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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타케미츠 토오루 武満 徹 | Takemitsu Toru | |
출생 | 1930년 10월 8일 |
일본 제국 도쿄도 분쿄구 | |
사망 | 1996년 2월 20일 (향년 65세) |
일본 도쿄도 도라노몬병원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작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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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는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음악 자체로 이끄는 음악을 쓰기 시작했다. 음악 속에서 난 사람으로서의 '레종 데트르[1]'를 찾을 수 있었다. 전후에 내게 음악은 유일한 것이었고, 음악 속에 있겠다는 선택이 내 정체성을 확립해주었다.
<Creative Sources for the Music of Toru Takemitsu>, 오타케 노리코 저.
서양 클래식과 동양 악기를 결합하려 시도한 일본의 작곡가. 미학과 음악 이론 부문 작가로도 활약했다. 영어명은 'Toru Takemitsu'.<Creative Sources for the Music of Toru Takemitsu>, 오타케 노리코 저.
굉장히 독창적인 소리로 유명한데, 실제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위해 동서양 철학 요소를 결합시키고, 소리와 침묵, 전통과 혁신 등 반대되는 것들을 융합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더욱 대단한 것은 기악과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완벽한 기술을 가지기까지 대부분의 음악 인생에서 독학의 길을 걸었다는 점. 이밖에도 수백편의 독립적인 음악 작품, 90편 이상의 영화 음악, 20권의 저서를 만들었다.
2. 생애
2.1. 유년기 ~ 청년기
1930년 도쿄에서[2] 태어났지만, 한 달 후에 중국 랴오닝 성 요동 반도에 위치한 다롄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후 1938년에 모국으로 돌아와 초등학교(당시의 소학교, 국민학교)를 다녔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1944년 징병 대상이 되어 결국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훗날 당시의 군 복무를 회상하면서 "매우 혹독했다"고 표현하였다.[3] 그래도 이런 혹독한 군 생활 중에 들었던 "Parlez-moi d'amour[4]"라는 프랑스 곡이 서양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동료들과 비밀리에 듣는 것이었기에, 대나무로 만든 임시 바늘이 달린 축음기를 통해 곡을 들어야 했다고...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 통치 시절엔 미국 공군을 위해 일했다. 그러던 중 병으로 몸져 눕게 되는데, 병상에서 쉬는 동안 미 공군 네트워크 덕에 서양 음악을 더욱 더 많이 접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이렇듯 서양 음악을 경험하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는 일본 전통 음악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훗날 뉴욕 국제 예술 축제의 한 강의에서 당시 거리감을 느꼈던 이유가 "일본 전통 음악이 항상 전쟁의 쓰라린 기억들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음악적 훈련이 거의 전무이다시피 했고, 그가 들은 몇몇 서양 음악으로 생긴 영감이 그의 음악 공부의 전부였지만, 그는 무려 16살의 어린 나이에 작곡을 시작했다. 당시 사촌과 레코드로 베토벤이나 멘델스존의 클래식을 주고받았지만 이 같은 고전 음악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1948년 동인으로 활동했던 '신작곡파협회(新作曲派協会)' 제2회 작품 발표회에서 만난 기요세 야스지[5]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등 기존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후 기요세 야스지로부터 음악에 대해 짧게 사사한 적도 있었으나, 그의 음악 인생 전체를 보자면 사실상 독학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2.2. 초창기 실험공방 활동
1948년에 작고 밀집된 튜브 안에서 조절되는 악음(樂音)으로 소리를 운반하는 전자음악 이론의 개념을 고안했다. 1950년대에는 프랑스 작가 '피에르 셰페르'가 자신과 동일한 개념의 구체 음악을 고안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서로의 생각이 일치했음에 기뻐했다고 한다.1951년에는 실험공방(実験工房, 지켄 코보)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6] 같은 해엔 실험공방의 공연을 통해 일본 대중들에게 동시대 서양 작곡가들을 소개하였다. 이 시기에 <Uninterrupted Rest I(遮られない 休息 I)>[7]라는 작품을 지었고, 1955년까지 <Relief Statique(ルリエフ・スタティク)>와 같은 작품을 통해 전자 녹음 기술을 이용한 작곡을 선보였다. 이러한 기술적 특징은 1956년작 <Vocalism A·I(ヴォーカリズム A・I)>에도 잘 나타난다. 1950년대 초반에는 작곡가 하야사카 후미오와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8]
2.3.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다
1950년대 후반, 그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그가 하야사카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쓴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레퀴엠>(1957)을 1958년 일본에 방문 중이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9]가 듣게 되었는데, 후에 기자회견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진실되고 열정적인 솜씨이다."고 다케미쓰의 작품을 칭송하였다.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다케미쓰를 점심식사에 초대하였고, 다케미쓰는 후에 이를 '잊지 못할 경험'이라 회상하였다.[10] 스트라빈스키가 미국으로 귀환한 이후, 다케미쓰는 얼마 안 가 스트라빈스키와 에런 코플런드 등의 제안으로 쿠세비츠키 재단으로부터의 새로운 작품의 의뢰를 받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Dorian Horizon>(1966)을 작곡하게 되고, 이 곡은 코플런드가 지휘자로 있던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케미쓰는 전 세계 각지에서 작곡 의뢰를 맡기 시작했고, 이는 곧 그를 20세기 일본 작곡가들의 대표격으로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11]
