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한이탈주민 박명호
박명호 | |
조선인민군 공군 공병 대위 출신의 북한이탈주민.
1.1. 생애
아버지가 인민군으로 한국 전쟁에 참가하는 등 토대가 좋은 집안이었지만, 2006년 가족을 이끌고 탈북했다. 군복무 당시, 리병철이 장진에서 연대장 할 때 휘하에 있었고, 그가 부사단장 할 때 소대장을, 그가 사단장으로 복무할 때 중대장을 한 인연이 있다. 중대장 시절에 미역 등을 채취해서 부대 내 영양실조가 한 명도 없어서 사단 내에서 크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1.2. 탈북 과정
2018년 1월,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탈북 스토리를 공개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로 남한의 소식을 몰래 들으면서 "못 살겠다. 북한은 잘못된 국가다." 라고 생각해서 탈북을 결심하였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너무나도 가난했던 시절이라 매일같이 산에 가서 풀을 많이 캐먹는게 일상이었다보니, 중대장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병사들에게 먹으면 안 되는 독초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도 했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의 대한민국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산나물은 그냥 시장에 가서 사먹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일화다.
공군에서 제대한 이후 당비서 같은 고위 직책을 역임하고 있었는데도 생활고로 살기가 어려워서 탈북을 시도하기 위해 해안가로 이사도 했고, 어업 일까지 배우면서 탈북의 기회를 노리기 위한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우리 같이 남조선으로 내려가자." 라고 권유했지만, "뭐하러 거기까지 가느냐. 죽어도 고향에서 죽어야지." 라면서 탈북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또한, 어느덧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성장했고, 물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나갈 때 아들들이 같이 바다로 나가 어업을 도와주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내가 그 때부터 사고로 배가 뒤집혀서 남편과 아들들이 혹시나 잘못 되지는 않을지 걱정도 되었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만 빼놓고 남조선으로 내려가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에 내심 불안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아내는 탈북을 반대하던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찬성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실, 탈북의 결정적인 계기는 박명호 본인이 북한 사회에 염증을 심하게 느끼는 것도 있었지만, 큰 아들이 어느덧 성장하여 인민군으로 입대해야 되는 나이가 되기 시작했고, 군복무를 해야 되는 10년간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개고생만 하다가,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매우 싫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명호 본인도 군인 집안이었고 제대군인 출신이라 당연히 조선인민군의 썩어빠지고 부패한 실상을 절대로 모를 수가 없었다.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렇게 막장의 끝을 달리는 북한군에서 자식을 빼내는 일은 스티브 유처럼 비겁하게 외국으로 도망가는 파렴치한 짓거리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식들이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물론, 큰 아들과 작은 아들도 인민군으로 입대했다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북한에서 40년을 살아온 자신과 아내는 몰라도 아버지로서, 어린 두 아들에게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키우면서 참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들의 밝은 미래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서 탈북할 때 타고 갈 수 있는 목선을 샀고, 탈북에 성공한 뒤 대한민국에 정착할 때는 땡전 한 푼도 없었다. 오직 북한에서 사온 복권과 이삿짐들만 들어있었다고...
그런데 14살짜리 작은 아들은 탈북을 반대하던 입장이라, 목선을 타고 탈북을 시도할 때 그냥 몰래 술을 먹여서 재웠다고(...) 한다. 북한의 술은 대부분 대한민국의 술보다 도수가 독한 것으로 유명한데, 작은 아들에게 술까지 먹여서 재웠을 정도로 얼마나 독하게 마음을 먹고 탈북을 결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훗날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물을 마시라고 하니까 물인 줄 알고 마셨는데, 알고보니 그게 술이었다. 자고 일어나니까 하루 아침에 나라가 바뀌어있었다." 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 년의 계획을 미리 세웠고 실행하려고 했으나, 막상 탈북을 시도했을 때 너무 무서워서 몸이 안 움직였다고 한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날을 잡은 것이 2006년 4월 25일. 북한의 건군절이라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간다는 것을 핑계로 목선을 끌고 황해남도 옹진군을 출발하였다. 막상 주변에서는 투철한 공산당 집안 출신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무도 탈북을 시도한다는 의심을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늦었을 뿐만 아니라 날씨가 좋지 않았고 타이밍이 맞지 않아 첫번째 탈북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그 당시 저 멀리 연평도가 보여서 아내와 두 아들은 속도를 올려서 냅다 연평도로 올라가자고 했지만, 목선의 성능이 좋지 않아 최고시속 4~5 노트가 고작이라, 잡힐게 뻔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배를 다시 돌렸다고 한다.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 현실적으로 대처를 한 박명호의 판단력이 돋보인다.
