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8 22:21:00

평론가

1. 개요2. 평론가가 되려면
2.1. 분야2.2. 평론가의 자질 문제2.3. 창작자와의 유착 관계2.4. 주관과 객관 사이의 균형
3. 평론을 소비하는 법4. 평론가가 직업인 사람
4.1. 국내4.2. 해외
5. 서브컬쳐에서의 묘사
5.1. 평론가로 등장하는 인물
6. 관련 문서

1. 개요

" 비평은 창조정수다. "
오슨 웰스
“ 미술 심사위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가여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나는 한 번도 달걀을 낳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달걀이 상한 것인지 싱싱한 것인지는 가려낼 수 있다. ”
윈스턴 처칠
평론가(評論家)는 비평가(批評家), 논평가(論評家)로도 불리며 평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이 하는 일은 작품이나 계획에 대해서 그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비판할 거리가 있다면 이에 대해 비평하게 된다. 이를 통해 문학이나 영화 작품, 예술 작품 등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가는데 그 의미가 있다.

비평가나 논평가라는 명칭보다는 평론가라는 명칭이 덜 부정적이고, 더 널리 쓰인다. 국어 사전의 개념을 살펴봐도 비평보다 평론이 좀 더 무난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평론 : 사물의 가치, 우열, 선악 따위를 평가하여 논함. 또는 그런 글.
비평 : 1) 사물의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따위를 분석하여 가치를 논함. 2) 남의 잘못을 드러내어 이러쿵저러쿵 좋지 아니하게 말하여 퍼뜨림.
논평 : 어떤 글이나 말 또는 사건 따위의 내용에 대하여 논하여 비평함. 또는 그런 비평.

비평가는 절대 비판만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판이 아니라 비평을 하는 것이다. 국어사전에도 나와있지만, 2번의 의미로만 비평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평론이나 비평은 내력, 가치, 좋은 점과 나쁜 점, 앞으로의 전망 등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2. 평론가가 되려면

2.1. 분야

비평할 수 있는 분야는 매우 다양하다. 연극, 음악, 문학,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이 있다. 나아가 사회, 정치, 경제, 군사, 건축, 자동차, 장난감, 음식 등 평론할 수만 있다면 모든 분야에 평론가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롤랑 바르트 이후로는 모든 형상 및 사물은 비평의 대상으로 본다. 이는 현대 비평 이론에 있어서는 매우 당연한 사안으로 여겨진다.

2.2. 평론가의 자질 문제

어떻게 생각하면 비평이라는 작업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위험부담이 없을 뿐더러 우리의 평론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젠척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미있는 나쁜 말들을 잔뜩 적어 놓는다. 하지만 쓴소리를 잘하는 우리 평론가들은 어쩌면 겉모습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비평보다 더 의미가 있는 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평가도 모험을 할 때가 있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켜야 할 때다. 새로운 재능, 새로운 발명에 대해 세상은 불친절하다. 새로움에는 그것을 지지해줄 친구들이 필요하다. 나도 어제밤에 새로운 것을 경험했다. 정말 기가 막히게 맛이 있는 소스가 뿌려진 아주 특별한 식사! 음식이나 주방장 모두에 관해 내가 느끼고 있는 추잡한 선입견은 모두 배제한 채 얘기하기로 하겠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므로!. 솔직하게 말해 예전에는 믿지 않았다. 구스또주방장의 유명한 좌우명인 누구든지 요리할 수 있다는 말을.하지만 지금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는 어디서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구스또에서 요리하고 있는 그 비천한 요리사를 상상하면 이 평론 자체가 정말 힘들겠지만 감히 말한다, 그는 프랑스의 그 어느 요리사보다도 훌륭하다고!. 다시 구스또에 가고싶다. 더 먹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
- 라따뚜이[1]
과거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 칼럼, 유튜브 크리에이터 문화의 발전과 함께 평론가의 자질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극적인 비평이 더 많은 조회를 불러오기 때문에 거의 트롤링에 가까운 비평을 하는 비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들을 비꼬는 말로 양산형 공장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체로 자기 주관에 갇혀서 그 대상의 역사성, 바탕이 되는 철학(방향성), 소비자들과 창작자들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창작 문화, 창작자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상업적, 예산적) 한계, 기술적 현실적 실현 불가능성 등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까기 위해 까는 이들이다. 자신이 평론을 업으로 삼는 프로 평론가라면, 소비자의 이익과 알 권리를 대변해주고, 창작자가 간과하기 쉬운 소비자의 관점을 불러일으키고, 소비자와 창작자의 관계를 이어주고, 자신의 지적 수준을 높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평가하는 입장을 지적인 상하관계로 오해하고 자신의 주관적 신념, 이데올로기를 창작자와 소비자에게 강요하려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창작계에 열풍처럼 불고 있는 페미니즘 워싱(핑크 워싱)이 있다. 페미니즘과 상관 없던 원작들에 2차 창작자가 페미니즘적 색채를 입히고, 기존에 흥행하던 작품의 후속작에 기생하여 고증스토리, 개연성 등등의 작품 내 모든 요소를 페미니즘을 광고하는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비튼다. 평론가들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그 작품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를 비판하는 대중들을 '못배운 놈(Uneducated)', 남성우월주의자취급한다. 이런 행태는 원래 그 작품을 함께 만들어온 원작자와 소비자의 문화를 무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3. 창작자와의 유착 관계

