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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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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ung Brahms (1853).jpg
젊은 시절의 브람스. (1853년, 20세)

파일:Johannes Brahms.jpg
말년의 브람스.
1833년 5월 7일 ~ 1897년 4월 3일

1. 생애2. 바그너와의 관계3. 주요 작품
3.1. 교향곡3.2. 관현악3.3. 협주곡3.4. 실내악3.5. 합창3.6. 가곡3.7. 피아노3.8. 오르간

1. 생애

1833년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출생한 작곡가로 19세기 후반기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음악가들 중 한 사람이다. 브람스의 아버지인 요한 야콥 브람스는 호른더블베이스 연주자였다. 브람스는 5살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면서 음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7살부터는 오토 프리드리히 빌트발트 코셀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어린 브람스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브람스의 부모는 브람스를 앞세워서 미합중국으로 건너가 천재 신동 음악가로서 돈을 벌려 했으나 코셀이 극렬히 반대하여 결국 성사되지 못한다. 코셀은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 에두아르트 마르크센에게 브람스를 보내 가르침을 받게 했고 브람스는 마르크센에게서 작곡법과 음악론을 배우면서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한다. 브람스는 11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나 젊은 시절에 작곡된 브람스의 여러 곡은 대부분 파기된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브람스는 학교를 결국 중퇴하고 집안 살림을 돕고자 연회장, 술집, 식당을 전전하면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때로는 개인으로서 피아노를 다른 사람에게 교습하기도 하는 동안 틈틈이, 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 음악을 편곡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브람스의 음악계에 후일 훌륭한 합창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853년, 브람스는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하노버에서 만나면서 생활이 전환된 후 요아힘과 연주 여행하면서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났고 요아힘은 편지를 써서 로베르트 슈만에게 브람스를 소개했다. 브람스와 슈만 부부는 뒤셀도르프에서 만났다. 로베르트 슈만은 젊은 브람스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 젊은 음악가를 세상에 소개하고자 (자신의 생애 마지막 평론이 된) 평론 「새로운 길」을 발표하여 브람스를 전 유럽에 알렸으나 이듬해인 1854년, 로베르트 슈만은 정신이 발작해 라인강에 투신한 일로 본 근교에 소재한 정신병원 엔데니히에 입원하게 된다. 브람스는 작곡에 몰두하면서 곤경에 처한 슈만 부부를 돕는 일에도 진력했다. 로베르트 슈만은 1856년에 결국 죽고 브람스는 과부가 된 클라라 슈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 여자와 로베르트 슈만 가족을 평생 돕는 일변으로는 1857년에서 1859년, 브람스는 공식 직위를 처음으로 얻어 데트몰트 궁정에서 피아니스트로서 근무하면서 작곡에도 몰두할 수 있었다.

그 후 1859년부터 1862년 가을까지 고향인 함부르크로 옮겨 합창단을 지휘하고 합창곡을 작곡하다가 1862년 9월 으로 이주해 1863년 징아카데미합창단의 지휘자로 초빙 된 브람스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뛰어난 작품을 작곡하였다. 1865년 2월부터 어머니의 사망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해 1868년에 대작 "독일레퀴엠"을 완성하고 같은 해 칸타타 "리날도"를 작곡한다. 1869년에는 로베르트 슈만의 셋째 딸 유리에를 향한 자신의 실연을 노래한 "알토랩소디"를, 1871년에는 프로이센의 對프랑스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관현악부 성악곡을 많이 만들었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 협회장으로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 연주회를 지휘하였다. 1876년, 20여 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제1번"이 초연된 후 브람스는 자신의 여러 대표작으로 남은 여러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게 된다. 1877년에는 "교향곡 제2번"이 완성되었다. 1878년에는 "바이올린 협주곡"과 "바이올린 소나타"를 발표했고 이듬해인 1879년에는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에 감사의 표시로 작곡한 곡이 바로 "대학 축전 서곡"이다. 1883년에는 "교향곡 제3번"이, 1885년에는 "교향곡 제4번"이 완성되었다. 1890년까지 브람스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비극적 서곡", "현악 5중주곡"을 작곡했다.

