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19:48

마광수

<colbgcolor=#000000> 마광수
馬光洙|Ma Kwang-soo
파일:thumb_3696639864_1mBHWpzT_1.jpg
출생 1951년 4월 14일
경기도 수원시[1]
사망 2017년 9월 5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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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소설가, 시인, 교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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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colbgcolor=#fff,#1f2023>서울청계국민학교 (졸업)
대광중학교 (졸업)
대광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 / 문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 문학석사[2] · 문학박사[3])
본관 목천 마씨
본적 서울특별시
신체 175cm, O형
배우자 김방옥[4](1985년 결혼 - 1990년 이혼)
가족 이부누나 조재풍(1943년생)[5]
사상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문화적 자유주의)
자유연애(Free love) 옹호[6]
종교 무종교 (무신론)
병역 병역면제 (부선망독자)
데뷔작 배꼽에 (1977)
소설 권태 (1985)
활동 기간 1977년 ~ 2016년 8월[7]
링크 개인 홈페이지 '광마클럽' }}}}}}}}}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성장 과정2.2. 작가 등단과 교수 재직2.3.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2.4. 정년퇴임 이후2.5. 사망
3. 성향과 사상
3.1. 성적 자유주의3.2. 알고보면 신사3.3. 전통적 가족관에 의문 제기3.4. 실험적인 강의 방식
4. 학문적 업적5. 작문 스타일6. 저서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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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makwangsoo.com/73.jpg
파일:external/www.campuslife.co.kr/img_17103_1.jpg
최연소 교수 부임 시절 (1977년) 말년
시대를 앞서간 천재, '사라'처럼 사라지다.
조철 문화 칼럼니스트. 관련기사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 소설가시여, 잘 가시오. 잘 가시오.
마광수 사십구재 추도사 중에서. 관련기사
대한민국교수, 국문학자, 소설가, 시인, 화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윤동주 스페셜리스트이자 성해방을 비롯한 문화적 자유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과정

어린 시절이 상당히 불우했던 편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몇 달 전, 6.25 전쟁 때 종군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친아버지가 1.4 후퇴 중 사망하는 바람에 경기도 수원시에서 피난 중 유복자로 태어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이부 누나와 함께 자랐다.

마광수의 친부 마씨는 어머니의 두 번째 남편이고, 첫 번째 남편 조씨 사이에 딸(마광수에게는 이부 누나) 하나를 얻었다.

2.2. 작가 등단과 교수 재직

파일:마광수.png

대광고등학교연세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석사, 1983년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으며, 학부과정을 전과목 A로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26세에 등단했으며,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당시 28세)를 거쳐 1983년부터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 교수(당시 32세)로 재직하다 2016년 8월 정년 퇴임했다.

또한 1977년 현대문학에 시로 등단한 시인이다. 1985년 장편소설 <권태>로 소설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즐거운 사라>[8], <자궁 속으로>[9], <귀족>, <불안>[10], <발랄한 라라>, <사랑의 학교> 등의 소설집과, <가자 장미여관으로>, <야하디 얄라숑>, 육필시집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등의 시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의 수필집을 집필하였다.[11]

1989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영화화하려고 했고, 감독으로도 결정되었으나, 제작사는 중간에 감독을 교체하고, 마 교수는 여기에 비난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일설에 의하면 마광수의 연기 지도가 너무 야해서 당시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체했다고 한다.[12]

교수로 임용된 시기는 1977년이고 박사학위를 딴 건 1983년인데, 당시 경제발전에 따라 많은 대학이 세워지고 정원이 늘어나는 가운데, 초중등 교사 뿐 아니라 대학교원 자체도 부족하던 시절이라, 석사만 따도 충분히 교수가 될 수 있던 시절이다. 1983년에 박사학위를 딴 것은 당시 교수들 중에서도 늦은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박사학위와 그 학위논문의 기대수준이 현재보다 높아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학위논문의 길이가 천 페이지를 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히나 인문/사회과학 쪽의 박사과정은 일부 이공계/상경계와 달리 학점을 다 수료하고 논문을 쓰느라 논문학기만 등록하고 몇년씩 걸리는 장수생이 (지금도) 많은데, 이런 경우는 대학에서 그 연구성과 등을 고려하여 교수 채용하는 경우가 지금도 있다.[13] 물론 지금은 대개 시간강사 정도만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편이다. 한술 더 떠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50년대, 60년대 임용된 교수들은 심지어 학사출신 교수들도 많았다. 일제시대 조선에는 정식대학은 경성제대 하나뿐이었고, 다른 사립대들은 모두 전문학교 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14][15]

2.3.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즐거운 사라 음란물 지정 및 탄압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결론적으로 놓고 보자면, 즐거운 사라는 현재는 물론 그 당시 기준으로도 딱히 음란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기존 교수들 사이에서 금기시하던 사상을 꺼낸 결과 기존 기성세대 교수들에게 꼬투리잡혀서 1992년 10월 교수직을 해임당하고 구속된 사건이다. 이후 1998년 교수직에 복귀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학과에서도 사실상 내쫓겨서 정년퇴임 때까지 교양과목 강의만 맡았다.

2.4. 정년퇴임 이후

2016년 8월, 만 65세가 지나 연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며 더 이상 마광수의 강의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실형으로 연금을 아예 한 푼도 못 받았다는 기사가 있지만 실형을 선고받았어도 50% 감액된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마광수 경우는 중간에 6년 해임된 기간으로 납입기간이 짧아졌고 그마저도 실형으로 반으로 잘렸으니 연금액이 작았을 것이다. 교수로 복직한 후에도 정년퇴임까지 교양강의의 시간강사만 맡았어야 했으니. 본인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연금을 받아도 집안일 봐주는 아주머니(가정부)[16]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라고 한적이 있다. 더구나 같이 살고 있는 노모의 간병비도 많이 든다고도 했다. 거기다 사망 몇개월 전에는 그가 심적으로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노환으로 별세[17]하면서 그야말로 쓸쓸하기 그지없는 말년을 보냈었다.

2.5. 사망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윤동주 연구」로 박사가 되었지만
윤동주처럼 훌륭한 시인으로 기억되긴 어렵겠고
아예 잊혀져 버리고 말든지
아니면 조롱섞인 비아냥 받으며
변태, 색마, 미친 말 등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칭송을 받든 욕을 얻어먹든
죽어 없어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저 나는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 뿐
시 <내가 죽은 뒤에는> 전문 마광수 作
어휴, 다 잊힐 겁니다
마광수 탄생 100주년(2051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냐는 질문에[18]
사망하기 몇 달 전 마광수의 모습.[19]

파일:광마클럽.jpg
2016년 6월 정년퇴임 직전 마광수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글.

