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0:03:39

김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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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길선.jpg
출생 1955년 10월 3일 ([age(1955-10-03)]세)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선양시 남시구
국적
[[북한|]][[틀:국기|]][[틀:국기|
속령
북한
]] →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나주 김씨
거주지 충청북도 괴산군[1]
가족 남편, 딸 한수정
사위 성락삼[2], 외손녀 2명
종교 무종교(무신론) → 개신교[3]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고전문학과 (졸업)
경력 제2자연과학원 강연선동편집부 기자
이메일 [email protected]
링크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탈북 동기2.2. 탈북 이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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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탈북과정 관련 증언 미사일개발 관련 증언

대한민국의 전 연구기관인, 현 유튜버, 방송인.

북한이탈주민으로, 북한에서는 기자였다. 북한의 소위 '항일 빨치산' 집안에서 태어나서 제2자연과학원에서 기자로 근무했지만, 동료의 고자질로 인해 지방으로 좌천되어 수난을 겪었고 고난의 행군 당시 처참한 상황까지 목격한 후 체제에 환멸을 느껴 탈북했다.

개인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할 뿐만 아니라, 다른 유튜브 채널이나 방송 활동도 가장 적극적으로 하는 북한이탈주민 중 한 명이다. 발언 논조는 대북 강경파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으로 북한 정권 체제의 치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냉혹한 태도로 비판한다.[4] 발언이 정제되지 않은 점을 제외하면, 북한 내부 사정에 대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설명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용 자체는 참고할 부분이 상당히 있다.

2. 생애

1955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남시구에서 출생하여 1962년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이주하고, 1972년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입학한 후 이듬해에 본과로 진학했으며, 1979년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고전문학과를 졸업한 후 1995년 말까지 대한민국의 국방과학연구소에 대응되는 제2자연과학원 (현재 국방과학원) 산하 제2자연과학 출판사 강연선전편집부 기자로 재임했다. 1995년 5월 1일부터 국책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근무했다.

북한에서 기자는 남한의 기자와 달리 당의 일꾼으로 조선로동당의 정책과 수령의 교시를 인민에게 교양하는 것이 임무였고, 특히 김길선은 군수분야의 정책기자라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 로작 저작물을 섭렵하여 글을 짜내야 하는 극한의 임무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길선은 본인의 직업을 "내가 하던 일은 로동신문 검열부서와 매일같이 싸움하는 것이 일이었다." 라고 말한다.# 한 번은 자신의 동료 기자가 자신의 이름과 소속까지 밝히면서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을 김정일에게 직접 올린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그와 그의 가족까지 전부 실종되었다고 한다. 실종된 이후 보위부 장교가 특별강연회에서 그 동료기자를 두고 '반혁명분자이자 남조선 괴뢰도당과 손잡고 양봉음위(陽奉陰違) 했다.'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자들을 형편없이 대우하는 북한의 현실에 대해 김길선이 말하길, "북한 기자들은 겉으로는 김씨왕조 선전과 찬양에 앞장서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김씨왕조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점을 잘 아는 집단이었다" 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현실과 괴리가 되는 글을 써가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체제에 반하는 발언을 하는 기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북한에서 제일 위험천만한 직업중 하나였고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수감자의 30~40%는 기자 출신일 것이다. 우리는 펜을 든 노예일뿐이다." 라고 증언했다.

가방끈이 짧은 김일성과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김정일을 대신하여 로동당중앙위원회 명의의 축전도 대신 작성해줄 정도로 북한 언론계와 출판계의 핵심이었다. 그만큼 김길선은 북한에서 그야말로 최상위권의 엘리트 출신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집안도 빨치산 출신이라서 출신성분까지 갖춰진 엘리트 명문가 집안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길선 본인은 엘리트로 알려진 인물답지않게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달리기를 하는 것을 좋아해서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해서 상을 받았거나 반장을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대학 진학도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두 체육인을 지망했었고 기자를 하고 싶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저 놀기 좋아해서 공부를 그다지 잘 한 것도 아니었던데다, 글을 쓰는 것과 전혀 거리가 멀었는데도 그저 집안이 김일성과 가까웠던 '빨치산 줄기' 출신이라서 김일성종합대학도 쉽게 합격할 수 있었고 기자도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길선이 이에 대해 말하길, "나는 기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다. 김씨왕조 때문에 강제로 끌려다녔던 인생이었다." 라고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1. 탈북 동기