1890년에 이르러 브람스는 체력 한계와 창작력 쇠퇴로 결국 작곡을 접게 되었으나 이듬해인 1891년,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뮐펠트의 연주를 듣고 다시 창작력과 영감을 회복한 후 말년까지 클라리넷을 목적한 독주곡과 클라리넷이 중심이 되는 여러 실내악 곡을 작곡하게 된다. 1896년, 오랜 친구로 지내던 클라라 슈만이 병으로 쓰러지자 브람스는 사망을 대상으로 해 생각하면서 기독교 성서에 토대한 "4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했다.

결국 1896년 5월 20일, 클라라 슈만이 죽었고 브람스의 건강도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서도 오르간을 목적한 "11개의 코랄"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97년 4월 3일, 브람스는 간암이 매우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브람스의 음악은 흔히 고전주의로 불리면서 당대 낭만주의를 배격한 듯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다.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이듯이 낭만주의 음악을 알만큼 알았다. 브람스는 고전주의다운 형식 체계를 지키면서 낭만주의다운 정서를 결합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냈지만, 브람스는 당대 작곡가들처럼 화려하고 찬란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지는 않았다. 이것은 브람스가 북독일 출신으로 북독일 지역의 소박하고 강건한 스타일에 많이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그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브람스가 싫어한 것은 낭만주의의 지나치게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음식에 비유를 하자면 진한 독일맥주가 생각난다. 브람스의 음악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순수하고 소박하여 사람의 마음을 더 끌리게 한다. 브람스의 음악은 후에 드보르작[1]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브람스가 말년에 베토벤을 바로크-고전주의 거장들,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에 비교하며 깐건 그가 얼마나 일생동안 뼛속까지 고전주의자였는지 단적으로 알수있는 사례이다.
""난 베토벤의 C단조 협주곡 (3번째 피아노 협주곡)이 모차르트의 그것보다 훨씬 규모가 작고 위력이 약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 . .내가 생각하기에, 베토벤의 작품에서 드러난 그의 참신한 인격과 지향성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를 더 위대한 작곡가로 생각했지만, 이 사상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재고해봐야한다. 우린 새로운 것의 매력과 작품의 자연적 가치를 구분할 능력을 갖추어야한다. 난 베토벤의 협주곡이 더 현대적이라는건 인정하나, 그러나 (모차르트의 협주곡보다) 더 중요하진 않다! 또한 난 베토벤의 첫번째 교향곡이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미쳤다는걸 알고있다. 보통 참신한 지향성이 그런 효과를 불러온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마지막 3개의 교향곡이 훨씬 더 중요하다. . . . 그렇다. 라주모프스키 사중주, 후기 교향곡 모두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고 있지만 (이미 2번째 교향곡에서 암시했듯) 베토벤이 모차르트보다 매우 약한 분야는 (특히 제바스티안 바흐에 비교하여 약한 것은) '불협화음의 사용'이다. 불협화음,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진정한 불협화음'은 베토벤에게선 찾아볼수가 없다. 이도메네오를 보라. 작곡 당시 어리고 당돌했던 모차르트의 걸작이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였다. 참신한 불협화음! 그리고 화성! 베토벤에게선 걸작을 의뢰할수 없었다. 그는 의뢰로 보수적인 작품들, 평범한 작품들, 변주곡들 따위만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반면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의뢰로 작곡을 해도 걸작을 만들어냈다.[2] "" -요하네스 브람스

2. 바그너와의 관계

스승인 슈만과 함께 고전적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서, 당대 민족주의 음악의 대표격이었던 바그너와는 경쟁, 대립 관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외부 여러 요인과 개인에 국한된 몇 가지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서 된 측면을 무시하기 어렵다.

우선 바그너와 브람스는 음악계에서 동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20살의 나이차가 있었을 뿐 아니라, 바그너가 이미 30대 초반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때 전독일을 대표하는 거장 작곡가로 자기매김한 반면, 브람스는 비교적 대기만성형의 작곡가로 40대 이후에 작곡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다졌다. 이처럼 성공한 음악가로서 바그너와 브람스는 거의 3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있었다.

