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3764><colcolor=#fff> 제27대 국립통일교육원장 고영환 高英煥 | Ko Yeong-hwan | |
출생 | 1953년 7월 14일 ([age(1953-07-14)]세) |
자강도 강계시 서산리[1] | |
본관 | 제주 고씨 |
가족 | 아버지 고필용 (1919년생), 어머니 문기섭 (1923년생) 형 고방남, 고영철, 남동생 고영송 누나 고춘희, 여동생 고명희 전처 김연옥, 딸 고은정, 아들 고경림 (남한 가족) 부인 김재숙, 자녀 1남 1녀출처 |
학력 |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 졸업) 평양외국어대학 (프랑스어문학 / 학사) |
경력 | 북한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담당 보조지도원 주 자이르 북한 대사관 3등서기관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담당 지도원 정무원 외교부 중부아프리카담당과장 주 자이르 북한 대사관 참사관 주 콩고민주공화국 북한 대사관 참사관 통일준비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위원 한국관광대학교 겸임교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장 통일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통일부장관 특별보좌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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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전직 외교관, 대한민국의 공직자. 2024년부터 국립통일교육원 원장을 맡고 있다.1953년에 북한 자강도 강계시에서 태어나 외교관이 된 후 김일성의 통역을 맡아 승승장구하다가, 김씨 일가에 관한 실언(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처형 영상을 본 직후 "우리 조선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인데..."라고 발언)[2]으로 인해 귀국 지시를 받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잠적 후에, 1991년에 홀로 대한민국으로 탈북했다.
북한에 있었을 때는 정무원 외무성에서 과장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지역의 외교관을 지냈다. 탈북한 이후에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 부원장을 지냈다. 원래 없던 직책이었는데, 2016년 직제 개편을 시행하면서 부원장직이 만들어져서 초대 부원장으로 취임했다. 정년퇴직 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과 국방부 산하 한국군사문제연구원(KIMA) 객원 연구위원이며 한국관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은퇴 이후 연구원 현직일 때보다 활발하게 방송에 출연한다. 2021년 개편 이후 채널A 예능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2023년에 통일부장관 자문기구인 통일미래기획위원회에 초빙되었으며, 이듬해인 2024년에 국립통일교육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2. 생애
2.1. 학원 시절까지
자강도 강계시 서산리(이북5도위원회의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영동)에서 조선로동당 간부급 직책을 맡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휴전 직후 아버지의 인사 이동으로 개성시로 이사하여 주로 자란 곳은 개성이다.인민학교(한국의 국민학교)[3] 졸업 즈음에 아버지의 권유로, 그리고 외교관이 되면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교관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 후 당의 간부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평양외국어혁명학원(한국의 중고등학교를 합쳐놓은 외고와 비슷하다) 불어과에 전국에서 모인 4,000명 중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80명에 들어 합격했다. 당시나 현재나 평양외국어학원은 부상급(차관급) 이상 토대만 지원이 가능했는데 아버지가 차관급으로 대우 받는 개성시 인민위원회장[4]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평양외국어 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갑산파 숙청 사건이 벌어지는데, 고위급 자제들이 모여있던 학교였던만큼 자신의 같은 반 친구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 가는 모습을 교실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고급 소련제 승용차에 양복 입은 남자 둘이 학생을 한 명씩 데려갔는데, 어디 온천이나 바다로 놀러갔나 했지만 보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 때가 되어서야 숙청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렇게 2년여 간 불어과 학급 12명 중 5명이 차례로 사라졌다고 한다. 쾌도난마에서 이 일화를 밝혔는데, 울지 않았냐는 박종진의 질문에 울게 되면 자신도 동조하는 것이므로 잔뜩 쫄아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고 회상했다.
졸업 후에 1972년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진학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게스트로 자주 등장하는 강명도씨가 같은 과 6년 후배이며,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가 같은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괜찮은 성적으로 5년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졸업하였다.
