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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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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2위3위4위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7위8위9위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17위18위19위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22위23위24위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72위73위74위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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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44><colcolor=#fff>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
파일:RichardWagner.jpg
본명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출생 1813년 5월 22일

[[작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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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왕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라이프치히
사망 1883년 2월 13일 (향년 69세)

[[이탈리아 왕국|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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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베네치아
국적
[[독일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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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장례일 1883년 2월 18일
직업 작곡가, 지휘자, 극작가, 이론가, 수필가
서명 파일:리하르트 바그너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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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44><colcolor=#fff> 묘소 독일 바이로이트 반프리트
학력 라이프치히 대학교 (음악학)
신체 166cm
주 경력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초대 총감독
작센 왕국 궁정악장
작센 왕국 궁정 오페라극장 지휘자
쾨니히스베르크극장 지휘자
베토만 오페라단 지휘자
뷔르츠부르크 시립오페라극장 합창지휘자
부모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 바그너 (1770~1813)
어머니 요한나 로시네 바그너 (1778~1848)
배우자 민나 플래너 (1836년 ~ 1866년, 사별)
코지마 바그너 (1870년 결혼)
자녀 이졸데 바이들러
지크프리트 바그너
에바 폰 뷜로
종교 불명[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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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44><colcolor=#fff> 한국어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일본어 ヴィルヘルム・リチャード・ワグナー
중국어 威廉·理查德·瓦格纳
라틴어 Wilhelmus Ricardus Wagner
러시아어 Вильгельм Рихард Вагнер
아랍어 فيلهلم ريتشارد فاغنر
힌디어 विलहॅल्म रिशार्द वाग्नर
조지아어 ვილჰელმ რიჩარდ ვაგნერი
불가리아어 Вилхелм Ричард Вагнер
페르시아어 ویلهلم ریچارد واگنر
아르메니아어 Վիլհելմ Ռիչարդ Վագներ
히브리어 וילהלם ריכרד וגנר
그리스어 Βίλχελμ Ρίχαρντ Βάγκνερ }}}}}}}}}

1. 개요2. 생애3. 바그너 그 이후4. 작곡 특징5. 종합예술이론6. 문학가로서의 바그너7. 영향력8. 작품들9. 저서10.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11. 바그너의 아내
11.1. 민나 플래너11.2. 코지마 바그너
12. 바이로이트
12.1. 극장12.2. 바이로이트 페스티벌12.3. 바이로이트 캐논
13. 팬덤14. 반유대주의 논란15. 여담
15.1. 자녀와 후손들15.2. 종교관15.3. 아리안주의
16. 창작물에서17.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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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페라 로엔그린 중 혼례의 합창
"이전과 이후 어느 작곡가도 바그너만큼 자신의 예술과정으로 그렇게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기획자, 철학자, 시인, 지휘자, 그리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자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물인 바그너는 그가 천재라는 것을 알았다."
― 그라모폰[2]
독일작곡가. 서양음악사에서 영향력 있는 위대한 음악가들 중 한 명이자[3]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4]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영향력은 현대 음악 뿐만 아닌 미술, 철학, 문학, 정치, 시각 예술과 극장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특유의 정교하고 화려하며 스케일이 큰 음악으로 많은 지지자들이 있으며, 또한 그의 숱한 논란들로 인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반대자들도 있다. 한마디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 활발하게 논쟁이 벌어지는, 명실상부한 클래식 음악계의 화두이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리하르트 바그너/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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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그너 그 이후

바그너는 어떻게 컴백했는가 / 2014년 BBC 기사[5]

1883년 사망 당시 바그너는 유럽 전체에서 유명했고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작곡가였다. 바그너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간에 누구나 바그너에 대해서 뭔가 한마디씩 할 말이 있었고, 또 그에 대한 반론도 펼쳤다. 바그너는 유럽의 거의 모든 교양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바그너는 독일적인 것의 결정체요 민족 문화의 구심이었다. 이들보다 더 극단적인 이들은 바그너야말로 유대인, 미국물질주의, 프랑스의 퇴폐주의, 가톨릭의 독재에 대항하는 게르만족 민족 정신의 방파제라고 주장했다. 다만, 바그너가 이러한 극우파들만의 소유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틀렸다. 바그너의 음악은 좌익에서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들은 바그너가 한때 혁명에 가담했고 그의 음악에는 혁명정신이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진보적인 프랑스의 바그너 애호가들의 다수가 이런 관점에서 바그너를 보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미국에서도 바그너의 인기가 독일 이민사회에서 시작되어 급속도로 넓고 깊게 확산된다. 미국인들은 당시 유럽인들에 비해 오페라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바그너의 음악이 주는 새로움 때문에 사회 여러 계층에서 수많은 팬을 만든다. 특히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열렬한 바그네리안이 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기가 상승했는데 교육을 받은 중산층 좌파들에게 어필했다.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이 바그너에게 적대적이었다면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그의 음악을 찬양했다. 많은 작곡가들의 바그너의 음악을 ‘미래의 음악’이라고 생각했고 ‘새로운 사운드’를 이어가려고 조바심냈다. 이런 숭배 분위기 속에서 바그너의 추종자들은 리처드 바그너가 제시한 철학적인 이상, 다른 미적인 생각들, 그리고 그의 음악을 애착하고 바그너의 음악을 따르는 것이 마치 성스러운 전투에라도 나가는 것인 마냥 생각했다. 이런 현상을 바그너주의(Wagnerimus)라고 한다. 19세기 말 바그너 사후부터 이 현상은 절정에 이른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옛 시대의 무거운 스타일에서 벗어나려고 했고, 의상이나 실내장식도 가볍게 바뀌었다. 이전 시대부터 바그너에 반대한 사람 중에 하나인 프리드리히 니체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며 ‘빛과 공기’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활기 넘치는 카르멘이야말로 미래의 음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그너의 인기는 여전히 대단했다. 무겁고 길고 강렬한 바그너의 작품들을 보통 사람들도 참을성 있게 즐기며 자신들은 바그네리안(Wagnerian)이라고 했다. 작곡가들은 바그너를 연구했고 교훈을 얻어 표현했다. 대표적인 예로 말러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같은 작곡가들이 등장했고 스트라빈스키는 평생동안 ‘바그너와 다른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세대도 나타난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그의 제자 알반 베르크무조음악12음계를 만들었다. 음악학자들은 이것이 모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파르지팔’에 그 기원이 있다고 설명한다.

1906년에는 코지마가 아들 지그프리트에게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운영을 맡기고 은퇴한다. 지그프리트는 1930년 어머니 코지마가 사망한 몇 달 후에 사망했는데 그때까지 성공적으로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1914년부터 1924년까지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페스티벌을 열지 못한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바이마르 시대의 불안한 상황에서 바이로이트는 다시 열릴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다. 그때 지그프리트의 아내 비니프레트는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고 친해진다. 두 사람은 아주 가까워지고 히틀러는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받았다. 히틀러가 가장 좋아한 작곡가가 바그너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청년 시절부터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숭모하는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독일 국가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영웅적인 신화와 결합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비니프레트는 남편이 죽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운영을 맡았다. 비니프레트는 히틀러의 지원을 원했고 히틀러는 1933년 수상이 된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비니프레트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히틀러의 나치당의 관계는 복잡했다. 비니프레트와 히틀러의 개인적인 친분 덕분에 바이로이트는 당시 다른 극장을 직접 통제하던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이로이트에는 나치 깃발이 걸리지 않았고 공연 전에 나치당가를 부르지도 않았다. 유대인이나 나치가 정한 불온 인물들도 얼마동안은 연주를 하도록 내버려뒀다. 그러나 바이로이트가 제3제국에 영합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망명길에 오르면서 바이로이트를 ‘히틀러의 궁정 극장’이라고 부르면서 비판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세계관에 자신이 숭배하던 바그너를 이용했고 또 문화 전쟁에서도 이용한다. 히틀러는 “누구든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을 이해하려면 먼저 바그너를 이해해야 한다!”, “독일은 바그너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같은 말을 하며 바그너를 찬양했다.

이런 이유로 바그너는 독일 국외에서 나치즘과 관련된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6] 그러나 전후 나치 독일을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7], 아르놀트 쇤베르크, 쿠르트 바일, 테오도어 아도르노 같은 지식인들이 바그너에 대한 찬반토론을 미국에 전했으며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퍼러, 라우리츠 멜키오르, 롯테 레만같은 음악가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부흥시키며 새롭게 세상에 전한다. 현재에도 바그너는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에게 좋은 떡밥이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대표적인 책으로는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쓰고 슬라보예 지젝[8]이 의견을 더한 바그너는 위험한가이다.

전쟁 후 비니프레트는 연합군의 조사를 받는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게 당연했지만 유대인 예술가와 동성애자 예술가들이 처형되지 않도록 도와준 증거가 나오며 연합군은 비니프레트를 그냥 풀어주며 은퇴하여 조용히 살 것을 권한다. 그 이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운영권은 두 아들 빌란트 바그너와 볼프강 바그너에게 넘어갔고 1951년부터 새로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시작된다. 전후 바이로이트에서 빌란트 바그너가 한 일은 팬들과 극장 예술가들에게 전설이 된다. 빌란트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복권시키려고 제3제국이 바그너에게 씌운 사상과 냄새를 없애기위해 작품들을 완전히 분해하고 하나씩 검토하여 재구성한다. 미니멀리즘의 무대가 나타났고 조명과 분위기를 통하여 민족주의 색채를 걸러냈고 범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드라마를 만든다. 1966년에 빌란트가 폐암으로 사망하자 동생인 볼프강 바그너가 운영을 맡았다. 볼프강은 외부 연출가를 불러 바이로이트를 새롭게 만들고 전후 ‘바그너 페스티벌’을 부활시켜 신바이로이트 시대를 개척한 인물이란 평을 받는다.

2008년 볼프강이 은퇴하고 후계자로 바그너의 직계 증손녀 카타리나 바그너를 지목한다. 이것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가문 중 포스트 볼프강 세대로서 바이로이트 총감독직 계승권을 가진 후손은 모두 12명이었다. 그중에서도 볼프강이 쉰이 넘어 낳은 카타리나는 서열상 제일 끝에 서 있었다. 그런 카타리나가 분쟁의 씨앗이 된 이유는 바이로이트의 공식 계승자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사망한 형 빌란트의 자식들은 물론 전처 엘렌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딸마저도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시킨 볼프강은 2002년, 두 번째 아내 구트룬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에게 바이로이트를 물려주겠노라고 공식 천명했다. 후계자로 거론되던 다른 후손들의 반발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예술감독까지 역임했던 볼프강의 장녀 에바와 뮌헨에서 드라마트루기로 활동중인 빌란트의 딸 니케의 반격은 꽤 위력적이었다. 자신의 입지를 다진 언니와 사촌에 비해 어린 카타리나의 배경은 반면 상대적으로 왜소했다. 1978년 태어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한 카타리나는 아버지 볼프강과 하리 쿠퍼 옆에서 조연출로 활동하며 도제교육을 받았다. 2002년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에는 이제 막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작을 선보이기 직전의, 스물네 살짜리 소녀에 불과했다. 12명의 차세대 바그너 중에서도 가장 곱게 자란,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은 멀리서 보고 듣기에 그저 ‘부모 잘 만난 덕에 만사가 잘 풀린 케이스’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바이로이트 축제 재단이사회는 2008년 바그너의 손자인 볼프강 바그너 전 총감독의 배다른 두 딸인 카타리나와 에바 바그너파스크비어를 공동 총감독으로 지명했다.

이로써 총감독 자리를 둘러싸고 7년을 끌어 온 바그너 가문의 내분이 일단락됐다. 형식은 공동이지만 사실상 볼프강 전 총감독이 원했던 젊은 카타리나가 자리를 계승하는 것으로 독일 언론은 보고 있다. 카타리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자신이 연출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시내 공공장소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생중계함으로써 입장권을 얻기 위해 보통 8~10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바이로이트 축제의 배타성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에는 공동 총감독이었던 에바가 물러나고 카타리나 단독으로 총감독이 된다.

바그너는 여전히 그의 논란들 덕분에 계속해서 토론이 끊이지 않고 있는 클래식 음악가이며 그에 대한 찬반 토론은 계속해서 펼쳐질 것이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많은 인기와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 축제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더불어 유럽 양대 음악 페스티벌로 꼽히고 있다. 반유대주의나 여성 편력 등 부정적인 면모도 있다.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은 바그너 악극 공연을 비난한 신문사 사장에게 "그럼 당신 신문사에 걸려있는 홀바인(독일의 화가)의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럼 나도 바그너 악극을 연주 안하리다."라고 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과연 음악은 음악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봐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란중인 문제이다. 어찌됐든 그의 음악이 전 세계 문화에 엄청난 영향력과 파급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4. 작곡 특징

그의 악극의 특징은 우선 지도동기, 혹은 유도동기 등으로 번역되는 라이트모티프를 사용한 표제음악에 있다. 라이트모티프는 극의 중요한 주제로서 극 안에서 계속 변형되어 제시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극의 전개를 암시하고 극 안의 통일성을 공고히 하는 효과가 있다. 이 라이트모티프의 사용은 바그너의 후계자들에게도 이어졌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인 자코모 푸치니도 라이트모티프를 자신의 방식대로 소화해 사용할 정도였다.

또한 스스로 무한선율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이전의 오페라가 아리아레치타티보에서 선율이 중단된 것과는 달리 선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방식을 구사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바그너의 악극이 기존의 오페라나 당대의 이탈리아 오페라들과는 다른 방식이다. 무한선율에서는 가사를 듣기 쉽게 하기 위해 레치타티보 풍으로 부르게 하기도 한다.

또한 바그너의 악극은 극단적인 반음계적 화성으로 당대에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에서는 전통적인 조성체계가 흔들리는 이른바 "트리스탄 화음"이 등장한다. 상당히 자유롭게 조가 바뀌는데 결국 이것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의해 무조음악을 여는 시초가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9]

그리고, 고전시대 이후로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금관악기의 반음계 처리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는데[10],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금관악기를 주 선율 역할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의 이러한 관현악법의 영향을 받은 말러, 브루크너 등이 이어지면서 금관악기 활용법에 있어서 가히 대격변을 일으켰다.

그의 오페라 작품은, 색감에서 화려하고 분위기에서 극적이다.[11] 음향은 청각을 압도하고 악곡은 듣는 이를 사로잡는다. 다시 말해 풍성한 현악기의 음색에 실린 목관악기의 음조가 유려하며 도취적인 선율과 맞물리는 금관악기의 화음이 장중하다. 그러니까 반음계의 사용에 따른 선율의 반복, 한 악절 안에 여러 차례 조성이 바뀌는 모호한 화성 체계, 그리고 무엇보다 화성이 자유로우니 관현악의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음악이 대체로 어렵게 느껴지고 시끄럽게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바그너는 멜로디의 개념을 바꾼 작곡가였다. 그는 주제를 변형시켜 펼쳐가는 방법 대신 주제를 쌓아가면서 악구를 늘려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걸 지탱한 것은 두 개 이상의 선율을 포개어 진행하는 대위법인데, 그는 그것으로 여러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기법으로 응용하기도 했고 음악 자체를 극화하는 기법으로 변용하기도 했다. 또 하나는 반음계를 폭 넓게 사용한 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악구가 끝났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에 곡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든다. 이른바 무한 선율이 가능한 이유이다. 또한 그는 등장인물, 배경, 사물, 상황 등을 나타내는 모티브 선율(주제동기)을 사용하여 악극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장치로 삼았다. 그것은 귀에 솔깃하도록 꾸며진 탓에 장대하고 복잡한 악극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복잡한 악곡구조를 단일하게 구성하는 종합능력에도 뛰어나며, 관현악을 한데 아우르는 통합(Unison) 능력에도 뛰어났다. 그의 음악에서 장중하고 임장감을 받는 외에 색채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이다. 그 점에서 그는 스펙터클한 규모가 특징인 대작주의 예술가이다. 그는 보다 많은 음계를 재료로 해서 악곡을 구성한 작곡가였다. 그래서 내용에서 풍부하고 구성에서 다채롭다. 그런 만큼 그의 음악은 온갖 분위기가 녹아있으며 여러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사색에 빠지게도 한다. 그는 여러 악기가 맞물려서 내는 소리의 어울림을 한껏 밀고 나갔다. 때로는 화성과 조성이 어긋나는 것에도 개의하지 않음으로써 조성을 무시한 음악에 암시를 주었다. 그를 가리켜 현대음악의 선구자로 부르는 데는 여기에 연유한다. 한편 그는 문학을 음악 이상으로 중시하였다. 그의 작품은 가사가 매우 중요한 극음악이면서도 관현악의 비중이 성악과 대등한 악극인 탓이다. 따라서 양식 면에서 이전의 오페라와 다르다.


유도동기(주도동기,지시동기,라이트모티브)는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주제악상을 가리킨다. 유도동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그너가 오케스트라에 부여한 임무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바그너에 의할 때, 그의 음악극에서 성악은 사물의 외면을, 오케스트라는 그 본질을 표현한다. 오케스트라의 이러한 역할은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의 역할과 동일하며, 또한 쇼펜하우어가 말한 ‘음악은 의지 자체의 모사’라는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칼의 동기’, ‘지그프리트의 동기’라는 식으로 사물,사건,인물들에 부여된 악상세포인 동기들은그들 서로간의 자유로운 변형과 조합을 통하여 드라마의 내적 본질을 표현하며 이는 바그너가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드라마를 이해하는데 있어 ‘정서적․심리적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된다. 예를들어, 테너와 소프라노인 두 남녀 성악가가 열정적인 사랑의 언어를 노래할 때(사물의 외면) 오케스트라(내적 본질)가 ‘사랑의 저주 동기’를 연주한다면 이는 둘간의 사랑이 ‘저주받은 사랑’이란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니벨룽의 반지>의 경우, 무려 100여개가 넘는 동기들이 나오는데 이들 동기들은 음조, 오케스트라 편성, 하모니, 리듬의 변화를 바탕으로 무한히 변형․발전하면서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상호교감한다.

유도동기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의해 확립되었다.[12] 예를 들면, 그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에서는 ‘칼의 동기’ ‘운명의 동기’ 등이 장면의 변화에 따라서 갖가지 변형으로 나타난다. 라이트모티프라는 말은 바그너의 친구 H.볼초겐이 그의 논문 <‘신들의 황혼’에서의 동기>(1887)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여 유명해진 용어인데, 바그너의 후계자들에게 그 기법과 함께 계승되었다. 이 바그너의 작곡 기법은 모든 헐리우드 영화 음악의 근간이 되었고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 맥스 슈타이너, 버나드 허먼, 알프레드 뉴먼 같은 초창기의 저명한 작곡가들이 바그너의 음악극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영화 음악의 스타일에 대한 표본을 제시했고 존 윌리엄스, 한스 짐머, 하워드 쇼어같은 작곡가들이 표본을 제시한 것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바그너의 이러한 유도동기는 시에 있어서는 모더니즘과 소설에 있어서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의 토대가 되었다.
<바그너 악극의 논리적 구조>
성악 = 개인적인 소리, 자아의 표출, 드라마의 외면
오케스트라 = 세계의 소리, 본질성, 드라마의 내면
=> 양자대등, 폴리포니적 구성

  • 무한선율
무한선율은 그의 총체예술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로 기존 오페라들의 폐해, 즉 번호 오페라(Number Opera)에서처럼 극과 음악이 분리된 번호들로 나뉘어져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을 막기위한 선율적 장치이다.
고전주의 음악의 구문법은 춤 음악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 투명한 전개를 특징으로 하나, 그 구문법의 단위는 아주 단순하고 짧다. 따라서 이러한 전래의 구문법에 따를 경우, 짧은 시간에 의미를 완결짓는 음악과 비교적 긴 시간을 요구하는 연극적 의미와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음악은 연극과 결합하려 하기보다는 시와 결합하려 했다. 시의 전개는 음악만큼이나 압축적인 까닭이다. 따라서 오페라의 아리아는 연극대본처럼 꾸며지지 않고 서정시처럼 꾸며진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러한 기존의 방식을 연극이 음악의 시종이 되는 방식이라 하여 따르지 않고 음악이 연극의 속도를 맞추어가는 방식을 주장하였다. 이제 음악은 연극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바로 속시원하게 종지가 나타나 음악의 구문법이 정리되지 않고 휴지와 종지를 회피하여 감정의 고조에 따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선율법이 그것이다. 이를 무한선율이라 한다.
‘무한선율’ 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본질적인 조건은 음악작품 전체를 통해서 각각의 순간은 다른 순간의 의미와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선율은 바그너의 말처럼 '완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흘러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의 음악적 사건들과 형태들은 무의미하게 메워져서 아무런 내적 관계도 없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서는 안되며 서로가 관계를 갖고 서로 상대의 것으로부터 유기적으로 발전되어 나와야 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이러한 무한선율 기법을 통해 드라마의 내적 행위가 급작스러운 위기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펼쳐진다고 주장한다.

음악사가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 첫부분의 주음과 주화음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모호함 때문에, 이를 기존의 온음계 화성체계를 거부하는 최초의 시도 - 그리하여 현대음악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바그너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조성을 깨고 극단적인 반음계주의를 지향함으로써 수백년동안 지속되어 온 기능화성으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바그너의 이러한 화성의 혁신은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에 의해 현대로 계승되었다.


* 두운 (Stabreim)

바그너는 근대적 일상언어로는 신화적 세계를 그려내지 못한다고 보아 특별한 예술언어를 찾아내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두운(Stabreim)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에 따르면, 두운은 심오한 표현들로 가득찬 새롭고, 간결하고, 힘찬 예술언어를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바그너에 의하면, 당대의 일상언어는 이해를 목적으로 오로지 오성에만 제시될 수 있도록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 관습으로 인해 생겨난 결실이므로 더 이상 감정을 상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강화된 행동의 순간들은 그 습관적인 표현방식들을 넘어서도록 균형있게 고양된 언어에 의해서만 적합하게 구체화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두운에 의해 조정된 운문이다.
그의 저서 <오페라와 드라마>에서 바그너는 시와 음악의 역사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을 통해 두운법칙을 합리화하려 시도하였다. 바그너가 고대 독일의 시형식을 적용한 것은 단순히 분위기적인 이유 때문에 드라마의 주제에 맞추어 시의 발성을 적응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드라마의 주제를 신화에서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두운법칙을 통하여 가사 속에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바그너는 태고의 것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추구하였으며, 역사적 요인들이 시와 음악을 서로 분리되기 이전에 존재하였던 음악과 시의 원초적인 통합을 추구하였다.
바그너 오페라의 가창양식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는 말하기와 노래부르기의 중간 형태인 ‘아리오소’ 양식을 언급한다. 이것은 이태리의 ‘번호 오페라(Number Opera)' 속에서 볼 수 있듯이 레치타티브와 아리아가 확연히 구별되는 양식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 이유는 바그너가 음악극을 창출하는데 있어 두가지의 기본문제들을 ① 말하기(speech)와 노래의 통일, ② 드라마와 음악의 통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기와 노래를 통합하는데 있어서 바그너는 한편으로는 운율없이 있는 그대로의 산문과 다른 한편으로는 운율이 있는 시 사이의 중간 영역을 추구하였다. 그는 해결책으로 <니벨룽의 반지>(이 시는 음악이 작곡되기 이전에 이미 씌여졌다)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듯 고대 북유럽의 시의 기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고대 북유럽의 시에서는 두운(Stabreim)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공통되는 자음들의 첫글자 소리로 운을 이룸으로써 논리 정연함은 물론 의미상의 대조와 반테제를 허용할 수 있다. 예컨대 “Die Liebe bringt Lust und Leid"(사랑은 기쁨과 고통을 가져왔다)라는 문장에서 기쁨(Lust)과 고통(Leid)이라는 두 가지 대비적 의미의 단어들은 테제와 반테제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대조나 반테제는 음악, 특히 화성적 전조를 통하여 강조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가사와 음악에서 주어진 유사성을 통하여 말하기는 음성적 언어(tone language)로 강화될 수 있으며, 이 음성적 언어는 극적 연기, 독백, 대화 등을 위한 주요 매체가 되었다.
두운의 예
<라인의 황금> 1장
Nur wer der Minne
Macht versagt,
nur wer der Liebe
Lust verjagt,
nur der er-zielt sich den Zauber
zum Reif zu zwingen das Gold.

