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00:47:01

시오노 나나미

塩野七生(しおの ななみ)[1]

1937년 7월 7일~ (현재 만 [age(1937-07-07)]세)

일본의 작가. 현재는 이탈리아에서 거주하고있다.

1. 개요2. 문제점
2.1. 망언 모음2.2. 편향된 관점2.3. 근거 없는 추측2.4. 사료 활용에 대한 비판2.5. 정치적 성향과 역사관2.6. 취향(?)
3. 그 외4. 작품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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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작가. 현재는 이탈리아에서 거주하고있다. 망언으로 국내 이미지가 나빠져 가고 있다.

1937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1963년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하였다. 이후 5년 만에 귀국했고, 1970년에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이탈리아인 의사와 결혼하여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2]를 낳았으나 이혼했다. 아들은 시오노가 맡았으며, 이혼 후로도 시오노는 이탈리아에 살았다. 시오노는 피렌체에 체류하면서 이탈리아사(史)를 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양사 집필 및 연구를 시작하였다. 시오노가 유럽에 살고 있는 이유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유럽에 살고 있는 것이 자료수집 등의 집필에 더 유리하고, 독자들에게도 시장성[3]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4]

고등학생 시절 고대 그리스를 다루었던 일리아스를 보게 된 것을 계기로 서구 문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한다.

시오노 나나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역사소설가이다. 역사학자가 절대 아니다. 따라서 로마 관련글에 인용하지 않는 게 옳다. 역사를 연구하거나 배우는 입장에서 그녀의 소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부적합하다.[5]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일반인들에게 막연한 인식 밖에 없었던 고대 로마, 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를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알린 인물이다.[6] 작가가 역사전공자가 아니며 개인연구로 시작해 철지난 통설을 인용하고 편견이 많으며 새로이 추가된 지식이 업데이트되지 않은 교양서를 쓰지만, 마침 시의적절하게 나온 그 저서가 대중에게는 교양을 넓혀주는 역사서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시오노의 대표작은 15권으로 출판된 역사 소설 로마인 이야기로 그 외에도 르네상스 시대나 십자군에 관해 여러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시대의 주요 세력 가운데 하나인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이슬람 세계에 대해서도 다룬다. 물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시오노 나나미가 좋아하는 베네치아와 치고받고 싸운 오스만 제국은 과소평가의 대상. 작품들을 읽어보면 오스만의 정치, 군사, 문화 등 그야말로 다양한 분야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무지하다는 티가 곳곳에서 나는데, 후기 로마 제국을 다룰 때도 바로 그러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양면적인 인물로, 로마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녀를 호의 반, 비아냥 반으로 여사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녀의 책은 딱딱하지 않고 쉽게 읽히는 서술, 이야기를 풀어내는 흡인력, 특유의 감성적인 인물 접근법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서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사료를 임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점, 영웅주의 사관,[7] 심각한 인물 편애,[8] 근거 없는 상상 끼워넣기,[9] 기타 역사서술에 어울리지 않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많은 찬사와 비판을 함께 받는다.

기본적으로 학교나 연구기관에서 제대로 공부하고 훈련을 받은 정식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자료를 수집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종의 '역사 매니아' 나 '재야사학자' 정도에 해당된다. 이런 매니아들은 해당 분야에 대한 열정은 돋보이지만 사안에 대해 객관성을 담보하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서술 방향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고 사료를 철저히 분석하여 본질에 접근하기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아마추어 특유의 피상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에서도 이런 약점과 한계가 드러난다. 이런 약점은 분석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면 어렵고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책이 팔리지 않으며, 시장성만 생각한다면 깊이가 좀 약하더라도 책이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쪽이 낫기 때문에 많은 교양 역사서에서 공통적으로 어쩔 수 없다지만, 시오노 나나미처럼 아예 긴걸 아니다 하는 수준에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기에 변호는 어렵다.
단 로마나 르네상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기작가인 시오노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심지어는 그 영향력이 나무위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나무위키에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견유학파'라는 학파의 어원이 되었다는 서술도 로마인 이야기에 있는 내용을 가져온 정황이 역력하다.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책이 로마인 이야기밖에 없다.

때문에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은 역사를 다루지만, 역사서가 아니며 교양 역사서라고 보기도 어렵다. 굳이 장르를 분류하자면 역사 에세이나 역사기행 정도. 그녀의 책을 읽을 때 이런 점들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하며, 제대로 로마 역사나 십자군 등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면 좀 딱딱하더라도 해당 분야 전공자들이 저술한 역사서를 보도록 하자. 안 읽어서 문제지 이런 전문 서적의 경우 대학 도서관 같은 곳을 제외하면 일반인이 접하기 힘들다는 데, 도서관 가서 찾아보면 분명히 있다.

최신작으로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그리스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총 3권이라고 한다.

2. 문제점

시오노가 쓴 책들은 쉽게 읽히고 흡인력이 높기 때문에, 독자와 출판사 입장에서는 분명히 환영할 만한 베스트셀러 작가다. 하지만 역사 서술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동인지 작가"라고 말할 정도로 문제가 있는 작가이다. 많은 저작에서 역사를 메인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역사학자가 가져야할 객관성과 엄밀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도 이 사람의 책이 소설인지 역사를 다룬 책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기본적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중요한 부분을 바탕으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에 상상력을 가미하면서 써내려가는 스타일. 이 때문에 종종 '역사소설' 정도가 아니라 '대체역사소설'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아무리 에세이라지만 타인의 저작에서 인용한 내용에 대해서는 반드시 각주나 책 후반부의 색인 항목 등을 통해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시오노 나나미는 논문을 써본 적이 없는 탓인지 이런 레퍼런스 표기에 상당히 인색한 편이다[10]. 또한 해당 내용이 자신이 창작한 픽션이라면 그 역시 책에 표시를 해 놓아야 하는데, 종종 이런 표시가 없어서 실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2.1. 망언 모음

"누가 위안부(慰安婦)라는 명칭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참 상냥한 이름을 붙였다"
"위안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며 종군 위안부라는 단어를 다른 언어에서 찾아봤지만 없었고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섹스 슬레이브(성 노예)가 된다"
"전쟁터는 인간에게 극도의 긴장을 강요한다, 하루가 끝난 후에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위안부에게 가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리기만 한 젊은 병사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한다"
이 세 문장만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과 성 의식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알 수 있다. 한때 나무위키의 시오노 나나미 문서 최상단에 등재된 망언으로, 대한민국 내에서 그녀의 여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한 대표적인 망언이다. 자세한 사례들은 하술되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 보기 바람.

