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20 17:10:33

동아일보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조중동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10대 중앙 종합 일간지
서울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국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국민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
순서는 창간일자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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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margin-bottom: -10px; margin-top: -5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 파일:동아일보 로고.jpg주식회사 동아일보사
株式會社 東亞日報社
THE DONG-A ILBO
}}}
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설립 1920년 4월 1일[1]
창간
창업주 인촌 김성수
주소 본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서린동)
충정로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9 (충정로3가)
DMC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75 (상암동)
대표자 김재호, 임채청
임원진 대표이사 사장 김재호
대표이사 부사장, 발행·편집·인쇄인 임채청
부사장 이희준
업종명 신문발행업, 정기간행물출판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
임직원 659명 (2018년 12월)
매출액 2,945억 8,225만 원 (2018년 연간)
영업이익 52억 8,782만 원 (2018년 연간)
순이익 64억 1,392만 원 (2018년 연간)
최대주주 재단법인 인촌기념회 (지분 24.14%)
사이트 파일:동아닷컴.png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1. 개요2. 사시3. 사가
3.1. 구 버전3.2. 신 버전
4. 사옥5. 역사
5.1. 일제강점기5.2. 광복 이후
6. 역대 임원
6.1. 상임고문6.2. 명예회장6.3. 회장6.4. 부회장6.5. 대표이사 사장6.6. 대표이사 부사장6.7. 부사장
7. 역대 법정등록인
7.1. 발행인7.2. 편집인7.3. 인쇄인7.4. 출판편집인
8. 역대 주요 간부
8.1. 편집감독8.2. 주간8.3. 주필8.4. 편집/논설상임고문8.5. 논설고문8.6. 논설주간8.7. 논설위원실장8.8. 수석논설위원8.9. 수석해설위원8.10. 편집고문8.11. 편집국장8.12. 출판국장
9. 상징10. 성향11. 논란과 비판12. 기획·특집기사13. 기타14. 자매지 및 정기간행물15. 주요 대회
15.1. 사라진 대회
16. 계열사17. 산하기관18. 공익재단19. 제휴 신문사20. 관련 인물21. 관련 문서22. 관련 문헌

1. 개요

東亞日報, Dong-A Ilbo

파일:동아일보.jpg
세상을 보는 맑은 창, 신뢰받는 신문 東亞日報
- 동아일보 비전
한국의 조간 종합일간신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자세한 건 이곳을 참고.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앙 일간지 중에서는 서울신문(1904년 창간), 조선일보(1920년 3월 5일 창간)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 된 일간지다.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이라 불리는 우파의 3대 신문사이다. 대한민국 언론 삼대장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구독부수가 급속하게 감소하는 추세인 데다가[2](2018년 기준으로 발행부수 96만 부, 유료부수 74만 부)[3] 채널A도 TV조선만큼 화끈하지 않은 데다가 물론 선정성은 쌍벽을 이룰 수준이라지만 JTBC처럼 개혁적인 논조를 취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존재감에서 밀리기는 한다. 그러나 사실 80-90년대 조선일보가 급속한 성장세로 구독부수 1위를 기록할 정도가 되기 이전까지는 한국일보와 더불어[4] 구독부수에 있어서 1, 2등을 다퉜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한신문이었고 대표적인 야당지였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기준으로 유료부수에서 중앙일보를 이기고 2위를 차지했다.

전라도 지역의 부호였던 김성수[5]가 설립하였다. 그래서인지 옛날에는 "전라도 사람은 껌은 해태 껌을 씹고 신문은 동아일보 본다"는 말도 있었다.[6] 초대 사장은 박영효가 맡았으나[7] 1920년 평양 만세운동 사건조선총독부로부터 기사에 관한 제재를 받게되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김성수가 사장이 되었다. 초대 주간은 장덕수. 후에 송진우가 사장을 맡았다.

노조는 미가맹이다.[8]

2. 사시

파일:동아일보_창간호.jpg
동아일보 창간호 1면에 실린 동아일보의 사시
1. 본보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함
2. 본보는 민주주의를 지지함
3. 본보는 문화주의를 제창함
동아일보 사시
주지를 밝히노라
主旨를 宣明하노라

(1) 조선 민족의 표현 기관을 자임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소수 특권계급의 기관이 아니라 단일한 전체로서의 2000만 민중의 기관으로 자임하니, 그 의사와 이상과 의도와 운동을 여실히 표현하며 보도하고자 한다.

(2)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이는 국체(國體)니 정체(政體)의 형식적 표준이 아니다. 곧 인류 생활의 일대 원리요 정신이니 강력을 배척하고 인격의 고유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를 국내 정치에 적용하면 자유주의며, 국제정치에 적용하면 연맹주의요, 사회생활에 적용하면 평등주의요, 경제조직에 적용하면 노동 본위의 협조주의라.
특히 동아시아에 있어서는 각 민족의 권리를 인정한 가운데 친목과 단결을 의미하며, 세계 전체에 있어서는 정의와 인도(人道)를 승인한 가운데 평화와 연결(聯結)을 의미한다. (중략)

(3) 문화주의를 제창한다.
이는 개인이나 사회의 생활 내용을 충실히 하며 풍부히 함이니, 곧 부의 증진과 정치의 완성과 도덕의 순수와 종교의 풍성과 과학의 발달과 철학 예술의 심원함과 오묘함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하게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을 높이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선 민족의 사명이며 생존의 가치라고 사유한 까닭이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사 중 일부[9]

3. 사가

3.1. 구 버전

작사는 춘원 이광수, 작곡은 김영환이 맡았으며, 1926년부터 제정되어 59년을 사용해왔다.
1절
삼천만 가슴속에 졸던 자유혼
깨어라 소리치어 자유의 소리
나날이 새힘자라 새는 날마다
영원히 외치도다 자유의 소리

2절
이 붓대 보았는가 정의의 붓대
의 아닌 것 보고는 못 참는 붓대
차라리 의에 싸워 꺾일지언정
곧고 곧은 그 절개 꺾지 못하네

3절
횃불은 들렸도다 진리의 횃불
삼천만 우리 강산 두루 비치러
옛 역사 새 정신 타는 광명은
천만대 내리 전할 진리의 횃불

4절
원컨대 복이 되어 사랑의 꾸리[10]
끝없는 실을 끌고 동포의 가슴
낱낱이 들어나어 삼천만 혼을
짜리라 새 조선의 빛난 깃발로

후렴
동아일보 동아의 종소리 자유종 소리
삼천만 자유혼의 외치는 소리
만국에 울려라 만세에 울려라

3.2. 신 버전

1985년 창간 65주년을 맞이해 제정되었으며, 작사는 강인섭, 작곡은 김성태, 편곡은 장일남이 맡았다.
1절
동녘의 빛이어라 민족의 길 밝힌 등불
삼일정신 받들어 새벽을 헤쳐오다
밝히리라 온누리에 자유의 횃불
누구도 영원한 그 앞을 막지 못하리