  • 바그너 오케스트레이션
바그너는 이전의 작곡가들과는 달리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의 오케스트라를 창안하려 했다. 자신이 원하는 악기가 세상에 없는 것이라면 새로이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식이었다. 특히 그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에서 바그너는 기존의 관현악 규모를 완전히 뛰어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예) <발퀴레> 관현악 편성(4관 편성)

현악기 : 현 5부
제1․2 바이올린 각 16, 비올라 12, 첼로 12, 더블베이스 8
목관 : 플루트 3, 피콜로 1
오보 3, 잉글리쉬 호른 1
클라리넷 3, 베이스 클라리넷 1
바순 3, 콘트라바순 1

금관 : 호른 8
트럼펫 3, 베이스 트럼펫 1
테너-베이스 트럼본 3, 더블베이스 트럼본 1
테너 튜바 2, 베이스 튜바 2, 콘트라베이스 튜바(일명 ‘바그너 튜바’) 1

타악기 : 팀파니 4
트라이앵글, 테너 드럼, 글로켄슈필, 심벌즈
(그리고 하프 6)
바그너의 오페라 및 악극의 악기편성은 극단적인 파격이 나타나진 않지만, 관악기의 수가 크게 보강되면서 양적인 면에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큰 팽창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현악기가 주된 역할을 해오던 방식으로부터 탈피하여 관악기의 역할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니벨룽의 반지>에는 무려 8대의 호른이 등장하며 바그너 튜바 및 콘트라베이스 튜바 등 금관악기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바그너의 오케스트레이션은 베를리오즈의 경우처럼 디비지(Divisi : 입체적이고 풍부한 음향효과를 거두기 위해 하나의 파트를 다시 여러 파트로 분할하여 각기 다른 음을 연주하도록 지정하는 관현악법의 하나) 기법을 통해 복잡하고 분산된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이중, 삼중으로 확장된 각 파트의 덩어리진 소리로부터 풍요로운 음색과 넓은 범위에 걸친 다이내믹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영국의 음악학자 토비는 바그너 음악에 나타난 각 파트의 음색을 가리켜 개별적인 각각의 성부가 아니라 두터운 ‘띠’(band)와 같은 소리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바그너는 베를리오즈의 경우에서처럼 성부들을 잘게 분산시켜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음향을 얻어내기보다는 하나의 성부를 두텁게 만들어서 보다 폭넓은 다이내믹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바그너는 한 성부를 여러 갈래로 분산시키는 대신 여러 성부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여 서로 조화되는 대위법적인 텍스처를 즐겨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오케스트라를 더욱더 현란한 색채로 물들이고 있다.

5. 종합예술이론

Gesamtkunstwerk / Total work of art

낭만주의 미학이론의 최정점이자, 가장 강력한 성과물인 바그너의 이른바 ‘종합예술작품’ 이론은 그 자신의 예술작품 뿐 아니라, 뒤따르는 세대들의 창작활동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상화된 극장예술의 관습을 거부하고 비극적 에너지의 시원을 탐구하여 모든 예술이 통합된 강력한 드라마를 창조해냈다.


바그너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의 위대함은 비극에 존재하는데, 고대 그리스 비극은 하나의 종교적 체험으로서 ‘지고의 예술형식’이었다. 그에게 이 예술은 진지한 공동체적 표현으로서 하나의 통일된 예술작품을 형성하며 공동체의 모든 본성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세계 지배 말기 가톨릭의 지배 하의 시대상황은 자조적이고 존재를 혐오하며 공동체를 증오하도록 가르쳤다. 그리하여 예술은 공동체적 삶의 진정한 표현일 수 없었으며, 그것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란 오로지 기독교정신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그너는 기독교가 유럽의 예술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고, 그것을 유럽의 예술적 가치들이 쇠퇴한 원인이라고 분석하기에 이른다.
바그너는 그리스인들이 ‘극히 훌륭한 인간적 삶의 결과인 자발적인 예술의 모든 풍부한 요소들에다 언어라는 끈을 연결시켜서, 그것들을 모두 한데 모아 지고의 예술형태인 드라마를 탄생시켰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바그너는 비극들에 예시되어 있는 바와 같은 드라마의 필요조건들을 그리스인들로부터 물려받아서 현대의 상황에 의거하여 재창조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은 드라마가 인간의 삶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성장해 나와야만 한다는 자신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비극은 예술작품화된 종교의식이었다. 그리스 종교의 핵심은 바로 인간, 실제있는 그대로의 본능적인 인간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의 핵심을 털어놓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었다.예술은 종교의 마지막 은폐적 의상을 벗기고 종교의 핵심인 실제의 육체적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청중의 정신에 의해 고무된 한에서만이 번성하였으며, 청중이라는 인간적 형제애가 깨졌을 때 인간의 예술작품 또한 소멸하였던 것이다. 바그너가 의미한 이러한 보편적 의미에서의 인간은 ‘청중’이라는 공동의 집단적 요구를 느끼는 모든 이들을 통칭한다.
바그너가 그리스인으로부터 물려받아 재창조할 드라마의 필수조건으로 들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주제가 공동의 경험의 일부라는 의미에서 일반 대중에 의해 ‘리얼하다’고 인식되어야 한다.
② 그 경험은 시인에 의해 농축되어야 하며 모든 지엽적인 문제들은 삭제되어야 한다.
③ 그것은 지성에 의해 찾아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청중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직관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며 바그너가 찾아낸 것이 바로 신화였다. 이것은 민족과 종족을 초월하고 있으므로 과거를 이해하는데 보다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집중적이고 시적인 형태로 인간생활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여러가지 철학적 문제를 구현하고 있다고 바그너는 생각했다. 이와 같이 바그너는 신화가 인간의 삶의 표현이며 역사는 신화에서 나타날 수 있는데 역사는 보편적 인간을 나타낸다고 보아, 신화가 인간의 모든 내부 동기들을 표현하기 때문에 보편화될 수 있다고 보고 여기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 예술적 도덕성

바그너 미학의 핵심은 엄격한 '예술적 도덕성'에 있다. 이것은 19세기 중반의 극장예술에 대한 바그너의 비판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에 의할 때 16세기 말, 그리스 비극의 재구성이라는 이상을 내걸고 이탈리아에서 탄생된 오페라는 이후 가수와 무분별한 청중을 위한 극장음악으로 타락해버렸다.
<예술가와 대중 Der Künstler und die Öffentlichkeit, 1841>, <대중과 대중성, 1878> 등의 글에서 바그너는 당시 대중들을 조롱에 가까운 어조로 힐난한다.
‘왕자가 푸짐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은행가가 고된 재정경영을 끝낸 후, 그리고 노동자가 수고로운 하루를 마친 후, 극장으로 가서 휴식과 기분전환과 즐거움을 찾을 때, 과연 예술가가 무엇으로 그들을 접대할 것이냐는 태도는 일응 정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예술이 아닌 어떤 다른 것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예의바른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극장이 공중예술의 주요 형식으로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는 강력한 매개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그너에 있어서 마이어베어에서 절정을 이루었던 대중을 겨냥한 화려한 파리의 그랜드 오페라는 밤의 여흥을 조달하는 단순한 오락에 불과했다. 극장이란 그 시대 민중의 정신을 반영하는 문화의 극치로서, 타락한 일반대중의 취미에 영합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 무대공연정신이 보다 고상한 예술이해에 의한 지시에 통제되도록 함으로써 대중의 취미를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바그너가 보기에는 당시의 극장예술, 특히 오페라는 쾌락만을 고무시킴으로써 대중을 타락시키고, 고상한 것을 통속화하며, 마침내는 전 대중을 아주 무질서한 속물들로 타락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예술은 상품적 가치로 전락되었으며 예술가는 그러한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자기자신과 대중을 기만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오페라들은 각각 순수음악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음악 외적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작품들 중에서는 목적과 수단이 완전히 일치하는 예술은 창조될 수가 없었다. 이런 작품에서는 전체적인 구성을 무시한 채 가수들의 특별한 기교만을 내보이려 한다는 데에 또한 바그너의 비난이 가해진다. 가수들은 자기 주변의 노래와 연기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전체적 구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비르투오소적인 연주에 탐닉함으로써, 또한 청중은 그것에만 주목함으로써 불필요한 종속물의 수준으로 타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학적 관점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바그너의 지극히 현대적인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바그너는 청중들은 '예술작품의 종'들이며, 따라서 청중이 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종교적 회중(Kultgemeinde)'이 되기를 호소한다. 종교적으로서의 예술개념은 헤겔에서 바그너로 오는 동안 그 의미가 변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종교가 예술에서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바그너에 있어서 예술은 종교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었다.

  • 결론

서양의 예술사에서 낭만주의라는 시기에 있어서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은 형식과 구조라는 전통적 원리와 균형을 이루며 그로부터 새로운 예술적 실체를 창조해냈다. 그러한 예술적 원동력이 기존 예술 원리에 대한 반동적인 힘들이었다는 사실은 낭만주의의 근본적인 배경이다.

예술,정치,사회,종교에 대한 낡은 이념들의 붕괴는 인간을 그 자신의 수단에 의지하게 하였고 그럼으로써 인간은 더욱 창조적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새로운 예술적 충동을 낳게 하였다. 바그너라는 낭만주의 최고의 예술가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기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음악적,문학적,연극적 기술에 숙련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예술 통일의 예를 확립하였다. 바그너가 추구한 것은 총체예술작품으로서의 '음악극'이었다. 이러한 그의 예술관은 쇼펜하우어의 미학, 셰익스피어의 비극, 베토벤의 음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바그너는 예술을 인간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것(ⓐ)과, 자연적 요소로부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구분했다.

(ⓐ) 무용(동작), 음악, 시 ․․․ 인간은 주체이자 동인(動因)
(ⓑ) 건축, 조각, 회화 ․․․ 자연에 대한 예술적 묘사

바그너는 이러한 예술들이 개별적으로는 빈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드라마에서의 이상적 예술적 모델이 시간이 지나면서 소실된 이래, 각각의 예술은 개별적으로 이기적인 발전을 해 왔으나 이 예술들의 역사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예술 개개의 국면들에 대한 하나의 연속적인 묘사로서, 자신들의 결핍을 메꾸기 위한 여러 속임수들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있었던 종합의 시도를 실패라고 보았는데, 그 실패의 원인을 제 예술 상호간이 서로 빼앗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 '이기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바그너는 베토벤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위의 (ⓐ)의 세 예술(무용,음악,시)들이 결합한 미래의 예술작품을 위한 최초의 가능성있는 도구들로 여겼다. 베토벤은 음악에 언어를 첨가함으로써(그의 제 9 교향곡) 음악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였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음악으로는 그 이상의 단계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보다 높은 단계의 예술작품은 보편적인 드라마로서, 바그너는 베토벤이 이 예술의 부활을 위한 열쇠를 만들어주었다고 보았다. 또한 바그너는 셰익스피어에게서 시와 드라마(앞문장의 ‘드라마’와는 그 의미가 다름에 주의)의 완성된 형태를 발견하였다고 생각했다. 이제 바그너에게는 이들 두 절반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일이 미래의 예술작품에 남겨진,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과업이었다.
① 기존모델 : 오페라 = 대본(드라마,극) + 음악
* 이 경우 극(대본)은 철저히 음악에 봉사
② 종합예술작품 : 보편적인 드라마 = 대본 + 음악 + [ 건축․조각․회화 + 무용 등 제예술 ]
* 보편적인 드라마(이상화된 드라마)는 모든 예술이 종합되어 최고도로 강렬한 정서표현을 산출하는 새롭고도 궁극적인 예술형식

6. 문학가로서의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는 작곡가와 이론가로서의 중요성을 넘어서 동시에 극작가, 무대감독, 서정시인, 소설가, 수필가와 가극 대본작가이기도 하다. 토마스 만은 그의 <니벨룽의 반지> 강연(1937년)에서 “바그너의 시인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나에게 언제나 모순되게 생각되었다.”고 토로했다.
“지그프리트에 대한 보탄의 관계, 그의 파괴자에 대한 신의 그 아버지다운 조소적이며 냉연한 애정, 영원한 젊은이를 위해 낡은 권력의 보좌에서 사랑으로 퇴위하는 것보다 시적으로 더 아름답고 더 심오한 것이 있을까? 여기에서 음악가가 발견하는 그 경이에 찬 소리를 그는 시인에게 힘입고 있다.”
토마스 만

바그너에 있어서 음악과 문학은 서로 긴밀한 관계 속에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그너의 경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을 ‘그것이 중요한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깊이 받아들이도록 온세상을 설득시키기 위해 문학을 필요로 했다. 그는 평생토록 그 ‘이념’의 주석자였다.”

바그너는 낭만적인 태고의 언어, 즉 오성에 의해 아직 굴절되지 않은 감각적인 감정언어에 의존하여 두운법을 부활시켰다. 언어와의 결합은 문학에서 그것이 가지는 미적 자율성, 독자적인 표현의 가치를 빼앗았지만 <요정 Die Feen>(1833)에서 <파르지팔 Parsifal>(1877~1882)까지의 바그너의 가극들은 그때마다 뛰어난 정신사적 증언으로서 간주된다.
바그너는 문학, 음악, 극예술과 조형미술의 복합적인, 모든 감각들을 포함시키는 규합으로서의, 고대에 이미 발현되어 있었던 총체예술품을 그의 음악극 속에 이루어 놓았다.이것은 한민족의 공동체 체험으로서의 국민종교의 봉헌극 사상과 결합되어 일치의 효과를 목표로 한다. 이점에 있어서 바그너는 낭만적 사고의 최후의 정점이며 성취자이다. 중세의 소재들, 민중문학, 민족신화에 대한 그의 선호가 그 사실을 입증하듯 음악 및 문학 창작 활동에 있어서 바그너는 낭만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또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사상,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염세주의와 동시대의 심리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바그너는 신과 신앙을 잃어버린 자연 과학의 시대를 예술 속에서 극복하고자 애썼다. 유도동기(Leitmotiv)를 사용하여 거장다운 기술을 발휘한 그의 음악극들은 감각적 향락을 즐겨하는 세속에의 헌신과 신비-염세적인 구원에의 동경의 대비로 구성되어 있다.

언급된 바처럼, 음악가인 동시에 시인인 바그너의 작품은 따라서 가극 애호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문학애호가들에게도 각별히 중요하다. 바그너는 음악에서 뿐아니라 그의 가극들의 대본작가로서도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였다. 그의 가극 대본들은 그저 대본서들이 아닌 그 이상의 것으로서, 뛰어난 비극작가가 그 속에서 다양한 문학적 전통들을 수용하여 극을 만들어내고, 극중 인물들을 통해 항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가극 계획안들로 간주된다.
괴테 시대가 끝난 이후로는 독일의 극작가나 소설가중 거의 어느 누구도 세계문학 속으로의 입구를 발견치 못했던 반면, 작곡가이며 시인이기도 한 바그너는 20세기를 넘어설 때까지의 다른 어떤 독일작가들의 것과도 그 강도에 있어서 비교될 수 없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특히 19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 속에 그가 행사한 역할은 중세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중요성, 독일의 18세기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중요성에 비교되었다. 그의 작품이 독일의 19세기가 세계문학에 가져 온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여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음악가이며 시인인 바그너는 그러나 순수한 의미의 시인, 또 순수한 의미의 음악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범해야 한다는 것이요. 나에게 있어서는 시인과 음악가와의 연합에 엑센트가 주어져야 하오. 음악가만으로서는 나는 별 의미를 갖기 못할 것이요.” 단순히 음악가만으로서는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기악곡의 대가들에 비해 하위에 선다는 생각을 자주 품고 있던 바그너는 음악과 문학의 결합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이 그를 결코 능가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 연합은 ‘가극대본(Libretto)의 음악화(Vertonung)’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극문학 속에서의 ‘음악의 지배’를 또는 더 이상 음악 독자적으로가 아니라 시적 암호들, 상징들로서 이해될 수 있는 유도동기들을 언어와 유사하게 의미론화시킴으로써 음악을 ‘문학화’하는 것을 뜻한다. 바그너에 따르면, 모든 필수적인 표현요소들을 정신에 완전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하모니의 함께 울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하모니를 함께 울리게”하는 것은 음악가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서, “표현되어있지 않은, 그러나 시행들 속에 이미 내재해 있는 하모니를 가진” 시인의 멜로디는 그 드러나지 않은 하모니를 가장 잘 인식할 수 있게 표현해줄 음악가의 도움을 거쳐서 그것의 완전한 표현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시인의 멜로디의 다만 암시된 의도”를 음악가가 그 멜로디에 하모니를 덧붙이면서 비로소 “실현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음악’극이 “인간성향의 완전한 표현형태”라고 보았다.

또 그는 실제로 이런 식의 음악적․시적 표현수단들의 결합을 통해 독보적인 보다 고차원의 문학을 만들어냈다. 세계무대는 신화적 상상력에 덕입어 연극사에 있어서 시적으로 가장 위대한 것들에 속하는 인물들, 상황들과 정세들을 갖게 되었다.

7. 영향력

바그너의 영향력에 관해서 토론하는 보스턴 대학교 교수들
"바그너는 모든 예술을 처음으로 하나의 위대한 미적 종합으로 합한 고로 위대한 유일의 예술의 창시자다."
프리드리히 니체

바그너는 세계의 예술과 문화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했다.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오페라나 음악 분야에서 그친게 아니다. 바그너는 현대 사상과 문화에 아주 커다란 충격과 변화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음악과 예술은 물론이고 철학, 역사, 정치, 심리학을 연구하는 인물들도 바그너에 대해 평하기 바빴다. 덕분에 근대사를 연구하거나 현대 예술과 사상에 관심이 많으면 바그너라는 단어를 만나게 된다. 가디언지는 바그너를 “위대한 작곡가들 중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함께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다”라고 평했다. 바그너의 영향력이 그 만큼 무궁무진하다는 뜻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예술 분야에 혁신을 일으킨 음악가이다. 그는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사회 경제 분야에 혁신을 일으킨 카를 마르크스, 생물학 분야에 혁신을 일으킨 찰스 다윈과 더불어 19세기 유럽의 충격과 논쟁을 불러온 인물이다. 한편 그는 세계 문화사에서 누구보다 이채로운 인물로 괴물 같은 천재(Monstrous genius)이며, 신비로운 인물(Mysterious persona)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따라서 그를 제외하고 서양 음악을 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실제로 바그너는 서양 음악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가 창조한 악극은 설화에서 소재를 빌린 탓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새로운 기법으로 가득한 관현악은 음악의 표현력을 무한대로 넓혔다. 또 그는 생전에 자기 작품만을 상연하기 위한 전용극장(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가진 유일한 음악가이면서 후손(Wagner clan)들에 의해 자신의 유지가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 인물이다.

바그너는 한 손에는 작곡술을, 다른 손에 극작술을 쥐고 독창적인 악극의 세계를 누빈 종합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시, 단편소설, 수필 등 장르를 넘나드는 문필가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평론과 논문으로 써낸 사상가였고, 작곡가이면서 지휘자, 오페라 연출가였다. 그처럼 문학과 음악을 아우른 이에 베를리오즈슈만이 있었다. 또 여러 장르에 걸치는 음악을 다작한 외에 초인적인 피아노 연주로 당대를 풍미한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하지만 전자는 바그너에 비해 능력 범위가 넓지 않았고, 후자는 작곡가로서 대다수 곡들이 피아노곡에 편중된 한계로 바그너를 넘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평자들은 바그너를 가리켜 ‘백만금의 인물(Man of Million)’, ‘천년의 인간(Man of Millenium)’ 또는 ‘희대의 슈퍼스타’, ‘바이로이트의 마법사’ 등으로 불렀다. 바그너는 당대의 유럽 음악계를 평정하였으며 그 파급력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의 언동은 위세가 있었고 그의 인기는 독보적일 만큼 대단했다. 또 그가 브람스의 아성인 비엔나에 머물 때면 환영하는 시민들의 열기로 바그너의 반대편에 선 자들의 입지를 좁혔다.

당시 바그너와 비견되는 작곡가는 주세페 베르디가 유일했다. 많은 작곡가들이 바그너에 대적하거나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모두 그의 영역 안에 들었을 뿐이다. 그 보기로 영국과 동구권 작곡가들의 오페라는 바그너의 것에 비교할 수 없으며,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범하지만 후계자의 지위에 머물렀다. 그 점에서 바그너는 현대 오페라에 길을 튼 음악가이다. 아울러 거의 모든 유럽의 작곡가들이 그의 창작 스타일을 추종한 데서 바그너는 현대 음악의 선구자이다.