2.2. 편향된 관점

역사가로서 바라보는 자질은 한마디로 평할수 있다. 형편없다.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시오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역사 자체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인물과 특정 국가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좋아하는 특정한 남자인물에 대해 서술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데,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체사레 보르지아에 애정이 대단하며 그중에서도 카이사르에 대해서는 단순한 호의적 서술을 넘어 거의 숭배에 가까운 수준으로 치켜세운다. 원래 로마사에 관심있는 사람들 중에 카이사르 팬이 꽤 많기는 하지만(#) 시오노의 경우는 카이사르에 대해 광신이나 사생팬급의 짝사랑을 과시한다. 로마인 이야기 15권 중 카이사르 개인에 대한 책이 2권(4, 5권)이나 되며 다른 책에 비해 꽤 두껍다.[11] 내용은 '카이사르를 위한 헌정문'으로 봐도 될 정도로 카이사르 띄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반대로 그와 대립했던 많은 인물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고 있다. 심지어 카이사르와 동시대에 살았던 키케로를 카이사르와 비교하면서 키케로를 소인배에 기회주의자로 너무 심하게 비하하는 대목에서는# 실소가 나올 정도. 사료를 보면 카이사르의 내전이 일어 났을 때 처음에는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와 카이사르파 둘 중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원로원 측에 붇는 기회주의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 맞고, 법적으로 그다지 깔끔하지 못했던 카틸리나 탄핵가지고 평생 자뻑하고, 친구에게 카이사르 집에 갔는데 비서가 키케로를 못 알아보고 키케로보고 번호판 받고 기다리라고 했다고 불평하고, 클래오파트라가 약속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고 건방지다고 까는 등 쪼잔한 면을 보여주기는 했으나, 시오노 나나미가 깎아내리는 수준의 한심한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반감으로 한국 서브컬쳐계에서 카이사르를 역으로 너무 깎아내리고, 키케로나 술라[12] 등을 너무 띄워주는 경향이 보이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에 대해서 나쁜 점은 은근슬쩍 넘어가거나 뇌피셜을 사실인양 기술한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카이사르에 푹 빠져서 있는 탓에 그가 갖고 있었던 성향들을 다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외에도 좋아한다고 밝힌 남자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있는데, 다빈치의 경우 그가 자연과학 쪽에서 남긴 업적을 쓰기 어려워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우 이라크중동의 정세가 좋지 않아 방문할 수 없어서 쓰지 못했다고 밝혔다.

전쟁 3부작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편에 보면, 오스만 제국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남색 상대인 노예 소년과 술탄의 성애에 대한 묘사가 비잔티움 제국 재상 루카스 노타라스보다 비중이 높다. 이쯤 되면 역사책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다(역사소설이라고는 할 수 있다. 소설은 뭘 쓰든 작가 마음이니). 다만 그 '남색용 노예'가, 메메드 2세의 치세에 대해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서인 <정복자의 역사(Tarih-i Ebülfeth)>를 쓴 투르순 베이(Tursun Bey)라는 점은 감안해줄 필요가 있다. 다만 그에 대해서는 그 자신의 기록으로 밖에 알 수가 없는 탓에 궁정 시종이었던 것은 맞는 것 같지만 '남색용 노예'였다는 건 상상.[13] 물론 '동로마 제국로마 제국'이지만, 시오노는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이 아니야!"라고 하는 분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특유의 극렬한 반기독교 사상 탓에 특정 시대의 정체불명 자기 취향에 맞는 로마 제국만 로마 제국이라고 하는 사람이라, 폄하와 비하가 어쩔 수 없이 베어 있다.[14] 그런데 전쟁 3부작은 역사책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작자 자신도 인정한 소설이다. 역사 에세이에선 살짝살짝 드러나던 작가의 취향을 소설에선 감출 필요가 없어졌는지, 3부작 중 2작품은 주인공이 동성애를 하고, 남은 하나에선 불륜을 한다.[15]

꼭 마음에 드는 남정네에게만 하악하악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국가도시도 좋아한다. 이 아줌마의 이탈리아 사랑, 특히 베네치아 & 로마 제국 사랑은 정말 엄청난 수준이라, '역사소설'의 한계조차 넘어 거의 대체역사소설에 이를 정도다.

거의 유일하게 여성들에 대한 평가가 좋고 여성 인물들에게 주목한 저서로는, <르네상스의 여인들>이 있다. <남자들에게> 1, 2라는 에세이집을 냈는데, 여자가 바라보는 남자의 시각을 썼고 나름대로 긍정적인 평가도 받지만, 여성 상품화에 대한 안티테제적인 관점을 페미니즘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비판과 '병맛 넘치는 중2병 여성을 위한 지침서'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사실 한국 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로마 제국 역사라는 건, 중ㆍ고등학교의 세계사 수업에서나 아주 잠깐 배우고 넘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로마인 이야기가 히트를 치기 이전에 한국어로 발간된 서양 고대사 관련 서적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베네치아사나 르네상스사 또한 마찬가지.

또 전쟁 3부작에 나오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에 '황량해졌다'고 하는 말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보낸 다음에나 나올 법한 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황제 메흐메트 2세가 치세 내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일 가운데 하나가, 콘스탄티노플을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여러 민족이 한데 어울리는 국제 도시[16]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다른 거 필요 없고 인구 추정치만 해도 1453년 당시 4만 5천 명에서 1500년에는 20만, 1550년에는 66만으로 폭증. 따라서 굳이 '황량'이라는 말을 쓰는 게 소원이라면,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에 콘스탄티노플이 황량해졌다'가 아니라 '황량했던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다시 대도시로 부활했다'고 하는 게 옳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다만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에서는 보다 좋게 나와 있다. 대표적으로 "술탄 아래가 모두 평등하다"는 표현을 하며, 사실 이것도 군주론 4장에 나오는 마키아벨리의 표현을 빌린 것이다.

"인재 등용에 있어서 능력을 우선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근데 그러다가도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치고 물량빨로 밀어붙이며 변덕이 심하다고 또 비난한다. 근데 웃기는 것은, 시오노가 찬양하지 못해서 안달하는 로마 제국도 물량빨로 밀어붙인 적이 간혹 있다는 것. 그런데 이에 대한 시오노의 평은, '소규모 군대만 찔끔찔끔 보내면 쓸데없는 희생이 커지잖음. 그런데 로마 제국은 한꺼번에 대군을 보내서 이런 희생을 줄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하고 위대한 일임?'이다.[17] 똑같이 숫자로 밀어붙인 건데 한쪽은 훌륭한 전략이고 다른 쪽은 실력이 안 되니까 물량으로 밀어붙인 거다? 이건 대체 뭐 하자는 거냐?

오스만 제국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유럽 측 시각에서만 바라볼 뿐, 오스만 제국의 내부 사정이나 정치적 변동에 대해서는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시오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편으로, 시파히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예니체리만이 오스만의 상비군이었다고 하는 것[18]이 대표적인 예. 게다가 예니체리는 일종의 특수병이었고 오스만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시파히였으니, 시파히의 존재를 제대로 몰랐다는 건 시오노가 오스만 제국이 벌인 육전에 대해서는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된다.[19]

가령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를 다룬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 나오는 '스쿠타리[20] 공방전'의 경우, 시오노가 "체계적이고 정확하다"고 찬양하는 베네치아의 역사가 마린 바를레티가 오스만 제국군의 수를 무려 35만으로 잡은 예가 있다. 물론 오늘날 역사가들은 "앞의 1자가 3자로 바뀐 거 아니냐"고 하는 중.

