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3:08:44

엑토르 베를리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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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엑토르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rlioz_young.jpg
베를리오즈의 초상화. 29세였던 1832년에 그린 것이다.
본명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1]
Louis Hector Berlioz
출생 1803년 12월 11일
프랑스 제1공화국 라 코트 생 앙드레
사망 1869년 3월 8일 (향년 65세)
프랑스 제국 파리
직업 작곡가, 지휘자, 평론가
사조 전기 낭만주의[2]
종교 무종교(불가지론)[3]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해리엇 스미드슨과의 결혼2.3. 국제적인 명성과 재혼2.4. 말년
3. 베를리오즈의 음악
3.1. 표제음악의 창시자3.2.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사용3.3. 파격적인 형식
4. 여담5. 작품
5.1. 교향곡5.2. 관현악5.3. 오페라5.4. 가곡5.5. 합창
6. 기타 사항

[clearfix]

1. 개요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및 음악 평론가. 낭만주의 음악가 가운데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로 표제음악의 개척자이자 관현악 기법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2. 생애

2.1. 초기

1803년 프랑스 리옹 근교의 라 코트 생 앙드레(La côte-St-André)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 때는 음악에 큰 흥미가 없었는지 플루트기타만 조금 만졌을 뿐 악기를 제대로 배운 경험이 없었다. 심지어는 피아노마저.[4]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7세의 나이로 파리의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18살 때 병원의 열악한 위생환경을 보고 구토를 하고 의학에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일기에도 기록이 남아있는데, 죽은 환자를 대충 둔 영안실에[5] 쥐들이 들끓어 죽은 환자를 갉아먹고 있었고 온갖 토사물과 쥐의 배설물이 병원 곳곳에 대충 치워진 채로 있었다. 이게 당시 파리 내의 대형 병원의 모습이었다.[6] 결국 그 광경에 충격을 먹은 베를리오즈는 창문을 뛰어넘어 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 이후 베를리오즈는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력을 느껴 작곡가가 되고자 진로를 바꾸게 된다. 이후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826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했으나, 보수적인 교수들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이때 파리 음악원 학생에게 주는 '로마 대상'[7]을 타기 위해 칸타타 작곡에 도전했다. 음악원 첫해인 1826년에는 사전심사에서 탈락, 1827년에는 칸타타 "오르페우스의 죽음", 1828년에는 "에르미니", 1829년에는 "클레오파트라"를 제출했으나 모두 탈락했다. 그리고 1830년 4번째 도전에서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으로 드디어 로마 대상 수상에 성공한다. 1830년 당시 프랑스는 7월 혁명이 한창이었는데, 베를리오즈는 작곡을 마친 직후 총을 들고 혁명에 참여했다고 한다.
파일:harriet smithson.jpg
오필리아로 분장한 해리엇 스미드슨

한편 1827년 가을 파리에서는 영국에서 온 연극단이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이들의 햄릿 공연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햄릿의 성공에 고무된 연극단은 이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해서 다시 큰 성공을 거둔다. 베를리오즈 역시 유행을 따라 햄릿 공연을 보다가 오필리아 역할을 맡은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을 보고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이 짝사랑은 정도가 심해져서 한동안 거의 상사병 수준에 달했는데, 그는 해리엇이 머무르는 아파트 근처에 숙소를 잡고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았다.[8] 베를리오즈는 해리엇에게 틈틈이 연서(戀書)를 보내고 1828년 자신의 연주회를 개최하면서 해리엇 스미드슨에게 초대장을 보내기도 했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여배우는 세 살 어린 무명의 음악학도 따위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베를리오즈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828년부터 그의 대표작인 환상교향곡 작곡을 시작했다. 이 곡은 5악장으로 구성되었고 각 악장마다 제목이 붙어있는데, 1악장 '꿈,정열', 2악장 '무도회', 3악장 '전원의 풍경', 그리고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 5악장 '마녀들의 밤의 꿈'이다. 4악장부터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무시무시한 제목이 붙은 이유는 3악장까지 잘 쓰다가 해리엇이 다른 남자에게 갔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홧김에 4, 5악장을 작곡하여 완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해리엇은 1829년 3월경 연극단을 따라 파리를 떠났고 이후 한참동안 베를리오즈를 만날 일이 없었다.