2017년 9월 5일 오후 1시 51분쯤, 자택인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향년 66세. 경찰은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고 자살로 추정했다. 유서에는 자신의 유산을 시신을 발견한 가족에게 준다고 썼다고 한다. ##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어 자살로 결론. 실제 2017년 1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누가 불러주질 않아 그냥 집에서 지낸다."라면서 "우울하다", "서운하다"라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 특히 그는 30년간 우울증 약을 복용해왔고, 사망 전 의사로부터 입원 권유를 받을 정도로 우울증이 심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연세대 교수였던 사람이라면 뉴스 패널이나 시사회 등에서 한두번쯤은 불러줄 법도 한데 1990~2000년대엔 사회풍토가 굉장히 보수적이라 마광수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태였고, 2010년대엔 젊은층을 중심으로 사회풍토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수평적으로 바뀌었음에도 젊은 세대에게는 거의 잊혀진 인물이 된지라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마광수 본인도 차라리 자신을 그렇게도 욕하던 1990~2000년대가 그나마 나았지, 2010년대엔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아예 관심조차 없어서 쓸쓸하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사망 이후 일부 지인들은 마광수 전 교수가 제자를 많이 길러내고 싶어했는데 교수 사회에서 왕따였기에 복직 이후 정년퇴임 때까지 교양수업만 해야 했고, 전과자 이력 때문에 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주장했다.[20] 또 최근 모친상을 당했고, <마광수 시선>을 출간하면서 시평이나 추천사를 동료 국문학자들에게 의뢰했는데 대부분 거부하거나 답변을 회피해 상처를 크게 받았다고 했다. 2017년 9월 6일 네이버-문화일보 “故 마광수 대학·문단서 왕따… 처지 비관했었다” 실제로 <마광수 시선>에는 비슷한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추천사나 평론 등이 없고 마광수 교수의 글만 수록되어 있다.

시신은 화장 후 경기도 광주시 능평동에 있는 '분당추모공원 휴'에 안치되었다. 유족은 고인의 책이 더 이상 출간되는 걸 원치 않아 절판될 확률이 높다. 관련기사

3. 성향과 사상

3.1. 성적 자유주의

이른바 '유미주의적 쾌락주의'를 전적으로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쾌락은 모든 사건의 근본이자 목표라는 것.[21] 사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사상도 아니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얼마든지 주장될 수 있는 사상이지만[22] 시대를 너무 앞서간 죄로 <즐거운 사라> 사건 이후 마광수가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자 이문열을 필두로 많은 동료 문인들은 '그런 쓰레기 같은 소설을 쓴 자는 소설가로 부를 가치조차 없다'고 맹비난을 가했다. 특히 마광수와 이문열의 사이는 엄청나게 안 좋았다.[23] 자세한 부분은 이 링크를 참조하자. 마광수와 이문열의 논쟁.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 1권> 발췌

마 교수가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던 와중에 몸까지 아파서 고생하던 시절에 김동길이 보약을 지어 병문안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김동길과 마광수 두 사람은 모두 연세대에서 교수를 지낸 이력이 있었고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교수 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는 등의 동병상련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68운동을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구가 성적 자유주의를 추구하게 된게 68운동 덕분이라고 평가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입장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실제로 젊었을 때 마광수는 진보 진영에 우호적이었으며 사상적으로 신좌파스러운 면모를 많이 보였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은 후 좌파 진영 또한 혐오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향을 보수 진영으로 전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수많은 여성들을 의도치 않게 마광수의 적으로 돌리게 만든 '외모 우월주의'로도 악명이 높다. 2005년 MBC 백분토론에서 "예쁜 애들이 공부도 잘한다"고 발언한 사례는 아주 유명하다.

부부강간죄, 성희롱 방지법, 원조교제, 즉 미성년자 성매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남성을 억누르는 악법이라고도 주장하여 논란을 만들기도 했다.

부부강간죄의 경우는 부부간의 특수한 관계[24]에 비춰 생각해 볼 때 성관계에 대한 (능동적인) 동의를 부부 외의 성관계와 같은 수준으로 요구할 수는 없고, 부부강간죄의 필요성에 대한 근거로 여성계가 제시한 사례들은 형법 체계 내에서도 처벌이 가능한 사례들이라는 주장이고, 가정 폭력에 의한 성폭행을 당할 수 있고, 성희롱 방지법 부분은 가해자의 행동에 대한 객관적 판단 기준 없이 피해자의 입장만으로 성희롱이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 법적 형평성과 합리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며, 미성년자 성매수자 신상 공개 문제는 1) 살인이나 강간같은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도 신상공개를 당하지 않는데, 미성년자 성매수자의 신상을 공개한다는 것은 미성년자 성매수를 살인, 강간등의 흉악범죄보다 더 무겁게 처벌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으며 2) 만 15세~19세의 청소년을 만 14세 이하로 (법적인) 자기책임능력이 없는 청소년과 같은 기준으로 대하고 있으며 3) 미성년자 성매수에 대한 형사적 처벌을 받은 상태에서 신상공개를 또 하는 것은 이중처벌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주장에 가깝다. 사실 글의 논조가 과격한 점이나 편견에 기반한 점이 많고 주장에 억지스러운 점이 많은 것[25]은 사실이고, 이 때문에 널리 동의를 얻기 힘든 주장임은 분명하다.

파일:광마.jpg

그는 "허례허식과 허세를 비판하며, '성(性)'에 솔직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는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해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데에 누구보다도 앞장선다. 이렇게 그는 무엇보다도 위선을 최악의 부덕이라 보았고, 생전에도 도덕을 명분으로 삼아 개인을 억압하는 풍조를 강력히 비판했다.

무신론자이며 반금욕주의적 성향인 사람이라 시오노 나나미처럼 로마 제국기독교 때문에 멸망했다고 주장했다.#[26] 같은 글에서 원균을 쾌락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작전에 실패한 패장(敗將)이었을 뿐, 주색에 찌든 엉터리 장수는 아니었다고 옹호하기까지 했다. 물론 난중일기에도 적혀있듯이 원균은 주색에 찌든 엉터리 장수가 맞다.

세간에 알려진 변태라는 이미지와 달리 본인은 방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올곧고 정직한 성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수로서의 권위의식같은 것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베풀기도 잘했다. 그 때문인지 1990년대에는 불경한 음란문학이라며 지탄받았지만, 현재는 그가 말한 대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상파 방송에서 섹드립을 치는 지금[27]과 비교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3.2. 알고보면 신사

위의 항목을 보면 거칠 게 없이 살아와 자유분방하고 주위에 아랑곳없이 살 것 같은 자유인 같지만 실제로 보여준 행적은 품위를 갖춘 신사에 가까웠다.