바그너는 마르틴 루터, 프리드리히 니체와 더불어 가장 독일적인 인물로 불린다. 모두 자기 확신에 강하고 열정과 카리스마에 넘첬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바그너는 비망록에 “나는 모든 독일인 중에서 가장 독일인이다”고 적었다. 바그너는 이처럼 유별난 개성을 지닌 면에서 큰 관심의 대상이 되며, 음악에서 이룬 성취 면에서 깊은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는 세계 문화사에 그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인물로도 서열을 다툰다. 예로부터 인물을 대상으로 글을 쓰려면 두 가지 난관에 부딪친다고 한다. 하나는 자료의 많고 적음에 따른 것으로 자료는 많을수록 좋다. 그런데 바그너는 그 문헌이 무척 방대하여 되레 갈피를 잡기 힘든 편이다. 참고로 바그너는 예수나폴레옹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바그너에 관한 서책과 문헌이 그를 능가하는 인물이 없다.[13] 바그너는 1883년 사망 당시 그에 관한 서책과 논문이 만 편에 달했다고 하며, 1932년 바그너 관련 문헌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883년 이후 그 세 배에 이르는 수가 축적되었다고 한다.[14] 바그너의 자료는 음악, 문학, 역사, 철학, 정치 등 여러 방면에 걸쳐있다. 게다가 1차 자료도 풍부하다. 즉 그 자신이 저술한 자서전, 에세이, 오페라 대본, 서신들, 자신과 아내 코지마가 쓴 방대한 양의 일기와 비망록이 그것인데. 난해한 오페라 내용에 더해 모순된 주장과 좋지 않았던 인격으로 논란을 불러온 사실 등이 그에 관한 연구를 한층 기름지게 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자신의 저서와 음악, 인물에 관련된 연구, 자신의 작품 공연 등으로 가히 ‘바그너 산업’이라 불러도 좋을 엄청난 자산을 낳는 인물이다. 대체로 인물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데 난관의 하나는 그에 대한 객관성 확보이다. 특히 바그너는 자신의 주장과 행적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은 데다, 같은 정도로 찬사와 비난을 받은 인물인 탓에 객관성을 지켜내기가 힘들다. 이 같은 사실은 바그너에 대해 글을 쓰려는 욕구를 돋우는 한편 역으로 그에 대해 쓰기를 주저하는 큰 요인일 것이다. 그것도 그의 전기를 쓰려면 극히 난감할 터인데, 그 방면에서는 영국의 음악학자 어네스트 뉴먼의 저서로 1947년에 완간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생애(The Life of Richard Wagner, 도합 네 권으로 총 2700쪽에 달함)』가 결정판이다. 그럼에도 바그너 전기는 지금도 출간되고 있다. 사실, 사계의 방면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은 후대에 끼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시대와 관점을 달리하여 평가하거나 해석할 여지가 많다. 이는 그들의 전기와 작품론이 후대인에 의해 거듭 새롭게 쓰이는 근거가 된다. 특히 그 대상이 바그너라면 더욱 그러할진대, 그와 관련한 서책과 논문이 줄을 잇는 연유이다.

바그너의 작품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새로운 음악적 스타일을 개척했다. 바그너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바그너의 노선에 동조하고 그의 스타일에 침전되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항이다. 물론 어떤 작곡가들은 의도적으로 바그너의 스타일에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몇몇 음악 역사학자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현대 클래식 음악의 시작이라고 보기도 한다.
안톤 브루크너, 휴고 볼프는 바그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곡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자르 프랑크, 앙리 뒤파르크, 에르네스트 쇼송, 쥘르 마스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한스 피츠너 등도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다. 이렇듯 수많은 작곡가들이 직접, 간접으로 바그너의 영향을 받자 구스타프 말러는 '이 세상에는 베토벤과 바그너만 있을 뿐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드뷔시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의한 20세기 하모니의 혁명은 그 원류를 찾는다면 '트리스탄'에서 찾을수 있다. 이탈리아의 사실주의 오페라 형태인 베리스모도 바그너적인 음악형태를 재건해 보자는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쇤베르크는 “바그너는 우리에게 ‘풍부한 화성’, ‘짧은 동기’, ‘대규모의 구조를 만드는 기술과 더 나아가서는 이 기술을 발전시키는 방법’, 이 세 가지를 남기었다.”라고 평했다. 바그너는 지휘의 원칙과 실천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에세이 "지휘에 관한 것"은 지휘를 발전시킨 헥터 베를리오스의 기술은 지휘가 단순히 음악 작품을 오케스트레이션하지 않고 다시 해석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의 지휘에서 이러한 접근방법을 예시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해석적 접근법을 통해 바그너가 새로운 세대의 지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바그너의 '음악 드라마', 즉 '악극'에 대한 이론은 다른 예술의 장르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기도 했다. 시도 동기(Leitmotif) 같은 바그너의 작곡 기법은 거의 모든 헐리우드 영화 음악의 근간이 되었다. 예를 들면 '스타 워즈'(Star Wars)에 사용된 존 윌리엄스음악은 바그너의 악극 스타일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한스 짐머 역시 바그너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인터뷰했다. 영화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며 영화 킹콩,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음악을 작곡한 맥스 스타이너는 본인이 영화음악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가 아이디어를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만약 바그너가 이 세기에 살았다면 아마도 최고의 영화음악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듀서인 필 스펙터(Phil Spector)의 '소리의 벽'(wall of sound) 역시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락 음악의 장르에 속한 헤비 메탈 음악은 바그너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수 있다. 독일의 메탈 밴드 람슈타인의 음악도 바그너의 음악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 그런 이유에서 요아힘 비트의 가장 유명한 앨범의 이름은 '바이로이트'이다. 영화 '니벨룽의 반지'는 역사적인 사항을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바그너의 오페라를 더 많이 참고한 것이다. 이 영화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 각각 다른 제목으로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는데 미국에서는 '어둠의 왕국: 용의 왕'(Dark Kingdom: The Dragon King)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미국의 헤비메탈 밴드 매노워는 바그너를 “헤비메탈의 아버지”라고 평했다.
바그너는 문학과 철학에도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1870년대 초반에 바그너의 인너 서클 (an inner circle: 친밀집단)에 속하여 있었다. 니체는 그의 첫 출판물인 '음악의 정신' 중에서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The Birth of Tragedy)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유럽 문화의 디오니서스적인 부활'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니체였는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이후 그는 바그너와 결별했다. 니체는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들이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신앙에 영합하는 것이며 나아가 선동적인 새로운 독일 제국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영국 출신의 미국 시인인 와이스탄 휴 오든은 바그너를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라고 불렀다. 토마스 만이나 마르셀 프루스트도 바그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에서 바그너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제임스 조이스는 바그너를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바그너의 작품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는 내용이 나온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는 바그너가 주제로 등장할 정도이다. '황무지'에는 '트리스탄'의 구절들이 나오며 '링 사이클'과 '파르지팔'과 관련된 내용도 나온다.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스테판 말라메(Stephane Mallarme), 폴 베를랭(Paul Verlaine)과 같은 사람들은 아예 바그너를 숭배했다. 바그너의 여러 아이디어, 예를 들면 '트리스탄'에서 사랑과 죽음의 관계(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나중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연구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바그너에 대한 반응이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독일의 음악계는 한때 두 부류로 분류된 일이 있었다. 바그너 지지자들과 브람스 지지자들이었다. 브람스 지지층은 유명한 평론가인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의 후원을 받았으며 전통적인 형태의 음악을 옹호하였다. 이들은 바그너의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전선을 이끌었다. 심지어 프랑스의 드뷔시도 바그너를 '늙어빠진 독살자'(old poisoner)라면서 비난했다. 바그너의 새로운 작곡법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작곡가들이 많았다. 로시니와 같은 사람들도 바그너에게 비판적이었다. 차이콥스키도 그중의 하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만일 그대로 놓아 두었다가는 바그너의 영향이 너무 커져서 전통적인 음악계에 커다란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가 염려했던대로 바그너의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져서 현대 클래식음악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정 음악인들에게는 열렬 팬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바그너의 팬덤은 열렬이라는 말을 떠나서 실로 광신적이라고 할만큼 현재에도 대단한 팬들이 많이 있다. 바그너가 끼친 영향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이다.

8.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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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저서

《베토벤》(홍은정 역, 포노, 2020). 한국어판. 바그너의 베토벤 전기, 단편소설 '베토벤 순례' 등 베토벤 관련 글 5편을 묶은 책.

10.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

“나는 조금 홀가분해졌다. […] 바그너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내게는 하나의 운명이었으며 ; 이후에 무언가를 다시 기꺼워하게 된 것은 하나의 승리였다.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위험하게 바그너적인 짓거리와 하나가 되어 있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나보다 더 강력하게 그것에 저항하지는 않았으리라. 어느 누구도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나보다 더 기뻐하지는 않았으리라. […] 내가 도덕주의자라면, 어떤 명칭을 부여하게 될지 알겠는가! 아마도 자기극복이라는 명칭일 것이다.”
― 『바그너의 경우』, 1888년

바그너는 니체의 사상에도 많은 영향을 미첬다. 니체와 바그너의 만남에서 바그너가 니체의 영향을 받아 만든 작품은 없지만 니체는 그의 사상을 형성해가는 데에 바그너의 영향을 지대하게 많이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니체의 작품에 고스란히 등장하며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바그너는 니체 사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니체와 바그너가 교류하면서 가졌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 문화고대 비극이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니체의 관심은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바그너는 그의 음악극에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를 소재로 사용했다. 음악과 비극에 대한 니체와 바그너의 공통적인 해석과 관심은 둘을 연결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다. 니체가 고전학 교수에 오를 정도로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바그너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이며 니체는 음악의 대가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을 것이다.

니체와 바그너의 이러한 교류를 통해 탄생한 니체의 작품이 ‘음악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이다. 이 작품의 예비적 성격을 갖는 작품으로는 ‘그리스적 음악극(Das griechische Musikdrama, 1870)’, ‘소크라테스와 비극(Sokrates und die Tragödie, 1870)’ 두 개의 강연문과 ‘비극적 사유의 탄생(Die Geburt des tragischen Gehanken, 1870)’ 등이 있다. 그리스 비극과 음악에 대한 니체와 바그너의 관심사가 일치하지 않았다면 둘의 관계가 성립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그너는 고대적인 것, 정통 그리스적인 요소를 지닌 극작품을 원했다. 즉 이상적 상황으로서의 신화성이 필요했던 것인데, 바그너에게 그것은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의 비극이었다. 바그너는 아이스킬로스를 음악정신으로부터의 탄생이라고 명명하고 에우리피데스를 데카당스라고 정의내린다. 바그너의 이러한 해석은 음악적인 근원이 절정을 이루는 아이스킬로스에서 비극이 탄생하고, 음악적인 요소가 퇴화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종말에 이르렀음을 의미하고 있다. 니체는 바그너와 의견을 같이 하며 에우리피데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이 바로 비극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다.

니체는 근대인이 예술을 수용하는 감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에 대한 해답으로 바그너의 음악을 내세운다. 근대의 예술은 사람들을 더욱 둔감하게 하고 탐욕스럽게 되도록 할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근대 예술의 부적절한 감성이 사람들을 끊임없이 잘못된 길로 이끌고 사람들은 의지조차 갖지 못한 부적절한 감성의 노예로 전락한다고 보았다. 또한 바그너의 영향으로 인해 니체는 전통 형이상학적 철학 풍토에 반기를 들게 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반시대적 고찰’과 아울러 삶의 부정을 긍정으로 돌리는 계기를 구성한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통하여 전통적인 현상과 물자체의 이원적인 대립을 해소시키며 한층 더 나아가서 근본적인 요소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니체 철학에서 후기에 절정을 이루는 초인개념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특히 소크라테스적 요소를 가장 비가치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니체는 현대문명이 품고 있는 이성 중심의 일차원적인 사고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결국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비극의 본질, 곧 디오니소스적인 내용과 아폴론적인 형식의 조화를 통해서만 삶의 가치가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바그너를 가까이서 알게 된 것은 1868년 가을이었다. 나이로 보아 니체에게 그는 아버지뻘이었는데[15], 마침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던 자신의 여동생 오틸리에 브로크하우스를 방문하고 있었다. 리츨 교수 부인을 통해 그 여동생을 알게 된 니체는 어렵지 않게 바그너를 만날 수 있었다. 숙명적인 만남이었다. 고전 문헌학을 전공한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품과 그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여기서 생의 무한한 환희와 긍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비극은 말 그대로 강인한 족속만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예술로서, 그 정수리에 아이스킬로스가 바로 바그너였다. 바그너 또한 열렬한 쇼펜하우어 추종자였다. 공통의 대부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바그너는 니체의 새로운 우상이 되었다. 니체는 바그너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니체의 재능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화답했다. 청년 니체에게 바그너는 숭배의 대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니체의 능력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그너에게 헌정된 니체의 첫 번째 저작 『비극의 탄생』은 이 시기에 쓴 것이다. 그것은 바그너와의 대화에서 출발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저작이기도 했다. 이 책과 함께 보낸 편지에 니체는 “이 책의 모든 내용에서 당신이 제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오로지 감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바그너는 기뻐했다. 1872년 니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당신은 내 아내를 제외하고는 내 삶이 내게 허락한 유일한 소득입니다”라고 쓴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관계도 순탄치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관계는 애증 관계로 바뀌었고 걷잡을 수 없는 파행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다가 10년을 가지 못하고 1876년 이후 서로 앙숙이 되면서 결국 파국을 맞고 말았다. 열광이 컸던 만큼 환멸도 컸다. 그러면 왜 이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는가? 니체는 그가 말년에 낸 『바그너의 경우』에서 그 전말을 자세하게 밝혔다. 바그너가 퇴화의 화신으로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즉 작품 「파르지팔」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아이스킬로스, 바그너가 찬연했던 고대 그리스 문화에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교 신에 귀의하면서 새삼 신의 어린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니체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배신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프랑스 사람들과 유대인을 증오했다. 그에게는 독일 밖에 없었다. 프랑스 등 라틴 문화를 높게 평가하는 한편 독일 문화의 추진성을 꼬집고 반유대주의를 경멸하고 있던 니체는 이를 유치한 민족주의로 받아들였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그너는 바그너대로 니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니체도 변한 것이다. 그는 반계몽철학자 쇼펜하우어에게서 벗어나 계몽철학자 볼테르에게 기울어 있었고, 세계 시민주의적 안목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쇼펜하우어의 충직한 사도이자 국수주의자 바그너가 발끈했다. 지극히 사적인 알력까지 끼어들었다.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니체의 주치의가 환자에 대한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본연의 의무를 버리고 니체로서의 수치스런 성적인 문제를 바그너에게 귀띔했고, 바그너가 나서서 니체에게 나름대로 충고를 했던 것이 그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바그너를 얘기할 때에 루트비히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도와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다만, 루트비히는 바그너보다 서른 몇 살이나 젊기 때문에 세대의 차이는 있었다. 아무튼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생애와 작품에 있어서 대단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보통 열렬 팬이 아니라 아주 광적일 정도로 바그너를 숭상했고 바그너의 음악을 애호한 사람이었다. 루트비히 2세는 평소에 바그너를 많이 도와주었다. 빚도 갚아주고 오페라 공연도 후원했으며 나중에는 바이로이트 극장을 짓고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까지 많은 재정적 지원을 했다. 바그너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루트비히가 바그너에 대하여 처음 얘기를 들은 것은 왕세자 시절인 13세 때였다. 루트비히의 가정교사였던 사람이 루트비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보았는데 이러이러하여 참으로 감동을 받았다고 쓴 것을 읽은 것이 바그너를 알게된 시작이었다. 루트비히는 소년시절부터 예술을 애호하였다. 루트비히 가문의 전통이었다. 화가와 조각가와 건축가와 시인, 그리고 배우와 과학자들을 위하는 전통이었다. 소년 루트비히는 '로엔그린'과 관련하여 성배의 기사 이야기, 백조의 기사 이야기, 사악한 오르트루트의 이야기, 순결한 엘자의 이야기 등을 듣고 '로엔그린'에 정신을 온통 빼앗겼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로엔그린'과 같은 훌륭한 오페라를 작곡했는가라며 대단히 궁금해 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를 더 잘 알기 위해 바그너가 쓴 글을 구해서 읽었다. 그리고 감탄하였다. 루트비히가 16세가 되던 해에 뮌헨에서 '로엔그린'이 공연되었다. 루트비히는 만사를 제쳐놓고 '로엔그린'을 보러 갔다. 이때 루트비히는 처음으로 바그너를 만났다. 루트비히는 나중에 왕이 되면 바그너를 후원해야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했다. 바그너는 루트비히를 보고 앞으로 자기의 활동에 필요한 좋은 후원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함께 바그너는 그가 생각하는 독일 예술의 순수성이 루트비히를 통해 존속되고 발전될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바그너는 물려 받은 재산도 없고 버는 것도 신통치 않은데 빚만 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러다보니 빚쟁이들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한 때에 루트비히가 바그너를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인 뮌헨으로 불렀다. 루트비히는 왕이 되자 평소에 숭배하는 바그너를 곁에 두고 그의 아이디어와 사상을 자기의 정치철학에 융합하여 독일인에 의한, 독일만을 위한, 독일의 음악예술을 꽃피우고자 했다. 아무튼 바그너라는 존재는 루트비히의 생활에 깊숙히 스며들어 있었다. 오죽하면 루트비히에게 바그너가 없다는 것은 마치 지구에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루트비히와 바그너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서로 떼어질수 없는 관계였다. 돌이켜보면, 바그너의 생애에 있어서 루트비히는 가장 막강한 후원자였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뛰어난 두뇌에서 나온 산물들을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실제로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후기 작품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고 바이로이트 극장의 완성을 위해서 거의 1백만 마르크의 재정지원을 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가 빚에 쪼들려 곤경에 빠질 때마다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처럼 바그너를 곤경에서 구원해 주었다.

루트비히는 점차 권세를 잃어갔을 때 바그너는 링 사이클의 마지막 두 편의 오페라를 완성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바그너는 바이에른 북쪽 끝에 있는 바이로이트에 정착하였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를 그의 작품만을 연주하는 특별 극장의 적지라고 생각했다. 루트비히는 바이로이트 프로젝트에 상당한 재정적 기여를 했다. 그리고 1876년에 바이로이트에서 공연된 링 사이클 전편을 두번이나 감상하였다. 링 사이클을 보고 난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대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바그너와 루트비히의 관계는 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러다가 1880년대 후반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다. '파르지팔'의 전주곡을 연주하는 문제로 의견에 차이가 있었다. 그 이후로 바그너와 루트비히는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다. 루트비히는 자기의 모든 궁전에 있는 피아노에 검은 휘장을 덮도록 했다. 바그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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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루트비히는 그의 에너지를 건축으로 돌렸다. 루트비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바그너의 신화적인 오페라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생각하며 짓도록 했다. 노이슈봔슈타인 성은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가져올 마법의 낙원을 의미했다. 루트비히가 1886년에 세상을 떠날 때 노이슈봔슈타인은 절반 밖에 완성되지 않았다.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엔 브람스가 바그너를 흠모하고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다는 루머가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바그너를 존경하는 브람스"는 후세사람 관점으로 별것도 아닌 음악적 의견 대립으로 (브람스와 바그너같이) "위대한 음악가"들이 속좁게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렸다는 사실이 불편했던 사람들의 꾸준한 역사왜곡을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실제 브람스는 (바그너에 적대적이였던) 굼브레시트의 바그너 비평을 즐겨 읽었으며 파르지팔에 대해선 "한슬릭의 평가가 제일 정확하다"라고 공공연히 말했을 정도로 바그너에 대한 반발심과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다.

브람스와 바그너가 활약하던 시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고전주의가 사그러들면서 무대가 독일로 옮겨져 낭만주의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의 이슈는 “포스트 베토벤” 이었다. 누가 과연 베토벤의 뒤를 이을 음악가인가? 였다. 이 때 등장한 음악가들이 베버와 멘델스존, 슈만 등이었으나 이들은 포스트 베토벤이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나타난 이들이 바로 브람스와 바그너였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가 주장하는 노선마저 극명하게 달랐다. 바그너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를 연 베버의 뒤를 이어 독일 국민 오페라를 창출해낸 '개혁파' 작곡가였다면, 브람스는 앞 세대의 작곡가인 바흐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같은 선배 음악인들의 노선을 철저히 뒤따라간 '보수파'였다.

작품 양식에 있어서도 브람스는 악곡을 형식 또는 소재 별로 구분하여 각각 독립된 가운데 완벽성을 기했으나, 바그너는 음악의 모든 장르와 양식을 다만 종합 예술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데 비해, 브람스는 한 편의 오페라도 남기지 않았고, 브람스가 작곡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천부적인 작곡가형이었다면, 바그너는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팔방미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가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그토록 멀리 갈라진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바그너가 1863년 그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무렵의 일이다. 브람스는 이때 바그너의 조수처럼 사보를 돕고 있었다. 그럴 즈음 브람스에게 당시 이미 거장이었던 바그너 앞에서 본인이 작곡한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 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연주를 들은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이에 고무된 브람스는 “역시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앞으로 없을 것”이라며 흥분하게 된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브람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바그너 앞에서 두 번째의 연주를 가지게 되면서 그만 깨지게 된다. 예상과 달리 바그너가 브람스를 “전통 속에 갇힌 인물”이라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후에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브람스를 “바흐나 작곡해야 할 인물”로 혹평하고 있다.

이 사건은 브람스로 하여금 바그너의 환상을 깨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후 죽을 때까지 바그너를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바그너가 왜 그처럼 표변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 문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당시 브람스는 빈의 최대 평론가인 한슬릭에게 바그너의 여자문제를 폭로해버렸고, 이 때문에 바그너는 한슬릭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슬릭으로부터 수세에 몰린 바그너는 이 때문에 빈에서 공연하기로 하고 연습을 거듭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바그너가 공격을 받았던 여자 문제란, 그에게 많은 돈을 빌려주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 여인에게 연정의 뜻이 담긴 각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각서가 그만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브람스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베토벤 등의 자필 서한을 비롯한 음악인들의 악보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의 연서가 브람스에게 흘러들어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각서를 브람스가 자신의 후견인처럼 활약하고 있는 한슬릭에게 공개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고, 더구나 그 시기가 바그너가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던 리스트의 둘째 달 코지마에게 아이를 갖게 한 때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바그너에 대한 브람스의 폭로 사건은 하필이면 <니벨룽겐의 반지>의 성공으로 떠들썩한 유럽 음악계에 찬물을 끼얹은 일대 사건이었다. 졸지에 허를 찔린 바그너는 이에 질세라 브람스의 음악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낭만주의 시대에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한 것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끈질기게 헐뜯으면서, 그의 음악을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깽깽이로 쏘다닐 것이다”라고 힐난했다. 이렇게 드러내놓고 브람스의 험담을 해대는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침묵으로 고민만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독설과 공방은 마침내 유럽의 음악계가 양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브람스 지지파와 바그너 지지파로 나뉜 것이다.

브람스 지지파는 슈만 부부를 비롯해, 아내를 바그너에게 빼앗긴 한스 폰 뷜로, 당대 최대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 등이었고, 바그너 쪽으로는 리스트, 니체, 쇼펜하우어, 마이어베어 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브람스의 지지파인 한스 폰 뷜로가 그의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기기 전까지는 바그너의 숭배자였다는 사실이다. 바그너와 브람스는 여자 문제에서도 격돌하게 되는데, 베젠동크 부인과의 사랑이 그것이다. 두 번의 결혼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인을 가까이했던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여인들을 사랑은 했으나 결혼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이런 브람스를 두고 바그너는 '내시'니 '고자'니 하는 독설을 퍼부었는데, 하필 이 두 사람이 모두 한 여인을 사랑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그너가 브람스의 명예박사학위 수여까지도 고깝게 볼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악화했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한슬릭의 탓이 크다는 분석도 있다. 바그너의 진보성을 띤 음악을 고깝게 보던 한슬릭은 바그너를 대상으로 한 대항마로 브람스를 내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언론과 평론가 그룹이 별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어서 싸움을 붙이는 현상이 이와 유사하다.