친한 동료들과 성혜림에 관해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초를 겪은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단순히 대화에서 풍문식으로 풀어놓은 것인데, 당시 김정일의 정실부인은 부친인 김일성이 직접 고른 김영숙으로 알고 있었고 이것도 일부 핵심계층 내에서만 암암리에 전해지고 있어서 그렇게 믿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성혜림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아니, 우리 지도자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니 뭔 소리인가?" 라고 의문을 표했는데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이 신고를 해 버렸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른 북한이탈주민과 탈북 스토리를 나누는 과정에서 증언했는데, 같은 직장 동료였던 여성이 김길선에게 돈을 꾸었고 다른 직장 동료에게도 돈을 빌렸는데 빌린 돈을 갚지 않으려고 같이 동석한 자리에서 이를 듣고 그대로 고자질을 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 그 고자질을 한 그 여성은 죽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느 날 직장에 출근하는데 사장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에 갔다가 낯선 남성을 따라가라는 지시에 차에 타고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10호실로 끌려갔는데, 10호실은 핵심 계층에서 수령의 권위를 훼손한 사람으로 소위 말하는 '말반동'들을 다룬다고 한다.[5] 연행되어 40일 간 구속수사를 받았다. 40일간 감옥에 갇혀 고초는 겪었으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탄날 정도로 한평생 한 일과 발언을 모두 적어서 검토 대상을 거쳤는데 조사관들도 사람인지라 조사 중에 들은 정보로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줄어들까봐 조사관을 발언마다 다른 사람으로 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성혜림 관련 김정일의 추문을 접한 죄로 잡혀가 혹독한 심문을 받은 끝에 함경북도 김책시으로 추방되어버렸고, 엄중히 감시받는 와중에 하필이면 김정일이 하사한 러시아 민요 테이프를 들은 것이 꼬투리가 잡히면서 또 다시 박해를 받았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이름, 심지어 초상화조차 함부로 말하거나 취급했다간 소위 '불경죄'로 걸려서 엄청난 후폭풍을 겪어야 한다. 이는 고위 공직자나 일반 간부급이라도 예외가 아니다. 더구나 김씨 일가의 사생활은 엄격하게 금기시되어 누설이라도 했다간 집안이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후 추방을 당하고 내려온 김책시에서 지방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과 북한체제의 실상을 깨닫고 염증과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때는 고난의 행군 중이었던 때라 평생동안 평양에서만 거주하던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6] 고난의 행군의 처음 문항에 등장하는 주성하의 증언에 따르면, 실질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것이 1994년 12월부터였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평북 구성에서 온 여인에게서 들은 현지 상황을 증언해줬는데, 특히 평북 구성은 평양에서 불과 100km밖에 되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로동자구였다.

김책시로 유배를 와서 이웃해 살던 노인이[7] "왜정 때보다 못하다. 그때는 왜놈들은 쌀밥 먹고 조선인은 조밥 먹는게 배알이 꼴렸지만 그래도 굶고 살지는 않았다." 라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그때 당시부터 남한의 영화, 드라마와 노래가 밀수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가지 일을 거쳐서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하였다고 한다.

본인의 유튜브에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에 체류할 당시 작성하였던 수기가 계기가 되어 남한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작성한 수기는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2.2. 탈북 이후

1997년 8월 남편, 딸과 함께 탈북하여 중국에서 약 1년 반 동안 조선족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국정원 요원들을 만나 1999년 1월 남한에 정착하였다.

입국 후에 군수공업 분야에 종사했기 때문에 국정원 산하 연구기관에 재직하였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패널로 출연한 국정원 직원에 따르면 북한의 미사일 개발 초창기 시기의 정보를 한미 측에 제공했다고 한다. 황장엽의 비서로도 짧게 일했지만 황장엽이 아직도 주체사상에 빠져있음에 실망하고 그만두었다.

2010년대 이후 아마도 정년퇴직 이후 각종 방송과 언론에 출연해서 북한정권의 실체에 대해 알리는 한편, 김씨일가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김길선은 김씨일가를 김일성 족속이라고 표현하며 방송상에서도 김일성 족속만을 팬다고 할 정도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세우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북한만 비판한다고 밝힌 만큼 현존하는 남한의 정치세력에 대해선 가급적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 다만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선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

유튜브도 개설해 주기적으로 게스트도 초청해가며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8][9][10]

북한의 핵개발에 대응한 주한미군 전술핵 재배치나 대한민국의 핵무장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군 위협론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북한군의 장비들은 전부 고물이거나 써먹지 못할 폐품들이라 한다. 이에 대해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장담할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

남북통일 이후 북한 정권 청산작업에 대해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소속 간부들에게는 엄벌을 내리되, 행정부 관료들이나 말단 관료들에 대해선 주민들의 동의하에 조건부 사면시켜줘야한다고 밝혔다. 특히 내각 관료들의 경우 현지 경제 실정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통일 이후에도 활용할 가치가 있다는 입장이다.

