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1-20 17:37:54

한성룡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경제 테크노크라트.

2. 생애

1925년 2월 16일,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 밑에서 복무하다가 1938년 무산전투에서 전사한 빨치산 중대장 한홍권이었다고 한다. 해방 이전에는 일반 노동자로 일했지만 이런 좋은 성분 덕분에 해방 이후인 1946년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 김일성종합대학 기계공학과에 진학하였고 졸업 이후 공장 기사장에 부임, 동부 전선에서 포탄 보급을 맡아 금강산을 국군에게 빼앗기지 않게 필사적인 포탄 생산 똥꼬쇼를 했다 카더라. 이때 김일성에게 포탄 생산을 늘리겠다고 호언장담하여 김일성의 눈에 들게 되었다. 김일성은 이후에도 "잊을 수 없고 사랑하고 싶은 일군, 믿음이 가고 정이 가는 나의 친구"이라고 한성룡을 추켜세웠다. 종전 이후 1954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공대로 유학하였다.

1957년 귀국 이후 희천기계공장 기사로 부임, 1960년 당중앙위원회 중공업부 지도원으로 배치된다. 1965년에 중공업부 과장, 1968년에 중공업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였고, 1970년 제2기계공업성 부상, 1971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리근모의 뒤를 이어 제2기계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정무원 선박기계공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이무렵 한성룡이 주관과 독단으로 사업하여 나라의 국방공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신소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에 김일성이 한성룡은 당과 수령을 배반할 사람이 아니라고 실드를 쳐주었다고 한다. 그 신소는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한성룡을 음해한 것이었다나 뭐라나. 이후 1973년 함흥시 책임비서를 지냈으며 이후 1980년대 남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1980년 이전까지 제2경제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81년 김일성이 4대 자연개조사업을 선포하면서 렴재만, 김윤혁 등 테크노크라트들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한성룡의 경우에는 자강도 행정경제지도위원장으로 부임하였다.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6년 12월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1987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75세 생일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11월 조선로동당 6기 14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 12월 6기 15중전회에서 연형묵이 정무원총리로 조동됨에 따라 연형묵의 후임 비서로 선출되었다. 흥남비료연합기업소의 현대화, 대형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5월 9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90년 5월 조선로동당 6기 18중전회에서 최광과 함께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1월, 조선로동당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또 다시 수훈받았음으로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3년 12월,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에서 해임되고 박남기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4년 3월, 당중앙위원회 경제정책검열부장에 임명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10기 1차 회의에서 예산위원장에 유임되었으며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예산위원장은 박남기에게 물려주고 은퇴했다.

1998~2004년 사이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많이 수행하는 등 김정일 정권 초기의 가장 무게감 있는 경제 테크노크라트 중 한명이었으나 2004년 8월 김보현 탄생 133주년 화환 진정식 참가를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2009년 2월 2일에 사망하였는데, 김정일에게 뭔가 밉보였는지 현직 정치국원이며 비서국 비서인 그의 죽음에 대해서 북한 언론은 일체 보도를 하지 않았다. 20여년간 경제비서로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탓에 김정일에게 책임추궁을 당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서 한성룡은 갑자기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2012년 6월, 한성룡의 유가족들이 애국렬사유자녀로 인정받았으며 2013년 8월 19일자 로동신문은 <조국과 인민이 기억하는 일군을 키우신 위대한 스승의 손길>이라는 기사를 게재, 2면 전체를 할애하여 한성룡의 삶을 칭송하였다. 2016년에도 한성룡의 생애를 다룬 영상편집물이 만들어지고 한성룡을 본받자는 기사가 쓰여지는 등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다시 떠오르는 인물. 시신도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이 확인되었다.

2021년 6월 30일자 로동신문도 <일편단심 당과 수령을 받든 충신들의 한생에서: 수령의 의도는 결사관철하여야 할 지상의 명령이다>라는 기사를 통해서 한성룡의 6.25전쟁 중 일화를 우려먹으며 그를 칭송했다.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북한의 주요인물 2010(서울: 통일부,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