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08:26:27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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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요제프 하이든
Joseph Hayd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oseph_Haydn.jpg
▲ 토마스 하디가 그린 그의 초상화 (1791)[1]
본명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출생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로라우
사망 1809년 5월 31일 (향년 77세)
오스트리아 제국
직업 작곡가
배우자 마리아 안나 테레지아 켈러[2] (1760년 결혼)
종교 가톨릭[3]
서명 파일:Joseph_Haydn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사후의 시련4. 주요 작품들5. 창작 성향6. 사생활7. 작품 연구와 감상
7.1. 작품 연구7.2. 하이든의 음악 감상
8. 여담
8.1. 대중문화에서의 이용8.2. 미하엘 하이든8.3. 독일 국가 에피소드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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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한국의 경우 하희돈(夏熙敦)이라는 음역한 이름도 있었으며 해방 직후까지 이 음역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교향곡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있는데 하이든은 살아 있을 때 104곡이나 되는 교향곡을 남겼고 그는 이전까지 명확하게 확립하지 못했던 교향곡 형식과 악장 개수, 각 악장의 성격과 구성 등에 대한 기준을 세웠다. 예를 들어 1악장은 빠른 소나타 형식, 2악장은 서정적인 느리게, 3악장은 빠른 춤곡 형식이고, 4악장은 매우 빠른 론도·소나타 형식이라는 양식을 정립하였다. 그의 기여는 오스트리아 음악의 발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트럼펫 협주곡. 연주자는 윈튼 마살리스.[4]

2. 생애

오스트리아 대공국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시골 마을이자 헝가리 왕국과 국경을 접한[5] 로라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2남매를 두었지만 그중 5명은 어릴 적에 죽고, 7명만 살아남았다. 하이든은 위에 누나를 둔 둘째였다. 아버지인 마티아스 하이든(1699~1763)은 마차 바퀴 제작가였고, 어머니 마리아 하이든(1705~1754)은 귀족 저택에서 일하던 키친메이드 출신이었다. 양친 모두 음악을 생업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경우 민속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악보를 읽을 줄은 몰랐지만 하프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부모는 로라우 북동부에 있는 하인부르크라는 소도시에서 재직하던 음악교사에게 하이든을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불과 6살 때의 일이었는데, 말이 음악 교육이었지 실제로는 교사 밑에서 빨래 등 집안일까지 떠맡아야 하는 더부살이 신세였다. 어쨌든 그곳에서 성악과 바이올린,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웠고, 하인부르크 성당의 성가대에 보이 소프라노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때 교회 관계자가 그의 실력에 감탄해, 아버지에게 "아드님 목소리가 고우신데 카스트라토만드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 했었다. 아버지가 거절하지 않았다면 그는...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 하인부르크에 우연히 들른 요한 게오르크 로이터(Johann Georg Reutter, 1708 ~ 1772)라는 음악가가 하이든의 재능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인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음악 감독이었다. 로이터는 하이든에게 오디션을 볼 것을 제안했고, 오디션에 합격한 뒤 1740년 빈으로 이주했다.

하인부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빈에서도 로이터의 집에 얹혀 살면서 계속 음악을 공부했다. 1745년에는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6]도 장크트 슈테판 성당의 성가대원이 되면서 합류했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아서 쇤브룬 궁전에 몇차례 초대받기도 했다. 한번은 궁전 내의 공사 중인 건물에서 위험한 장난을 치다가 테레지아에게 걸려서 벌로 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로이터도 이전의 선생처럼 하이든 형제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고, 1749년에 성장으로 인한 변성기가 찾아오면서 성가대에서 어쩔 수 없이 퇴단해야 했다. 로이터의 집에서도 나와야 했고, 한동안 기본적인 의식주도 형편없는 상태에서 악전고투해야 했다.