이 때 아내의 닥달로 인해 집안에 있는 이삿짐을 다 실었는데, 그걸 또 다시 꺼내서 감시를 피해 몰래 집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의 아내는 '남조선 인민들은 못 산다.' 라는 북한의 세뇌 때문에 탈북하면 가족들이 길거리에서 꽃제비처럼 살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집안의 가재도구를 포함해서 이삿짐들을 잔뜩 배에다 실었다. 심지어 밥을 해먹으려고 대한민국에서 대북지원용으로 보낸 쌀 두포대와 불을 피울 구멍탄도 잔뜩 실었고, 집에서 키우고 있었던 강아지까지[1] 목선에다 실어서 모두 데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첫번째 탈북 시도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실패했다. 이 때 전혀 들키지 않았으니, 주위 사람들에게는 모르는 척 하고, 당비서 회의 출장으로 15일간 평양으로 한 번 갔다왔다는 것이 코미디였다. 그렇게 박명호 일가는 몰래 탈북을 시도한 것이 걸릴까봐 항상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고, 긴장감이 너무 심해서 자다가 악몽까지 꾸는 바람에, 언제 잡힐지 모를까봐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하루 빨리 북한을 빠져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두번째 탈북을 시도할 때는 지난 번의 실패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아침부터 안개가 엄청 뿌연 날씨를 확인한 뒤 대낮부터 대담하게 목선을 타고 다시 한 번 탈북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이삿짐을 날랐는데, 보위대 여군들 앞에서 대범하게 이삿짐을 날랐다고 한다. 박명호 일가의 신분이 높았고, 그 때가 마침 숭어철이라 선박 단속원이나 보위부에서도 탈북을 시도한다는 의심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렇게 다시 한 번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딱 한 달만인 5월 24일에 다시 한 번 탈북을 시도했고, 이틀동안 항해를 하는 두번째 탈출 시도 끝에 극적으로 대한민국으로 정착하는데 성공한다.
탈북을 시도했을 때, 북한 해군 경비정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개마고원 출신이었던 눈이 좋은 아내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큰 아들은 목선에 들어오는 물을 퍼내서 버리는 역할을 했다. 이 때 북한에서는 나침반이 귀해서[2] 나침반도 없이 육안관찰과 낡은 지도 하나만 들고 남쪽으로 가는 항로를 파악해야만 했다. 결국 고생 끝에 NLL을 넘었으나, 당시 연평도로 표류했던 북한 어민들을 다시 북송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연평도나 백령도가 아닌 충청남도 부근을 목적지로 삼아서 목선을 타고 계속 남하했다. 이틀동안 항해를 하며 끝내 대한민국 영토의 섬이 보였는데, 수목이 울창한 것을 바라보고 남쪽의 섬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그 곳에다 배를 정착했다. 그 섬은 바로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덕적도였다.
당시 숭어를 잡기 위해서 낚시를 하고 있던 이장에게 "어르신? 이 곳이 어디입니까?" 라고 묻자, 이장은 "(인천광역시의) 옹진군이요." 라고 대답했다. 이 때 옹진군에서 출발했던 박명호의 아내가 "아니? 그렇게 고생하면서 목숨을 걸고 힘들게 탈출했는데 다시 (황해도의) 옹진군으로 돌아왔다고?" 라면서 깜짝 놀랐는데, 이틀동안 헛고생을 했다고 생각해서 크게 절망했다고 한다. 그래도 박명호는 진정시키면서 "아니야. 여기는 우리가 살던 곳과 다르게 나무도 울창하고 흑염소도 보여. 여기가 진짜로 남조선이 맞는지 아닌지 물어봐야 해." 라고 대답했다. 이는 남북의 분단과 함께 2개로 분할된 옹진군이 만들어낸 비극의 한 단면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이장이 박명호의 가족들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당신들, 어디서 왔소?"라고 질문했는데, 박명호는 "북쪽에서 왔어요."라고 대답했다.
노인 : "당신들, 어디서 왔소?"
박명호 : "우리는 북쪽에서 왔어요."
노인 : "아? 연평도?"
박명호 : "그 위에요."