어쨌거나 그간 우리나라에는 브람스가 이렇게 바그너에게 당했던 사실만 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브람스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좋은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바그너가 죽은 이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브람스파가 바그너파를 박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브람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바그너를 열렬히 추종했던 안톤 브루크너의 음악을 가혹하게 비판하여 그에게 많은 시련과 좌절을 안겼다. 또 브람스는 브루크너의 수제자였던 재능있는 젊은 작곡가 한스 로트가 베토벤상을 받는 것을 가로막고 그의 교향곡 1번의 초연을 좌절시켰다. 고아로 여동생과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져야했던 불운한 청년 한스 로트는 이 충격으로 브람스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소리치고 다니다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요절했다.

또한 브람스파는 젊은 구스타프 말러가 "탄식의 노래"로 베토벤상을 받는 것도 가로막았다. 말러는 베토벤상에서 떨어지면서 전업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고 지휘자를 생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말러는 평생에 걸쳐 브람스의 음악을 평가절하했다.[16] 그러나 말러는 자신의 선배였던 한스 로트가 브람스에 의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목격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브람스와 한슬릭의 무서움을 절감하고 있었다. 말러는 속으로는 브람스를 고깝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브람스를 비위를 잘 맞춰주며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함부르크 지휘자 시절 말러는 최만년의 브람스의 말동무가 되어 하루에 몇 시간씩이나 브람스의 얘기를 들어주는 말동무가 되었다. 비록 말러는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브람스의 뒤담화를 깠지만... 여하튼 덕분에 브람스는 젊은 지휘자 말러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고 한슬릭 등에게 말러의 지휘를 자주 칭찬했다. 이렇게 브람스파의 지지를 등에 업게 된 말러는 승승장구하여 1897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당시 빈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로 거론되던 인물들은 펠릭스 모틀, 헤르만 레비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바그너의 제자들이었다. 빈 음악계의 거물 한슬릭은 이들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당시 브람스파라고 생각하고 있던 소장파 지휘자 말러를 밀어 그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랬다고 브람스가 바그너의 음악적 영향력까지 인정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브람스의 음악적 동지이기도 했던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 역시 한 때는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한 적이 있으며, 그것은 드보르자크의 대부분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었고, 그런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을 브람스가 밀어준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던 게 아마도 당시 음악계의 상황이 바그너라는 강력한 태풍의 영향권을 브람스조차도 벗어나기가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브람스가 눈감아준 것인지도 모른다.

바그너에게 있어 동갑내기 베르디는 일생의 라이벌이었다. 다만 이들은 인생에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만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서로 피했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한 말도 아꼈다. 단지 베르디는 바그너를 겨냥해 “엉뚱하게 다른 방향에서 헤매고 있다”며 그의 작품을 에둘러 비판했다. 바그너도 “아무 대사를 하지 않는 게 가장 낫다”며 대사 위주의 베르디 작품을 은근히 비꼬았다. 하지만 베르디는 1883년 바그너가 먼저 사망하자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음악가가 숨졌다며 비통해했다고 한다.

바그너와 베르디는 ‘민족주의 오페라’를 다뤘다는 공통점이 있다. ‘민족주의의 시대’라 불리던 19세기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것은 ‘민족’ 키워드와 맞닿아 있었다. 특히 바그너와 베르디가 태어난 독일과 이탈리아는 통일조차 이루지 못해 통일에 대한 열망과 겹쳐 민족주의가 가장 활발한 국가였다. 이에 베르디는 또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각 국가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베르디는 <아틸라>, <나부코> 등 이탈리아 역사의 위대한 승리 장면을 담은 오페라를 통해 이탈리아 민족의 자부심과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독립운동)를 부추겼다.이 같은 민족주의적 요소는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했지만, 베르디의 음악은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되지 않았다. 이경분 서울대 일본연구소 연구교수는 “집단 코러스, 신화적 줄거리 등 나치의 선전 사상에 적합했던 바그너 오페라에 비해 베르디의 그것은 파쇼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바그너와 베르디의 음악적 성향은 완전히 다르다. 이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의 성향 차이에서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독일은 오페라의 줄거리와 드라마로써의 오페라를 강조한다. 반면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노래와 가수를 중심으로 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작품의 줄거리보다는 음악적 탁월함이 강조된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은 “바그너는 ‘음악극’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일생동안 추구해왔지만, 베르디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등장인물의 등장, 행위, 퇴장 등을 짜임새있게 연결하기 위해 선율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바그너 오페라는 대체로 긴 호흡을 가지며 막 사이에 관객들이 박수를 잘 치지 않는다. 반면 베르디는 ‘바그너에 비해’ 뚜렷한 음악적 목표가 존재하지 않았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음악적 형식이나 선율의 짜임이 아닌 ‘휴머니즘’이다. 때문에 비범한 인간이나 신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바그너 오페라와 달리 베르디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예(<아이다>) 등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 두 작곡가 중 더 폭넓게 사랑을 받은 쪽은 베르디이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등의 베르디 오페라는 세계 어느 나라의 오페라극장에서도 핵심 레퍼토리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베르디는 푸치니와 더불어 오페라 공연의 대부분을 차지해왔다. 반면, 독일어로 연주되는 바그너의 악극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국내에서 전막 공연된 적이 없었다. 무대 장치와 연기 없이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전막 연주한 것도 서울시향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처음이었다.

바그너가 국내에서 베르디에 비해 자주 연주되지 않는 이유는 연주상의 어려움이 주요한 이유로 꼽힌다. 격음이 많은 독일어는 모음이 많은 이탈리아어에 비해 노래하기가 어렵다. 또한 오케스트라가 아리아를 반주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달리 바그너 악극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두텁게 쓰여 균형을 맞추려면 목에 무리가 갈 수 있다. 바그너의 대표작인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의 경우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으로 이어지는 4부작을 모두 연주하는 데에 휴식시간을 제외한 공연시간만 약 16시간이나 소요된다. 후기낭만주의적 불협화성, 극의 철학적 함의를 이해하기 까다롭다는 점도 연주와 감상을 제한하는 요인이 됐다. 보통 바그너의 작품에는 전문적인 ‘바그너 가수’가 출연하는데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유학해 독일어 발성을 잘하는 ‘바그너 가수’가 드물다. 바그너 작품에서는 금관악기의 역할이 중요한데, 국내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금관 파트가 취약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 마틸데 베젠동크

마틸데 베젠동크는 독일의 시인 겸 작가이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친구로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정부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다섯 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것을 '베젠동크 가곡'(Wesendonck Lieder)이라고 부른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작품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던져준 주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베젠동크와의 관계가 영감을 주어 완성한 오페라다. 한편, 바그너의 사생활과 관련하여서는 첫번째 부인인 민나 플라너과 바그너가 이혼하게된 원인을 제공해 준 여인이었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예쁘게도 생겼지만 대단히 지성적이며 음악과 문학에 있어서 조예가 깊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마틸데 베젠동크의 원래 이름은 아네스 마틸데 루케마이어(Agnes Mathilde Luckemeyer)이다. 독일 라인란트의 엘버펠트(Elberfeld)라는 곳에서 1828년 12월 23일에 태어났다. 엘버펠트는 오늘날 독일 라인지방에 있는 부퍼탈(Wuppertal)의 한 파트이다. 아네스 마틸데 루케마이어는 오토 베벤동크라는 스위스의 부유한 비단상인과 결혼하여 마틸데 베젠동크가 되었다. 오토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베젠동크 부부는 바그너를 1852년에 취리히에서 만났다. 베젠동크 부부는 바그너가 편안하게 오페라를 작곡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이들의 저택에 있는 작은 별채를 기꺼이 제공했다. 그로부터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별채에서 기거하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857년부터는 예쁘고 지성적인 베젠동크 부인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사랑하게 되었다. 아무튼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는 통상적인 친구, 또는 청년 작곡가를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의 부인이라는 것을 뛰어 넘어 애틋하고 애절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이다. 바그너는 그때 '니벨룽의 반지'의 작곡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과의 열애로 인하여 '니벨룽의 반지'는 잠시 넣어 두고 대신 마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비유하여 그리고 싶었던지 저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한편, 1858년에 민나는 바그너가 마틸데에게 보내는 로맨틱한 편지를 발견하고 바그너의 부정함을 따지고 들었다.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는 마치 시베리아처럼 냉랭해졌다. 결국 바그너는 여행이나 가자고 생각하여 혼자서 취리히를 거쳐 베니스로 갔고 민나는 딸과 부모가 살고 있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갔다. 딸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민나의 딸은 민나가 바그너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작센 왕국 근위대의 어떤 장교와 지내다가 낳은 아이이다. 그러므로 바그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틸데는 자서전적인 글에서 바그너가 취리히에 와서 머물렀던 일에 대하여 자세히 적어 놓았으나 바그너와 썸이 있었다는 얘기는 비치지도 않았다. 이와 함께 민나와는 서로 직접 다투는 등 문제가 많았지만 그런 얘기도 자서전에 하나도 쓰지 않았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1902년 8월 31일에 오스트리아의 알트뮌스터(Altmunster)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4세였다. 마틸데는 독일 본(Bonn)의 알텐 프리드호프(Alten Friedhof)에 있는 베젠동크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11. 바그너의 아내

11.1. 민나 플래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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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나 플래너 (1835)
여배우인 민나 플래너(Minna Planer)는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이다. 19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여배우이다. 1809년 작센 왕국의 외데란(Oederan)에서 태어났으므로 바그너보다는 4년 연상이다. 바그너와 민나는 1836년에 결혼했다. 바그너가 23세의 청년이었고 민나는 27세였다. 두 사람은 약 22년 동안 부부로서 지냈다. 다만, 마지막 10년은 여러 사정으로 거의 떨어져서 살았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겉으로는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관계 때문에 깨진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은 처음부터 모든 면에서 맞지 않아서 불화가 계속되었고 결별은 시간의 문제였다. 민나는 바그너와 결별한지 8년 후인 1866년 드레스덴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였다. 드레스덴의 알테 안넨프리드호프(Alte Annenfriedhof)에 민나 플라너의 묘지가 있다. 민나는 바그너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마다 바그너와 함께 그 사건들을 겪어 나갔다. 바그너와 함께 빚쟁이들을 피해서 라트비아의 리가로 갔던 일, 파리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리가를 떠나 런던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죽을뻔 했던 일, 파리에서 오페라의 실패로 빈곤한 생활로 연명하던 일, 바그너가 드레스덴 봉기에 관련되어 독일에서 수배되자 그와 함께 유럽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했던 일, 바그너와 베젠동크 부인이 밀애에 빠졌던 일 등 파란만장한 바그너 생애의 중심에 함께 있었다.

민나 플래너의 아버지는 작센 왕국의 군악대에서 트럼펫을 불다가 제대한 사람이었다. 살림이 넉넉치 못해서 민나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싸우는 것이었다. 민나는 예쁘장하고 매력적으로 생겼다. 민나는 10대 소녀일 때 작센왕국의 근위병 대위인 에른스트 루돌프 폰 아인지델이라는 사람에게 원조교제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폰 아인지델 대위는 민나가 임신하자 돌연 민나를 멀리하고 핑계를 대며 떨어지고자 했다. 민나의 부모는 민나의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자 시골에 있는 친척 집으로 보냈다. 얼마후 딸이 태어났다. 나탈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애칭으로는 네티(Netty)라고 불렀다. 민나는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가 있어서 네티를 동생이라고 하며 키웠다.
민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연기라면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극단에 들어가 배우가 되었다. 주로 맡은 역할은 비운의 가련한 소녀 역할 즉, 에어스테 리브하베린(Erste Liebhaberin)의 역할이었다. 에어스테 리브하베린이란 누구나 첫눈에 동정심을 갖게 해주는 가련한 처녀를 말한다. 신파조 연극에서는 그런 역할이 의례 주인공이었다. 민나는 인기가 높아져서 데사우, 알텐부르크, 마그데부르크, 드레스덴 등 독일의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연극에 출연했다. 주가가 높아진 민나는 주역이 아니면 안 맡는 위치가 되었다. 출연료도 많이 받았다. 팬들도 많이 생겼다. 민나는 배우로서 연기력도 좋았지만 미모도 한 몫했다. 어떤 팬은 민나의 미모를 창조주의 최대 걸작이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런 팬 중의 하나가 바그너였다. 바그너가 민나에게 보낸 이른바 러브레터를 보면 요즘의 기준으로서 유치한 내용이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히 감동적인 표현이었다. 예를 들면 "당신과 헤어진지 24시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에게는 그 24시간이 마치 영겁의 세월과 같았습니다. 어찌하여 나는 이같은 헤어짐에 익숙하여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당신이 없다는 것은 마치 나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운운이다.

민나는 1834년 여름에 마그데부르크의 하인리히 베트만 극단에 속하여 있으면서 할레(Halle) 부근의 바드 라우흐슈태트(Bad Lauchstädt)라는 곳에서 여름 시즌 연극에 출연하고 있었다. 바그너도 마침 바드 라우흐슈태트에 있었다. 바그너는 마그데부르크의 오페라단으로부터 지휘자로 오라는 요청을 받고는 조건이 어떤지를 알아보기 위해 왔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시간을 두고 좀 더 생각하기 위해 바드 라우흐슈태트에 왔던 것이었다. 바그너는 우연히 민나가 묵고 있는 호텔에 방을 구하게 되었다. 바그너는 민나를 로비에서 민나를 보고 '아, 저 여자다'라고 생각하고는 차마 말을 붙이지는 못하고 민나가 묵고 있는 방의 바로 아랫층 방에 투숙함으로서 민나를 그리워하였다. 다음날, 바그너는 민나가 마그데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는 민나와 계속 만나기 위해 마그데부르크의 지휘자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때 바그너는 21세 였다. 그렇게 하여 민나와 바그너의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민나는 미모의 인기 여배우였고 바그너는 한낱 음악가에 불가했다. 그래서 민나는 바그너가 너무 집요하게 접근하므로 바그너를 떨쳐 버리기 위해 그야말로 여러 노력을 다 기울였다. 바그너로부터 잠적하여 찾지 못하게 했으며 다른 남자들과 공공연히 애정행각을 벌여 바그너로 하여금 실망하여 물러나도록 시도하기도 했다. 민나는 그저 바그너와 자기가 절대로 맞지 않는 커플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고집이 있었고 계속해서 구혼한다 결국 민나는 바그너의 요청을 받아 들이고 결혼을 승낙했다.

바드 라우스슈태트에서의 여름 시즌이 끝나고 그해 10월에 민나의 연극단이 마그데부르크로 돌아갈 즈음에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1835년 2월에 바그너는 민나와 약혼을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나이를 속였다. 바그너는 원래의 나이에 한 살 더 붙여서 얘기했다. 그렇지 않으면 미성년자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민나는 원래 나이에서 네살이나 빼고 말했다. 바그너는 비록 민나와 약혼했지만 민나의 열성 팬들 때문에 속이 상해서 화를 내는 일은 빈번했다. 1835년 11월에, 민나는 말도 없이 갑자기 베를린으로 떠났다. 나중에 알아보니 베를린의 쾨니히스버그 극장에서 역할을 맡게 되어 갔다는 것이다. 마그데부르크 연극단이 만족스럽지 못해서 베를린으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아마 바그너에게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민나가 말도 없이 떠나자 바그너는 분노와 함께 절망에 빠졌다. 바그너는 민나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어 제발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와서 당장 결혼식을 올리자고 간청했다. 결국 민나는 돌아오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마그데부르크로 돌아온 민나는 시즌말까지 머물다가 다시 저 멀리 쾨니히스버그로 떠났다. 바그너는 민나와 함께 있기 위해 쾨니히스버그에 있는 어떤 작은 극단의 부지휘자라는 직책을 어쩔수 없이 맡았다. 마침내 민나와 바그너는 1836년 11월 26일 쾨니히스버그의 트라그하임(Tragheim)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으면서도 두 사람의 말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는 결혼식 도중에 주례를 맡은 목사님 앞에서도 심하게 말다툼을 했다.

결혼후 가장 골치거리는 허구헌날 빚쟁이들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나도 그렇지만 바그너도 사치성이 있었다. 쾨니히스버그에서의 보조 지휘자의 자리는 별로 급여가 많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사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최상의 비단과 화려한 공단과 벨베트를 좋아하였다. 바그너는 집에서 입는 가운이 하나 필요해도 유명 상점에서 아주 깐깐하게 맞추어 입었다. 돈을 벌지 못하고 사치만 부렸으니 빚만 늘어날수 밖에 없었다. 바그너는 쾨니히스버그는 물론, 멀리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빚을 졌다. 민나는 바그너에게 빚을 받으로 온 사람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피곤했다.

결혼한 다음 해인 1937년 5월 31일에, 민나는 자신의 팬중의 하나인 디트리히라고 하는 쾨니히스버그의 상인과 함께 가출했다. 민나는 딸 네티를 데리고 가출했다. 바그너는 바로 그날 아침에 빚쟁이들이 고소하는 바람에 지방법원의 판사에게 갔었기 때문에 민나가 가출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분이 머리끝까지 치민 바그너는 민나를 찾으러 나섰다. 바그너는 민나의 행방을 사방으로 수소문해서 결국 민나가 드레스덴에 있는 민나의 부모 집에 있는 것을 찾아냈다. 민나는 바그너에게 맨날 빚쟁이들만 상대하는 일이 지긋지긋해서 집을 나왔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다시는 빚을 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민나를 설득하여 겨우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화해도 잠시뿐이었다. 두달 후인 7월에 민나는 다시 디트리히와 함께 어디론가 떠났다. 분노가 극도에 달한 바그너는 민나와 디트리히를 찾으면 당장 죽이겠다고 하며 나섰으나 이번에는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였다. 민나가 마음이 변해서(일설에는 바그너에게 잘못했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바그너에게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0월이었다. 바그너가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서 음악감독의 자리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빚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민나도 리가의 극장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바그너와 민나는 리가에서 2년 동안 잘 견디며 살았다. 그러다가 바그너는 1839년 1월에 음악감독의 자리를 내놓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리가까지 몰려온 빚쟁이들을 피해서 멀리 잠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그너와 민나는 기르던 개 한마리만 데리고 리가에서 가까운 러시아 국경을 넘어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갔다가 다시 파리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 파리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의 공연이 준비되고 있다고 하므로 만일 '리엔치'가 성공을 거둔다면 돈도 많이 벌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나는 4월 18일에 리가에서 마지막이 되는 무대 출연을 했다. 쉴러의 '마리아 스투아르트'였다. 민나는 이 공연에서 받는 출연료로 리가에서 파리까지 가는 여비를 충당할 계획이었다. 마침내 7월 10일, 두 사람은 라트비아-러시아 국경을 안전하게 건넜다. 국경 수비대에게 발견된다면 총살을 면치 못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두 사람은 국경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를 타고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향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탄 마차가 도중에서 전복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바그너는 별로 다친데가 없었지만 민나는 상처를 입었다. 바그너와 민나는 발트해의 항구인 필라우(Pillau: Baltiysk)에서 테티스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런던으로 향하였다. 필라우는 러시아 땅이지만 독일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필라우를 떠난 배는 심한 폭풍우 때문에 표류하다가 노르웨이의 어떤 표르드에 겨우 정박하였다. 아무튼 바그너와 민나는 필라우를 떠난지 24일 만에 런던에 도착했다. 보통 같으면 기껏해야 8일 걸리는 일정이었다. 런던에서 며칠 휴식을 취한 이들은 마침내 파리로 가는 증기선을 탔다.

바그너와 민나는 1839년부터 1942년까지 3년 동안 파리에서 지냈다. 무척 가난하게 지냈다. 그러던 바그너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드레스덴 궁정극장이 '리엔치'를 공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바그너는 1842년 4월에 파리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갔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궁정카펠마이스터가 되었다. 민나가 소원하던 사회적 지위와 생활의 안정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바그너는 1849년 5월의 드레스덴 혁명에 연루되어 당국에서 체포령이 내리자 취리히로 도피하였다. 바그너가 궁정카펠마이스터 자리를 버리고 취리히로 도망가자 민나는 당황하고 속이 상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는 냉랭해졌다. 민나는 취리히를 드레스덴보다 형편 없는 시골 도시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카펠마이스터의 부인'(Frau Kappelmeister)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잃게 되어 한탄을 금치 못했다.
바그너가 그런 민나를 설득하여 취리히로 오게 한 것은 몇 달 후인 8월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그너의 이상적인 세계관, 또는 작품관과 민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데 있었다. 민나는 지휘자로서 바그너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바그너의 오페라에 대하여는 점점 흥미를 잃고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나로서는 예전과는 달리 바그너의 활동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무대에 서서 연극을 한다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민나는 심장질환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의사는 아편을 처방해 주었다. 그만큼 통증이 심했다.

바그너와 민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파국을 맞은 것은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와 불륜 관계에 있었던 것이 큰 원인이었다. 바그너는 1857년에 취리히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는 중에 베젠동크와 열애의 관계에 들어갔다.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과 좀 수상한 관계에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데 증거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1858년 4월에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민나는 두 사람이 간통을 했다고 하면서 비난했다. 바그너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면서 민나가 편지의 내용을 과대해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중에 민나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에게 추가로 보낸 편지들을 발견했다. 편지에는 바그너가 베젠동크 부인을 '바람둥이 여자'(hussy), 또는 '순결하지 않은 여자'(filthy woman)라고 표현한 내용도 있었다. 민나는 이로 미루어보아 베젠동크 부인이 바그너를 유혹하였고 바그너는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고 추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나와 민나는 결국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바그너는 베니스로 여행을 떠났고 민나는 온천에서 치료를 받으면 심장질환에 좋다는 말을 듣고 브레스텐버그(Brestenberg)로 갔다. 당시 민나는 심장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다. 민나는 베젠동크 부인에 대하여 유감이 많았다. 그래서 드레스덴으로 돌아가기 전에 베젠동크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민나는 편지에서 '피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말합니다. 당신은 결혼한지 거의 32년이나 되는 나와 나의 남편을 갈라 놓는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당신에게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민나는 나중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지나치게 가증스러운 사랑을 했던 두 사람'이라고 말했다. 물론 베젠동크 부인과 바그너를 빗대어서 한 말이다.