2020년대의 북한 시사[11]를 분석, 평가한 바로는 비록 숙청과 정치범수용소 때문에 본심을 드러내진 못해도 북한 주민과 간부들이 전부 김정은의 지시를 잘 안따르거나 태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평가했으며 4대 세습을 성공하지 못하고 국가 멸망에 이를 거라고 예측했다. 이는 동아일보주성하 기자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주성하와 함께, 검증이 안된 북한의 정보들을 마구잡이로 보도하는 국내 언론사들의 실태에 대해서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3. 여담

  • 친가 외가 모두 빨치산 가문 출신으로 한 두명이 아닌 여러명이 항일 빨치산 출신이며 북한에선 알아주는 명문가였다고 한다. 특히 고모부는 김일성이 직접 병문안을 와서 날씨 좋은곳인 베트남 대사를 제안할 정도였지만 감히 가기 싫다고 거절하고도 무사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고, 고모는 김일성이 만주에서 빨치산 하며 굶고 다닐 때 한 두달에 한번씩 와서 밥먹여주고 숨겨주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고종사촌 형제는 북한군 중장이있으며, 자신은 여자라 기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와 남자 형제는 모두 보위국 군관이며 특히 아버지는 인민무력부[12] 후방총국 보위국장까지 지낸 명문가였다.
  • 아버지는 1932년 태생, 함경북도 나진(라선시 라진구역)에서 태어나 조부모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카이산툰(開山屯, 개산둔)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이 18세 때 6.25 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인민지원군 탐지기부대에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다고 한다. 하얼빈공업대학 출신으로 김일성이 직접 중국 공산당에 요청해서 북한으로 입국했다고 한다. 막상 북한에 오자 이공계 인력임에도 김일성에 의하여 보위국 군관으로 배속되었다고 한다. 장성까지 오를 정도였지만, 아버지도 결국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에게 탈북을 종용했다고 한다.[13]
  • 어머니는 함경북도 길주, 명천 지역 출신이며 한산 이씨[14]라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얼빈공업대학에서 동창생으로 만나 1955년 1월 결혼하였고 1964년 초에 남편과 더불어 북한에 들어갔다고 한다. # 김길선을 포함 5자녀를 낳았다. 60년대 북한에 와서 로동당 입당 시 면접 때 "내각수상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최용건[15]이라고 답하고도 타박만 받고 무사히 입당했다는데 만약에 70년대였으면 수용소에 끌려 갔을 것이라고 한다.
  • 북한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전형적인 북한 어문 규범인 문화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본인이 김대 조선어문학과 출신인데다 수십년 간 기자 생활까지 했기 때문에 문화어 전문가다.[16] 평양 사투리라고 하지만 사실은 진짜 평양 사투리에 비해서도 '데거이' 같은 말을 '저거'라고 하는 서울말 같은 말투다. 지방의 지식인이 서울말을 쓰며 사투리가 약간 섞이는 것과 거의 같다. 김일성이 문화어의 서울 방언과의 연관성을 극구 부정하며 내부적으로도 평양말이라는 세뇌 공작을 벌이며 남한에서도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습관대로 평양 사투리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집안이 함흥 출신이라 함경도 사투리도 섞여있다. 그래서 '미사일'을 미싸일로 발음하고, '다치다'를 '건드리다'의 뜻으로[17] 사용한다. "이제 무서워서 '다치지' 못하겠답니다." 최근에는 '뇌피셜' 등의 남한 신조어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 어릴 때 중국에서 살다가 1962년 약 7~8살 때부터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서 자랐다. 그래서 당시 처음에는 중국어가 더 편했고 우리말을 전혀 못했지만, 60년대 북한의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로 여러 출판물들을 접하면서 우리말을 익혔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는 서툴렀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 없이 조선어문학과로 전공이 결정되었고, 김일성대 은사 중에 한 명은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도 있었다고 한다. 졸업 후 역시 당의 결정으로 기자가 되었다고 한다. 대학내내 한자옥편 끼고 다니며 공부했는데 뜬금 기자로 발령나서 황당했었다고 한다. 후일 알고보니 집안 토대가 좋아서 군수분야 기자는 아무나 시킬 수 없기에 김정일이 핵심군중에서 선발하라는 1호 지시 때문에 배치된 것이라고 한다. 결국, 김길선 본인은 체육인이 되고 싶었지만 당의 결정으로 원하지 않던 진로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 황장엽의 장녀와 같이 대학교를 다녔는데 자신은 고전문학 쪽이고 황장엽의 장녀는 한 학년 위에다가 어학 쪽이라서 전공은 다르지만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탈북 후 황장엽이 딸처럼 반가워했다고 한다.
  • 북한의 여배우 우인희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되어 총살형을 당했을 때, 직접 현장에서 목격했었다고 한다.#