2절
나라가 없을 때도 깨어있던 종소리
진리와 함께 가는 보람찬 길이로다
외치리라 온누리에 민주의 소리
누구도 의로운 그 붓은 꺾지 못하리

3절
아― 세계로 뻗어가는 겨레의 기상
시대에 앞장서서 문화의 발을 간다
알리리라 진실이 무엇인가를
천 년 뒤 만나도 살아있는 글자기를

후렴
동아일보 겨레의 얼 나날이 새로와라
나라 위한 바른 말 역사에 전하리라

4. 사옥

파일:일민미술관.jpg 파일:청계천 동아일보.jpg
광화문 동아일보 구 사옥[11]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52 (세종로)
세종로 동아일보 동아미디어센터[12]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 (서린동)
파일:충정로동아일보사옥.png 파일:DDMC.jpg
충정로 동아일보 사옥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9 (충정로3가)
상암동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13]
서울특별시 마포구 매봉산로 75 (상암동)

건축적으로는 2000년 완공된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빌딩 옆에 1926년에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마코토가 설계한 구사옥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데, 근대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나란히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광화문 구 사옥은 현재 일민미술관과 신문박물관으로 사용되고있고 국내에 남아있는 언론사 건축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참고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중동이라고 불리던 신문사들 중 구 사옥은 사라지고 신 사옥만 번듯하게 있는 조선일보, 일찍 폐간되어 농협으로 사용되는 구 사옥만 남아있는 조선중앙일보[14]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1992년 완공한 충정로 사옥이 있다. 원래 동아일보는 충정로사옥 완공 이후 이곳으로 본사를 이전하였으나, 광화문 구 사옥 옆에 동아미디어센터가 건설되자 다시 이곳으로 본사를 옮겼다. 2014년에는 디지털미디어시티채널A와 함께 동아디지털미디어센터를 신축하였다.


파일:동아일보100주년.jpg

2019년 3월 20일부터 2020년 12월 31일까지 프랑스의 현대미술가 다니엘 뷔렌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사옥의 외벽을 미술작품으로 바꾸었다. 한국의 색, 동아일보 X 다니엘 뷔렌

5. 역사

1920년 4월 1일에 전라도 지역의 만석꾼의 아들인 김성수가 설립하였다. 초대 사장은 박영효가 맡았으나 1920년 평양 만세운동 사건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기사에 관한 제재를 받게되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후임으로 김성수가 사장이 되었다. 초대 주간은 장덕수. 후에 송진우가 사장을 맡았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발행되었던 신문들 중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문이라 한국에서 발행된 신문들 중에서 역사가 긴 편에 속하기 때문에 한국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중심에 있던 신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조선일보와 사이좋게 서로 친일신문이라고 싸웠다. 결국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 씨가 반협박 비슷하게 중재하면서 일단락.

5.1. 일제강점기

창간때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는 일제의 문화 통치에 의해 창간된 한국어 신문 3개 중 유일한 민족지 노선이었다.[15]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검열에 저항하여 맞서기도 하였으나, 1920년대 후반에 가서는 논조가 상당히 온건해진다.

일제강점기의 손기정일장기 말소사건은 (원문) 교과서에도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사건이며,[16]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브나로드 운동[17]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지금은 없어진 박문사(博文寺, 現 장충동 서울신라호텔 면세점 부지)에서 일제는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을 단죄한다는 목적으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쇼를 벌였는데, 이 만행을 일제강점기 유력언론들 중에서 유일하게 보도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 언론에 별 관심없는 사람들은 동아일보에 대해 무척 호의적인 첫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를 두고 동아일보는 스스로 자신들이야말로 민족정론지라고 주장하는데 1930년대 후반 이후의 동아일보의 모습을 보았을때는 그다지 와닿지 않는 주장이다. 일례로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사장 송진우는 '소수 기자들의 실수였으며 이는 사측의 입장과 무관하다.'라며 정간을 해제해달라고 사정하였고, 속간이 되면서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 통치의 익찬을 다하려 하오니"라며 일장기 말소에 대해 사과하였다.[18]

폐간을 모면한 뒤 송진우는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모든 활동을 그만둔채 칩거생활을 지냈다. 1937년 속간된 이후의 동아일보는 친일 어용 기관지로 전락했다. 이를테면 학도병 권유문도 올렸다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그와 더불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광고를 자주 게재하였다.

파일:external/www.mediaus.co.kr/7810_12751_4218.jpg
사옥에 내선일체, 보도보국이라는 간판이 걸려있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8월 11일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한국어 신문들은 모조리 폐간당하게 되면서 조선일보와 함께 동아일보도 폐간당하게 된다.

당시 동아일보의 연재 코너 중에는 독자들이 엽서로 보낸 질문에 답을 해주는 일종의 1문 1답 코너가 있었다. 처음엔 제목이 '동아 살롱'이었다가 1936년에 '응접실'로 바뀌었다. 내용들을 보면 질문과 대답 모두 의외로 유쾌하고 날카로운 내용들이 많다. 살짝 과장해서 말하면 현대의 트위터인터넷 카페 수준으로 신선한 내용들이다. 문답들의 예시

5.2. 광복 이후

5년 뒤인 1945년 12월 1일에 다시 복간되었다. 1945년 12월 말에 동아일보에서 대서특필로 다룬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한국 근현대사를 완전히 바꿔났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대사건이었다. 쉽게 말해서 분단의 시초가 된 사건이며, 이 사건으로 좌우익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져 싸워 결국 찬탁하는 북한과 반탁하는 남한으로 분단되게 하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일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당시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이를 오보라고 시인했고 극렬한 반탁운동을 삼갈 것을 촉구하다가 반탁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 이전에, 김일성이 일으킨 보천보 전투를 대대적으로 호외보도하는 바람[19]에 민중들 사이에 김일성 신화가 생기게 만들어 윗동네 세우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나중에 와서 보면 여러모로 씁슬한 흑역사가 있다.(...)[20] 심지어 남북 교류가 활성화 됐을 당시 김병관 동아일보 사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천보 전투를 호외보도한 기사를 새긴 금판을 기증하기도 했다.‘보천보전투 금인쇄원판’ 선물 물론 이후에 남북 관계가 경색되자 김병관 사장과 동아일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급정색했지만.

1950년대 이후로는 미군정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신문 중 경향신문과 함께 대표적인 야당지로 자리매김한다.[21] 이 당시 동아일보는 '반독재 민주화'를 내걸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아일보의 창립자인 김성수의 정치행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내기반이 전무했던 이승만은 한반도 내의 친일파와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과 그 창립자인 김성수와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승만이 초대 내각 구성 당시 김성수를 총리로 지명하지 않았고, 한국민주당은 내각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는 야당지로 전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성향이 심화된 것은 김성수의 부통령 취임 이후였다. 6.25 전쟁 도중 국민방위군 사건에 실망한 이시영이 부통령을 사퇴하자, 국회에서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김성수에 우호적인 세력들이 제2대 부통령으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불편한 동거를 계속하던 김성수는 결정적으로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반발하면서 부통령을 사퇴하고, 반이승만 노선을 걷게 된다. 당연히 동아일보도 이승만 독재를 공격하면서 김성수 계열이 주도한 민주당민주당계 정당에 우호적인 야당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박정희 정권 때도 이어지지만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치밀한 언론 탄압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대표적인 탄압이 바로 동아일보 광고 사태.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반발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내면서 투쟁하자 정권의 외압으로 동아일보의 광고면이 전면 백지화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시민들이 기자들을 지지하며 동아일보에 개인광고를 내주는 등 지원을 했으나 결국 경영진의 굴복으로 기자들은 해직되고 회사도 친 정권적 성향으로 변하게 되었다. 해직된 기자들은 전두환이 물러나 민주화가 된 시점인 1988년에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외압과는 그다지 관련은 없지만 서울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면서 광화문 사옥이 헐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22]

같은 보수 언론으로 평가받는 조선이 주로 북한 같은 안보문제를 다루고, 중앙이 경제문제를 다루는데 비해 동아는 문화 방면을 더 다룬다. 창간 당시 사시(社是)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에 검열이 심하니까 민족주의, 민주주의보다는 문화주의가 강조되어 발행되었다. 딱히 큰 공연 없이도 항상 2면 이상을 문화면에 할애한다.