2.2. 아프리카 생활
1979년부터 북한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으로 첫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근무했을 때만 해도 김일성의 열렬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남북통일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점차 외교관 생활을 하다 보니 북한 정권의 실상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고 그토록 미워했던 한국 외교관도 같은 동포로서 생각하며 적대감이 많이 누그러지고 남한의 경제 발전을 느끼게 되면서 고영환은 점차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colcolor=#242748> 김일성을 접견한 고영환 |
<colcolor=#242748> 방북한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블레즈 콩파오레를 수행중인 고영환 |
특히 북한 외교관들은 기껏해야 선물로 인삼주를 받는데에 비해 남한 외교관들은 포니 자동차를 선물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남한 외교관들이 받는 대우에 더해 남한의 비약적인 공업 발전이 믿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권력의 곁을 수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이 저지르는 각종 부정축재를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특히 그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던 사건은 1979년, 피로회복관 화재 사고이다. 피로회복관은 겉으로는 '장군님의 피로를 풀어드리는 시설'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김정일의 온갖 유흥과 향락을 위한 시설이 준비된 퇴폐적인 건물이었다.[6] 이 건물의 건설에 북한 외교관들도 동원되어서 해외에서 건설 자재들을 들여오곤 했는데, 완공 단 하루를 앞두고 인화성 물질로 가득찬 건물 안에 불이 나버려서 북한 외교관 1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고영환은 당시 해외 출장중이었기에 천만다행으로 참사를 피할 수 있었으며, 명색이 한 나라의 엘리트들인데 단지 지도자의 수발을 들다가 목숨을 잃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고 한다.[7][8]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을 직접 겪었다. 본인이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북한과 친한 나라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이고 남한과 친한 나라들은 부유한 나라였다는 점이라고. 80년대까지는 김일성의 교시로 아프리카와 제 3세계권 외교에 북한이 중점을 두었는데, 유엔국가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여 주한미군의 유엔군 감투를 벗겨버리면 주한미군 철수 명분을 쥐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구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프리카 외교는 본전도 못찾고 북한에서는 미국과의 직통 대화를 추구하는 대미 외교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후 유튜브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힌 바로는 전두환 암살 작전에 주 자이르 북한 대사관이 거점 역할을 했고, 공작원들을 태우고 아프리카 각지를 이동하며 추적을 피하는 운송책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 때 일본어를 쓰던 공작원 중 한명이 나중에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미얀마 당국에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2.3. 탈북 과정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 574회에 '북한 외교관 1호 망명 사건'으로 그의 망명 스토리가 상세히 소개되었다.[9]
대사관에 있던 보위원이 충성의 외화벌이에서 벌어들인 외화 일부를 몰래 빼돌리자고 제안하였으나, 당시 대사관의 당세포 비서였던 고영환이 거절한 일로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보위부 요원이 고영환을 험담하고 노리고 있다고 조심하라는 충고를 했지만, 고영환은 자기가 그래도 김일성에게 특급 칭찬을 받은 '접견자' 신분인 데다가 김정일이 직접 지시한 전두환 암살 작전에도 참가했고 친형도 조직 지도부에서 있고 하니 "아무리 그래도 고작 보위부 요원 주제에 자신을 뭐 어쩌겠나?"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동구권에서 김일성의 독재를 따라 배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장면을 보면서 "우리 조선(북한)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다가 평소 사이가 안 좋던 그 보위원이 "김일성도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말로 곡해하고 왜곡해서 평양에다 보고를 하였다. 훗날 고영환은 이만갑 방송에 출연하여 이 사건을 설명했을 때 "북한의 외교관들은 같은 동료들과의 관계와, 해외의 외교관들과의 관계를 같이 신경써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결국 같은 동료들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 얼마든지 자신의 등에 칼을 꽂는 배신을 하고 반동으로 왜곡되어 보고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보고를 받은 북한 당국이 고영환에게 소환 명령을 내린다. 명목상으로는 국제회의에 프랑스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지만, 실제 공항에서는 보위원을 기술자로 속여서 체포조로 보냈다.[10] 이에 고영환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훗날 강적들에 나와서 언급하기로는 자신이 탈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대사의 안색을 본 후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사가 외국어에 서툴러 만약에 단순 통역 같은 업무로 평양으로 파견을 간다고 하면 평양에 건의라도 해서 자기를 잡았을 사람인데 그런 일도 없었던 데다가, 무전수가 고의인지 호의인지 입국자가 건설 인력이 아니라 보위부 사람이라 말을 했고 대사가 고영환에게 북한에 들어가라는 말을 전하고 표를 3장 끊어오라고 할 때 대사가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래는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강을 내려다보니 여기저기에 바위도 있고 물살이 세서 뛰어내리면 많이 아플까 봐(…) 마음을 고쳐먹고 강가에 옷가지를 벗어두어 자살로 위장하고 국경을 넘어서 콩고 인접 국가로 갔다.[11] 그 나라는 본인이 외교 분쟁의 소지가 있어서 어느 나라인지는 밝히지는 않았다. 그 나라로 가서 아프리카의 유력한 정치인 친구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여 두 달 동안 은신하며 지내게 된다. 그 후 아프리카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생각지 않았으나 친한 성향의 아프리카 친구가 그에게 한국행을 권유하였다.