본인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도 자주 비판하며, 영국은 대체로 찬양조다. "관리가 부실한 이탈리아의 로마 제국 유물을, 관리를 잘하는 영국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발언이 이탈리아에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알게 되면 상당히 분개할 듯. 이탈리아에서는 널린 게 고대 로마 유적이기 때문에 모조리 관리할 수 없는 노릇이고, 영국의 경우는 로마 유적을 포함한 고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를 잘 보존할 뿐이지, 이탈리아가 자기 조상들의 업적이나 유물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영국인들이 문화 유산에 대해 보존과 관리를 잘 한다면 성공회를 믿는 잉글랜드보다 상당히 과격한 칼뱅주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던 스코틀랜드의 폐허와 무너진 돌더미로만 남아 있는 수많은 유수한 수도원, 교회, 옛 주교좌성당, 덩달아 허례허식과 사치의 상징이라 허물린 궁전, 귀족들의 대저택은 뭐라 설명할까 시오노의 주장이 틀린 것과는 별개로, 이 설명은 어폐가 상당히 있는 것이 영국인들이 유적 관리를 잘한다는 것은 현대 영국을 말하는 것인데 16-17세기의 예를 들고 오는 것은 상당히 뜬금없다. 19세기부터 영국인들은 16-17세기의 광신으로 인한 중세 유적 파괴를 후회하기 시작하면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세웠고, 덕분에 현대 영국은 유물 보존 관리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가 맞다.

아우구스투스 당시의 로마군과 현대 한국군을 비교하는 유치하고 무식한 짓도 저질렀는데, 밀덕 입장에서는 충분히 탄식하고도 남을 정도. 이 정도면 밑의 역사관과 더불어 일부러 한국을 은근히 깎아내리려는 성향이 있는 것도 같다. 그 내용인즉슨 '고대 로마군도 5,000만 명을 15만으로만 지켰는데, 현대 한국군은 오히려 5,500만 명을 60만으로 지킴! 이거 쓸데없이 병력 많은 것 아님?'[21] 또 열 번 양보하여 비교한다 해도 한국을 비하할 수는 없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나와 있다.

2.3. 근거 없는 추측

사료로 밝혀져 있지 않은 부분의 마무리를 'XXXX 아니었을까?'라고 사료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예를 들어 칼리굴라를 암살한 근위병사가 "잘못된 자식을 책망하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찌르지 않았을까"라며 말하거나[22] 도미티아누스를 죽인 것이 도미티아누스의 아내인 롱기니아[23]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이것이 도미티아누스와 그의 조카딸의 관계를 질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하였는데, 사실 위는 학계의 의견도 아니고 근거없는 상상에 불과하다.

물론 롱기니아가 배후에 있다는 것은 고대 역사가들이 서술에 나오므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롱기니아가 이렇게 한 동기가 조카딸과의 관계를 질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시오노의 상상이다. 가령 롱기니아는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과부로 수절하였고, 자신을 항상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로 소개하였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도미티아누스 암살의 조종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얀데레

이는 마치 시오노가 막시무스의 사망에 대해 쓴다면, 그녀의 문장을 통해서 막시무스의 죽음은 이렇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러가지 행적에서 추측해 보자면 그는 공화파였지 않았을까?' (뒷받침 증거는 없다! 오로지 그녀의 상상력 뿐이다.)

대다수의 메이저 역사학자들이 사료의 가공을 최소화하여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봐도, 시오노의 글은 역사서라는 카테고리에 묶을 수는 없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가 워낙 대히트한 바람에 대학생들이 로마 제국 관련 과목 레포트로 《로마인 이야기》를 당당하게 참고자료로 제시하고 써가는 사태가 종종 벌어져서, 사학과 교수들이 뒷목을 잡는 일도 종종 있다.[24]

또한 흔히 말하는 독자연구에 해당되는 서술을 저서에 간간히 삽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제정은 넓은 로마 제국을 통치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거나[25]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덕에 로마 제국의 멸망이 뒤로 미루어졌다는 견해를 집어넣는다. 하지만 위의 두 인물이 등장했을 때인 공화정 말기, 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정점을 찍었다. 이때 로마 제국은 동방의 국가들을 몽땅 소멸시키고 영토를 2배로 확장하였으며 당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이미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개기는 미트리다테스를 자살로 몰고 갔으며 야만족인 갈리아족, 게르만족을 상대로도 승승장구하였다. 따라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등장이 아니었으면 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것이라는 의견은 군사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세습에 우호적인 견해를 삽입한 경우도 있는데, 일본의 정치가들이 지역구를 물려주는 것을 예로 들며 "안정을 위해 적절한 선택이 될 때가 많다"는 식의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로마 제국이 혈연에 의한 세습을 하여 안정적으로 굴러간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하였으므로[26] 이런 발언은 신빙성이 그렇게 높지 않다. 애당초 현대 정치와 고대 로마를 비교하는 것부터가 오류.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로마인들은 노예를 가족처럼 대우하였고 죽을 때 해방해 주었다"는 등 인간미가 넘치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는데, 사실 로마 제국의 노예 제도는 충분히 가혹하였다. 공화정 말기에 몇 차례 노예 반란[27]이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자. 이 가족 같은 노예제는 로마가 이탈리아도 통일하기 전의 노예제 혹은 중산층이 부리는 가족 단위 노예를 설명할 때 쓰이는 말이고 극소수의 행운아들에 불과했으니, 시오노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셈. 주경철 교수는 "햇빛을 보지도 못했던 광산 노예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는 식으로 비판했다. 모두가/족같은 노예제라면 맞는 말일 수도

성급한 추측을 함부로 쓴 예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로마인 이야기》 6권 말미에서 클레오파트라로마군에게 사로잡혔을 때의 부분을 묘사한 다음을 보자.
39세의 여왕과 33세의 승자는 왕궁 안에서 딱 1번 만났다고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가들 중에는, 그때 클레오파트라카이사르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수작을 부려 성공한 것과 똑같은 '수법'을 옥타비아누스한테도 시도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40세를 앞둔 나이에는 저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의 매력도 이미 효력을 잃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애당초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자기를 귀여워 해줄 사람을 한눈에 알아본다고 한다. 여자도 고양이와 같다. 자기한테 마음이 쏠릴 만한 남자는 눈빛만 보아도 안다.

클레오파트라도 단정한 용모를 지닌 33세의 젊은이의 차가운 눈길을 받은 순간, 그런 수법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게 아닐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는 것은, 일류라고 자부하는 승부사가 할 짓이 아니다.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고 나서 클레오파트라는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난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현실 인식에서는 계속 잘못을 저지른 클레오파트라였지만, 막판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현실을 분명히 본 게 아닐까. 그녀가 삶에 집착한다면, 로마 제국으로 압송되어 수도에서 거행되는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서 최고의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개선식이 끝난 뒤에는 여동생 아르시노에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지방 도시 어딘가에서 연금생활을 하는 것이 40세 이후의 인생이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패전국의 왕이라도 개선식이 끝난 뒤에 죽이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자살을 결심한다. 한 여자로서 살아남기보다는 여왕으로서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옥타비아누스도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으로서 죽든 간에, 어쨌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주는 것이 그에게는 편리했기 때문이다.

위는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누스가 만났다는 한 문장의 역사적 기록으로, 장문의 상상의 나래와 추측을 한 예이다. 근거 있어 보이는 추측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에 물려 죽은 것을 알고 서둘러 시종을 시켜 몇 L의 액을 빨아내게 하였고, 마침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낙담했다는 것이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등장한다. 다만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역시 여기저기서 루머로 돌아다니던 이야기를 듣고 쓴 게 많기 때문에 객관성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28] 여튼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를 유혹하여 탈선시킬 위험성이 없다면 죽는 것보다 살려서 개선식에 공개하는 쪽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훨씬 이득이다.