환상교향곡을 완성한 후 해리엇에 대한 연정을 간신히 억누른 베를리오즈는 이어 마리 모크라는 젊은 피아니스트와 사귀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베를리오즈는 로마대상을 타게 됐는데 마리 모크와의 연애때문에 그토록 고대했던 로마 유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국의 강압에 못이겨 결국은 로마로 떠났는데, 로마로 떠나기 전 베를리오즈는 마리와 약혼까지 하면서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리는 우려했던 대로 베를리오즈가 로마에 있는 동안 변심해서 약혼을 깨고 돈 많은 피아노 제조업자 가문인 플레옐 집안의[9] 아들과 카미유 플레옐과 결혼해 버린다.[10][11]
파일:Marie-Moke-Pleyel.jpg
마리 모크(플레이엘), 1830년경

격정의 사나이 베를리오즈는 이 소식을 접하고 자살 소동을 일으켰다가 주변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했고 "파리로 가서 두 악녀(마리와 그 모친)와 무고한 한 남자(플레이엘)를 죽여버리겠다"면서 실제로 택도 없는 살인 계획까지 세워서 파리로 향했다.[12] 다행히 도중에 포기하고 로마로 돌아온 베를리오즈는 환상교향곡의 연작에 해당되는 "렐리오 : 삶으로의 복귀('Lélio ou Le retour à la vie)"라는 작품을 쓰면서 마리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환상교향곡이 순수한 관현악 작품인 반면 렐리오는 4부 독창(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과 합창이 포함된 일종의 칸타타로 모노드라마(1인극)가 가미돼서 세미 오페라식으로 연주된다.[13] 렐리오

2.2. 해리엇 스미드슨과의 결혼

원래 로마유학은 3년 예정이었지만 로마 생활에 싫증난데다 빌라 메디치의 음악공부가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다고 판단한 베를리오즈는 2년만인 1832년 11월에 파리로 돌아왔으며 직후에 환상교향곡 연주회를 개최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베를리오즈는 로마로 떠나기 직전인 1830년 12월 파리에서 환상교향곡을 초연해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2년 후에는 더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나름 유명 작곡가 반열에 올라섰다.

베를리오즈에게 이 연주회가 특기할만한 것은 연주회의 성공 자체보다도 자신이 꿈에도 그렸던 해리엇 스미드슨이 이 연주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직접 해리엇을 연주회에 초대하지 않았으나 베를리오즈의 지인들이 그녀를 부추겨서 연주회에 데려온 것. 1832년 당시 해리엇은 특급 히로인으로 각광받았던 5년 전과 달리 계속 공연이 실패한데다 불어난 체중 탓에 더 이상 여주인공 역할을 맡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잃고 상심하고 있던 해리엇은 이 놀랍고 기괴한 교향곡이 자신을 모델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베를리오즈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베를리오즈 역시 해리엇과 재회하자 소시적의 연정이 되살아났다. 베를리오즈가 평생 똑똑히 기억했던 날짜인 1832년 12월 9일을 기점으로 둘은 본격적으로 사귀게 된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서 베를리오즈는 떠오르는 젊은 작곡가가 되었고 해리엇 스미드슨은 내리막길에 있었지만 베를리오즈에게 그런 세속적인 사항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1833년 10월에 결국 결혼을 강행한다.[14] 그리고 이듬해 8월 두 사람은 유일한 아들 루이 베를리오즈(Louis-Clément-Thomas Berlioz)를 낳는다.

이렇게 어렵게 결혼을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을텐데......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 초기 빚에 쪼들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갖고 있던 환상은 금세 깨어져 버렸다. 그나마 처음 몇년간은 큰 풍파 없이 지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인기가 쇠락하면서 퇴물 배우가 되어 버린 해리엇은 잘나가는 남편에 대해 점점 집착하기 시작했다.[15]

둘 모두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자주 싸움이 벌어졌고 해리엇의 의부증에 가까운 집착에 질려버린 베를리오즈는 점차 그녀를 멀리하게 된다. 베를리오즈가 스페인 출신의 여가수 마리 레치오(Marie Recio)와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서 베를리오즈와 해리엇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맞게 되고, 결국 1843년 두 사람은 이혼하고 아들 루이는 베를리오즈가 키우게 된다. 이후 해리엇은 알콜중독에 시달렸고 파리 근교에 살다가 1854년 쓸쓸하게 죽었는데, 비록 이혼을 했지만 베를리오즈는 해리엇에게 평생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으며 종종 그녀의 집을 방문하였다. 1848년 그녀가 심장병으로 쓰러진 후에는 치료비와 간호비도 모두 부담했으며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재혼도 하지 않았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인간적인 도리는 다 했던 것.

