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8 19:51:19

고난의 행군



1. 개요2. 진행 과정
2.1. 북한의 배급제2.2. 식량난 도래2.3. 에너지난과 수송난
3. 파멸적인 결과4. 남한측의 반응5. 영향6. 기타

1. 개요

1995년 봄. 평양의 공기는 음산했다.

2월경부터 쌀값이 미치기 시작했다. 1kg에 50원 정도였는데 자고 나면 올라 석 달쯤 뒤엔 230원까지 치솟았다.

120원쯤 됐을 때 사람들이 “이러다 망하는 거 아니냐”며 술렁거렸다. 200원이 넘었을 때 거리는 축 늘어져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들로 넘쳤다.

식인 사건 등 범죄 소식이 퍼지며 도시 분위기는 불과 몇달 만에 흉흉하게 변했다.

난 1994년 12월 말 기차역에서 만난 평북 구성의 여인에게서 대량 아사 소식을 처음 들었다.

군수공장이 밀집한 그곳 노동자구(區)에선 여름부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기 시작했고 가을쯤부터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불과 100여 km 떨어진 곳에서 그런 참사가 벌어지는 줄 몰랐다. 그때 북한은 그런 곳이었다.

몇 달 뒤 굶주림은 평양까지 순식간에 삼켰다.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를 외부에선 1995∼1998년으로 보지만, 실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아사자 수는 300만 명이라 알려졌지만 난 100만 명 미만으로 추산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을 정도면 어림잡아 1000만 명은 심각한 신체·정신적 장애를 겪어야 했을 것이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하 생략)
-주성하 기자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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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국방일보에 나온 기사의 그림으로, 여성 탈북자 이애란 씨가 탈북 후 남한에서 통감자를 보자 북한에서 먹던 통감자가 생각났다는 이야기로, 배고픔이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내용이다.[1]

영어: Arduous March

고난의 행군[어원]은 1995년~1999년초반 동안 북한에서 발생한 대기근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서히 세가 기울어가던 북한이 재기불능의 수준으로 망가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1980년대부터 북한 경제는 이미 쇠락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남한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뤄낸데다, 1988 서울 올림픽이 대박을 치고, 반대로 북한이 자랑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삽질 끝에 망하면서 임수경 방북 사건을 통해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보다 앞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인민들한테도 알려지는 등 그야말로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남한에 패배했다는 것이 가시화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최소한 사회주의 배급제도나 생활보장, 복지는 그럭저럭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격차가 고난의 행군 이후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고난의 행군 이전인 1992년~1993년경까지만해도 북한이 그럭저럭 먹고 살았고 국가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까지 월북이 꽤나 발생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옥 같은 상황을 숨길 수 없는 1993년 이후의 북한과는 달리, 1992년~1993년경까지만 해도 적어도 (외신에 소개되는) 평양직할시와 그 근방은 당시 대한민국과 비교는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은 말 그대로 북한이라는 조직을 반신불수로 만들어 버렸고, 그 여파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북한에서 자생적인 시장 경제가 싹트는 계기가 되었고, 탈북자를 급속도로 늘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수령에 대한 실망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본격적으로 경제적인 의미의 계층 분화[3], 즉 빈부격차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2. 진행 과정

2.1. 북한의 배급제

사람의 하루 평균 권장 소비량은 600g인데[4], 김일성 집권 시기, 그러니까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620g 정도의 쌀을 배급하였다. 즉, 최소한 굶을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80년대 후반 즈음부터 농사 작황이 좋지 않아 양이 조금씩 줄기 시작하더니, 고난의 행군 시기 들어서는 그 배급량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난의 행군 시기의 김정일의 미친 짓) 이후 김정일과 현재 이어지는 김정은 집권 시기까지, 100g이 조금 넘는 양을 아주 가끔 배급하고 있다. 국가 전반의 산업은 붕괴되었으며, 배급 제도로 운영되는 사회주의 북한에서 배급을 중단하였다는 건 배급에만 의존하며 살았던 인민들을 전부 다 굶겨서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단, 평시에도 제대로 배급제를 실시한 사례는 공산권에서도 북한이 이례적인 경우였다. 소련에서도 배급제스탈린 집권 초기(정확히는 1929~1935),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및 전후 복구 시기(1941~1947)에만 시행되었으며, 1947년 12월 들어서면서 배급제를 완전히 폐지했다.[5] 물론 배급제 폐지 이후에도 간간히 상당수 소비재나 사치품들을 배급하기도 했지만 법적으로 공식화된 건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물건을 팔았냐면, 국가에서 각 가게마다 물건을 보급하고, 소비자들은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방식으로, 사실 유통 과정 자체만 본다면[6] 서방과는 큰 차이는 없었다.[7] 다만 TV나 자동차 같은 사치품을 제외한 생필품은 국가에서 굉장히 싸게 공급했는데, 급작스러운 수요가 발생할 때를 대비되지 않아서[8] 물건 공급이 달리는 경우가 꽤 빈번해서, 어떤 가게에서 좋은 물품이 나왔다는 소문이 나오면 무조건 줄을 서는 경우가 많아서 다리가 아팠다고 한다.[9]

하여튼, 북한은 배급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 영향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인민들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일은 더 하고 학생들까지 노동과 농사일까지 하게 되었다. 당연히 배가 고프니 도저히 일하러 올 수 없는 사람이 늘게 되어 노동자들은 직장에 출근하지 못하게 되었다. 배급이 줄자 북한의 인민들은 장마당에서 식량을 구해서 먹게 되었고, 부족한 식량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농사에 동원되면서 기초적인 국가 시스템은 마비되었다. 철도는 움직이지 않았고, 편지 배달을 할 집배원도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으로 일부 지방에서는 부족하게나마 여유가 생겼는데 교통과 통신의 마비로 인해 이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것 조차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문제가 2010년경까지 이어졌는데[10], 열차는 석탄이 필요하고 트럭은 기름이 필요한데, 열차가 남는 기름을 수송하려 해도 석탄이 없고, 트럭으로 남는 석탄을 수송하려 해도 기름이 없단다. 말과 수레로나마 수송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가 차라리 낫다 싶을 수준.

2.2. 식량난 도래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말 대대적인 집단농장화를 완수한 북한의 농업은 외견상 전쟁으로 인한 물자와 노동력의 부족을 해소해 가면서 착실히 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근저에는 사회주의 농업의 고질적 병폐인 부족의 경제국가로부터의 과도한 수탈이 만연해 있었다.

1960년대 쿠바 위기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베트남 전쟁 등으로 연이어 위기를 느낀 북한은 국가경제 운용에 대하여 자력갱생을 원칙으로 내세웠고, 이는 척박한 북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중요한 화학 비료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졌다.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경제위기가 1960년대 말 북한의 과도한 무력 도발과 이어지는 갑산파 숙청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김일성은 1970년대 초부터 적시적작, 적지적작을 통해 화학 비료의 사용을 줄인다면서 다락 밭 개간, 강냉이 영양 단지 농법, 밀식 재배를 주축으로 하는 주체농법을 내세웠고, 1975년 435만 톤의 식량을 생산하면서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농법은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였다.

특히 주체농법의 꽃이라 할 만할 "영양단지 농법"은 사진처럼 거름이 많은 부식토에 미리 강냉이 알을 심어 싹을 트이어 놓은 뒤 이를 에 옮겨 심는 것으로, 말하자면 강냉이 농사를 위한 모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벼운 모를 심는 모내기만 해도 엄청나게 노동 집약적인 농법이라 논 하나에 마을 하나가 통째로 달라붙어야 할 정도인데, 그게 강냉이를 심은 모종에 산비탈에 만든 다락 밭이 작업장이라고 하면 어떨까? 더 심각한 건 심는 건 이앙기를 개조해서 굴리면 된다 쳐도 진짜 문제는 파종이다. 만 해도 파종기를 써도 인력이 많이 들어간다. 근데 강냉이는 한 칸에 한 알씩 일일이 심어줘야 하고, 그런 파종기는 적어도 민수용으론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국 가뜩이나 기계 써도 인력을 미친 듯이 먹는 작업을 기계 없이 순수 인력 만으로 해야 했다.