"정치가가 정치 기자들을 경멸하고 예술가가 미술 평론가들을 혐오하는 것처럼 생리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도 대개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 창조하는 사람이 해설하는 사람에 대해 갖는 경멸감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고 명백히 정당한 것이다. 설명이나 비평, 평론 등은 이류급 인간들이나 하는 일이다. "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묘하다. 평론가는 비평을 통해 다양한 평가를 작품에 내리지만, 대개 작가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작품을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러나 비평가는 작품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기도 하고,[예시]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가치를 드높이기도 한다. 문학상 수상 같은 경우 대부분 평론가들이 수상작을 심사한단 점에서 비평이 작품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일부 영역에서 평론 대상의 풀이 넓지 않거나 평론가의 풀이 넓지 못하다면, 특히 소비자와 괴리되어 있다면 평론가와 창작자는 공생관계를 가지기가 쉽다. 이 때 평론가는 대상에 대하여 과도하게 칭찬만을 늘어놓고 그 대가를 받고, 생산자는 그 평론을 이용해 마케팅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주머니를 불린다. 서로가 서로의 돈줄을 쥐는 형국이 된다. 이러한 비평 권력은 곳곳에 있으며, 조금만 찾아보면 문학계를 비롯한 곳곳에서 발견된다.

다만 모든 비평가가 그런 건 아니고 비평 권력을 깨부수려고 하거나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 등을 내세워 주류 의견과는 일부러 정반대로 나서는 경우도 꽤 있다. 단순히 돈벌이 수준만으로 평론을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고 대중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의 경우는 오히려 유착도 거부하지만 대중적 시각을 인정하는 것 역시 거부하는 상황이 되기 쉽다.

당연히 평론이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줄 수는 없다. 이해를 하지 못 하는 이들에게 X문가라고 까이는 경우도 있고,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직접 하던가' '악플러네' 등등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까이기도 한다. 비평가는 스스로 대단한 뭔가를 만들지 못하며, 남이 만들어 놓은 것에 편승하는 사람이란 견해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창작자에게 비평가의 말을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있다.
" 세상에는 비평가들을 위해 세운 동상은 없다 "
장 시벨리우스[3]