특히 바그너에 대한 브람스의 태도가 초기에 일관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정확한 사실관계를 밝히기 힘들다. 우선 이 둘의 싸움에 먼저 불을 지핀 것은 브람스였다. 20대의 무명 음악가 브람스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슈만의 음악신보에 바그너, 리스트가 주창하던 신음악을 비판하여 당시 음악계에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무명의 젊은 청년들의 호기에 가까운 도발에 바그너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건이 브람스 쪽에서는 항상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바그너 쪽에서는 서술된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볼때, 바그너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은 듯 하다. 이 사건으로 미루어볼 때 이미 20대 초반에 브람스는 바그너의 신음악에 대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가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미 독일 음악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다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 브람스는 바그너에 대해 공손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브람스의 음악적 소신이 바뀌었다기 보다 사회적 처신술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브람스는 바그너의 악극을 좋아하고 바그너의 악극 공연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브람스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말했고, 바그너에게 직접 스코어를 요청하기도 했다. 브람스의 이러한 행동은 진심에서 나왔을 수도 있고, 당시 음악계의 거장이었던 바그너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바그너 역시 속으로는 브람스를 높이 평가했다. 바그너는 브람스가 아직 무명 작곡가일때 우연히 브람스의 초기 실내악 작품을 듣고 단번에 브람스의 천재성을 알아차리고 나중에 큰 작곡가로 성장할 것을 직감했다.

한번은 브람스가 헨델의 작품을 지휘하는 연주회에 바그너가 우연히 참석했고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물론 작곡가로서 격찬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합창지휘자로 칭찬한 것에 불과했다. 그 극찬에 고무된 브람스는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없을 것"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후 두 사람의 사이 좋은 관계는 깨지고 만다. 브람스의 연주를 다시 감상할 기회가 있었던 바그너는 이번에는 "전통 안에 갇힌 인재"라면서 브람스를 평가절하했고 심지어 아내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람스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나 작곡할 위인"이라고까지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브람스를 대상으로 바그너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는 자세히는 모르나 후세 음악학자들은 바그너의 여성 편력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브람스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자필 서명이나 편지를 수집하는 취미도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높이 평가하던 바그너의 자필도 수집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바그너가 당시 유명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브람스의 수중에 우연히 들어간게 화근이 되어 버렸다. 브람스는 자신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던 당대 저명한 음악 평론가 한슬릭에게 이 러브레터를 보였고[3], 바그너를 공격할 거리를 찾던 한슬릭에게 좋은 무기를 쥐어준 꼴이 되었다. 한슬릭은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문제삼아 공세했고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빈 공연을 결국 포기해야 했다. 한슬릭이 자신을 어떻게 공격할 수 있었는지 사유를 알게 된 바그너는 격분해서 브람스를 마구 공격했다.[4]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헐뜯었고 심지어 브람스를 고자·내시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하며,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깡깡이쟁이로 쏘다닐 것"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브람스는 표면적으로 바그너의 독설에 맞대응하지 않았지만 바그너로 인해 매우 심기가 상했다. 브람스가 빈의 유흥가를 도시 전체에 소문이 퍼지도록 뻔질나게 드나든 것도 본인의 성욕 해소 차원을 넘어서 바그너가 고자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바그너의 브람스를 대상으로 한 독설은 후세에 독신주의자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사회를 연구하는 문화학자들의 좋은 연구거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바그너가 브람스의 명예박사학위 수여까지도 고깝게 볼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했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한슬릭의 탓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바그너의 진보성을 띤 음악을 고깝게 보던 한슬릭은 바그너를 대상으로 한 대항마로 브람스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언론과 평론가 그룹이 별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어서 싸움을 붙이는 현상이 이와 유사하다.