막대한 노동력이 주체농법에 투입되기 시작하자, 이런 주기적인 '농촌 지원 전투'에 동원되면서 사회의 전체적인 생산 능력마저 떨어뜨렸다. 게다가 척박한 한반도 산악 지대에서 지력을 미친 듯이 소모하는 옥수수를, 그것도 밀식으로 재배하면서 일시적인 식량 증가는 가능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지력의 고갈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1970년대 말부터 북한의 농업 생산량은 감소 추세에 접어들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감자를 심는 것이 낫기 때문에 감자를 보급하려 했지만 옥수수보다도 척박한 양강도 고산지대에서 재배가 용이하다는 정도의 장점이 있을 뿐, 단위 면적당 수확량 및 열량 충족도, 특히 보존/수송에 있어서 난점이 있기 때문에[11] 북한의 처참한 물류 수송 환경으로는 감자 역시 옥수수에 비해 쓸모가 없다. 1998년부터 그렇게 대홍단 감자 노래를 불렀으면서 그놈의 감자 농사가 여태껏 양강도를 못 벗어나고 여전히 옥수수을 주식으로 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197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식량 생산량이 줄어드는 것은 남한도 마찬가지 현상이기는 한데, 남한의 경우에는 맛없어서 혹평이 쏟아지는 통일벼 재배의 포기, 대규모 도시화로 인한 농지 감소, 밀가루 등의 저렴한 대체 작물 수입, 당분 및 육류 등의 섭취량 증가로 인한 주식 작물 소비량의 상대적 감소 등이 원인이다. 한마디로 수요가 줄어들어서 생산도 자연스럽게 감소 추세였던 거지만, 북한은 그런 거 없이 여전히 사람들이 배고픈데 식량 생산이 줄어들었으니 문제였다. 거기다 남한은 식량 수입이라도 했었지, 자력 갱생을 고집하는 북한에 식량 수입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이때부터 북한의 국제신용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던 중이었으니 수입하려고 해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터이다.

또한 산을 깎아 다락밭을 만들다 보니, 비가 왔을 때 물을 저장하고 흙이 씻겨내려가지 않도록 하던 나무들이 모조리 사라져 조금만 비가 적게 와도 지하수가 고갈되어 가뭄이 들고,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비에 쓸려 내려간 흙이[12] 하천 바닥과 저수지 바닥에 쌓여 쉽게 홍수가 발생하게 되었다. 무리하게 경사가 급한 곳에도 다락밭을 만들면서, 옹벽이나 사방댐같은 안전 시설물도 제대로 설치하지 않다 보니 산사태발생도 늘어나서 기껏 만들어 놓은 밭과 작업로를 쓸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렇게 다락밭으로 인한 인재로 서류상 생산 면적은 늘어났음에도 생산량 증가가 주춤하자, 북한은 산림 개간 및 관리를 허용하는 권한을 중앙 정부에서 지방으로 이양, 더 쉽게 다락밭과 화전을 만들게 하는 악수를 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다락밭 개간 → 산림 황폐화 → 산림의 물 저장 기능, 토양 침식 방지 기능, 산사태, 홍수 등 재해 방지 기능 약화 → 재해로 인한 피해로 식량 생산 감소 → 다락밭을 다시 개간하는 악순환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부 지방 도시에서는 1980년대부터 배급이 밀리는 현상이 발생했고, 평안북도 신의주시함경북도 청진시 등 대도시들도 이런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이런 식량 공급의 부진이, 함경북도 청진시직할시에서 일반시로 격하된 이유 중 하나였다. 직할시 주민들의 식량 공급 규정은 일반시보다 훨씬 급이 높은데, 당시 북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0년 371만 (농촌진흥청 추산)까지 떨어진 식량 생산량은 1991년 441만 톤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고난의 행군이 일어나기 직전인 1993년에는 동아시아를 휩쓴 냉해로 인해 다시 388만 톤으로 떨어지는 등 극심한 등락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2013년 북한의 식량 생산량 추정치는 약 480만 톤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북한에서 필요한 식량은 약 500만 톤에 육박한다. 일반적인 국가에서 연간 30만 톤 정도의 식량 부족이라면 외국에서 수입하면 되지만, 북한의 경우 군사력 유지와 정권과 체제의 유지, 세습을 위해 여기저기 돈을 쏟아붓다 보니 식량 사올 돈이 없다는 게 문제로 그 좋은 본보기가 바로 금수산태양궁전이다.

이 즈음 되면 일찌감치 중국이나 베트남의 사례를 본받아 농업 부문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조금 자세히 짚어보자면 영농 조직의 소규모화와 자율화, 정부 수매의 축소와 개별 처분권 강화 등이 골자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중국베트남이야 공산주의 국가였음에도 실용주의적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해 해결 가능했지, 일인 독재 체제, 그것도 개인숭배의 정점에 오른 북한에 있어서는 체제 전복이나 거의 다름없는 말인 것이다.

다만 소규모화와 자율화에서 무작정 개인 농화하는 것은 자칫 개별 농가의 영세화로 이어져 국내 농업의 전반적인 붕괴를 야기할 수 있다. 일례로 폴란드는 막 공산화 되었을 시절에 집단 농장을 만들어냈으나,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이어서 벌어진 포즈난 항쟁 이후 스탈린주의파가 물러나고 고무우카가 집권하면서 백지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는 드물게 개별 자영농 체제가 유지되었지만, 그 결과 폴란드 농업은 영세화를 면하기 힘들었다.[13] 반면 러시아의 경우, 개별농으로 전환된 농민들이 콜호스를 재결성, 자본주의 협동조합화 하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조직을 어떻게 운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북한에서 강제적 정부 수매는 국방과 경제의 병진 노선과 직결되는 문제다. 간단히 말하자면 '군량미 확보'. 그리고 농업 집단화와 주체농법은 수령 스스로가 우긴 결과이니 철회=수령의 오류 인정이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수령의 무오류성을 하나의 사상으로 확립해 놓은 상태였고, 그 작업을 진두지휘한 것이 바로 김정일이었다.[14]

북한에서는 소련이나 중국처럼 후임 지도자가 전임 지도자의 정책을 바꾸거나, 혹은 베트남처럼 당 내의 개혁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철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사실 이는 김일성이 정확히 의도한 바였다. 심지어 하부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자구책을 마련할 수조차 없는 여건이었다. 결국 북한은 어영부영하는 사이 1995년 갖은 자연 재해를 겪고 농촌진흥청 추산 345만 톤에 불과한 식량 생산량을 기록하면서 기록적인 경제난의 막을 올렸다.