바그너는 1859년 11월에 '탄호이저' 수정본을 파리오페라에서 공연되기를 바라면서 파리를 찾아왔다. 바그너는 민나에게 연락하여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파리에서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나는 그래도 남편인 바그너의 요청을 받아 들여 파리로 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만나면 다투고 싸웠다. 두 사람은 모처럼 파리에서 재회하였지만 마찬가지였다. 민나는 '탄호이저' 수정본으로서는 파리에서 돈을 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리엔치'로서 돈을 벌수 있다고 믿었다. '탄호이저'는 대실패였다. 1861년 7월에 바그너는 비엔나로 갔고 민나는 다시 온천요양을 위해 바드 조덴(Bad Soden)으로 갔다가 이어서 드레스덴으로 갔다. 드레스덴에는 민나의 딸 나탈리(네티)와 민나의 부모가 살고 있었다. 이들은 바그너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862년 2월, 민나는 바그너가 살고 있는 뷔스바덴의 비브리히(Biebrich)를 깜짝 방문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그래도 부부인지라 과거는 다 잊고 서로 잘해보자고 다짐했다. 두 사람의 생활을 누가 보던지 다정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오래 갈수는 없는 일이었다. 민나가 바그너와 재회한지 며칠 후에 베젠동크 부인이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민나가 난리를 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결론만 말하면 바그너는 나중에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마치 10일 동안 지옥에 있었던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1862년 6월에 바그너는 도저히 더 이상 민나와 살수 없어서 이혼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민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민나는 오히려 바그너에게 지난 일은 다 잊고 드레스덴에 가서 함께 지내자고 계속 간청했다. 드레스덴에는 민나의 딸인 나탈리와 민나의 부모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드레스덴에 가서 살 생각이 없었다. 비록 이혼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베젠동크 편지사건 이후 민나와 바그너는 한 지붕 아래에서 산 일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혼을 한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는 민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민나에게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다. 민나 바그너는 1866년 드레스덴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민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민나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인 1870년 오래전부터 사랑하던 코지마 리스트와 결혼하였다.

민나와 바그너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알려지게 된 것은 두 사람이 주고 받은 편지가 공개되어서였다. 민나가 간직하고 있던 바그너와의 편지들은 민나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딸인 나탈리가 보관하게 되었다. 나탈리는 나중에 미국의 작가인 메리 버렐(Mary Burrell)에게 그 편지들을 대부분 팔았다. 메리 버렐은 바그너에 대한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이었다. 메리 버렐은 바그너 자서전이 나오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중에 바그너 편지들을 중심으로 하고 민나의 편지도 포함한 '버렐 콜렉션'이 1950년에 출판되었다. 버렐 여사가 나탈리로부터 매입한 민나-바그너 편지들은 현재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11.2. 코지마 바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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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 (1872)
코지마 바그너는 헝가리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겸 지휘자인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다. 리스트가 태어날 당시의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리스트는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이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가 사랑하며 낳은 자식이다. 마리 다구는 프랑스의 유명한 여류작가로서 리스트와 한동안 동거생활을 하였다. 코지마는 처음에 한스 폰 뷜로라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와 결혼하였으나 나중에 바그너와 불륜에 빠져 스위스로 도망갔고 결국 바그너와 결혼하여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에게 평생을 헌신하며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여러가지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였다. 바그너와 함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창설했고, 바그너 사후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경영한다. 또 코지마는 바그너의 후기 작품들, 특히 '파르지팔'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을 증진하는 일에 여생을 헌신했다. 코지마와 바그너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코지마는 1837년 12월 24일 북부 이탈리아의 코모 롬바르디아에서 태어났다. 코지마의 아버지는 당대의 인기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였으며 어머니는 프랑스의 여류작가로서 귀족인 마리 다구 백작부인이었다. 코지마는 어린 시절을 할머니, 그리고 가정교사와 함께 지냈다. 코지마는 20세가 되는 1857년에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지만 대체적으로 이들의 결혼생활을 사랑이 없는 것이었다. 코지마는 한스 폰 뷜로와 결혼한지 6년 후에 바그너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때 바그너는 코지마보다 24세나 연상이었다. 결국 코지마는 바그너와 1870년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1883년에 바그너가 세상을 떠나자 그로부터 20여년 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주관하였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의 레퍼토리를 바그너의 10개 오페라로 구성된 이른바 '바이로이트 캐논'(Beyreuth Canon)으로 확대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 세계적인 행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오로지 코지마 바그너의 헌신적인 기여때문이었다. 코지마가 20년에 걸친 바이로이트의 감독으로 활동하는 중에 일부 사람들이 극장무대의 혁신을 주장했지만 코지마는 반대하였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오리지널 제작 의도를 최대한으로 존중하여 오페라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코지마는 그런 주장을 그가 1907년에 은퇴한 후에도 후임자들이 계승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코지마는 독일이 문화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바그너의 주장에 대하여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코지마가 바이로이트의 감독으로 있을 때에 바이로이트는 점차 반유대주의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한 성향은 바이로이트가 출범한지 수십 년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코지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부흥발전시킨 인물로서 인정을 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페스티벌을 정치와 인종문제로 연결시키는 것이 옳으냐는 논란을 낳게 했다.

코지마의 아버지는 프란츠 리스트이고 어머니는 마리 다구이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 백작부인(Marie, Comtesse d'Agoult)을 만난 것은 21세 때인 1832년이었다. 마리 다구는 리스트보다 6년 연상으로 파리 사교계의 여류였다. 마리의 어머니는 독일인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이름난 은행가 가문의 출신이다. 아버지는 프랑스의 귀족인 라비니 백작(Comte de Lavigny)이었다. 마리는 1827년에 다구백작인 샤를르(Charles, Comte d'Agoult)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두 딸을 두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무미건조한 것이었다. 그때 마리는 리스트를 만났다. 리스트는 그 놀라운 피아노 재능으로서 파리 사교계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파리 사교계의 두 인물이 만났으니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더구나 마리와 리스트는 서로 지성적인 관심이 같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2년 후인 1835년, 마리와 리스트는 피라를 떠나 스위스로 도피를 떠났다. 파리에서 자신들에 대한 온갖 스캔들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 사람은 제네바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마리는 그해 12월에 딸을 낳았다. 코지마의 언니, 블란디네(Blandine: 블랑댕)이었다.

리스트는 유럽의 여러 곳을 다니며 연주회를 가졌다. 콘서트 피아니스트로서 경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2년이 넘게 그렇게 다녔다. 마리가 언제나 함께 다녔다. 1837년 말 쯤해서 마리는 임신말기였다. 리스트와의 두번째 아이였다. 그때 두 사람은 이탈리아 북부 롬마르디아의 코모(Como)에 있었다. 마리는 코모의 호수가에 있는 벨라지오(Bellagio) 호텔에서 12월 24일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이름을 프란체스카 게타나 코지마(Francesca Gaetana Cosima)라고 붙였다. 코지마라는 생소한 이름은 의사와 약사들의 수호성인인 성코스마스(St Cosmas)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로부터 이 아이는 코지마라고 불렸다. 리스트와 마리는 연주여행을 계속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린 블란디네와 코지마는 유모에게 맡겨서 길렀다. 당시에는 웬만한 집에서는 아기들을 유모에게 맡겨 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리스트와 마리의 세번째 아이인 다니엘은 1839년 5월 9일 베니스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다.

1839년 리스트는 계속 연주여행을 다니는 중에 마리는 두 딸을 데리고 파리로 돌아갔다. 마리가 파리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리스트와 애정도피하였다가 몇년 만에 두 딸을 데리고 파리에 나타났으니 오죽이나 말들이 많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마리가 그런 눈총을 받으면서도 파리에 온 것은 아이들을 사생아가 아니라 적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친정 어머니인 마담 드 플리비니는 아이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마리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일수 없는 여인이 되었다. 사생아인 두 딸이 증거였다. 그런 소식을 들은 리스트는 아이들을 마리로부터 떼어내어 기르는 것이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파리에 살고 있는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에게 맡겼다. 아들 다니엘은 베니스에 두고 유모가 기르도록 했다. 이렇게하여 리스트와 마리는 서로 독립적인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리스트와 마리의 관계는 점점 식어갔다.

1841년에는 리스트와 마리가 만나는 일이 별로 없게 되었다. 1845년에는 서로 아예 만나는 일도 없었다. 얘기할 일이 있으면 제3자를 통해서 얘기를 전할 정도였다. 리스트는 파리에 있는 딸들이 마리와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 마리는 리스트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온 열매들을 훔치려 한다'고 비난했다. 리스트는 딸들의 장래를 결정하는 유일한 권리는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마리는 그런 리스트와 '마치 암사자처럼' 싸우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얼마후에 그런 투쟁을 포기했다. 아마도 사회적인 체면이 어머니로서의 의무보다는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마리는 딸들과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1850년까지 5년 동안 한번도 서로 만난 일이 없었다.

두 자매 중에서 언니인 블란디네가 더 이뻤다. 코지마는 코가 유별나게 길었고 입이 넓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코지마를 '미운 오리새끼'라고 불렀다. 리스트는 자기 아이들에게 살뜰하지는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리스트는 아이들이 제대로 교육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두 딸은 마담 베르나르(Madame Bernard)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특수기숙학교에 갔다. 아들 다니엘도 역시 리체 보나파르트라는 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리스트는 36세 때인 1847년에 러시아 공자의 부인인 카롤리네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Carylyne zu Sayn-Wittgenstein: 1819-1887)을 만났다. 카롤리네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별거하고 있었다. 이듬해에는 리스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리스트와 카롤리네의 관계는 리스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카롤리네는 리스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카롤리네는 리스트의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입장이 되었다. 두 딸을 양육하는 일까지도 카롤리네의 책임이 되었다. 1850년 경에 리스트는 두 딸들이 엄마인 마리를 가끔씩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스트는 카롤리네의 조언을 받아 두 딸들이 마리와 만나지 못하도록 기숙학교에서 데려나와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고 지내도록 했다. 가정교사는 카롤리네의 가정교사였던 당시 72세의 마담 파테르시 데 포솜브로니였다. 리스트의 지시는 분명했다. 가정교사가 두 딸들의 모든 생활을 관리하고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가정교사는 두 딸들이 무슨 일을 하면 되고 무슨 일을 하면 안되는지를 일일이 결정했다. 리스트는 말년인 1881년에 외손녀 다니엘라를 위해 '크리스마스 트리 모음곡'을 작곡했다. 모두 12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모음곡이다. 그중에서 마지막 세곡은 리스트와 카롤리네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열번째 곡인 '옛적에'(Ehemals)는 리스트가 카롤리네를 처음 만났던 때를 회상하며 쓴 것이며 열한번째 곡인 '운가리슈'(Ungarisch)는 헝가리 출신인 리스트 자신을 표현한 것이고 열두번째 곡인 '폴니슈'(Polnisch)는 폴란드 출신의 카롤리네를 표현한 곡이다.

블라디네와 코지마 자매는 4년 동안 그렇게 마담 파테르시의 우산 아래에서 지냈다. 어쨋든 코지마는 마담 파테르시로부터 귀부인으로서의 예의범절을 깍득하게 배웠다. 1853년 10월에 리스트가 마담 파테르시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두 딸을 만나러 왔다. 1945년 이래 8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 때 리스트는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찾아왔다. 이때 코지마는 16세의 소녀였고 바그너는 40세의 중년이었다. 나중에 카롤리네가 낳은 딸인 마리는 그 때의 코지마에 대하여 '키가 크고 삐쩍 말랐으며 각이 진 얼굴은 그의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었다. 정말 볼품 없는 소녀였다. 다만 한가지 멋있던 것은 코지마의 길고 빛나는 금빛 머리칼이었다'고 말했다. 무도 식사를 함께 마친 후에 바그너는 나중에 '신들의 황혼'이라는 제목의 오페라가 된 작품의 마지막 막의 대본을 낭송했다. 코지마가 바그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 이 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바그너는 일기에 '두 소녀는 매우 수줍어 했다'라고만 썼다.

리스트는 딸 들이 점점 성장하자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딸들을 베를린으로 보내 살도록 했다. 파리에 있던 마리가 극구 반대했음은 물론이었다. 두 딸들은 베를린에서 프란치스카 폰 뷜로 부인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프란치스카 폰 뷜로 부인은 리스트가 가장 총애하는 제자인 한스 폰 뷜로의 어머니이다. 아들 한스는 두 딸들의 음악교육을 맡았고 한스의 어머니인 프란치스카 폰 뷜로 부인은 두 딸들의 일반적인 생활관습에 대한 교육을 맡았다. 한스 폰 뷜로는 원래 법률을 공부했으나 1850년 8월에 리스트가 바이마르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의 초연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법률공부를 집어 치우고 평생을 음악가로서 헌신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한스는 피아노를 공부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고 프란츠 리스트에게 배웠다. 리스트는 한스의 재능을 보고 언젠가는 위대한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리스트의 두 딸의 음악교육을 맡은 한스는 그 중에서도 코지마의 피아노에 대한 재능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버지인 리스트의 스탬프를 찍은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로 테크닉이 뛰어났다. 한스와 코지마는 어느덧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한스와 코지마는 1857년 8월 18일 베를린의 성 헤트비히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신혼여행 중에 취리히 인근에 살고 있는 바그너를 찾아가기도 했다. 리스트도 함께 갔었다. 코지마는 그 다음해에도 스위스의 바그너를 찾아갔었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코지마는 바그너에게 충격을 주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집을 떠나면서 바그너의 발 아래에 몸을 던지고 바그너의 손을 부여 잡고 눈물을 흘리고 키스를 퍼부었다. 바그너는 코지마의 뜻밖의 행동에 몹시 당황하였다. 코지마의 사랑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파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한 코지마로서는 베를린에서의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였다. 코지마는 베를린이 시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무슨 모임이 있더라도 외톨이 처럼 지내기 일수였다. 코지마는 처음에 남편 폰 뷜로의 경력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코지마는 남편에게 작곡도 해 보라고 권면하였다. 어느날 코지마는 폰 뷜로에게 대본을 하나 주며 오페라로 작곡해 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코지마가 직접 쓴 대본으로 아서왕의 궁정 마법사인 멀린(Merlin)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었다. 폰 뷜로는 지휘자로서 너무 스케줄이 많았다. 그럴수록 코지마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코지마는 프랑스어 잡지인 Revue germanique의 번역자 겸 기고가로서 시간을 보냈다. 코지마는 1860년 10월 12일에 첫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코지마는 사망한 남동생인 다니엘을 추모하여서 딸의 이름을 다니엘라(Daniela)라고 지었다. 1862년에 코지마는 또 하나의 비통한 경험을 해야 했다. 유일한 언니인 블란디네(블랑댕)이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블란디네는 1857년에 파리의 변호사인 에밀 올리비에라는 사람과 결혼했었다. 코지마와 블란디네는 어릴 때부터 자매 이상으로 함께 자랐기 때문에 블란디네의 갑작스런 죽음은 코지마로서 큰 충격이었다. 블란디네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863년에 코지마는 두번째 딸을 낳았다. 언니 블란디네를 생각하여서 딸의 이름을 블란디나(Blandina)라고 지었다.

바그너와 폰 뷜로는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폰 뷜로가 리스트의 뛰어난 제자이기도 했지만 바그너도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인정하여 여러 일을 맡겼던 터였다. 폰 뷜로는 1858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보컬 스코어를 준비하는 일을 맡았다. 1862년에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스코어를 필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폰 뷜로는 1862년 여름에 가족과 함께 비브리히(Biebrich)에 있는 바그너의 거처를 방문하여 함께 지냈다. 나중에 바그너는 당시 코지마와 작별을 하면서 '발퀴레'에서 '보탄의 작별'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1862년 10월, 블란디네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바그너와 폰 뷜로는 라이프치히의 콘서트에서 나누어 지휘를 하게 되었다. 코지마도 리허설을 참관하고 있었다. 바그너는 나중에 '그때 코지마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면서 코지마에 대하여 더 할 수 없는 애정을 느끼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1863년 11월에 바그너는 베를린을 방문하였다. 당연히 코지마를 만났다. 폰 뷜로는 어떤 콘서트의 리허설 때문에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택시를 타고 오래오래 드라이브하면서 서로의 감정을 비로소 털어 놓았다. 바그너는 나중에 '우리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으면서 우리가 서로 혼자가 아니라 함께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고 썼다.

1864년에 들어서서 바그너는 새로운 후원자로 인하여 그동안의 구차했던 생활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 국왕이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빚을 모두 갚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생활비도 지급하였다. 루드비히는 바그너에게 슈타른베르크(Starnberg) 호수가에 별장을 주었고 뮌헨에는 커다란 저택을 주었다. 바그너의 요청에 의해 폰 뷜로는 루드비히의 궁정피아니스트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폰 뷜로와 코지마는 뮌헨으로 이사왔다. 바그너의 저택 근처에 집을 구하여 지내게 되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개인비서처럼 일하기 시작했다. 폰 뷜로브가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코지마는 바그너와 함께 슈타른베르크 호수가의 별장에 가서 1주일도 좋고 열흘도 좋다고 하면서 마냥 함께 지냈다. 어떤 날 폰 뷜로가 바그너의 집을 찾아갔더니 코지마가 바그너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폰 뷜로는 코지마에게 어찌된 일인지 묻지 않았으며 바그너에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코지마가 뮌헨으로 와서 바그너와 밀회를 시작한지도 아홉 달이 지났다. 1865년 4월 10일, 코지마는 딸을 낳았다. 이졸데라는 이름을 붙였다. 폰 뷜로브는 그 아기가 분명히 자기의 딸이 아니며 바그너의 딸인 것을 알면서도 이졸데를 자기의 딸로서 받아 들이고 코지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적법한 아이로서 출생신고를 하였다. 바그너는 4월 24일 이졸데의 세례식에 버젓이 참석하였다. 그해 6월 10일에 폰 뷜로브는 뮌헨의 궁정오페라(Hofoper)에서 공연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하였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의 총애를 받았지만 바이에른 궁정에서는 바그너에 대하여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바그너는 내각들에 의해 바그너는 추방된다. 바그너는 몇 달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1866년 3월에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코지마가 뒤따라서 제네바로 왔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루체른으로 함께 가서 호수가에 커다란 저택을 구해서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빌라 트리브센(Villa Triebschen)이다. 임대료는 루트비히가 준 돈으로 냈다. 바그너는 빌라 트리브센에 대한 임대계약을 맺자마자 폰 뷜로와 그의 아이들을 여름에 루체른의 자기 집에 와서 지내라고 초청했다. 폰 뷜로는 이졸데를 포함한 아이들과 함께 바그너의 집에서 여름을 보내고 아이들과 함께 돌아갔다. 하지만 그후 폰 뷜로가 바젤에 일이 있어서 떠나자 코지마는 즉시 루체른의 빌라 트리브센으로 달려왔다.

이때 쯤해서 폰 뷜로는지금까지는 알면서도 모른체 했지만 이제는 도저히 자기 아내와 바그너와의 관계를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폰 뷜로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1865년 1월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진전될 줄을 몰랐다'고 말했다. 바그너는 코지마와의 관계가 스캔들로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루트비히을 속여서 1866년 6월에 성명서를 내도록 했다. 궁정지휘자인 폰 뷜로는 신성한 결혼생활을 유지되도록 더욱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인 1867년 2월, 코지마는 빌라 트리브센에서 두번째 딸을 낳았다. 에바였다.
1868년 10월에 코지마는 폰 뷜로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당연히 폰 뷜로는 동의하지 않았다. 폰 뷜로는 집안 식구들에게 코지마가 바그너와 함께 있기 위해 장기간 집을 비운 것을 베르사이유에 살고 있는 이복언니의 집에 가서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듬해인 1869년 6월에 코지마는 바그너와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세번째 아이를 출산했다. 아들이었고 지그프리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후 코지마는 폰 뷜로에게 편지를 보내어 마지막으로 이해를 촉구하였다. 마침내 폰 뷜로브도 어찌할 수 없어서 코지마의 이혼요청을 받아 들일수 밖에 없었다. 이혼이 법적으로 성립된 것은 1870년 7월 18일이었다. 이렇듯 지연된 것은 베를린 법원에서 수속에 시간이 걸려서였다.

폰 뷜로는 코지마와의 이혼이 성립되자 의도적으로 바그너와 코지마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냈다. 폰 뷜로브는 그후로 다시는 바그너와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코지마를 다시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만난 것은 이혼한 후로부터 11년이 지난 때였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1870년 8월 25일 루첸른의 어떤 장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코지마는 일기에서 그날의 일을 'R이라는 이름을 간직하는 것이 보람된 일이 되기를'라고 적었다. R은 Richard를 뜻하는 것이었다. 코지마의 아버지인 리스트는 두 사람의 결혼식을 미리 통보받지 못했다. 신문을 보고서 처음 알았다.

코지마는 바그너에게 바그너의 야심작 니벨룽의 반지 페스티벌의 장소를 바이로이트로 제시했다. 백과사전을 보고 바이로이트라는 지명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바그너는 1835년에 바이로이트를 잠깐 방문했던 일이 있었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가 지역적으로 독일의 중심부분에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바이로이트는 라이프치히와 뮌헨의 중간 지점에 있다. 실제로 지도를 펴놓고 보면 베를린-라이프치히-바이로이트-뮌헨이 거의 일직선 상에 놓여 있는 것을 알수 있다. 바그너는 또한 바이로이트의 조용한 분위기에 매력을 느꼈다. 바이로이트는 지나치게 유행을 따르지 않는 도시였다. 바그너는 코지마와 함께 1871년 4월에 현장조사를 위해 바이로이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즉시 그곳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결정했다. 이와함께 바이로이트가 장래 두 사람의 영원한 고향이 될 것으로 계획했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서 2년 후인 1873년에 오페라 축제를 열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때 링 사이클 전편을 공연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루드비히는 새로운 극장 건설을 위한 재정지원을 거절했다. 착공이 늦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이와 함께 1873년으로 발표되었던 개관도 어쩔수 없이 지연되지 않을수 없었다. 원래 예정일인 1873년 3월까지는 총건설비의 3분의 1정도 밖에 모금되지 않았다. 건설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바그너는 루드비히에게 다시 간청을 하였다. 루드비히는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던지 자금을 대주었다. 전체 건설 계획에는 바그너가 가족들과 함께 살 저택인 빌라 발프리트(Villa Wanfried)의 건설도 포함되어 있다. 빌라 반프리트는 1874년 초에 완성되어 그해 4월 18일에 코지마와 아이들이 입주하였다. 극장은 1875년에 완공되었다. 페스티발은 아무래도 준비과정이 있어서 1876년으로 미루어졌다. 바그너는 극장건설에 따른 그 동안의 노고를 코지마에게 다음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돌 하나하나는 나와 당신의 피로서 붉게 물들어 있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의 건설 기간 중에 아버지인 리스트에게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로 개종하겠다고 고백하였다. 그때 리스트는 이미 가톨릭의 어떤 작은 수도회에 속한 성직자가 되어 있었다. 코지마가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것은 바그너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유지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코지마는 1872년 10월 31일 개신교로의 전례를 받았다. 바그너는 코지마의 이같은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일기에 '세상의 어떤 권세가 이보다 더 위대할 수 있는가? 과연 종교라는 것은 사랑이다.'라고 썼다. 1876년 3월에 바그너와 코지마는 베를린에 있었다. 이들은 파리에서 마리 다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코지마의 생모였다. 코지마는 파리에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딸 다니엘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마리 다구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다만, 나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한 여인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루트비히가 헤르만 레비를 '파르지팔' 초연의 지휘자로 강력 천거하자 바그너는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였다가도 현실을 생각하여 루드비히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코지마는 두고두고 레비의 등장을 못마땅해 했다. 2회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 막을 내리자 바그너는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베니스로 갔다. 이번에는 일행들이 많았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갔고 하인들도 갔다. 손님들도 자주 올것이므로 팔라쪼 벤드라민 칼레르기(Palazzo Vendramin Calergi)에 있는 넓은 아파트를 빌렸다. 그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코지마의 걱정은 바그너의 건강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날로 악화되어 갔다. 심장경련이 자주 일어났다. 코지마가 11월 16일에 쓴 일기를 보면 '오늘은 경련이 없었다'고 적었다. 경련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를 알게 해주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두어 달 후인 2월에 코지마가 쓴 글을 보면 바그너는 푸케(Fouque)의 소설인 운디네(Undine)를 읽었으며 그 다음에는 '라인의 황금'에 나오는 라인 처녀들의 탄식을 피아노로 연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그너의 건강이 어느 정도 호전되었는가 싶었지만, 뜻하지 아니하게 캐리 프링글(Carrie Pringle) 쪽에서 문제가 터졌다.

