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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별 예술 분야] 문학분과: 소설, 시, 아동문학, 평론 미술분과: 건축, 공예,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태피스트리 음악분과: 국악, 바이올린, 성악, 작곡, 지휘, 첼로, 피아노 연극분과: 극작, 무대미술, 연기, 연출 영화분과: 감독, 시나리오, 연기 무용분과: 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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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시인 서정주 徐廷柱 | Seo Jeong-ju | |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915년 5월 18일 |
전라북도 고창군 | |
사망 | 2000년 12월 24일 (향년 85세) |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성모병원 | |
본관 | 대구 서씨 |
창씨명 | 다쓰시로 시즈오(達城 静雄) |
호 | 미당(未堂) |
가족 | 배우자 방옥숙 슬하 2남 5녀 여동생, 남동생 서정태[1] |
학력 |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중앙불교전문학교 (국어국문학 / 중퇴)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clearfix]
1. 개요
<nopad>[2] |
2. 생애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아버지 서광한(徐光漢)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1924년 인근의 줄포로 이사하여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의 시 「자화상」의 "애비는 종이었다." 부분은 이 점을 의식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6]1929년 14세의 나이로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1월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된 뒤 풀려난 적이 있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돼 빈민 운동에 투신해 당시 아현동에서 살던 좋은 하숙집에서 나와 빈민굴에서 생활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같은 해인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1주년 기념 학생운동을 주모한 혐의로 구속되어 퇴학당했다.
1931년 고향 쪽의 고창고등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했으나 일본 교육과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 동맹 사건을 주동해 그해 가을 권고 자퇴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는 만주나 러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아버지의 돈 300원을 훔쳐 고향을 떠났지만 결국 서울에 눌러앉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때 많은 책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스승으로 모셨던 승려 석전 박한영을 비롯해 작가 김동리, 함형수, 이상 등과 만나 교류했고 특히 오장환과는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1935년에는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당시 교장을 지냈던 박한영의 권유로 입학했으나 1년 뒤 자퇴했다.[7]
1933년 「그 어머니의 부탁」이라는 시를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기고 형식으로 발표하다가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등단 과정이 좀 특이한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벽」 역시 여느 작품처럼 신문에 투고한 것인데 담당자의 실수였는지 신춘문예 원고로 바뀌어서 당선까지 된 것이라고 한다. 같은 해인 1936년 김동리, 김달진,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했고 1938년 방옥숙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941년에는 「자화상」, 「화사」, 「문둥이」 등의 시가 수록된 첫 시집 「화사집」을 출간해 문단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그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8] 하지만 1940년대에 친일적 활동을 하는 오점을 남겼다.
해방 이후 1946년 김동리, 조지훈, 곽종원, 박목월, 조연현 등과 함께 좌파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대응키 위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창설해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현실 참여 문학 대신 순수시를 택했다. 이후 동아일보 문화부장,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거쳐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시 분과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며 전쟁 초기 한강을 간신히 건넜으나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 탓에 조현증이 발병해 요양하여 그 영향 탓인지 시 세계가 확장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48년 「화사집」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견우의 노래」, 「귀촉도」, 「푸르른 날」 등이 수록된 2번째 시집 「귀촉도」를 출간했고, 이어 1956년 「무등을 보며」, 「국화 옆에서」, 「추천사」 등이 수록된 3번째 시집 「서정주시선」을 출간해 해방 이전에 이어 시인으로서 또다시 크게 주목받았다.
1961년에는 「꽃밭의 독백」, 「고조」, 「무제」 등이 수록된 4번째 시집 「신라초」를, 1968년에는 「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선운사 동구」 등이 수록된 5번째 시집 「동천」을 출간하면서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한국의 문화와 정서를 독특한 언어 구사력으로 표현한 서정주의 시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전까지 단명한 시인이 많았던 한국 시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큰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9]
박재삼 등 여러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고 오랫동안 교수직에 있으면서 많은 시인 지망생들을 가르치는 등 시인 양성에 노력을 쏟기도 했다. 시 이외의 다른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남겨 자서전인 「도깨비 난 마을 이야기」와 「천지유정」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평론집을 내기도 했다. 특히 평론 중에서 「한국의 현대시」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를 다룬 글은 지금 읽어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진보 문학계 시각으로 보면 그의 순수시는 '우파적인 경향을 띤 문학'이라고 비판받는다.
1975년에는 「신부」, 「상가수의 소리」,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등이 수록된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를, 1976년에는 「시론」, 「낮잠」 등이 수록된 일곱 번째 시집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이후의 시들은 서정주의 후기 시에 속하는데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져 별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1977년에는 신문사의 후의로 세계여행을 다녀와 1980년 기행시집 「서으로 가는 달처럼...」을 냈고 1982년에는 한국의 역사를 시로 표현한 시집인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를 냈다. 같은 시기 한국문인협회 이사장(1977~1979)도 맡았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 등 친독재적인 행보를 저질러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3년 자신의 생애에서 인상 깊었던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집 「안 잊히는 일들」을, 1984년 노래로 쓰이도록 만든 시들을 묶은 시집 「노래」를 출간했고 1988년 자서전적 성격의 담시들을 쓴 시집 「팔할이 바람」을 냈다.
1985년의 모습.[10] |
노년기에 이르러서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매일 1600여 개의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는데 이를 바탕으로 1991년 시집 「산시」를 냈다. 말년까지 공부와 시쓰기를 활발하게 하여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러시아 유학을 떠나기도 했고 1990년대 중반 「세계 민화집」과 동화집 「우리나라 신선선녀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1993년 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1997년 마지막 시집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출간했다.