여기에 그쳤다면 "뭐야, 생각보다 심한 게 아니었네?"라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1993년에도 300만 톤 정도의 식량 생산량을 기록한 바가 있지 않은가? 물론 고난의 행군은 단순한 식량 부족 만으로 발생한 사태는 아니었다. 식량 부족이 문제의 전부였다면 그냥 외국으로부터 식량을 수입하거나 혹은 지원을 받았으면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되었을 것이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2.3. 에너지난과 수송난

1960년대부터 내세운 자력갱생을 관철하기 위해 북한은 줄곧 전력 중심의 에너지 수급 정책을 고수했다. 수력과 석탄 자원은 나름대로 넉넉했기 때문이다. 소련이나 중국을 통해 들여온 석유는 군수부문이나 단거리를 수송하는 민간 차량, 각종 선박 등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북한의 높은 전철화율과 철도 중심의 수송 체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장거리에 거쳐 계획적으로, 저렴한 수송이 가능한 철도가 교통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례다.[15][16] 북한은 특히 석유의 사용을 줄이기 위해 부족한 재원을 주요 철도의 전철화에 집중했고, 그 결과 전체 철도의 80%를 전철화하는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철도 수송 능력의 강화에 절실하게 필요한 복선화와 선형 개량은 포기해야 했다. 거기에 김일성은 전철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철도 복선화 요구를 대놓고 무시했다. 전철화를 택하고 복선화를 포기한 것 자체는 자금, 인력 등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는 나름대로 일리있다고 보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놈의 자력갱생 운운만 안 했어도 이럴 일은 없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게 전철화를 이뤄내면서 수송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 참 좋았겠지만, 문제는 이로 인해서 향상된 견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각종 제반 사항들이 제때 개선되지 못하면서 북한의 전기 철도는 전기 먹는 기계로 전락해버렸다. 여기서 제반 사항이라고 함은, 예를 들면 한꺼번에 많은 짐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좀 더 무거운 중량화차와 이를 받아낼 중량 궤도가 필요하다. 또한 열차 편성이 길어지면 그만큼 대피선이나 신호장 등도 확충되어야 단선에서도 무리 없이 교행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 사업들이 제대로 수행되는 일은 없었다. 철도전기화에만 신경을 쓴 북한은 이어지는 후속 사업들에선 정말 거짓말처럼 파행에 파행을 거듭했다.

오죽하면 김일성이 대놓고 "니들은 전철화만 해 놓으면 다냐? 다른 것도 제때 해 놔야 할 거 아냐!"라며 짜증을 냈을 정도였지만, 위에서 보듯 철도가 제대로 짐을 실어 나르지 못하는 판인데 제철소에서 어떻게 철광석을 받아서 강철을 생산하고, 공장에서는 어떻게 강철을 받아서 궤도와 화차를 생산하고, 철도국에서는 어떻게 궤도와 볼트와 자갈과 공구를 받아서 대피선을 설치한단 말인가?

이것이 철도 하나의 문제로 끝나면 참 다행이었을 것인데, 문제는 발전소에서 석탄을 받아야 전기를 생산하고, 전기가 들어와야 석탄을 캔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탄광들은 갱도 식이기 때문에 조금만 발전기가 멈춰도 지하수가 차버려 못 쓰게 된다. 이렇게 멈춰버린 탄광들이 부지기수다.[17]

수력 발전소가 있다고 하지만, 하상계수[18]가 큰 한반도에서 수력 발전은 계절에 따라서 발전량의 편차가 심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므로 화력이나 원자력 발전은 필수다.[19] 무엇보다 수력 발전 자체가 한반도, 중국, 인도, 동남아 같은 몬순성 기후에는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다. 현재도 수력 발전이 발달한 나라는 대부분이 영국, 노르웨이1년 내내 강수량이 고른 해양성 기후를 띤 나라들이다.

게다가 그 수력 발전소들의 상당수는 일제 강점기의 설비, 혹은 (구) 소련이나 동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쓰다가 새로운 발전기를 도입하면서 버려야 하는 것들을 북한에 무상 공여해준 것들이고, 그걸 북한 측은 운영하는 식이기에 고장이 나면 더 이상 고칠 수도 없고 어떻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발전의 효율성은 처참하다. 일례로 청진 화력발전소는 2015년 가동을 중단했는데 그 이유는 연료 부족은 물론 유일하게 돌아가던 발전기 하나마저도 완전히 고장났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이며, 그나마 돌아가는 평양 화력발전소조차도 상당수 발전기들은 고장이 나서 돌리지 못한 상태에서 작동이 가능한 발전기들을 최대한 돌리지만 수명이 이미 초과된 발전기들을 가동해봤자 효율이 떨어지기에 김정은이 동평양 화력발전소를 세우라고 지시해서 이를 보완했을 정도다.

이런 수송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로, 결국 김일성이 직접 "차도 좀 멀리 많이 굴려라!"라고 주문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북한은 1970년대부터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를 비롯해 각종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유류 소비량도 1980년대 중반까지 큰 폭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후 북한 경제의 내부 예비 고갈과 80년대의 삽질로 쓸 수 있는 예산이 크게 줄고, 이로 인한 성장률 감소 현상이 지속되면서 유류 소비량의 증가 현상은 둔화되었고,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1990년대 동구권의 체제 전환이었다. 그동안 무상 지원이나 현물 교환으로 들어오던 각종 원자재나 기계 부품 공급이 끊겼다. 소련 몰락 이후에 제 코가 석 자인 러시아에서는 달러를 요구했는데, 북한에는 위조 달러만 넘쳤다는 소문이 있다.[20]

다급해진 북한 정부는 1991년 라진선봉경제무역지대라는 나름의 승부수를 띄웠지만, 70~80년대에 시장경제에 적응할 기회를 제 발로 차낸 끝에 다급하게 도입한 특구가 제대로 돌아갈 리는 만무했고, 들어오는 달러 수입은 신통치 않았다. 일단 무역이란 것이 자유로운 상업 활동과 구매력 높은 상품, 신용과 신뢰, 철저한 이윤 보장이 있어야 가능한 행위인데 그런 게 전혀 없는 북한과 어느 나라가 무역을 하겠다고 나서겠나[21]? 심지어 혈맹(?)이란 중국조차도 북한에 선불을 먼저 받아야 하겠다고 할 정도다. 게다가 거의 의존하고 있던 공산권 형님인 중국러시아는 체제를 전환하고[22], 심지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몽골, 베트남, 불가리아 등 공산권 동지 국가들이 90년대 들어 북한의 불구대천 원수 대한민국과 국교를 맺어 정치/체제적으로 매우 큰 충격까지 받게 되었다.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남한은 너무나 성장한 상태였고, 북한은 그 자신의 폐쇄성이나 지도자의 쓸데없는 고집 등으로 인하여 점점 더 심하게 나락으로 빠져갔다.

사실 북한도 1984년 합영법과 합작법을 시행하고, 1986년 관광총국을 만드는 등 이래저래 뭔가 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것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전면적인 시장화 개혁·개방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돈 몇 푼에 합영·합작 기업의 뒤통수를 치는 등 뻘짓만 잔뜩 하다가 시간을 날려 먹었다는 것이다.

결국 1993년 북한의 화력 발전량은 88억kWh(추정)를 기록하며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100억kWh선이 무너지는 참사를 맞이했으며, 현재도 100억kWh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전력이 부족해지자 군수·중공업 부문에 우선적으로 전력을 공급했지만, 그 결과 안 그래도 빈약했던 경공업 부문이 연쇄적으로 붕괴하면서 농민들과 근로자들의 생활고는 가중되었다.

여기에 국가 교통의 근간을 이루는 철도가 전력 부족으로 운행에 어려움을 겪고, 이를 보완해야 할 도로 교통 또한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서 국가 수송 체계 또한 전면적인 마비에 직면했다. 설령 쌀이 있다 해도 실어 나를 수 없는 전근대적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일례로 1996년 청진 철도국에서는 남포항에 쌀이 들어와 있는데 이걸 실어올 수가 없어서 쫄쫄 굶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철도국이 말이다.

에너지난과 수송난이 고난의 행군에 미친 영향은 식량난의 피해 분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UN에서 2002년에 자강도, 강원도를 제외한 북한 전역에서 실시한 어린이 발육 부진 현황 조사를 보면, 식량 생산이 적고 공업 비중이 높은 함경·도 및 량강도 같은 동북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23], 평안·도가 뒤를 이었으며, 이북곡창지대인 황해·도는 지방 중에서는 가장 피해가 적었다. 물론 가장 피해가 적은 건 평양직할시남포특별시였다.