그 후 김포국제공항을 통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고영환이 탈출하자 북한에서는 고영환이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횡령하여 도주하였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자이르 주재 북한 대사관 1년 총 유지비가 2만 달러에서 1만 5천 달러로 삭감되어 북한 외교관 부인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른 나라 외교공관에서 파출부로 일했을 정도라고 한다. 고영환이 탈출할 때 수중엔 달랑 100달러만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날은 1991년 5월이지만 망명 기자 회견은 그 해 9월에 하였다. 처음에는 가족의 신변 때문에 언론에 발표하지 않고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안기부 요원이 언론에 발표하자고 설득해서 결국 4개월 후 망명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였다. 공개 활동을 하는 북한 출신 외교관으로는 고영환이 최초였다.
2.4. 대한민국에서
<colcolor=#242748> 망명한 직후 1991년 기자회견을 가지는 고영환(38세). 이때는 상당히 날씬하고 마른 인상이었다. |
그래도 주위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박태준 회장 등의 응원을 받으면서 힘을 내고 1993년 2월 15일 7살 연하의 의상 디자이너 김재숙 씨와 결혼하면서 점차 한국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그 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국정원 산하의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으로 임명되어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상임연구원으로 승진했고, 2016년 1월 1일자로 부원장직에 재직하다가 현재는 정년퇴직 후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직에 있었을 때 못한 방송 출연이나 유튜브 강연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TV조선이나 YTN의 시사 프로그램의 북한 전문 패널로 자주 출연한다. 과거 추적 60분에도 북한군 문서 관련하여 출연한 바 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 574회에 '북한 외교관 1호 망명 사건'으로 그의 망명 스토리가 상세히 소개되었다.
2023년 9월 6일, 통일부 장관 특별보좌역에 위촉되었다. 2023년 10월 31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대북관과 향후 정세 예측 및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
2024년 5월 2일, 국립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되었다.#
3. 기타
-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이 그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국내에서 공부하였음에도 외국어를 참 잘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본인 명의로 홍삼 열 뿌리를 선물해주기도 하였으며, 김영남 외교부장에게도 "국내에서 공부했는데도 이리 외국어를 잘하는데 뭣 때문에 자꾸 외교관들 유학 보내달라면서 달러를 달라고 하느냐?"면서 핀잔도 주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때 김영남한테 내리갈굼을 당할 줄 알았다고 했는데 의외로 별 탈 없이 넘어갔다고 하였다.
- 1등 서기관 근무 중 소련의 개혁과 개방,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2]의 총살, 독일의 통일을 보며 많은 충격을 느끼고 가치관의 혼란이 온 것이 망명의 첫 번째 이유였다. 이 혼란 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말들[13]이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나오자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망에 들었다. 곧이어 보위부의 체포조가 자이르로 도착하기 1시간 전 제3국으로 도피하였고 그곳에서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였다.
- 탈북 과정에서 고영환은 정보기관의 조사를 받았다. 그때까지 배우기로는 해외에 나와 있는 대한항공 직원들은 다 중앙정보부 특무인 줄로만 알았기에 눈만 마주쳐도 몸을 벌벌 떨면서 달아났고, 입국 직후에도 정보기관에서는 자신의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고문부터 시작하리라 여겼다. 이한영의 경우에는 실제로 자기가 김정일 처조카라고 주장했다가 안기부에서 어디서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느냐고 한동안 고문을 당했다.[14]
- 탈북 과정에서 북한 외무부와 대사관 외교 문서 원본을 들고 왔는데, 안기부에서 당시까지 김정일의 친필 사인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고영환이 들고 온 문서에 암호와 친필이 들어 있어 상당액의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둘 중의 하나만으로도 북한 대사는 정치범 수용소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 의외의 정보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실제로 군을 통솔하는 조직이 아니라 총참모부의 일개 부서라는 것을 알려줬다. 이는 당시 정보 당국에서도 놀랄 정도였다. 당시까지 최고사령부가 어디 있는지 어떤 규모의 조직인지를 수십년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 이북에 있을 가족들의 신변 때문에 처음에는 언론공개를 꺼렸으나 안기부 요원의 설득으로 공개 활동에 나서게 됐다. 당시 북한에서는 큰 충격으로 와닿았는데, 김정일은 자신이 가장 총애했던 사람이 탈북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분노하여 고영환의 가족과 친척을 모두 쓸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느날 어머니가 수용소에 붙잡혀 가던 중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밤새워 오열했다고 한다.