2.4. 주관과 객관 사이의 균형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평론가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펼치되,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따라서 주관에 갇힌 평론은 평론으로서 실격이다. 물론 로봇이 아닌 사람이기에 자신의 취향이 뚜렷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취향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므로, 주관에 치우친 평론을 하면 같은 사람의 말이 어제 오늘이 달라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고전 작품이라 할 지라도 취향을 타는 작품은 분명히 존재한다. 일례로 심지어 김소월의 시도 일부 어르신 중엔 유치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원래 소년, 소녀적인 감성을 싫어하는 성향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나이에 맞는 태도를 강요하는 우리나라 특성상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을 수 있다. 다만 시인의 명성 때문에 대놓고 드러내진 못하는 것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분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을 경우, 대놓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치고 애당초 만장일치로 지지받은 작품은 없다. 오히려 일부의 취좆에도 불구하고 대대손손 마니아를 확보하며 살아 남았기에 고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객관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객관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인지, 소신과 독선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못하여 키배가 벌어지는 것이다. 예시를 들기엔 다소 위험하지만, 이런 경우는 주관에 치우친 최악의 평론이라 볼 수 있다.
  • 특정 국가의 전통 음식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어그로를 끄는 경우 - 실제로 서구권 네티즌 중에 역겨운 김치 같은 영화라느니 하는 식으로 인종차별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연히 그 나라에서도 비웃음거리가 된다.
  • 독심술 - 작품을 만든 사람의 머릿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글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탄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경우는 평론을 빙자한 명예훼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이는 표절 논란에도 적용되는데, 결과물에 대한 오리지널리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의견을 낼 수 있겠지만, 대놓고 베낀 정도가 아니라면 고의성을 확신하기 어렵다. 아무리 기준을 교묘히 비껴간 지능 표절이 횡행한다는 심증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반드시 의도적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레드 제플린 문서에도 언급되듯이, 모든 창작은 기존에 나온 것을 자기 식으로 다듬으면서 이루어지므로,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론적인 근거 없이 단순히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분위기 표절"이라 모는 것은 전문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 게다가 실제 표절은 못 잡고, 오히려 애먼 작가들이 뚜렷한 근거 없이 표절로 몰린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평론계의 갑질이 심할 경우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창작자를 매도할 위험이 있다.
  • 어릴 때나 심취할 작품이지 나이 들어서 보면 유치하다 - 물론 상당수의 인터넷 소설 같은 경우는 이러한 발언이 들어맞을 수 있지만, 연령을 기준으로 한 평가는 "나이 든 사람의 판단이 무조건 옳다"는 꼰대적인 발상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 안데르센의 경우도 당대에는 “왜 애들이나 읽는 동화를 쓰느냐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도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명작이 많으며, 성인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의 모티브로도 등장한다.
    • 그리고 저러한 발언이 중장년, 노년층 전체의 생각을 대표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주로 저러한 이유로 까이는 작가들은 청년기에 요절한 사람들이 많은데, 노년이 되어도 이들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청년기에만 깊이 공감할지라도 이러한 현상이 세월이 흘러 새로운 청년 세대에서도 나타난다면 세대를 초월한 보편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유아용 그림책이 있는데, 이러한 서적은 유아의 언어 발달 과정에 맞춰 개발한 것이므로 나이가 들면 내용의 단순성 때문에 외면하게 되지만, 이 분야에서 세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도 있다. 어디까지나 유아를 위한 장르이므로 이를 어른의 관점[4]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여 선진국에서는 기획 단계에서 유아들의 반응도 살핀다고 한다.
    • 사실, 역사적으로 청년 문화는 폄하되어 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상업적인 주목과는 별개로 그러한 현상이 심했는데, 서태지, 이현도를 통해 랩, 힙합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90년대에도 저러한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한창 활동 중인 20대 뮤지션들이 이들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것을 보면 당초 기성 세대의 예측은 빗나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힙합의 역사 자체가 40여 년이니 이제는 더 이상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다.
    • 몇 년 전에 유행한 40대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란 류의 글이 대표적인 병크인데 여기엔 심지어 김광석 음악 듣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러한 예측이 빗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수십 년 후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개인의 감수성은 다 다르기 때문에 나의 감수성이 이런 식으로 변했다 하여 다른 사람도 똑같은 경로로 그렇게 변하리라고 단정할 수 없다.