1752년에는 당시 꽤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였던 니콜라 포르포라[7]에게 잠깐 수업을 받았는데, 이것이 하이든이 받은 첫 본격적인 작곡 수업이었다. 이미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혔는지, 이후에도 유명한 대위법 교재인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이라든가 초기 고전주의 작품들의 악보를 사보해 연구하는 등 이론 기반을 강화하면서 오페라 등의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 형편은 현시창이었고, 하이든도 동시대의 많은 음악가들처럼 귀족 집안의 전속 음악가가 되기 위해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이 노력은 점차 성과를 얻었고, 툰 백작부인이나 퓌른베르크 남작 집안의 비상근 작곡가 겸 음악 교사로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퓌른베르크 남작은 하이든을 마음에 들어했는지, 1757년에 모르친 백작 집안에 악장(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으로 취직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8]

모르친 백작 집안에서 하이든은 처음으로 안정된 전속 직책을 얻게 되었고, 이 시기에 교향곡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1760년에 들어 모르친 백작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자, 이듬해에 헝가리계 귀족 집안인 에스테르하지[9] 가문으로 옮겨 부악장 자격으로 활동했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당시 공작 작위를 보유하고 있던 유력 귀족 세력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꽤 높은 수준의 악단도 고용하고 있었다.

이때 하이든은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를 1768년 빈의 요한 기사 수도회에서 연주하면서, 이 연주에 참석했던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로부터 호평을 받았다.[10]

하이든은 이 집안에서 거의 30년 가까이 봉직했고, 열성적인 아마추어 음악인들이었던 파울 안톤과 니콜라우스 두 공작들을 위해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수백 편의 작품을 작곡했다. 사실상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신세였음에도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의 타 독일어권 영방 국가에까지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고, 1780년대 중반 쯤에는 모차르트와도 친교를 나누며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790년에 니콜라우스 공작이 타계하면서 고용주도 그의 아들로 바뀌었는데, 아들은 전임자들과 달리 음악에는 별 관심이 없는데다, 니콜라우스 공작이 지나치게 음악에 돈을 쓴 나머지 재정에 무리가 갈 정도여서 음악에 대한 투자를 줄이기로 했다. 결국 하이든에게 상당한 액수의 퇴직금을 주고 계약을 해지했다. 프리랜서가 된 뒤에는 런던에서 활동하던 공연 기획자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의뢰로 영국을 2차례 방문했고, 12곡의 '런던 교향곡집' 등을 비롯한 후기의 대표작들을 작곡했다. 이 시기 동안 베토벤을 제자로 받기도 했는데, 서로 궁합이 잘 안맞았는지 미적지근한 관계로 끝났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베토벤 문서를 참조.
파일:Rößler_Joseph_Haydn.jpg
말년의 초상화. 요한 카를 뢰젤러 작, 1799년

런던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 1795년에는 다시 빈으로 돌아왔고, 도시 근교의 굼펜도르프라는 마을에 커다란 저택을 가질 정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미사곡을 비롯한 종교음악에 전념했고, 예전의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을 위해서도 작품을 써주었다. 종교음악 외에는 트럼펫 협주곡현악 4중주를 비롯한 후반기의 걸작 기악곡들도 남겼다.

그러나 칠십 줄을 넘긴 1802년부터는 건강이 영 좋지 않게 되었고[11], 작곡도 힘들 정도로 악화되었다.[12] 각지에서 하이든에게 지휘청탁이 들어왔지만 건강문제로 모두 못하게 되자 유럽 각국에 하이든이 사망했다는 뜬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뜬소문을 들은 파리의 프리메이슨 지부에서 루이지 케루비니에게 하이든을 추모하는 작품을 청탁했고 케루비니는 하이든에 대한 애도와 존경을 담아 "하이든의 죽음에 대한 애가"를 작곡해 발표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이 소식을 나중에 들은 하이든의 반응이 압권이다. "참 아쉽군. 미리 알았더라면 내가 가서 초연을 지휘했을 텐데."

1809년에 나폴레옹이 빈을 침공하던 때에[13] 하이든은 의뢰로 들어온 연주를 하고 마쳤으나 5월 26일 저녁에 연주실에서 갑자기 쓰러졌고 제자들과 하인들에 의해 저택으로 옮겨졌으나 5월 31일에 저택의 침대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해는 집 근처의 묘지에 매장되었다가 1820년에 이전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아이젠슈타트 저택 근처의 베르크 교회에 이장했다.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3. 사후의 시련

파일:하이든 세하스.png
1785년 초상화. 크리스티안 루트비히 세하스 작

1809년에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고 그의 유언대로 유해를 교회가 아닌 일반 묘지, 즉 가문의 묘에 안장시킨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하이든의 무덤이 파헤쳐졌고, 게다가 그의 머리가 온데간데 없어진 것이다. 이에 유족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유해의 머리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정부에 보냈고 필사적으로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머리를 찾는데 필요한 단서와 현장의 목격자도 한명도 없어 전혀 진전이 없었다.