2.4.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다
실험공방 활동을 하며, 다케미쓰는 존 케이지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접하게 된다.[12] 그의 곡은 다케미쓰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고, 31년이 지나 케이지의 부고 기사에 관해 다룰 적엔 당시 그의 작품을 듣고서 느낀 감정을 회상하곤 하였다.[13] 케이지의 영향으로 그는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한 진행을 이용하고 도형 악보 표기법을 사용하게 되었고, 대표적으로 <Ring>(1961), <피아니스트를 위한 코로나>(1962), <현악기를 위한 코로나 II>(1962) 등의 도형 악보에 잘 나타난다. 이 곡들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악보를 구성하고자 연주자들의 의도로 배치된 색깔 있는 원형 패턴들이 인쇄된 카드를 건네받게 된다.다케미쓰의 음악에서 케이지의 진행 방식이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고까진 말하지 못해도[15] 다케미쓰의 사상과 케이지의 철학은 확실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례로, 각각의 사운드 속 음색에 대한 케이지의 강조, 그리고 진공(vacuum)보다는 오히려 고압(plenum)에서의 고요함에 대한 케이지의 개념 등은 "마(ma, 間)[16]형과 무형의 동시적 인식이라는 공간적 자각을 나타낸다.]"에 관한 다케미쓰의 흥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와 더불어, 선종 사상에 대한 케이지의 흥미[17]는 전반적으로 동양에 대한 다케미쓰의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궁극적으로 그가 작곡에 있어서 일본 전통 음악 속에 녹아든 요소들을 구체화하는 가능성을 의식하게 하였다.
난 존 케이지에게 깊고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내 삶 속, 내 발전 속에서 긴 시간동안 '일본인'이 되는 것을 피하고 '일본적'인 특성을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의 전통이 갖는 가치를 인식하게 됐던 것은 존 케이지를 접하고 나서부터였다.
"Contemporary Music in Japan",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27, no. 2, (1989).
"Contemporary Music in Japan",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27, no. 2, (1989).
또, 그가 1988년 한 강의에서 밝히길, 이러던 와중에 당시 우연히 본 일본 전통 음악 공연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일본 전통 음악을 연구하는 데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됐다고 한다.
어느 날 난 분라쿠 인형극장에서 공연을 볼 기회를 얻었고, 그것에 매우 감탄하였다. 그 후타자오 삼현금[18]의 음색과 음질은 내가 일본 전통 음악의 장려함을 처음으로 인지한 계기였다. 난 매우 감동을 받았고, 왜 내가 여태 이 일본 음악에 주목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Contemporary Music in Japan",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27, no. 2, (1989).
"Contemporary Music in Japan",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27, no. 2, (1989).
그 후로 그는 모든 종류의 일본 전통 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특히 그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던 일본 음악의 감성을 자아내려고 근면히 노력함으로써 매우 다른 두 음악적 전통의 차이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허나 전쟁과 함께한 몇 년간 전통 음악은 매우 간과되고 무시당했기에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분야에 남아 예술을 지켜나가던 '장인'들은 오로지 한 명 내지 두 명뿐이었고, 대개 대중의 무관심 속에 지내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국의 예술 학교에선 심지어 전통 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피아노 공부만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다케미쓰는 그의 음악에 일본 전통 악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영화 할복(1962)의 음악 등에서 비파를 연주하곤 한다.1967년, 그는 무려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 게다가 이는 뉴욕필의 창립 125주년을 그가 쓴 <비와, 샤쿠하치[19][20], 오케스트라를 위한 'November Steps'>를 연주하며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967년, 오자와 세이지에 의해 <November Steps>의 첫 공연이 열렸다.
초기에 다케미쓰는 한 작품 안에 서로 다른 음악적 문화를 지닌 이러한 악기들을 조화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비와, 샤쿠하치를 위한 'Eclipse'>(1966)는 서로 함께 조화로이 소리나지도 않고 서양식 오선보 체계의 작품에 쓰이지도 않는 이러한 악기들을 위한 기보법을 찾아내려는 다케미쓰의 노력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허나 이런 어려운 작업에도 불구하고, 다케미쓰는 "시도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다. 어찌 됐든 그 결과들은 음악을 침체로부터 해방시켰고, 음악에 무언가 명백히 새롭고 다른 것들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그의 곡들은 올리비에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 LP의 4번째 사이드와 맞물려 서양에서 광범위하게 퍼져갔다.
