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프랑수아즈 사강 Françoise Sagan | |
본명 | 프랑수아즈 쿠아레 Françoise Quoirez |
출생 | 1935년 6월 21일 |
프랑스 카자르크 | |
사망 | 2004년 9월 24일 (향년 69세) |
프랑스 옹플뢰르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극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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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세기 중, 후반(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동했던 프랑스의 여성 문학가.불과 19세에 발표한 소설 '슬픔이여 안녕(Bonjour Tristesse)'으로 데뷔한 이래 '어떤 미소(Un certain sourire)',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vous Brahms...), '흐트러진 침대(Le lit défait)' 마음의 파수꾼(Le garde du cœur)등을 발표했다.
2. 생애
프랑수아즈 사강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민음사 영상 |
1935년 프랑스 남서부 카자르크에서 출생했다. 전기 회사를 운영하는 엔지니어인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며 본명은 프랑스아즈 꾸아레[1]였으나 사회적 평판을 중요시하게 여긴 그녀의 아버지가 막 탈고된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보고는 발표 후의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며 가족의 성을 쓰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이후 필명인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활동한다. 필명의 유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인 사강 공작 혹은 공작 부인.
사강은 리옹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3개월도 못 다니고 퇴학당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이후 사강은 유명 사립 학교 Cours Hattemer[2]에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독서에 임했는데 훗날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처음 접한 것이 바로 이 때 였다. 사강은 13살에는 앙드레 지드를, 15살에는 알베르 카뮈를, 16살에는 아르튀르 랭보를 읽기 시작했으며 이 외에도 윌리엄 셰익스피어, 장 자크 루소, 스탕달,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르셀 프루스트, F.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장폴 사르트르 등의 작가를 탐독했다.
1951년 사강은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했고 1952년 가을, 재수 끝에 바칼로레아 시험에 통과하여 대학평준화가 되지 않았던 당시 프랑스 최고의 인문과학대학인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 후 사강은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양가의 처녀로는 발디딜 곳이 못되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면서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며 재즈를 즐겼으며[3] 결국 1953년에 개강한 첫 학기에 학사경고를 받고 만다. 한편, 그 해 여름에 바캉스를 즐기다 요트 사고를 당한 사강은 병상에 있던 중 심심풀이로 6주만에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썼고 여러 출판사에 자신이 쓴 원고를 보낸다.
출판사 쥘리아르의 편집자 르네 쥘리아르는 그녀가 투고한 원고를 보고 그녀에게서 자신의 출판사에 큰 돈을 벌어주었던 레몽 라디게와 비슷한 천재성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고 이 소설을 출판하기로 계약한다. 이 때 사강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2만 5천 프랑을 선인세로 요구했는데 쥘리아르는 오히려 그 두 배에 해당하는 5만 프랑의 선인세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4] <슬픔이여 안녕>은 1954년 3월 15일에 발표되었고 1954년 한 해에만 50만부가 팔려나가는 공전의 히트를 쳤으며 비평가상 까지 받게 된다.[5] 비평가상 수상 당시 사강은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상금 10만 프랑을 수표가 아니라 전액 현금으로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설의 여주인공인 10대 소녀 세실이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는 묘사 때문에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이 이 소설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바티칸 당국은 "독과 같은 이 책을 젊은이들로부터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대학을 정식으로 자퇴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을 시작, <어떤 미소 (1956년)>, <한 달 후 일 년 후 (1957년)> 등을 연달아 발표했고 이 작품들이 모두 인기를 끌면서 사강은 천재 소녀라 불리며 "사강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주목받는다. 1958년에는 '슬픔이여 안녕'이 진 시버그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고 사강은 마침내 1959년, 그녀의 대표작이자 프랑스 현대소설의 대반향으로 손꼽히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 vous Brahms...)