나중에 왜 무덤이 파헤쳐졌는지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귀족 중 1명이 음악의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하이든의 를 조사하고 싶어 유태인 피터와 로젠바움에게 부탁해서 파헤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피터와 로젠바움은 하이든 머리를 더욱 비싼 값에 팔기 위해 다른 노인 시체의 머리를 꺼내 귀족에게 넘겨준 것이다. 피터와 로젠바움은 더 비싼 값을 받고 하이든의 머리를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겨버린다. 당시의 하이든 머리의 부패 상태를 생각해보면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속았다는것을 알아차린 그 귀족은 분노했으며 그들을 즉시 붙잡아 조사했으나, 이미 하이든의 머리는 익명의 사람에게 팔렸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수소문하였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후 100여 년이 넘도록 하이든의 머리는 유럽 전역에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는다.

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이든의 후손들은 생전에 그의 머리를 찾기위해 노력하였고, 자신이 사망할 때는 후손에게 "반드시 조상님의 머리를 찾아야 한다"는 유언을 대대로 남기고 있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도 하이든의 머리 도굴 사태에 대해서 "이 사건은 국제적 망신이며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조국의 음악가 머리가 도굴당해 온 유럽에서 장식품처럼 여기저기로 팔려나가는 것은 두고볼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도굴된지 100년이 훨씬 넘었고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데 필요한 단서조차 없었다. 많은 의견과 비난 여론이 빗발친 건 물론이다.

그러다 수소문 끝에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 데는 성공하여, 하이든의 후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반환소송을 청구하였다. 하지만 그 유해의 주인은 소송반환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되찾는데 어려움을 맞았고, 설상가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에 유해반환 소송은 잠정중단된다.

그러다가 1954년 6월 마침내 유해반환 소송에 승소하여 하이든의 머리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무덤에서 파해쳐져 머리가 분리된지 무려 145년 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 국민 수십 만명이 나와 145년 만에 조국에 돌아온 하이든의 머리를 맞이한다.[14]

또한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정치인들이 하이든의 미사에 대거 참석해 대 음악가의 안식을 간절히 바라며, 이제서야 머리를 찾은것에 대해 하이든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하이든이 사망할 당시의 유럽에서는 골상학[15]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며, 로젠바움과 페테르가 하이든의 진짜 두개골을 골상학적으로 분석하였더니 측두엽과 전두엽이 일반인들보다 튀어나와 있었고 이러한 특징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루트비히 판 베토벤 같은 다른 작곡가들의 두개골에서도 나타나 있었다.

연구가 끝난 뒤 두개골만 남은 하이든의 머리는 나무 상자에 봉인되어 모처에 감춰졌고, 이장할 때 두개골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꼭지가 돈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로젠바움과 페테르의 소행임을 알아냈다. 공작이 두 사람을 찾아내 갈구자 두개골이 반환되었는데, 문제는 이 두개골이 다른 인물의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하이든의 진짜 두개골은 로젠바움이 세상을 떠나자 페테르에게, 페테르가 죽자 빈 음악가협회에 넘어갔다.

빈 음악가협회에서는 1954년에야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하이든의 진짜 두개골을 넘겨주었는데, 그 해 6월 5일 하이든의 고향인 로라우에서 로라우 교구장 주교추기경미사를 집전했고[16], 거리에서 수만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중하게 모셔져 다시 묻혀졌다. 이 때는 가짜 두개골도 처치곤란했는지 2가지를 모두 입관시켰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 묘지에는 '몸통 하나에 두개골 2개'라는 엽기적인 상태로 유해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4. 주요 작품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요제프 하이든/작품 목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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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창작 성향