사실 성뿐만이 아니라, "매 순간의 욕구에 충실하고 장래를 기대하며 스스로를 억압하지 말라"는 식의 말을 생전에 자주 했다. 특히 내세론을 크게 비판[28]하며 "내세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번 생이나 잘 살라"고 강조한다. 일종의 쾌락주의에 가까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며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비난한다. 자신이 피해를 입기 싫은 만큼 상대도 존중하라는 것인데, 실제로 마광수 교수 본인도 일상생활에선 그의 글과 다르게 점찮고 부드러운 이미지다. 평소 학생들에게 굉장히 예의 바른 사람이라, 교수들에게 "교수님들, 학생은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던 인물이다. 마광수가 지나갈 때 인사를 꾸벅 하면 곧바로 똑같이 인사를 한다. 복도에서 학생의 "안녕하세요"에 항상 "안녕하세요"로 고개 숙이며 받아 주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굉장히 놀랐다.

게다가 마 교수는 이미지와 다르게 학생을 성추행하거나 더럽게 굴어 문제된 적이 없다. 마 교수 본인이 강의 중 그런 루머에 대하여 말하길, "씨발놈들이[29] 소설이랑 현실을 구분을 못하는 거지"라고 일갈. 오히려 학생들에게는 굉장히 정중한 편이었다. 게다가 조교한테 모두 일임하는 웬만한 다른 교수보다 훨씬 신경 써서 시험지를 채점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다만 마광수가 교수였을 때 학생으로서 수업을 듣던, 연세대학교를 나온 범죄심리학자 이수정은 2023년 2월에 한 인터뷰에서 "마광수 교수는 담배를 피워가면서 강의를 했는데, 특정 학생을 지목하면서 노골적으로 성희롱을 했다."라며 여성으로서 당해왔던 성희롱을 회상하던 중에, 마광수 또한 그 사례로 거론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30]

이런 마광수와 매우 닮은 꼴의 인물이 일본에도 존재하는데, 다름 아닌 만화가 나가이 고이다. 나가이 고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고, 일본의 보수적인 언론과 학계의 맹비난에 시달렸으며, 폭력적이고 성적인 작품 성향과 달리 개인은 매우 선량하고 올곧은 인품의 소유자이다. 그런 쪽으로도 스캔들이 없는 인물이다. 다만 나가이 고가 막대한 부[31]를 누린 성공한 만화가였음을 생각하면, 마광수 교수의 말년은 그야말로 너무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3.3. 전통적 가족관에 의문 제기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를 고마와하라고 들입다 강조해대는 효 사상이 얄밉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식에게 효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그저 '애완용'으로 길러야 한다.
마광수의 뇌구조, 2011년
개를 한 마리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식 낳고 싶은 생각이 더 없어져 버렸다
(중략)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자신 없는 다짐일지는 모르지만
정말 자식은 낳지 말아야지
모든 사랑, 모든 인연, 모든 관계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도록
이를 악물어 봐야지
적어도, 나 때문에, 내 성욕 때문에
내 고독 때문에, 내 무료함 때문에
한 생명을 이 땅 위에 떨어뜨려 놓지는 말아야지
, 1979년
부모들은 다 죽어 마땅해
'낳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자식한테 미리 동의도 구하지 않고
무조건 자식을 낳았으니까
부모들은 다 죽어 마땅해
정말 대역죄(大逆罪)인 '낳은 죄'를 저질렀으니까
낳은 죄, 1997년

성적 자유주의, 사회문화적 자유주의, 반금욕주의, 쾌락주의, 반(反)권위주의 등으로 잘 알려진 그의 사상에 가려져서 그렇지, 전통적인 가족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비판적인 모습을 종종 보이긴 했었다.

마광수는 사상과 유교 철학에 대해 한평생 반대하고 적대적이었으며, 한국에서 사실상 집단주의로 왜곡된 한국식 가족주의는 물론이고 서구권의 가족주의를 포함한 가족주의 자체를 굉장히 반대했으며 우리 사회의 모든 개개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을 갖게 된 배경으로는 어린 시절,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어 홀로 자신과 이부누나를 힘겹게 키운 홀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두번 결혼해서 두번 모두 과부가 된 어머니에 대한 어린 시절 친척들과 이웃들의 손가락질이 가부장제 자체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거기에 어머니와 이부누나 말고는 가까운 친척이 없었기에 어쩌다 한번 만나던 먼 친척들이나 이웃들 말고는 결혼과 자녀에 대한 압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상이 주위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을 수 있었다.[32]

본인을 직접 반출생주의자라고 하지 않았고 생전 반출생주의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었지만 반출생주의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전인 2016년 정년퇴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2017년 사망한 것을 감안해야 하고 1979년 <업>이라는 시와 1997년 <낳은 죄>라는 시를 쓴 것을 보면 반출생주의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허나 시 속 화자의 주장이 언제나 작가의 주장과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고, 모든 부모들을 "낳은 죄"를 저질렀으니 죽어야 한다고 했으면서 정작 그 "낳은 죄"를 저지른 본인의 모친에게는 한평생 효자였다는 점으로 보아 평시 항상 갖고 있던 사상이라기보단 감정에 격앙되어 단순 일시적인 감정을 시로 적어낸 것 뿐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거기다 반출생주의로 의심될 만한 사상이 담긴 말과 글은 본인의 개인 블로그에서만 올려졌고 강의나 인터뷰 등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이에 대한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작은 일이 있었을 때도 구속되고 6년 동안이나 교수직에서 박탈된 적 있었으니 "결혼하고 애를 낳는 건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던 1990년대까지는 물론이고 저출산에 대한 범국민적 위기의식이 커지고 "결혼과 출산은 선택이지만 여건이 되면 가급적 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강하던 2010년대 중반까지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즐거운 사라 사건 이상으로 중형을 선고받고 큰 사회적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기에 생전 내내 함부로 꺼낼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3.4. 실험적인 강의 방식

교수와 학생 간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하던 면모는 강의 중에도 엿보였다. 연극의 이해나 문학과 성과 같은 수업의 경우 수백 명이 듣는 대규모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출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에 따라 전자출석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그로 인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수는 실 수강 인원에 비해 턱 없이 적었지만, 학생을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태도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유명 교수 효과로 수업 초반에는 사람들이 북적북적거렸다가 조금만 지나면 출석체크만 하고 나가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중반쯤 지나면 약 30명만이 조촐하게 남아 수업을 듣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사실은 기계 출석체크 외에는 더는 출석을 체크하지 않으며, 중간고사(정확히는 대체 리포트)와 기말고사(수업내용 정리하기)가 고정인 탓에 출석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연세대에서 가장 널널한 과목 중 하나였다. 대신 너무 사람이 없으면 너무 없다 싶으면 '없어도 너무 없다'며 가끔 불시에 출석체크를 따로 할 때도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연대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농담 중 하나가 있었다. 3주 내리 출튀[33]를 하는 것이 조금 찔려서 간만에 강의에 들어간 학생이 앞에 앉은 학생에게 "지난 시간에 뭐 했어요?"라고 묻자 앞에 앉은 학생 왈, "저도 1달 만에 와서…"라고 했다고 한다.

