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21:34:35

이근배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의 가수에 대한 내용은 이하늘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1
이름 이근배
분야 시인
은관문화훈장(2등급)

이근배의 수상 내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제15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수상
존 롤스턴 솔, 정진규
(2010)
이근배, 모옌
(2011)
수아드 알 사바, 김재홍
(2012)
제27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사랑 세 쪽」
나태주
(2014)
이근배
(2015)
신달자
(2016)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 제39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이근배
李根培
파일:70635_87728_3427.jpg
본관 경주 이씨[1]
출생 1940년[2] 3월 1일 ([age(1940-03-01)]세)
충청남도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 209번지[3]
현직 만해시인학교 교장
학력 당진상업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58 / 학사)
경력 한국문학 발행인
지용회 회장
인천재능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
신성대학교 초빙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이명박 정부)
제37대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제39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단 경향신문 신춘문예 「묘비명」
서울신문 신춘문예 「벽」
조선일보 신춘문예 「압록강」 당선 (1961)

1. 개요2. 생애3. 수상4. 경력5. 시집6. 벼루 수집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이근배의 시, '살다가 보면' -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중 한 명으로 시조 작단의 좌장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2. 생애

1940년[4] 3월 1일, 충청남도 당진군(현 당진시) 송산면 삼월리 209번지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이선준(李銑濬)과 어머니 장순의(張順儀)[5]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이각현(李覺鉉)은 한학자로 당진 지역 유도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이선준이 8.15 광복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해 활동하다가 국민학교 5학년 되던 1950년 6.25 전쟁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이후 줄곧 조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이후 당진상업고등학교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6]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아버지가 보던 일본책 여백에 펜촉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프랑스의 18세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소설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를 읽고 자신이 먼저 그런 소설을 써야 했다는 생각에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도망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집안에서는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를 가길 원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 선생이나 공무원이면 당시 어른들이 바라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어쩐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근배는 선생이 되긴 싫었고 그는 신문에서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자기가 장학생 선발과정에서 장학생이 되면 보내달라고 그의 조부에게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장학생 선발과정에서 을류 장학생[7]이 되었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58학번으로 진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김동리에게서 소설을, 서정주에게서 시를 사사했다. 1960년 서정주의 서문이 실린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출간한 이후에, 196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묘비명>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벽>과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압록강>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이근배 시인의 서라벌예대 재학 시절 시 창작 강의를 하던 박목월 시인은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상식 장소에서 “오 바로 너였구나. 어쩐지 시어가 참 곱고 신선해서 네가 아닌가 했었다.”라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보신각종>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달맞이꽃>가 당선되었으며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북위선>기 당선됨으로써 문단 최초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5개나?

3. 수상

1983년 가람시조문학상
1983년 가람문학상
1987년 중앙시조대상
1987년 한국문화작가상
1997년 육당문화상
1999년 월하문학상
2000년 편운문학상
2002년 현대불교문학상
2007년 제5회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2010년 제9회 고산문학상 시조부문
2011년 제 15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2011년 은관문화훈장
2014년 제46회 한국시인협회상
2014년 제4호 이설주문학상
2015년 제27회 정지용문학상
2017년 제7회 한국시조대상
2017년 제4회 심훈문학대상

4. 경력

1972년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1972년 한국문인협회 이사
1972년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1973년 ~ 1975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위원회 위원장
1983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94년 ~ 1996년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1997년 ~ 2009년 지용회 회장
2002년 ~ 2003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2003년 ~ 만해시인학교 교장
2008년 ~ 대한민국예술원회원
2015년 ~ 2017년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2019년 ~ 202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5.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1960)
<노래여 노래여> (1981)
<동해 바다 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1982)
<한강> (1985)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2004)
<추사를 훔치다> (2013)

6. 벼루 수집가

파일:27961641.1[1].jpg

시, 시조에서의 문학적 성취 외에 문화 예술계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품 벼루 컬렉터로도 유명하다.

유학자인 할아버지와 면암 최익현의 수제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붓글씨를 익혀 왔는데, 1973년 창덕궁에서 문화재관리국 주최로 열린 벼루전시회가 계기가 되어 40년 넘는 세월동안 벼루를 수집하였다. 한국 벼루 500여 점, 중국 벼루 500여 점, 합쳐서 총 1000여 점에 달하는 벼루를 갖고 있다. 당(통일왕조), 북송, 명나라, 청나라대 벼루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황제가 사용하던 벼루, 조맹부 주이존 유용 옹방강 완원 이홍장 등 명사들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벼루를 여럿 갖고 있다고 한다. 흠좀무

벼루에 대한 애정 때문에 스스로를 연벽묵치((硯癖墨痴)[8]라고 평하기도 하였고 벼루에 관한 연작시만 무려 80편 정도를 썼다.

7. 관련 문서



[1] #[2] 호적상 생년월일로 실제로는 1939년생이다.[3] #[4] 본래 1939년생이나, 호적에 이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5] 장후재(張厚載)의 셋째 딸이다.[6]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의 전신. 과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더불어 '한국 문학의 사관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 문맥을 자랑한다.[7] 갑류는 전액 장학생이고 을류 장학생은 반액만 내주는 장학생.[8] 문방사우에 빠지는 어리석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