오랫동안 귀족 집안의 전속 작곡가로 일한 덕에 특별한 삶의 굴곡이 없어 작품에 큰 기복은 없고, 꾸준한 자기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초기에는 바로크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았고, 바흐헨델 등의 독일계 거장 대선배들 뿐 아니라, 코렐리비발디이탈리아 선배들의 영향도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교향곡 제6~8번 연작의 경우, 이탈리아에서 유래한 합주 협주곡(Concerto grosso) 양식을 적극 도입해 여러 악기들이 솔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하지만 1760년대 후반부터 1770년대 초반까지는 판할이나 디터스도르프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이 크게 유행시킨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이 시기에 단조로 된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가 꽤 많이 나왔다. 질풍노도 시기를 지난 뒤에는 고용주였던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주문으로 많은 오페라와 극음악을 썼는데, 다른 장르의 작품들에도 이러한 주문 폭주가 반영되어 다소 가볍고 해학적인 곡들이 많이 나왔다. 그 절정에 있는 작품이 교향곡 제60번으로, 모차르트의 디베르티멘토 F장조 '음악의 농담(Ein Musikalischer Spaß, KV 522)'에 필적하는 그 시대 초절개그인데 마지막 악장인 6악장에서 현악기의 조율을 다시 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있다.

1770년대 후반에는 고용주의 허락 없이 자작곡을 출판할 수 있게 되었고, 직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외부 출장도 가능해졌다. 이때를 전후해 하이든의 수많은 악보들이 여러 음악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에스테르하지 가문에 묶여 있던 명성을 유럽 각지에 퍼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저작권 개념은 지금과 달리 상당히 애매했고, 몇몇 악보들은 작곡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첨삭 혹은 편곡되거나 하이든의 이름을 사칭한 짝퉁까지 나돌기도 했다.

후기에 속하는 1790년대에는 런던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하면서 자신의 명성과 작풍을 완전히 확고하게 굳히는 시기였는데, 특히 자신의 임지였던 아이젠슈타트 근처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헝가리나 크로아티아, 체코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했던 동유럽계 민속 음악이나 집시 음악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작품의 구조와 규모도 더 방대해졌고, 말년의 두 걸작 오라토리오인 '천지창조'와 '사계'에서 정점에 달했다.

6. 사생활

커다란 마찰이나 일화 같은 것은 없고, 오랫동안 고용인 생활을 한 만큼 온화하고 친근한 성품으로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이 있다. 하지만 교향곡 제45번 '고별'의 에피소드에서 보듯 고용주가 너무한다 싶으면 음악으로 되갚는 용자 기질도 있었고, 의외로 대단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였다. 하이든 사망 200주년이 된 2009년에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로 개최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서 고별 교향곡의 4악장이 공식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었는데, 지휘자를 무시하듯 계속 하나둘 빠져나가는 악단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개그. 이건 하이든 자신이 진짜로 초연 때 단원들에게 지시한 퍼포먼스다.[17]

당시 고용주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도통 휴가를 주지 않아서 단원들의 마음을 헤아린 하이든이 이렇게 지시했고, 그 결과 휴가를 따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휴가를 따내기 위해 이런 걸 지시한 하이든이나 그걸 보고 휴가를 내준 후작이나 보통 인물은 아니었던 듯.


▲ 바렌보임의 빈필 신년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하이든의 고별교향곡. 차례차례 빠져나가는데 여기서는 4분 18초부터 보면 된다. 당황스러워하며 가지 말라고 손짓하는 지휘자[18]와 무시하고 나가는 단원이 유머. 5분쯤부터는 청중들도 웃는다. 개그의 절정은 곡이 끝나는 7분 이후.[19]

하지만 결혼 생활은 별로 유쾌하지 않으며 불행했다고 한다. 모르친 백작 집안에서 일할 때 마리아 안나 알로이지아 아폴로니아 켈러라는 3년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불행히도 아내 마리아는 드센 성격과 낭비벽으로 남편과의 갈등이 심했으며 남편의 음악 활동을 이해하지 않고 듣보잡 취급한 데다가[20] 결정적으로 불임이라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식을 가지지 못하여 서로 애정이 급속히 짜게 식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금지하고 있어서[21], 결국 부부 관계는 하이든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그 지긋지긋한 생활에 서로 질렸는지, 아예 각자 애인을 두고 살기까지 했다. 특히 하이든은 마리아를 "지옥에서 온 짐승"이라고 부를 정도로 미워했고 나중에는 별거하며 생활비만 보내줄 뿐 아내를 절대 찾지 않았다. 만년에 미사곡 창작에 몰두한 예를 봐도 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것 같은데, 아마 그 때문에 아내가 미워도 종교를 버려가면서까지 이혼을 하는 모험을 하지 않았을지도.

