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2-10 22:44:37

김복신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흔치 않은 여성 정치인으로 최초의 여성 부총리가 되었다.

2. 생애

1925년 신의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인민들 속에서 90권에 김복신이 남긴 수기에 따르면 1992년 4월에 65세였다고 하니, 1927년생으로 보인다. 여중을 다니다 중퇴하였으며 방직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해방 이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신의주 제지공장 직장장을 하다가 방직공장 부지배인까지 했다. 1946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 1기에 입학, 1950년에 졸업했으며 1954년에 중앙당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1958년 6월, 길주펄프공장 지배인으로 배치되었는데 일을 잘 하였는지 1958년 9월에 경공업성 부상에 이르렀다.

1960년 7월, 중앙위원회 경공업부 부부장이 되었으며 1961년 5월, 내각 경공업성 부위원장이 되었다. 1966년 10월, 평양시 지방산업총국 부총국장을 지냈으며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8년 평양종합피복공장 지배인이 되었으며 1971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방직공업상에 임명되었다. 1972년 7월, 북한-이라크 친선협회 위원장 및 조선피복가공기술협회 위원장을 맡았다.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에 가서 소련 원조를 뜯어내는 재주가 일품이었으며 이 때문에 고속승진을 거쳤다고 한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정무원 경공업위원회 방직 및 피복공원 총국장이 되었다. 피복총국장 재직 시절 소련에서 경공업 원료 제공을 거절하자 다른 성원들은 다 귀국하는데 홀로 책임지고 재료를 얻어오겠다고 소련 내각 경공업담당 부총리 집무실 앞에서 하루종일 버티면서 농성했는데, 화난 소련 부총리가 북한에서 맨날 값도 거의 치르지 않으면서 양심이 어떻게 이렇게 없을 수 있냐고 성을 내면서 안나가면 쫓아내겠다고 위협했으나 김복신은 들은 척도 안하고 버텼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 외교적 항의가 들어왔으나 김일성은 오히려 김복신이 이악하다고 칭찬했고, 마침내 김복신은 소련에서 원료까지 뜯어오는데 성공했다.

1981년 12월, 정무원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에 전격 임명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인선에 없었는데 부총리 임명 이후 중앙위원에 보선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1982년 2월, 7기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4월의 7기 1차 회의에서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3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8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중간에 부총리에서 한번 해임된 것으로 보이는데 1983년 12월, 소련으로 가는 경공업 대표단장을 맡았을때 그저 경공업위원장으로만 보도되었다. 1984년 1월, 최고인민회의 7기 3차 회의에서 강성산 내각이 출범하면서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에 다시 임명되었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5년 10월 1일, 당정연합회의 결정에 따라 경공업위원장 대신에 무역위원장을 맡게 되었으며 무역위원회가 대외경제위원회로 개편되면서 대외경제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조선국제합영회사 이사장을 맡았고 12월 8기 1차 회의에서 부총리 겸 대외경제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87년 5월에 북한 경제대표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녀를 본 소련 총리 니콜라이 리즈코프가 "그 여자가 악마처럼 노는 것은 보기가 싫지만 그 이악성 하나만은 본받아야한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12월에는 불가리아를 방문했다. 1988년 6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대외경제위원장에서 해임, 경공업위원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런 악과 깡 덕분에 김정일의 측근 그룹에 합류했던 모양인데 1991년 12월, 김정일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 측근들과의 기념사진 촬영 때 김기남, 문성술, 권희경, 최광, 후지모토 겐지 등과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9기 1차회의에서 부총리 겸 경공업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91년 1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방문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하지만 개판인 북한의 경제상황은 김복신이 그저 악을 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고, 1992~1993년 사이에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다. 통일부 자료는 1992년 12월, 조선일보 보도는 1993년 6월로 파악하고 있다. 시기상 1992년 12월, 6기 20중전회에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홍성남 내각이 출범하면서 부총리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다른 부총리들이 실종된 것과 달리 내각 사무국 명예참사로 남아서 공개활동을 계속했다. 2003년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2009년 9월, 김정숙 사망 60주기 여맹원들의 회고모임에 참석한 것을 마지막으로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는 탈락했으며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해임됐다. 이미 1998년 이후로는 명예직을 맡고 있었으니 뭔가 딱히 잘못해서 숙청된 것으로 보이진 않고 나이가 들어서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소개편집물이나 여러 기념보고회 정도는 나올법한데 감감무소식이고 정권 원로임에도 장의위원 위촉도 되지 않는 것을 보면 말년에 사고를 쳤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2022년, 김일성 탄생 110주년 기념 조중친선 화보집에서 김복신이 나온 것을 봐서는 숙청당한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3. 참고문헌

  • 고영환, 평양25시(서울: 고려원, 1992).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북한의 주요인물 2011(서울: 통일부,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