1920년대 소련 대기근이나 대약진운동 당시 중국 대기근이 주로 농촌 지역에 피해가 집중되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의 시장화가 주로 함경북도 및 량강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반정부 움직임 또한 나름대로 나타나는 것은,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과 함께 이 시기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북한의 문제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제한된 예산으로는 철도 개선에 전철화와 복선화, 선형개량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김정일은 이 중 전철화를 택했다. 이로 인해 북한의 철도는 대부분 전철로 바뀌었지만 대신 다른 정비 사업에 쓸 돈이 없어졌고, 이는 좋은 전철을 가지고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주요 수송 수단이었던 철도의 효율성이 떨어지자 국가 전체가 마비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철을 굴리려면 전기가 필요하지만 문제는 전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석탄을 나르지 못하고 또한 석탄을 캐는 탄광 역시 전기가 없어 석탄을 캐지 못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대체 에너지 자원이지만 수력 발전 같은 건 북한의 들쭉날쭉한 강수량으로는 효율이 개판이었고, 80년대에 마지막 여윳돈마저 고갈되며 북한은 고립되었다. 큰형님들인 소련과 중국에서 지원이라도 받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건 있을 수 없었고, 결국 90년대에는 에너지 공급량이 바닥을 치며 국가 전체가 마비가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3. 파멸적인 결과

(전략)...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1994년 8월의 대홍수는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로 이어졌습니다. 더욱이 8월은 농작물이 숙성하는 시기인데 어느 하루도 그치지 않는 비로 하여 그나마 물에 잠기지 않은 농작물도 여물지 못하고 쭉정이만 남았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저주’로 불린 대홍수는 김일성의 암살설로 비화됐습니다. 김일성이 후계자이고 아들인 김정일에게 암살당하였고 그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북한에 재앙을 불러왔다는 설이었는데 이러한 설은 주민들 속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주민들은 비록 농사는 망쳤지만 전쟁예비물자로 저축한 식량이 많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부터 농사가 안 돼 전쟁예비물자를 다 털어 먹었다는 사실을 당시 북한의 인민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농사는 망쳤지만 아편은 그 어느 때보다 잘 되었습니다. 도시 노동자들의 배급이 끊기고 인민들이 느끼는 식량난이 커가고 있었지만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을 심는 자신들만은 나라에서 정상적인 배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아편의 진은 8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채집을 했습니다. 아미산 총국은 아편을 생산하는 기간인 8월 달까지 청림리 주민들에게 배급을 주었습니다. 생산된 아편을 다 거두어 갔을 때 이곳 주민들은 곧 ‘우대상품’이 차례지리라 꿈꾸고 있었습니다. 올해는 예년보다 아편이 잘 되었으니 양복지나 대동강 텔레비죤(TV)과 같은 ‘우대상품’의 가짓수도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게 이들의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우대상품’은 커녕 9월에 받아야 식량조차 공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곳 백도라지농장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수십 리도 넘는 양강도 농촌경리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양정과를 쉼없이 오가며 청림리 주민들의 배급을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군 당위원회를 찾아가 “중앙에서 아편을 거두어 갔으니 그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거칠게 항의했다가 김상원은 직무정지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초급당 비서까지 직무 정지되다 보니 주민들의 배급을 위해 뛸 사람이 없었습니다. 청림리 주민들은 국가배급에 매달려 뙈기밭 농사를 포기했던 자신들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굶주린 주민들은 마을에 남아 있는 가축들을 마구 도둑질하고 축산작업반을 습격해 농장에서 키우던 까지 모두 먹어치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4년 10월 9일 축산을 전문으로 하는 제6작업반에서 태어난 지 3개월밖에 안된 어린이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가 함께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아내와 어린 자식을 잃은 아버지는 목을 매 숨졌습니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던 10월 굶주림으로 죽음의 문턱에 선 청림리 주민들은 아편농사를 지어 ‘우대상품’으로 받았던 텔레비죤(TV)과 고급양복지를 헐값에 팔아먹었습니다. 지어 돈이 된다면 늄(알루미늄)으로 된 밥 가마까지 팔아먹었습니다.

김상원 초급당비서가 처벌을 받은 상태에서 양강도 무역국과 교섭해 이깔나무 30입방을 주고받아 왔다는 것이 포장지에 소와 양의 머리 그림이 있는 사료용 강냉이 1톤 680kg이었습니다. 통나무 1입방 당 사료용 강냉이 56kg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식량은 통나무를 베어내는데 동원된 농업노동자들과 젖먹이 어린이가 있는 가정들에 조금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청림리 6백 세대의 가정들에 800그램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800그램의 식량은 한 가정이 한 끼 먹을 량도 안됐습니다.

1994년 10월말에 청림리에서 노약자들과 늙은이들을 비롯해 가정세대 7개가 멸족했습니다. 청림리의 식량위기는 보천군에 큰 공포를 불러왔습니다. 군 당위원회에서 현장을 방문했지만 군수예비물자까지 다 털어먹어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해 눈 내리는 12월, 김상원 초급당 비서는 늙고 병든 몸을 끌고 마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작업반장들을 불러냈습니다. 작업반장들과 함께 집집의 문을 일일이 두드려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고 인기척이 없는 집은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농장에서 젊은 청년들을 불러 모아 굶주린 주민들에게 뜨거운 물을 끓여 나누어 주는 자원봉사도 조직했습니다. 또 농장 진료소에서 비상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아편을 양강도 무역국에 주고 강냉이 가루 2백여kg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가져온 강냉이 가루를 1kg을 큰 밥솥에 넣고 끓여 마을의 모든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1994년 12월 청림리에서 대량아사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가정은 누가 살고 누가 죽는다는 순서가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가정은 온 집안 식구가 통째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몰래 보관하던 아편까지 다 팔아 보았지만 식량난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당장 식량이 없는 가정에 오늘 쌀 1kg을 가져다주면 그들의 죽음을 하루 정도 더 늦추어 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95년 1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청림리를 떠나는 14살 소녀와 10살 되는 그의 남동생에게 김상원 초급당비서는 닦은 강냉이 한줌과 손톱눈 크기의 아편을 쥐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지만 누구도 초급당비서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편이 고향을 떠나는 아이들에게 하루 식량이 될 수 있음을 마을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1월의 강추위 속에 “여러분 물을 끓여 마십시다”라고 소리치며 눈보라를 헤치던 김상원 초급당비서의 목소리는 큰 동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양강도 당위원회의 지시로 도농촌경리위원회 수출원천동원사업소에 통나무를 팔아 청림리 주민들을 살릴 과제가 떨어졌습니다. 눈이 녹는 3월, 몇 백 키로그램의 강냉이가 지원됐지만 이미 마을주민들의 4분의 1 이상이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후략)
-당시 양강도 보천군 지역의 참상에 대한 탈북민의 증언.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19970095-00_01202816.jpg
당시 MBC 뉴스데스크에 보도된 고난의 행군 시기 참상(미국 CBS 촬영). 1997년 10월 2일, 북한 주민들의 굶주리는 모습이 미국 CBS 방송에 방영되며 전 세계에게 큰 충격을 줬다.(KBS, MBC) 당시 북한을 취재한 기자 피터 밴 센트는 북한 인구의 5분의 1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전하며, 북한을 돌며 북한의 고난의 행군으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는 비참한 상황을 촬영하였다.