말년에는 친일 행위와 여러 정치적인 행보로 인해 살해 협박과 스토킹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특히 그의 아내와 그에 대한 모욕적인 헌사도 서슴치 않는 연락이 매 시간 단위로 걸려왔다고 한다. 실제로 집 앞에 외부인이 칼을 들고 한 참 동안 머물다가 간 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협박과 스토킹에 회의를 느껴 미국으로 피난하다시피 떠났고 아내와 함께 장기간 체류했다가 1990년대 중반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말년인 1997년의 서정주 부부[11] |
2000년 10월 아내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쓰러졌으며 나중에는 곡기를 거부한 채 술만 마시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 이후 산소호흡기를 쓰고 투병하다가 11월에 "잘 봐달라고 말씀하더라고 해."라는 최후의 인터뷰를 남겼으며 12월 22일부터 혼수 상태에 빠졌고 2000년 12월 24일에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는데 생전 1,000여 편에 달하는 문학 작품을 남겼다.
3. 여담
- 시인으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개인사에 있어서는 정치적으로 잘못된 행적을 여러 번 보여 큰 비판을 받고 있다.[12] 우선 일제강점기 때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고 친일 활동을 하는 오점을 남겼다. 현재까지 총 10여 편의 친일적 성격의 글들이 발견되었으며 때문에 8.15 광복 이후 반민특위에 소환되었는데 이때 "적어도 일제 치하에 몇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우리 민족 절대 다수의 실상이었다고 회고한다"는 발언을 남겼다.[13]
-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는 저명한 한인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이름을 본인의 동의 없이 차용하거나 도용하여 자신들의 선전에 이용하던 시절이었다'며 그도 도용의 피해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변호가 민망할 정도로 그가 적극적으로 일제의 나팔수 노릇을 하였다는 증거들은 차고 넘치며 심지어 본인조차 친일행위를 인정했다.[14] 더군다나 해방 이후에는 독재자들을 찬양하는 등 일생동안 일관되게 권력에 빌붙어 출세하려는 비굴한 태도를 보였다.
- 1949년 여름부터 경무대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며 구술로 이승만의 자서전인 「우남 이승만전」을 완성하였으나 이승만의 선친 이름에 경칭을 붙이지 않았다고 하여 모두 파쇄된 해프닝이 있었다. 이 책은 후에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용을 보강하여 1980~1990년대에 재출간 되어서 세상에 드러날 수 있게 되었다.
-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충격적일 정도로 친군부적 색채를 확연히 드러냈는데 1987년에는 전두환의 만 56세 생일을 기념하는 축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으며 전두환도 그에 대해서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15] 1987년 4.13 호헌조치 때는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는 발언을 남겼는데 카더라도 아니고 4.13 호헌조치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반응이라고 해서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이야기다. 이외에도 학생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드러내 운동권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 그는 문학 작품을 쓸 때 현재도 따라갈 이가 없는 수준의 단어 구사와 소재 선택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논란이 되는 시기 이외의 작품에서는 순수 문학적 색채를 지향했으며 소재로 전통적 요소들을 많이 차용한 것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첫 시집인 「화사집」에 수록된 시들은 몸부림치는 생명력을 시적인 표현으로 적절하게 소화해냈다는 평을 듣는다. 이문열의 봉인됐다가 풀린 소설 「사로잡힌 악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정도 가감만 하면 서정주의 시라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능력이 있다. 위에서 인용된 시들 외에 당장 널리 애송되는 유명한 구절들만 언급하더라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 아름다운 배암... /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화사」)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푸르른 날」)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무등을 보며」)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추천사」)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꽃밭의 독백」)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푸르른 날」)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무등을 보며」)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추천사」)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꽃밭의 독백」)
이별이게, / 그러나 / 아주 영 이별은 말고 / 어디 내생에서라도 /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이런 그의 언어 감각을 두고 평론가 김우창은 "그의 시적 언어는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언어이다"라고 평했고 평론가 유종호는 "어떤 말이나 붙잡아 늘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미당을 뛰어난 부족 방언의 요술사라고 부르는데 유보감을 드러내는 이 또한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이렇듯 순수하게 문학적 업적만 보면 한국 현대시의 거목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지만 문학인으로서의 의무를 회피하고 일신의 안위만 노린 기회주의자라는 비판도 받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즉, 자기 그릇에 걸맞지 않게 과분한 재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인지 그의 사후 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많이 빠졌다고 하며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던 그의 집은 폐가로 방치되었다가 2011년에 복원되어 개방했다. 아마 친일 행위만 하지 않았더라면 모의고사나 수능에 윤동주나 이육사급 이상으로 많이 출제되었을 것이다. 당장 친일 행위 관련 비판이 많음에도 모의고사에 얼굴을 비치고 있으니 말이다.
- 한국 문단에서 그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여론은 모르게 묻힌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서정주 본인이 살아 있었을 때야 좋든 싫든 문단에서 그가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있었을 때니 대놓고 비판하기는 좀 어려웠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전에나 사후에나 그의 잘못된 행보를 비판하는 이들은 결코 적지 않았고 심지어 그를 옹호하는 이들도 그가 잘못된 행적을 남겼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시인일지라도 거의 평생에 걸쳐 잘못을 저지른 인물에게 찬사를 보내서야 되겠느냐'는 주장과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오점 때문에 그의 문학 전체가 매도되거나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느냐'는 입장의 차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한편 대중이나 젊은 학생들이 막연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학계에서 진지하게 평가되는 작가의 문학적 성취와 업적은 차이가 꽤 크다. 그와 대비되어 높게 평가받는 윤동주는 대중들에게 다가가기 좋은 면이 많아서 그렇지, 문학적 성취에서는 서정주나 백석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다.