노인 : "아? 백령도?"
박명호 : "아니, 더 위에서요."
노인 : (놀라면서) "응? 거기는 북한인데?"
박명호 : (웃으면서) "예. 바로 거기서요."
박명호 : "우리는 북쪽에서 왔어요."
노인 : "아? 연평도?"
박명호 : "그 위에요."
노인 : "아? 백령도?"
박명호 : "아니, 더 위에서요."
노인 : (놀라면서) "응? 거기는 북한인데?"
박명호 : (웃으면서) "예. 바로 거기서요."
결국 노인은 크게 놀라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렀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스스로 경찰에 자수를 하면서 "우리 가족이 탈북했습니다." 라고 자진신고를 하였다. 자신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노인에게 알렸는데 당연히 노인은 깜짝 놀라서 몇 초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가, 간첩으로 내려온 것도 아닌데다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지도 않았고 순순히 귀순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으니 웃으면서 "아이고. 먼 길을 내려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라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박명호의 가족들을 따뜻하게 환영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대낮부터 마을 사람들과 다같이 모여서 근처의 백반집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소주도 한 잔 마시면서 탈북을 시도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다. 마을 사람들은 박명호의 가족들이 타고 온 목선도 직접 구경하면서 "와? 정말 잘 만들었네? 그런데 이렇게 열악한 목선으로 어떻게 북한에서 내려왔어요?" 라고 놀랍다고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박명호 일가는 탈북에 성공하고 덕적도에 정착한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저희 가족들이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가 고프니까 먹을 것 좀 주세요." 라면서 식사를 얻어먹었다고 한다. 쌀밥과 계란 후라이나 여러가지 밑반찬같은 평범한 백반집 식당의 식사였지만, 24시간 넘게 굶었던 상황이었으니 그것마저도 황송하다면서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북한에서는 쌀밥이나 계란 후라이같은 평범한 반찬이라도 상류층들마저 쉽게 못 먹었던 매우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고질적인 식량난으로 일가족들이 어디가서 식사를 얻어먹는다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다.
이 때 경찰들도 박명호의 일가족이 가재도구까지 다 챙겨서 탈북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다, 순순히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과 같이 술도 다 마시고 가족들도 식사를 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뒤에 연행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엄밀히 보면 비무장 상태에서 자수를 했으니 어느 정도 배려를 해준 것이라고 봐야한다.) 여기서 박명호는 "남조선에서 우리들같은 탈북자를 무섭게 대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니까 살만한 국가는 맞는 것 같다." 라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가족들과 같이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조사를 받으러 갔을 때 주변의 경치를 둘러봤는데 도로가 매우 잘 닦여져있는데다 깜깜한 저녁인데도 가로등에 불빛이 가득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북한은 전력 사정이 매우 열악해서 우대를 받는 평양에서도 2시간 이상 전기를 공급하지도 못하니까 밤이 되면 깜깜해서 그렇다.
나중에 하나원에서 정착교육을 받았을 당시, 가족들과 시골 체험을 갔었을 때, "남조선의 시골 사람들이 살아봐야 얼마나 잘 살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집집마다 자동차와 트랙터도 있는데다, 농수로와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도 잘 되어있고, 시골 사람들이 키우는 개들도 쌀밥을 먹는 것을 바라보고 "이야? 남조선이 많이 발전했다고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그게 진짜였구나?" 라면서 매우 놀라웠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자동차를 일부 극소수 고위직의 특권층만 타고 다니고, 국경과 인접한 지역에서는 자전거를 소유하는 것조차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한은 전 세계에서도 자동차 보급률이 최하위권에 속한다.