반면, 평론가의 소신 때문에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 일반적으로 폄하되는 대상을 호의적으로 평가한 경우. - 브랜드만 보고 편견을 가지는 경우도 많음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이런 소수 의견이 가치가 있다.
    • 일례로 와인의 경우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을 때 의외로 저가 와인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 훌륭한 소믈리에라면 가격대를 막론하고 좋은 와인을 고를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을 제시해야지, 무조건 고가 와인이나 특정 와이너리만 추천한다면 오히려 의도를 의심해 볼 만하다.
    • 사실, 허세, 스노비즘에 의해 억울하게 폄하당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카펜터스 같은 팝의 고전도 당대 락꼰대들은 너무 대중적이라며, 일부러 싫어하는 척을 했다고 한다.
    • 복면가왕에서 가창력을 재평가받은 아이돌 가수들도 그러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평론가가 주관과 객관이 균형을 이룬 평론이 가능한지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알 수 있다. 만약 음식을 평론할 경우, 화려한 미사여구로만 현혹하려는 평론가라면, 음식의 재료, 조리 방식, 여러 맛의 조화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고, 추상적인 표현만 남발할 것이다. 반면 전문성이 있다면, 이 음식은 고수가 들어가 있어 대중적인 맛이 아니다라고 실제 사실에 근거한 평을 내릴 것이다. 그런데 식재료의 맛을 가려낼 능력이 없으면서 단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다고 화학 조미료 맛이다라고 평가했다면 객관적인 사실에 어긋난 것이다.[5]

3. 평론을 소비하는 법

평론을 읽을 때는 그 평론가가 그 대상의 역사성, 바탕이 되는 철학(방향성), 소비자들과 창작자들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창작 문화, 창작자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상업적, 예산적) 한계, 기술적 현실적 실현 불가능성 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평론 소비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중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까기 위해 까는 것인지를 잘 구분해야 한다.

일반적인 서적의 뒤에 적혀 있는 평론은 대부분 출판사에서 돈을 주고 평론을 부탁한 내용이다. 당연히 평론의 일부인 뿐더러 평론의 전체 내용 자체도 칭찬일색의 글이다. 믿으면 곤란하다. 평론이 한자리 수 정도의 소수만 올라오면 신뢰성이 흔들리는 마당에 조회수가 목적인 파워블로거 등의 인터넷 리뷰어의 경우 그 신뢰도가 더욱 떨어진다. 물론, 파워블로거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진짜 알짜배기 정보를 제공하는 파워블로거들은 극소수여서(...).

4. 평론가가 직업인 사람

4.1. 국내

4.2. 해외

5. 서브컬쳐에서의 묘사

서브컬처에서는 매우 독설적이고 비판을 많이 해 주인공들의 어그로를 사는 경우가 많고 충돌이 잦다. "어디 네 놈이 뭘 만들지 기대되는구나"라고 말하면서 쓰레기라고 평가를 하려하지만 맨 마지막에 그들을 감동시키는 클리셰가 담겨있다. 츤데레라는 설도 있다.

5.1. 평론가로 등장하는 인물

6. 관련 문서



[1] 위의 글은 픽사의 라따뚜이에서 故 피터 오툴이 연기한 까다로운 평론가 캐릭터인 "안톤 이고"의 독백으로# 과거에는 혹평으로 오귀스트 구스토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등 악랄하게 그려지기도 했으나, 평범한 라따뚜이 요리를 먹은 뒤 이에 감명하고, 작중 요리와 관련된 진실을 알게되면서 생각을 고치게 된 뒤의 내용. 음식 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 평론가의 위치 및 스스로의 선입견에 갇힐 수 있는 한계와 그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는 창작물의 입장, 그리고 이를 극복한 자신의 심정을 하나의 독백 속에 잘 표현해냈다.[예시] 새로운 의미부여의 대표적인 예시로 이어령이 진달래꽃을 비평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참조[3] Bengt de Törne, "Sibelius: A Close-Up" (Houghton Mifflin, 1937), p. 27.출처[4] 한 마디로 어른들이 뽀로로를 즐겨 보지 않는다 해서 뽀통령의 장기 집권을 폄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5] 사실 고수 같은 식재료는 비누나 화장품 맛으로 오해하기 쉽다. 오히려 화학 조미료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맛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품위있는 그녀에 등장하는 김치 전문점에서는 화학 조미료를 몰래 썼으면서도 자연 레시피라고 속였다.[6] 지식의 기록자 내에서 각종 안건에 대한 비평을 제시하는 것이 본래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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