아예 노선이 확고한 조선일보나 기업들 입장을 대변하는 중앙일보와는 달리 이렇다 할 노선이 없어서 기회주의적이라고 비난받기도 한다.

2018년 1월 26일부로 지령 3만 호를 맞이하였다.

6. 역대 임원

6.1. 상임고문

  • 김상기, 김성열 (1989~1993)
  • 이채주, 이종석 (1997~1998)
  • 송수항 (2000~2003)
  • 어경택 (2003~2006)

6.2. 명예회장

6.3.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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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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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고재욱
제2대

김상만
제3대

이동욱
제4대

김상기
제5대

김성열
제6대

김병관
제7대

오명
제8대

김학준
}}}||
  • 고재욱 (1971~1975)
  • 김상만 (1977~1981)
  • 이동욱 (1981~1983)
  • 김상기 (1983~1989)
  • 김병관 (1993~2001)
  • 오명 (2001)
  • 김학준 (2008~2010)

6.4. 부회장

  • 김상기 (1977~1981)

6.5.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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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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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영효
제2대

김성수
제3대

송진우
직무대리

허헌
제4대

이승훈
제5대

김성수
제6대

송진우
직무대리

양원모
제7대

백관수
제8대

송진우
제9대

김성수
제10대

최두선
제11대

이희승
제12대

고재욱
제13대

김상만
제14대

이동욱
제15대

김상기
제16대

오재경
제17대

김성열
제18대

김병관
제19대

권오기
제20대

오명
제21대

김학준
제22대

김재호
}}}||

6.6. 대표이사 부사장

  • 임채청 (2017~ )

6.7. 부사장

  • 장덕수 (1921~1937)
  • 고재욱 (1961~1965)
  • 김상만 (1965~1971)
  • 김두익 (1971~1973)
  • 이언진, 김상기 (1973~1975)
  • 이동욱 (1975~1977)
  • 김성열 (1983~1985)
  • 김병관 (1985~1989)
  • 권오기 (1989~1993)
  • 송수항 (1999~2000)
  • 김병건 (1999~2001)
  • 김재호 (2006~2008)
  • 최맹호 (2010~2015)
  • 이희준 (2017~ )

7. 역대 법정등록인

7.1. 발행인

  • 이상협 (1920~1921)
  • 한기악 (1921~1924)
  • 설의식 (1924)
  • 김철중 (1924~1927)
  • 양원모 (1927)
  • 김석중 (1927~1930)
  • 송진우 (1930~1936)
  • 백관수 (1937~1940)
  • 임정엽 (1940)
  • 김승문 (1945~1947)
  • 국태일 (1947~1961)
  • 김상만 (1961~1969/1971~1977)
  • 고재욱 (1969~1971)
  • 이동욱 (1977~1981)
  • 김상기 (1981~1983)
  • 오재경 (1983~1985)
  • 김성열 (1985~1989)
  • 김병관 (1989~1999)
  • 오명 (1999~2001)
  • 김학준 (2001~2008)
  • 김재호 (2008~2016)
  • 임채청 (2017~ )

7.2. 편집인

  • 이상협 (1920~1921)
  • 한기악 (1921~1924)
  • 설의식 (1924/1945~1947)
  • 김철중 (1924~1927)
  • 국기열 (1927~1930)
  • 송진우 (1930~1936)
  • 백관수 (1937~1940)
  • 임정화 (1940)
  • 고재욱 (1947~1966/1971~1976)
  • 우승규 (1966)
  • 천관우 (1966~1969)
  • 이동욱 (1969~1971/1976~1981)
  • 권오기 (1981~1995)
  • 김병관 (1995~1996)
  • 오명 (1996~2001)
  • 이현락 (2001~2002)
  • 김학준 (2002~2008)
  • 김재호 (2008~2016)
  • 임채청 (2017~ )

7.3. 인쇄인

  • 이용문 (1920~1921)
  • 최익진 (1921~1924)
  • 조의순 (1924~1933)
  • 김병석 (1933~1935)
  • 황영모 (1935~1938)
  • 장석태 (1938~1940)
  • 이언진 (1945~1975)
  • 김성칠 (1975~1983)
  • 김병관 (1983~1985/1995~1996/1997~1999)
  • 최준철 (1985~1987)
  • 한갑수 (1987~1988)
  • 신용순 (1988~1989)
  • 김광희 (1989~1995)
  • 오명 (1996~1997/1999~2001)
  • 김학준 (2001~2006)
  • 김재호 (2006~2008)
  • 최맹호 (2008~2016)
  • 임채청 (2017~ )

7.4. 출판편집인

  • 이재호 (2009~2012[23])

8. 역대 주요 간부

8.1. 편집감독

8.2. 주간

  • 장덕수 (1920~1921)
  • 설의식 (1945~1947)

8.3. 주필

  • 장덕수 (1921~1923)
  • 홍명희 (1924~1925)
  • 송진우 (1925~1927)
  • 김준연 (1935~1936)
  • 고재욱 (1946~1949/1951~1955/1955~1965/1971~1974)
  • 김삼규 (1949~1951)
  • 천관우 (1966~1968)
  • 이동욱 (1968~1971/1974~1977)
  • 권오기 (1981~1989)
  • 이채주 (1994~1997)
  • 이현락 (1999~2000/2000~2001)
  • 배인준 (2010~2015)

8.4. 편집/논설상임고문

  • 김학준 (2000~2001)

8.5. 논설고문

  • 이종석 (1994~1997)
  • 김학준 (1999~2000)
  • 황호택 (2016~ )

8.6. 논설주간

  • 홍승면 (1974~1977)
  • 김성한 (1977~1980)
  • 박권상 (1980)
  • 권오기 (1980~1981)
  • 김진현 (1989~1990)
  • 이채주 (1990~1993)
  • 남중구 (1998~1999)
  • 최규철 (2002~2005)
  • 배인준 (2006~2010)
  • 황호택 (2012~2016)
  • 김순덕 (2016~ )

8.7. 논설위원실장

  • 우승규 (1964~1965)
  • 김진현 (1985~1989)
  • 남시욱 (1989~1991)
  • 이종석 (1991~1994)
  • 정종문 (1994~1995)
  • 민병문 (1995~1997)
  • 남중구 (1997)
  • 김종심 (1997~1999)
  • 어경택 (1999~2001)
  • 최규철 (2001~2002)
  • 이규민 (2002~2003)
  • 전진우 (2003~2005)
  • 배인준 (2005~2006)
  • 이재호 (2006~2009)
  • 황호택 (2009~2012)
  • 김순덕 (2013~2016)
  • 박제균 (2016~ )

8.8. 수석논설위원

  • 홍승면 (1972~1973)
  • 송건호 (1973~1974)
  • 권오기 (1980)
  • 민병문 (1994~1995)
  • 남중구 (1995~1997)
  • 김종심 (1997)
  • 최영훈 (2015~2016)