>를 발표한다. 60년대부터는 소설보다 희곡 집필에 몰두했다가 80년대부터 다시 소설을 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프랑수아즈 사강은 "매혹적인 작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온갖 비행을 일삼기도 했다. 첫 소설 '슬픔이여 안녕'이 비평가상을 탄 후 상금으로 10만 프랑을 받자 재규어사의 스포츠카를 산 것을 시작으로 여러 스포츠카를 구입하여 과속으로 드라이브를 즐가다가 1957년 4월, 자신이 소유한 애스턴 마틴의 스포츠카를 시속 160km의 속도로 몰던 도중 교통사고를 냈고 이 때 치료 목적으로 사용한 모르핀에 중독되었다. 모르핀 중독에 못이겨 이후 그녀는 약물 중독에 여러 번 빠졌고 과도한 음주로 죽음 직전까지 간적도 여러 번이었다. 사강은 1964년에 발표한 첫번째 자서전 <독약(Toxique)>에서 자신의 모르핀 중독을 털어놓았다. 이외에도 1956년, 21살의 나이로 카지노에 처음 출입한 후 도박에 중독되어 수 많은 재산을 탕진했으며 급기야는 정부에 자신의 카지노 입장 금지를 스스로 요청하기도 했다. 사강의 비행이 계속해서 화제에 오르자 1978년 극우 정치가 장마리 르 펜은 "사강을 단두대에 보내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
80년대 들어서 그녀는 재기하여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으로 당선된 친구 프랑수아 미테랑과 함께 정치 개혁에 뛰어들었고 미테랑 재임 시절에 지식인으로서 사회 현안에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다.[6] 사강은 프랑스에서 인신 보호 영장 청구권에 대한 법률이 제정되는데 큰 기여를 했고 교도소 개혁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사강은 1984년에 발표한 에세이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Avec mon meilleur souvenir)>을 통해 과거 자신의 방탕한 생활상을 담담하게 묘사하여 화제를 일으켰다.
미테랑 대통령 퇴임 직후인 1995년에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면서 사강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녀는 한 TV쇼 프로그램에 나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J'ai bien le droit de me détruire.)#[7]며 자신을 변호했고, 이후 두 차례 기소에서 모두 선고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사강이 미테랑 재임시절 개발회사인 Elf의 우즈베키스탄 매장 석유 개발 관련 민원을 대통령에게 전달해 외교부에 압력을 넣어 해소한 대가로 약 9백만 프랑 가량의 금품을 수수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8] 1991년에 불탔던,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을 증개축하면서 탈세한 혐의도 인정되었다. 그 결과 2002년 사강은 금고형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녀의 말년은 재산 몰수로 인해 궁핍했으며, 사강의 동료들은 참작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2004년 사강은 심장 및 폐질환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사강의 장례는 국장급으로 치러졌으며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의 가장 감각적인 작가를 잃었다며 직접 애도를 표했다.
3. 주요 작품
-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 (1954년) : 17살의 세실은 15년째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바람둥이 아버지 래몽, 그의 정부 엘자와 여름 동안 해변에 있는 별장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친구 안이 찾아오면서 이들의 삶에는 균열이 생긴다. 아버지와 세실이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반면, 안은 지적인데다 세련되고 질서를 추구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안이 사랑에 빠지게 되자 세실은 자신의 남자친구 시릴과 엘자를 꼬드겨서 모종의 사건을 꾸미게 된다.
19살의 나이에 발표되어 사강을 일약 천재 작가로 만들어 준 그녀의 데뷔작으로 아버지의 재혼이라는 사건 앞에서 자기 내면의 낮선 감정과 마주하게 된 10대 후반 소녀의 심리를 치밀하고 감각적으로 묘사하여 높은 인기를 얻었고 1958년 진 시버그 주연으로 영화화까지 되었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슬픔에 '작별을 고한다'(= 잘 가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처음 맞아들이는' 인사(= 반가워)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 책에선 밈으로 활약하는 여름이었다라는 문장이 등장하기에 네티즌들은 ‘여름이었다’의 원조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 어떤 미소 (Un certain sourire) (1956년) : 매력적인 유부남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겪은 뒤 성숙해 가는 과정을 그린 여대생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요약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젊은 여성의 복잡한 내면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의 엄청난 인기에 대한 부담감으로 집필에 1년이나 걸렸다. 다행히 소포모어 징크스에 걸리지 않고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해당 소설로 사강은 자신이 운이 좋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한국에서 이 소설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전혜린이다.