초상화를 보면 그럭저럭 준수한 외모처럼 보이지만, 당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키도 작고 어렸을 때 앓은 두창 때문에 얼굴에 얽은 자국이 계속 남아 있었다고 한다. 체격이 왜소해진 것은 어릴 적부터 도제식으로 음악교육을 받느라 그랬던 것 같은데, 한창 자라나야 할 청소년 시기에 배불리 먹기는커녕 스승들의 온갖 잡일에 시달려야 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청장년 시기에는 일종의 인후 질환인 비용종과 그로 인한 편두통에 시달리기도 했고, 종종 작곡 활동에 방해를 주기까지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이든을 탓하기가 뭣한 것이, 당시 작곡가라는 직업은 귀족 혹은 고위 성직자들에게 예속되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위치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룰을 스스로 거스르고 프리랜서를 자처했던 모차르트의 만년 생활은...[22] 이들은 안정된 주거 환경과 보수를 제공받는 대신, 고용주가 쓰라는 대로 곡을 계속 써야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작품에 오랜 시간과 공을 들이는 스타일의 창작가는 살아남기 힘들었고, 때로는 자신의 의지에 반해 별로 애착이 안가는 장르나 편성의 곡을 억지로 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숫자의 곡들을 근성으로 차근차근 들어보면 나름대로 발전 양상을 추적할 수 있고, 특히 말기에 가면 베토벤 등의 작풍을 예견할 만큼 원숙하고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작곡가 당대의 악기와 연주법을 고증해 재현하는 '시대연주'가 득세하면서 묻혀있던 많은 작품들이 리바이벌되고 있고, 재평가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이든의 손으로 쓰여진 모든 장르에서 고전 형식의 발전과 완성 양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천재성이나 베토벤의 혁신 기질 등 후배들의 후광에 눌린다고 해도 여전히 중요성을 잃지 않을 작곡가이기도 하다.

듣는 사람에게도 근성이 요구되지만, 전곡을 연주한다는 연주자들에게는 근성 이상의 대인군자+용자 기질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끈기있는 이들에게 종종 떡밥이 되곤 한다. 특히 100곡을 넘는 교향곡의 경우 많은 이들이 전곡 녹음에 도전했는데, 현재 딱 4명의 지휘자와 관현악단 만이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차례대로 오스트리아 지휘자인 에른스트 메르첸도르퍼와 빈 실내 관현악단, 헝가리 출신의 미국 지휘자인 언털 도라티와 필하르모니아 훙가리카, 역시 헝가리 지휘자인 피셔 아담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하이든 관현악단, 미국 지휘자인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와 슈투트가르트 실내 관현악단. 하지만 메르첸도르퍼의 경우 음반이 너무 극소량+제한적으로 풀려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23] 도라티가 최초인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청취자와 연주자 모두에게 근성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김성모. 근성이다?

2014부터 이탈리아 출신의 시대악기 지휘자인 지오반니 안토니니에 의해 하이든 탄생 300주년인 2032년(!) 완성을 목표로 한 교향곡 전곡 녹음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24]

물론 트리오나 현악 4중주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전곡을 녹음한 케이스는 많지 않다. CD 9장 분량으로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피아노 트리오도 보자르 트리오와 반 스베덴 트리오, 아이젠슈타트 하이든 트리오, 트리오 1790의 녹음 정도 밖에 없는 실정이고, 아예 장르 자체가 생소한 CD21장 분량의 바리톤 트리오는 앙상블 에스테르하지의 녹음 외에 전곡 녹음은 시도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친숙한 장르인 현악 사중주도 CD23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으로 인하여, 타트라이, 에올리안, 코다이, 앙헬레스, 부크베르거 4중주단 정도가 전곡 녹음의 위업을 달성하였고, 시대악기에서는 초기 곡을 제외하고 녹음한 페스타티치 4중주단이 전곡녹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기의 위업 중에 도라티, 피셔의 교향곡전집, 유일한 바리톤 트리오 전집을 남긴 앙상블 에스테르하지, 현악 사중주 전집을 남긴 타트라이, 코다이, 페스타티치는 모두 헝가리 단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아무래도 헝가리 귀족인 에스테르하지가의 음악가였던 만큼 생각 외로 헝가리에서 녹음에 근성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7. 작품 연구와 감상