독자의 입맛에 맞게 딱딱한 역사 서술을 버리고 작가의 생각을 담아냄으로서 책을 쓰는 것 자체는 나름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저렇게 비논리적인 작가의 개입과 무리한 추정의 연속은 위에 언급된 비밀 회동이 마치 클레오파트라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양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그 근거가 "여자는 고양이와 같다"세상에 지 혼자서 여자인가. 진짜 자신이 고양이 같다고 느껴지는 여성 위키러 있으면 제보 바란다라거나 "승부사는 지는 경기에 걸지 않는다"는 등의 것이라면, 더욱 문제가 된다. 굳이 역사학적 소양이 없어도 대충 술자리에서 들으면 좀 간지날 법한, 듣기엔 섹시하지만 내용은 전혀 없는 격언이나 미사여구를 근거랍시고 끌어 오는거 자체가 저런 수사학적 화려함에 완전히 현혹되지 않은 최소한의 이성을 갖춘 독자를 우롱하는 것이다.

다만 "사료가 부족하니 상상력을 보태면" 등 아예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것이 아니고 설명을 해두었다. "사료가 부족해 이 부분을 알수없다"라고 책 이야기 진행이 끊기면 책이 당연히 재미없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2.4. 사료 활용에 대한 비판

신동아 2007년 5월호 인터뷰에 따르면, "이탈리아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내일 도쿄에서 유명 대학교수들이 온다'며 만찬에 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가 곧 그 교수들이 저와 동석하기 싫다고 했다는 연락을 받거나, 마키아벨리 전집에 발문을 써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좀 지나니 번역자가 시오노의 발문은 싫다고 했다.[29] 얘길 들을 때 어땠겠습니까.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일본 학계에서도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너무도 당연한거다.

교차 검증이 일반화되지 않았고 폐쇄적인 학계 권력이 강했던 시절 저질렀던 표절을 비롯한 세부적인 지적 불투명성, 카르텔화된 학계 권력 같은 비판이야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어느 나라 사학계를 상대로도 할 수 있는 말이고, 이런 점을 떼어놓고 보면 일본 사학계는 아시아에선 여전히 독보적으로 세계적 권위를 가진 학계이다. 서양 내의 동양사 연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일본사 자체의 볼륨과 심도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일본사가 아닌 외국의 역사를 공부하는 일본인 학자들을 기준으로 봐도 러시아 혁명사의 거장 하세가와 츠요시, 근세 유럽-중동간 문명 교류 연구로 명망 높은 다케다 준코, 남아시아사의 권위자 카라시마 노보루 같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일본 외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전 세계적 권위와 명성이 있는 학자들의 아웃풋으로 따지면 여전히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확실하게 우위일 만큼 일본 사학계는 권위나, 업적이나, 프라이드나 높은 편인데 학자면 다 거기서 거긴줄 아는 어떤 멍청한 윗사람이 돈 좀 만져본 동인지 작가를 동석시키려고 하니 일본 학자들도 실소 밖에 안나오는게 지극히 당연하다.

사실 시오노의 저술을 보면, 혹은 어느 특정 역사학자의 견해를 전체적인 학계의 의견인 것처럼 정의를 하면서 서술하는 아마추어적인 패턴을 보여줄 때가 많다. 프로페셔널이 아닌 아마추어 역덕후들의 일반적인 문제로서 나나미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독일테오도르 몸젠이라는 학자가 "카이사르로마 제국을 재창조했다"고 말한 것을 인용하며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을 재창조했다는 근거로 삼는데, 이는 몸젠이 개인적인 찬사를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이것만으로 카이사르가 재창조를 하였다고 확인 서술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30]

그렇다고 어떻게 재창조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들면서 독자들을 납득시키지도 않는다. 참고로 몸젠은 유명한 역사가이고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긴 하지만, E.H 카가 비판하듯 영웅주의적 사관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는 비판적으로 접근되고 있다. 등자의 발달이 기사계급의 출현을 초래했다고 정의를 내리기도 하나,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학계에서 아직도 진행 중에 있으며, 요즘은 등자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사료를 잘못 인용하는 경우도 눈에 뜨인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있었던 칸나이 전투의 전술을 자마 전투의 전술과 혼동하였으며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제 일선에 있는 잡병을 돌파하자 배후에 포진하던 정예병이 맞섰고 잡병은 측면에서 협공했다고 하는데, 이는 자마 전투 때 벌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이중으로 전열을 짠 뒤 일선이 분쇄되어도 포위가 가능할 정도면 숫적으로 우세해야 하는 상황인데, 칸나이 전투 때는 로마군의 보병전력이 한니발 바르카 군의 2배가 넘었다.

사실 칸나이 전투는 너무도 유명한 전투이다. 포에니 전쟁의 수많은 전투 중 가장 유명한 전투이고, 고대 로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이것만큼 대중적인 전투는 없는데, 여기서 전술을 잘못 설명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31] 고대 로마의 선거제도를 서술할 때 민회라고 일컫으며 193개 그룹으로 나눠 과반수를 가져가는 쪽이 승리라고 말하는데, 고대 로마에는 백인대 집회와 평민 집회라는 2개의 집회가 따로 있었으며 위는 백인대 집회에만 해당될 뿐 평민 집회는 전혀 다른 방식을 쓰고 있었다.[32] 그리고 콤모두스를 암살한 사람들의 동기를 알 수 없다고 서술하나, 실은 이들이 왜 그랬는지 서술해 주는 사료는 명백히 존재하고 있다.[33]

또 개인의 취향에 맞는 사료를 고르고 다른 사료는 누락시키는 경우도 많다. 가령 포에니 전쟁 때 벌어진 전투에서의 전사자 수는 사료마다 다른데, 시오노는 대체로 부풀린 쪽의 사료를 골라 썼다. 때문에 한니발 바르카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2만 5천명의 생존자와 함께 이탈리아에 상륙했다는 식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갈리아를 지나 알프스를 넘는 것이 힘든 여정이긴 하였으나, 75%가 행군 도중 사라질 정도는 아니었다. 가령 그의 동생 하스드루발은 역시 대군을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와 똑같은 루트를 지났지만, 매우 적은 이탈자를 냈을 뿐이었다. 비록 처음 시도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같은 루트에서 그 정도로 처음 시도한 쪽과 2번째 시도한 쪽의 차이가 어마어마한 이유를 설명하긴 어렵다.

또한 카이사르의 일생을 서술할 때, 그가 로마 제국 내에서 집정관으로서 원로원과 권력투쟁을 했을 때의 묘사도 주로 로마 과목의 교과서로 쓰이는 수에토니우스나 아피안의 사료와 불일치한다. 폼페이우스의 동료들에게 배분하기 위한 농지법을 통과시킬 때, 원로원 의원들의 참석 하에 폼페이우스크라수스가 차례로 연설하고 동료 집정관인 비불루스를 새점 타령이나 하는 겁쟁이로 묘사하는데, 이런 서술은 위의 사료들과 정확히 불일치한다.[34] 지나가는 이야기로 언급하지만, 브루투스의 처가 불붙은 을 물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그대로 서술한다.

