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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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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長燁
1923년 2월 17일 ~ 2010년 10월 10일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2.2. 조선노동당 입당과 모스크바 유학2.3. 숙청위협과 탈북2.4.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증언2.5. 사망
3. 가족4. 논란
4.1. 현충원 안장 논란4.2. 북한망명정부 논란
5. 기타

1. 개요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조선로동당 비서와 제 6, 7, 8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1]으로 재직하다가 탈북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정치인이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과 유사한 직책인데[2]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에서는 최고 의결기구의 의장이 국가원수로 대우받으므로 그 실제 위상은 더 높다.[3] 다만,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지위는 시기에 따라 좀 달랐는데 1972년부터 1983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재직한 황장엽의 경우, 북한이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김일성을 그 자리에 앉혔으므로[4] 이 당시에는 상임위원장이 아닌 상설회의 의장으로 불렸으며 명목상으로도 국가원수로 대우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1948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두봉이나 최용건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대접받았음은 물론, 김일성 사후 1998년부터 2019년까지 21년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을 유지했던 김영남의 경우 1998년 ~ 2009년까지 헌법상의 국가원수였고[5] 2010년대에도 김정은에 이은 부동의 권력서열 2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황장엽이 얼마나 엄청난 직책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황장엽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을 때 외국 언론이나 정보기관의 동아시아라인이 발칵 뒤집힌 바 있다.
"황장엽이란 사람이 북한의 새 상임위원장이랍니다!"
"그런가? 그런데 황장엽이 누구야?"
"모릅니다. 아까 기자 클럽 다 뒤져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대요!"
하지만 그 무엇보다 북한에서 사는 동안 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행적은 주체사상의 이론을 정립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망명을 두고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나치 독일괴벨스가 망명한 것과 같다'고 표현했는데, 둘 다 자신들의 독재자를 위해 이론을 정립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하면 적절한 비유다.(다만 북한에는 김기남이라는 북한판 괴벨스가 있다.)

황장엽은 김일성의 조카 사위로 따지자면 종친에 해당하긴 한다.

2. 생애

2.1. 어린시절

황장엽은 1923년 1월 23일, 평안남도 강동군 만달면 광청리 삼청동에서 황병덕과 이덕화 사이의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황장엽의 회고에 따르면 중산층 정도의 집안으로 아버지는 마을 훈장에 2000평 정도의 밭과 고향집에도 빌려주는 밭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 덕분에 무학자가 넘치던 시절 황장엽과 형 황승엽은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평양고보 졸업후 원래는 사범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지만 적록색맹으로 탈락하고 1937년 평양상업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주산실력을 인정받아 4학년 때는 식산은행에서 열리는 전 조선 주산 대회까지 나가서 우승을 했는데 황장엽의 회고록에서 따르면 이때 식중독에 걸려서 몸고생을 했음에도 운좋게 우승을 했고, 이 요행을 두고 황장엽은 "정신을 강화시키려면 육체를 약화시켜야 한다"라고 마음을 고처먹었고 이 개똥철학에 따라 단식이나 냉방에서 자는 등 육체를 굴려먹었고(출처:황장엽 회고록, 1장) 나중에는 2000만 인민에게도 자신의 개똥철학을 강요한다.

그리고 1941년 12월[6]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2월 27일에 도쿄로 유학, 주오대학 야간 전문부 법과에 입학시험을 합격하고 입학한다.

2.2. 조선노동당 입당과 모스크바 유학

삼척에서 징용살이를 하던 황장엽은 광복을 맞이하게되고 45년 8월 20일 고향 평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황장엽은 모교인 평양상업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학교부지를 옮겼다가 김일성 종합대학에 부지를 빼앗기고 평양상업학교가 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는 등 여러 과정을 지켜보다가. 1946년 11월 15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한다. 그뒤 황장엽은 대학생 출신 때문인지 석달만인 47년 2월에는 세포위원장으로 승진하고, 1년뒤인 48년 2월에는 조선노동당 핵심간부를 양성하던 중앙당학교 이론반에 입학한 뒤, 그 해 8월에는 김일성 대학교 예비과에 입학하는 등 당의 참모 교육을 착실히 받는다. 그러던 중 49년에는 모스크바대학교의 유학생으로 낙점을 받는다. 그렇게 황장엽은 49년 10월부터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연구원에 입학했고 53년 11월까지 모스크바에서 유학을 한다. 여기서 훗날 아내가 되는 박승옥도 만났고 52년에는 헬싱키 올림픽에 대령의 통역병으로 참여했다.

53년 11월에 황장엽은 평양으로 귀국한다. 이때 한국전쟁으로 평양이 토굴만 즐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황장엽은 김일성 대학 철학 강좌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2.3. 숙청위협과 탈북

황장엽 망명 사건 항목 참조.