결혼 초기 베를리오즈는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16] 작곡보다는 각종 잡지에 비평문을 기고하고 원고료를 받아서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는 이 일을 내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쓴 글들이 나름의 지지를 얻으면서 음악비평가/이론가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베를리오즈는 경제사정이 나아진 후에도 평생 음악관련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17]

또한 당장 큰 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작곡가로서도 승승장구했다. 관현악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쇼팽리스트와 같은 뛰어난 음악가들과 우정을 쌓았으며 이들은 베를리오즈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결혼 초기에 물심 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쇼팽과 리스트는 헤리엇의 공연에 찬조 출연해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공연 수익 전액을 신혼부부의 생활비 및 빚 변제에 쓰라고 주기도 했다. 한편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을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해서 악보를 출판하고 연주회를 개최하면서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18]

1834년에는 환상교향곡에 감명받은 파가니니가 베를리오즈를 찾아왔다. 당시 유럽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던 파가니니는 자신이 최근에 구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비올라를 연주해보고 싶다면서 비올라를 활용하는 곡을 작곡해달라고 의뢰했다. 파가니니의 의뢰로 탄생한 이 곡이 바로 그의 두 번째 교향곡인 "이탈리아의 해롤드"이다. 하지만 이 교향곡을 살펴본 파가니니는 실망을 표시하며 자신의 의도와 맞지 않는 곡이라며 연주를 거절했는데, 이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파가니니가 원하는 것처럼 비올라의 비중이 높은 작품도 아니고 비올라 독주부도 현란한 초절기교와는 거리가 먼 철저하게 교항악적인 곡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은 1834년 11월 다른 연주자에 의해 초연되었다.[19]

정작 의뢰인이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성공을 거두었다. 파가니니 역시 1838년 연주회에서 베를리오즈가 지휘한 이태리의 해롤드 연주를 감상한 후 자신의 안목이 좁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 작품을 크게 칭찬했다. 며칠 뒤 파가니니는 2만 프랑이라는 거액의 수표를 베를리오즈에게 전달했으며 이로써 작곡가 부부는 경제적 궁핍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오페라 분야에 도전하게 된다.[20] 그는 1836년부터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풍운아였던 "벤베누토 첼리니"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1838년 작곡을 완료한 후 파리에서 초연했다. 하지만 초연은 대실패로 끝났으며 겨우 4번 상연된 후에 극장에서 내려갔다. 이 벤베누토 첼리니는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일관성 없이 혼란스러운데다 어떤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다가 어떤 장면은 처절한 비극성이 두드러지는 등 스타일도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은 이 오페라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21] 오페라의 음악은 상당히 훌륭했지만 연출자와 가수들은 음악이 너무 낯설고 부르기 어렵다면서 작곡가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1837년에는 7월 혁명으로 집권한 프랑스의 7월 왕정으로부터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진혼곡(requiem)을 의뢰받아서 같은 해에 초연했으며 1839년에는 자신의 세 번째 교향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초연했다.[22] 1840년에는 역시 7월 왕정의 의뢰로 7월 혁명 10주년 기념식에 연주할 장송과 승리의 대 교향곡(Grande symphonie funèbre et triomphale)을 작곡했다. 이 교향곡은 기념식에 걸맞게 화려한 금관악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기념식 당시 200명이나 되는 연주자를 동원했음에도 연주자들이 자기가 연주하는 악기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을 정도로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2.3. 국제적인 명성과 재혼

비록 야심차게 작곡한 첫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베를리오즈는 극음악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프랑스 극장의 요청으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프랑스풍으로 개작했으며 그의 피아노곡 '무도회의 권유'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또한 1841년 오페라 피투성이 수녀(La nonne sanglante, The bloody nun)의 작곡을 시작했지만 첫 오페라의 실패로 인한 좌절감 때문인지 작곡은 지지부진했으며 5년 넘게 시간을 끌다가 결국 포기했다.

오페라 분야에서의 부진과 별도로 1840년대부터 그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그의 작품이 연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베를리오즈는 1842년부터 본격적으로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연주여행을 하면서 그는 작곡가로서 뿐만 아니라 열정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지휘자로도 이름을 날리게 된다. 1843년에는 독일에서 멘델스존슈만(라이프치히), 바그너(드레스덴) 등 당대의 유명 작곡가들을 만나게 된다.
파일:Marie recio.jpg
마리 레치오

한편 사생활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는데, 1841년에는 전술한 것처럼 11살 연하의 여가수 마리 레치오와 사제관계를 넘어 연인관계가 되었으며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연주여행에 마리 레치오를 자주 동반했다.가뜩이나 남편의 성공에 질투심을 느끼고 있던 해리엇 스미드슨은 당연히 이에 크게 분노했고 일찌감치 삐걱거렸던 두 사람은 결국 1843년에 이혼하게 된다.[23]