이건 당시 로마 제국에서 떠돌던 이야기이고, 이후 2차 창작물에서도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플루타르코스는 당대 여러 기록과 브루투스 개인 서간집을 인용하여 이설을 일부러 반박하고 있다. 즉 브루투스가 필리피 전투에 참가할 즈음에 이미 중병으로 죽기 직전이었다는것, 플루타르코스를 상당히 자주 인용하는 시오노가 이 서술을 고의로 누락시킨 것이다.

또한 글을 쓰다보며 심취하는 탓인지, 그리스어에 무지한 탓인지, 안티오코스 3세가 등장할 때 대왕이란 존칭(메가스)라고 적어놓고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대왕의 칭호를 얻은 자는 폼페이우스 뿐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메가스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구별하지 못한 건지 아님 자기 글에 심취해 잊은 건지… 이렇게 헬레니즘 세계&오리엔트에 너무 무지하고 서술을 거의 하지 않는다

'무지'를 넘어, '비하'에 가까운 발언도 서슴치 않는다. 로마와 파르티아나 사산조 페르시아가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써넣는 소리가, '서방' 사람들은 이성을 갖춘 반면 '동방' 사람들은 강력한 전제군주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서방' 사람들과는 달리 '동방' 사람들에게는 힘이 곧 이치이며 무조건 강자에게 굴복한다는 것.[35]

이렇게 아마추어적인 의견 삽입과 자잘한 오류들은, 아마도 가쿠슈인 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이후 어떠한 공식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고 공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문인지 학계와 마찰이 심하다. 그래도 꼭 학계와 연이 없어서 마찰이 그렇게까지 심한 편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사료위조사건이 있다. 자신이 창작해 낸 사료를 학회지에 실었다.

물론 이게 문제가 되기 전에 그게 가짜라는 걸 다시 알린 것으로 보아, 정말 위조사료로 뭔가를 얻어내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단순한 장난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장난으로 얼굴에 먹칠을 당한 출판사 측은? 학계가 치를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 사료 조작이 은밀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다니기까지 하였다.[36]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저서인 <테이레시아스의 역사>는 이걸 지적한다. 그것도 해당 부분이 수록된 주경철 저서의 비판을 읽어 보면 저 위의 링크된 카이사르와 키케로의 대면과 비슷하게 마치 '진짜 지식인'인 자신이 전문적인 내용만 파느라 어수룩한 자칭 전문 학계를 엿먹였다는 식으로 자뻑하는 듯한 분위기까지 풍기는데, 전문 역사학자들이 보면 같잖아서 기분이 나쁘다가 그냥 웃음만 나올 내용이다.

역사 얘기하면 천날만날 동양에선 삼국지, 서양에선 로마 타령만 하는 대중적 차원과는 달리 전문 학자들은 항상 새로운 내용, 남들이 연구한 적없는 새로운 주제를 찾는 것, 즉 참신함을 강요받는다. 괜히 이런 역덕의 구미에 맞는 자극적인 내용 중심인 전쟁사, 정치사가 현대 역사학계 내에서는 전공자나 수요가 싸그리 말라죽고, 포스트모더니즘 대두 이후 문화, 사회, 미시사가 학계의 주류로 군림하는게 아니다. 특히 시오노 할망구가 다루는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같은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고대 로마의 위인들은 애초에 역사학계가 건드리기도 이전 서양 대학들에선 대부분 아예 다른 고전학과로 딴집 차리고 있는 고전학자들이 수백년동안 빨아먹은 고인물 of 고인물이라 이런거 가지고 도저히 남들이 몰랐던 새로운 지식을 발견, 논증해야 하는 전문 학계의 입장에서 다룰 이유도, 필요도 없는 주제들이다.

이래서 진짜 어지간한 1차 사료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50년, 100년 전에 싸그리 흝어 먹어버린 경우가 대다수라 상당히 잘 알려져 있는 중세 이후 서양사에 대한 연구는 혹시나마 다른 학자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는 영수증 하나라도 없나 하며 남의 개인집에 있는 창고와 조부모댁 유품 보여달라고 징징거릴 지경이다. 해당 시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이면 동시대인들이 알고 있었을 만한 내용에 기반해 구라치는 건 일도 아니고, 그 중에서 조금만 더 깊게 파면 아예 언어학적 표현, 표기법까지 동시대 기준으로 맞추어 위조 사료 만드는 것 자체는 일도 아니다. 그 뒤에 얼마나 빨리, 얼마나 처참하게 발각되서 털리느냐가 문제지. 당장 문자는 전혀 안 남겨진 고고학적 유물도 탄소 연대측정기술로 언제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 착착 알아낼 수 있는 시대인데 어설프게 조작한 문서 쪼가리가 들키지 않을까? 전문 역사학자들이 직업적 윤리 의식과 뻔한 결과로 인해 안 하는 학문적 관점에서 보면 범죄적인 짓거리를 해놓고 그게 자신이 학자들보다 더 똑똑해서 통한 줄 알고 있다. 사실 이런걸 일일히 찾아 보고 태클 걸어 줄 전문 학자들은 로마인 이야기 따위를 읽고 있는게 아니라 당장 이탈리아, 스페인, 남프랑스, 발칸반도 현지에 직접 가서 자료 찾고 발굴[37]할 예산을 타내기 위해 학장, 총장 앞에서 똥꼬쑈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이딴걸 읽고 하나 하나 반응할 시간과 여유도 없는 걸 자기 혼자 학계를 물먹인양 희희번죽거리는 것이다.[38]

다만, '허구의 이야기'로써 기승전결 구조를 갖추고 있다면, 그 글은 외형상의 형식과는 무관하게 소설에 해당한다. 즉, 소설은 기행문, 서간문, 일기의 형태로 쓰여질 수도 있고, 논문이나 보고서 형태로 쓰여질수도 있다. 즉, 시오노가 역사서와 유사한 형식으로 소설을 쓰는 것 자체는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일단은 "소설인 시오노의 책을 역사서를 보는 관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 작가의 상상을 덧붙이는 건 소설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자기 최애캐는 신격화하고 마음에 안 드는 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악의적으로 깎아내리는 행위나 제국주의 옹호 등을 "소설이기 때문에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저런 짓은 진짜 동인지에서 해도 비판받는다.[39]

로마인 이야기 7권 내용 중 집필하는 데 가장 크게 참고했고 9권에 해당 시기의 저술이 없거나 소실되어 집필이 난처했다고 하는[40] 타키투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아니다(또는 틀렸다. 잘못된 일이다.) 싶은 일이라면 해당 사료를 소개하기도 전에 일도양단으로 붓을 휘둘러 응징한다며 "타키투스의 저술을 읽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표현했지만... 자신도 별로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한 성향이 있다. 타키투스는 당신처럼 창작작가가 아니야