  • 남편이 홀어머니 아래에서 외아들로 성장했는데, 그래서 처음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시댁 식구가 단촐하다고 좋아했다고 한다. 이유는 층층시하 온갖 시댁 식구들 아래에서 살았던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너무나 고달팠다보니 시댁 식구가 적어서 시집살이를 덜할 것이라고 좋아했던 것. 하지만 그런 친정의 바람과 달리 김길선 본인은 매서운 시집살이로 온갖 설움을 겪으면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남편 대신 의지하고 살았던 아들을 빼앗겼다는 시어머니의 피해의식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듯 하다. 게다가 남편이 유학이나 출장으로 장기간 집을 비우는 일이 잦고 김길선 본인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함께 살면서 온갖 기상천외한 구박과 학대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부부의 직장 당비서가 "이러다 젊은 두 사람 잡겠다." 라면서 시어머니의 재혼을 주선할 정도였다고 한다.
  • 기자로 근무했을 때 007 시리즈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이 해외 무기체계들의 동향을 확인하라며 국방과학원과 군수분야 성원들에게 서방세계의 군사, 첩보 영화들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007 영화들을 자주 보여줬다고 한다. 북한 기자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 추방 이후 황장엽 망명 사건김책공대 학생들로부터 접하고 난 뒤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주체사상의 핵심이자 김일성대 총장을 지냈고 당중앙위원회 비서까지 지낸 황장엽과 김덕홍의 탈북을 바라보고 "그 사람들이 아무렴 배가 고파서 달아났겠는가? 더 이상 이 체제는 안된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실질적인 탈북의 계기는 다른 사건이 기폭제가 되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탈북을 결심하고 있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탈북 후 한국에 오게 된 실마리는 먼저 망명해 있던 황장엽과 김덕홍이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안기부로 넘어가게 된 그녀의 수기를 본 두 사람이 "이 사람은 북한의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본 사람이니 무조건 데려와야 한다." 고 안기부 직원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도 과거 패널로 자주 참여했는데 시원시원한 입담으로 인기가 좋다. 그래서, 김길선씨는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서 북한 정권에 관해서만은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의 수위가 방송용으로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보니 심지어 보수 성향 방송사/언론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일부 네티즌들이 댓글로 정치적인 성향에 대해 따질 때도 "성향은 보수이지만 맹목적인 보수 옹호는 하지 않는다. 그럴만큼의 정치적인 식견도 없는 사람이다. 북한에 대해 열렬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보고 경험했던 것으로 인해 그리 된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달라" 라고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관련 명대사는 김일성 족속이다.
  • 북한에 지하자원이 많다는 것에 "그렇지 않다" 라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김일성 시대에 이미 지하자원을 조사했고, 이것을 팔아서 부국강병을 만들겠다는 선언을 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보고된 지하자원 상당수가 과장되어 보고되거나, 쓸모없는 저질 자원들이라서 팔아먹을게 아무것도 없다." 라는 말을 김일성 자신이 직접 했다는 북한 측의 기록이 있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래서, 정말로 북한에 지하자원이 있다면 이미 수백만 명을 갈아넣어서라도 무조건 채굴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북한 지하자원은 "자원의 백화점"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데, 다양한 종류가 채굴되지만 운산·대유동 금광과 함경북도의 탄광 외에는 채산성 있는 자원이 드물기 때문에 백화점 쇼윈도와 같다 하여 이런 별명이 붙어 있다. 애초에 남한을 포함한 한반도자체에는 고가치 자원이 없다.
  • 유튜브 시청자와의 소통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녀의 꿈은 북한이 자유화된 이후, 북한으로 넘어가서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씻겨 주고 먹여 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서 유학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평양으로 당장에 달려가서 김일성 동상을 전부 때려부수고 모든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 명칭을 개칭하는 작업도 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 북한의 언론 검열 과정에 대해 소상한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11:44~16:24 부분