- 북한에서 겪었던, 들었던 이야기와 외교관으로써의 술회,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탈북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저서인 '평양25시'라는 책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 같은 탈북 외교관인 태영호 공사와 자주 통화를 한다고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태영호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라는 청원과 태영호의 신변을 보호해달라는 청원이 같이 올라오는 것에 대해 태영호가 어리둥절해하자, 여러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대한민국이라며 돌려보내기를 바라는 자가 있는가 하면 보호하려고 하는 자들도 그 이상으로 있으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말했다 한다.
-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김일성의 프랑스어 통역관을 지냈다. 어느날 마침 담당 통역관이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대타로 나섰다가 김일성에 눈에 띄었던 것. 그는 프랑스어권에서 유학하지 않았는데도 프랑스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국산이라고 더욱 칭찬받았다고 한다. 이 일로 외국어 인재들을 유학 보내던 김영남이 그 자리에서 한 소리 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 말은 김일성의 육성으로 이루어진 발언이었기에 김일성 교시로 취급되어, 고영환의 인사문건 맨 앞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고영환은 이때 "비동맹국 흡수와 관련한 정책 제의서"를 적었고 이를 대견하게 본 김정일에게 통역관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면 프랑스어 통역을 맡으면서 같이 김일성의 지하 벙커에도 들어가보고 김일성의 비행기, 특급 열차, 요트 같은 것을 모두 타 보았다고 한다.
- 외교관으로서 80여 개 나라를 방문하였으나 북한만큼 폐쇄적인 나라는 없다고 평한 바 있다.
-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에서 활동할 당시 자이르의 외교관으로부터 "우리나라도 독재국가이지만 당신네 나라는 괴물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자이르의 대통령이던 모부투 세세 세코도 당대 아프리카 독재자들 중 유난히 악명이 높던 인물이었다. 특히 부패와 무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 도둑정치(kleptocracy)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모부투가 얼마나 부패한 인물이었냐면 그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이 자이르 GDP와 맞먹는 수준이었던 데다가 (2010년 가치로 환산하면) 미국으로부터 무려 50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음에도 32년간 집권하면서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1.4%도 안 되었을 정도였다. 모부투는 대외적으로 반공을 내세웠음에도 1974년에 방북했을 때에 북한에 감명을 받아 TV 뉴스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신의 모습으로 시작하게 하는 등의(...) 우상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그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며 '모 아저씨'(Uncle Mo)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그런 독재자 치하에서 살아온 사람마저 '괴물'이라고 평했을 정도였으면 북한의 독재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 만하다.
- 비슷한 일화도 함께 전했는데 한 번은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이 방북했을 때의 일이다. 김정일은 시아누크를 환영하기 위해 온갖 외설적인 복장으로 치장한 기쁨조의 공연을 선보였다. 그러나 명색이 한 나라의 국왕인 시아누크 입장에선 이는 오히려 불경한 일로 보였고 자동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길길이 날뛰며 화를 냈다고 한다. 동승한 고영환이 시아누크를 말리다가 결국 자동차의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세를 취하자(‘당신은 도청당하고 있다.’) 그렇게 불같이 화내던 시아누크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고 한다.
- 여러모로 북한 세뇌교육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본인은 김일성이 진짜 하느님인 줄 알았다고 한다. 자기가 처음에 김일성 곁에서 통역을 수행하러 주석궁에 갔을 때 심장이 너무 쿵쾅거리고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통역을 못해서 죽을까 엄청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김일성을 가까이서 보자 배도 나오고 걸음걸이도 이상하고 어깨 양 옆에는 비듬이 떨어져 있고 목 뒤에 있는 혹이 걸을 때마다 흔들리고 시도때도 없이 방귀를 뀌고[15] 식사를 할 때도 밥알을 흘리면서 먹는 것을 보았는데 그게 좀 깼는지 그때부터 김일성도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것은 김일성이 70대 이상인 1980년대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 유튜브에 찾아볼 수 있는 김일성 말년의 영상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 처음에 한국에 올 때 한강의 기적을 보고 대단히 감동하면서도 자신이 북한 관련 발언을 하면 아직도 냉전시대 사고에 젖어 있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어서 이 부분은 실망했다고 한다.