또한 이런 문제점은 기독교와 관련한 서술 부분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이 경우에는 실제 (1차 원사료라고 할 수 있을) 바이블의 해당 부분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긴 한 건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의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예로, 로마인 이야기 제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 411~412p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병역거부와 관련해서 다루고 있는데,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성구를 예로 들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병사들이 '유대 왕의 병사이면서 기독교인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 지불하는 봉급에 만족하라. 또한 군사행동을 하더라도 포악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안 된다. 군대 안에서의 승진도 동료를 중상모략한 결과여서는 안 된다."(제12권 411~412p)
해당 부분은 누가복음 3장 14절의 내용이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개역개정판의 해당 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시오노가 참고한 성경의 번역판이 무엇이었느냐를 굳이 따져 볼 필요조차 느끼기 힘든, 너무나 이질적인 두 내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해당 내용은 그리스도가 요르단 강에서 침례(혹은 세례)를 받고 소위 '공생애'를 시작하기 얼마 전의 일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요한에게 질문한 병사는 절대 기독교인일 수가 없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지언정 그들이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요한이 훗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회의감을 품고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누가복음 7장 19절)라고 질문했던 걸 보면 더더욱 이 병사들이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그 병사들은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기독교인인 우리는'이라 억지표현을 집어넣은 것 자체가 시오노 자신의 결론에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서라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또한 단순히 강탈하지 말고 고발하지 말고 받은 급료로 족하라는 본래 내용을, 자기 임의대로 '군사행동을 하더라도', '군대 안에서의 승진도'라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을 첨가하여 이 역시 바이블 내용을 왜곡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로마 '정치사 부분'의 서술에 있어 시오노가 그나마 견지하려고 한 '정확한 사료참고'의 태도가 유독 기독교 서술 부분에서는 이렇듯 전혀 보이지 않거나 매우 허술한 경우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바이블 왜곡은 다음 내용에서 극치에 이른다.
인간의 몸에도 많은 부분이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을 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바지하는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인 이상 타고난 능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을 잘 하는 사람은 행정관, 가르치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은 교사,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은 설교사를 하면 된다.(제12권 410~411p)
초기 기독교인들도 얼마든지 로마제국의 공직에 취임할 수 있었을 거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내용인데, 저 부분은 로마서 12장 내용의 일부이다. 개역 개정판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로마서 12장 4~8절)

시오노의 왜곡행위가 명백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로마서의 해당 부분은, 로마 제국 신민으로서의 (로마 사회 내에서의) 여러 역할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교회(회중) 내에서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신도들이 자기들이 받은 능력대로 교회 내에서 수행할 여러가지 다양한 내부적 역할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시오노는 해당 내용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결여된 상태로 (로마 제국의)'행정관'이라는 완전히 엉뚱한 표현으로 왜곡해 자기 주장을 성립시키는 데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바이블의 해당 내용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저러한 서술들이 왜곡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속아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바이블 해당 내용의 기본적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오노가 서술한 기독교 관련 파트가 신뢰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부분들을 보아도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2.5. 정치적 성향과 역사관

시오노의 책을 꼼꼼이 읽으면 그녀가 "체제보단 운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로마인 이야기에서 종종 "오래 번영하는 국가는 개인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시스템에 의존하는 반 영웅주의의 국가"라고 말하긴 하는데,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그녀의 저서의 실제 서술 태도는 이와 정반대로 굉장히 영웅주의적이고 인물 중심적이다. 단순히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카이사르와 같은 특정 위인들을 통해 전체 역사를 해석하려고 시도하기도 하는데, 이는 알려지지 않은 대중들의 역사적 역할에 관심을 쏟고 있는 현대 역사학계의 경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실제로 시오노는 저작만 보면 미시마 유키오 식의 로망스형 우익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다만 무명 시절 미시마 유키오할복에 대해서 어설픈 세레나데라고 비꼬았고, 외국의 자유당 총수에게 "일본자민당은 전혀 자유와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지 않기에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었다"고 말했는데, 다만 시오노가 우익인 건 명백하다. 또한 기본적으로 그녀가 갖고 있는 영웅주의적 사관이 결국은 파시즘과 유사한 사상으로 수렴한다.[41]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해서 아사히신문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시오노는 "돈이 없으면 원전 폐쇄도, 대체에너지 개발 등의 대비책도 마련할 수 없다. 사고 이후 원전 가동 중지에 들어간 이탈리아프랑스로부터 전력을 사와야 해서 전기료가 상승했고, 경쟁력이 떨어졌다."며 원전 재가동을 주장했다. 전형적인 우익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시오노 나나미가 자국의 우경화에 동조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아래의 과거사 부정 사례를 보면 일반적인 일본의 우익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 등과 같은 책을 보면 로마나 베네치아 공화국 등 자신이 좋아하는 나라에 대해 거의 사대주의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일방적인 찬양을 해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즉, 서양 강대국을 맹목적으로 미화하는 옥시덴탈리즘 지지자이자, 어느 정도 국까에 가까운 우익이라서, 과연 그녀가 로마 제국일본 제국을 동급으로 볼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런 점에서 타카다 마코토 같은 일반적인 일본 우익이 이런 그녀의 주장에 동조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아래의 글에서 일본이 로마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보면, 자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문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지도 심히 의심스럽다. 다른 의미로 골때리는 우익 아래의 과거사 관련 망언은 '우리나라는 무지무지 위대해서 그런 흑역사는 없스무니다'하는 의미로 한 게 아니라, '강대국에게 패배한 약소국 주제에 말이 많다'는 식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준 언행을 보면, 거꾸로 자국한국에게 멸망해 식민지가 되는 리버스 상황이 와도 그동안 한국의 식민 통치자들이 행했을 법한 각종 악행에 대해 부인주의적 경향을 보일 수도 있다. 당장 아래 항목을 다시보면, 자국의 옛 만행들을 부인하지도 않으면서도 이를 어쩔 수 없었던 것인 양 미화하고 있다.

'로마인과 일본인의 비슷한 점'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으면, 더더욱 충격과 공포가 배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로마 제국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이 글은 일본 잡지사 기자가 굳이 시오노에게 "일본인과 로마인의 비슷한 점을 설명해 주세요!!"라는 병맛 넘치는 질문을 해서 억지로 대답한 것에 가까워서 무작정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사료가 없어서 상상력을 넣어"라는 문장을 항상 넣으므로 오해하지 말자.

시오노 나나미 역사관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조상과 후손은 별개"라는 주장을 하며 본인이 원하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저지른 과거사의 문제들도 "일제에 점령당한 35년이란 상처가 한국인에겐 매우 큽니다." 라는 질문에도 "한국이 역사 문제를 말할 때, 지금의 일본인은 전쟁을 이끌었던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제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입니다. 누군가 제게 전쟁 책임을 묻는다면 저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살아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그녀의 논리를 요약하면 "그 만행들은 우리 조상이 한 것이긴 한데, 내가 한 짓이 아니니까 나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니 내가 미안하게 느낄 필요도 없고, 사과할 필요도 없음."이다. 물론 조상이 저지른 죄를 무작정 후손에게 묻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많은 논란이 있는 일이지만[42], 개인과 국가의 일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이 문서의 열람자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위의 논리로 일본인으로서의 책임까지 회피하고자 하고 있다.[43]