바그너와 브람스를 추종하는 사람들 간의 골은 깊어져서 이것은 후에도 계속 영향을 끼쳤다.[5] [6]

이렇다 보니 일반인들 내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는 '대스타 바그너의 공세에 쩔쩔매는 순수한 브람스'라는 식의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양측의 경쟁에서 브람스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거나 신사적이라는 인식이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바그너가 건재했던 시절의 이야기고, 나중에 바그너가 죽자 그 반대로 브람스파가 바그너파를 박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브람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했던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을 가혹하게 비판하여 그에게 많은 시련과 좌절을 안겼다. 또 브람스는 브루크너의 수제자였던 재능있는 젊은 작곡가 한스 로트가 베토벤상을 받는 것을 가로막고, 그의 교향곡 1번의 초연을 좌절시켰다. 고아로 여동생과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했던 불운한 청년 한스 로트는 이 충격으로 브람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소리치고 다니다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요절했다.

또한 브람스파는 젊은 구스타프 말러가 "탄식의 노래"로 베토벤상을 받는 것도 가로막았다. 말러는 베토벤상에서 떨어지면서 전업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고 지휘자를 생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말러는 평생에 걸쳐 브람스의 음악을 평가절하했다.[7] 그러나 말러는 자신의 선배였던 한스 로트가 브람스에 의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목격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브람스와 한슬릭의 무서움을 절감하고 있었다. 말러는 속으로는 브람스를 고깝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브람스를 비위를 잘 맞춰주며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함부르크 지휘자 시절 말러는 최만년의 브람스의 말동무가 되어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브람스의 얘기를 들어주는 말동무가 되었다. 비록 말러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브람스의 뒤담화를 깠지만... 여하튼 덕분에 브람스는 젊은 지휘자 말러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고 한슬릭 등에게 말러의 지휘를 자주 칭찬했다. 이렇게 브람스파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된 말러는 승승장구하여 1897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당시 빈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로 거론되던 인물들은 펠릭스 모틀, 헤르만 레비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바그너의 제자들이었다. 빈 음악계의 거물 한슬릭은 이들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당시 브람스파라고 생각하고 있던 소장파 지휘자 말러를 밀어 그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랬다고 브람스가 바그너의 음악적 영향력까지 인정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브람스의 음악적 동지이기도 했던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역시 한 때는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한 적이 있으며, 그것은 드보르자크의 대부분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었고, 그런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을 브람스가 밀어준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던 게 아마도 당시 음악계의 상황이 바그너라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권을 브람스조차도 벗어나기가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브람스가 눈감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3. 주요 작품

3.1. 교향곡

3.2. 관현악

브람스, 세레나데 A장조, Op.16브람스, 대학 축전 서곡
  • 세레나데 1번 D장조 Op.11
  • 세레나데 2번 A장조 Op.16[8]
  •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56a[9]
  • 대학 축전 서곡 Op.80[10]
  • 비극적 서곡 Op.81[11]

3.3.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77
  •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 A단조 Op.102
  •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 Op.15
  • 피아노 협주곡 2번 B플랫 장조 Op.83[12]

3.4. 실내악

브람스, 피아노 3중주 Op.101브람스, 클라리넷 3중주, Op.114
브람스는 실내악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고 해도 될 정도로 주옥같은 작품들로 가득하다.
  • 현악 6중주 1번 B플랫 장조 Op.18[13]
  • 현악 6중주 2번 G장조 Op.36
  • 현악 5중주 1번 F장조 Op.88
  • 현악 5중주 2번 G장조 Op.111
  • 피아노 5중주 F단조 Op.34
  • 클라리넷 5중주 B단조 Op.115
  • 현악 4중주 1번 C단조 Op.51-1
  • 현악 4중주 2번 A단조 Op.51-2
  • 현악 4중주 3번 B플랫 장조 Op.67
  • 피아노 4중주 1번 G단조 Op.25[14]
  • 피아노 4중주 2번 A장조 Op.26
  • 피아노 4중주 3번 C단조 Op.60
  • 호른 3중주 E플랫 장조 Op.40[15]
  • 클라리넷 3중주 A단조 Op.114
  • 피아노 3중주 1번 B장조 Op.8
  • 피아노 3중주 2번 C장조 Op.87
  • 피아노 3중주 3번 C단조 Op.101
  • 단악장 바이올린 소나타 "F-A-E" 스케르초 C단조 WoO2
  • 바이올린 소나타 1번 G장조 Op.78
  •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장조 Op.100
  • 바이올린 소나타 3번 D단조 Op.108
  • 클라리넷 소나타 1번 F단조 Op.120-1[16]
  • 클라리넷 소나타 2번 E플랫 장조 Op.120-2[17]
  • 첼로 소나타 1번 E단조 Op.38
  • 첼로 소나타 2번 F장조 Op.99