8.9. 수석해설위원

  • 이동수 (1971~1974)
  • 권오기 (1974~1977)

8.10. 편집고문

  • 이광수 (1927~1929)
  • 고재욱 (1949~1951/1955)
  • 우승규 (1966)

8.11. 편집국장

  • 이상협 (1920~1924)
  • 홍명희 (1924~1925)
  • 이광수 (1926~1927/1929~1933)
  • 김준연 (1927~1928)
  • 주요한 (1929)
  • 설의식 (1935~1936)
  • 백관수 (1937~1939)
  • 고재욱 (1939~1946/1947/1951~1952/1952~1953/1954~1955/1958~1960)
  • 임병철 (1946~1947)
  • 김삼규 (1947~1949/1950~1951)
  • 장인갑 (1949~1950)
  • 곽복산 (1952)
  • 민재정 (1953~1954)
  • 우승규 (1956~1958)
  • 김영상 (1960~1962)
  • 천관우 (1963~1965)
  • 변영권 (1966~1969)
  • 홍승면 (1969~1971)
  • 박권상 (1971~1973)
  • 김성한 (1973~1974)
  • 송건호 (1974~1975)
  • 최호 (1975~1977)
  • 권오기 (1977~1980)
  • 이웅희 (1980)
  • 신용순[24] (1980~1983)
  • 이채주 (1983~1986)
  • 남시욱[25] (1987~1989)
  • 장행훈 (1989~1990)
  • 김중배[26] (1990~1991)
  • 홍인근 (1991~1994)
  • 이현락 (1994~1997)
  • 정구종 (1997~1999)
  • 박기정 (1999~2000)
  • 최규철 (2000~2001)
  • 김용정 (2001~2002)
  • 어경택 (2002~2003)
  • 이규민 (2003~2005)
  • 임채청 (2005~2008)
  • 심규선 (2008~2012)
  • 최영훈 (2012~2013)
  • 김차수 (2013~2016)
  • 김정훈 (2016~2018)
  • 천광암 (2018~ )

8.12. 출판국장

  • 김상기 (1965~1966)
  • 조병륜 (1966~1970)
  • 김성한 (1970~1973)
  • 홍승면 (1973~1975)
  • 임순묵 (1975~1980)
  • 안재준 (1980~1981)
  • 이채주 (1981~1983)
  • 남시욱 (1983~1987)
  • 장행훈 (1987~1989)
  • 김중배 (1989~1990)
  • 이준우 (1990~1991)
  • 이정윤 (1991~1994)
  • 이대훈 (1994~1995)
  • 정구종 (1995~1997)
  • 어경택 (1997~1999)
  • 김종심 (1999~2001)
  • 민병욱 (2001~2005)
  • 최맹호 (2005~2006)
  • 고승철 (2006~2008)
  • 황의봉 (2008~2009)
  • 이재호 (2009~2012)
  • 권순택 (2012~2014)
  • 박태서 (2014~2016)
  • 박성원 (2016~ )

9. 상징

파일:동아일보 로고.jpg

1920년 창간 당시부터 사용해왔던 오래된 로고이며 타원 속에 한자 '東(동녘 동)'이 가로세로로 반복된 형태이며 45도로 기울여 보면 亞(버금 아)자 형태도 드러나는 그 당시엔 보기 드물게 꽤 복합적이고 모던한 형태의 로고. 1920년 이후 단 한 번도 바뀌거나 폐기된 적이 없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심벌마크이다.

창간 당시 서화협회에 위촉해 협회 회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東'자를 도형으로 도형화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이것을 본사가 채택함으로써 결정됐다. 처음에는 배달부의 배달용 덧저고리(당시 일본어로 '핫피'라 했음)에 마크로 새겨 사용했다. 동아일보 지면에 로고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22년 10월 15일자 3면으로, 동아일보 후원으로 열렸던 제3회 전선(全鮮)야구대회의 동아일보에서 제정한 우승기 사진이 실렸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심벌마크를 교체해서 각각 C자형 로고J자 로고를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서 조중동 중 유일하게 심벌마크를 폐기하거나 변경한 적이 없는 사례를 가지고 있다.

파일:chosun_old_logo.gif
과거 조선일보는 통일교 로고 사명(社名)의 머리글자를 본떠서 만든 로고를 사용했으며, 로고를 자세히 보면 '조선'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로고는 1920년부터 2010년까지 쓰였다. 현재의 로고는 2010년 창간 90주년에 즈음하여 바뀌었다.

파일:joongang_old_logo.jpg
중앙일보 역시 천일여객 사명의 머리글자를 본뜬 로고를 사용했는데, 한자 中(가운데 중)자가 삼각형으로 모인 형태였다. 이 로고도 자세히 보면 '中央(중앙)'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이 로고는 1965년부터 1995년까지 쓰였다. 현재의 로고는 1995년 창간 30주년에 즈음하여 바뀐 것으로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이 되겠다.'라는 의지를 표현한 것인데, 주황색 원은 눈과 입, 알파벳 J자는 귀를 뜻한다.

동해상사고속의 로고가 동아일보 로고와 너무 유사하다. 차이점이래봐야 바깥 원에 끊어진 부분이 있으면 동아일보, 없으면 동해고속, 이 정도. 이외에 두 회사가 서로 비슷한 로고로는 효성그룹과 옛 축협이 있었다.

10. 성향

1974년 기자 해고 사건과 1991년 김중배 편집국장 경질사태 이후 성향이 꽤 딱딱해지긴 했어도 2001년 세무조사 사건 이전까지는 제도권 언론 내에선 비교적 중도적, 개혁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유시민이 동아일보에 기고하기도 했었고, 진보성향의 대표적인 대학교수로 한국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도 역시 10여 년 동안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었다. 한겨레 신문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 신문 중에서는 가장 정권 비판적인 성향이었다. 유신정권기 때 동아일보 소속으로 가장 격렬하게 반 독재 성향을 주도한 기자가 바로 나중에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 청암 송건호 전 편집국장.

한겨레 창간 이후에도 현재의 경향신문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고,[27] 심지어 당시 진보적인 신문 기자 지망생들 중에는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다른 신문사의 논조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전국적인 영향력 면에서 동아일보만 한 신문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동아일보는 영향력이 방대한 중도개혁적 논조의 신문이었다. 이런 성향에 암운이 드리워질 1998년쯤에는 얼핏 보면 조선일보 광수생각의 경쟁만화로 착각하기 쉽지만 모두까기 성향을 보였던 풍자만화 대한민국 도날드닭이 짧게나마 연재되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신문 순위를 매기면 동아일보- 한국일보 - 중앙일보 - 조선일보 순이었을 정도였다. 다만 1990년대 말기에도 동아일보는 북한 관련 소식이나 노동조합 소식에는 조선일보에 버금가는 수구적 논조를 보였다.

1980년 5.18이 일어나자 동아일보는 5월 19일부터 5일간 전두환 정권의 살육에 저항하는 의미로 사설을 싣지 않았고, 박종철 사건 당시 여러 지면을 할애하여 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바 있다.

