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31 09:21:03

윤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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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윤기복.jpg
이름 윤기복
출생 1926년 8월 6일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2003년 5월 8일 (향년 76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국적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1926~1945)
파일:북한 국기.svg 북조선인민위원회(1946~1948)

[[북한|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틀:국기|
행정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틀:국기|
속령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8~2003)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학력 서울수송보통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중퇴)
교토제3고등학교 (졸업)
김일성종합대학 (통계학과/졸업)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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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정치인, 경제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26년 8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3년까지 한국에서는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고 파악하고 있었으나 정작 윤기복 사망 이후 북한에선 서울 출신이라고 공인해주었다. 1939년 서울 수송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진학했으나 4학년만 수료하고 중퇴했다. 신형식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윤기복은 계동에 살았는데, 공부를 굉장히 잘해서 신형식이 같이 공부한다고 윤기복 집에서 자고 오기도 했지만, 집안은 가난해서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고 한다. 1972년 8월, 남북 적십자회담 때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경기고보 중퇴 후 일본 교토 제3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 문과에 편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45년 12월 겨울방학 때 친구인 이항진에게 그냥 고향에 가서 교사나 하겠다면서 대학을 그만두고 월북, 만주의학전문을 다녔다고 하며, 김일성종합대학 통계경제학과를 1948년 졸업했다. 이후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통계학을 전공하였다. 1953년 졸업 이후 귀국하였다.

1956년 인민경제대학교 부교수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겸 중앙통계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보통교육상에 임명되었다.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재정상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선 어찌된 일인지 탈락했다. 1969년 7월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며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준택의 뒤를 이어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최재우에게 물려줄 때까지 재임하였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1971년 11월에 중앙위원회 과학교육부장에 임명되었다. 대남 문제에도 많이 관여했는데, 1972년 8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부위원장 직함으로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여했다. 정치자문 위원으로 대표단을 관리했으며, 남한에 와서 경회루에서 만찬을 대접받았으나 봉건왕조가 인민의 고혈을 착취해서 세운 건물이라고 맹비난하는 등 적대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남북적십자회담 참석을 위해 남한에 왔을 때, 경기고등학교 40회 동창이었던 내과의사 이항진 씨가 그에게 공개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민주공화당 대변인이었던 신형식 의원도 윤기복과 동기동창이라서 그와 만남을 가졌다. 9월 16일에 북으로 돌아가는 윤기복에게 경기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동창회 뱃지를 전달하였고 윤기복은 사의를 표하며 동창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다. 1972년 11월, 이후락의 답방 때 양형섭과 함께 그를 환영하였으며,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자 대의원에 재선, 상설회의 의원 및 법안심의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5기 8중전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비서국 비서에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1974년 9월, 김경인 장의위원,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상설회의 의원, 법안심의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78년 12월에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비서국 비서에 유임되었다. 1981년 5월 조평통 부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법안심의위원장 및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3년 6월, 6기 7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및 비서에서 해임되고 평양시 인민위원장으로 조동되었으나 1985년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다시 중앙의 경제를 맡아보게 되었다.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예산심의위원장,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다.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89년 최덕신 장의위원에 위촉되는 한편 범민족대회 위원장에 임명, 임수경 석방투쟁을 지휘하였으며, 1990년 1월, 조선로동당 6기 17중전회에서 김중린의 후임으로 대남비서에 임명되기도 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심의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범민련 출현 이후 범민련 북측본부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1년 해외동포 원호위원장을 맡았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7월 홍기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등을 맡았다. 1991년 11월과 4월, 김일성의 특사로 서울을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였으나 성과를 보진 못했고 1992년 12월, 다시 과학교육비서로 이동하여 쿠바에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대남비서 해임에 따라 김용순에게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심의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93년 10월 29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중앙인민위원회 경제정책위원장에 임명됨으로 다시 경제문제로 돌아왔으나 김일성 사후에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정권기관으로 조동됨에 따라 1993년 12월, 6기 21중전회에서 당 비서에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99년 7월, 김병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9년 9월 3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당,단체련합회의에 조국전선 의장 자격으로 참석하면서 조국전선 의장에 위촉된 것이 확인되었다. 2000년 4월 11일,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북측본부 위원장으로 위촉되었으나 이후 활동은 보이지 않다가 2002년 4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2003년 5월 8일 오전 4시 30분, 병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연명으로 "당과 국가의 주요직책에셔 로래 조국과 인만앞에 오래동안 우리 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경제건설을 위하여, 주체의 사회주의제도의 공고발전과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투쟁하였다."라고 윤기복을 칭송하였다. 부고에서 이례적으로 그의 생일과 고향이 언급되었다.

3. 여담

  • 1991년, 문선명이 방북했을때 그를 맞이했다. 당시 문선명의 패기에 대해서는 문선명 문서 참조.
  • 여동생 윤기정 역시 정무원 재정부장을 역임했으며 북한에서 유일한 여성 재정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윤기정은 2010년에 사망했다.

4. 참고문헌

  • 돈 오퍼도퍼, 로버트 칼린, 두 개의 한국(고양: 도서출판 길산, 개정판 4쇄, 2015).
  • 통일부 정보분석국, 북한의 주요인물 2003(서울: 통일부,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