2.4.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증언

1997년에 망명한 황장엽1997년 7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자신은 핵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 확산 방지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노동당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고 이미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했다는 것(1997년 당시)으로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렇게 알고(믿고) 있다"고 폭로하여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KBS, 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1985년 당시 소련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특정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북한이 그러한 핵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2001년 7월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을 통해 미국으로 재망명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확인됐다. 자신과 함께 한국에 온 김덕홍전 노동당 자료실 부실장과의 서한이 발견되었다.#

2.5. 사망

2010년 10월 10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추정된다. 사망 당시 따뜻한 욕조 안에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정황상 자연사로 추정하고 있지만 그 전에 암살 미수 사건(이전에도 협박을 여러 번 받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 암살조가 붙잡힌 사건이라든지, 모 종북 단체에서 황장엽 사진에 빨간칠을 하고 도끼를 박아서 황장엽에게 보낸 사건)도 있었기에 혹시나 하여 사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했다. 같은 날 북한에서는 노동당 65주년에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3대 세습이 확정되고 가도에 오르게 된다.[7]

황장엽의 경호는 국무총리 이상급이었다. 국가정보원이 직속으로 경호하였다.[8]

사후 한국에서 일반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추서받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의 네티즌과 정치인들 사이에 과연 그를 이렇게까지 대우할 이유가 있는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9]

그의 사망 이후 북한 홍보용 모 웹사이트에서는 '황가 놈'이 '하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다가 글을 지우고 다시 '노동당 행사날 죽었는데 우리 행사의 우렁찬 소리를 듣고 죽은 거 같다.'는 연이은 비난을 퍼부었다.[10]

3. 가족

망명할 때 가족들은 모두 북한에 두고 왔다. 부인 박승옥씨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부인은 북한 유수의 출판사이자 외국 책을 북한에 번역하는 외국문출판사에서 일했으며 아들은 외교관, 큰딸은 외국문학을 전공한 학자, 둘째딸은 의대를 졸업한 의사였다. 직계 가족들의 안위에 대해서는 '숙청되었다', '자살했다', '그래도 살아있다' 등등의 다양한 설이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단 부인은 그의 망명 직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식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탈북자인 김현식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맏사위는 이혼을 강요당했으나 이혼하지 않고 같이 수용소에 들어갔고, 둘째 사위는 이혼당했으며 며느리 또한 이혼당해 아이(황장엽의 손자들)들을 빼앗기고 추방되었다고 한다. 탈북자인 전 국가안전보위부 중좌 출신의 목사 김용의 증언에 따르면 황장엽의 조카는 북창 수용소에 끌려온 다음날 자살했다고 한다.[11]

그의 친척들 또한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자의 수만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민경부대에 있다가 비무장지대를 넘어 탈북한 주성일씨의 회고에 따르면 황장엽의 먼 친척 되는 어떤 군인은 "당에 충성하던 내가 왜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황장엽 비서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 가야 하느냐"고 저항하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최근 먼 친척 3명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탈북한 이후 교수 출신인 김숙향이란 여성을 양녀로 삼았으며, 비서로 두고 있던 엄씨와 결혼없이 슬하에 아들을 두었다. 당시 70대였던 황장엽과 30대 후반이었던 엄씨의 나이차는 자그만치 38세에 달한다. 현재 남한의 처 엄씨와 아들은 미국에 체류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엄씨는 논현동 대도식당과 대도식당이 위치한 빌딩을 소유중이다.

수양딸은 사실혼 관계 있는 여자에게 아버지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했다. 그리고 2012년 10월 탈북자들에게 100억원 이상 돈을 사기친 혐의로 체포되어 법정 구속되었다.

황장엽의 수양딸은 2015년 3월 27일 징역 5년이 확정됐다.

2017년에는 황장엽의 친척이 북한에서 내란모의를 하다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있다.황장엽 친척 처형

4. 논란

4.1. 현충원 안장 논란

황장엽은 국립묘지법상 훈장을 받거나 한국전쟁 등에서 이룬 업적 등이 없어 현충원에 안장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후 이틀 뒤인 10월 12일 이명박 정부가 훈장 추서 등을 추진하면서 일반 민간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인 1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고, 국가보훈처는 그 다음날 현충원 안장을 결정해 2010년 10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청와대 임태희 비서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황장엽 선생은 역사의 아픔이나 고인에 대해 생전과 사후 모두 국가가 책임지고 지켜야 한다. 안전하게 영면하실 수 있게 조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사실을 전하였으며, 맹형규 행자부 장관은 "북한의 실상을 세계에 알려 안보 태세 확립에 기여하고, 북한 민주화 발전과 개혁개방에 헌신한 것을 인정해 무궁화장을 추서했다며 국무회의에서도 이의 없이 훈장 추서가 결정됐다"고 밝혔다.#