한편 동아일보는 지역기반이 같은 김대중을 적극 지지해 주었으며[28] 김대중 정권 초기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일보가 노골적으로 김영삼과 이회창을 밀어주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김대중도 동아일보의 창업주였던 김성수를 적극적으로 감싸주었는데, 실제로 김대중은 1980년대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동아일보의 창업주이자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로 중흥시킨 김성수친일파라며 규탄했을 때, 김성수를 옹호해주면서 그 고대생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했었고, 1993년 8월 15일 광복 48주년 특별기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촌은 비록 감옥에 가고 독립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 민족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인촌은 동아일보를 창간해 우리 민족을 계몽하여 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큰 힘을 주었다. 그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인촌은 오늘의 중앙고고려대를 운영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일제 치하에서
이 나라를 이끌 고급 인력을 배출, 우리 민족의 내실 역량을 키웠다. 인촌은 또한 근대적 산업규모의 경성방직을 만들어서
우리 민족도 능히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 김대중, 1993년 8월 15일, 동아일보 광복 48주년 특별기고

2000년 3월 31일 동아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는 "인촌 선생은 민족 민주 문화주의 3대 강령을 내건 동아일보로 우리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 "동아일보의 3대 사시(社是)는 그때뿐만 아니라 21세기를 맞는 새천년에도 참으로 합당하다."라고 동아일보와 인촌 김성수를 칭찬하였다. 사실 그래서 김대중이 1987년 대선에서의 실패 이후로 여러차례 위기에 빠졌음에도 제1야당을 전두지휘하는 인물이자 차기 대권주자로써의 굳건하게 영향력을 유지할수있었던데에는 호남권에서의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동아일보가 그나마 김대중과 친했기 때문이었다.[29] 당시 언론사들의 논조를 보면 조선일보야 말할것도 없고, 중앙일보도 군부에 호되게 당한적이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14대 대선15대 대선에서는 김영삼, 이회창을 대놓고 밀어주었을 정도로 김대중에게 영 고까운 시선을 보냈던데다가, 방송사들의 논조도 조선일보나 중앙일보급이거나 지금의 종편수준 그 이상인 경우도 많아 사장과 이사진 선임에 있어서 눈치를 봐야하는데다가 군부정권 시절에 일했던 간부들이 멀쩡히 남아있던 시절이라 김대중과 민주당에게 친화적이지 않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동아일보와 친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야권이 버틸수있었고 그로인해 정권교체를 이뤘다는것이 결코농담이 아닌 상황이었다.

정권교체 직후 김대중 정부와 동아일보는 교묘한 줄타기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동아일보 창립자 김성수가 호남출신이고 역시 호남 기반의 김대중이 김성수를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띄어줬다고는 하지만 신문 창간후 몇 십 년이 흐른 뒤라서 동아일보 오너 김씨 일가의 후손들은 호남과 민주당쪽에 대한 특별한 정서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거기에 군부독재시절 동아가 비교적 야권 성향이었다지만이것도 한계가 분명한 것이었다. 진짜배기 야권 성향으로 독재를 공격하고 민주화를 주장했다면 정권에서 바로 박살냈을 것이기 떄문이다. 실제 1975년 유신독재정권의 탄압으로 촉발된 백지광고 사태와 동아투위 사건 때문에 정권에 비판적이던 수많은 기자들이 신문사를 강제로 떠나야했다. 그리고 1987년 6월항쟁과 19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군사정권이 청산되고 민주화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동아일보는 당시 강제해직된 기자들에게 어떠한 사과나 해명도 없었고 복직도 없었다. 동아투위 사건은 마치 이 세상에 없던 일마냥 계속 침묵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군사정권 시절 동아일보가 야당지였다고 기억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동아일보도 정권의 보도지침에 충실하게 따르던 신문일 뿐이다. 단지 다른 신문들이 아예 야당과 재야세력의 입장을 쓰지도 않는 데 반해서, 동아는 기사 말미에 몇줄씩 소개해줬다는 정도의 차이뿐. 물론 서슬퍼런 시대에 그 정도라도 대단히 가치있는 일이지만.

게다가 그 시절에도 노동자 문제나 대북정책에 대해선 군부독재 정권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즉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라면 모를까 대북정책, 노동자권익, 복지를 가지고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현재의 구도로 본다면 동아는 과거에도 보수에 가까운 신문이었다. 여기에 외환위기 직후 노동자 문제, 재벌개혁 문제가 급속도로 부각되고 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한 국가붕괴 가능성 등이 점처지면서 한국의 언론지형, 정치 지형은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 보수와 진보의 구도로 급속하게 재편된다. 그리고 아래 언급하게 되는 삼성과의 특별한 관계, 외환위기 이후 어려워진 경영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동아는 점점 친재벌, 보수우익 신문으로 기울어져 간다.

특히 동아일보가 친재벌, 강경우익 성향으로 급속하게 변화한 이유로 꼽히는 게 삼성그룹과의 관계이다. 애초 삼성 계열사에서 시작했던 중앙일보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동아일보도 삼성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다. 1998년 외환위기 직후 동아일보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삼성생명으로부터 500억 긴급대출을 받아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 대출의 배경에는 삼성 오너 이건희와 동아일보 오너 김병관의 사돈 관계가 있다. 동아일보 故 김병관 명예회장(김성수의 장손)의 차남인 김재열이 1999년 이건희의 2녀인 이서현과 결혼한 것이다.[30] 그 김재열은 이후 그 제일모직의 사장, 삼성엔지니어링의 경영기획총괄 사장을 거쳐 제일기획의 스포츠사업총괄 사장이 된다. 이 때문에 그 중앙일보만큼이나 삼성으로부터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언론으로 꼽힌다.

그리고 외환위기로 인해서 경제가 심각하게 위축되고 개인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31] 언론사들은 몇몇 대기업 광고에 대한 재정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지게 된다. 말 그대로 비판 기사 한 번 썼다가 대기업에서 광고 빼버리면 신문사가 흔들리기 때문에 신문, 방송, 잡지 할 거 없이 대기업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기는 행태가 만연하게 된다.[32] 어차피 야권 성향이라는 소리를 듣던 1980년대, 90년대에도 노동자 문제와 대북정책에선 조선일보랑 비슷하게 강경우익 성향을 보이던 동아일보였기에, 이후에는 대놓고 친재벌 반노동자 성향을 보이게 된다. 노동자 파업에 대해선 색깔론 공격을 퍼부었고 그 연장 선상에서 과거 노동운동,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매카시즘 보도를 일삼았다.

동아일보의 이런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2000년 9월 8일 1면을 가득 채운 대구, 부산에는 추석이 없다라는 궤변과 억지로 가득찬 지역감정 조장 기사이다. 내용을 보면 대구, 부산 시민들 입을 빌려 김대중 정부가 IMF를 기회삼아 대구, 부산 경제를 죽이고 광주와 전라도 경제만 살리려 한다. 라는 건데... 그러나 기사에 포함된 표를 보면 추석이 없다는 대구, 부산보다 추석이 있는 광주의 실업율과 기업 부도율이 더 높았다.[33] 뭥미...원노골적으로 영남을 피해자로 호남을 가해자로 포장하면서 지역주의를 선동하는 기사를 보면 이미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의 고향이 호남이라는 사실은 21세기 동아일보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현장 기자들은 외환위기 이후 어려움에 빠진 지역경제를 돌아보자는 시리즈물로 알고 취재에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부산, 대구만 다룬 뒤에 끝나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기자들도 황당해서 간부들에게 항의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34]