시오노 나나미의 이 발언이 나온 당시는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이었는데, 당시 한일관계가 비교적 양호해서 그랬는지 한국에서 별 문제 제기 없이 넘어갔고, 이토록 저자의 역사관이 무책임스러웠는데도 로마인 이야기는 청소년-중고등학교-대학생 권장도서가 되었었다. 그 결과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수익을 벌여들였고, 더 유명해졌다.[44] 결론적으로 이는 시오노 나나미가 역사적 참상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 멋대로 역사를 편협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2014년 9월 우익성향 월간지 문예춘추에서 일본군일본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글.(2018 8월 현재 삭제 됨. 같은 내용을 다루는 다른 링크 요망.)을 기고[45]했는데 위안부 피해자가 강제로 연행된 것에 대해 일본 극우의 위안부 자발적 매춘부론자가 잘 써먹는 주장인 "인간은 부끄럽거나 나쁜 일을 했다고 느끼는 경우에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스스로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스스로 믿게 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한국의 위안부 관련에는 모르쇠 하면서 네덜란드 여성들을 강제로 성노예를 시킨 스마랑 강간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조속히 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독자의 후기를 보면 문제의 기고문이 탈아입구에 근거한 서양인들 눈치보기에 가까운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 "네덜란드여성 위안부 동원 빨리 손써야" 시오노 나나미 "네덜란드여성 위안부 동원 빨리 손써야"

또한 ‘분케이 슌슈’(文藝春秋)에 기고한 글에 "누가 위안부(慰安婦)라는 명칭을 붙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참 상냥한 이름을 붙였다"면서 "위안이라는 단어는 고통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며, 종군[46] 위안부라는 단어를 다른 언어에서 찾아봤지만 없었고,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섹스 슬레이브(성 노예)가 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그녀의 말은 위안부를 인정하고 사과하고자 한 발언이 아닌, 모호하게 일본군의 만행을 부정하는 말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시오노 나나미는 "전쟁터는 인간에게 극도의 긴장을 강요한다. 하루가 끝난 후에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위안부에게 가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버리기만 한 젊은 병사들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며관련기사 아시아권 전체에 끼친 세계사적 인권 유린이자 전쟁범죄인 위안부문제를 두고 역겨운 망상의 싸구려 소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가 로망에 가득차 진실을 왜곡하는 미화 사관(美化 史觀)을 가지고 있다는 적나라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아시아국가들에 대한 우월의식에 가득찬 전쟁의 광기에 빠진 일본군은, 위안부여성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긴 개뿔,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게 공연히 화풀이를 할 목적으로 손찌검을 하거나 담뱃불로 몸을 지지는 등 온갖 추잡하고 잔악한 행위를 자행했다.[47] 더 충격적인 것은 심지어 일본군은 전쟁에서 패하면 황군(皇軍)의 수치를 알려선 안 된다고 위안부를 죽이기까지 했다.[관련자료].

여담으로, 이 발언에서 '위안[49]'이라는 단어를 번역 문제로 돌리고 있지만, 굳이 '위안'이라는 단어에 맞춰서 번역하자고 하면 'solace', 'relaxation' 등으로 쉽게 번역할 수 있다. 종군위안부를 '섹스 슬레이브'로 번역하는 것은 바로 저렇게 시오노 나나미가 하는 로망스 사관처럼 미화된 단어로 실태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실태에 맞춰 정확한 명칭을 붙이려는 뜻에서 일부러 단어를 적나라하게 하는 것이다. 그 실태는 죄악으로 가득찬 계획에 적당히 미화된 이름을 붙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공식 문서에서는 "최종 조치" 등으로 돌려 불렀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지 W. 부시 시절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문제에 대해 당국자들이 민간인 학살,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부수적 피해 (collateral damage) 따위 표현이나 쓰는것과 마찬가지이다.

과거사 문제를 재판에 빗대서 중국과 한국은 원고로 일본은 피고로 비유하며 원고 측(한국과 중국)은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이는 전법을 잘 쓰는 데다, 피고 측은 유능한 변호인을 기대하기 어려워서 피고측인 일본은 침묵해버리기 쉽고 침묵하고 있으려면 증거를 통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20세기 전반부터 50년간 일본의 모든 공문서를 모아 공개하고 영어 번역문도 만든 뒤 이에 대한 판단은 제3자에 맡기자고 했다.[50]

그 뒤 '아시아역사자료센터'라는 곳이 공문서를 수집하고 있다면서 "이런 센터를 통해 '일본은 역사를 마주 보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응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센터에 대한 정부 지원금을 10배 늘리자면서 "공문서를 데이터화하는 데 20년이 걸리기 때문에 그동안 자기비판이나 사죄를 유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산을 10배 더 지원하는 건 싸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존 저작들의 탐미주의적, 제국주의 옹호적, 영웅주의적 성향 때문에 상당수의 독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그야말로, 평생까임에다 노망난 할매 확정이다. 시오노의 책을 안 사서 다행이었다는 비아냥과 분서 인증을 하고 싶다는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인은 고대 로마인과 전혀 관계가 없고[51], 비잔티움과 로마는 역사적으로 아무 상관없다는 논리로 비약한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 그럼 서로마 제국 멸망 전과 후 양 시기에 걸쳐서 통치한 동로마의 제노 황제는 476년까지는 로마 황제였고 그 이후부터는 '비잔틴 황제'였는가? 애초에 비잔티움이란 단어는 고대 로마와 중세 로마를 구분짓기 위해 현대 역사학자들이 쓰는 단어일 뿐이며,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로마라고 호칭하고, 자신들을 로마인이라고 불렀으며, 주변국의 인식과 호칭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서로마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지위를 계승한 역사적 맥락이 확고한 나라다.[52] 설령 비잔티움 제국 국민들의 시각에서 생각하지 않고 달리 생각해 보더라도 최소한 비잔티움 제국이 7세기 전반 이후에 지중해의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제국 공식언어가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로 바뀌고 황제의 정식 칭호가 카이사르 아구구스투스에서 바실레우스로 바뀌는 등 로마적 특성을 상실하고 '그리스화'가 진행되기 이전 시대에는(즉 476년 ~ 7세기 전반) 말 할 것도 없이 로마제국 그 자체였다. 뭐 시오노 나나미 아니라고 해도 서양사를 잘 모르는 문외한은 라틴어 안 쓰고 현대 이탈리아의 로마시가 수도 아니면 로마 제국 아니라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전개하며, 로마 제국은 기독교 때문에 망했으니 기독교 믿는 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 아니다라는 실소할 소리를 하긴 하지만, 이런 말이 소위 로마사 분야의 인기 작가에게서 나와서 현대 한국의 서양사 이해에 심각한 해독을 끼치고 있는 건 진짜 심각한 문제다. 또한 심지어 이 분께선 로마인 이야기와 관련하여 "이탈리아로마 제국 유적을 영국인이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출처 필요)

2.6. 취향(?)