이혼으로 홀가분해진 베를리오즈는 마리 레치오와 함께 연주여행에 더욱 전념하게 된다. 그의 연주여행은 1850년대까지 계속 됐는데 여기에는 나름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무능한 7월 왕정의 거듭된 실정으로 인해 각지에서 소요와 탄압이 계속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고 예술분야에서도 자주 검열과 감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대로 된 음악활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1848년에 2월 혁명이 발발해서 7월 왕정은 무너지고 루이필리프 1세는 영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한편으로 그가 연주여행을 자주 다닌 배경에는 프랑스의 청중들이 그의 음악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다. 소나타나 대위법 등의 전통적인 작곡 양식을 거부하고 대담한 화성을 시도하고 표제성을 강조하는 그의 음악은 자주 논란을 일으켰으며 보수적인 청중과 평론가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그의 음악은 논란을 일으켰는데, 멘델스존은 그의 관현악곡 악보를 보고 '관현악 수법이 너무 지저분해서 악보를 만진 손을 씻어야 할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1846년 그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오라토리오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이 파리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객석이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베를리오즈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24] 이 빚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로 연주여행을 떠났고 여기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야(체코) 등을 거쳐 1847년 가을에는 영국 런던에서 몇달간 머물렀는데 여기서도 큰 환영을 받았다.

영국에서의 성공에 고무된 베를리오즈는 1853년까지 총 4차례 런던을 방문했으며 작곡가/지휘자로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애증의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만은 영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코벤트 가든에서 한 번 공연된 후 반응이 좋지 않자 그대로 극장에서 내려갔다. 이 작품은 리스트가 개작을 해서(물론 원작자의 동의 하에) 1852년에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다시 상연됐지만 역시나 대본이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런던에서 공연되었을 때 보다는 반응이 괜찮아서 여러 번 상연이 되었다는 것이 위안거리.

1854년 3월에 전처 해리엣 스미드슨이 사망하자 베를리오즈는 상주로써 그녀의 장례를 치렀다. 같은 해 10월에는 장기간 연인관계를 유지했던 마리 레치오와 정식으로 재혼했다. 베를리오즈는 파우스트 겁벌의 실패 이후 작품활동 보다는 주로 지휘와 글쓰기에 전념했는데, 그나마 1854년에 또하나의 오라토리오 대작 "예수의 어린 생애(L'Enfance du Christ)"가 완성되었다. 이 예수의 어린 생애는 파우스트 겁벌과 달리 초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전작과 달리 좀더 전통적이고 무난한 작법을 적용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2.4. 말년

1856년 독일 방문에서 리스트 부부[25]의 격려를 받은 베를리오즈는 벤베누토 첼리니의 좌절을 딛고 다시 한 번 오페라 장르에 도전을 선언했다. 이번에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대본을 작성했으며 "트로이인(Les Troyens)"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1858년경 악보 자체는 완성되었으나 공연이 문제였다. 1860년대의 프랑스는 그랜드 오페라의 유행이 지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주시간이 5시간이 넘는 5막의 대규모 오페라를 공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공연할 곳을 찾지 못한 베를리오즈는 결국 오페라를 둘로 나누어 처음 2막을 "트로이의 몰락", 후반부 3막을 "카르타고의 트로이인"으로 재편했다. 하지만 트로이의 몰락은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그나마 카르타고의 트로이인이 1863년에 대폭 축소된 버전으로 공연되었는데,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의도대로 상연되지 않은 이 공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역시나 흥행도 저조했다.

심혈을 기울인 오페라 트로이인에서 또 한번 좌절을 맛본 베를리오즈는 이후 1868년 사망할때까지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았으며 몇몇 편곡작품만 남겼다. 대신 지휘와 저술활동은 죽을 때까지 계속 했다.