캐리 프링글은 '파르지팔'에 출연했던 예쁘장하게 생긴 영국의 소프라노였는데 바그너와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 말이 코지마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2월 13일 아침에 바그너와 코지마는 캐리 프링글 문제로 크게 말다툼을 했다. 점심 때 쯤해서 바그너는 결정적인 심장마비 증세를 보이더니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시신 옆에 앉아 24시간을 보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튿날과 사흗날에 걸쳐 바그너의 시신에 방부처리를 대한 방무처리 작업이 진행되었다. 코지마는 그 과정도 거의 빠지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어떻게 될까 걱정했지만 코지마는 개의치 않았다. 코지마는 딸들에게 가위를 가져와서 자기 머리칼을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코지마는 작은 쿠션을 만들어 안에 머리칼을 넣고 바그너의 가슴에 얹었다. 2월 16일에 바이로이트로 운구를 시작했다. 이틀 후인 2월 18일에 바그너의 시신은 반프리트에 도착했다. 간단한 종교의식을 치른 후 바그너의 시신은 반프리트의 뜰에 묻혔다. 코지마는 하관할 때에 집 안에만 있었다. 코지마는 모든 장례절차가 끝나고 모두 돌아가자 그때서야 나와서 바그너의 묘지에 엎드려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나중에 아들 지그프리트가 가서 겨우 모셔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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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코지마는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아이들과 긴히 할 얘기가 있으면 쪽지에 적어서 보내고 쪽지에 대답을 받았다. 그러기를 몇 달이나 했다. 바그너의 장례식과 관련하여 코지마는 수많은 조전을 받았다. 그 중에는 한스 폰 뷜로의 것도 있었다. '수녀님, 그래도 살아야 합니다'(Soeur il faut vivre)라고 적은 것이었다. 폰 뷜로가 코지마를 수녀라고 짐짓 지칭한 것은 리스트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 반열에 들어간 것과 연관하여 말한 것이라고 본다.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유언이나 지시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다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누가 맡아서 꾸려 나가야 할지 정말 걱정이다. 적당한 사람이 없다. 믿을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라고 적어 놓았던 것을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은 분명했다. 바그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건 걱정이 아니라 현실로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코지마는 바그너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슬픔에 외부사람들과 어떠한 연락도 끊은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저 계속 혼자서만 지내고 있었다. 코지마가 그나마 아주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은 자기의 아이들, 그리고 친구이며 조언자인 아돌프 폰 그로쓰(Adolf von Gross)뿐이었다. 그리하여 1883년의 페스티벌은 코지마의 참여 없이 진행되었다. '파르지팔'이 12회 공연되었다. 에밀 스카리아(Emil Scaria)가 주관했다. '파르지팔'에서 구르네만츠를 맡은 베이스였다. 에밀 스카리아는 '파르지팔'에 출연하면서 예술감독의 일을 함께 맡아 수행했다. 1883년의 제3회 페스티벌의 캐스트는 1882년과 거의 같았다. 그리고 헤르만 레비가 계속 지휘를 했다.
1883년의 페스티벌이 끝난 후, 코지마는 어떤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장문의 편지 한장을 받았다. '파르지팔'의 공연이 바그너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연출되지 못했다는 점을 줄줄이 지적하고 코지마에게 상황이 이렇게 되어 가는데도 얼굴도 내비치지 않으니 사람이 그러면 되느냐고 힐책하는 내용이었다. 코지마는 그 편지를 읽고 심기일전하였다. 코지마는 지난 몇 달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그냥 누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페스티벌의 합창지휘자인 율리우스 크니제(Julius Kniese)가 전부터 말해왔던 사항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를 음악감독을 맡도록 하고 전남편인 한스 폰 뷜로를 수석 지휘자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리스트와 폰 뷜로가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그건 생각으로만 그쳤다. 결국 코지마는 외부 사람들에게 페스티벌의 총책임을 맡긴다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바그너의 유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코지마는 우선 지적재산을 포함한 바그너가 남긴 일체의 재산을 자기와 아들 지그프리트가 바그너의 유일한 법적 상속인임을 확실히 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페스티벌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막을수 있다고 믿었다.

1885년이 되었다. 드디어 코지마는 1886년의 페스티벌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바이로이트의 총감독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로부터 코지마는 1907년까지 22년 동안 바이로이트의 총감독으로서 활동했다. 코지마는 이 기간동안 13회의 페스티벌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이라고 하는 바그너 작품만의 레퍼토리를 정리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공연되는 레퍼토리를 규정한 것이다. 코지마는 고대 로마시대의 3두정치처럼 레비, 리히터, 펠릭스 모틀의 세 사람을 공동 음악감독으로 삼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1894년 레비가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레비가 떠난 후에는 리히터와 모틀이 코지마가 총감독으로 있는 동안 함께 일했다. 한스 폰 뷜로는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코지마는 경영에도 큰 재능이 있어서 감독과 관리 아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놀랍게도 흑자운영을 이루었다. 매년 개최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입장료 수입 등으로 바그너의 유가족들을 부유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코지마는 페스티벌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창의적으로 제작코자했다. 그렇지만 그의 주인인 바그너가 원했고 지시했던 사항들을 충실히 따랐다. 코지마는 '우리가 무얼 새로 창조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벽을 기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코지마가 바그너의 복사품처럼 행동하자 비판들도 따랐다. 발전적인 모습이 없다는 비판이었다. 조지 버나드 쇼[17]같은 사람은 코지마를 '바그너를 회상하는 자들의 우두머리'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조지 버나드 쇼는 '바이로이트 스타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참을수 없을 만큼 구시대적인 전통을 간직한 모임'이라고 말하고 절반은 현학적이며 절반은 역사정치적인 자세와 제스추어로 물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주인공들의 노래는 어느때는 참을만 하지만 어느때는 지루하다고 말했다. 음악을 대본과 딕션과 주인공의 이미지 표현에 종속시키는 것은 바이로이트 스타일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코지마는 명확한 발성법 원칙을 마치 맹목적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같은 스타일로 바꾸는 노력을 했다. 그 결과 거친 연설조의 스타일이 생겨났다. 나중에 음악학자들은 이같은 스타일을 '바이로이트 짖어대기'(Bayreuth bark)라고 불렀다.

코지마의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는 코지마가 페스티발을 주관하는 것을 보러 일부러 왔다. 리스트는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코지마는 리스트를 돌보아 주지 못하고 페스티벌에만 신경을 써야 했다. 리스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공연을 본 후 쓰러졌다. 그리고 며칠 후인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장례식을 모두 주관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에서 리스트를 추모하기 위한 어떠한 콘서트의 개최도 거절했다. 바이로이트는 바그너의 음악만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1888년에, '탄호이저'는 1891년에 바이로이트의 캐넌(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로엔그린'은 1894년에, '방랑하는 화란인'은 1901년에 캐논에 포함되었다.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는 1894년에 사임하였다.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는 1896년의 페스티발에 지휘자로서 데뷔하였다. 링 사이클 중에서 한 편을 지휘하였다. 지그프리트는 코지마가 총감독으로 있는 동안에 바이로이트의 고정 지휘자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더한 반유대주의였지만[18] 바이로이트를 위해서 그런 편견을 잠시 선반에 얹어 두었다. 유대인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를 페스티발을 위해 상당 기간 활용했던 것도 그런 조치의 일환이었다.[19] 실제로 코지마는 레비의 음악적 재능을 크게 존경하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레비를 계속 낮게 보았고 자기의 아이들이 레비를 흉내내고 조롱하는 것을 그냥 두었다. 코지마는 친구에게 '아리안과 유대인의 혈통은 아무것도 연결된 것이 없다'고 말하며 기본적으로 자기의 반유태주의적 생각이 변함이 없음을 밝혔다고 한다. 코지마는 그러한 신조아래 바그너를 존경했던 구스타프 말러를 바이로이트에 초청하여 지휘를 맡기지는 않았다. 말러는 유태계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바 있다. 다만, 코지마는 말러에게 예술적인 사항에 대하여 여러가지 자문을 구하기는 했다.
코지마는 '파르지팔'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고 컸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에서만 공연하도록 정했다. 코지마는 그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코지마는 '파르지팔'에 대한 바이로이트의 전권을 보호하기 위해 루트비히 왕의 인정을 받았다. 1886년에 루드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바이로이트의 그런 권리가 잠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루드비히의 후임인 오토 왕은 바이로이트만이 '파르지팔'을 공연할 수 있다는 관례를 인정할 수 없다고 나선 것이다. 코지마와 친구이며 자문관인 아돌프 폰 그로쓰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오토의 그런 주장을 없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독일의 저작권법에 의하면 작가의 사후 30년 동안만 저작권을 보호받을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사후 30년이 되는 1913년에 저작권이 종료된다는 것이다.

바이에른 법원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것은 독일의 법에 예속이 되어야 했다. 코지마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이미 1901년에 '파르지팔'의 저작권을 50년으로 연장해 놓고자 노력했다. 코지마는 제국의회(Reichstag)의 의원들에게 집요하리만큼 로비를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빌헬름 2세 황제로부터 지지를 약속 받았다. 그러나 코지마의 이런 노력은 독일의 저작권법을 고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1903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미국과 독일간의 저작권에 대한 어떠한 합의도 없음을 이용하여 '파르지팔'을 그해 말에 무대에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그 소식을 들은 코지마는 무척 분노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연하겠다는 것을 제재할 수 없었다. 1903년 12월 24일에 뉴욕에서 '파르지팔'이 공연되었다. 대단한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둔 공연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은 '파르지팔'은 연속 11회나 공연하였다. 코지마는 이것이 '성폭행'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코지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메트로폴리탄을 증오하였다.
코지마는 첫 남편인 한스 폰 뷜로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고 바그너와의 사이에서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폰 뷜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의 이름은 블란디나와 다니엘라이다.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은 이졸데와 에바이며 아들은 지그프리트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까지 코지마의 딸 중에서 셋이 결혼을 했다. 블란디나는 비아지오 그라비나 백작과 결혼했다. 1882년 첫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끝나는 날 결혼식을 올렸다. 바그너도 참석했다. 둘째 딸인 다니엘라는 1886년 7월 3일에 역사학자인 헨리 토드(Henry Thode)와 결혼했다.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이었다. 그리고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자녀인 이졸데는 젊은 지휘자인 프란츠 바이더(Franz Beider)와 1900년 12월 20일에 결혼했다. 막내 딸인 에바에게는 여러 혼처가 있었다. 하지만 에바는 홀몸이 된 어머니 코지마와 함께 지내겠다고 하며 청혼들을 모두 거절했다. 에바는 코지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개인비서로서, 친구로서, 딸로서 지냈다.
1906년의 페스티벌을 주관하고 난 후 고단하여서 쉬고 있던 코지마는 랑엔부르크에 있는 친구인 호엔로에(Hohenlohe) 공자를 방문하고 있던 12월 8일에 일종의 심장마비 증세로 고통을 겪었다. 병명은 Adams-Strokes seizure라고 했다. 그러기를 몇 달을 보냈다. 이듬해인 1907년 5월에 의사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코지마에게 더 이상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일을 맡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페스티벌의 책임은 아들인 지그프리트에게 이관되었다. 지그프리트를 바이로이트의 후임자로 임명하는데에는 가족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졸데의 남편인 지휘자 바이더는 지휘자로서 지그프리트의 탁월한 능력을 감안할 때에 적임자라고 주장했다. 마침 당시에 이졸데와 바이더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바그너의 유일한 손자였다. 이졸데와 바이더는 자기들의 아들이 지그프리트의 뒤를 이어 바그너 왕조를 이어나갈 사람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일단은 지그프리트를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지그프리트는 40세가 가까웠는데도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코지마와 지그프리트는 이졸데와 바이더의 주장을 일축했다. 만일 지그프리트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가 바이로이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후로 바이더는 바이로이트에서 다시는 지휘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바이더와 코지마의 관계는 아주 나빠져서 나중에는 마치 원수처럼 지냈다.

코지마는 빌라 반프리트의 뒷방에서 지냈다. 손님들도 자주 찾아오는 앞쪽의 거실은 복잡하므로 그곳을 피해서였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유품들과 가족들의 사진들로 둘러싸여 지냈다. 페스티발의 주관을 책임 맡은 지그프리트는 처음에는 코지마를 찾아와 협의를 하였으나 코지마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코지마의 도움 없이 혼자서 주관해 나갔다. 지그프리트는 코지마와 바그너가 만들어 놓았던 몇가지 제작상의 전통을 바꾸었다. 하지만 바그너가 처음에 지시했던 사항들은 절대로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존속토록 하였다. 예를 들면 '파르지팔'의 무대장치도 비록 낡아졌지만 최초의 무대장치를 그대로 사용했다. 지그프리트가 변경한 것은 바그너의 오리지널 제작 지시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다른 식구들도 한결 같이 '주인의 눈길이 머물고 있는 그대로'를 주장하였다.
1908년 12월에 막내 딸 에바가 드디어 결혼했다. 에바는 41세였다. 상대방은 영국 출신의 사학자인 휴스턴 스튜어트 챔벌레인이었다. 챔벌레인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문화적 순수성이라는 원칙에 기본을 둔 독일국수주의에 대하여 광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조를 채택한 인물이었다. 챔벌레인은 코지마와 1888년부터 알고 지냈다. 그러나 바그너와의 관련은 188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다. 그때 그는 '파르지팔'의 초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실상 챔벌레인은 처음에는 코지마의 큰 딸인 블란디나에게 청혼을 하였다가 안되니까 다음에는 이졸데에게 청혼을 하였고 그것도 실현이 안되지 에바에게 끈질기게 청혼하여 결국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 챔벌레인에 대하여 코지마는 감정적으로 상당한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챔벌레인의 신조에 대하여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코지마는 그를 마치 아들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하게 생각하였다. 에바와 결혼한 챔벌레인은 바그너 서클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다. 특히 이졸데와 그의 남편인 바이더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주도권을 잡고 나아가 바그너의 재산을 자기들이 것으로 만들고자 했을 때 이를 저지한 인물이 바로 챔벌레인이었다. 1913년에 이졸데는 지그프리트와 함께 바그너 재산의 공동 상속자가 되는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는 패소였다. 그후 이졸데는 191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코지마와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 않고 지냈다.
1915년에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가 드디어 결혼하였다. 지그프리트가 45세 때였다. 신부는 18세의 비니프레드 월렴스(Winifred Williams)였다. 바그너의 친구도 되고 리스트의 친구도 되는 칼 클린드워스(Karl Klindworth)의 수양 딸이었다. 1917년 1월 5일에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드의 첫 아들인 빌란트가 태어나자 코지마는 바그너가 사용했던 피아노 앞에 앉아 그 옛날 바그너가 자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지그프리트 이딜(Siegfried Idyll)을 연주하였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막을 올리지 못했다. 페스티벌은 1차 대전과 그 이후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혼돈으로 1924년까지 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 국수주의적인 사상이 솟구쳐 오르자 페스티벌을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일어났다. 바그너의 열렬한 찬미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이미 1923년에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 바그너의 가족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때 코지마는 사정이 있어서 히틀러를 만나지 못했다. 아무튼 그후로 히틀러는 바이로이트의 단골 손님이 되었다. 에바의 남편인 챔벌레인과 지그프리트의 부인인 미니프레드는 열렬 나치당원이 되었다. 1924년에 재개된 페스티벌은 그야말로 공공연한 나치 주요 간부들의 대집회와 마찬가지였다. 당시 86세였던 코지마는 참으로 오랜만에 '파르지팔'의 드레스 리허설에 참석했고 이어 7월 23일의 오프닝 공연에도 1막까지 참관했다. 이때 타이틀 롤인 파르지팔은 테너 로리츠 멜키오르가 맡았었다.
코지마는 1927년, 90세의 생일을 치르고 나서 건강이 눈에 보이도록 악화되었다. 바이로이트 시는 코지마의 90세 생일을 기념하여서 시내에 있는 거리 중의 하나를 코지마거리라고 명명했다. 가족들은 그런 사실을 일부러 코지마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연히 흥분하면 건강에 더 영향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후에 코지마는 침대에만 누워 있었고 눈은 멀어서 아무것도 볼수 없었으며 기억력도 오락가락해졌다. 코지마는 1930년 4월 1일, 향년 92세로 숨을 거두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47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코지마의 시신은 반프리드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코부르크(Coburg)로 운구되어 그곳에서 화장을 했다. 1977년, 코지마가 세상을 떠난지 47년 후에, 코지마의 유분은 코부르크에서 반프리드로 옮겨져 반프리트 정원에 있는 바그너의 묘지에 합장되었다.

12. 바이로이트

12.1. 극장

바그너는 자신의 일생의 역작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를 작곡하면서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공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극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세기 오페라 극장이라는 것은 작품을 감상하는 장소라기보다는 귀족, 부르즈와, 엘리트들의 사교의 장소로서의 기능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곳에서 자신의 <반지>를 상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이로이트'라는 장소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를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에서 시작된 필연의 결과였다. 바이에른 주 오버프랑켄 군의 이 작은 도시에는 (오늘날에도 도시의 인구는 7만 5천 남짓이다) 1748년 주세페 비비에나의 설계로 지어진 호화로운 바로크 극장이 있었고 바그너는 이 극장의 설비가 매우 훌륭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반지>의 상연이 가능한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기 위해 답사한 결과 자신의 새로운 작품을 상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극장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도시는 바그너의 마음에 들었고 마침내 교외의 숲속 언덕에 극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 설계와 운영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의 건설을 통해 몇가지 중요한 변화를 추진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는 바그너가 그의 오페라만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건설한 극장이다. 바그너는 이 극장을 거의 자신이 직접 설계했다. 다만, 과거 친구로서 건축가인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의 아이디어를 많이 참고하였다. 바그너가 채택한 변화에서 대표적인 것은 공연 중에 오디토리엄(객석)을 어둡게 하는 것,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관중들이 볼수 없는 피트(무대 바로 앞의 오케스트라석)에 두는 것이다. 바이로이트의 오케스트라석은 다음 두가지 면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첫째는 제1바이올린을 지휘자의 오른쪽에 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제1바이올린을 지휘자의 왼쪽에 둔다. 왜 오른쪽에 두느냐면 제1바이올린의 소리가 일단 무대쪽으로 갔다가 다시 객석으로 반향되어 오도록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제1바이올린의 음향이 우선 무대쪽으로 간다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로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노래를 부를수 있다는 설명이다. 두번째 특징은 콘트라베이스와 첼로, 그리고 만일 하프를 하나 이상 사용하게 된다면 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오케스트라 피트의 양쪽에 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테레오 개념이다.
  • 예술적 고려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이 ‘총체 예술(Gesamtkunstwerk)’이 되기를 원했고 따라서 작품 외에 다른 것에 관객의 주의를 빼앗기는 것은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오페라 하우스들이 대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것에 비해 이 극장은 작은 도시의 교외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어 관객들은 단지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한 그 목적만으로 이 도시를, 극장을 찾게 된다. 숲 속으로 난 길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저 멀리에 붉은 벽돌로 지은 극장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관객에게 마치 성지를 방문하거나 신전에 들어서는 것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하며 오로지 그에 음악에 대한 헌신만이 장소가 요구하는 모든 것이다.
  • 극장의 구조
극장의 설계에는 바그너 자신이 직접 관여하였으며 그는 이 극장을 설계하는데 있어 몇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행하였다. 우선 관객석은 그리스 극장을 모델로 하고 있어 무대를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객석이 배열되어 있으며 박스석이나 로얄석등은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바그너는 오케스트라 피트를 무대 밑으로 집어넣는 그야말로 독창적인 생각을 해 냈는데 이에 의해 관객은 오케스트라나 지휘자에 주위를 빼앗기는 일없이 오직 무대에만 시선을 집중할 수 있으며 관악기의 소리는 피트 내를 한번 돌아 현악기의 소리와 섞여 피트 밖의 관객에게 전달되므로 매우 독특한 이른바 `바이로이트 사운드'라는 것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극장의 내부 공간은 대부분 나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바이올린 등의 악기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종류의 것으로 실로 이 극장 자체가 하나의 악기라고도 할 수 있다. (L바이로이트에서는 통상적인 오페라 하우스에서처럼 지휘자가 등장할 때 관객이 박수를 치거나 하지 않는다. 극장 내부가 완전히 어두워지면 관객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틈에 이미 지휘자는 등장해 있고 서곡이나 전주곡이 시작되면서부터 마지막까지 관객이 볼 수 있는 유일한 빛은 오직 무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재정이 부족하였으므로 외부 장식은 일체 배제하였으며 이는 이 극장에 `벽돌공장‘이라는 별명이 붙는 데 일조하였다. 극장의 기공식은 1872년 5월 22일 자신의 59번째 생일에 있었고 이날 바그너는 `구 바이로이트 극장' (쥬제페 비비에나의 18세기 극장.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극장이 `새로운 극장'이므로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지휘하였다.