- 한 달 후 일 년 후 (Dans un mois, dans un an) (1957년) : 사랑의 위약함을 잘 알고 있는 영리하고 매력적인 조제, 부인이 있지만 조제를 사랑하는 베르나르, 사랑을 성공의 발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야심찬 여배우 베아트리스, 오랜 결혼생활로 더 이상 사랑을 못 느끼는 50대 말리그라스 부부 등 파리에 거주하는 아홉 남녀의 각기 다른 사랑과 삶을 그려낸 소설.
각각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가슴에 품은 사랑의 어긋남,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으나 시간이 지나 열정이 식은 후의 남녀관계를 관조적 어조로 풀어냈다. 섬세한 심리묘사로 탐미주의적인 20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경향이 물씬 묻어 있는 작품이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조제라는 이름이 이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Brahms...) (1959년) : 39살의 이혼녀 폴에게는 오랜 연인 관계인 로제가 있지만 그는 그녀를 혼자 놔두며 유흥을 즐기고 폴은 로제와의 일방적인 관계에 권태감을 느낀다. 어느 날 그녀는 업무 차 반 덴 베시 부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부인의 아들인 25살의 잘생긴 변호사 시몽을 처음 만나게 된다. 시몽은 폴에게 호감을 느끼며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하면서 폴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고백하고 그런 시몽의 태도에 폴은 불안감을 느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신선한 호기심을 느낀다.
사강의 대표작으로 그녀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출판사에게 반드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겉으로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는 작곡가였기에 먼저 정중하게 상대의 취향을 물어본 것이지만 시몽의 숨겨진 진짜 의도는 자신의 사랑을 폴이 받아줄 수 있을 것인지 간접적으로 질문하는 것이다. 브람스는 자신보다 14살 연상이었던 클라라 슈만을 평생동안 짝사랑 한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강은 인터뷰에서 제목이 물음표(= 시몽이 폴에게 건내는 질문)가 아니라 말줄임표(= 시몽의 질문에 고민하는 폴의 목소리)로 끝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했다. SBS의 2020년작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제목은 바로 이 작품 제목에서 따 왔다.
- 신기한 구름 (Les merveilleux nuages) (1961년) : 조제는 부유한 가정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20대 여성이다. 조제는 파리에서 화려하고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중 앨런이라는 부유한 미국인 남성과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지만, 얼마 못가서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미묘한 어긋남들이 그들을 끊임없이 어려움에 빠뜨린다. 표면적으로는 조제를 향한 앨런의 집착 어린 사랑이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부부가 플로리다의 키 웨스트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조제는 충동적으로 외도를 시도한 뒤 그 사실을 앨런에게 알린다. 마치 이혼을 바라는 것 처럼. 하지만 앨런은 조제를 놓아주지 않는다. 부부는 휴가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조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프랑스로 달아나버린다.
<한 달 후 일 년 후>에 등장한 주인공 조제가 다시 등장하는 소설. 작품 속에서 조제가 하는 행동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가끔은 무척이나 충동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녀는 인생에 대한 달콤한 환상이 조금도 없으며 매우 담담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삶을 바라본다. 작품의 제목 ‘신기한 구름’은 조제가 뉴욕에서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떠나올 때 비행기 창문을 통해 내다본 하늘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바라보는 여명과 다양한 색의 구름들이 삶의 기로에 선 조제의 심경과 앞날을 처연하게 시각화해서 보여준다.