- 인생에서 죽을 뻔한 적이 총 3번 있었다. 첫 번째,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든 액자의 먼지를 청소하다가 실수로 액자를 떨어뜨렸는데 다행히 유리만 깨지고 사진 자체는 멀쩡해서 살아남았다.[16] 두 번째는 조선로동당 주관 정신교육 시간이었다. 당시 "남조선에는 600만의 매춘부와 60만의 에이즈 환자가 존재한다."는 간부의 말에 한 동료가 "아니, 1,800만 여성 중에 600만이 매춘부이고 60만이 에이즈에 걸렸는데 어떻게 그런 곳이 아직까지 존속을 할 수 있나?"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고영환은 이 말을 듣고도 당에 보고하지 않아 수용소로 갈 뻔하다 15일 동안 온갖 반성문을 쓰면서 자아비판을 한 끝에 용서를 받았다. 이때 동료가 말한 것 중 김씨 부자에 관한 얘기가 없어서 망정이었지, 김씨 부자 얘기가 나왔다면 그 자리에서 끝났을 거라고 한다. 세 번째는 한국으로의 망명으로 그 과정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죽을 뻔했다.
- 한국에도 이름이 낯익은 김영남, 강석주를 북한 외교부 근무 시절 상관으로 모신 얘기를 많이 한다. 훗날 외무부 제1부상 김계관은 아내가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의 프랑스어 통역을 한 경력으로 찍혀 1980년대 후반에도 자기 10년 선배이면서도 자기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한다.
-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근무 당시 김정일의 지령으로 1982년 가봉에서 전두환 암살조에 안내조로 들어가 합류했다고 한다. 작전 개시 직전 김일성의 중지 지시로 무산되었는데 가봉이 친 북한 국가인 데다가 아프리카에서 테러를 하면 40여 개 아프리카 국가들이 북한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에 다음해 버마에서 테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버마에서 공작원이 자기가 가봉에서 본 공작원과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일본 여권을 쓰고 장발을 하고 다녀서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줄 알고 몇 주 동안 실컷 욕을 했다고 한다.
- 영화 모가디슈(2021) 리뷰를 했다. 재밌고 감명 깊게 보았지만 영화와 실제는 조금 차이가 난다고 했다. 고영환은 소말리아 정부에게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라고 선전하기 위해 이미 모가디슈를 방문한 적이 있다. 1990년대는 이미 남북 국력 차이가 기울어져서 더 이상 외교전을 벌이던 시기가 아니고 1990년대는 북한 외교의 중심이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대미외교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제3세계 외교전이 종식된 것은 의외로 박정희 시대로, 남북한 모두 유엔 총회에서 더 많은 지지표를 얻기 위한 똥꼬쇼에 매달렸는데 1974년에 남북한 지지결의안이 죄다 통과되면서 이게 병림픽이란 것을 깨닫고 돈낭비를 중단했다. 물론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견제는 어느 정도 했고 친북국가들과의 수교를 위한 투자외교는 이어졌으나 1990년대 들어서는 순전히 북한 견제를 위해서 어거지로 설치했던 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을 철수하는 등 제3세계에 대한 투자를 더 줄여버렸다.
-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 평가를 내렸다. 임기가 3달도 남지 않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잔소리를 많이 하고 싶지는 않지만, 대북 정책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밝혔는데, 대북 관계를 지나치게 순진하게 접근했다는 것이 주요 비판 사안이다.
- 김영남을 수행하여 쿠바를 방문하였을 당시 카스트로 자택에서 카스트로가 가정부 아줌마와 함께 몸소 요리한 음식들을 대접 받았다고 한다. 이때 금수산기념궁전과 카스트로의 사저, 그리고 김부자의 호화로운 연회 만찬과 카스트로 자택에서의 소박한 식탁 사이에서 많은 의미를 느꼈다고 한다.
4. 탈북 전 외교관 경력
1979년 6월 |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 |
1980년 2월 | 자이르 주재 대사관 3등 서기관 |
1985년 2월 |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지도원 |
1987년 1월 | 정무원 외교부 중부아프리카 담당 과장 |
1988년 11월 | 자이르 주재 대사관 참사관 |
1989년 11월 | 콩고 주재 대사관 참사관 |
5. 저서
- 평양 25시(서울: 고려원, 1992). 이후 平壌25時 - 金王朝の内幕[17]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정발.