- 멸칭으로 '말당(末堂)'이 있는데 이것이 전두환(혹은 당시 영부인 이순자)이 서정주를 청와대에 초청했을 때 서정주의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의 호인 '미당(未堂)'을 잘못 읽어 '말당'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으나 사실 제5공화국 당시에 유행하던 블랙코미디인 '전두환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로 '토관과 신토'[16]가 있다. 이외에도 김수정의 만화 「O달자의 봄」에서도 '말당' 얘기가 나오지만 이건 그냥 호의 '미(未)'와 '말(末)'의 모양을 이용한 말장난 개그다.
- 그의 시 「자화상」(1937)에 나오는 '애비는 종이었다'는 구절을 가지고 '종놈의 자식'이라고 까는 경우도 있는데 이 시에서도 나오듯이 그의 집안은 김성수 집안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는데 그렇게 된 것이 서정주의 아버지가 지주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기 때문이다. 마름은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직으로 소작농들 앞에서는 지주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렸다. 「동백꽃」의 점순이도 바로 마름 집안 딸이다. 이건 그의 친일 행각과는 무관한 인신공격성 발언이기는 하지만 그의 경력이 워낙 악질적인지라 '말당'과 함께 그를 비판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종놈 새끼라는 식으로 자주 언급된다.
- 일단 문학적인 성취는 높은 사람이라서 생전에 수많은 제자들을 기르쳤지만 제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의 친일 행위와 친군부 행위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되려 더 크게 비판하고 반감을 가지는 이가 많다. 그의 제자인 소설가 조정래는 그의 친일 행위와 친군부 행위를 "수십 년 동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사실 조정래는 서정주 생전 이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1985년 조정래는 「한국문학」이라는 문학지를 맡았는데 광복 40주년을 맞아 8월호에 '친일문인'을 다루는 특집 기사를 기획하고 친일 전력이 있는 문인 가운데 생존자들을 찾아 그들의 행적을 스스로 지면을 빌려 이야기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조정래에게 서정주는 은사인 동시에 아내(이자 동창) 김초혜 시인과 하는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 준 사람이었으니 말하기 굉장히 어려운 게 당연하다. 아내와 길게 상담하고 고민한 끝에 서정주를 찾아간 조정래는 서정주에게 "글 마지막에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선생님께서는 자유로워지십니다."라고 말하였으며 이 말을 들은 서정주는 조정래에게 "네가 내 제자로서 그럴 수가 있냐"며 크게 화를 냈다 한다. 조정래의 회고에 따르면 그냥 쫓아내지는 않고 조정래 앞에서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변명하는 장광설을 두 시간 동안 펼쳤다고 한다. 죽기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 나와 기자에게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질문을 받자 "거 뭐 잘들 봐달라고 해!"라고 말하고 끝내 버렸다. 이를 집에서 화면으로 보던 조정래는 차라리 이 때 한 마디라도 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 문인 조지훈도 그에게 큰 굴욕감을 주었는데 매해 정월 후배 문인들이 항상 사실상 대선배인 서정주를 제쳐두고 제일 먼저 조지훈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이유는 조지훈은 학생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시위대를 학생과 함께 이끈 지조 있는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동갑내기 문인 황순원도 그에게 크나큰 굴욕감을 주었는데 황순원은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에 어떠한 비판이나 칭송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켰고[17] 이에 문인들은 "역시 선생님다우십니다"라고 극찬하며 인사드리러 갔다. 당연히 후배 문인들이 이러한 행동을 보이자 서정주는 이에 굉장히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한 까닭에 서정주 본인은 '순원을 보면 옛 고즈넉한 우리 선조들이 떠오른다'며 황순원 칠갑잔치 때 축시를 쓴 적이 있다.[18]
- 신경림 시인의 수필집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67년 겨울 서정주의 동서인 김관식 시인이 신경림 시인과 함께 조지훈 시인의 집에 새해 문안 드리고 술자리를 가졌다. 그 다음에 서정주 시인에게 세배 드리러 갔는데 이 때 김관식은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그만 신발을 벗고 택시를 타 버려서 눈길을 양말 바람으로 걸어와야 했다. 서정주가 그 모습을 보고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훈계하였자 김관식은 술김에 화가 난 나머지 "이전의 행적을 볼 때 형님을 먼저 뵙는 것은 뭔가 아닌 것 같아서 조지훈 선생 댁에 먼저 세배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이에 서정주는 몹시 화를 내며 노발대발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그 자리에서 막걸리 주전자가 김관식의 머리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 때 함께 찾아온 신경림 시인에게도 불벼락이 떨어졌는데 "이런 미친 놈과 어울리면 자네도 미친 놈이 될 테니 함께 다니지 말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에 서정주의 아우인 우하 서정태가 김관식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고 전한다. 김관식은 서정주에게 '사위 같은 동서'였는데 서정주의 처제는 언니(서정주의 아내)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서정주가 처제를 딸처럼 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관식은 스무 살에 낸 첫 시집에서 조지훈의 추천사를 받았는데 결혼 전에 낸 2번째 시집에서는 서정주의 추천사를 받았으니 서정주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서운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주는 김관식을 매우 아껴서 그가 몸에 아플 때에는 닭고기와 과일을 마련하고는 몸소 병문안 가서 몸보신을 시켜줬다고 한다.[19]
- 미당의 생가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다. 근래에 복원된 곳으로 미당시문학관도 같이 자리하고 있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로부터 차로 10분 거리에 있어 들렀다가기 좋은 곳이다. 아무래도 선운사를 찾는 김에 같이 찾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한때는 이곳에서 시 낭송 대회도 했지만 현재는 하지 않는 듯하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는 달리 친일 행적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어 그의 발자취를 제대로 느끼기 좋은 곳이다. 인근에 인촌 김성수의 생가도 있다.