3.5. 합창

  • 아베 마리아 Op.12
  • 독일 레퀴엠 Op.45
  • 알토 랩소디 Op.53
  • 운명의 노래 Op.54

3.6. 가곡

브람스, Op.96 No.4브람스, Op.49 No.4
브람스, Op.106 No.1브람스, Op.52
  • 6개의 노래 Op.3
  • 6개의 노래 Op.6
  • 6개의 노래 Op.8
  • 5개의 시 Op.19
  • 3개의 듀엣 Op.20
  • 9개의 노래 Op.32
  • 티크의 <아름다운 마겔로네의 사랑이야기>중 15개의 로망스 Op.33[18]
  • 5개의 노래 Op.49[19]
  • 8개의 노래 Op.59[20]
  • 4개의 듀엣 Op.61
  • 7개의 노래 Op.62
  • 9개의 노래 Op.63
  • 5개의 듀엣 Op.66
  • 9개의 노래 Op.69
  • 4개의 노래 Op.70
  • 5개의 노래 Op.72
  • 4개의 발라드와 로망스 Op.75
  • 6개의 노래 Op.85
  • 6개의 노래 Op.86
  • 2개의 노래 Op.91
  • 5개의 노래 Op.94
  • 7개의 노래 Op.95
  • 4개의 노래 Op.96
  • 6개의 노래 Op.97
  • 4개의 엄숙한 노래 Op.121
그 외의 다수의 가곡 및 성악곡이 있다.

3.7. 피아노

브람스, Op.39 No.15브람스, Op.76 No.2
브람스, Op.118 No.2브람스, Op.118 No.6
  • 헝가리 무곡 WoO1[21]
  • 헝가리 무곡 제5번
  • 피아노 소나타 1번 C장조 Op.1
  • 피아노 소나타 2번 F샤프 단조 Op.2
  •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
  • 스케르초 Op.4
  • 4개의 발라드 Op.10
  •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9[22]
  • 자작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1-1
  • 헝가리 노래에 의한 변주곡 Op.21-2
  •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Op.24[23]
  •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35[24]
  • 16개의 왈츠 Op.39[25]
  • 8개의 소품 Op.76[26]
  • 2개의 랩소디 Op.79[27]
  • 7개의 환상곡 Op.116[28]
  • 3개의 인터메초 Op.117[29]
  • 6개의 소품 Op.118[30]
  • 4개의 소품 Op.119[31]