황장엽의 회고록[24]을 근거로 300만이 굶어 죽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북한 외무성은 22만 사망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2008년 UN에서 조사단을 파견해 직접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결과로 추정한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자는 의외로 북한 측의 주장에 가까운 약 30~40만 명이다. 물론 그래도 많은 숫자임은 확실하다. 당장 이 당시 인구 17만 명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무려 200명이 죽어나갔을 정도로 심각했다.

인구의 5%가 사라진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인구의 5%가 증발한 대약진운동에 비하면, 인구의 1.5~2%가 감소한 것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저 수치에는 나타나지 않은 한 가지 사실에 있는데,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태도 절대로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름대로 잘 먹던 70~8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북한 성인은 그래도 허우대가 비교적 좋은 반면, 고난의 행군이 발생한 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키와 체격이 아주 왜소하다. 이 때의 청소년들은 성장이 매우 느려서 탈북 관련 TV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10대 후반의 고등학생이 한국의 10대 전반 초등학생과 비슷하였고, 10대 중반의 여학생은 아예 한국의 8~9세 정도의 성장을 보일 정도로 영양 상태가 매우 안 좋았다.

더 심각한 것은, 대약진운동은 몇 가지 병크로 인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으며 수습 또한 고난의 행군과 비교하면 단기간에 성공한 반면, 고난의 행군은 무려 만 5년에 걸쳐 이런 엄청난 기근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워낙 구멍이 크고 광범위해서 어디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반 세기 동안 내부 자원을 있는 대로 쥐어 짜내고 갉아먹으며 쌓여온 적폐가 마침내 폭발해 발생한 기근이니, 단기간 내에 수습이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마오쩌둥마저 권위는 유지했으나 실권을 크게 상실하고, 뒷방 늙은이 직전까지 전락할 정도로 '책임'을 지도록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도, 오직 외부에만 책임을 돌리고 사실상 정권 핵심부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북한의 정치 체계가 정상적인 수준의 평가 기능은커녕, 최소한의 판단 능력조차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이 때부터 북한 정권이 어떤 집단인지 깨닫게 되었다. 특히 한국 내 북한에 대한 환상은 이 일을 계기로 완전히 깨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지나친 영양 결핍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정도다. 성인에 진입한 90~00년대 출생자들의 키가 머리 하나 크기 감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014년 현재 10~20대에 신장이 150cm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발육부진 세대라고 부른다. 출생자들의 낮은 신장으로 인하여 이들의 군 복무 시기부터 대폭 하향된 신검 신장 기준이 확인이 되면서 이 추측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 대재앙은 북한의 교육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줬다. 이 시기를 겪은 아동들, 그러니까 90년대 출생자들의 문맹률이 이전 세대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다. 북한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쉽게 배우라고 만들어진 한글을 쓰는 국가에게 무슨 문맹이 발생할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오겠지만[25], 진지하게 이 시기를 거친 탈북 청소년 절대 다수가 한글조차도 읽거나 쓰지 못한다고 한다. 폐쇄적이고 철옹성 같았던 북한의 시스템 자체가 이때부터 총체적 난국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북한 관련 통계를 보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인데, UN 추산 1인당 GNI가 1989년 약 900$ 수준에서 1998년에는 500$수준으로 급감했고, 이후 2006년까지 900$대를 회복하지 못했다. 사실 1990년부터 GNP 하락이 시작됐다는 것을 보면 북한 경제는 망했다.

현재는 수치상으로는 대략 90년대 초반 수준으로 경제 상황은 상당히 나아졌고 시장도 크게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시장화의 부작용으로 양극화 현상이 벌어져 빈부격차가 급속히 커진 데다 사회 복지 제도와 배급 체계는 고난의 행군 시기 이전으로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해 출세한 계층[26]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의 사정은 굶어 죽을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난의 행군 이후 인구 손실 추정

김정일은 이 처참한 결과에 대한 책임과 관심을 애먼 곳으로 돌리느라 급급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심화조 사건이었다.

2000년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기념하며 고난의 행군이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기에 이후에도 20만명은 더 죽어나갔다고 한다.

4. 남한측의 반응

1994년 김일성 사후 조문파동으로 냉랭해지던 남북관계는 1995년에 북한이 식량난으로 쌀 지원을 요청하면서 반전할 기회가 찾아왔다. 동년 5월 26일 나웅배 통일부총리가 "민족복리 차원에서 어떤 전제조건이나 정치적 부대조건 없이 북한이 필요로 하는 곡물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한 후 6월 17일부터 사흘 간 비공개 회담을 진행해 남한이 북한에 1차로 원산지 표시 없이 쌀 15만 톤을 무상 제공키로 합의했다. 이걸로 남북관계에 새 물꼬가 트일까 싶었으나, 얼마 뒤 '인공기 사건'이 훼방을 놓았다. 즉 남북은 대북지원선이 태극기와 인공기를 모두 계양한 채 항해하다가 입항 후 모두 내리기로 합의하였는데 6월 쌀 2천 톤을 실은 씨아펙스호에게 북측이 입항하기도 전에 태극기를 모두 내리도록 무력까지 동원하며 합의를 어겼고, 이에 보수언론들은 대북 지원을 하면서도 북한에게 저자세를 보인다며 정부를 비판한 것이다. 추후 북측이 대외협력위 명의로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했으나 개선되지 못하였다.

이 후에도 대북 쌀 지원선 삼선비너스호 일등항해사가 청진항 사진을 찍다가 북한에 정탐 행위로 몰려 억류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안승운 목사가 납북되는 사건[27]이 일어나며 악화일로를 걸었다. 특히 삼선비너스호 건은 북측의 사과 요구를 굴욕적으로 수용하면서 종결됐다.

그러나 위와 같은 두 가지 사건은 남북간에 감정적인 앙금을 낳아 차후 회담을 어렵게 했다. 9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3차 회담에서 북측이 쌀 추가지원 규모에 대해 우선 협의하자고 하자, 남한이 86우성호 선원 송환 및 회담장소 변경을 주장하며 양측이 팽팽히 맞서다 결국 결렬되었다.

대북 쌀 지원 문제는 북한이 처음으로 일본에 쌀 지원을 요청하자 이를 알아차린 한국 정부가 남북 당국자 간 대화 재개 기회를 마련키 위해 쌀 지원을 자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처음엔 어떠한 조건 없이 쌀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북측의 막나가는 행동으로 국내에서도 반발이 일어났고 정부에서도 회의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즉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나 북한 특유의 막무가내식 행동으로 인해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한 것이다. 일각에선 6.27 지방선거를 앞두고 쌀 지원을 하여 김영삼의 정치적 성과로 직결시키려 했다고도 해석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쌀 지원이 국익에 도움 안 된다고 판단해 대북정책을 강경 일변도로 되돌렸고, 10월 7일 코렉스부산호 출항을 끝으로 대북 쌀 지원은 끝났다. 김영삼 대통령도 <뉴욕타임즈> 회견에서 "더 이상 남북회담은 없다"고 강경대응했고, 북한 역시 뻗대는 행동으로 일관하면서 파국을 맞았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도 1996년 새해 국정연설에서 북한이 변화하지 않는 한 추가적 대북지원에 반대한다고 입장을 강조했다. 경실련 논평도 참고. 반면 북한은 북한대로 호전적 성명을 연일 내보내며 국제구호단체 등의 지원을 받은 채 기어이 버티며 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계속 보여왔다.