- 2020년 3월 11일 그의 8살 아래 남동생인 우하(又下) 서정태 시인이 97세에 별세했다. 동생으로 그와 사이가 각별했고 형을 따라 시인을 꿈꿨으며 서정주는 19살에 당시 15살이었던 여동생과 11살이었던 남동생의 시를 묶어 「형제시첩>이라는 제목으로 문집을 냈다. 미당 서정주 동생 서정태 시인, 97세로 별세
4. 논란
4.1. 친일 행적
나는 여기 인제 내 생애에서 가장 창피한 이야기들을 한바탕 벌여놓아야 할 마련이 되었다. 그것의 제목은 친일적 업적 또는 전범 여부에 대한 것이다. (…) 정치 세계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내 그릇된 인식을 만들고, 이 그릇된 인식에서 나온 언행들이 내 생애의 가장 창피한 일들을 빚었다. (…) 여기 깊이 사과해 둔다.
서정주, 문학적 자서전 『천지유정』 중에서
서정주, 문학적 자서전 『천지유정』 중에서
1942년 7월 13일~1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 1943년 9월 1일~10일자에 '인보정신', 1944년 12월 9일 "松井(마쓰이) 오장 송가", 1943년 국민문학 10월 호에 일문 '항공일', 1943년 조광 10월호에 '스무살된 벗에게'라는 수필, 11월호에 '최체부의 군속지망'이라는 소설, 12월호에 '보도행'이라는 르포 등 거의 전분야에 걸쳐 친일 행위를 하였다.
말년인 1992년 신동아 4월호에 '일정말기와 나의 친일시'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그 동안 내가 써온 시나 그 밖의 글 중에서 일정 말기에 쓴 몇 개의 글이 '친일파'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1980년대의 한동안 우리 문단의 일각에서 새삼스럽게 문젯거리가 되더니 요즘에 와서 또 웬일인지 다시 이 나라의 신문들이 이걸 내걸고 공격을 하고 있다"고 분개하며 자신이 친일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징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친일 문학을 한 것처럼 호도하였으며 자신이 쓴 친일시를 정 연구하고 싶으면 도서관에 가 알아서 찾으라고 서술했다.
이후 다시 일본의 지배가 몇백 년은 더 갈 것 같아 체념하며 친일 시를 썼다며 상황론으로 자신의 친일을 해명했다. 1992년 「시와 시학」 봄호에서 평론가 김재홍과 대담을 통해 "쓰라는 대로 쓸 수 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30년대 이후 숨 쉬는 것 말고는 전부 일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서 독립운동을 하건 하지 않건 국내에선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이때 국내 독립운동은 '일제의 허락' 아래 진행되는 실력 양성/교육 사업을 제외하면 고사했고 지배 체제가 더욱 탄탄해지면서 독립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인식이 널리 퍼졌으며 독립운동가들도 "이제 독립은 어려우니 일본의 지배는 인정하되 대신 그 테두리 안에서 조선 민족의 권익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노선으로 변화를 주었고 조선인 일본군 중 비교적 후세대에 속한 이응준이나 채병덕은 이런 인식 아래 언젠가 일본의 협력 아래 조선이 독립하려면 일본에서 조선인의 위상을 올려야 한다는 의외로 민족적인 목적으로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들이다.
일본의 패망과 조선 독립이 연결된다는 가능성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야 처음 공식적으로 제시되었지만 그것도 사업가나 유학생 같이 국제 정세 흐름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들 혹은 외부에 끈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당대 문인들은 가방끈만 길뿐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실제로 김동인의 경우 같은 블랙 코메디가 나오기도 했다.
松井(마쓰이) 오장 송가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멫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멫만 리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x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x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21]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신풍(神風,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정국대원(靖國隊員).[22]
정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x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내리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국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x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x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멫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멫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멫만 리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x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x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21]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신풍(神風,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정국대원(靖國隊員).[22]
정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x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내리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국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x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x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멫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친일시 중 가장 잘 알려진 「松井(마쓰이) 오장 송가」. 해당 시의 마쓰이 오장인 인재웅(印在雄)은 실존인물로 서정주 외에 노천명도 그를 기리는 친일시를 내기도 했다.[23] 전쟁이란 딱딱한 소재를 운문으로 세련되게 묘사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유려하게 시상을 전개해 후반부에 단번에 감정을 폭발시킨다. 문체만 보면 웬만한 서정시 저리가라다. 수미상관의 구조로 자아내는 여운은 덤이다. 친일시인데도 그 와중에 쓸데없이 고퀄리티다.
시에서 자주 언급되는 레이테 만 해전은 카미카제가 첫 등장한 전투다. 일본 해군은 레이테 만 해전의 사마르 해전에서 미군의 호위 항공모함과 구축함으로만 이뤄진 작은 함대의 용맹한 분투에 쫓겨 도망쳐야 했다. 위의 친일시에서 그렇게 찬양해 대던 카미카제로 깨부쉈다는 항공모함도 전술한 일본 함대를 내쫓은 호위 항공모함 한 척이었다.