3.8. 오르간

  • 11개의 코랄 전주곡 Op.122


[1] 보헤미아의 브람스.[2] 출처: "말년에 베토벤을 바모하랑 비교하면서 깠던 브람스"[3] 별 생각이 없었던 듯하지만.[4] 바그너는 성격이 조금 다혈질이었다.[5] 바그너에게 마누라를 도둑맞은 한스 폰 뷜로가 브람스 진영으로 돌아선 것은 유명하다.[6] 심지어 국민악파도 브람스 진영과 바그너 진영으로 나뉘었는데, 드보르자크가 '보헤미아의 브람스'라고 불린 것, 스메타나를 브람스 진영에서 공격한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7]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텅빈 음악이라 혹평했다고 하지만, 말러가 뉴욕필에 재직하던 시절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3번을 각각 두 차례 지휘한 바 있기도 하다.[8] 두 개의 세레나데는 교향곡을 작곡하기 전의 작품이다.[9] 브람스가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을 먼저 썼으나 작품번호를 Op.56b로 하고 나중에 쓴 관현악 버전의 이 곡을 Op.56a로 했다. 하이든의 디베르티멘토 1번의 2악장 주제선율(부제: 성 안토니의 찬가 Chorale St. Antoni)을 먼저 주제로 제시하고 8개의 다채로운 변주곡이 이어지며 파사칼리아 형식의 대위법적 피날레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주제선율을 정말 하이든이 작곡했는지에 대해 일부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10] 악기편성이 브람스의 전체 관현악곡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그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타악기가 많이 사용되어 밝은 느낌을 준다. 현재지명은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인 당시 독일의 '브레슬라우'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게되어 감사의 표시로 작곡해 대학에 헌정했다. 그가 젊은 시절 들어 기억하는 4곡의 '학생의 노래' 선율들을 곡전반에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극적인 고양감에 이르게 한다.[11] 대학축전서곡과 같은 시기에 작곡되어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브레슬라우'에서 1881년(48세) 두 곡이 그의 지휘로 함께 초연되었다.[12] 두 피아노 협주곡 작품 번호, 곧 작곡 시기 간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2번 협주곡은 거의 피아노가 참여한 교향곡을 방불케 하며 피아니스트에게 음악적으로나 기교적으로나 무척이나 힘든 난관을 안겨주는 대곡이다.[13] 2악장의 쓸쓸하고 인상적인 멜로디가 매우 유명한데 게임 노바1492의 BGM이 이 곡 2악장의 리믹스이다.[14] 쇤베르크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버전이 있다.[15] 다악장의 악곡치고는 특이하게 느린 악장으로 시작한다.[16] 클라리넷 파트는 비올라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브람스가 직접 편곡했다.[17] 클라리넷 파트는 비올라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기도 하는데 브람스가 직접 편곡했다.[18] 낭만시대 독일작가 루트비히 티크(1773~1853)의 서정시에 곡을 붙였다.[19] 이 작품 중 4번째 곡이 그 유명한 브람스의 자장가다.[20] 3번째 곡 '비의 노래'가 바이올린 소나타 1번 3악장에 차용되었다.[21] 곡이 1번부터 21번까지로 장난 아니게 많기에 일일히 열거하지 않음을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다만, 특히 유명한 건 5번. 이중 1, 3, 10번은 브람스가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했고 드보르작도 17~21번을 편곡했다. 후에 이 집시음악 모음집에 대해 저작권문제가 생겼을 때 브람스는 '편곡'이라 표기했음을 주장해 이길 수 있었다.[22] 슈만이 1854년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기도하여 충격을 받은 클라라 슈만을 위로하기 위해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그녀에게 헌정했다. 곡전반에 슈만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클라라를 위한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며, 변주곡의 주제는 슈만의 "다채로운 작품(Bunte Blätter) Op.99"의 네번째곡이며 주제제시후 16개의 변주곡이 이어진다.[23] 브람스가 1861년 클라라 슈만의 42번째 생일에 그녀에게 헌정하여 그녀가 직접 초연했다. 일부에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과 더불어 3대 피아노 변주곡으로 부르기도 하며 브람스와 대척점에 있었던 바그너조차 이 곡을 듣고 진가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 곡의 주제는 헨델의 건반악기(하프시코드)를 위한 모음곡 HWV.434중 3번째 곡 Air이다.[24] 2권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첫 주제는 동일하나 1권과 2권의 변주곡들이 약간 차이가 있으며 같이 공유된 변주곡도 있다. 기교적인 면에서는 1권의 난이도가 더 높다.[25] 16곡중 No.15 A플랫장조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26] 1878년(45세) 작곡. 1~2번:Capriccio, 3~4번:Intermezzo, 5번:Capriccio, 6~7번:Intermezzo, 8번:Capriccio.[27] 1879년(46세) 작곡.[28] 1892년(59세) 작곡. 1번 :Capriccio, 2번:Intermezzo, 3번:Capriccio, 4~6번:Intermezzo, 7번:Capriccio.[29] 1892년(59세) 작곡.[30] 1893년(60세) 작곡. 1~2번:Intermezzo, 3번:Ballade, 4번:Intermezzo, 5번:Romance, 6번:Intermezzo (6곡 중 2번 A장조 Intermezzo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영화 색, 계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흐른다.)[31] 1893년(60세) 작곡. 1~3번:Intermezzo, 4번:Rhapso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