12.2.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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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7월 ~ 8월) 독일 바이에른주 북쪽에 위치한 소도시 바이로이트(Bayreuth)에서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바그너의 음악과 작품만을 연주, 상연하는 특별한 페스티벌이다. 이 축제에선 무조건 바그너의 작품만을 다룬다. 예를 들자면 바그너의 부인 코지마의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는 코지마가 페스티발을 주관하는 것을 보러 일부러 왔다. 당시 리스트는 건강이 몹시 악화되어 있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공연을 본 후 쓰러지고 며칠 후인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코지마는 리스트의 장례식을 모두 주관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에서 아버지 리스트를 추모하기 위한 어떠한 콘서트의 개최도 거절했다. 바이로이트는 바그너의 음악만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1876년, 4부작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에 올리면서 시작된 이 페스티벌은 독일과 유럽을 비롯 전세계의 바그너 추종자(일명 ‘바그네리안’)들이 성지순례하듯 모여들어 바그너의 악극을 관람하는 바그너 예술의 메카이다.
바그너 사후 그의 부인 코지마가 페스티벌을 주관했으며, 그녀가 죽은 뒤에는 아들 지그프리트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병약한 지그프리트가 죽자, 그의 부인(즉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드가 바이로이트를 이끌었는데, 그녀와 히틀러의 밀월관계는 예술과 정치의 함수관계를 이야기하는데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고전적 레퍼토리이다. 2차대전이 끝나자 나치 부역혐의를 받던 비니프레드는 페스티벌의 주도권을 두 아들 - 빌란트와 볼프강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51년부터 재개된 페스티벌은 정치적 색깔을 완전히 배제하고 바그너 드라마를 심리적인 측면에서 파헤쳐 나갔으니, 이를 일컫어 ‘新 바이로이트 양식’이라고 한다. ‘신 바이로이트 양식’을 주도했던 빌란트 바그너가 죽자(66년) 동생 볼프강 바그너가 전권을 쥐게 된다. 볼프강은 동시대의 다양한 해석조류들을 바이로이트 무대에 과감히 수용하였으며, 페스티벌의 대중화를 위해서도 크게 힘써 많은 음반과 영상물들이 만들어졌다.

12.3. 바이로이트 캐논

Bayreuth canon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는 1907년까지 22년 동안 바이로이트의 총감독으로서 활동했다. 코지마는 이 기간동안 13회의 페스티벌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바이로이트 캐논'(Bayreuth canon)이라고 하는 바그너 작품만의 레퍼토리를 정리하였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에서 공연되는 레퍼토리를 규정한 것이다. 코지마가 페스티발을 주관하는 동안 '파르지팔'은 단골메뉴로서 매년 바이로이트의 무대에 올려졌다. 예외가 있었다면 1896년이었다. 그 해에는 '링 사이클'에만 주력하였기 때문이었다. 코지마가 1886년에 페스티발을 주관할 때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처음으로 캐논에 포함하였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1888년에, '탄호이저'는 1891년에 바이로이트의 캐넌에 포함되었다. '로엔그린'은 1894년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1901년에 캐논에 포함되었다.
<rowcolor=#000> 작품이름 바이로이트 초연 최근 바이로이트 공연 시즌[20] 바이로이트 공연 총 횟수[21]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901년 7월 22일 2018년 229회
탄호이저, Tannhäuser1891년 8월 22일 2014년[22] 220회
로엔그린, Lohengrin1894년 7월 20일 2018년 237회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1876년 8월 13일 2017년 229회
발퀴레, Das Walküre1876년 8월 14일 2018년 229회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86년 7월 25일 2018년 244회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1886년 7월 25일 2018년 244회
지그프리트, Siegfried1876년 8월 16일 2017년 228회
신들의 황혼, Götterdämmerung|1876년 8월 17일 2017년 232회
파르지팔, Parsifal1882년 7월 26일 2018년 536회

13. 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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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반유대주의 논란

파일:Wagnerbelike.jpg
바그너의 사회진화론적 관점을 풍자한 그림. 뿔나팔을 부는 유대 랍비의 모습에서 지휘봉을 든 바그너의 모습으로 '진화'하는 것에 빗대었다.
바그너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 음악가들을 자주 비난했다. 독일 문화에 유해한 이방인적인 요소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그너가 처음으로 공공연히 유대인들을 비난한 에세이는 1850년, 그가 37세 때에 K. Freigedank(K. 자유생각)이라는 필명으로 '음악신보'(Neue Zeitschrift fur Musik)에 기고한 '음악에서의 유대적 성향'(Das Judenthum in der Musik)이었다. 그의 에세이는 의도적으로 유대인 작곡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증오와 혐오를 설명한 내용으로 바그너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펠릭스 멘델스존자코모 마이어베어를 대상으로 삼았다. 바그너는 독일 국민들이 아무리 유대인들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말하고 쓴다고 하더라도 독일 국민들은 그들의 이방인적인 외양과 행동 때문에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음악가들은 천박하고 인위적인 작품만 생산할줄 안다고 전제하고 그것은 그들이 독일 국민들과 진정으로 정신적인 연결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그너는 이 에세이의 결론으로 '유대인들이 저주의 멍에로부터 해방될수 있는 유일한 일은 성경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처럼 구속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왕은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하만 총리의 음모라는 것을 깨닫고는 유대인들을 안전하게 해주고 오히려 하만을 벌주었다. 에세이에서는 실제적인 폐지 또는 소멸을 의미했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유대인 분리주의자와 유대의 전통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에게 루드비히 뵈르네(Ludwig Boerne: 1786-1837)의 경우를 따를 것을 권고하였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인 그는 유대교를 버리고 루터교로 개종하였으며 그후 원래 이름인 레오브 바루크를 루드비히 뵈르네로 개명하였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이처럼 자기부인(또는 자발적인 포기)을 통해 새로운 생산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으며 그럴 때에 모두 하나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바그너는 유대인들이 독일 문화와 사회의 주류에 동화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그렇게 된다는 것이 어렵다는 점도 수긍을 하였다. 바그너는 유대인에 대하여 처음 발표한 에세이가 사람들의 관심을 별로 끌지 못하자 1869년에 이번에는 자기의 본명을 사용하여 팜플렛으로 다시 만들어 출판했다. 이와 관련하여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공연할 때에 상당수 사람들이 바그너의 유대인에 대한 관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와 비슷한 글을 몇번 더 썼다. 예를 들면 '독일인은 누구인가?'(1878)에도 그런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바그너 자신이 후세의 나치즘을 미리 내다보고 악극을 만든 건 절대 아니지만, 그가 독일 민족주의를 그의 작품에서 강조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일례로 "로엔그린"에서 작중의 배경이 독일이 통일된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왕'이라는 용어를 쓰는 등에서 그러하다.[23] 니체와의 절교의 요인에도 이 독일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깊게 작용했던것 같다.

바그너가 죽은 뒤 그의 후손과 아내가 나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더욱 까이게 되는 점도 있다. 아내인 코지마 바그너(1837~1930)가 1920년대 아돌프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만나 사진도 같이 찍고 그를 칭송하였으며 그녀가 죽을 때 히틀러가 애도했으며 나아가 자신이 정권을 잡자 바그너 특설연주회와 같이 바그너 후손들을 초청하면서 더더욱 나치=바그너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히틀러가 바그너 작품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것은 물론이다. 물론 현재 바그너의 후손들은 그 당시 나치에게 반대했더라면 자신의 조상들도 아우슈비츠에 갔을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음악 속의 유대적 성향(Das Judenthum in der Musik)[24]'을 비롯해 바그너가 남긴 많은 글들은 반유대주의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아주 많은 정치적 모순과 윤리적 불안정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음악적 재능은 지극히 뛰어났지만 인간적으로는 일관되지 못하고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점이 많아 적을 많이 만드는 타입이라고 한다. 그래서 혹자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음악 자체로만 볼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영국의 지휘자 토머스 비첨은 바그너 악극 공연을 비난한 신문사 사장에게 "그럼 당신 신문사에 걸려있는 홀바인(독일의 화가)의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럼 나도 바그너 악극을 연주 안하리다."라고 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과연 음악은 음악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봐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란 중인 문제이다.

다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그의 철저한 독일 민족주의 사상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거다. 아마도 바그너가 유대인을 안 좋아했던 것은 독일땅에서 수백 년을 살아오고도 독일이라는 국가에 동화될 생각이 전혀 없는 유대계 사회 전반에 대한 것이지 그냥 평범하게 유대계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는 적대감이 없었던 거 같다.

바그너가 반유대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에게는 유대인 친구 또는 동료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Hermann Levi)이다. 당시 뮌헨궁정극장의 지휘자였다. 바이에른 국왕인 루드비히의 신임을 받고 있던 지휘자였다. 헤르만 레비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독일에서 활동했지만 유대교도로서 생활했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 랍비였다. 하지만 바그너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헤르만 레비는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휘했다. 처음에 '파르지팔'을 초연한다고 했을 때 루드비히 2세는 헤르만 레비가 지휘를 맡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기독교적 내용의 오페라이므로 유대인이 지휘하면 곤란하다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루드비히 왕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헤르만 레비는 '파르지팔'의 초연 지휘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훗날 베네치아에서 세상을 떠난 바그너의 시신이 매장을 위해 바이로이트에 도착하여 장례식을 치를 때에 헤르만 레비는 바그너를 추모하여서 가장 앞에서 운구하였다.

바그너의 이러한 경향에 후손들의 잘못 및 히틀러의 만행이 더해져, 지금도 유대인 중에서는 바그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스라엘에선 최근까지도 바그너 음악의 공연은 터부시되었다가 그 터부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곡은 2000년에 지크프리트 목가가, 2001년에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연주하기 전에는 금기에 가까웠고[25] 지금도 큰 차이는 없다.

2018년 8월 31일에는 이스라엘 유명 클래식 음악 전문 방송 ‘보이스 오브 뮤직’은 바그너의 4부작 악극 ‘니벨룽의 반지’ 중 마지막 곡인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Twilight of the Gods)’을 선곡해 방송했다. 해당 음원은 다니엘 바렌보임이 1991년 독일 바이로이트 바그너 음악제에서 지휘한 연주의 녹음본이었다. 그런데 보이스 오브 뮤직을 운영하는 이스라엘 공영 방송 ‘칸’은 2일 성명을 내고 사과했다. 성명에는 "선곡자의 실수가 있었다"며 "해당 방송이 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고통을 줬을 것이란 사실을 인정한다"고 했다. 이어 "과거 수년간 그래왔듯이 바그너의 곡을 틀지 않겠다는 칸의 방침은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 사과로 방송국 측은 이스라엘 내 바그너 옹호자들에게 또 다른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바그너의 견해와 작품 자체는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출신이기도 한 요나단 리브니 이스라엘 바그너협회 대표는 "그의 음악을 싫어하는 이들만큼이나 좋아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도 있다"며 "그의 음악은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는 BBC에서 했던 다큐에서 나온 표현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실크 태피스트리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 졌다. 태피스트리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얼룩 또한 진짜다."

반유대주의 논란에 대한 관련 문헌들은 아래와 같다.(영어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2차 출처 기준)
  • Weiner, Marc A. (1997), 《Richard Wagner and the Anti-Semitic Imagination》 Lincoln (NE) and London: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ISBN 978-0-8032-9792-0.
  • Katz, Jacob (1986), 《The Darker Side of Genius: Richard Wagner's Anti-Semitism》 Hanover and London: Brandeis. ISBN 0-87451-368-5.
  • Vaszonyi, Nicholas (2010), 《Richard Wagner: Self-Promotion and the Making of a Bran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51996-0

15. 여담

  • 반음계적 화성의 사용에서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코지마는 "남편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반음계주의자'(der große Chromatiker)라 여기며 존경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으며 바그너 자신도 일생동안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을 접하고 연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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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페라의 대본 제작과 작곡을 같이 해낸 사람이다. 많은 오페라 작곡자들이 대본은 다른 사람이 쓴걸 사용한걸 보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에세이 등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쓰는 등 글재주가 있는 사람.
  • 음악 자체가 정교하고 화려하며 스케일이 큰 편이라 현대의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바그너빠가 많은 편이다. 바그너빠를 바그네리안이라고 하는데, 사전에도 수록되어있다.
  • 그의 여성관은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는 어린 시절 수줍고 겁이 많았다. 또 응석을 받아주지 않으면 새침해지는 특징을 보였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누이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던 환경 탓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그는 누이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많은 여성으로부터 사랑 받길 원했다. 실제로 그가 여성들과 나눈 친교와 애정은 큰 누나에게 받았던 사랑과 막냇누이와 함께 했던 소꿉놀이의 연장인 셈이다. 바로 여기에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설명할 열쇠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제 나이 또래의 이성과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례적이었다. 그가 사귄 여성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나이 차가 많이 진다. 결혼도 한 번은 연상의 여자(사별로 헤어진 첫 부인 민나)와 했으며 또 한 번은 한참 어린 여자(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했다. 실은 딸이 있는 연상여와 결혼한 그의 심리적 배경은 큰누나 로잘리에로부터 받은 헌신적인 사랑에 동기를 두고 있다. 또 코지마를 부인으로 맞은 것은 어릴 때의 소꿉친구였던 막냇누이 체첼리에에 대한 기억 탓이 크다. 이들 두 누이는 그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여성들이었다. 즉 로잘리에는 민나를 비롯한 나이 많은 여성들의 원형이었고 체칠리에는 코지마를 비롯한 나이 어린 여성들의 원형이었다. 따라서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상적인 여성상은 이들 누이이며 그가 사랑한 여성들은 큰 누나와 막냇누이의 그림자로 볼 수 있다. 바그너는 많은 여성과 연애를 했음에도 질투로 인한 원한을 사지 않았다. 여난이 없는 점 또한 통념에 어긋난다. 여난은커녕 그처럼 여복이 많았던 사람도 드물다. 어릴 때는 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결혼해선 부인의 인내로 많은 여성들과 바람을 피울 수 있었다. 민나는 남편의 사치와 도피생활로 인한 어려움을 잘 견뎌낸 조강지처였고 그가 코지마와 동거해 아이를 낳았을 때는 재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바그너는 자서전에 "여성은 인생의 음악이다" 라고 썼다. 그는 여성들과 사랑을 나눈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얻어 여성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악극의 모티브로 연장시켰다. 그의 여주인공들은 그가 최상의 찬사로 묘사했듯 흰옷을 입은 정결한 금발미인으로 자태를 드러낸다. 그들은 젠타, 엘리자베스, 에바, 이졸데, 지글린데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되어 저주받은 남자, 어리석은 남자, 욕정에 눈 먼 남자를 구원한다. 바그너는 바람기가 있었음에도 그의 작품 세계에서 추구한 사랑은 순수한 것이었다. 이 점 역시 그의 여성관과 어긋난다.
  • 그의 정치관도 많은 모순이 있다. 젊은 시절 바그너 당시 급진적인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1849년 5월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혁명이 진압되자 당국은 그를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몰아 체포령을 내린다.[26] 당시는 혁명과 소요의 시기로 사건은 불발로 끝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는 〈로엔그린〉의 창작 중에도 뜨거운 가슴으로 혁명에 참가한 것이다. 이때 기미를 알고 재빨리 남편을 국외로 피신시킨 사람이 아내 민나로, 아마 그가 체포되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그는 부르주아 의식에 철저한 사람이었다.[27] 그는 단지 이상주의자로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하는 평등과 박애의 이념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학문과 예술은 자유주의 정신에서 활발히 피어나며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다. 바그너 자신도 격식과 인습에 얽매이기를 싫어한 자유주의자였다. 그것은 그의 성품이나 예술적 기질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주의의 이상에 끌렸다곤 해도 그의 마음을 지배한 가치는 정치적으론 자유민주주의였으며 경제적으론 자본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망명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정치신념 탓이라기보다 낭비벽이 가져온 빚 독촉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여권 정지 사유를 볼 수 있다. 혁명때문에 정지된것이 아니고, 과다한 채무때문이었다.
  • 그의 사치생활은 이름났다. 한 예로 그는 〈파르지팔〉을 작곡하는 동안 최고급 향수가 뿌려진 욕조에 자주 목욕을 하였다. 그러니까 정신의 희열을 악극에 담기 위해선 육신의 쾌감을 느껴야 했던 것인지, 또는 창작에 따르는 고통을 감각적인 편안함으로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였을 것이다. 정신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니까.
  • 주세페 베르디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정작 성격이나 작곡 스타일은 평행선을 달린다.
  • 아돌프 히틀러는 청년시절부터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숭모하는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독일 국가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영웅적인 신화와 결합코자 했다.
    "독일은 바그너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그너를 광적으로 존경한 히틀러는 바그너의 친필 악보 등을 가능한한 많이 수집하여서 자기만의 공간인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간수하였다. 바그너의 가족들은 히틀러에게 그곳에 두면 전쟁 중에 파손될수도 있으니 제발 바이로이트에서 보관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히틀러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베를린 벙커의 바그너 친필 스코어들은 전쟁의 막바지에 폭격과 함께 재로 변했다.
  • 오페라에 나오는 음악으로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주 들을수 있는 음악은 바로 바그너의 '로엔그린'에 나오는 '신부의 합창'(Bridal Chorus)일 것이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에 연주되는 '딴 딴따단...'이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Here Comes the Bride'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곡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오페라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혼식장에서 '로엔그린'에 나오는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런데 이 곡은 실은 오페라에서 로엔그린과 엘자가 결혼의 예식을 마치고 신혼의 방으로 들어갈 때에 연주되는 곡이다. 그러므로 신부가 자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주례석으로 입장할 때 연주되는 음악은 아니다. 그래서 한때는 신부가 입장할 때에 연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그러지 말라는 캠페인도 있었으나 워낙 신부가 입장할 때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도무지 바로 잡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 그의 부인이 프란츠 리스트의 딸 코지마인데, 하필 결혼 전에 한스 폰 뷜로의 부인으로 있었다. 골때리는게 코지마는 바그너 빠순이, 뷜로는 바그너의 제자, 리스트는 바그너랑 친구뻘이자 은인.
  • 참고로 프랑스 화가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의 팬이라고 한다. 당시 그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바그너를 만나 35분이라는 스케치 시간을 얻고 매우 기뻐한 뒤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고 하며, 그걸 본 바그너는 개신교 목사처럼 보인다는 평을 내렸다고 한다.
  • 좀 우스갯소리로 13과 인연이 많은 음악가로 언급된다.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이름이 13자이고, 태어난 해에인 1813년에 13이 들어가며 각 자릿수의 합도 13이다. 탄호이저를 완성한 날이 4월 13일이며 니벨룽의 반지는 1876년 8월 13일 처음 연주되었다. 그는 13개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그리고 죽은 날은 13일이었다는 것. 다만 이거 말고 상당히 억지도 들어가기에 다 믿은 걸 못 된다. 대중들 앞에 1831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숫자를 합치면 13이라느니 하는 것들. 80년대 금성출판사에선 낸 책자에선 엉뚱하게 바그너와 13을 다루면서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언으로 난 13과 인연이 많지만 행복했다는 유언을 했다는 만화를 그린 바 있는데, 당연히 엉터리다. 참고로 바그너는 13일의 금요일에 죽지는 않았다. 1883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므로 이 해의 2월 13일은 월요일이다.
  • 베토벤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했지만 절대음악을 완성한 베토벤과는 달리 바그너가 작곡한 곡들의 종류는 오페라와 같은 극장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절대음악, 특히 교향곡 분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29][30]

15.1. 자녀와 후손들

리하르트 바그너는 두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배우인 민나 플라너(Minna Planer: 1809-1866)였다. 무려 30년 가까이 부부로서 지냈지만 슬하에는 자녀가 없다. 두번째 부인은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 1837-1930)였다.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무려 24년 연하였다. 코지마 리스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다. 딸이긴 딸이지만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코지마는 전남편인 한스 폰 뷜로브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고 바그너와 결혼하고서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코지마와 한스 폰 뷜로브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의 이름은 블란디나와 다니엘라이다.

코지마와 바그너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의 이름은 이졸데와 에바이다. 이졸데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이며 에바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에바이다. 그리고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Siegfried Wagner: 1869-1930)는 '링 사이클'에 나오는 지그프리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의 뒤를 이어 작곡가가 되었다. 처음에는 음악가가 되기 싫어서 건축공학가가 되려고 했었다.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1930년 8월, 어머니 코지마가 세상을 떠난지 몇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1930년에는 바그너와 코지마의 첫 딸인 이졸데의 남편, 즉 바그너와 코지마의 큰 사위인 프란츠 바이들러도 세상을 떠났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40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아서 어머니인 코지마의 속을 썩혔지만 46세에 돌연[31] 영국 출신의 17세 빈프레트 마조리 윌리엄스(Winfred Marjorie Williams: 1897-1980)와 결혼하였고 네 자녀를 두었다.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큰 아들은 빌란트 바그너(Wieland Wagner: 1917-1966)이며 둘째는 딸 프리델린트 바그너(Friedelind Wagner: 1918-1991)이고 셋째는 아들 볼프강 바그너(Wolfgang Wagner: 1919-2010)이며 마지막이 딸 베레나 바그너(Verena Wagner: 1920-)이다. 셋째 아들인 볼프강은 두번 결혼했는데 첫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두 딸 중 큰 딸인 에바(Eva)와 두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카타리나(Katharina)가 현재 공동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므로 리하르트 바그너에 의하여 발족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미망인인 코지마가 상당기간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가 아들 지그프리트에게 일임하였으며 지그프리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큰 아들인 빌란트가 책임을 맡았고 1966년에 빌란트가 세상을 떠나자 빌란트의 동생인 볼프강이 맡았다가 이어 볼프강의 두 딸들이 공동으로 맡고 있는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들, 손자-손녀, 증손자-증손녀 중에는 예술계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다. 오페라 성악가들도 있고 무대 감독, 극작가, 작곡가, 무용가 겸 안무가, 음악학자, 출판가, 심지어는 재즈 싱어까지 있다.
  • 리하르트 바그너 (1813-1883).
  • 1836년 결혼 민나 플래너(1809-1866) 배우. 리하르트 바그너보다 4세 연상
  • 1870년 결혼 코지마 리스트(1837-1930) 리하르트 바그너보다 24세 연하.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Marie d'Agout)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남. 1870년에 첫번째 남편인 지휘자 한스 폰 뷜로브와 이혼. 폰 뷜로브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사이에서는 1남 2녀를 두었다.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 이졸데는 코지마가 폰 뷜로브와 이혼하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이졸데 루도비츠 폰 뷜로브라고 붙였다. 둘째 딸인 에바도 리하르트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태어났으므로 어쩔수 없이 에바 폰 뷜로브라는 이름으로 출생신고되었다. 아들 지그프리트만이 결혼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지그프리트 바그너가 되었다.
  • 딸 이졸데 뷜로브 (1865-1919)
    • 1900년 결혼 프란츠 뷜러(1872-1930). 음악감독
      • 손자 프란츠 빌헬름 베이들러(1901-1981)
  • 딸 에바 본 뷜로브 (1867-1942)
    • 1908년 결혼 휴스턴 체임벌린(1855-1980). 작가(유명한 반유태주의자)
  • 아들 지그프리트 바그너 (1869-1930). 작곡가, 지휘자, 무대감독.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운영[32][33]
  • 1915년 결혼 비니프레트 마조리 윌리엄스 (1897-1980). 피아니스트 칼 클린드보르트(Karl Klindworth)의 양녀. 히틀러와 친분이 두터웠음. 지그프리트 바그너와의 사이에 네 자녀를 두었다.
    • 손자 빌란트 바그너(1917-1966). 무대감독.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운영[34][35][36]
    • 1941년 결혼 거트루드 라이싱거 (1916-1998). 댄서 겸 안무가
      • 증손녀 이리스 바그너(1942-)
      • 증손자 울프 지그프리트 바그너(1943-)
      • 증손녀 나이키 바그너(1945-) 극작가, 출판가
      • 증손녀 다프네 바그너(1946-) 배우
        • 배우자 우도 프락쉬(1934-2001) 기업가(루코나 사건에서 살인혐의), 이혼
        • 배우자 틸만 스팽글러(1947-) 작가 겸 출판가
    • 손녀 프리덜린드 뱌그너(1918-1991)
    • 손자 울프강 바그너(1919-2010) 무대감독
      • 배우자 1943년 결혼 엘렌 드렉셀(1919-2002) 1976년에 이혼
        • 증손녀 에바 와그너 파스퀴에(1945-) 극장지배인.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공동감독
          • 배우자 이브 파스퀴에
            • 현손자 안토인 바그너(1982-)
        • 증손자 고트프리드 바그너(1947-) 음악학자
          • 배우자 베아트릭스, 이혼
          • 배우자 테레시나 로제티
            • 현손자 에우제니오 바그너
      • 배우자 1976년 결혼 구드른 바그너 (1944-2007)
        • 현손녀 카타리나 바그너(1978-) 무대감독.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공동감독
    • 손녀 베레나 바그너(1920-)
      • 배우자 1943년 결혼 보도 라페렌츠(1897-1974) 나치당 간부 겸 SS 지휘관