교수의 독특한 시험문제의 훌륭한 예로, '에로틱 판타지 소설'을 과제로 제출해야 했다. 본인은 러브스토리를 써오라고 했지만 실상은 '야설 써오기'다.[34] 어지간한 것들은 보았기 때문에 참신하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 A 맞은 과제의 내용은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파내기"였다고 한다.[35] 근친상간, 동성애 요소를 넣으면 가산점을 준다는 말도 있었다. 그밖에 건물에 무단 침입하여 한 모녀를 강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광수 교수의 부인과 딸이었다는 야설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에 영감을 받은 한 학생은 마광수 교수를 강간하는 내용으로 썼지만 C를 받았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연극의 이해> 리포트 A+ 맞는 방법
  • 1. 마 교수님 문체 따라하기
  • 2. 마 교수님 페티쉬 이해하기
  • 3. 마 교수님 수업 듣고 내용 참고하기

4. 학문적 업적

작가로서는 굴곡이 많았지만[36] 문학 연구가로서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바로 윤동주 시인 연구.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정서인 '부끄러움'이 마광수의 발견이며, 마 교수가 제시한 이 틀은 현대 국문학계가 대중에게 '윤동주의 작품은 대체로 이렇습니다'라고 해설할 때 사용하는 정설이 되었다. 이는 마 교수 본인의 가장 큰 자부심 중 하나이다.

다만 이 이후로는 제대로 된 연구성과가 거의 없어서 비판받기도 한다. 실제로 이후론 이렇다 할 논문이 없다. 예를 들어 2000년 재임용 심사 때 연구 실적물로 제출한 것이 에세이집 1권, 장편소설 1편, 단편소설 2편, 시 8편 등 창작물이 대다수고 신문 등 매체 기고문과 학술논문은 겨우 6편밖에 되지 않았다. 다만 90년대 필화사건을 겪으며 8년간 야인으로 지내 타의로 절필당하다시피 한 것을 감안을 해야 한다. 그런 사정이 감안되었는지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지만 정년까지 교수로 일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마 교수 자신이 논문 쓰기를 지양하고 아포리즘을 선호한 데에 있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마광수 어록을 검색해 보면 자신의 생각을 짧은 격언으로 꿰뚫는 능력이 출중함을 알 수 있다.

5. 작문 스타일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유명해졌지만, 사실 마광수의 핵심은 직관성과 전달력을 중시하는 그의 작문 스타일이다!

문학계에 만연한 지적허영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진짜 좋은 글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게 마광수의 작문철학으로 그는 가독성을 매우 중시하여 복잡한 문장구조와 어려운 어휘들을 피해 글을 쓴다. 때문에 글이 쉽고 전달력이 매우 높다. 즉 그의 글에는 문학적 허세가 없고 글의 전달력이 높아, 읽는 데 피곤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오히려 "쉽게 쓰는 게 어렵다"라고 말할 정도로 글의 전달력, 가독성에 힘을 쏟는 스타일이다. 작가로서 대단한 장점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광수 교수를 싫어하는 다른 교수들 중 쉬운 문필에 매우 반감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 "쉬운 어필을 주장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역설하는 교수들도 많다. 특히 송도에서 찾기 쉽다. 글쓰기 수업 때 주제가 나오기 쉬우므로.

물론 문학에 있어서 쉬운 문체를 고수한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가 어려운 말을 몰라서 못 쓴다는 말은 아니다. 일례로 그가 저술한 문학 이론서인 '시학'과 '상징시학'을 보면 머리가 아파질 만큼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37]