4.2. 친독재행위
해방 후 우파로 스탠스를 확립한 후 좌익 문인단체 '조선문학가동맹'을 비난하는가 하면 이승만을 기리는 전기를 썼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베트남 파병을 촉구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1981년 대선 당시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해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그를 지지하는 지원연설을 하기도 했고 1987년에는 전두환의 만 56세 생일을 기념하여 찬양시를 지어 바쳤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처음으로
-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 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 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 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1987. 1.)
-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잘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온 세계에 넓히어
이 나라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서울 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 능력은 옛것이건 새것이건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힘으로 남북 대결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가지고
자유 민주 통일의 앞날을 믿게 되었고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1987. 1.)
위의 '松井(마쓰이) 오장 송가'를 읽고 이 시 중간의 '86 아세안 게임을 열어 일본을 이기게 하시고' 부분을 읽으면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미당 서정주 평전」에서 이 시를 일컬어 '서정주 자신도 다시 보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했겠지만, 지금도 인터넷에 전문이 떠돌며 시인의 이름을 먹칠하고 있는 시'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친전두환 행위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는데 친일 행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된 행위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전술한 전두환 축하시가 '전혀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고 표현력도 낮다'라며 서정주를 옹호하지만 전두환이 웃는 얼굴을 보고 "세상을 구제하실 미륵의 미소다"라고 한 적도 있다.
그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대체로 서정주 특유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정치감각의 결여[24], 반공주의가 낳은 비뚤어진 정치적 보수주의, 개인적으로 연루된 정치적 사건의 여파[25]로 인해 생긴 정치에 대한 정신적 불안 등이 합쳐져 그런 지나친 권력 옹호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도 언급된 평론가 이경철은 서정주와 여러 번 인터뷰를 갖기도 했을 만큼 친분이 있었는데 서정주가 두고두고 비난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생전에 사죄의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해 여러 차례 이 문제에 대해 사죄를 할 것을 추궁했고 결국 서정주는 중앙일보에 실린 말년의 인터뷰에서 "생각해보니 무척 잘못된 일이었네. 그때 그들에게 짓눌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협조했으나 돌이켜보니 내 짧은 생각이었네."라고 말했다.
4.3. 옹호
그의 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작품과 친일 행위가 분리되어 평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문학평론가 이남호는 '고은의 서정주에 대한 비판''을 비판했다. 이남호는 고은의 비판은 정치적 측면에 집중하고 있으나 삶은 다층적이고 복잡하며 서정주의 삶에서 정치의 비중이 낮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작은 부분에 비해 문학사에 남긴 족적이 크니 서정주의 시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건 아깝다고 주장한다.[26]
미당의 시는 예술지상주의, 순수문학에 속하는 것으로 정치참여, 민중문학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의 친일 활동이 현실보다 지나치게 부각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실제로 1943년 그가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처녀시집 「화사집」에 「바다」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시를 남겨 왔으며 오늘날로 따지면 고등학교 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조사를 받았던 적이 있는 등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그가 조선일보 폐간호에 싣기 위해 썼던 작품 「행진곡」은 민족주의적인 열망을 고취시켰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는데 행진곡이라는 시를 읽은 연극 배우들이 작품에 탄복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연극을 하고 다녔는데 그들이 당시 경찰에 붙잡히고 나서 이러한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해당 진술로 인하여 그는 감옥에 갇혔지만 당시 경찰 중 하나가 문학에 대한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터라 그를 미워하지 않았으며 그 덕분에 일찍 풀려났다고 한다.
아래는 「행진곡」의 전문.
잔치는 끝났더라.
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그에 따르면 위 시는 조선일보의 폐간 기념시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마지막 앉아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르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 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집에 돌아오니 엽서 한 장과 전보 한 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조선일보 학예부장 김기림(金起林)이한테서 온 건데, 엽서의 내용은 조선총독부에서 신문을 폐간하라고 하여 그 기념호를 내게 되었으니 며칠까지 기념시를 한 편 빨리 써 보내라는 것이고, 전보는 그것을 다시 독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아려 보니 그 기념호가 나온 날짜는 이미 지났고, 나는 초청받고도 너무 늦게 가서 이미 끝난 잔치 자리에 혼자 불사른 재나 밟고 서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늦은 대로 나는 그걸 안 쓰고는 있을 수가 없어 ‘행진곡(行進曲)’이란 제목으로 하나 지어 보았다.
실제로 다른 친일 문학가들에 비해 오히려 적은 기간 동안 친일 활동을 해 온 데다 친일로 인한 이렇다 할 혜택도 받지 못했던 그의 친일이 부각된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첫째, 그가 「국민문학」에 일본어로 발표했던 「항공일에」가 일본 문학인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여린 숨을 폭폭 내쉬며
내 귓가에서 자그마한 서운녀(西雲女)가
일곱 살 서투른 고향 말씨로
아이 하늘은 서울이레야,
속삭이던 그 하늘이구나
마늘이랑 파랑 고추를 먹고
기름때 절은 하이얀 옷을 입은
뜨겁디뜨거운 가슴을 안은 이들이
산비둘기 울던 노오란 길을
가고 가던 진초록
바로 그 하늘이구나
아아 애달퍼라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눈과 눈이여
잊을 수 없는 파아란 정
해 저물어 밤이 되면
별똥은 반짝거려
아아 애달퍼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스러져 나날이 하늘은 깊어만 가고
여기 있는 건 내 덧없는 몸짓과 말뿐
메아리와 파도소리와
해맑은 좁은 마당엔
꽃축제 올리는
쇠가죽 북소리만 은은해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바람 !