다만 이 기간동안 그의 세 번째 오페라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Béatrice et Bénédict)"가 작곡되었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극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을 바탕으로 한 2막의 오페라로 베를리오즈가 직접 대본을 작성했으며 원작의 분위기를 살려서 코믹오페라 스타일로 작곡되었다. 당시 프랑스보다 독일에서 더 인기가 높았던 베를리오즈는 이 오페라를 독일에서 먼저 공연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이 오페라는 1862년 작곡자의 지휘로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초연되었고 이듬해에는 독일어로 편곡한 버전이 바이마르에서 공연되었다. 흥행에 실패한 벤베누토 첼리니나 제대로 상연조차 되지 못한 트로이인과 달리 그나마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는 독일 한정이긴 하지만 꽤 큰 성공을 거두면서 오페라에 대한 그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그간 궁핍과 안정을 반복했던 베를리오즈는 1856년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의 회원이 되면서 비로소 경제적 불안정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말년의 베를리오즈는 꽤 성공해서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문제는 그의 생전에 가족과 친척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 1862년에는 둘째 부인 마리 레치오가 48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사망원인은 불명). 이어 그의 누이들이 연속해서 세상을 떠났고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둘째 부인이 사망한 후 아멜리에라는 젊은 여성을 잠시 만났는데 그녀도 26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충격은 1867년 상선의 선장이 된 유일한 아들 루이가 쿠바의 아바나에서 황열병으로 죽었다는 것. 이 힘들었던 시기에 그나마 소시적 짝사랑이었던 4살 연상의 미망인 에스텔(Estelle)과 재회한 것이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부인에 이어 아들까지 잃고 비탄에 빠진 베를리오즈는 삶의 의욕을 찾기 위해 러시아 연주여행을 떠났으며, 러시아에서 다시 한번 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건강에 이상을 느낀 베를리오즈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며, 잠시 회복세를 보여서 그르노블에서 열린 음악축제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결국 1869년 3월에 파리에서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몽마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26]

3. 베를리오즈의 음악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낭만주의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문헌에서 그를 낭만주의 후기 작곡가로 소개하고 있는데, 시기적으로만 보면 그는 활동한 시기는 주로 낭만주의 초창기였다. 나이로 봐도 낭만주의 초기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슈베르트보다 겨우 6살 후배이고 멘델스존보다는 6살 선배이다. 하지만 그가 자주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로 소개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음악이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이고 특이했기 때문이다.

음악 전문가들은 베를리오즈에 대해 입을 모아 "음악적으로 누구의 후계자도 아니며 또 누구도 그의 후계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27] 즉 베를리오즈는 특정한 음악 사조에 구속된 작곡가가 아니었고 한편으로 자신이 특정한 유파를 만들지도 않았던 일종의 이단아였는데, 좋게 말하면 시대를 앞서간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별로 후술.

3.1. 표제음악의 창시자

베를리오즈는 표제음악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이루 리스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등의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표제음악에 대한 개요는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물론 베를리오즈 이전에도 표제음악 성격의 작품이 꽤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안토니오 비발디사계협주곡과 베토벤전원 교향곡. 사계는 작자 불명의 소네트(14행의 짧은 시)를 바탕으로 쓴 곡이고 전원 교향곡은 각 악장마다 음악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만 보면 두 작품 모두 전통적인 음악 양식(사계의 경우 콘체르토 그로소, 전원 교향곡의 경우 소나타/론도/스케르초 등)을 충실히 준수하고 있고, 다만 여기에 제목에 걸맞은 음악적 효과를 구현했을 뿐이다.

하지만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음악 자체를 표제에 종속시켰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곡가들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3.2.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사용

오케스트라에 온갖 악기를 총 동원, 가능한 한 음색을 화려하게 내길 좋아했다. 레퀴엠의 경우에는 4관 편성[28]바순을 8대로 확장, 호른을 12대, 튜바를 4-6대로 쓸 것을 명시하고, 타악기팀파니만 10명, 그 외에도 9명을 더 썼다. 거기다 성악곡이니 210명의 합창단[29] + 테너 독창까지 들어갔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것과는 별도로 금관악기로 이루어진 4-8명의 주자가 동서남북으로 위치해 있다. [30]

이것 때문에 지휘자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과 잦은 마찰을 빚어야 했다. 연주자가 부족해 다른 오케스트라의 단원이나 객원 연주자를 쓰고 특수 악기를 대여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 그런데 그는 오히려 다른 작곡가들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고. 하지만 이런 점 때문에 현재까지도 그의 작품은 명성에 비해 연주 횟수가 적고 그나마도 편성을 줄여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3.3. 파격적인 형식

그의 음악은 기존의 확립된 음악양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으며 파격적인 구성을 많이 시도했다.

그의 교향곡만 보아도 이런 점이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첫 번째 교향곡인 '환상교향곡'은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교향곡인 '이탈리아의 해롤드'는 4악장으로 정상적인 듯... 싶지만 비올라가 협주 악기로 붙어있다. 세 번째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예 악장도 아니라 연극처럼 막장막, 장으로 곡을 나누었고, 마지막 '장송과 승리의 대 교향곡'은 취주악단을 위해 쓴 3악장제 교향곡이다.