6. 저서

  • 시집
    • 광마집 (심상사, 1980)
    • 귀골 (평민사, 1985)
    • 가자 장미여관으로 (자유문학사, 1989년; 책읽는귀족, 2013)
    • 사랑의 슬픔 (해냄, 1997)
    • 야하디 얄라숑 (해냄, 2006)
    • 빨가벗고 몸 하나로 뭉치자 (시대의창, 2007)
    • 일평생 연애주의 (문학세계사, 2010)
    •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
    •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 (책읽는귀족, 2012)
    • 천국보다 지옥 (등대지기, 2014)
    • 마광수 시선 (페이퍼로드, 2017)
  • 문학이론서
    • 상징시학 (청하, 1980; 청하, 1985; 청하, 1997; 철학과현실사, 2007)
    • 윤동주 연구 (정음사, 1984; 철학과현실사, 2005)
    • 심리주의 비평의 이해-편저 (청하, 1986; 청하, 1995)
    • 마광수 문학론집 (청하, 1987; 청하, 1992)
    • 시 창작론-2인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1987)
    •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철학과현실사, 1997)
    • 시학 (철학과현실사, 1997)
    • 삐딱하게 보기 (철학과현실사, 2006)
  • 비평
    •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 (민족과 문학사,1991; 사회평론, 1997)
    • 사라를 위한 변명 (열음사, 1994; 개정판, 2005)
    • 문학과 성 (철학과현실사, 2000)
    •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 한다 (새빛에듀넷, 2007)
    • 모든 사랑에 불륜은 없다 (에이원북스, 2008)
    • 연극과 놀이정신 (철학과현실사, 2009)
    • 육체의 민주화선언 (책읽는귀족, 2013)
    •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읽기 (책읽는귀족, 2013)
    • 생각 (책읽는귀족, 2014; 개정판, 2016)
  • 철학적 에세이
    • 운명 (사회평론, 1995)
    • 성애론 (해냄,1997; 해냄, 2006)
    • 인간 (해냄, 1999; 개정판, 2008)
    •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오늘의책, 2005; 개정판, 2010)
    • 인간론 (책마루, 2011)
    • 멘토를 읽다 (책읽는귀족, 2012)
    • 사랑학 개론 (철학과현실사, 2013)
    • 마광수의 인문학 비틀기 (책읽는귀족, 2014)
    • 인간에 대하여 (어문학사, 2016)
  • 에세이
    •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했는데도-마광수 외3인 (유림, 1988; 유림, 1990)
    •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자유문학사,1989; 북리뷰, 2010)
    • 사랑받지 못하여 (행림출판,1990)
    • 열려라 참깨 (행림출판, 1992)
    • 사랑의 다른 기술 (여원, 1992)
    • 자유에의 용기 (해냄, 1998)
    • 남자도 이혼을 꿈꾼다 (동서고금, 1999)
    •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해냄, 2005)
    • 나는 헤픈 여자가 좋다 (철학과현실사, 2007)
    • 마광수의 뇌구조 (오늘의책, 2011)
    • 더럽게 사랑하자 (책마루, 2011)
    • 나의 이력서 (책읽는귀족, 2013)
    • 스물 즈음 (책읽는귀족, 2014)
  • 아포리즘
    • 마광쉬즘 (인물과사상사, 2006)
    • 소년 광수의 발상 (서문당, 2011)
    • 행복 철학 (책읽는귀족, 2014)
    • 섭세론 (철학과현실사, 2016)
  • 소설
    • 권태 (문학사상사,1990년; 해냄, 2005; 책마루, 2011)
    • 광마일기 (행림출판, 1990; 사회평론, 1996; 사회평론, 2005; 북리뷰, 2009)
    • 즐거운 사라 (서울 문화사, 1991; 청하, 1992)
    • 불안 (리뷰앤리뷰,1996)
    • 자궁 속으로 (사회평론, 1998)
    • 사인사색-마광수 외 3인 (고도, 1999)
    •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1,2 (해냄, 2000)
    • 로라 1,2 (해냄, 2005)
    • 광마잡담 (해냄, 2005; 책읽는귀족, 2012)
    • 유혹 (해냄, 2006)
    • 귀족 (중앙북스, 2008; 책읽는 귀족, 2012)
    • 발랄한 라라 (평단, 2008)
    • 사랑의 학교 (북리뷰, 2009; 책읽는 귀족, 2012)
    • 첫사랑 (북리뷰, 2010)
    • 미친 말의수기 (꿈의 열쇠, 2011)
    • 돌아온 사라 (아트블루, 2011)
    • 페티시 오르가즘 (아트블루, 2011)
    • 세월과 강물 (책마루, 2011)
    • 별것도 아닌 인생이 (책읽는귀족, 2012)
    • 공처가 괴담 (책읽는 귀족, 2012)
    • 무덤 속 야한 유령 여인 (책읽는 귀족, 2012)
    • 미스터리 두 여인 (책읽는귀족, 2012)
    • 노총각의 이상한 러브스토리 (책읽는 귀족, 2012)
    • 도깨비 집 여인들 (책읽는 귀족, 2012)
    • 야한 인어이야기 (책읽는귀족, 2012)
    • 야한 신들의 나라 (책읽는귀족, 2012)
    • 모란꽃 요정 (책읽는귀족, 2012)
    • UFO를 타고 온 섹시 여인 (책읽는 귀족, 2012)
    • 청춘 (책읽는귀족, 2013)
    • 2013 즐거운 사라 (책읽는귀족, 2013)
    • 상상놀이 (책읽는귀족, 2013)
    • 아라베스크 (책읽는귀족, 2014)
    • 나만 좋으면 (어문학사, 2015)
    • 나는 너야 (어문학사, 2015)
    • 인생은 즐거워 (등대지기, 2015)
    • 사랑이라는 환상 (어문학사, 2016)
    • 덧없는 것의 화려함-웹소설 (광마클럽, 2016)
    • 야사-웹소설 (광마클럽, 2016)
    • 추억마저 지우랴 - 유작 (어문학사, 2017)[38]
  • 전시
    • 1991 [마광수,이목일,이외수,이두식 4인의 에로틱 아트 전] 나우갤러리, 서울
    • 1994 [마광수 개인전] 다도화랑, 서울
    • 2005 [마광수, 이목일 전] 거제 예술회관, 거제 (1월)
    • 2005 [마광수 미술전] 인사갤러리, 서울 (6월)
    • 2005 [마광수 미술전] 대백플라자 갤러리, 대구 (7월)
    • 2006 [마광수, 이목일 전] 롯데마트 화정점 로비, 일산 (2월)
    • 2007 [마광수 개인전] 미국 뉴욕 Maxim 화랑 (6월)
    • 2007 [색(色)을 밝히다 전(展)] 북스 갤러리 서울 인사동 (1월)
    • 2009 [마광수 전(展)] 순수 갤러리 서울 청담동 (4월)
    • 2009 [마광수, 천소연, 2 인전] 미국 뉴욕 갤러리 옴즈 (4월)
    • 2009 [6월의 그림展] 갤러리아 순수 (6월)
    • 2011 [소년, 광수 전(展)] 산토리니 서울 갤러리 서울 서교동 (2월)
    • 2011 [마광수- 변우식, 5월의 思色전] 인사동 가가 갤러리 (5월)
    • 2011 [도문희 마광수 박성남 박인숙 展] 갤럴리아 순수 (6월)
    • 2012 [돌아가자, 장미여관으로] 한남동 꿀 (2월)
    • 2012 [순자와춘희의 3인展 "Mash up Show"] 춘천 갤러리아르숲 (3월)
    • 2013 [Return to Never Land 展] 강원대 갤러리&커뮤니티 카페 피터팬 (1월)
    • 2014 [꿈꾸는 삼총사 展] 한대수,마광수, 변우식 인사동 리서을 갤러리 (5월)
    • 2015 [마광수·변우식 2인전, “색(色)을 밝히다”] 인사동 노암갤러리 (9월)
  • 마광수 관련 서적
    • 마광수는 옳다 - 연세대 국문학과 학생회 쓰고 엮음 (사회평론사, 1995)
    • 마광수 살리기 - 강준만 외 6인 (중심, 2003)

7. 기타

  • 상술했듯 강의 시간에 성적인 농담 및 '자X' 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학생들로부터 성희롱 등으로 문제가 일어나거나 하는 등의 논란이 일어난 적은 없다. 오히려 성희롱 논란이 마광수를 지속적으로 비난해왔던 타 문학계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문학계의 엄청난 이중성이 아닐수가 없다. 사실 교수란 직책에 있는 사람이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성적인 발언을 자주 사용한다는 것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성희롱, 미투, 폭언 등으로 고발을 당할 수 있는 꽤 위험한 일인데, 마광수가 가해자로 폭로당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적어도 선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강의 시간에 성적인 농담이나 표현을 자주 했지만,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중간 중간에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덧붙였고, 문맥을 이해해보면 결코 그가 퇴폐적이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너무도 솔직한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