7.1. 작품 연구

하이든 뿐 아니라 바로크와 고전 시대의 '양산형' 작곡가들 대부분에 해당되는 문제지만, 워낙 출판된 작품보다 그렇지 않은 곡들이 많고 악보의 소재도 명확하지 않아서 음악학자들의 애를 먹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교향곡의 경우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가 104곡으로 처음 정리했는데, 교향곡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것도 작곡 연대 추정에 관한 수많은 오류가 있는 조사였다.

1957년에는 네덜란드 음악학자인 안토니 판 호보켄이 자신의 성을 딴 '호보켄 작품번호(Hoboken-Verzeichnis. 약칭 Hob.)'로 장르별 작품들을 분류한 목록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현재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 번호 분류도 후배 음악학자들인 로빈스 랜던이나 옌스 페터 라르센, 솜파이 라즐로 등이 새롭게 발굴한 자료들을 통해 계속 오류를 지적했기 때문에 완벽한 목록으로 보기는 힘들다.

'창작 성향'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하이든의 명성에 편승해 무단 편집된 악보나 위작이 나도는 등 부작용도 많아 연구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개중에는 하이든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던 곡들까지 위작으로 판명되고 있는데, 현악 4중주 '세레나데'는 로만 호프슈테터라는 작곡가의 작품으로 사실상 확정된 상태다. 장난감 교향곡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여흥 음악인 카사치오네에서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이 3개 악장을 골라 편곡한 것으로 밝혀…진 줄 알았는데, 이게 끝이 아니다. 장난감 교향곡 참조.

반대로 타인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오던 것이 유력한 자필보나 필사보의 발견으로 하이든 작품임이 확실해진 경우도 있다. 첼로 협주곡 제2번의 경우 에스테르하지 악단의 첼리스트로 봉직했던 안토닌 크라프트의 작품으로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지만, 1951년에 하이든의 서명이 첨부된 자필 악보가 발견되어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외에도 당시에 반짝하고 사라진 악기들을 위해 쓴 곡들도 있는데, 이들 작품도 하이든의 고용주나 작품을 의뢰한 사람들의 취향과 당대 유행을 추측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즐겨 연주한 바리톤(현악기)(baryton)[25]이 포함되는 현악 3중주나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의 왕 페르디난도 1세의 주문으로 작곡한 리라 오르가니차타(Lira organizzata)[26] 협주곡이 대표적인 예.

7.2. 하이든의 음악 감상

하이든은 교향곡, 협주곡, 현악 4중주, 소나타 등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서양음악의 주요 양식을 정립한 음악가로서, 음악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하이든의 음악을 주로 찾아서 챙겨 듣는 사람들은 애호가들 중에서도 생각보다 보기 어려운데, 고전파의 다른 거장들인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존재감이 워낙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작품이 너무 많다(…). 애초에 전곡 연주에 도전하는 연주자/연주단체도 별로 없는 판국이니...

그 때문에 특정한 장르의 하이든 전곡 연주를 듣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또한 초기 작품은 아직 각 장르의 스타일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듣는 재미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따라서 하이든 음악 감상은 파리/런던 교향곡, 후기 현악 4중주, 첼로 협주곡, 트럼펫 협주곡, 후기 피아노 소나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등 원숙미를 보여 주는 후기 작품, 그리고 유명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며, 거기에서 취향이 맞으면 조금씩 감상 레퍼토리를 늘려 나가는 식이다.

하이든의 음악은 고전적인 양식미가 뚜렷하고 정갈한 호모포니(homophony) 음악이다. 그 때문에 처음 들을 때에는 조금 심심하다는 생각도 들 수 있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편안한 가운데 깊이를 발견할 수 있는, 일용하는 양식과도 같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8. 여담

8.1. 대중문화에서의 이용

원체 유명한 인물인 만큼 음악이 방송이나 영화, 광고의 BGM으로 쓰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의 경우 작품 목록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장학퀴즈의 시작 음악으로 오랫동안 쓰였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기상음악으로도 이용되었다. 제목이 붙어 있는 후기 교향곡이나 현악 4중주의 경우에도 이런저런 분야에서 사용된 바 있다.