단순히 악장의 개수만 다른게 아니라 형식 자체도 소나타 양식이나 론도, 스케르초 등과 같은 전통적인 교향곡 작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사실 벗어나 있다기보다 애초에 형식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데, 그의 작품은 대체로 규모가 상당히 큰데도 불구하고 제시된 악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발전시키기 보다는 특유의 스토리텔링 의식의 흐름 방식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형식 외에 화성 처리도 좋게 말하면 파격적이고 안좋게 말하면 규칙성이 없어서 산만하게 느껴진다. 그가 후계자나 제자를 남기지 않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데,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단순한 형식 파괴를 누군가에게 음악 기법적으로 전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치밀하지 못한 악상 전개와 거의 무형식에 가까운 구성은 그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논란이 되는 사안인데, 놀라운 것은 이런 심각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전체적으로 봤을때 지리멸렬하지 않고 나름의 재미와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베를리오즈 음악 특유의 '매력적인 무형식'은 기법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으며 거의 전적으로 그의 음악적 재능의 산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이렇게 형식 파괴에 앞장섰던 베를리오즈가 정작 가장 존경했던 음악가가 베토벤이었다는 것(..) 그가 남긴 저작들을 봐도 그렇고 치밀한 악상 전개와 견고한 구축력의 대명사인 베토벤을 존경했던 것도 그렇고 베를리오즈는 기존의 음악 형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음악가는 결코 아니었다. 다만 기질적으로 형식에 맞춰 작곡하는 것을 싫어했을 뿐.

베를리오즈는 관현악의 대가답게 가곡도 피아노 대신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했다. 이후 말러리하르트 슈트라우스등의 오케스트라의 대가들도 가곡을 작곡할 때 오케스트라 반주를 적극 활용했다.

4. 여담

베를리오즈는 기행으로 유명하였는데, 밤에 잠을 자다 사라지질 않나, 연극을 보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질 않나, 거기다 가끔씩 집을 나와 숲에 잠적해 친구들이 찾으러 가기도 했다고. 뿐만 아니라 언젠가 펠릭스 멘델스존이 그에게 최고급 지휘봉을 선물해서 그도 답례로 지휘봉을 보냈는데... 그 지휘봉의 정체는 나뭇가지였고 잘 다듬어 쓰라고 했다.

연애와 관련된 사건들도 비범하다. 그가 벨기에 출신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와 약혼을 한 후 로마로 떠났는데, 그 사이에 약혼녀 쪽에서 파혼을 하고 플레옐 피아노[31] 사의 대표 카미유 플레옐에게 시집을 보낸 것. 그러자 그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면서 살인 계획을 세웠는데, 비범하기 짝이 없다.
  1. 권총 두 자루, 독약을 준비한다.
  2. 약혼녀가 있는 파리로 간다.
  3. 메이드로 변장한 후(...) 권총으로 둘을 쏜다.
  4. 실패하면 독약을 사용한다. 참 쉽죠?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실제로 실행하기 위해 권총과 독약, 변장도구까지 준비를 하고 갔는데... 중간에 가던 길에 계획을 취소하고 그냥 간 김에 휴식만 취하다 왔다고.[32] 에이 아깝다

생애 항목의 여러 사건사고만 봐도 알겠지만 감정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시를 읽다가 감상에 젖기도 하고, 첫사랑을 나이들어서까지 잊지 못하기도 하고, 공연을 보던 중 감격하여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때 옆 사람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는데, 그 사람과는 초면이었다고...

이러다보니, 1865년에 해리엇 스미드슨 무덤을 옮기고자 무덤을 팔때, 관 속을 보게되어 뼈만 남은 전처를 본 베를리오즈는 충격을 크게 받아 사람이 죽으면 뼈나 남길뿐, 천국도 지옥도 과연 있을까? 라고 일기에 썼다고 한다.

5. 작품

《베토벤과 아홉 교향곡》(이충훈 역, 포노, 2020). 한국어판. 베를리오즈의 평론집 《노래를 가로질러À travers chants》(1862)에 실린 베토벤 관련 평론 다섯 편과 그의 초기 평론 중 하나인 베토벤 전기를 한데 엮은 것이다.