- 亡命高官の見た金正日(망명고관이 본 김정일)(東京: 徳間書店, 1995). 고영환의 책 중 유일하게 일본에서만 출간되었다. 신동아 등에서 서지사항을 밝히지 않고 마치 한국에서 출판된 책인 것처럼 인용했지만 한국어판은 없으므로 낚이지 않게 주의.
- 김일성의 꿈, 서울에서 이루어지다(서울: 조선일보사, 2000). 이후 ソウル暮らし平壌暮らし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정발. 조선일보사에서 나오다보니 당시 김대중 용공론을 한창 내세우던 조선일보 논조를 따라서 김대중이 김일성 간첩인 것처럼 욕하는 책이 아닐까 오해할 수 있는데 단순히 고영환의 서울살이를 다룬 책이다.
[1] 이북 5도 기준으로 평안북도 강계군.[2] 고영환의 발언에 따르면 평소 사이가 나빴던 주콩고 북한 대사관의 국가보위부 파견 요원이 자신의 발언을 '고영환은 수령님도 차우셰스쿠처럼 될 수 있다고 발언함'이라는 식으로 왜곡하여 보위당국에 보고해서 귀국 지시가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친한 동료들을 통해서 숙청 목적의 송환임을 직감하고 자살로 위장하고 도주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문단 참조.[3] 현재는 한국은 초등학교, 북한은 소학교로 각각 명칭이 바뀌었다.[4] 남한으로 치면 지방자치 시대 이전 관선 시장과 유사하나 북한 체제는 로동당 우위의 지배체제이므로 시당 책임비서보다 낮고, 실질적으로는 당책임비서 밑급인 조직담당 부국장이나 선전부국장보다 떨어진다. 내각의 상(장관)도 로동당 부장보다 낮으며, 부부장급 대우이다.[5] 김일성이 고영환이 너무 말랐다고 몸 보신 하라고 내렸다고 한다. 고영환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고영환을 본 김일성이 “왜 불어하는 놈들은 이리 빼빼 말랐나?”라고 했다는 후문이다.[6]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MC 남희석은 이걸 듣고 “김정일 쾌락관”이라며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7] 당시 북한 당국에선 남편을 잃은 과부들을 외무성 직원으로 특채하면서 일종의 배상을 했는데,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외무성에 여성들이 많아진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고 한다.[8] 이후 그 잔해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철거되었으며 대신 그 자리에 평양제일중학교가 들어섰다.[9] 방송에서 간략하게 나온 이야기나 생략된 일화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유튜브에서 밝힌 바가 있다.[10] 북한이 숙청의 대상으로 삼은 외교관이나 외화일꾼을 소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한다. 두개의 각각 다른 지령서를 내리는데 대상에게는 사업 경과 보고 및 신규 사업 등을 이유로 들어올 것을 지시하는 내용을 보내고, 대사에게는 대놓고 어느 날까지 해당 인물을 평양행 비행기로 탑승시킬 것을 지령하는 ‘친서’라는 것을 보낸다고.[11]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항구에서 배를 탔다는 점, 그 나라에 친한 정치인이 있었다고 밝힌 점으로 볼 때 콩고 강을 두고 접경하며 자이르와 같은 불어권에 북한과 같은 공산권이었던 콩고 공화국(당시 콩고 인민공화국)일 확률이 매우 높다. 조건을 만족하는 다른 나라들은 1회 주유로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12] 김일성을 매우 존경한 인물이었다.[13] 이들 중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말도 있었는데, 공관에 나와 있던 국가보위부 파견관이 "김일성 주석님도 차우셰스쿠처럼 처형될 수 있다"로 곡해해서 평양 본부에 전달했다고 한다.[14] 국내 정보기관에선 오래전부터 신원이 불분명한 탈북자는 일단 간첩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고문으로 조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런 악습은 1998년 김대중 집권과 함께 사라졌다. 고영환은 이미 외교관으로 대한민국 정부도 신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을 피한 것이며, 이한영은 그 이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라 당시 관행상 고문을 당한 것이다.[15] 북한 기자 출신 탈북자 김길선도 똑같은 증언을 한 바 있다. 자신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당시 북한 엘리트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16] 사실 고영환이 하던 일은 '정성사업'으로 북한에서 김일성 부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의식이며, 심지어 고영환의 탈북 전 북한은 김일성 초상화에서는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야 한다며 초상화에 향수까지 뿌리던 시절이었다. 후자는 김만철과 주성하의 증언으로 교차검증까지 되었다.[17] 평양 25시 - 김씨왕조의 내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