8.2. 미하엘 하이든

요제프 하이든의 5살 반 아래 나이의 친동생 미하엘 하이든도 교향곡, 실내악, 협주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미사, 가곡 등 많은 장르에서 작품을 남긴 당대 명작곡가였다. 형 요제프가 당대 고전주의의 최신 트렌드, 즉 음악적 농담의 활용과 다이내믹을 이용한 극적 표현에 충실한 "베토벤스러운" 비엔나풍이라면 동생 미하엘은 전반적으로 전통적 대위법에 의한 반음계적 화성의 풍부함을 중시한 "모차르트스러운" 잘츠부르크풍이라고 볼수있다. 베버, 디아벨리 등 후대에 작곡가로써 활약할 여러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슈베르트가 매우 존경하였다.

천주교 미사곡 중에 하이든 작곡 성가들이 있는데, 이는 요제프 하이든이 아니고, 그의 동생인 요한 미하엘 하이든이다. 성가 작곡에 두각을 나타내었고, 요제프도 성가 작곡에 한해서는 동생이 자기보다 낫다고 부러워했었다.

8.3. 독일 국가 에피소드

현재 독일 국가로 쓰이고 있는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 또는 독일의 노래 Deutschlandlied)도 하이든 작품인데, 원래 1797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프란츠 2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영국의 국가를 좀 베껴서 지은 축가였다. 원제는 '하느님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을 개발살내기 시작하던 시기였던 만큼 그에 대항하는 애국주의 경향이 물씬 풍기는 가사 때문에 자주 애창되었다고 하고, 하이든도 말년에 건강 악화로 고통받으면서 자기 위안으로 이 멜로디를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이 멜로디에 독일의 시인이었던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August Heinrich Hoffmann von Fallersleben, 1798~1874)이 1841년에 독일 민족주의 성향의 3절로 된 새로운 가사를 붙였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 운동과 함께 일종의 애국가로 널리 보급되었다. 세기가 바뀌고 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이 곡은 독일을 상징하는 국가[27]로 계속 쓰였는데, 나치의 경우 1절만 채택해 나치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함께 국가로 지정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난 뒤, 동독서독은 서로 다른 국가를 채택해야 했다. 동독의 경우 요하네스 베허 작사/한스 아이슬러 작곡의 '폐허로부터 부활하여(Auferstanden aus Ruinen)'라는 노래를 새로 채택했지만, 서독에서는 호프만의 가사 중 '통일과 권리와 자유(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라는 3절만 공식 채택해 국가로 부활시켰다. 하지만 네오 나치들은 1절을 부르고 있다.

1990년에 통일이 되면서 새로운 국가 제정에 대한 떡밥이 던져졌는데, 그래서 다른 노래나 동서독 국가의 짬뽕 연주 등 온갖 대안이 이곳저곳에서 제시되었는데, 결국 흡수 통일한 서독 정부의 국가가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통일 당시에는 1절부터 3절까지 전곡을 부르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9. 관련 문서