    - 1999년 1학년 교양필수 '글과 삶' 수업 수강 소감
  • 생전에 영화 동주를 고증이 엉망이라는 이유로 큰 혹평을 하였다. 그는 ‘윤동주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윤동주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하다.
  • 소설가로 유명해졌지만 원래 시인으로 등단했고 시집을 내기도 했다. 소설과 달리 시는 대놓고 야하지 않으며[39], 의외로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으면서 꽤 괜찮은 작품들이 많다. 특유의 페티시즘적인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밸런스는 잘 잡혀 있는 수준이다. 윤동주 연구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의외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시가 많다.
  • 생전 세간의 논란에 가려져 있지만, 국내 문학 연구에서 상당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현재 교육과정에 실린 윤동주의 시 해석 대부분이 마광수 교수의 박사 논문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 정설. 게다가 20대의 나이에 교수로 취임[40]했다는 것은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히 뛰어난 재능이라는 방증이다. 이와 통하는 여담으로, 그 니체24살에 문헌학 교수가 되었으니 말이다. 또한 한때는 신춘문예 단독 심사위원이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위원이었는데 그가 발굴해 낸 문인들이 무려 기형도안도현. 안도현은 이미 1981년 대구매일신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는데,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재등단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기형도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는데, 마광수 교수 본인이 쓴 수필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연세대 내 동아리인 연세문학회에서 지도교수와 학생의 신분으로 서로 대강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인맥의 힘이 없지 않았으나 그로 인해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명 시인이 빛을 보게 됐으니 비난하기도 참 애매하다.[41]
  • 연세대학교에서 교양과목 <연극의 이해>와 <문학과 성>을 가르쳤다. 전공수업은 교수들의 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수업에서 가장 많이 다룬 주제는 카타르시스였지만[42] 그 수업을 들어본 학생들의 소감은 그냥 두 수업 모두 <性의 이해> 혹은 <마광수의 이해>. 수업에서는 음담패설, 욕설, 경험담 등이 날아다녀서 19세 미만이 듣기에는 부적절한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막장은 아니고, 수업 중간중간에 딱 필요한 부분을 이걸로 메꾸는 형식이었다. 따라서 잘 듣다 보면 매우 유익한 수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주로 쉬는 시간에 백양관 휴지통 앞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이 많이 목격되었다. 단 국문과 학생이라면 마광수의 수업을 수강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었다. 국문과의 다른 과목 담당교수에게 들켰을 경우 학점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럼에도 2015년 기준 국문과 수강생들도 많이 들었다. 다만 이 국문과 수강생들이 담당교수에게 불이득을 받을 것을 감안하고 수강하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불이득 이야기가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였는지는 불명이다.[43]
  • 개그 콘서트에서 박성광이 자신의 패러디인 '마 교수'라는 캐릭터로 야한 개그를 하는 것을 불쾌해 해서 박성광은 그 캐릭터의 이름을 '박 교수'라고 바꿨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서 인기가 없어져서 짤렸다. 당시 개그콘서트의 시간대가 1시간 앞으로 옮겨지면서 심의의 기준이 되는 시간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 도용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2006년 4월에 출간된 시집 <야하디 얄라숑>에 실린 <말에 대하여>가 1983년 홍익대 교지에 실린 김이원의 시 <말에 대하여>와 똑같은데 당시 마광수 교수는 홍익대 국문과 조교수 겸 교지 편집위원으로 일한 바 있다. 논란이 일자 본인은 도용 사실을 인정했다. 시집을 내지 않는 제자의 시가 묻히는 것이 아까워서 그랬으며 이전에 제자와 대화하면서 협의가 된 줄 알았다고 한다.[44][45] 하지만 당연히 도용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이라는 비판을 피하지는 못했다. 본인은 내가 미쳤나 보다 하면서 잘못을 시인하고 언론에 공식 사과했으며 이후 문제가 된 시집을 모두 수거·폐기함으로써 법정 싸움까지는 가지 않고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한편 이메일을 통해 창작을 지도하던 주부의 작품을 도용했다는 논란도 있었는데 이는 마 교수와 주부 간의 사전 협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련의 도용 논란으로 인해 마광수 교수는 연세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정직 2개월과 2007년 1학기 출강 금지의 경징계를 받았다.[46]
  • 여성의 긴 손톱, 긴 생머리, 하이힐페티시즘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긴 발톱에까지 페티시즘을 느끼고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긴 발톱이 드러난 신발 신은 모습을 보면 너무 좋다고. 1999년 '글과삶' 1학년 교양수업에서 표현하기도 했다. 전형적 여성성 페티시였다.
  • 마광수 교수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더 자세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었다. 이 사이트에서는 자작 단편소설, 야사[47]와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했다. 해당 홈페이지에서 직접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이건 수위가 낮은편) 하지만 마광수 교수 사후 홈페이지가 비공개 처리되었다.
  • 고려대학교 호법제에 강연을 하러 오기도 했다. 강연이 끝난 후 받은 사인에 "쓰X 야해지자! 마광수"라고 남겼다고 한다.
  • 2013년 3월에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수강생들에게 영수증을 제출해야 학점을 준다는 식으로 저서를 강매한다는 보도로 "돈 벌려고 혈안이 되었냐"는 네티즌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인터뷰 기사에서 "영화 한 편이나 커피 한 잔에는 돈을 펑펑 쓰면서 만원짜리 교재 하나 안 사려는 학생에게, 교육적 소신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수업에 들어가는 학생이 교재를 준비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교재를 아예 준비하지 않거나 저작권자인 교수 앞에서 저작권법을 대놓고 위반하고 제본한 교재를 펼쳐 놓는 것은 당연히 예의가 아니며 분명히 잘못이다.
  • 본인도 학생시절 회원이었으며 지도교수로 있기도 했던 연세대 내 문학 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그의 문학론에 영향을 받은 에로티시즘 문학제가 열리기도 했다.
  • 엄청난 골초였다. "평생동안 담배나 여자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하자, "담배"라고 대답한 것은 이미 레전드이며, 체포되었을 때 갇혔다는 사실보다는 아침에 담배를 못 피운다는 것이 더 신경을 거슬렸다고 한다. 평소 즐겨 피우던 장미가 단종되자 뭘 피워야 하나 곤란에 빠졌을 정도.
  • 생전에 조영남과도 상당히 친한지라, 같이 전시회도 하고 술도 마시고 했다.
  •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때 발행인으로 같이 옥고를 치렀던 장석주 시인이 마광수 교수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했다. 장 시인은 마 교수의 작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운동권 좌파 이념이 휩쓰는 사회의 편향된 의식[48]에 비판적인 마 교수에 대해 지식 생태계 균형 차원에서 여러 책을 출판했다고 했다. 또 장 시인은 마광수 교수의 죽음을 프랑스 작가 앙토냉 아르토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인 '사회적 타살'로 표현했다. 2017년 10월 15일 여성조선 장석주 시인이 본 마광수
  • 월간 로드쇼 1990년 1월호에 그의 영화추천 목록이 있다. #[49]
  • 2019년 9월 5일부터 12월 31일까지 마광수 교수 유작 기념 특별전이 2주기 추모전으로 열렸다.# 추모전을 보도한 뉴스는 "외로움을 견디다 삶을 등지기까지 30년 넘도록, 여전히 변한 게 없는 세상 속에 그는 아직도 그저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는 쓸쓸한 위로만 건네듣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끝냈다.
  • 의외겠지만 김동길 교수와 친분이 있었다. 실제로도 마광수 교수는 김 교수를 일컫어 "플라토닉한 사랑을 추구한다"고 평한 바 있으며, 성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50] 김동길이 마광수 자신이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많이 챙겨 주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51]
  • 이 카페에 고인의 생전 글들이 일부 올라와 있다. 닉네임 '광마'가 마광수 교수 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현진영이 마광수 교수의 수필인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읽고 영감을 받아 자신의 데뷔 앨범의 타이틀곡을 <야한 여자>로 정했다고 한다. 1990년에 발표했으며, 뉴 잭 스윙을 초창기 한국 가요계에 도입한 역사적이고 실험적인 곡이다.
  •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구속되어 교수직에서 잘렸던 이력 때문에 의외겠지만 한때 TV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1989년 11월부터 1990년 4월까지 방영된 MBC 토요 심야 예술프로그램 <밤의 문학산책>의 MC를 맡았다.
  • 타계 후 맥심(잡지)의 표지 모델이 됐다. 이영비 편집장이 부고를 듣고는 우리나라의 성 문화를 만든 그에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해 마광수 특집으로 전환했다고. #
    파일:맥심 2017 10.jpg