5.1. 교향곡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
  • 환상교향곡 : 보통은 이 곡만 주로 연주되고 있지만, 속편인 '렐리오, 삶으로 복귀하다'라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전편의 '환상'에서 깨어난 1인 배우의 독백과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교차하는 연극적 무대인데 대본까지 직접 쓴 베를리오즈는 '서정적 독백극(Monodrame Lyrique)'라는 장르명을 붙였다.
  • 비올라와 관현악을 위한 이탈리아의 해롤드
  •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로미오와 줄리엣
  • 관악합주, 현악 애드리브, 타악기를 위한 장송과 승리의 대교향곡

5.2. 관현악

리어왕 서곡

오페라 서곡은 제외함.
  • 로마의 사육제 서곡: 원래 오페라 '벤베누토 첼리니'에 삽입된 곡이었는데, 오페라가 망해버리자 연주회용 서곡으로 다시 만든다.
  • 해적 서곡
  • 서곡 '리어왕'
  • 서곡 '웨이벌리'
  • 라코치 행진곡: 헝가리 행진곡으로도 부르는데, 파우스트의 겁벌의 일부를 연주회용으로 편집한 것이다.

5.3. 오페라

  • 벤베누토 첼리니
  • 트로이인
  • 베아트릭스와 베네딕트 : 셰익스피어의 희곡 '헛소동'을 원작으로 한다.

5.4. 가곡

가곡집 여름밤
  • 가곡집 여름밤

5.5. 합창

테 데움
  • 장엄 미사
  • 레퀴엠 : 정식 명칭은 '죽은 자를 위한 대미사곡'이다.
  • 테 데움
  •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 파우스트의 겁벌 : 경우에 따라 오페라로 보기도 한다.
  • 칸타타 '오르페우스의 죽음'
  • 칸타타 에르미니
  • 칸타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죽음

6. 기타 사항

의외로 영화에 사용된 사례가 적다. 샤이닝에서 오프닝 부분에 사용된 것과, '적과의 동침'에서 쓰인 것 외에는 거의 없을 정도.

아머드 코어 4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베를리오즈라는 링크스가 존재. 랭크 1이며, 등장 미션명도 단두대로의 행진이다. 기체명마저 슈플리체.

"파우스트의 겁벌" 중 헝가리 행진곡은 게임 포르자 호라이즌 5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었다.


