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22 11:10:58

장사훈

장사훈
金鍾熙
파일:국악학자 장사훈.jpg
<colbgcolor=#94153e> 운초(云初)
본관 직제학계 인동 장씨
국적 일본령 조선파일:일본 제국 국기.svg대한민국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직업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1936년~1944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1961년~198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객원 교수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학장
(1986년~1989년)
'한국국악교육학회' 설립자
출생 1916년 11월 26일(음력 8월 15일).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운문리
사망 1991년 9월 25일. 충청북도 청주시
(향년 7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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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1. 개요

일제강점기, 한국 음악이 축소되고, 잊혀지던 시기국악을 이어가고 연구하던 국악학자. 한국국악교육학회의 설립자이자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국악인.

2. 상세

호는 운초(云初). 경상북도 영주시(당시에는 영주군) 출생이다. 1916년 11월 26일(음력 8월 15일) 일본령 조선 경상북도 영주군 이산면 운문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9살이 되던 해인 192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홀로 서울에 오게 되었으나 당시 장사훈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남들이 학교에 다닐 때에도 일을 하면서 학업에 종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1년, 그 당시 공립으로 운영되던 청운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당시 법관이나 변호사를 희망하였으나, 부족한 형편으로 인하여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당시 이왕직에서 운영하던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이왕직 아악부는 학비가 모두 면제되고 옷을 비롯한 여러 학용품과 도서(책)들도 줄 뿐더러 매달 품삯까지 나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왕직 예식과의 수석 전사로 있는 친구할아버지 또한 그에게 “네 재주가 아깝다.”며 꼭 이왕직 아악부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를 보라고 하였다. [1]
그렇게 들어가게 된 이왕직 아악부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게 된다. 1931년. 마침내 장사훈은 이왕직 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에 제 4기생으로 입소하여 거문고를 전공 악기로 하여금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 장사훈은 1936년부터 1944년까지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규일과 임기준으로부터 가곡·가사·시조를 배워 악보를 만들었는데, 후에 그 일부가 단행본으로 출간되게 되었다. 장사훈은 일찍이 조선과 고려, 신라 등의 고악보들을 수집,해독하고 관심있게 연구하였다. 그는 광복 3년전인 1942년에 '보허자논고(步虛子論攷)'라는 생애 첫 논문을 발표하였고, 광복 직후인 1945년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을 역임하였다. 그 후로는 중앙방송국 국악프로담당을 맡고, 편집부[구]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장사훈은 1954년부터 덕성여자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무과장 등의 보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1961∼1982년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1968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이 밖에 한국국악교육학회를 설립하여 [국악교육] 학술지를 출간하였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부설 동양음악연구소를 설치하여 '민족음악학'이라는 학술지를 발간하였다.
1982년부터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객원 교수로 있으면서 1986년∼1989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였고, 1991년 청주대학교 운초민족음악자료관 관장으로 재직하였다.이후 1982년에 서울대학교를 정년 퇴임한 후, 명예교수의 자격으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으며 이후 1982년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으로 부임하면서 청주에도 우리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국악과가 생기게 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평생 국악이론의 체계화와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현대 국악관련 학문들의 주요 부분들을 마련하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국악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장사훈은 이후 76세의 생일을 2달 앞둔 1991년 9월 23일, 초가을에 자신이 일하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숨을 거두었다.

[1] 그 당시 장사훈은 막상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며칠 동안 밤을 새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당시로서는 조선 음악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지 않았을 뿐더러 돈이 돼지도 못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구] 합동통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