당시 한겨레21 제333호 (2000년 11월7일)에서는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몇 가지 특혜를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에 대한 반발로 정권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족벌언론 황제들, 브레이크가 없다. 이 기사에 따르면 정부에 요구한 특혜는 경기도 일산지역 농지 2만 6천 평 지목 변경, 서울 충정로 사옥건물 매입, 저금리 대출, 부동산 환수 소송 지원 등이다. 날강도네

그리고 2001년 언론사 세무조사 사건과 이를 비관한 당시 회장 부인의 투신자살 사건(한국어 위키백과 참조)으로 당시 새천년민주당과의 관계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로 틀어지면서 외환위기 많이 흐려지긴 했어도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개혁적 색채가 사라지고 완전한 보수우익으로 돌아선다. 사실 이게 사건씩이나 된 것은 대단히 웃긴 이야기인 게 언론사 세무조사는 공소시효 관계로 5년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과거의 군부독재정권뿐 아니라 김대중 이후 집권한 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모든 정권에서도 똑같다. 김대중 정부가 언론사 세무조사를 한 것이 딱히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라는 것이다. 문제는 딱 한 번 이 정기적인 세무조사가 멈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김영삼 정부, 최초의 문민정부 시기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세간에서는 기업이라면 당연히 받아야 하는 정기세무조사가 실제로는 군부독재정권의 언론길들이기였으며, 문민정부들어서자 비로소 중단했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렇게 김영삼 정부 시기를 거치고, 김대중 정부가 법대로 언론사 세무조사를 부활시키자 바로 조중동과 김대중 사이의 껄끄러운 관계가 부각이 되면서 정권이 과거 군부독재시절처럼 비판적인 언론을 길들이여 한다는 조중동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어 간 것이다. 특히 동아일보는 김대중과의 관계 때문에 자기들은 특별히 잘 대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놈들이 저렇게 대놓고 지역감정 부추기는 기사를 쓰냐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우그룹과 김우중의 경우와 대단히 유사하다.

이후에는 뉴라이트의 등장 때에도 특집기사로 스포트라이트를 주었으며,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보수노선이 상당 부분 강조되고, 노골적인 친 정부 성향을 보이는 등의 횡보로 인해 이명박 정부 시기에는 조선일보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까지 있었다.[35] 이는 박근혜 정부 때에도 이어져 극우 보수성향의 신문으로 계속되었고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조선일보와 함께 자유한국당홍준표 후보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기사들이 많이 작성되었다.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에는 고공행진하는 지지율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동아일보 지령 3만호 기념 축사를 보내고, 비판의 수위도 상당히 낮아져 조선일보와 달리 과거 親민주당 성향으로 돌아오는가에 대한 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2018년 말부터는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보수 신문 동아일보로 돌아왔다. [사설]與 ‘김경수 재판’ 불복… 유리하면 정의고 불리하면 적폐인가 다만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시각은 북한군 개입설을 옹호하는 등의 과거와 달리 정상적으로 돌아온 듯 하다. [사설]전두환, 5·18 과오 용서 구할 마지막 기회다

11. 논란과 비판

동아일보의 문제점으로 주로 지적되는 것은 극단적인 진영논리, 편향적인 색깔론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예전부터 인식되어와서 아예 조중동으로 함께 묶여서 취급당할 정도였다. 다만 동아일보보다 더 극우적으로 강경한 논조를 쏟아내는 조선일보의 존재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묻히는 감이 있다. 때문에 동아일보가 문제되며 비판받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기사들과 색깔론을 내세운 편파적인 논조는 사람들이 괜히 조중동으로 묶어서 싸잡아 취급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11.1. 신탁통치 오보사건

동아일보 최악의 흑역사 자세한건 문서 참조.

11.2.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왜곡 보도

수사 초기 박 경정은 한창 조사를 하던 검사와 수사관에게 뜬금없이 “우리나라의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면서 박근혜 정부의 권력 지형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윤회 씨의 전 부인이자 고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 씨가 1위, 정(윤회) 씨가 2위이며 박근혜 대통령은 3위에 불과하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허위로 결론 난 ‘정윤회 동향 문건’만큼이나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근거를 대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단독]박관천의 황당한 ‘권력서열’ 강의
동아일보의 희대의 자충수이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평가되는 기사 보도.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이 2016년 10월 최순실 특검이 결정된다. 새누리당조차도 당시에는 박관천 경정의 발언에 대해 정치 공작, 음해성 발언, 배후 음모설을 주장해왔었지만 결국 2016년 10월 26일 긴급 총회를 열어 특검을 수용한다.

당시 진보 언론을 제외한 다른 언론들에서도 해당 폭로에 대해 황당하다는 반응이였지만 동아일보처럼 크게 이슈화 하면서 비판하진 않고 이러이러한 발언을 했다. 다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식으로 기사를 내보내는 정도에 그쳤다.

11.3.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과 기자해고

1974년부터 유신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대표적인 야당지 동아일보에 대한 정부의 압박이 시작되었다. 정부의 압력으로 기업들은 동아일보 지면광고를 철회하였고, 광고란이 비워지자 동아일보사의 경영은 매우 어려워졌다. 시민들이 광고면을 익명의 응원 메시지로 채워줬고, 사태 이후에는 동아일보사 측에서 직접 시민들에게 감사장까지 보냈지만 경영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결국 1975년 3월 당시 정권의 요구에 굴복 200여명 가량의 용역을 동원벽을 부수고 5일째 공무국에서 단식중인 기자 23명을 끌어냈다. 이후 해당 기자들의 대부분은 해고되었다.

여기까지였다면 동아일보로서도 정부의 압박에 의해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겠지만 문제는 1987년 6월항쟁 이후로도 해직 기자들에게 끝끝내 사과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와 달리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논조를 고수하는 현재 동아일보의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

여기서 해고된 기자들은 대표적으로 이부영 기자를 중심으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들은 조선일보에서 해직된 '조선자유언론투쟁위원회'의 기자들과 함께 유신정권과 제5공화국 정권에 대항하다가 1988년 한겨레를 창간하였다.

11.4. 전교조 명단 공개사건

2010년 4월,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던 교직원들의 명단을 공개하였다. 이 때 동아일보의 인터넷 사이트인 동아닷컴은 조전혁 의원이 공개한 자료를 그대로 게재하였고, 결국 전교조에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배상금을 물어주게 되었다. '전교조 명단 공개' 조전혁 의원 3억 배상

11.5. 5.18 민주화운동 왜곡

2016년에는 수석논설위원이 <전두환이순자의 천생연분>이라는 칼럼을 냈다. 둘이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시시콜콜 적은 칼럼이었는데 그것은 알기 싫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칼럼이 신문에 실린 날짜다. 이날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인 2016년 5월 18일이었다. 게다가 전두환이 동아일보의 산하 방송국빼앗은 장본인임을 생각하면 더욱 경악스럽다. 거기에 같은 계열사인 채널A의 경우 이미 2013년 TV조선과 함께 5.18 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을 보도하는 등 과거 5.18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호남신문이라고까지 불렸던 동아일보가 많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11.6. 삼성 장충기 문자 청탁 사건

2017년 8월, 뉴스타파의 보도로 밝혀진 삼성그룹에서 보도청탁한 언론계 인물들 중에서 동아일보에서 오랫동안 주필을 맡아왔던 '배인준' 씨가 있는 것이 드러났다. 관련 기사
동아일보는 특히나 김재호 사장의 동생이 김재열 제일기획 사장으로 삼성그룹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삼성그룹으로부터 청탁을 받아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11.7. 역술인과 미신

