 의원은 "이 분은 주체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고 오늘날 북한 현실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남한에 와서 주체사상을 부정한 바가 없다"면서 현충원 안장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진보계열 평론가인 진중권은 "황장엽은 전향한 적 없습니다. 그는 투철한 김일성주의자이며, 원본 주체사상가죠. 그저 김정일과 사이가 나빴을 뿐. 아무튼 보수우익이 김일성주의자, 주체사상가의 장례를 주관한다니, 귀한 일"이라며 "톨레랑스의 모범이랄까요? 물론 그 이전에 코미디고요"라며 그의 현충원 안장에 독설을 퍼부으며 반대했다. #

우익 군사평론가로 유명한 지만원 역시 "황장엽은 김정일과 관계가 악화되자 남한을 피신처로 이용한 사람이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황장엽은 귀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망명자 신분을 고집해 왔던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며 황장엽의 현충원 안장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장은 추서되었고, 10월 14일 황장엽의 안장식이 거행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영결식과 장례식장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비롯한 정, 관계 인사들이 참석하였으나,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의 관계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4.2. 북한 망명정부 논란

그가 대한민국에 실망하여 북한 망명정부를 수립하려 한 사실이 사후에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비슷한 케이스인 조선자유인권공화국 북한망명정부의 경우에는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한다는 기본 강령을 가지고 있다.

5. 대중매체에서

6. 기타

철학가의 면모를 보면, 1997년 리영희와의 대담을 가진 적이 있으나, 리영희의 회고담인 대화편에서 그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용옥이 한때 그와 주체사상을 논의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그 다음 소식은 없었다. 그리고 극우 평론가로 유명한 지만원에 의해서 1980.5.18 음모론의 광수로 지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지만원/논란과 비판 참조.

그는 일부 탈북자에게도 미움을 받기도 했다. 실제 어느 탈북자남한에 와서 황장엽의 글을 보고 "지가 무슨 반공투사랍시고 설레발 치는 거 보면 구역질이 난다. 그동안 김일성 밑에서 얼마나 호강하던 작자인데 마치 자기가 북한에서 나중이나마 고생했다고 써대는 거 보니 어이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비판적인 시각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가 북한 내부의 실상에 대해서 정치적 숨겨진 이야기라든지 여러 가지로 알렸다는 점, 북한 정권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탈북하여 남한으로 왔다는 점에서 북한 정권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남북한간의 체제경쟁에서 북한 체제의 패망,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한 것이다. 즉 이는 황장엽을 받아준 '남한'을 긍정적으로 봐야 할 근거일 뿐 이 인물을 긍정적으로 볼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장성택의 길이라는 책에 의하면 장성택이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남한을 방문했을 때 남한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황장엽이 가까이 지내던 탈북 망명 인사를 급히 찾아 그에게 밀봉된 봉투 둘을 주면서 "중요한 문제이니 집에 가서 혼자만 열어보라"는 말을 했다. 첫 번째 봉투에는 장성택이 시내를 방문하는 기회가 생길 때 다른 쪽 봉투에 들어 있는 쪽지를 그에게 접근해 몰래 전해주라는 지시가 적힌 쪽지가 나왔다. 두 번째 봉투에서 나온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장성택, 지금도 늦지 않았다. 조국의 반역자가 되겠는가? 아니라면 남한에 남아라!”

엘리트 계층 탈북민 출신인 김길선 기자는 유튜브 채널에서 황장엽에 대해서 북한 주민들을 노예화한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김길선은 같은 탈북자이지만 황장엽이 김일성-김정일에만 반대할 뿐 주체사상을 포기하지 않아서 황장엽에 대한 실망감을 표한 바 있다.

그는 북한 내부의 실상을 이야기하며 그 예시로 도시락 이야기를 했는데 북한에서는 염장무 하나를 갖고 3찬을 만든다고 했다. 깍둑썰기, 어슷썰기, 채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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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파공파 21세 엽(燁) 항렬.[2] 1938년에 왜 굵은 글씨를 해났는지 궁금하다면 아래 형제자매의 출생년도를 봐 보자.[3] 황장엽이 무려 75세에 본 늦둥이 아들이다. 이 아이가 불과 12살이었을 때 황장엽이 사망했다.[4] 의장이 겸직했다.[5] 근데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임명 이전에 황장엽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었음으로 어디 가서 무시당할 지위는 아니었다. 기자 클럽에서 북한에 관심 없었던 모양(...)[6] 황장엽의 며느리가 김경희의 시조카가 되고, 김경희는 김일성의 딸이니 서로 사돈 간이 되는것이다.[7]황해북도 승호군 광정리 삼청동[8] 원래는 42년 3월이었으나 태평양 전쟁 때문에 졸업식을 앞당긴 것으로 추정된다.[9] 2주간 지원병훈련소에서 훈련까지 받았다는 사실로 보아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에 응하여 일본군에 입대하는 걸 거부하여 이 대신에 징용된 걸로 보인다. 이들은 응징학도(應徴學徒) 혹은 징용학도(徴用學徒)로 불리었으며 2주간 경성의 지원병훈련소에서 군훈련을 받다가 전국 각지의 철도공장과 시멘트공장으로 차출되어 해방되기 전까지 노역에 종사했다.[10] 1997 MBC 황장엽 망명 뉴스[11] 김영삼은 재야인사 시절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에게 시달렸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기 때문에 당연히 정보기관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다. 특히 그랬던 정보기관이 자신이 하는 대화를 듣겠다고 집으로 들어온다면 불같은 성격을 가진 김영삼은 당연히 화를 냈을 것이다.[12] 기관원은 YS의 격노한 모습을 보고 사색이 돼서 바로 자리를 피했다고...[13] 이 시기 하태경 의원이나 김성민 북한자유방송 대표 등 대북관련 활동을 하는 인사들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14] 암살 미수 사건 이전에도 협박을 여러 번 받았었다. 암살 임무를 받고 북한에서 직파된 2인조 공작원들이 방첩당국에 체포되거나, 모 종북 단체에서 황장엽 사진에 빨간칠을 하고 도끼를 박아서 황장엽에게 보낸 사건 등...[15] 북한에서는 이를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우겨댔다. #[16] 중국, 특히 중화민국의 국경일 쌍십절이며 1945년 북조선 분국 및 로동당 창건일이다.[17] 재향군인회 등지에서 한동안 황장엽이 가택연금되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애초에 황장엽이 경호를 받은 시기가 국민의 정부 때부터였으니 헛소리에 불과하다.[18] 2023년 7월 현재는 우민끼가 수차례 개편되는 과정에서 과거 기사들이 대거 지워져 우민끼에서는 찾을 수 없으나 해외의 종북단체에서 퍼나른 글들은 남아있다.[19] 이와 판박이로 나치 독일프리츠 하버유대인 출신이라고 사실상 추방시킨 것과 다를 바 없는 주제에(정확히는 하버는 독일에 그대로 두려고 했지만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본 하버가 스스로 독일을 떠났다) 하버가 개발에 참여한 치클론 B는 '유대인의 발명품'이라고 폐기하기는커녕 유대인 학살에 써먹었다. 심지어 이쪽에서는 나치가 북한보다 훨씬 양반인 게, 하버는 나치 집권 후 거의 반년 만에 망명을 떠났던 터라 나치는 하버를 제대로 써먹은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20] 완전통제구역의 유일무이한 생존자이다.[21] 김철호 명성그룹 창업주의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