15.2. 종교관

바그너의 유년기는 기독교적인 신앙생활로 점철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바그너는 소년시절에 신앙심이 매우 뛰어나 어느 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달리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한 일도 있었다. 바그너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인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는 복음서를 열심히 공부한 후에 쓴 것으로 신약에 나오는 구절들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가 많았다. 또 하나의 작품으로 합창과 오케스트라 앙상블인 '열두 제자의 사랑의 축제'(The Love Feast of the Twelve Apostles: WWV 69)도 성경말씀에 기본을 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생활을 했던 바그너는 삶의 행복과 인생의 완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880년 쯤에서 바그너는 '종교와 예술'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그는 이 에세이에서 예수가 보여준 사랑이이야말로 구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예수의 보혈이 긍휼히 여김의 원천이며 그같은 보혈은 실상 모든 인류에게 흐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평화롭고 이상에 넘친 세상을 이룩하려면 '그리스도의 보혈에 동참해야 한다'고 내세웠다. 다만 바그너의 기독교 신앙은 정통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구약의 내용, 특히 십계명을 경멸하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과 창조성 및 영성(靈性)간의 형이상학적 시너지에 대한 통찰력있는 견해는 그의 실제적인 생활경험과 결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그너는 '트리스탄'을 작곡할 때에 마치 내세에 들어와 있는 듯한 마음의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그너의 종교관은 상당히 특이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다. 존경했다기 보다는 훌륭한 분이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그는 또한 헬레니즘적인 비교(秘敎)와 마찬가지로 구약이 신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한 예로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느님과 다른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구약의 십계명은 기독교의 가르침인 사랑과 자비가 부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맨날 '하지말라, 벌받는다'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의 다른 여러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중에서도 특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바그너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불교 오페라를 작곡하려고 몇년이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었다. '승리자'(Die Sieger)라는 제목까지 생각해 두었다. 결국 불교적인 '승리자'는 완성을 하지 못했지만 대신 '파르지팔'이 나왔다. '파르지팔'은 기독교에 대한 바그너의 버전이라는 특이한 작품이다. '파르지팔'과 '승리자'가 연계성이 있다는 것은 예를 들어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로 대용하는 의식이 사실상 기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이교도의 의식에 가까운 것이라는 해석이다. 비학 역사학자인 조슬린 갓윈(Joscelyn Godwin)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불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3. 아리안주의

바그너는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신봉했는가? 만일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는 언제나 화제거리였다. 일각에서는 프랑스의 유명한 인종학자인 아르튀르 드 고비노(Arthur de Gobineau: 1816-1882)의 아리안 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바그너는 고비노의 이론에 별로 수긍하지 않았다. 다만, 말년에 고비노의 아리안 철학이 진실된 것이라는 확신은 갖게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 귀족으로서 외교관이기도 했던 고비노는 아리안 우월주의의 이론을 정리한 사람으로 현대 인종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인종문제에 대하여 대단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런 고비노가 바그너에게 과연 영향을 주었느냐 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바그너가 고비노를 만나 대화를 한 것은 '파르지팔'을 거의 완성한 단계에서였기 때문이다.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기독교 철학과 아리안 민족의 우수성을 은연히 내세운 내용이다.
바그너가 고비노를 처음 만난 것은 1876년 11월 로마에서였다. 고비노는 바그너보다 세살 아래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로마에서 그렇게 잠시 만났지만 그후로 1880년까지 다시 만난 일은 없었다. 1880년이라고 하면 바그너가 '파르지팔'의 대본을 완성한 후였다. 다시 말하는 사항이지만,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바그너가 고비노의 인종주의적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는 보기가 어렵다. 고비노는 25년 전에 Essai sur l'inegalite des races humaines(An Essay on the Inequality of the Human Races: 인종의 불평등에 대한 에세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하여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한바 있다. 그러나 바그너가 1880년에 이르기까지 고비노의 그 에세이를 읽고 무슨 감동을 받았다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바그너는 서구사회가 우등민족과 열등민족의 혼합으로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는 고비노의 아이디어에 대하여 대단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그때까지만 해도 게르만 민족 또는 북구의 민족만이 다른 민족에 비하여 우월하다는 생각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비노는 1881년에 바이로이트를 방문하여 빌라 반프리트에서 무려 5주 동안이나 묵은 일이 있다. 그때 바그너는 당연히 고비노와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의견이 엇갈려서 대체로 논쟁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바그너가 고비노의 인종 이론에 비하여 기독교를 옹호하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다는 것이다. 한편, 고비노는 아일랜드인을 영국이 통치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아일랜드인을 퇴폐 민족으로 간주했고 영국인을 북구의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음악적 능력을 가지려면 흑인조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바그너는 고비노의 아이디어에 대한 반론으로서 세편의 에세이를 썼다. '고비노백작의 작품 입문'(Introduction to a Work of Count Gobineau), '네 자신을 알아라'(Konw Thyself), 그리고 '영웅주의와 기독교'(Heroism and Christianity)이다. 모두 1881년에 썼으며 바이로이트 블래터에 게재되었다. 바그너는 '네 자신을 알아라'에서 독일 국민에 대한 사항을 다루었다. 고비노는 독일 국민을 '우수한' 아리안 민족이라고 믿었다. 이에 대하여 바그너는 독일 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은 아니며 그저 여러 민족 중의 하나라고 전제하고 문제는 '인간의 품질'(Das Reinmenschliche)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웅주의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가 모든 민족의 도덕적 조화을 제공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일 서로 다른 인종들이 혼합한다면 물리적인 통일을 이루어서 연합된 힘이 될수 있다고 내세웠다.
고비노는 1882년 5월에 반프리트에 다시 묵은 일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그너와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초연을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민족간의 혼합이라는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걱정을 했다. 바그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인류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On the Womanly in the Human Race: 1883)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이 글은 인류의 창조에 있어서 결혼의 역할을 고찰한 것이다. 인류 또는 인종에 대한 바그너의 글은 별로 중요한 내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위인 휴스턴 스투워트 챔벌레인의 생각은 달랐다. 바그너처럼 대단히 영향력있는 사람의 글을 조금 손질하여 발표한다면 그에 편승하여 자기의 주장을 펼칠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99년에 바그너의 에세이를 바탕으로 하여 The Foundations of the Nineteenth Century(19세기의 기초)라는 책을 펴냈다. 인종주의적 내용이었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는 이 책에 나와 있는 아리안 이상주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6. 창작물에서

  • 지명도가 높은 작곡가인 탓에 그의 음악은 창작물 곳곳에 제법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바그너의 선율을 삽입한 헐리우드와 유럽의 각종 TV, 영화가 무려 1300편에 달한다.(IMDb 통계).
    •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 나오는 헬리콥터 부대의 바닷가 마을 폭격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나오는 배경음악이 ``발키리의 비행``이다. 지옥의 묵시록하면 바로 떠오르는 명장면이다. 그외 대표적 작품으로는 은하영웅전설의 게임판. 여기서도 로엔그린, 발키리의 비행 등 바그너의 대표작을 배경음으로 삼았다. 은하영웅전설6의 경우에는 게임CD를 일반 음악CD 재생플레이어에 넣고 돌리면 바그너의 음악이 재생된다.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의 부기팝은 등장할 때 휘파람으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부른다.-그런데 원곡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휘파람으로 부를만한 곡은 아닌데.. 과연 괴인- -단지 휘파람으로 불렀을 뿐인데 다들 그 곡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
    •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라스 폰 트리에감독의 영화 멜랑콜리아의 OST로 사용되었다.
    • 1941년 영화사에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에는 탄호이저의 선율이 삽입되어 나온다.
    • 1948년 조안 폰테인 주연의 <미지의 여성으로부터 온 편지(A Letter from An Unknown Woman)>에는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서의 ‘오 그대 나의 사랑스러운 저녁별이여(O, du mein holder Abendstern)’가 삽입되어 있다.
    • 1968년 찰턴 헤스턴 주연의 나치를 다룬 영화 <카운터포인트>에는 탄호이저 서곡이 라이트 모티프로 쓰이고 있다.
    • 1996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로미오와 줄리엣>에는 바그너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할 수 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리베스토드(Liebestod)의 선율을 이용하여 무겁고 애절한 죽음의 사랑을 기리고 있다.
    • 2006년의 <클림트>에서는 로엔그린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다. 이 영화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아트 누보의 거장 화가 오스트리아의 구스타프 클림트의 애정행각을 다룬 것으로서 존 말코비치가 주연을 맡고 있다.
    • 1939년 할리우드의 대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신부의 합창이 나온다.
    • 에일리언 커버넌트에서는 신들의 발할라 입성이라는 음악을 데이빗 8이 연주한다.
  • 대한항공 우주편 광고에서는 탄호이저 서곡을 브금으로 사용했다.
  • 시빌워에서 클론 토르의 정지 코드가 바그너의 출생일과 사망일이다.
  • 1955년에 미국의 영화제작사인 리퍼블릭 필름이 '매직 파이어'(Magic Fire)라는 영화를 만든 것이 있다. 바그너에 대한 내용이다. 마틸데 베젠동크의 이야기도 나온다. 발렌티나 코르테세(Valentina Cortese)가 마틸데의 역할을 맡았다. 바그너의 또 다른 두 여인인 민나 플라너는 이본트 데 칼로(Yvonne de Carlo)가 맡았고 코지마 리스트는 리타 갬(Rita Gam)이 맡았다. 바그너는 알란 바델(Alan Badel)이 맡았고 프란츠 리스트는 카를로스 톰슨(Carlos Thompson)이 맡아따.
  • 1983년에는 영국에서 '바그너'라는 미니시리즈가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명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작품이었다.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이 바그너의 타이틀 롤을 맡은 작품이다. 그밖의 출연자들은 젬마 크레이븐(Gemma Craven:P 민나 플라너 바그너), 바네사 레드그레이브(Vanessa Redgrave: 코지마 리스트 바그너), 미겔 헤르츠 케스트라네크(지휘자 한스 폰 뷜로), 라츨로 갈피(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 존 길구드(프란츠 세라프 폰 피스터마이스터), 로렌스 올리비에(지그문트 폰 포이퍼), 랠프 리처드슨(칼 루드비히 폰 포르텐 남작), 에케하르트 샬(프란츠 리스트), 로날드 피컵(프리드리히 니체), 마르테 켈러(Marthe Keller: 마틸데 베젠동크), 리차드 파스코(Richard Pasco: 오토 베젠동크), 귀네스 존스(Gwyneth Jones: 말비나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피터 호프만(루드비히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 제스 토마스(알버트 니만), 버논 돕체프(자코모 마이에르베르), 가브리엘 번(칼 리터), 윌리엄 월튼(작소니의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2세), 지그프리트 슈타이너(바바리아의 루드비히 1세), 바바라 리 헌트(바바리아의 테레제 왕비), 다프네 바그너(파울리네 폰 메테르니니 공녀) 등이다.

17. 외부 링크



[1] 니체와 친할 시절에는 니체와 같이 무종교를 넘어서 반종교적인 입장도 취했지만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오페라들을 쓰면서 니체와 절연하게 된 이후에는 입장이 미묘하다. 일단 바그너는 구약성경과 십계명을 경멸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말년에 불교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기독교인지 불교인지 무종교 내지 반종교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여담으로 아내 코지마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개신교 신자였다.[2] 출처[3] 그는, 아주 간단하게,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서양음악, 특히 오페라를 변화시켰고,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태어난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위대한 작곡가들 중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함께 가장 오래 지속되는 동시대의 존재로 남아 있다.(중략) 바그너의 영향은 엄청났고 엄청났다. / 출처: 가디언지[4] 출처[5] “그가 나치즘과 연관되기 전까지, 바그너의 음악은 다른 분야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이제 그는 다시 뮤즈가 되었다.”라는 주제의 기사.[6] 물론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나치 쪽에서 일방적으로 팬질한 것에 불과하다. 즉 히틀러는 바그너가 죽고 나서야 태어났다.[7] 버나드 쇼는 바그너를 사회주의 영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8] 슬라보예 지젝은 바그너의 팬이기도 하다.[9] 더 자세하게는 바그너를 존경해마지 않았던 브루크너, 바그너와 브루크너를 존경하고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말러, 말러를 신봉했던 쇤베르크.[10] 바로 밸브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 밸브가 없던 시절에는 트롬본같이 슬라이드를 붙이지 않는 이상 현재 조에 맞는 크룩을 바꿔 끼워야 했다.[11] 이 극적인 효과가 생각보다 굉장해서 현대의 오케스트랄과 비교해도, 영화나 드라마 OST에 살짝 넣어놔도 전혀 위화감 없을 정도이다.[12] 다만 바그너가 확립하고 이 기법을 널리 퍼트렸지만 창시자는 아니다. 이와 같이 어떤 악구를 특정한 인물이나 사물과 연결시키는 기법은 실은 오래 전부터 행해져 바흐나 모차르트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13] 1983년 네덜란드 작가 Martin van Amerongen가 쓴 바그너 전기 Wagner, a Case History에서[14] 출처 1932년 스위스 작가 Guy de Pourtales의 바그너 전기 Richard Wagner: The Story of an Artist에서[15] 31살 연상이다.[16]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텅빈 음악이라 혹평했다고 하지만, 말러가 뉴욕필에 재직하던 시절 브람스의 교향곡 1번과 3번을 각각 두 차례 지휘한 바 있기도 하다.[17] 이 사람도 유명한 바그네리안이다.[18] 코지마는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 코지마는 아마도 소녀시절부터 아버지인 리스트(즉 리스트도 반유태주의 사상이 있던 셈)로부터, 아버지의 두번째 연인인 카롤리네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카롤리네가 주선해준 가정교사인 마담 파테르시로부터, 그리고 나중에는 첫 남편인 한스 폰 뷜로로부터 '반유태주의가 무엇보다 우선되는 계율'이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코지마의 반유대주의는 바그너를 알기 전부터 비롯된 것이다. 코지마의 5천 페이지에 달하는 일기를 보면 평균적으로 4페이지마다 한번씩 유태인을 경멸하거나 조소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만 보아도 코지마가 얼마나 반유태주의자였는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19] 레비가 바그너의 친구였기 때문에 그런 영향도 있을 것이다.[20] 2018년 기준[21] 2018년 기준[22] 2019년 예정[23] 그러나 독일왕이라는 명사 자체는 작중의 배경인 시대에서도 정치적 상황이 어쨌든 간에 실제로 통용되고 있었다. 일찍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에게 독일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지며, 게다가 독일 지역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동프랑크의 왕이 독일왕으로 칭호가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꼭 독일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24] 이 글은 두 번이나 출판되었는데, 출판할 때마다 바그너의 모든 주변인들이 제발 출판하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하자면서 전 여친과 전 부인마저도 극구 만류했다. 심지어 재판했을 때는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아질 때였다.[25] 1981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일부를 연주하던 중에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상처를 보여주는 소동이 벌어져서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고.[26] 당시 드레스덴의 '민중의 소리'라는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모임 신문에서 <혁명>이라는 칼럼을 익멍으로 기고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앤다.로 시작하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27] 니체와 틀어지기 시작한것도, 루트비히 2세의 후원으로 성대한 공연을 열어 여러 귀빈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철저한 귀족같아서 니체가 실망했기 때문이다.[28] 출처[29] 애초에 대단한 재능과 업적을 남긴 바그너도 젊은 시절 베토벤의 작품들을 접하며 도저히 교향곡과 피아노곡으로는 그의 흔적 외에서 걸작을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페라로 방향성을 잡은 이유도 베토벤은 오페라곡을 생전에 완성한 곡이 1곡뿐이었다는 점이었는데 그 한곡인 피델리오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서 오페라를 시작했으며 이후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접하며 오페라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당연히 오페라가 주 무대였고 베토벤을 의식했던 바그너의 곡에서 베토벤의 색채를 느끼기는 어렵다.[30] 교향곡이 있기는 하지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전에 쓰인 워낙 초기작이라 바그너의 색채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그너가 교향곡을 썼다고 할 경우 가장 근접했다고 볼 수 있는건 안톤 브루크너지만, 이마저도 어느 시점을 지나면 브루크너만의 색을 띄게 된다. 참고로 교향곡 3번의 부제가 '바그너'.[40][31] 지그프리트는 양성애자였다.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인 코지마는 지그프리트에게 결혼해서 바그너 가문의 상속자를 만들어야 낸다고 독촉했다. 그럴 때마다 지그프리트는 핑계를 대며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코지마도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1913년쯤 해서 지그프리트는 이른바 하르덴-오일렌부르크 스캔들(Harden-Eulenburg Affair: 1907-1909)으로 덩달아서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독일에서 동성애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지그프리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바그너 가문에 큰 망신을 주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지그프리트는 자기도 이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32] 지그프리트라는 이름은 '링 사이클'에 등장하는 지그프리트의 이름을 가져온 것이다.[33]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기록상으로 18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작품들과 성악작품(주로 가곡)들도 남겼다.[34]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들을 새로운 현대 스타일의 무대로 연출하는 이른바 레기테아터(Regietheater)의 주창자이다. 레기테아터는 간단히 말해서 드라마의 심리학적인 면에 초점을 두며 상징적인 자연주의 무대를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설명을 하자면 오페라를 공연함에 있어서 감독이나 제작자에게 재량권을 주어 작곡자의 오리지널 의도와 무대 연출의 내용이 변경될수도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주로 2차 대전 이후에 이러한 경향이 시도되었다. 그래서 장소가 변경된다든지 또는 상황이나 스토리, 그리고 출연진 까지도 변경될수 있다. 스토리는 정치사회적인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변경될수도 있고 지나치게 전통적이어서 현대인으로서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변경하는 경우도 있다. 레기테아터에서는 장소가 오리지널로부터 현대적으로 변경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인종차별, 남녀차별, 계급에 의한 억압 등 현실적인 문제들은 강조된다. 무대장치는 현대적으로 추상적이며 단순화 된다. 섹스에 대한 사항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의상은 시대나 지역을 혼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2010년 생루이오페라극장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2011년 '돈 조반니'를 공연 할 때에 어떤 출연자는 18세기의 의상을 입었으나 어떤 출연자는 20세기 중반의 의상을 입도록 했다.[35] 빌란트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서 그의 할아버지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연출한 사람으로 기억되지만 그는 독일의 다른 도시, 또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도 오페라 연출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탄호이저'와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을 코펜하겐에서 '링 사이클'을 나폴리, 슈투트가르트, 쾰른에서, 베토벤의 '휘델리오'를 슈투트가르트, 런던, 파리, 브뤼셀에서 연출하여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빌란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독일의 소프라노인 안야 실랴였다. 안야 실랴는 불과 20세의 젊은 나이에 바이로이트에서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의 젠타를 맡았었다. 당시에 젠타를 맡았던 레오니 리자네크가 사정이 생겨서 출연을 취소했기 때문에 대타로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안야 실랴의 젠타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안야 실랴는 강력하고 화려하며 젊고 빛나는 음성을 마음껏 들려주었다. 게다가 연기력이 뛰어났다. 안야 실랴는 빌란트가 이상으로 생각하던 여인이었다. 안야 실랴는 빌란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엘자(로엔그린), 엘리자베트와 비너스(탄호이저), 에바(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맡아했다. 안야 실랴는 빌란트와 실과 바늘의 관계가 되어 바이로이트 이외에서도 함께 했다. 이졸데, 브륀힐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와 살로메, 알반 베르크의 룰루와 보체크의 마리를 맡아했다. 안야 실랴는 심지어 빌란트가 제작한 베르디의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맡기도 했다. 빌란트가 연출을 맡고 안야 실랴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바그너 오페라로서 비디오로 나온 것으로는 1967년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발퀴레'가 있다. 오사카 국제 페스티발에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과 관련하여 공연한 실황이다. 이밖에 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에서 1968년에 공연한 베르크의 '룰루'도 있다.[36] 빌란트의 바그너 오페라 제작에 참여했던 정상급 성악가들은 다음과 같다. 한스 호터, 조지 런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에버하르트 배흐터, 토마스 스튜워트, 테오 아담, 요제프 그란이들, 제롬 하인스, 볼프강 빈트가쎈, 라몬 비나이, 제스 토마스, 욘 비커스, 마르타 뫼들, 아스트리드 바르나이, 레진 크레스팽, 리타 고르, 레오니 리자네크, 비르기트 닐슨, 장 마데이라, 그레이스 호프만, 프란츠 크라스,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그레이스 범브리, 크리스타 루드비히, 마르티 탈벨라, 카를로스 알렉산더, 이사벨 슈트라우스, 제임스 킹, 클로드 히터, 티초 팔리(Ticho Parly), 귀네스 존스, 프릿츠 분덜리히 등이다. 빌란트는 위대한 배우를 원했지만 그러면서도 자기의 계획을 성실하게 따라줄 성악가를 원했다. 지휘자로서 빌란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한스 크나퍼츠부슈, 클레멘스 크라우스, 앙드레 클러이튼스, 피에르 불레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하인츠 티트옌, 로린 마젤, 볼프강 자발리슈, 칼 뵘, 브루노 마데르나, 토마스 스키퍼스 등이었다.[37] 바그너의 증손녀인 카타리나 바그너가 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와 인터뷰를 나누면서 '증조 할아버지의 외모를 닮지 않아 여자로서 다행이라는 농담을 건넨 바가 있다.예술의전당 월간정보지 2007년 6월호[38] 혁명 운운하고 외모를 보면 어린시절 바그너를 모티브로 한것이 보인다. 위에서도 말했듯 바그너의 정치성향은 생애 내내 스펙타클하게 바뀐다.[39] 바그너의 저술들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