2018년 5월 30일 <'김일성 사망' 적중 역술·무속인들의 예언…"김정은, 내년 결정적 위기">란 기사를 실었는데 당연히 비과학적인 내용이라 논란만 되고 기사는 내려졌다. 자매사인 채널 A도 몇해 전 이름 궁합이나 역술인 섭외해 정치 평론을 하는 등 동아일보는 미신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12. 기획·특집기사

  • 1987년 고문근절 추방캠페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배경으로 동아일보에서 대대적으로 벌였던 캠페인 특집기사이다. 본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가장 먼저 보도했으나, 대대적으로 전두환과 군부정권에 반기를 들고 보도를 쏟아낸 것은 동아일보였다. 이 기사는 특히 6.10 민주 항쟁을 이끌어낸 원동력 중 하나로도 꼽힐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 2019
    창간 98주년 기획특집기사로, 과거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부당한 악습들을 타파하는 내용이 많아 호평을 받았다. 특히 추석편은 간소한 차례상에 관한 이야기를 실어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어냈다.
  •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창간 99주년, 3.1 운동 100주년 기획특집기사로, 3.1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과정, 의의 등을 재조명하였다. 특히 이 기사와 연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동아닷컴에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디지털 전시관'이라는 3.1 운동 데이터베이스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고령화사회를 맞아 연재된 특집기사이며 기자가 직접 노인과 비슷한 조건으로 도심을 걸어다니며 느낀 체험내용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다. 노인들에게 위험한 구조물이나 시설 등을 주목하여 많은 관심을 받았다.

13. 기타

1926년 이완용 사망 직후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증오하는 명대사를 연달아 날리기도 했다. 그 명대사는 이러하다.
‘구문공신(口文功臣) 이완용은 염라국에 입적하였으니, 염라국의 장래가, 가려(可慮)’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신료 이완용이 지옥에 들어갔으니 장래에 지옥마저도 팔아먹을지 걱정된다.)
1926년 2월 12일[36] 동아일보 1면 횡설수설 기사 중.
도 갔다. 도 필경 붙들려 갔다. 팔지 못할 것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누린 자,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1926년 2월 13일[37] 동아일보 1면 사설 기사 중.[38]

1931년부터 매년 3월에 마라톤대회를 열고 있는데 이 대회가 국내 대표적인 마라톤 대회 중의 하나인 동아마라톤대회다. 1982년부터는 국제마라톤대회로 확대돼 치러지고 있다. 1947년부터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주최하고 있으며 1956년부터 2016년까지 국수전이라는 프로바둑기전도 주최하였다.

자매언론인 신동아가 최근 미네르바 낚시사건을 저질러 관심을 받기도 했다.

한편, 라디오 방송국이었던 동아방송(DBS)도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서울 지하철 1호선시청역~종각역 사이의 드리프트(…)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자세한 것은 서울 지하철 1호선 항목 참조.

파일:external/www.museum.seoul.kr/img_07_97.gif
1970년대 중반경의 사옥 모습. 바로 뒷쪽 큰 건물은 당시의 광화문 우체국이다. 왼쪽에 건물이 헐린 곳은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이다.

사실 동아일보 사옥이 헐릴 뻔한 게 이때 한 번이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상 앞부터 시청 뒤편까지 광장을 만들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이때는 정부로부터 여의도 부지를 받아서 이전할 뻔했다. 물론 계획이 사라지면서 안 헐렸지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심사위원이 예심에서 떨어진 응모작을 표절하여 작품을 써 발표한 희대의 막장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건 동아일보의 문제라기 보단 문단의 문제인데, 문단에선 특유의 친목질, 쉴드를 가동해서 결국 표절한 조경란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조선일보에서 주최하고 이문열, 신경숙 등의 빵빵한 작가들이 심사하는 동인 문학상까지 받았다.

90년대 특종 기사 중 하나를 꼽자면 신촌 그레이스백화점을 날려버린 여자화장실 몰카 설치 폭로가 있다. 몰카에 대한 인식을 확립시켜 준 사건이라는 의미도 있다. 잘나가던 백화점 하나를 그렇게 순식간에 날려버렸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이 매우 대단했다. 이후 외환위기와 겹쳐 좆망 테크를 탔고, 지금은 현대백화점 신촌점이 되었다.

딱 수능날이던 2010년 11월 18일엔 위키백과를 디스했는데, 위키백과에 북한군들이 주민번호를 도용해서 가입한 뒤 편집한다는 추측[39]을 A5면(!)에 싣는 병크를 저질렀다가 신나게 까였다.

그리고 2011년 7월 16일에 또 위키피디아를 디스했다. 제목은 北 편들고 南 깎아내리는 위키피디아. 게다가 이번에는 조선일보도 가세했다.

동아일보에서는 전국 경영학도를 대상으로 DBR(Donga Business Review)을 무료배포하고 있다. 한 권에 12,000원이나 하는 책이니 많이 이용하자(...). 경영학 실제 케이스와 연구분석사례들이 나와 있다. 대학에 있는 경영학과 건물에서 배포하는 듯.[40]

페이스북#이 보통 일간지 페이스북과는 컨셉이 조금 다르다. 어설프지만 개드립(...)을 구사해보려고 하는 듯.

대대손손 4대에 걸쳐 회사의 대표이사직을 이어받고 있다. 김성수의 장남 김상만, 김상만의 장남 김병관,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41]

박권상, 정연주 전 KBS 사장을 비롯해 역사학자 천관우, 송건호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 김종철 전 연합뉴스 사장, 김근 전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이웅희 전 문화공보부 장관, 황선필, 김중배 전 MBC 사장, 최시중 초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윤양중 초대 예술의전당 이사장, 김종심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이재호 초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이낙연 국무총리 등 쟁쟁한 인물들이 동아일보 출신이다.

2019년 북미정상회담 보도에 난데 없이 자사 기자의 외모 자랑하는 자뻑성 기사를 지면을 내 다른 의미로 화제가 됐다.#

2019년 5월부터 구독료가 기존의 1만 5천원에서 2만원으로 오른다.#

14. 자매지 및 정기간행물

제작업무는 출판국에서 담당한다.

15. 주요 대회

15.1. 사라진 대회

  • 국수전 (1956~2016)
  • 동아사이클대회 (1958~1997)

16. 계열사

17. 산하기관

  • 미래전략연구소 : <동아비즈니스리뷰>를 발행하고 있다.
  • 뉴센테니얼본부 : 동아일보 100주년 사업 기획 및 진행
  • 청년드림센터 : 청년일자리지원 및 취업사이트 운영

18. 공익재단

  • 인촌기념회
  • 일민문화재단
  • 화정평화재단
  • 동아꿈나무재단

19. 제휴 신문사

20. 관련 인물

21. 관련 문서

22. 관련 문헌

  • 민족과 더불어: 동아일보 80년사 (2000)
  • 동아일보 대해부(전 5권) - 문영희, 강기석, 김종철, 김광원 공저. 안중근평화연구원. 2014.