[1] 부모의 집은 서울이지만 6.25 전쟁 피난 중 수원지방서 출생했다. 수원에서는 출생만 하고 밑의 학력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질적인 고향은 서울이다.[2] 석사 학위 논문 : 언어표현을 통한 문학의 사회적 효용성 연구(1974).[3] 박사 학위 논문 : 尹東柱硏究 : 그의 詩에 나타난 象徵的 表現을 中心으로(윤동주연구 : 그의 시에 나타난 상징적 표현을 중심으로, 1983).[4] 마광수보다 1살 연하인 1952년생으로, 동국대학교 연극학과 교수였다.[5] 이부 남동생인 마광수와는 달리 자녀가 있어서 마광수 별세 당시 상주는 조재풍의 자녀들인 마광수의 조카들이 맡았다.[6] 성해방이랑 연관이 있다.[7] 2016년 교수 정년퇴임 이후 2017년 사망할 때까지 1년여간은 아무런 활동도 안 하고 자택에 은둔해 있었다.[8] 출간 금지 판결 이후로 재심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출간될 일이 없는 전설의 소설이다. 단 도서관에서나 중고책으로 볼 수 있다.[9] <첫사랑>이란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10] <페티시 오르가즘>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11] 의외로 멀쩡한 수필집이라고 한다. 애초에 일종의 평론서고, 시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마광수는 이걸 저항의 언어로 1980년대 민중문학에 종언을 고했다고 자찬한다고 한다. 민중문학, 또는 저항문학의 종언이라는 개념은 현대 문학사, 특히 현대 한국 소설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할 만한 문제다. 군사독재정권 시대 내내, 그리고 90년대에서 이천년대 초반까지도 한국 문단과 소설계의 주축은 참여문학이나 민중문학, 저항문학 등으로 불리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들에 있었으며, 이러한 경향에 반하는 작품들, 특히 유미주의적이거나 쾌락주의적이고 오락성이 강한 작품에 대해서는 '비겁하다'거나 '현실도피적이다'는 비판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21세기 초반 무렵부터 이러한 참여문학 전통이 순식간에 와해되고 오락으로써의 문학이 급성장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무렵 마광수의 작품활동을 선구적이라고 볼 여지는 분명히 있다. 사실 마광수가 호오가 공존하는 평가를 받는 호시절이 끝난 건 <즐거운 사라>부터다.[12] 이때의 경험이 소설 <자궁 속으로>의 일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13] 심지어 고은은 6년제 중학교(現 중학교+고등학교) 중퇴 학력임에도 문학적 업적을 고려해 교수가 되었다. 즉, 해당 분야에 있어서 특기할만한 업적이 있다면 드물긴 하지만 학사~석사 학력만으로도 교수가 될 수 있기는 하다.[14] 마광수 교수가 처음 임용된 학교가 모교인 연세대가 아닌 홍익대 사범대학인데 국내 사범대학의 뿌리인 일제시대와 해방후 50년대까지의 사범학교 역사를 감안하면 석사 소지자의 교수임용도 충분히 가능했다. 62년 4년제로 사범대학이 일원화 되기 전까지는 중학교 교사는 2년제 사범대학으로 가능했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 사립대학에도 사범대학이 앞다투어 설립되는 과정에서 교수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15] 77년의 교수임용이 흔히 지금의 기준으로 교수 임용의 첫 단계인 조교수 직위가 아닌 전임강사였을 가능성도 있다. 즉 지금은 조교수 임용 후 부교수-(정)교수의 코스가 일반적이지만, 학교에 따라서는 시간강사 다음 단계인 전임강사 임용부터도 사실상 교수임용으로 대우해주는 학교들도 많았다. 박사과정 중에 전임강사로 임용하고 박사학위 취득후 조교수로 승격되는 코스. 마교수도 이후 박사학위 취득 후에는 모교인 연세대 교수로 임용된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인다.[16] 상술하듯 마광수는 결혼 5년만에 이혼하였고 자녀도 없었으므로, 가사일의 일부는 가정부가 돌보았다.[17] 이부누나 조재풍이 마광수보다 8살 많은 1943년생으로 마광수 사망 시점에서 74세였음을 감안하면 최소 90세 이상 장수했을 것으로 보인다.[18] 인터뷰 시점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앞둔 2017년이기에 윤동주 전문가였던 그에게 인터뷰를 진행했을 때 인터뷰어가 덤으로 해 본 질문에 답변한 것이다.[19] 상당히 마르고 수척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90년대에 한번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크게 고초를 겪어서 그 전부터 이미 상당히 수척해졌음을 감안해도.[20] 마광수는 원래 현재 래미안 첼리투스로 재건축된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에 살았는데, 생활고로 재건축 전에 아파트를 팔았다고 한다.[21] 가령 나도향의 소설 <>의 주제를 일반적으로 "가난한 빈민들의 도덕적 타락"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마광수는 "그냥 떡치는 게 좋다고 외치는 소설 아니냐"는 이야기를 한다.[22] 따라서 마광수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 역시 상당히 많은 편이다.[23] 마광수는 생전에 이문열 보고 "이문열은 작가도 아니다." 라고 까내린 적이 있다.[24]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만 성관계를 하지만, 부부 사이에서는 성관계를 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25] 예를 들어, 부부강간죄의 성립 근거 중 하나는 부부간이라 하더라도 성관계를 갖고 싶지 않을 때는 거절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무시해버렸다.[26] 계몽주의 계열 문학에 큰 반감을 보이는 사람이 계몽주의적 역사관의 오류를 인용하는 점은 아이러니. 이 문서 참고.[27] 다만 그조차도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한정이라 볼 수 있고,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젠더갈등과 맞물려 온갖 불편러들의 난입으로 인해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워지긴 어려워졌다.[28] 이 점은 상술하듯 <내가 죽은 후에는>이라는 시에서 "그저 윤회하지 않고 꺼져버리기를 바랄 뿐"이라는 구절에서 잘 드러난다.[29] 각색이 아니다! 실제로 강의 중 욕설은 물론이고 자지, 보지, 쓰리썸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타일.[30] 물론 교차검증이 딱히 안 되는 사항이니 곧이 곧대로 믿으면 곤란하긴 하다. 다만 마광수가 무엇보다 성에 관련된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하는 특성상 호불호는 있을 수밖에 없고 오해의 요지가 생길 수밖에 없긴 하다.[31] 데빌맨과 마징가Z, 큐티하니 등등 그의 대표작은 TVA로 방영된 적도 있고 당대는 물론 현재도 일본에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가이 고 역시 오사카예술대학 교수로 재직한 적 있다.