사실 파국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1994년에 있었기는 했다. 1994년에 남북관계가 급격히 경색되었다가 지미 카터가 중재를 하면서 급속히 가까워졌고, 그 덕택에 서로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는데, 이때 남한 측에서 당시 북한 경제상황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이용해서 북한의 군축을 유도하고, 그 대신에 고속도로 건설 지원, 발전소 건설, 철도 현대화, 남포공단 개설 등의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었다.[28] 당시 북한도 식량배급량이 줄어드는 등의 상황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으니 받아들일 가능성 자체도 있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고령에 지병이 있던 상황에서 무리를 하다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틀어졌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한 결과로 현재까지도 여파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으로써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5. 영향

굶주린 북한 주민들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의 탈북을 감행하였고 이 중 일부는 남한으로 입국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이 국경 지대와 가까운 함경도 출신들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꾸준하지만 적은 수가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넘어왔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치적인 문제가 주류였다. 경제적 문제로 생존을 위해 북한에서 도망친 탈북자의 존재가 대규모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다. 이 시기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휴전선을 넘어 탈북하는 사람들도 민간인, 군인을 가리지 않고 급증했다. 최전방 군인들조차도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탈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나원 설립이 대한민국 정부 내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1995년에서 1996년 사이의 이 시기다. 이전까지는 군 정보기관과 국정원에서 탈북자를 전담 관리했으나 민간인 탈북자가 수십~수백명으로 늘어나면서 통일부 주관의 민간인 수용시설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 여성들의 지위가 급상승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장이나 기업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직장 생활이 의무적(?)인 남성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만 것. 거기에 북한 정권은 직장생활을 하는 남성들은 "사회주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동하지도 않는!) 직장에서 자리를 사수하도록 엄단을 했다고. 얼핏 들으면 황당해 보이지만, 생활총화나 상호 감시 등을 유지하기 위한 방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동안 가정에서 살림만 하던 여성들이 밖으로 나와 장사를 시작한 것이 장마당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의 경제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전환되었다. 실업자가 되어버린 남성은 '집 지키는 강아지' 내지는 '낮전등'[29] 정도로 그 위치가 전락하고 말았고, 여성은 지위가 높아지자 이혼까지 할 정도로 위치가 높아졌다. 북한 여성 인권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해당 문서를 읽는 것도 좋다.[30]

타이밍이 묘하게도 김일성이 죽고 바로 시작된 재앙이라서 상당수 북한의 보수층(?)이나 일부 탈북자들까지도 "김정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라는 생각[31]을 가진 이들이 많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경제가 꽤 탄탄하게 자리 잡혀 배부르게 먹거나,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았던 80년대를 겪다가 이런 대기근을 겪으니 더더욱 잊을 수가 없을 듯. 그러나 김일성의 죽음이 일종의 기폭제로 작용했을지는 모르나, 1970~80년대의 북한과 1995년의 북한은 결국 완전히 같은 체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 체제의 창시자인 김일성이 책임을 면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김정일에게 옹호해주기도 힘든 게 김정일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일선에 나섰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는 아예 늙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실상 북한을 통치했기 때문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그냥 부자가 쌍으로 글러먹었다

어차피 김일성이 살아있었다 해도 북한은 이미 1990년부터 지속적인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기록했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전면적인 개혁 개방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결과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1993년에 라선항을 특구로 지정하는 등 부분적인 개방 정책을 펴기는 했다. 경제,외교 정책을 전면적으로 전환하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더불어 고난의 행군을 쿠바 같은 북한과 동맹이던 나라나 해외에서도 잘 알고 "쟤들은 왜 저러냐?" 하고 어이없어 한다. 쿠바를 여행한 한국 여행자가 집주인(은퇴하여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전직 외교관)과 만나 이야기한 경험을 보면, 이 사람이 외교관 시절인 90년대 북한에 가서 지옥을 눈으로 봤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쿠바는 정말 북한에 견주면 천국이지, 저렇게 굶어 죽는 사람 여긴 없잖아" 이렇게 느끼고 와서 쿠바에 대하여 외국이 뭐라고 비난하면서 코웃음 치면 "북한 같은 나라를 보라고 쯧쯧" 이렇게 반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외교관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과 친하게 지낸 피델 카스트로조차 이 일에 대하여 당시 허구하면 김정일을 미쳤다고 욕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과 우호를 다졌고 북한과 일단 우호국이라 외교적으로 대놓고 이러진 못했고, 쿠바 정계에서 "아주 민중을 굶겨 죽이네..."라고 미친 놈이라고 꼴보기 싫다는 투로 투덜거렸다고 한다. 카스트로 역시 서방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은 인물이긴 하지만 국가적 위기에 가톨릭교회, 테크노크라트, 라울 카스트로를 비롯한 당 내 개혁파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개혁 개방을 통해 국민들 굶겨죽이진 않은 카스트로와 김정일을 비교된다는 건 카스트로에게 굴욕이다. 카스트로 말고도 쿠바 내 정계는 물론 다른 친북국가 대다수도 같은 반응이었다. 외교적으로 차마 뭐라고 말은 안 했어도 내부적으로는 북한이 미쳤다고 수군거렸으니까.

사실 쿠바도 북한과 비슷한 시기(1993년)에 경제 위기를 겪었다. 이쪽도 소련에 설탕을 팔고 석유나 공산품을 받아오며 그럭저럭 지내다가 물주의 공중분해로 인해 난리가 나는 등 원인도 대강 비슷하다. 그래도 쿠바는 유기농 농업이라든지 여러 모로 노력하고, 적어도 북한이랑 다르게 최소한 민중을 굶기는 일은 안 했다. 대대적인 군비 축소까지 하며 배급 제도 같은 기본적인 사회 복지 시스템은 최대한 유지하려 노력했고, 또한 농업 체계도 개편해서 유기농 농법을 확산시켰다. 북한에서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못하는 사이 쿠바에선 자영업의 활성화 및 관광 산업 활성화 등의 정책을 통해[32] 2000년대엔 상당한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일단 1990년대 초반의 경제난을 그럭저럭 극복했다. 그에 반해 북한은 90년대 고난의 행군 와중에 산업 기반 및 사회 복지 체계 자체가 전부 0으로 됐기 때문에 그 후유증이 매우 컸고, 2000년대에 와서 겨우 부분적인 자영업 활성화 조치를 했는데 그마저도 매우 소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거기에 핵실험까지 더해 중국의 호황과 남한과의 경제 교류 확대라는 절호의 기회를 얻고도 경제를 겨우 90년대 초반 수준으로 돌려놓는 선에 그쳤다.

같은 시기 러시아나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체제 변화에 따른 혼란과 침체가 생기긴 했지만, 위기라고는 해도 일단 북한에 비할 수준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속에서도 빈곤 문제는 항상 진지하게 다뤄졌고 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은 이루어졌다. 애초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니 이 문제를 완전히 방기해버린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를 기준으로도 실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탓하지만 당연히 북한이 하는 소리는 그냥 헛소리다. 자력갱생하는 주체적인 나라라면서 타국의 경제 제재가 무슨 상관일까?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상당 부분 제공한 김정일은 정작 인민들에게는 자신이 줴기밥(주먹밥)[33]을 먹고 쪽잠을 자며 일한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뒤로는 혼자 산해진미란 산해진미는 전부 처먹어서 지금도 두고두고 까인다.[34]

고난의 행군이 끝난 뒤, 아니 아직도 이어지던 2000년 초반, 경수로 공사로 북한에서 1년 동안 머물던 만화가 겸 전기기술자 오영진이 목격한 걸 보면, 아침을 굶고 온 북한인 노동자가 점심을 먹는데(동석하지는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밥을 푸는 것만 볼 수 있었단다) 적어도 여기 노동자들은 밥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그런지 엄청나게 퍼먹는데, 정말 남측 사람들이 경악할 정도로 밥을 식판이 넘쳐나도록 퍼가서 먹더란다. 하지만 아침이나 저녁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점심만 엄청나게 폭식하니, 노동자들은 점심시간 끝나면 비몽사몽 식곤증으로 제대로 일하지 못하며 공사에 그리 도움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6. 기타

위에서 대강 고난의 행군의 원인과 전개 과정을 서술하긴 했지만, 사실 '왜 하필 1995년이었는가?' 하는 질문은 아직도 북한학계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어차피 북한이라는 나라는 건국 이래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아본 적은 없었고[35] 특히 고난의 행군의 핵심으로 알려진 식량난 역시 198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는데, 왜 약 10년 이상을 버텨오던 이 시기에 급작스럽게 국가 체제 자체가 동반 붕괴하는 현상이 나타났느냐는 것. 그만큼 고난의 행군이라는 현상은 기존의 대기근들과는 차별화되는 사태다. 사회학적으로 김일성 사망과 이로 인한 국가 행정의 일시적 마비,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등의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은 애초에 현상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니. 공산주의식 혁명 의식 실종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20년 간 없는 자원에서 경제를 일으켰는데, 갈 사람은 다 가고, 2대는 혁명 정신은 없고, 그렇다고 일하자는 동인도 없고... 그러니 자꾸 정체되었다가 김일성 사후에 뻥 터졌다는 것.