[1]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간, 1945년 해방 이후 복간[2]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 구독부수에서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안났는데 2012년 기준으로 조선일보가 175만 부, 중앙일보가 126만 부를 기록한 데 반해 동아일보는 유료부수. 무료부수 다 합해도 100만 부 아래다. 다만 2016년 기준으로는 중앙일보와 큰 차이는 안 나고 유료구독부수 기준으로 오히려 중앙일보를 추월한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건 동아일보의 구독자수가 늘어서는 아니고 그냥 중앙일보 구독부수가 빨리 줄어들어서 2위에 올랐을 뿐이다. 사실 조선일보도 증발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1위는 1위인지라.[3] 더군다나 이 수치도 이른바 부수 밀어주기 관행으로 인해 상당부분 부풀려졌다는 것이 중론이다.[4] 1990년대 초반가지만 해도 한국일보의 위상은 상당해서 1990년대 초반에도 구독부수가 상당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망테크를 타기 시작해서 후발주자인 한겨레 신문보다도 못 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5]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이승만 정부시절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지냈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와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하다. (엄밀히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고려대학교를 창립한 것이지만.) 때문에, 형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는 그렇게 서로 밀어주고 당겨줬기 때문에 이 둘의 커넥션은 끈끈한 편.[6] 이 말도 2000년대 이후 동아일보의 논조가 보수 성향으로 바뀌면서 사어가 되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동아일보는 아직도 호남지역에서 강세이다. 예전 구독자들이 이탈하지 않아서 그런 듯하다.[7] 일본에게 설립허가를 받기 위해서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박영효를 내세운 것이다.[8] 원래는 언노련 소속이었지만 2000년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화면서 탈퇴.[9] 국역본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을 참조했음. 원문은 이곳 참조[10] 둥그런 실타래를 뜻하는 순우리말.[11] 현재는 일민미술관과 신문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12] 채널A와 사옥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광화문 구 사옥의 바로 오른쪽에 있다.[13]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동아미디어그룹이 건설한 사옥이다. 청계천의 동아미디어센터와 달리 채널A가 중심이다.[14] 다만, 현재 조중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홍진기와 삼성의 중앙일보는 중앙일보빌딩(흑갈색건물로개국 초기 JTBC의 사옥으로도 쓰였던 그 건물) 옆에 구 사옥이 존치 중이며, JTBC빌딩(DMCC 타워)가 세워지기 전까지 구 사옥에 임시로 중앙일보가 세들어사는 케이스는 있긴 있었다.[15] 그 당시 조선일보와 시대일보는 친일 노선이었다.[16] 한때는 여운형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조선중앙일보동아일보 지방판 모두 같은 날에 일장기 말소사진이 실린 것으로, 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와 함께 일장기 말소사진 게재에 동참한 것이 확인되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17] 브나로드란 '민중 속으로' 정도의 뜻을 가진 러시아어다. narod는 영어로 치면 people정도의 의미로, 현 러시아의 유명 웹호스팅 서비스인 나로드 러시아(http://narod.ru)의 이름이기도 하다.[18] 다만 이는 총독부에 변명하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이길용 기자의 회고록에 의하면 사시로 일장기의 게재를 피하고 내지라는 용어를 쓰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즉, 송진우 사장이 최악의 상황인 동아일보가 정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 아첨하는 것 같은 말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기사[19] 이 보도가 나고 당연히 일제에 의해 정간당했다. 그리고 김성수가 조선총독부로 달려가 굽신굽신해서 돈을 상납해서 다시 복간.[20] 물론 이건 당시 동아일보 탓이라기보다 해방 직후의 정치권 탓이겠지만.(물론 당연히 김일성도 포함.)[21] 당시 경향신문은 가톨릭 계열이었다.[22]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종각 드리프트. 만약 원안대로 추진했으면 아예 철거되어 몇 년씩 정간당하는 사태가 생겼을 것이다. 당시 윤전기가 진동에 약했는데 지하철을 그대로 지으면 윤전기가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아무리 당시 정권이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충분한 언론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23] 초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임명 후 퇴사.[24] 퇴사 이후 1993년에 강원일보 사장 역임. 1996년 작고.[25] 퇴사 이후 문화일보 사장 역임.[26] 퇴사 이후 한겨레신문 사장, MBC 사장 등을 역임함.[27] 반면, 당시 경향신문은 친정부, 극우, 친재벌 성향이 강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정국과 1990년 한화그룹 합병이 주 계기가 되어 극우성향을 벗어던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보수적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 신문시장 경쟁격화와 외환위기로 인한 경영난으로 인해 독립하면서 현재의 성향을 가지게 된다.[28] 실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장 아꼈던 기자는 이낙연 현 국무총리인데, 이낙연이 바로 동아일보 소속이었다.[29] 사실 김대중과 민주당이 실제성향이 좌파적이지 않았음에도 보수언론사로부터 빨갱이라는 공격을 자주받았던에는 기자들과 식사하면서 차비와 식사비를 꼼꼼하게 계산하면서 내주는 습관 때문에(...) 기레기 기자들에게 반감을 사서 그랬다는 썰도 있을 정도였는데 그나마 김대중과 민주당쪽이 친했던 신문이 동아일보였다.[30] 이는 도날드닭의 연중시기와 일치한다.[31] 대부분의 가정이 돈이 쪼들리면 제일 먼저 신문을 끊는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 직후 대부분의 신문사들이 망하기 직전까지 몰렸고, 당시 한화그룹은 가지고 있던 경향신문 지분을 모두 포기하고 그냥 독립시켜 버린다.[32] 소위 진보개혁 성향이라는 한겨레, 경향신문도 재벌에 대한 비판기사는 광고 떨어질까봐 스스로 수위조절 한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시사인 창간으로 이어진 2005년 시사저널 파업 사태도 삼성 비판 기사를 경영진이 (연락도 안 왔는데) 알아서 짤라내면서 촉발된 것이다.[33] 원래 초판에는 표가 있다가, 배달판에서는 표가 빠졌다. 위의 링크는 배달판 기사이다.[34]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여러 기자들이 사표를 쓰고 나간다. 대표적인 인물이 경제평론가로 활동 중인 선대인, 이완배.[35] 사장 김재호2010 G20 서울 정상회의 준비위원회의 민간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36] 이완용이 죽고 난 다음 날의 기사다.[37] 희대의 매국노 이완용이 죽고 난 후 이틀 뒤의 기사다.[38] 현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는 이 기사를 볼 수 없다. 조선총독부가 위 사설을 포함해 당시 동아일보의 ‘이완용 비난 부고 기사’들을 모조리 압수하고 이를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39] 위키백과는 실명제가 아니기에 주민번호는커녕 휴대전화 인증도 필요 없다.[40] 배포처 :건국대학교 - 경영관 2층 경영학과 사무실 앞. 고려대학교 - LG-POSCO 경영관 3층 수당학술정보관. 서울대학교 SK경영관 (58동) 1층. 성균관대학교 - 경영관 4층 경영경제대 행정실. 연세대학교 - 신경영관 4층 경영대학 행정실 앞. 서울시립대학교 - 미래관 5층 경영대학 행정실 내. 간혹 미래관 3층 경영경제전문도서관 대출데스크에 비치하는 경우도 있으나 요즘은 최신호를 잘 안 가져다가 놓는듯. 포항공과대학교 - 무은재 기념관 101호 앞, 충남대학교 - 경영학부 사무실(경상관 233호) 앞. 한국외국어대학교 - 경영학부장실 앞. 전국에 있는 경영학도들의 열렬한 추가바람.[41] 동생인 김재열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차녀인 이서현과 결혼.[42] 구 마이다스동아일보[43] 동아일보 가문 참조[44]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당시 해직기자들이 주도하여 창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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