[32] 김영하 역시 딩크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던 1997년에 결혼했지만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신혼시절 손주를 보고싶어했던 부모님을 제외하면 자녀에 대한 압박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 역시 처음엔 손주를 강하게 원했으나 결혼 기간이 길어지자 자녀 없는 김영하 부부를 결국 받아들였다.[33] 기계 출석체크 후 도망가는 것[34] 마광수 교수 본인이 방송에서 여러 번 항변하기로는 멀쩡한 과제를 내 줘도 학생들이 으레 야설을 써 오다 보니 과제가 에로틱 판타지 쓰기로 굳어졌다는 것인데, 실제로 2000년대 중반에 카타르시스에 대해 써오라는 과제를 주었을 때 거의 모든 학생이 야설을 지어 제출했지만, 한 학생은 카타르시스를 자아내는 자신의 경험담을 묘사함으로써 A+를 받은 사례가 있다.[35] 실제로 중간고사 대체 리포트로 존재하는 과제였다. 그냥 성의만 있는 수준이면 점수는 잘 나왔다고 한다. 더불어 마광수 교수의 소설 독후감 쓰기도 중간고사 대체 과제. 지정 도서는 매번 바뀌었다.[36] 그래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당시 제법 회자되며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문제작 <즐거운 사라>는 일본에서 10만 부가 넘게 판매되어 한국 소설 최초로 일본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일본 내 유명작가도 5만 부 팔기 힘들었다고 하니, 상당히 선전한 셈이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역시 일종의 문화원류로서 한국 시문학 역사에 획을 그은 시집이다.[37] 물론 철학류 책들이 대부분 이렇긴 하다. 다른 이론서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쓰여졌다는 평도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쉽다는 뜻이다. 마광수의 문학이론서는 비전공자는 물론 문학 전공자도 어려워한다.[38] 공교롭게도 단편집 중 '마 교수, 지옥에 가다'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마광수가 노벨문학상(!)을 받고 2년 후 사망한다는 설정. 유령이 된 마광수는 신문을 읽으며 이문열을 패러디한 '이문혈'이 자기를 디스하는 글을 보게 되고, 며칠 후 저승사자들이 찾아와 "지옥에 가게 되었다"고 하자 마광수는 "교회 좀 다닐걸" 하면서 지옥에 갔는데, 알고 보니 마광수는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며, 지옥의 염라대왕은 노출이 심한 복장의 섹시한 여인에 채찍을 들고 마조히스트로 보이는 남자들을 개처럼 끌고 다니는 '염라여왕'이었다. 이유는 퇴폐문화를 외치는 이들이 지옥에 많이 와서 이렇게 변했다고. 그리고 마광수가 받을 벌이라며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사라'가 섹시한 알몸으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염라여왕 왈, "마 교수는 성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으니, 그에게는 지옥에서 성 해방을 전파해야 하는 벌을 주겠다"라고 한다...이게 지옥이야 천국이야[39] 소설은 대놓고 야하다. 등단 40년이 되는 2017년 출간한 '마광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40] 당시 최연소 교수로 27세에 교수가 되었다.[41] 희한하게도 백석과의 인연이 연결된다. 윤동주나 안도현 모두 백석을 롤모델로 하거나 존경하는 유명 시인들이다. 더구나, 고교 후배이자 위 <즐거운 사라> 당시 불교방송 출연 시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당한 고교 후배이기도 하는 노래하는 시인 김광석의 법명을 길상사를 기부받은 법정이 원음이라 지었다.[42] 수업의 주교재인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는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을 주역이나 한의학 같은 동양사상과 관련지어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43] 사실 이럴 가능성이 크다. 국문과 담당교수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교수 수업을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학부 학생을 차별하여 불공정하게 학점을 매기는 행위는 교수 자질이 없다는 증거이다. 실제로 학생이 공식적인 루트로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면 교수로서 골치 아파지므로 이를 감수하고 굳이 차별할 이유 역시 없다. 교수 자질이 없는 사람들이 실존해서 가능성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자신에게 불리해질 뿐이다.[44] 그러면서도 김이원한테는 "오히려 그 시를 (시집에) 집어넣어서 다른 작품들이 죽었다"고 디스하기도 했다. 한편 홍익대 교수 시절에는 문학 강의 시간에 그 시를 극찬하며 줄줄 외우기도 했다고 한다.[45] 처음에 마광수 교수는 사전에 제자와 만나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당시에는 연락이 전혀 되지 않았으며 지난 11월 제자가 갑자기 연락을 해서 그런 사실을 먼저 이야기했당시 옛 추억을 이야기하고 기분 좋게 헤어져 그냥 양해가 된 줄로 믿었는데 당시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지금 와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먼저 내게 다시 출처를 밝히라거나, 삭제하라고 요구했다면 다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김이원은 사전에 협의가 된 적이 없으며 마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가 아까워서 내 시집에 실었다’고 말을 꺼냈고 황당해서 따지자 '미안하게 됐다. 그럼 내 소설 1권을 주마' 하는 태도에 분노하여 표절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도덕적 불감증에 경종을 울리려는 취지로 폭로를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기사 전문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82353.html[46] 그 와중에 이런 소소한 잡음이 있기도 했다.[47] 은꼴사라고 하기엔 수위가 좀 심하다.[48] 즉 당대의 운동권들은[49] 그 바로 옆에 있는 것은 다름아닌 박평식의 영화추천 목록이다.[50] 김동길은 60~70년대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운동가로 유명했으며 80년대엔 양비론자이자 제3지대주의자, 90년대 후반 이후론 친 박정희주의자이자 개신교 근본주의자로서 강경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보수주의자가 된 말년은 물론이고 젊은 시절에도 민족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어떤 시대에도 마광수랑 성향이 맞을 수가 없었다.[51] 이는 김동길 역시 60~80년대 시절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의해 투옥되고 교직에서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시절 정권친화적인 행보를 보여 승승장구한 다른 교수들에 따돌림을 당하고 80년대에 전향한 이후엔 민주진보진영으로부터 변절자로 낙인찍히기까지 했으니 분야는 다르지만 마광수가 당한 따돌림에 동정적인 시각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