1972년, 다케미쓰는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벳시 졸라스 등과 함께 발리에서 발리식 가믈란[21] 음악을 듣게 된다. 이 경험은 그의 작곡에 대체로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의 영향을 주었다. 다케미쓰와 함께 동반하였던 그 탐험대[22]들은 다케미쓰의 말마따나 다케미쓰 본인처럼 "그 음악을 듣기 전처럼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고, 전례가 없는 경험을 한 셈"이었다. 왜냐하면 그 음악이 그들과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그들의 논리와는 불일치한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 허나 다케미쓰는 당시 그의 민속 음악적 전통과 이미 꽤나 가까워진 터라, 일본 음악과 발리 음악의 관련성에 대해 쉽게 캐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믈란의 소리와 카파치[23]의 음색, 그 악기들을 형성하는 독특한 스케일과 리듬, 그리고 그러한 내 감수성의 많은 부분을 형성했던 일본의 전통 음악 사이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었다.
"Mirrors",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30, no. 1 (1992).
"Mirrors",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30, no. 1 (1992).
2.5. 사망
그는 방광암에 걸린 후 치료를 받던 도중 폐렴 합병증으로 인해 1996년 2월 20일 도쿄도 토라노몬병원에서 숨을 거뒀다.[1] raison d'être, 존재 이유[2] 현재의 도쿄도 분쿄구[3] "Contemporary Music in Japan",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27, no. 2, (1989).[4] 장 르누아르(Jean Lenoir)가 쓰고 루시엔느 브와이에(Lucienne Boyer)가 부른 노래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어 후에 영어로도 번안된다. 2002년엔 소피 마르소가 감독, 각본을 맡은 동명의 프랑스 영화도 발표되었다. 해석하자면 '나에게 사랑을 말해주오'.[5] 작곡가. 일본의 5음 음계와 민요적 요소들을 구체화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6] 일본의 예술적 전통과 학계적 주류를 벗어나고자 한 아방가르드 예술 그룹으로, 혼합 매체 상의 종합적인 콜라보레이션을 위해 설립되었다. 실제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다고 평가 받는 전위 예술가들의 모임이었으니 이들이 후대에 미친 파급 또한 대단하다.[7] 1952년작으로, 규칙적인 리듬이나 세로줄이 없는 피아노곡.[8] 참고로 하야사카 후미오는 이후로도 다케미쓰와도 몇 십년 간 협업한 미조구치 켄지와 쿠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9] 당시 NHK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최신 일본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이때 다케미쓰의 곡이 잘못 포함되고 만다. 허나 스트라빈스키는 그 곡을 끝까지 듣겠다고 하여 다 듣게 된다.[10] "Afterword", Perspectives of New Music, vol. 27 no. 2, (1989).[11] "Takemitsu, Toru",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of Music, Ed. Michael Kennedy, (Oxford, 1996).[12] 참고로 케이지의 곡을 일본 대중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작곡가 이치야나기 토시로, 미국 유학 당시 케이지와 함께 공부했으며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적에 케이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일본 최초로 공연하였다.[13] Burt, Takemitsu's Works, "The Music of Toru Takemitsu", 92pg.[14]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아는 오선보가 아니라 원형 패턴으로 이루어진 임의적인 악보 표기가 적힌 카드로 연주한다는 것. 여기서 작품들의 표제가 왜 '반지(Ring)'이고 '코로나'인지를 알 수 있다.[15] 대표적으로 소프라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인 <산호섬(Coral Island)>(1962)의 경우, 다케미쓰가 새로이 흥미를 얻게 된 안톤 베베른의 음악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기에 케이지 특유의 불확실한 진행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16] 일본어로 '두 부분 사이의 틈'을 말하며, 시각의 극대화에서 오는[17] 선종 학자 스즈키 다이세쓰 데이타로를 접한 이래로 케이지는 선종 사상에 눈을 들인다.[18] 분라쿠에서 쓰이는 목이 넓은 삼현금.[19] 한자어로는 척팔(尺八)이며, 대나무로 만든 플루트 같은 악기.[20] 속어로서 펠라티오를 말하기도 한다.[21] 인도네시아의 전통 음악으로, 여러 재질의 타악기를 사용한 기악 합주이다. 주로 연극이나 춤의 반주에 쓰임.[22] 주로 프랑스 음악가들.[23] 원문에 'kapachi'로 되어 있으나, 불가리아어로 '모자'란 의미를 가질 뿐 그 뜻이 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