2018년이 되어서야, 탈북 스토리를 공개한 이유는 박명호의 가족들이 타고 왔던 목선이 해군과 해양경찰의 감시망을 완전히 뚫은 것이기 때문이다. 해경에게 조사를 받는 도중 탈북 루트를 설명했더니, 해군과 해양경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고, 억울한 군인들을 살리자는 심정으로 해군과 해경 감시망이 없는 루트로 둘러서 왔다고 거짓진술을 하였다. 박명호도 예비역 군인인만큼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해군과 해경이 징계를 받을 상황이 다가온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1.3. 탈북 이후
2008년, 영국의 채텀하우스에서 탈북자로서 북한의 현실에 대해 증언했다. #이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다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 대한민국 공군에서 장교로 군 복무를 해달라는 제안을 요청받았다고 한다. 탈북자 중에서도 공군 장교 출신은 매우 귀한 인재였기 때문이다.[3] 그러나 군생활이 답답하고 지긋지긋해서 탈북을 한지라, 다시 군대를 가기 싫다는 생각에 제안을 거절하고, 본격적으로 생업을 찾아나섰다. 이에 가족들은 "아니, 장교는 안정적인 일자리인데 왜 안 해요?" 라면서 타박했지만, "우리 가족들이 자유를 찾아서 탈북했으니까 더 이상 군생활은 지긋지긋해서 하기 싫다. 그리고, 남한이나 북한이나 군대는 똑같이 상명하복으로 본질은 같으니까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라면서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라고 거부를 하는 태도였으니, 가족들도 끝까지 강요를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남한에 정착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여러가지 일을 해보다가[4] 공군 시절에 잠수부로 작업을 했던 적이 있어서 가장 적성에 맞을 것 같은 바다에서 일하는 직업을 찾던 도중에, 강원도 최북단 고성군에 정착하여 머구리 생활을 하였고, 목돈을 모아 물고기를 잡을 좋은 배도 구입했고, 횟집을 창업하면서 사장님이 되었다.#
이후 앞서 언급한대로,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해 자신의 탈북 스토리를 증언했다. 머구리 생활을 하면서 잡아온 해산물들도 직접 선보였다. 마침 그 때 외부 패널로 미할 스파소프 아슈미노프가 출연했기에, 그에게도 북한식 해산물 요리를 대접했다. 2021년 중반의 개편 이후에도 얼굴을 비치고 있다.
훗날, 박명호 본인은 "우리는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이사를 온 것이지. 탈북을 한 것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 박명호 일가는 정말로 이삿짐을 모두 싣고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5] 그리고 "대한민국은 내가 평생동안 살아갈만한 국가가 맞는 것 같다." 라고 생각한다고... 박명호가 어린 시절부터 김씨조선이 지배하는 북한 사회에 얼마나 염증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삶을 다룬 독립영화 올드마린보이가 개봉하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넘어 탈북했는데, 또 다시 목숨을 걸고 바다에서 일을 하는 그의 휴먼 스토리에 감명을 받아 감독이 직접 설득했다고 한다.
현장르포 특종세상에서 근황이 나왔다. 두 아들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머구리 일을 하고 있다. 둘째는 명문대 졸업을 했으나, 아버지의 설득에 머구리 일을 하고 있다. 취업 문제로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듯 하다.#[6]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2023년에 박명호 일가와 비슷하게 목선을 타고 일가족이 탈북한 사건이 일어났다. 자세한 것은 2023년 북한 일가족 NLL 귀순 사건 문서를 확인하자.
1.4.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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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 전부터 화제, 가족 위해 매일 목숨 거는 남자 - 가족 사진이 실려있는 기사
2. 가수 박명호
이름 | 박명호 |
출생 | 1974년 4월 16일 ([age(1974-04-16)]세) |
학력 | |
신체 | B형 |
데뷔 | 1996년 허니 1집 Honey |
소속그룹 | 허니 패밀리 |
MBTI | ENFJ |
| |
2.1. 음반
2.1.1. 개인 음반
Park Myung Ho First |
God of Mom |
침대구석 |
해요 (Feat. 경상은) |
2.1.2. 허니 패밀리 음반
자세한 내용은 허니 패밀리 문서 참고하십시오.[1] 그 강아지는 하나원에서 키웠다고 한다.[2] 술이 귀한 북한의 군인들이 나침반에서 알콜을 몰래 빼간다고 한다.[3] 공군 장교 출신 탈북자인 이웅평 역시 탈북 이후 한국 공군에서 복무했다.[4] 이삿짐 센터, 축사, 농사, 건설현장 등등 여러가지 일을 해봤다고 한다.[5]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은 헌법 3조에 북한을 한국 영토로 명시하고 있고, 그에 따라 북한 주민들도 외국 국적을 따로 얻지 않은 이상 당연히 자국민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마따나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온 걸 이탈이 아닌 이사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단지 현실적 제약 때문에 이사를 목숨걸고 해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6] 덧글의 반응은, 둘째 아들에게 머구리 일을 물려주는 것에 대해 그렇게 좋게 생각을 안하는 듯 하다. 사실, 좋든 싫든 머구리라는 직업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되는 위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