서정주 「항공일에」 번역
실제로 일본의 노리타케 미츠오는 그의 이 작품을 보고 40년대에 발표된 작품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하며 시인 미당이 일본 문학가들에게는 없는 묘한 유통력이 있다고까지 하였다 한다. 이것을 고려했을 때 그의 친일파로서의 명성은 일본 문학가들의 지지로 인한 것임을 추측해 낼 수 있다.내 귓가에서 자그마한 서운녀(西雲女)가
일곱 살 서투른 고향 말씨로
아이 하늘은 서울이레야,
속삭이던 그 하늘이구나
마늘이랑 파랑 고추를 먹고
기름때 절은 하이얀 옷을 입은
뜨겁디뜨거운 가슴을 안은 이들이
산비둘기 울던 노오란 길을
가고 가던 진초록
바로 그 하늘이구나
아아 애달퍼라 아직은 감을 수 없는 눈과 눈이여
잊을 수 없는 파아란 정
해 저물어 밤이 되면
별똥은 반짝거려
아아 애달퍼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
스러져 나날이 하늘은 깊어만 가고
여기 있는 건 내 덧없는 몸짓과 말뿐
메아리와 파도소리와
해맑은 좁은 마당엔
꽃축제 올리는
쇠가죽 북소리만 은은해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온 바람 !
서정주 「항공일에」 번역
둘째, 그가 친군부 시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를 반대하는 인물들 중에서 그의 친군부 행적을 친일 행적과 엮어 그를 비난하는 과정으로 인해 더욱 친일 행적이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만 해도 그의 친일 행위는 "그럴 수도 있지"하는 분위기였는데 전두환 찬양시 발표 이후에는 그나마 용서받던 친일 행위도 더욱 거세게 비판을 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그가 했던 말인 '일제 치하가 이백년을 갈 줄 알았다.'라는 말은 그가 자신의 친일 행적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언급하며 자신이 당시의 시대상을 잘못 파악했고 어리석었다고 고백하며 했던 말이다.
그도 시인이기 전에 인간이므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민주주의 사상의 초석을 닦았다는 프랑스인 장 자크 루소는 육아의 교육성을 강조했는데도 슬하에 둔 다섯 자녀를 모두 고아원에 팔아넘겼다.
마쓰이 오장만 해도 뒷날 서정주 배격에 앞장선 고은의 시와 비교하면 재능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지며 왜 이 사람이 대가 소리를 듣는지 알려줌과 동시에 그 좋은 재능으로 이런 행위를 했다는 데 분통이 배로 터지게 된다.
즉, 이런 식으로 어두운 면만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은 인류사에 길이길이 남은 위인도 전부 쓰레기로 낙인을 찍는 모순을 연출한다. 따라서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일리는 있다. 정리하자면 그 인물의 모순적인 태도는 잠시 접어두고 업적을 인정하는 말이다.
4.4. 비판
1972년에 나온 <서정주 문학전집> 제3권에서 57세의 서정주는 자신이 친일파나 부일파로 불리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은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며 살았을 뿐이라는 게 그의 해명이었다.
일본의 기세가 뻗어 올라가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하늘의 기운을 따라 일본에 순종했을 따름이라고 그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 말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략)
그의 문학 인생에서는 전쟁과 독재를 찬미하는 방식으로 문학적 영향력을 늘려가는 패턴이 일관되게 발견된다. 친일 행위를 그의 나머지 인생과 분리할 수 없는 이유다.
전쟁과 독재의 공통점은 소수 지배층을 위해 다수 대중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소수 지배자의 편에 서서 전쟁이나 독재를 찬미하는 방법으로 영향력을 높이는 서정주의 패턴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중략)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견되던 시기에 창작한 이 시에서 그는 8·15 해방 이후 세대의 인생을 간략히 짚어나가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베트남뿐이다/ 베트남뿐이다"라며 베트남에서 활로를 찾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똑같은 수준에서 놓고 볼 수는 없지만 대중을 전쟁으로 내모는 데 주저함이 없는 태도는 1966년 작품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때 대중을 전쟁으로 내몬 친일 행위가 정말로 부끄럽고 후회됐다면 이런 시를 또다시 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대중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그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중략)
서정주는 자신이 억지로 친일을 한 듯이 변명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의 친일 행위의 저변에 깔린 다수 대중에 대한 경시는 해방 이후의 행적들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친일 행위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전두환은 정직한 사람” 어느 시인의 내면세계
일본의 기세가 뻗어 올라가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하늘의 기운을 따라 일본에 순종했을 따름이라고 그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 말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중략)
그의 문학 인생에서는 전쟁과 독재를 찬미하는 방식으로 문학적 영향력을 늘려가는 패턴이 일관되게 발견된다. 친일 행위를 그의 나머지 인생과 분리할 수 없는 이유다.
전쟁과 독재의 공통점은 소수 지배층을 위해 다수 대중을 희생시키는 것이다. 소수 지배자의 편에 서서 전쟁이나 독재를 찬미하는 방법으로 영향력을 높이는 서정주의 패턴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중략)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견되던 시기에 창작한 이 시에서 그는 8·15 해방 이후 세대의 인생을 간략히 짚어나가다가 마지막 대목에서 "새로 나갈 길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베트남뿐이다/ 베트남뿐이다"라며 베트남에서 활로를 찾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똑같은 수준에서 놓고 볼 수는 없지만 대중을 전쟁으로 내모는 데 주저함이 없는 태도는 1966년 작품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때 대중을 전쟁으로 내몬 친일 행위가 정말로 부끄럽고 후회됐다면 이런 시를 또다시 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대중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그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중략)
서정주는 자신이 억지로 친일을 한 듯이 변명했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의 친일 행위의 저변에 깔린 다수 대중에 대한 경시는 해방 이후의 행적들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친일 행위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전두환은 정직한 사람” 어느 시인의 내면세계
자신의 의도로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 행동의 의미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행동으로 이득을 취했느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다.