[1] 2022년 11월 10일 지진에 관한 콘텐츠를 다루면서 거주지를 공개했다. 출처[2] 남한 출신으로 아내 한수정과 이혼 후 재결합했음을 밝혔다.[3] 탈북 이후에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4] 그래서, 발언 내용 자체는 평이할 수도 있으나 발언 도중 사용하는 어휘나 어법이 과격한 경우가 많다. 이는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북한 체제 하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길들어진 화법으로 추정된다. 또한 북한에서 기자는 본질이 선전·선동 파트에 속하니 직업 특성상 그런 쪽으로 특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김길선이 북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시기는 지금의 북한보다 더욱 여성에 대한 인명경시와 억압적 시선이 만연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보통 성깔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게 당연했고, 이러한 환경도 그녀의 강경한 성향을 만드는데에 크게 한 몫했을 것이다.[5] 이외의 계층은 국가안전보위부에서 취급한다.[6] 김책시에 위치한 공장의 노동자로 재배정되었지만 첫 출근날 공장에 가보니 공장 가동은 이미 전부 정지된 상태였다고 한다. 공장 지배인이 '더 이상 출근하지 마라.'라고 말했고 그래서 자신은 탈북 이전까지는 사실상 무직인 채로 살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거리에는 밥을 못먹어 뼈가 다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고, 아사한 시체에서 가 마구 들끓는 것도 보았다고 한다. 이를 본 김길선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7] 이 노인은 다름 아닌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포로였다고 한다. 즉, 남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술을 먹으면 항상 남한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남한 노래를 부른 사실이 들키면 화를 면치 못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말렸다고 하지만, 자신은 이미 지옥에 와 있으니 더이상 갈 곳이 없다며 아랑곳하지 않았다고…[8] 김길선의 평양만사라는 제목으로 올려지고 있으며 딸이 편집을 맡고 있다. 부제가 자극적인데 김일성 족속만 팹니다다. 나이가 있어서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해 같은 탈북민 심하윤이 공동 진행자로 참여 중이다.[9] 현재 심하윤이 자신의 개인 유튜브 채널을 내고 별도 활동중이므로 주말 라이브는 역시 탈북민인 김지운을 섭외해 함께 진행하고 있었는데, 현재는 이 김지운도 개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때그때 별도의 게스트를 데리고 진행하는 일이 잦다. 방송 초창기처럼 한송이가 게스트로서 도와주는 일이 많다.[10] 월요일에 출연하는 남성 게스트는 북에서 철도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탈북한 양영일이다.[11] 로동신문, 김정은의 연설 등[12]국방성[13] 한 때 월북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에 대한 심문도 담당했다고 한다.[14] 어머니는 반드시 자신의 성씨를 량반 한산 리씨라고 말했으며 '량반'을 때고 말하면 성을 내며 꼭 량반 한산 리씨라고 부르라고 말했다고 한다.[15] 최용건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고, 내각수상은 다름 아닌 김일성이었다. 당시의 북한은 명목상으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명목상) 국가수반을, 내각수상이 정부수반을 맡고, 그 정부수반인 수상은 (명목상 인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었다는 제1당) 조선로동당의 당대표인 총비서가 맡는, 일종의 의원내각제 형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물론 허울일 뿐 실제로는 수상 김일성이 전권을 장악한 비정상적 독재 체제였다.[16] 로동신문 등 북한의 기자들은 글로 선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문학 전공을 데려다가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서 길러낸다. 당장 본 문서 위쪽의 생애 부분에도 김길선 본인의 고초가 잘 드러나 있다.[17]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준어로 실린 단어인만큼 한국 표준어 규정으로도 쓸 수 있긴 한데 실생활에서는 60년대에 쓰이던 옛날 말투에 더 가깝다. # 그러니까 옛날 서울말이다.[18] 현재 하고 있는 유튜브에서 한국의 우월성을 나타낼 때 쓰는데 자랑이 아닌 "니들도 정신차리고 바뀌면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처럼)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같은 힐난 겸 걱정이다. 실제로 탈북민 중에 북한 장교 출신이었던 모 여성은 벨로스터N의 오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