10월 11일 김무성 원내대표는 최고 위원회의에서 "황장엽 선생의 영면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표한다며, 북한 권력의 거짓과 잔혹함, 폭정에 신음하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면서 결단을 감행한 황 선생의 희생정신은 오늘날 우리 정치권의 리더십이 꼭 귀감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라고 평가하며 장례에 최고의 예우를 다해야 되겠다"고 덧붙였다. 나경원 최고위원은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10년 동안 (황장엽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며, 활발하게 행동하려 했으나, (지난) 정부의 압력 때문에 조용히 지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라며 전 정권을 비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의 네티즌과 정치인들 사이에 과연 그를 이렇게까지 대우할 이유가 있는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안장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민주당 등 야당 측에 의해 현충원 안장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다. 민주당 정세균 의원은 "이 분은 주체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고 오늘날 북한 현실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남한에 와서 주체사상을 부정한 바가 없다"면서 현충원 안장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은 "김일성 유일사상을 만들고, 노동계급 지배를 수령의 독재를 바꿔 놓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전향도 안 한 분이 대한민국 현충원에 안장된다? 보수우익이 김일성주의자, 주체사상가의 장례를 주관한다니 귀한 일"이라고 트위터를 통해 비판하다.#

우익 군사평론가로 유명한 지만원은 "황장엽이 김정일과 관계가 악화되자 남한을 피신처로 이용한 사람이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 황장엽은 귀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망명자 신분을 고집해 왔던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며 황장엽의 현충원 안장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장은 추서되었고, 10월 14일 황장엽의 안장식이 거행되어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영결식과 장례식장에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비롯한 정, 관계 인사들이 참석하였으나,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의 관계자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4.2. 북한망명정부 논란

그가 대한민국에 실망하여 북한망명정부를 수립하려 한 사실이 사후에 알려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5. 기타

철학가의 면모를 보면, 1997년 리영희와의 대담을 가진 적이 있으나, 리영희의 회고담인 대화편에서 그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용옥이 한때 그와 주체사상을 논의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으나 그 다음 소식은 없었다. 그리고 극우 평론가로 유명한 지만원에 의해서 1980.5.18 음모론의 광수로 지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지만원/논란과 비판 참조.

일부 탈북자들에게도 미움을 받기도 했었다. 실제 어느 탈북자남한와서 황장엽의 글을 보고 "무슨 지가 반공투사랍시고 설레발 치는 거 보면 구역질이 난다. 북한에서 얼마나 호강하던 작자인데 마치 자기가 북한에서 나중이나마 고생했다고 써대는 거 보니 어이없다."고 비판한 적도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북한 실체에 대해서 정치적 숨겨진 이야기라든지 여러 가지로 알렸다는 점, 북한정권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정립한 사람이 탈북하여 남한으로 왔다는 점에서 북한정권의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는 하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남북한간의 체제경쟁에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한, 즉 '남한 정부'를 긍정적으로 봐야 할 근거일 뿐 이 인물을 긍정적으로 볼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1] 정확히는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2] 엄밀히 말하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아닌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국회의장과 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폐회 중에 그 권한을 행사하는 상설조직으로 입법기능뿐만 아니라 행정기능의 상당부분 또한 행사하는 기구로, 최고인민회의 그 자체보다 오히려 권한이 막강하다.[3] 행정수반으로서의 역할은 그 국가의 공산당 서기장이 담당한다.[4] 이와 비슷한 체제가 현재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중국/정치항목 참조.[5] 물론 실질적 국가원수는 당연히 당권군 통수권을 가진 김정일이었으나 북한헌법상으로는 김영남이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직책에 있었다. 따라서 6.15 남북공동선언문에도 북한에서는 김영남으로 하여금 서명하게 하려 하였으나 남한 측에서 김정일이 서명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끝에 김정일이 직접 서명하게 되었다.[6] 원래는 42년 3월이었으나 태평양 전쟁 때문에 졸업식을 앞당긴 것으로 추정된다.[7] 중국, 특히 중화민국의 국경일 쌍십절이며 1945년 북조선 분국 및 노동당 창건일이다.[8] 국가정보원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은 청와대 경호실에서 파견되었다. 한동안 이 분을 가택연금 시켰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애초에 황장엽이 경호를 받은 시기가 국민의 정부 때부터였으니 헛소리다.[9] 단, 이런 파격적인 대우는 북한에서 망명하면 이 정도로 대접해 준다는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10] 그러나 이런 내용으로 글을 올린 것 자체가 황장엽이 암살이 아닌 자연사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 된다.[11]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전해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