그 시절엔 일제가 천년만년 갈 것 같았다는 변명을 할 수 있어도 조금만 식견이 있던 사람들은 늦어도 일본 본토에 폭격기 날아다니던 시점에는 일제의 패망을 예측하고 있었다. 즉, 정치나 시대에 대한 안목 없이 권력의 회유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서정주의 변명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말로만 하지 않고 실천을 했어야 하지만 차남 서윤이 가출을 하면서까지 말렸음에도 신군부에 대해서도 똑같은 행태를 보였으니 후세의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면피성 발언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서정주는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려고 했다. 신군부를 옹호하며 권력 지향적인 행태를 보이고 심지어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언급조차 불쾌해했다는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서정주의 작품은 자신이 배신했던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기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서정주는 단순 친일을 넘어 카미카제를 옹호했는데, 즉 반인륜 범죄에 대한 옹호와 미화를 저질렀다. 일제강점기의 수많은 친일 예술가들은 체제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려고 했어도 서정주처럼 카미카제라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옹호한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이를 근거로 서정주을 일반적인 친일문학가와는 차원이 다른 반인륜 범죄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시인 서정주는 분명 대단한 문인이며, 미당의 문장은 한국어의 미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작품의 가치나 문학계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그런 업적과는 별개로 인간 서정주는 평소에는 국가나 사회와 같은 거대 담론을 미학적 관점에서나 읊다가 거대한 권력 구조가 자신에게 영향이 미치면 그대로 굴종하던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권력에 편승한 기회주의적인 행적에 대한 비판은 피할 수 없다. 결국 문인 서정주와 인간 서정주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5. 관련 평론
서정주는 많이 연구된 한국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1975년 출간된 「서정주 연구」와 1994년 출간된 「미당 연구」를 비롯해 다종다양한 책이 나왔다. 서정주를 다룬 연구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송욱의 「서정주론」(1953), 김종길의 「의미와 음악」(1964), 김우창의 「한국시의 형이상」(1968)과 「떠돌이의 귀향」(2016), 유종호의 「소리지향과 산문지향」(1994)과 「서라벌과 질마재 사이」(2000), 김인환의 「서정주의 시적 여정」(1972), 천이두의 「지옥과 열반」(1972), 김화영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1984), 이남호의 「겨레의 말, 겨레의 마음」(1994) 등이 있다. 비교적 근래의 저술로는 최현식의 「서정주 시의 근대와 반근대」(2003), 이숭원의 「미당과의 만남」(2013) 등을 들 수 있다. 평자에 따라 서정주와 그의 시를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어느 정도 문학 감수성과 심미안이 있는 사람이 서정주의 시를 보면 현대 한국 시단은 물론이고 한국 문학 전체를 통틀어도 도저히 비슷한 시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큰 감명을 받거나 그 표현력에 압도되는 일이 잦다. 서정주를 숭배하는 사람, 서정주의 후기 작품을 비판하는 사람, 서정주를 싫어하는 사람도 대부분 그 표현 능력만큼은 높이 산다. 이런 독보적 재능이 친일과 친군부, 친독재 따위로 얼룩지지 않고 문학에 오롯이 환원되었더라면 정말로 한국 문단의 큰 자산이자 별이 되었을 것이다.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조적인 사람으로 엮일 만한 인물도 있는데 바로 소설가 황순원이다. 공교롭게도 서정주와 황순원은 생몰연도가 1915년과 2000년으로 똑같은데 각각 시와 소설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행보에 있어서는 거의 천양지차의 차이를 보여 흥미를 준다. 두 작가의 사후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이 함께 제정되었으나... 결국 미당문학상은 진보가 다수인 문단의 비판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6. 어록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자화상」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자화상」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무등을 보며」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무등을 보며」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 옆에서」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귀촉도」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귀촉도」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견우의 노래」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추천사」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추천사」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은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동천」
.....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28]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신부」[28]
7. 주요 작품
자세한 내용은 서정주/작품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 화사집 (1941)
- 귀촉도 (1948)
- 서정주시선 (1956)
- 무등을 보며 / 국화 옆에서 / 추천사 / 춘향 유문 등
- 신라초 (1961)
- 꽃밭의 독백 / 고조 / 노인 헌화가 / 무제 / 인연설화조 등
- 동천 (1968)
- 동천 /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선운사 동구 등
- 질마재 신화 (1975)
- 신선 재곤이 / 신부 / 상가수의 소리 /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 / 침향 등
- 떠돌이의 시 (1976)
- 시론 / 낮잠 등
- 서으로 가는 달처럼... (1980)
-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 (1982)
- 안 잊히는 일들 (1983)
- 노래 (1984)
- 팔할이 바람 (1988)
- 산시 (1991)
- 늙은 떠돌이의 시 (1993)
- 80소년 떠돌이의 시 (1997)
8. 수상 경력