[1] 가발 밑 코트 위에 하얀 가루가 잔뜩 떨어져 흰색이 되어 있는데, 18세기 당시 유럽에서는 머리카락이나 가발에 밀가루 혹은 분칠을 하여 하얗게 만드는 문화가 있었고, 그 가발의 염색을 위한 밀가루가 떨어진 것이다. 하이든이 아닌 모차르트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가발에 밀가루를 뿌리는 장면이 나온다.[2] Michael Lorenz, "Joseph Haydn's Real Wife", 2014.9.11.[3] 작곡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묵주기도를 할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4] 오징어 게임에도 매우 상징적으로 나오기에 이 영상 댓글에 오징어 게임 언급이 많아졌다.[5]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국왕을 겸하였으나 같은 군주를 모시는 동군연합이었을 뿐 두 나라는 사실상 남남이었다. 이는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실패하여 헝가리 왕국이 사실상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로 개편되는 1849년까지 이어졌다.[6] 1737~1806. 동생도 형만큼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교회음악을 많이 작곡하였으므로 교회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작품 수는 소실된 것을 제외하면 총 838개의 작품을 남겼다.[7] 파리넬리요한 아돌프 하세의 스승이기도 하다.[8] 이 때의 악장은 귀족 가문의 전속 최고 작곡가라는 의미로, 오늘날 관현악단에서 수석 제1바이올린 주자가 맡는 악장(concert master)과는 아예 다른 개념이다.[9] 참고로 이 가문 집사의 아들이 바로 프란츠 리스트다. 아쉽게도 하이든이 사망한지 2년 후에 리스트가 태어나서 두 거장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10] 이후 하세는 15살의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스카니오"를 관람하고서도 호평을 남기기도 하였다.[11] 현기증이 자주 오고 다리가 붓고 아파서 거동조차 힘들었다.[12] 다만 그래도 하이든은 고전 작곡가들 중에선 가장 장수한 편이다. 특히 하이든은 그의 아내 마리아보다 더 오래 살았다. 일례로 조카뻘 세대 후배인 모차르트의 경우 하이든보다 17년 먼저 죽었고, 하이든의 절반도 채 살지 못하였다. 사실 전근대의 경우 워낙 인간의 평균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모차르트가 이례적으로 단명했다기 보다는 하이든이 이례적으로 장수한 것에 가깝다.[13] 하이든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유명해서, 나폴레옹은 헌병 2명을 보내 하이든의 집을 경비하게 하였다고 한다.[14] 참조.[15] 骨相學, phrenology. 두개골과 두뇌의 형상을 통해, 머리의 각 부분이 사람과 그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추정하는 우생학의 일종.[16] 오스트리아 대통령도 참석[17] 출판 악보에는 단순히 연주가 끝나는 파트 악보에 마침표만 되어 있고, 하이든 자신은 거기에 독일어로 nichts mehr(더 이상 없음)라고만 적었다. 하지만 현대에 연주할 때도 음반 제작용 스튜디오 녹음이 아닌 한 초연 때처럼 진짜 단원들이 나가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 공연에 따라서 다양하게 연출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지휘자가 빡쳐서 나간다거나(...)[18] 연기가 전문 배우 뺨친다[19] 거의 마지막쯤에 안 나가고 자리를 지키는 단원의 머리를 인자하고 온화한 웃음을 보이며 쓰다듬어준다. 그런데 그 단원을 포함한 마지막 2명마저도 자리를 비우고 무대를 떠나지만 지휘에 몰두한 지휘자는 그것도 모르고 지휘를 이어가다가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걸 이상하게 여기며 귀를 기울이기까지 한다. 심지어 악단의 퍼포먼스에 청중이 박수를 치자 뒤를 돌아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까지 보내지만 결국 단원이 모두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해하는 지휘자의 표정이 킬포.ㅋㅋㅋㅋㅋㅋㅋㅋㅋ[20] 하이든의 친필 악보를 냄비받침 취급하여 손상시키거나, 심지어는 벽난로에 땔감으로 쓴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때문에 후대의 후대까지 욕을 거하게 먹고 있다.[21] 현재도 가톨릭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혼인무효'라는 것은 있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22] 사실 모차르트는 본인이 재산관리를 잘 못했던 부분도 무시할순 없다.[23] 미국의 동호회인 Musical Heritage Society에서만 발매되었는데, 최근 들어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존재감은 여전히 공기이다. 이외에 Haydn House에서 DVD로 발매한 전곡 음원이 존재한다.[24] 1990년대에 영국 출신의 호그우드가 진행하던 교향곡 전곡 계획은 잘 진행되다가 파리 교향곡, 런던 교향곡 등의 주요 교향곡들의 녹음을 남겨두고 무산된 적이 있다.[25] 첼로 크기의 7현악기. 하지만 7현은 활로 긋는 현의 숫자고, 그 뒤에 긋는 현과 같이 울리는 공명현(resonance strings)이 12개 가량 더 달려 있다.[26] 현악기지만, 활로 긋거나 손가락으로 퉁기지 않고 악기의 핸들을 돌려 소리를 내는 드렐라이어 계통의 악기였다.[2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가로도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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