가장 많이 거론되는 원인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경제권의 붕괴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하던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경제력이 약한 북한 등의 국가에게 물물교역 형식으로 원조를 해주고 있었는데, 북한이 수출한 제품은 품질이 너무 낮아 쓸 수도 없는 경우가 많았음에도 꾸준히 북한 제품을 사주고 북한에 물품을 공급해주고 있었던 것. 그러나 이런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력이 떨어진 북한으로써는 해외의 식량을 수입할 돈이 없었다. 미국의 농업 회사 카길과 식량을 받고 광석을 넘겨주는 거래를 시작했으나, 식량만 받고 광석을 보내주지 않자 카길이 거래를 끊었다.

1987년부터 계속 방영한 북한의 장수 만화영화였던 령리한 너구리 또한 고난의 행군을 피해가지 못하고 1995년부터 3년간 공백기를 뒀다. 먹고 살기 힘든데 시청자가 만화 영화를 보거나, 제작진이 그것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일부 북한 관찰자들은 저런 기근을 겪고도 북한이라는 국가가 붕괴하지 않은 것이 믿어지지 않다는 의견을 내면서 북한이 자체의 문제 때문에 붕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36]

2017년에 개봉한 영화 강철비에서도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고난의 행군에 대해 언급된다. 작중 메인 악역인 리태한(김갑수 분)이 고난의 행군 중에도 핵무기를 만들었지만 써먹지도 못하고 있었다며 울분을 토하는 부분이다.

