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3 22:58:09

클로드 샤브롤

클로드 샤브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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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를린 영화제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황금곰상
제8회
(1957년)
제9회
(1958년)
제10회
(1959년)
잉마르 베리만
(산딸기)
클로드 샤브롤
(사촌들)
세자르 페르난데스 아르다빈
(엘 라시리요 데 토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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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8D9FF><colcolor=#4B0082> 클로드 샤브롤
Claude Chabrol
파일:claude_chabrol.jpg
본명 클로드 앙리 장 샤브롤
Claude Henri Jean Chabrol
출생 1930년 6월 24일
프랑스 파리
사망 2010년 9월 12일 (향년 80세)
프랑스 파리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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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신체 168cm
배우자 아녜스 구테 (1956~1962)
스테판 오드랑 (1964~1980)
오로르 파키스 (1983~2010)

1. 개요2. 소개3. 주요 연출작4. 기타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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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chabrol.jpg
프랑스영화감독. 누벨바그 세대 감독으로 꼽히며 카예 뒤 시네마 평론가 감독 그룹 멤버 중 하나였다. 이후 60년대 후반부터는 프랑스 중산층의 불안을 포착한 스릴러 영화로 명성을 얻는다.

2. 소개

누벨바그 세대 중에서는 앨프리드 히치콕 광팬으로 유명했으며, 초기 두 편 이후 스릴러나 범죄, 미스테리 영화로 전환해 큰 성공을 거뒀다. 명프로듀서 앙드레 제노베와 작업하여 양성애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암사슴》의 성공을 시작으로 2차 전성기가 도래, 샤브롤은 앙리 조르주 클루조 이후로 프랑스 스릴러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 된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는 흥행 감독으로 입지가 있었던 편.[1] 상당한 다작가이기도 해서 생전엔 1-2년 꼴로 영화를 내놓는 감독이었다.

공공연연한 좌파인데다 루이스 부뉴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와 사회 풍자적인 블랙 유머 성향도 강하다. 부뉴엘 영화처럼 샤브롤 영화에서 부르주아는 조롱의 대상이며 좋은 꼴을 못 본다. (...) 중기에는 대놓고 초현실적인 블랙 코미디를 시도한 영화도 있을 정도. 반대로 이런 이미지와 달리 절절한 멜로드라마에도 소질을 보였다.

다만 정치적으로나 영화 언어적으로나 급진적이었던 장뤽 고다르나 프랑스 영화의 체질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프랑소와 트뤼포랑 달리 영화 어법적으로는 비교적 옛 미국/프랑스 영화 전통에 충실한지라 개성이 묻어가는 경향이 있다. 널리 알려진 일화로,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시사회가 끝나고 에릭 로메르에게 고다르가 미쳤나 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오죽했으면 평론가들 사이에서 샤브롤과 나머지 누벨바그 영화 감독들 간의 공통점은 앙드레 바쟁을 스승으로 모시며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 정도라고 말할 정도. 실제로 초기 대표작 몇 편을 제외하면 누벨바그 영화적인 느낌이 적고 오락성이 비교적 크다. 다작으로 인해 퀄리티 격차가 있었던 것도 한 몫한다.

누벨바그 영화 감독 중에서는 영화 산업의 생리를 잘 알았고 빨리 정착했던 인물. 자크 리베트처럼 조감독 경력이 있진 않았지만[2], 샤브롤은 영화가 돈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걸 알았고 흥행작을 만들려고 고심했다. 또한 친척의 돈을 빌린 뒤 제작사를 차려 누벨바그 동료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누벨바그 감독 중에서는 작가적 에고가 비교적 덜했던 인물.

프랑스의 히치콕이라 불렸지만 상당수의 히치콕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수동적인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샤브롤 영화의 여성들은 사건을 주도해 나가는 특징이 있다. 덕분에 샤브롤 영화에 출연한 여성 배우들은 유명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는 일이 많았다.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2010년 타계했다.

3. 주요 연출작

  • 1958년 미남 세르쥬
  • 1959년 사촌들 /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 1959년 이중 열쇠 /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마들렌느 로방송)
  • 1960년 착한 여자들
  • 1963년 푸른 수염[3]
  • 1968년 암사슴 /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스테판 오드랑)
  • 1969년 야수는 죽어야 한다
  • 1969년 부정한 여인[4]
  • 1969년 도살자
  • 1970년 파멸
  • 1971년 어두워지기 전에 /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스테판 오드랑)
  • 1973년 붉은 결혼식[5]
  • 1978년 비올레트 노지에르 /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이자벨 위페르)
  • 1984년 타인의 피
  • 1985년 닭초절임[6]
  • 1988년 여자 이야기 /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이자벨 위페르)
  • 1991년 마담 보바리
  • 1994년 지옥
  • 1995년 의식(영화) /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이자벨 위페르 & 상드린 보네르)
  • 1997년 사기
  • 2000년 초콜렛 고마워
  • 2004년 신부 들러리[7]

4. 기타

첫째 아들인 마티유 샤브롤은 영화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90년대 클로드 샤브롤 영화 작곡 전담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망 이후로는 은퇴한 상태. 오드랑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 토마스 샤브롤은 조단역 배우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페르소나로는 스테판느 오드랑[8]이자벨 위페르가 꼽힌다. 아예 전 부인과 이혼한 후 오드랑과 재혼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이혼한다), 위페르는 1978년 비오레트 노지에르로 만난 뒤, 오드랑을 대신해 후기-말기 페르소나로 자리잡기도 했다. 의식(영화)는 샤브롤과 위페르의 대표작으로 꼽힐 정도.

출생지는 파리였으나 성장은 누벨아키텐 시골 마을에서 했다고 한다. 본인도 파리지앵이었던 적은 없다고 밝힐 정도. 본인이 밝히길 사팔뜨기였으며 엄격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다. 친가는 약사 집안인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였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이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때문에 어머니 입김이 강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랑은 사이가 좋았지만 어머니하고는 데면데면했던 모양. 영화관을 운영하던 삼촌의 영향으로 영화광이 되었다고 한다. 출처

히치콕 감독의 영향을 받은 후대 감독이나 영화를 히치코키언(Hitchcockian)으로 부르듯이 샤브롤 감독의 영향을 받은 감독이나 영화는 샤브롤리언(Chabrolian)이라 부른다. 한국 영화 중에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9]》,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샤브롤 감독 느낌이 난다는 반응을 얻었다. 히치콕보다는 멜로드라마적이거나 부르주아 풍자적인 성격이 강한 부류의 영화들이 주류를 이룬다.

5. 참고 문헌



[1] 기복이 있었지만 100만-200만 영화가 여러개 있는 안타형 흥행 감독이었다. 돈 들일 일이 없는 영화를 만들다 보니 꾸준히 활동 가능했다.[2] 정작 리베트는 상업적으로 안 팔릴 영화를 찍었다는게 아이러니[3] 앙리 데지레 랑드뤼의 실화를 다룬다.[4] 미국에서 언페이스풀로 리메이크.[5] 봉준호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영화 중 하나로 거론하기도 했다.[6] 히치콕의 싸이코 속 뒤틀린 모자 관계를 변주한 작품.[7] 21세기 샤브롤 영화 중에 평이 제일 좋다. 브누와 마지멜 주연.[8] 재미있게도 스테판느 오드랑은 샤브롤이 존경하는 부뉘엘의 대표작인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출연한 바 있다[9]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을 보기 전 봐야할 영화로 《의식》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