[1] 시인. 1923년생. 2020년 3월 11일 별세.[2] 인물사진의 대가로 평가받는 작가 육명심이 서정주를 찍은 사진. 육명심은 한 인터뷰에서 사진에 나오는 서정주의 파격적인 자세 때문에 어느 문인에게서 '한국 최고의 시인을 시골 촌로로 만들어 놓았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고 밝혔는데 막상 서정주 본인은 이 사진을 보고 만족했다고 한다.[3] 장자에 나오는 표현에서 따 온 것이다.[4] 특히 현대시에서 서정주의 위상은 그 어떤 시인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5] 강자에게 빌붙는 문인[6] 그러나 지주의 아랫사람이긴 하지만 액면 그대로 그의 아버지가 종 취급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름은 마을에서 소작농들에게 직접적으로 소작료를 거둬들이는 중간관리직이기 때문에 악질 소리 듣는 지주들도 일반 소작농들보다는 잘 대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김성수는 소작인들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 동네에서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마름인 그의 아버지도 막 대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미당을 상경시킬 정도면 아주 가난한 집안도 아니었을 것이다.[7] 공교롭게도 서정주는 10년 뒤 같은 학교에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8] 오장환과 이용악의 시는 한동안 월북을 이유로 금서 취급을 받으며 잊혀 가다가 1980년대 후반 부당한 규제가 풀리면서 다시 읽히게 되었다. 다만 두 시인은 월북 문인들의 상황이 대부분 그랬던 것과 같이 해방 이후 서정주만큼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9] 이는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백석, 윤동주, 김수영 등의 시인이 한두 권 분량의 작품밖에 남기지 못한 것에 반해 서정주는 15권의 시집을 남겼고 작품의 성취도 고르게 뛰어나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비슷한 세대의 작가 중 그만큼 지속적으로 뛰어난 활동을 보여준 시인은 유치환, 박목월, 박두진, 김춘수 정도밖에 없다.[10] 사진작가 전민조의 사진이다.#[11] 사진작가 조선희의 사진이다.#[12] 뒤집어서 말하면 씻을 수 없는 오점만 남기지 않았어도 추앙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뜻이다.[13] 이 부분이 영화 「암살」에 나오는 대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변명과 다를 바 없는 말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정치 상황에 대한 오판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후회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런데 전혀 반성하지 않고 다음에 똑같은 일을 또 저질렀다.[14] 사실 증거가 너무 명확해서 '차마 부정하지 못 한 것'이지, 절대 친일 행위를 반성하거나 사과하지는 않았다. 그는 일생 동안 여러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회피하거나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15] 재미있는 것은 3~4공화국 당시 적극적이지 않더라도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표출했던 인사들이 5공 정권에는 친군부를 넘어서 아부에 가까운 병크를 벌이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혁신계 혐의로 10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그해 5월」 등의 소설이나 여러 에세이 등을 통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비판을 넘어서 혐오를 보였던 소설가 이병주는 <대통령들의 초상> 이라는 에세이에서 전두환을 찬양하였다.[16] 유명한 고전 영화인 「사관과 신사(an Officer and a Gentleman)」에서 '사'가 둘 다 '士(선비 사)'로 쓰는데 이를 비슷한 모양인 '土(흙 토)'로 읽은 말장난.[17] 심지어 황순원은 아들인 황동규가 태어날 무렵 일제의 탄압이 더 극심해지자 아예 대놓고 절필했다.[18] 황순원의 그 모습을 본인 스스로는 꽤 동경했던 모양이다.[19] 김관식은 평소 술을 매우 즐기고 굽힘없이 호방한 성격이였다. 문학상 시상식에서 "너희끼리 상 나눠 먹느냐"며 호통을 치고 미흡한 서민 복지 정책에도 항거해 벗은 몸으로 소를 거꾸로 타고 세검정에서 당시 중앙청으로 나간 일이나 살던 동네 판잣집 철거 때는 지붕에 앉아 술판을 벌인 일화 등으로 유명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출마하여 장면과 겨루었으나 낙마한 뒤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다 간염에 걸려 1970년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0] 참고 자료.[21] 현대 대한민국 국군으로 치면 하사에 해당하는 계급. 오장은 구 일본군 육군에서만 쓰이던 계급임을 감안하면 밑에 언급될 육항대 소속이라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구 일본군 해군에서는 삼등병조가 오장과 비슷한 위치였다.[22] 정국대(靖國隊)는 비행부대명으로, 여기서 "정국(靖國)"은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의 "야스쿠니(靖國)"를 말한다. 기존에는 "귀국대원(歸國隊員)" 또는 "구국대원(救國隊員)"으로 오독되어 왔는데 2009년에 발간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와 사료집,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서 처음으로 바로잡혔다.[23] 시의 주인공 인재웅은 생존하여 해방 후 귀국했다고 잘못 알려져 왔는데 이는 근거 없는 낭설이다. 해방 후에도 인재웅을 본 사람은 전혀 없었다. 1946년 1월 12일 『자유신문』의 기사를 통해 미국포로가 되어 하와이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생환한 2,500명이 인천항에 상륙하였으나 명부를 조사한 결과 인재웅의 생존은 허보임이 판명되었다고 보도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인재웅의 양친은 "찬바람이 살을 여위듯 하는 부두에 온종일 서 있으며 아들을 만나려다 그것이 허사인줄 알게되자 애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한다.[24] 이 때문에 '정치적 무뇌아'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25] 서정주는 6.25 전쟁 전후 좌우익 대립이 극심하던 무렵 정치공세로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강박관념으로 인해 환청과 신경쇠약 등에 시달린 적이 있고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4.19 혁명 때는 시를 가르치던 제자가 시위에 참가했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고 5.16 군사정변 무렵에는 이유 없이 감옥으로 연행됐다가 풀려나오기도 했다.[26] 그 외엔 서정주에 대한 인신 공격이나 근거로 든 시는 서정주가 쓴 수많은 시 중 극히 일부다 등의 내용이 있다.[27]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28] 서정주의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신화의 첫머리에 실린 작품으로 첫날밤 소박 맞은 여인의 한과 슬픔을 담담하고 동화적인 어체로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