- 패배의 신호 (La Chamade) (1965년) : 젊고 아름다운 서른 살의 루실은 그녀보다 연상인 부유하고 세련된 신사 샤를과 동거하며 샤를 덕분에 삶의 물질적 제약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린다. 어느 날 루실은 샤를과 함께 참석한 사교 모임에서 그녀와 동갑이며 누가 봐도 미남인 편집자 앙투안을 만난다. 앙투안 또한 그보다 10살 이상 연상인 사교계의 권력자이며 전설 같은 존재 디안과 동거하고 있었다. 30살의 늙은 어린애들인 루실과 앙투안은 연회장 한복판에서 둘만이 감염된 미친 듯한 웃음을 공유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과 쾌락에 빠져들고 이 두 사람에게 각각 깊은 열정을 간직한 보호자이자 어른들인 샤를과 디안의 고뇌와 고통이 시작된다.
막 30살이 된 프랑수아즈 사강이 『신기한 구름』(1961) 이후 4년 만에 출간했던 여섯 번째 소설이다.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 그 사이의 수많은 연애를 거치고 난 다음이었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이후였다. 사강의 앞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사랑과 이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 『패배의 신호』에서는 보다 깊어진 관능성을 보여 준다. 전작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사랑과 욕망의 장면들이 촘촘하게 표현됨과 동시에 인간이 타인에게 매혹되었을 때 발현되는 심리의 묘사가 작품을 가득 채운다.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사랑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문장만큼이나, 헤어짐의 풍경 또한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녀는 무서우리만치 냉정하게 인간의 고독과 나약함을 묘사한다.
1968년 카트린 드뇌브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영화의 의상 디자인을 이브 생 로랑이 맡아 화제가 되었다.
- 마음의 파수꾼 (Le garde du cœur) (1968년) :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45세의 도로시와 그녀의 연인인 영화사 대표 40세의 폴. 둘이 함께 탄 차에 어느 날 한 젊은 청년이 LSD에 취해 뛰어들게 되고, 이 청년이 도로시의 집에서 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교통사고의 대가로 도로시는 이 청년 루이스를 보살필 의무를 지지만 점점 의무를 넘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후 도로시가 평소에 싫어하던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죽기 시작하는데...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는 45세의 도로시와 그녀의 차에 치인 아름다운 청년 루이스의 기묘한 동거. 애인도 있고 성공도 이룬 40대 여성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흔드는 청년의 이야기가 여느 사강 소설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쪽으로만 흐르는 순수한 사랑의 방식,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사랑의 기대와 그로 인한 고통, 그 이율배반의 아이러니를 그렸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술, 마약, 자동차 사고, 나이 든 여자와 기둥서방 등 대중들이 그녀를 비난했던 요소들만 골라 스스로 즐기면서 15일만에 이 작품을 써냈다고 한다.
4. 여담
- 작가 데뷔 후 1998년까지 1년 6개월마다 주기적으로 새 저작물을 발표했던 성실한 작가였다. 작가로 데뷔한지 얼마 안됐던 시기에는 매일 규칙적으로 2000 단어 분량의 글을 쓴다고 밝히기도 했다.[9]
- 10대 시절부터 사망할 때 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엄청난 독서광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사강은 본인이 주최한 파티에서도 파티가 지겨워지면 혼자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읽었다고 한다.
- 그녀가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평소에 거짓말하는 것에 쾌감을 느껴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모르는 것은 쓸 수가 없다. 느끼지 못하는 것도 쓸 수가 없다. 체험하지 않은 일은 쓸 수가 없다"고 밝혔다.
- 생전 사강은 보통 밤 늦게 글을 쓰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글을 쓰다가 아침 8시 즈음에 잠자리에 들었고 점심 무렵에야 일어났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는 원고를 구술하기 시작했는데 새벽 4시에 비서를 깨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 사강은 자신이 막 탈고한 작품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읽으며 토론하고 수정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 원고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고.
4.1. 사생활
- 평생 두 번 결혼했는데 모두 이혼했다. 첫 남편은 20살 연상의 편집장이던 기 스콸레르였으며 1958년에 결혼했지만 2년만에 이혼했고[10] 2년 뒤인 1962년에 조각가 로버트 웨스토프의 아이를 가지게 되자 그와 두번째로 결혼했으나 로버트의 동성애 성향과 바람기 때문에 결혼한지 1년만에 이혼했다.
