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모스크바대학에 유학했다.성분이 좋았는지 그의 누나는 김일성 관저의 식모반장으로 김성애와 친한 사이였으며 박수동 본인은 김영주의 측근이었는데, 김영주는 당시 대학에 다니던 조카 김정일의 교육을 위해 박수동을 김일성종합대학 당위원장으로 배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문헌들과 동시기 로동신문 보도를 보면 한수동과 혼동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1968년 6월, 량강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 7월에 황해남도 책임비서로 이동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72년에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이동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아파서 골골대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와병 중인 김영주를 대신하여 조직지도부장을 대행했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일본 언론은 그가 김영주의 뒤를 이어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박수동 본인의 수기에 따르면 자신이 1973년 1월 시점에서 한 부서의 부장이었다고 하는데, 이를 볼때 적어도 당 부장을 지낸 것은 확실해 보인다. 1973년부터 경제 부문의 관료주의, 요령주의, 형식주의, 보수주의, 경험주의가 너무 심하다고 김일성이 비판하면서 당중앙위원회 지도소조를 조직하여 전국의 공업 실태를 조지고 3대혁명소조운동 전개 실무를 담당했다는 것을 보아서는 조직지도부장을 했던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73년 9월에 김정일이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면서 물러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2월 25일 경공업대회 주석단에서 17위를 차지, 정준기와 김영남의 사이에 호명되면서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974년 10월 즈음에 비서에 선출된 것으로 보이며 1975년 초부터 일본 언론은 그가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고 보도했다. 현성일 역시 그가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근로비서에 선출되는 등 70년대가 전성기였다고 서술했다. 하지만 1975년 9월 이후로 공개석상에서 실종, 10월에 대남 사업의 실패 문제로 인해서 김중린, 류장식과 함께 큰 비판을 받고 강등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7년 9월, 중앙선거위원에 위촉되면서 다시 등장,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70년대 후반의 보도 서열을 보면 정치위원회 후보위원 급의 서열을 기록하였다.[1]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는 한편 비서국 비서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중앙이 아니라 지방으로 밀려나 허정숙에게 근로단체비서를 넘겨주고 1981년 12월,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으로 내려갔다. 비서에서도 얼마 안가서 해임됐는지 최현, 김일, 오백룡 장의위원 등 주요 국장 장의위원에 위촉되지 못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법안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84년 1월,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상설회의 의원에 보선되었다. 1985년 6월, 변창복의 뒤를 이어 농업근로자연맹 위원장에 선출, 농근맹 대표단장으로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를 방문했다. 1986년 4월, 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 조국전선 의장을 겸하였고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3월, 농근맹 대표단장으로 폴란드와 시리아를 다녀왔다.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2월, 중앙선거위원에 위촉, 4월에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되었다. 1990년 10월, 농근맹 대표단장으로 쿠바를 다녀왔으며 1993년 초까지 활동을 지속하다가 해임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7월, 방학세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4년 5월 25일에 사망하였는데 북한은 일체의 부고를 발표하지 않았다. 다만 평양방송같은 다른 수단으로 공표는 하였는지 동시기 남한 언론들도 그의 죽음을 파악하였다.
이후 시신은 농근맹 중앙위원장 직함으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
- 김현식, 손광주, 다큐멘터리 김정일(서울: 천지미디어, 1997).
- 신평길(박병엽의 가명), 김정일과 대남공작(서울: 북한연구소, 1996).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 (最新)北韓人名辭典(서울: 北韓硏究所, 1996).
[1] 가령 1978년 7월 26일, 국제우호전람관 개막식의 보도서열을 보면 박수동의 서열은 김만금과 허담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