[1] 현지 언어 발음으로는 '루이 엑토흐 베흘리오즈'에 가깝다.[2] 그러나 활동 시기가 전기 낭만주의 시기였을 뿐, 그의 음악이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후기 낭만주의'로 분류되는 문헌들이 상당수 있다. 하단 참고.[3] 불가지론자이지만 레퀴엠과 미사곡을 쓴 적이 있다.[4] 작곡자에게 피아노는 거의 의무교육 대상 악기이다. 어떤 곡을 작곡하건 일단 피아노로 스케치를 해보는 것은 작곡의 가장 중요한 기초이다. 현재에도 웬만한 대학 작곡과 입학 시험에는 무조건 '피아노 연주' 실기 시험이 있다. 하지만 베를리오즈는 평생 피아노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이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피아노 독주곡은 단 한 곡도 남기지 않았다.[5] 물론 당시에는 냉장고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라 시신이 부패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6] 파리 뿐 아니라 당시 유럽이나 세계 많은 나라들 병원들이 이랬다. 덕분에 귀족들은 병원에 가느니 그냥 의사를 집으로 데려와 왕진받고 수술받게 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세균이나 위생에 대하여 몰랐던 시절이었기에 병원 말고도 식당 주방이나 푸줏간도 비슷했다. 결국 수십 년이 지나고 19세기 중후반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루이 파스퇴르의 세균 연구가 입증되고 나서야 위생 관념이 생기면서 세균에 의한 사망률이 대폭 하락하게 되었다.[7] 수상자에게 3년간 국비로 로마의 빌라 메디치에서 공부할 수 있는 혜택을 주는 제도이다. 이 상을 받은 작곡가들로는 드뷔시, 비제 등이 있으며, 카미유 생상스, 모리스 라벨 등의 작곡가들 역시 탈락할 정도였다.[8]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스토킹을 한 셈인데, 다행히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9] 쇼팽이 애호했던 것으로 유명한 플레옐 피아노를 만든 집안이다.[10] 참고로 이 마리 모크 플레옐이 바로 리스트가 쇼팽의 집에서 몰래 관계를 가졌던 그 플레옐 부인이다. 프란츠 리스트 항목 참고.[11] 마리 플레옐은 리스트 외에도 여러 사람과 염문을 뿌렸고 결국 카미유 플례옐과 몇년만에 이혼한 후 자유부인(?)으로 살았다.[12] 베를리오즈는 마리 모친이 마리를 부추겨서 자신과의 약혼을 깨고 돈많은 남자와 결혼시켰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편지로 마리 모크의 결혼소식을 알린 것도 그녀의 모친이었다. 그래서 복수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13] 보통 환상교향곡을 사랑과 실연의 연작 1부, 렐리오를 2부로 놓는데 렐리오는 환상교향곡보다 인지도가 약한데다가 훨씬 대규모의 연주단이 필요한 탓에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14] 10살의 나이 차이도 차이인데다 언어의 장벽까지 있었기 때문에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해리엇은 프랑스어를 거의 할 줄 몰랐고 베를리오즈도 영어가 서툴렀다. 그런데 어떻게 사귄거야[15] 이렇게 된 것은 해리엇의 나이와 비대해진 몸집 탓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의 언어 능력이 문제였다. 프랑스에서 살게 된 후에도 그녀는 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했으며 평생 프랑스어에 서툴렀다.[16] 그나마 로마 대상 수상자가 돼서 1830년부터 1835년까지 5년간 장학금을 받았는데 액수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17] 베를리오즈가 저술한 "관현악법"은 해당분야의 고전이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관현악을 공부하는 음악가 지망생들이 반드시 참고하는 책이다. 그가 쓴 회고록 역시 19세기 유럽음악을 연구할 때 반드시 참고하는 중요한 책이다.[18] 베를리오즈 당시에 오케스트라 연주회는 자주 개최하기 쉽지 않았다(심지어 현재에도 오페라 공연이나 관현악 연주회보다 독주 연주회가 훨씬 자주 개최된다는 것을 상기하자). 더구나 베를리오즈의 작품처럼 큰 편성을 갖는 관현악곡은 정말 많은 연주자와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더더욱 개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베를리오즈 입장에서 리스트가 자신의 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서 자주 연주회를 개최해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19] 베를리오즈가 쓴 음악평론을 보면 화려함에 치중하는 오페라 아리아나 독주악기의 기교주의를 자주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파가니니와의 일화는 비록 쪼들릴지언정 음악에 대한 신념은 꺾지 않겠다는 베를리오즈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가 이처럼 반비르투오조 경향을 보인 것은 본인이 뛰어난 악기 연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20] 베를리오즈 당시 프랑스는 모든 음악 중에서도 오페라를 으뜸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성공한 오페라 작곡가들은 상당한 부와 명성을 누렸기 때문에 오페라는 프랑스의 모든 작곡가들이 가장 선망하는 장르이기도 했다. 바그너역시 음악인생 초반에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면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을 노린 바가 있다.[21] 애초에 이 벤베누토 첼리니의 대본은 코믹 오페라 스타일로 작성되었는데 당시 극장의 요청에 따라 다소 억지로 정가극(세미세리아) 스타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현재에도 이 오페라는 연출상의 난점 때문에 잘 상연되지 않는다. 다만 베를리오즈는 이 오페라에 사용되었던 관현악곡들을 모아서 "로마의 사육제" 모음곡으로 편곡했는데, 이 작품은 굉장히 유명해져서 현재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22] 베를리오즈는 이 작품을 드라마틱 교향곡(symphonie dramatique)으로 명명했는데, 곡의 편성이나 구성을 보면 교향곡보다는 오라토리오에 더 가깝다.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베를리오즈 스스로 각 부에 악장(movement)대신 막(act)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즉 이 작품은 4악장이 아니라 4막의 교향곡이다.[23] 이 때부터 베를리오즈와 마리 레치오는 본격적으로 동거하면서 사실혼 관계가 된다. 다만 두 사람이 정식 결혼한 것은 베를리오즈의 전처 해리엇이 죽은 1854년이었다.[24] 이 파우스트 겁벌은 성악 4부, 7부 합창단, 어린이 합창단과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동원되는 대작인데다 초연때는 상황을 묘사해주는 연극배우까지 동원되었기 때문에 한번 공연때마다 엄청난 비용이 소요됐다. 흥행에 실패할 경우에는 당연히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25] 리스트와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 당시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부부는 아니다. 하지만 부부와 다름없는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26] 이후 그의 두 부인의 유해를 이 묘지로 이장해 와서 베를리오즈의 무덤과 합사하였다.[27]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영향력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간접적으로는 당연히 많은 선후배 작곡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다.[28] 목관악기를 4대씩 쓰는 것.[29] 소프라노알토 80명, 테너 60명, 베이스 70명[30] 후에 이 정도로 대편성의 곡은 말러천인 교향곡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31] 프레데리크 쇼팽이 애호했던 브랜드로 유명하다[32] 도중에 하녀복을 잃어버려서 포기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