- 비록 정식으로 커밍아웃하지는 않았지만 사강의 주변 인물들이 회고한 바에 의하면 프랑수아즈 사강은 양성애자였다. 그녀는 부유한 사업가 피에르 베르제, 당대에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태생의 마시모 가르자, 여가수 쥘리에트 그레코 등 수 많은 연인 및 섹스 파트너들을 사귀었으며 여성 모델이자 스타일리스트 페기 로슈와 오랜 연인 관계였다.
- 10대 후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작가로서 성공한 사강은 유년 시절부터 좋아했던 대문호들 중 생존해있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서 교우관계를 맺었다. 특히, 사강은 장폴 사르트르가 사망하기 1년 전 부터 열흘마다 한번씩 그와 식사를 같이했다.
5. 어록
작품은 시작이 힘들다. 잘 안 될 때는 다시 잘 써지는 순간을 무조건 기다린다. 글을 매일 써야 한다면 구태여 작가같은 자유업을 택하기보다 차라리 사무실에서 매일 일하는 공무원이 나을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예 멋지죠" 또는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둘러대세요. 어차피 어떻게 대답하든 오답처럼 보일 테니까요.
결혼이란 아스파라거스에 비니그레트 소스냐 네덜란드식 소스냐를 곁들이느냐의 문제, 곧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두번째 남편이었던 웨스토프와의 이혼 후 인터뷰에서)
(두번째 남편이었던 웨스토프와의 이혼 후 인터뷰에서)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건 "열정"이에요. 그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의 수명은 딱 2년입니다. 장담해요. 좋아요 3년으로 하죠.
("사랑"을 믿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을 받고)
("사랑"을 믿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을 받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한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Je revendique encore le droit de me détruire comme je l'entends, si je l'entends.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된 후 출연한 TV쇼에서의 발언.)
Je revendique encore le droit de me détruire comme je l'entends, si je l'entends.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된 후 출연한 TV쇼에서의 발언.)
[1] Françoise Quoirez[2] 1885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사립 학교. 주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체계적이고 반복을 강조하는 자체 교육 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학교의 유명한 동문으로는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 프랑스 전 대통령 자크 시라크 등이 있다.[3] 이를 두고 사강의 어머니는 딸의 행동이 들개 같다고 탄식했다고 한다.[4] (프랑수아즈 사강의 삶 - 트리스탕 사뱅, 2008년 <렉스프레스>#)[5] 조르주 바타유, 마르셀 아를랑, 모리스 나도, 장 폴랑, 로제 카유야가 당시 비평가상의 심사위원으로 있었다.[6] 당시 엘리제 궁전의 문화 고문이던 아들러는 사강과 미테랑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사강과 미테랑은 몹시 가까웠습니다. 두 사람은 종종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돌아다녔지요. 어느 날은 그녀가 늦게 도착해 대통령을 비롯한 수행원들을 기다리게 했는데 미테랑 대통령은 그런 일을 매우 재미있어했습니다. 두 사람은 연인 관계와는 다른 의미에서 아주 친밀했어요. 미테랑 대통령은 사강의 책을 전부 읽었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삶 - 트리스탕 사뱅, 2008년 <렉스프레스>#)[7] 이 발언은 시간이 흘러 김영하의 소설의 제목이 된다.[8] 이 Elf 스캔들은 워낙 복잡한 사건인데다 당시 프랑스에서 화제였던지라 훗날 클로드 샤브롤이 이자벨 위페르를 기용해 코미디 오브 파워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다만 담당 검사가 주인공이라 사강은 언급되지도 않는다.[9] <어떤 미소>를 발표할 무렵의 인터뷰.[10] 사강은 그와의 이혼에 대해 "나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고 그는 아침 7시에 일어나 말을 타러 간다. 결정은 내려졌지만 난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