2018년 영화 공작(영화)에서는 시체가 거리에 무더기로 쌓인 장면이 나오는 등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 이외에도 한 탈북자는 질긴 고기라도 맛있다며 남한 와서 고맙게 여기고 먹는다고 지인들에게 밝힌 바 있는데, 고난의 행군 시절 정말로 썩은 고기라도 먹었던 기억이 있기에 질긴 고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 시절 지옥을 겪어본 탈북자 증언을 보면 그야말로 입에 넣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죄다 먹었다는 증언들이 나온다. 그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일부 탈북자들은 과수원에서, 농촌 일손 돕기 도중, 심지어 가로수에 열린 열매만 봐도 따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고 한다.[어원] "고난의 행군"이라는 표현은 원래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김일성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쫓겨 다니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유격전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던 시기와 1956년에 있었던 8월 종파사건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지금은 북한의 경제난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현재에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격전을 1차 고난의 행군, 8월 종파 사건을 2차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3] 그 이전에도 핵심계층, 동요계층, 적대계층으로 나누어지기는 했지만, 이건 정치적인 의미의 계층을 나눈 것이었다.[4]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2013년 기준으로 을 하루 206g 정도로 권장되는 양의 3분의 1밖에 소비하지 않는다.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일일 권장량은 2,500kcal(1,800kcal 미만으로 내려가면 기아 상태로 본다), 쌀 100g의 열량은 360kcal이므로, 대부분을 밀가루, 육류 등 다른 음식으로 충당한다는 의미. 그러나 북한의 경우에는 부식류가 너무 부실하므로, 쌀 소비가 줄어들면 그것이 그대로 1인당 칼로리 섭취량에 현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5] 그나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배급제는 공산주의 경제 원칙에 따른 배급제이기 보다는 전시 상황에 따른 배급제에 가까웠다. 동 시대 영국 역시 전쟁으로 인하여 식량 부족 현상이 두드러지자 식량 배급제를 실시한 바 있고, 우리나라도 전쟁 등 위급 상황에서는 식량이나 의약품 등 필수 물자에 대해서는 시장 통제와 배급제를 실시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준비가 되어 있다.[6] 예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이지만 소련과 동독 등 타 동구권도 이런 식의 국영 상점이 존재했다고 보면 된다.[7] 모든 생활 필수 물자에 대한 배급제는 사실상 30년대에 포기한 셈이고, 이후 소련의 배급제는 일부 생필품을 배급의 형태로 지급하는 사회 보장 제도의 일종에 가까운 개념으로 운영되었다고 보는 쪽이 더 적절하다.[8] 이럴 경우에는 암시장에서 정가보다 웃도는 돈을 주고 물건을 사야 했다.[9]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초 생필품이 아닌 자전거, 시계 등의 사치품들은 무진장 비쌌다. 당장 북한만 해도 노동자 월급 70원 하던 1980년대에 흑백TV의 국정 가격이 1,500원이었다. 사회주의 체제는 단기간 내에 생산량을 무지막지하게 늘려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똑같은 자원이 있으면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생필품, 혹은 당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방위 산업에 쏟아부어야지,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닌 사치품들을 생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생산량 자체를 철저히 통제하는 것은 물론, 의도적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해 구매 의욕 자체를 박탈해버린다. 어중간한 가격이면 근로자들이 그 쥐꼬리만 한 돈으로 차 한 대 사보겠다고 현금을 모을 테고, 그렇게 모인 현금으로 현금 거래가 활발해지는 것은 모든 물자의 유통을 장악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정권 입장에서는 악몽과도 같은 일이다.[10] 2010년경부터는 "써비차"라고 부르는 개인화물운송업자들이 생겨나면서 수송난이 크게 완화되었다.[11] 감자는 냉장 유통이 안 되거나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싹이 나거나 얼어버리는 등 유통이 쉽지 않다.[12] 같은 세기, 같은 양의 비가 오더라도 나무가 있는 숲은 무성한 나뭇잎층, 나무 밑의 풀과 관목층, 낙엽층을 뚫느라 비가 흙 표면을 침식시키는 힘이 감소하지만, 다락밭을 만드느라 민둥산이 되고 낙엽층도 사라지면 그대로 노출된 흙 표면+그대로 운동에너지를 보존한 빗방울에 의해 침식 속도가 급격히 빨라진다.[13] 하지만 이게 오히려 득이 되기도 했던 것이, 폴란드가 1980년대 외채난으로 인해 가용 예산의 상당수가 외채를 갚는 데 들어가서 식량 부족이 시달릴 때에도 각 폴란드 가정은 시골의 연줄을 통해서 (혈연, 지연 등) 음식을 날라다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경제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폴란드는 동유럽에서 알아주는 대 농업국이다. 북한처럼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이야기.[14] 이는 김정일의 지도력이 그만큼 약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의외로 상당수 전문가들이 김정일의 권력 승계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기도 했다. 말이 많기는 하지만 어쨌든 군 출신에 항일 유격전을 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김정일은 군 관련 활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작업을 통해 적자인(김일성과 본처인 김정숙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므로) 자신에게 이를 이을 정통성을 부여 받고자 한 것이다.[15] 예를 들자면 일본의 개화기 시절 때에는 적은 비용과 빠른 속도로 건설할 수 있는 협궤를 깔아 물류 이동을 통한 산업화에 성공했었지만, 후대에서는 협궤의 단점 때문에 후손들이 두고두고 고생을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아직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철도 정책 자체는 대단히 성공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16] 대한민국의 경우는 예외로, 조선 고종의 주도로 서방 열강 자본으로 철도건설이 시작되고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병참기지화정책에 따라 본격적으로 철도노선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철도는 대부분의 사례에서 국가의 주도로 운영되며, 특히 비 선진국 국가에서는 이 효율과 절대적 수송량이 높지 못했기에 결국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한 교통체계를 구상하게되었고 경인고속도로를 시작으로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등 주요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교통체계가 짜여졌다. 물론 이와 같은 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대한민국은 성공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좁은 국토에 과밀된 도시화와 차량과밀의 원인 중 하나로 고속도로가 꼽히기도 하는 현실이다. 현재는 교통대란을 해소하기 위해 넉넉해진 국가재정을 바탕으로 철도에 힘을 실어주는 중이다.[17] 땅굴 대다수가 이렇다. 당장 우리나라 지하철들만 해도 지하수를 퍼내는 펌프질을 멈추고 몇 개월 지나면 전부 물에 잠긴다. 참고로 2016년 서울 지하철 1~8호선에서 하루에 나오는 지하수의 양은 6만8천톤이다. 그나마도 거의 재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류해서 매번 까이고 있다고(기사)[18] 河狀係數. 어느 한 하천에서 어떠한 지점을 정해 놓고 1년 또는 여려 해 동안의 최대 유량을 최소 유량으로 나눈 비율. 수치가 클수록 유량의 변동이 크고 불안정하다.[19] 쉽게 말해서, 전력은 지속적이고 꾸준한 공급이 생명이다. 지나치게 많이 생산된 전력은 잉여일 뿐이고 부족하면 난리 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여름철에 비가 집중되므로 수력 발전 위주로 전력을 설계했다면 겨울에는 전기가 끊겨 모닥불을 지펴야 하는 지경이 된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연간 강우량은 많지만 가뭄이 심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비들이 모조리 여름에 집중되어서 발생한다. 그 덕분에 하천부 개발, 저수지 확충 등이 이루어졌다.[20] 참고로 공산권 국가들은 화폐 가치로 무역을 하지 않고 노동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물물교환 형식의 거래를 주로 했다. 정치적인 배려로 공산권 큰 형님인 소련이 많이 퍼주기도 했었다.[21] 북한이 무역에 있어서 얼마나 한심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재일동포 사업가가 북한과 합작해 마카오에서 원단을 수입, 남포에서 양복을 제작, 일본 내의 중, 저가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든 비용은 다 재일동포 사업가 자신의 돈으로 부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일본으로 와야 할 제품들이 들어오지 않자 궁금해진 그 재일동포 사업가가 남포로 가서 물으니, "마카오와 홍콩이 돈을 더 주겠다고 해서 그곳으로 수출하게 되었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 이 재일동포 사업가가 기가 막혀 "공장과 사업에 관계된 모든 비용을 내 돈으로 한 것인데 나와 상의 없이 당신들 마음대로 바꾸는 게 어디 있냐"고 따졌더니, "조국의 혁명적인 사업을 위해 돈을 기부한 것으로 여기면 될 것을 왜 따지느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기에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훗날 임종 전 유언으로 자녀들에게 "북한과는 그 어떠한 사업도 하지 마라!"고 했다고 한다.[22] 러시아는 공산주의가 몰락했으며, 중국은 정치만 공산주의를 표방할 뿐, 경제 체제 자체는 자본주의를 도입한 지 오래되었다. 여기에 두 나라는 북한이 하는 한심한 짓에 일찌감치 내다 버린 자식 취급하며 제대로 된 대우조차 안 해줬다. 심지어 이 양국이 대한민국과 수교를 맺을 것 같은 조짐을 보이자 김일성이 직접 방문해서 혈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막으려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당시 소련)은 겉으로만 답변을 했을 뿐, 결국 수교를 맺고 말았다. 물론 이에 '배신(?) 당했다'며 분노한 김일성은 '자주적(?) 노선'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지만.[23] 이 편차 때문에 일각에서는 고난의 행군에서 동북 지역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이 김정일의 고의적인 동북 지역 핍박이라는 설도 있다. 관련 내용은 지역감정의 북한 부분 참조.[24] 황장엽은 고난의 행군 첫 해에 100만 명이 죽어나갔고, 이후에 추가로 100만 명이 더 죽어나갔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300만 명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소 150만, 많으면 350만은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함흥시에서 입수된 내부 문서는 360만 사망설을 적고 있었다.[25] 대한민국도 문맹률이 80% 정도에 육박하여 높았던 시기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1948년, 즉 광복 직후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그마저도 의무 교육을 도입함으로써 1959년에는 20% 정도까지 낮아졌다. 현재 우리나라는 (문맹률의 반대 개념인) 식자율(識字率)이 99%로 전세계 최고 수준이다.[26] 예를 들면 조총련계 교포 출신들과 화교, 중국이나 일본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 이들은 외부로부터 자금 조달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고난의 행군 시기 시장화의 혜택을 본 계층으로 손꼽힌다고 한다.[27] 안승운 목사는 2010년 북한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28] 다만 남포공단 계획 자체는 1992년에 합의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어진 것이 2000년대 와서부터였다는 것이 문제였지.[29] 낮은 밝으므로 전등을 켤 필요 없으니, 잉여라는 뜻이란다.[30] 위치가 높아진 것과는 별개로 북한의 여성 인권은 여전히 총체적 난국 상태로, 여성 자살률과 성범죄 피해 발생률, 가정폭력 발생률도 높은 편이다.[31] 김정일을 그리 비난하던 황장엽은 적어도 김일성이 집권을 하던 시절에는 죽기 직전까지 굶주리진 않았다며 비난을 하지 않았다. 끝내 황장엽 역시 탈북을 하게 된다.[32] 북한도 비슷한 조치를 하긴 했는데 2000년대에 와서야 시행했다는 게 문제. 1990년대 중반에도 상당 부분은 시행하다시피 했으나, 이건 사회 통제가 붕괴해서 먹고 살 길이 없어진 인민들이 어쩔 수 없이 장사했던 게 퍼진 것이다. 북한 정부는 그 무렵 어버버 거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제도적으로 시행됐다.[33] 줴기밥을 자주 먹기는 했는데, 그 줴기밥이란 게 동유럽산 기름, 뉴질랜드쇠고기, 연어알, 캐비아 등을 넣어서 만든, 재료비만 45$나 되는 물건이었다고 한다.[34] 김정일 항목으로 들어가 이 작자가 자신 산해진미 목록을 살펴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이 굶주림을 못 이겨 민가를 습격해 식량을 훔치다 걸려 처벌하자는 얘기가 나오자, "지금 내 아들들이 배고파서 한 일을 처벌하겠다는 거냐?"라는 개소리를 했단다.[35] 흔히 말하는 1960년대에는 남한보다 잘 살았다는 이야기도, 뒤집어 놓고 보면 결국 그나마 잘 나가던 시절에도 1960년대 남한 수준보다 좀 나은 정도밖에 안 되었다는 소리고, 그 이상의 것을 이룬 적은 없다는 뜻이다.[36] 그러나 이때까지는 북한의 핵개발이 표면화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북 제재를 할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고 중국 역시 북한의 완전한 붕괴는 바라지 않았으므로 암암리에 북한을 돕고는 있었다. 탈북인 출신인 주성하 기자는 만일 북한이 제 2차 고난의 행군으로 들어간다면 견뎌내지 못한다고 밝혔다. 2차 '고난의 행군'은 로드맵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