로마 제국과 관련되지 않은 시오노의 다른 책, 에세이 등을 읽다보면 그녀가 얼마나 외면의 아름다움, 즉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다. 1900~1950년대를 주름잡은 할리우드의 미남미녀 배우들에 대해서는 온갖 찬사를 던지다가도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니로는 극딜한다. 온갖 이유를 다 대는데 잘 들어보면 그냥 아, 못생긴 것들 나오니 짜증나. 내가 저걸 왜 봐야 함? 이 한 마디 뿐이다. 메릴 스트립도 비슷한 이유로 비난한다. 좀 더 자세히 적으면 1950년대 이전의 영화를 보면 현실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는데, 리얼리즘의 시대로 접어들며, 그리고 니콜슨과 호프먼, 드니로의 전성기가 시작되며 영화 속에서 현실과 똑같은 피로함을 느끼게 된다며 저 셋을 싫어한다. 물론 저 3명이 연기 잘하는 건 인정하지만 '현실과 똑같은 연기를 한다고 그게 연기를 잘하는 걸까?'라며 딴지를 걸고 넘어진다. 이 에세이는 메릴 스트립을 향해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세요. 당신이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다 알고 있나요?'라는 어이상실의 말을 날리며 끝맺는다.

시오노가 외모가 아닌 육체의 아름다움에 끌린다고 한 이유는 운동선수도 또 엄청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특히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을 비교한 글을 보면 앞선 세 배우를 극딜한 것과 반대로 세 선수 모두를 엄청나게 찬양한다. 패배한 날에는 '내가 내일 자네들에게 승리를 보여주겠어'라고 말한 뒤 반드시 이겼다는 일화를 이야기하며, '리더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절정은 마이클 조던이다. 조던에 대해서는 특유의 운동 능력을 찬양하며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젊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떠오른다', '인간 육체 본연의 아름다움' 등 시오노가 쓸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를 바친다. 여기에는 육상선수인 칼 루이스도 포함된다.

이탈리아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엄청난 축빠이기도 한데, 축구에 많이 식견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좋아하는 선수 중심의 얼빠. 물론, 식견이 있든 선수만 좋아하든 본인 마음이지만 아무래도 시오노는 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성향을 많이 드러냈고 이런 성향이 축덕질에서도 그대로 나오는지라 곱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즈보니미르 보반, 로베르토 만치니,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데니스 베르캄프 등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대단하다. 다음은 선수에 대한 평이다.[53]
바티스투타: "한 번이라도 좋으니 카메라맨으로라도 분장해, 골 바로 뒤에서 바티스투타의 슈팅 모습을 보고 싶어요. 이 천성의 스트라이커의 발에서 튀어나가는 슈팅의 위력을, 골키퍼와 거의 같은 위치에서 맛보고 싶은 거예요. 막무가내로 강력히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지단: "프랑스의 10번이 델 피에로였다면, 프랑스는 이기지 못했어요. 한편, 이탈리아의 10번이 지단이었다면, 이탈리아는 챔피언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대답이 되지 않나요? 지단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이런 남자와 결혼하면 여자는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다하게 돼요. 부드러운 유머, 축구를 직업으로 삼는 데 대한 마음가짐의 확실함, 무대가 크면 클수록 더욱 발휘되는 승부 배짱. 미남이 아니건 머리가 벗어졌건 알 바 아니라는 느낌마저 들거든요. 고대 로마의 장군이라면, 서슴없이 그를 백인대장에 임명했을 겁니다."[54]
루이스 피구: "포르투갈 팀의 약진상은 나를 매우 행복하게 만들었어요. 첫째, 피오렌티나에서 플레이하고 있는 루이 코스타의 차분한 멋이 못 견디게 좋아요. 게다가 피구 선수는 그 생김새부터가 '사나이'거든요. 그래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반면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서슴없이 디스하는데, "나의 위대한 이탈리아가 이럴 리가 없어!" 수준이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에 대해서는 "소심하고 모국어조차 제대로 못하는 저능아"라고 비난했다.[55][56] 프란체스코 토티 역시 "지능 수준이 의심가며, 유로2000에서 고작 1골 넣은 걸로 거만해하는 어린애"라고 깠다. "이러한 어린애들이 이끄는 이탈리아 축구팀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고 깠는데, 결과론적으로 그들의 대활약으로 이탈리아는 독일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 역사학 외에 시사나 축구, 정치, 영화든 뭐든 수박 겉핥기 식으로 존나 피상적으로 아는 내용을 자신의 뒤틀린 미학으로 왜곡시킨 다음 자기가 무슨 굉장히 통찰력 있는 사람인양 으쓱하기 좋아한다. 비단 역사학 뿐만 아니라 상기한 축구, 영화도 진지하고심도 있게, 선수나 해당 작품 자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순수, 근면한 팬들 입장에서는 토나오는 인물 일 수 밖에 없다. 이 할망구는 결국 뭘 하던 그 주제 자체를 진지하게 조명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파시즘적 싸구려 영웅주의에 기반한 뒤틀린 미학의 소품정도로 다루기 때문이다. 비평가이자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대표작 오리엔탈리즘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한 서구 지식인들은 중동을 진지하게 그 자체만으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재생산하는 목적으로 다루어 왔다"며 언급한 문헌적 태도[57]가 끼치는 해악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3. 그 외

시오노의 책이 인기를 얻은 것에는 번역자 김석희의 공로가 크다. 실제로 김석희 번역이 아닌 작품들은 번역이 되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시장에서 참패했다. 이는 시오노 팬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경우, 김석희 씨가 시오노의 동의를 얻어 문장 구조를 완전히 뜯어 고쳤다고 한다.

특히 전쟁 3부작의 경우, 소설이기 때문에 역사는 잠깐 제쳐두고 읽을 수 있다. 다만 시오노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 기반에 깔린 생각을 염두에 두면서 읽을 것.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시오노는 정규 훈련을 받은 역사가가 아니고, 그녀의 아마추어 에세이 책을 역사로 읽는다는 것은 역사공부에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오노는 자신의 글에서, 그것이 역사서로 기능하기 위한 최소한의 고민도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소설가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해 놓고서도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인 척하는 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국내에서는 역사학/인문학에 몹시 나쁜 영향을 계속해서 끼치고 있다. 다만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관문으로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비유하면, 과거 조셉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3권은 웬만한 대학에서 교양서로 꼽혔지만 이걸 완독한 대학생은 전공자말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연의나 작가들이 적당히 편집 각색한 중국 고대사 중세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완독한 대학생은 많을 것이다.

아무리 제대로 된 역사서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더라도, 어느 정도 학계의 연구에 의해 명확히 밝혀진 사실조차 무시&왜곡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58]를 표현하는 책이 시오노의 저작들이다. 게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당당하게 사실인 양 이런저런 사례를 끌어 모으다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지적을 받으면 '픽션이니까'라면서 면피하는 자세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흥미진진하게 서술하는 능력은 뛰어나므로, 시오노 의 저서는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이 있으나 잘 모르는 초보에게 있어 읽기 쉬운 입문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바람직한 입문서인지는... 먼나라 이웃나라가 많은 역덕들을 유럽사로 이끌었듯이. 하지만 제대로 된 서양사에 대한 지식을 쌓고 싶다면 시오노의 책으로 공부하는 것은 위험하며, 대학 교수와 같은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저서를 읽는 것이 좋다. 둘 다 읽으면서 시오노가 어떤 부분에서 이상하게 서술했는지 발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전공자보다는 전공자가 혹여 뭔가 놓치고 넘어간게 있나? 하는 의문으로 보면 그나마 좀 말이 되는 얘기도 없진 않다. 논란거리 중 여러 주장 중 하나와 일치하는 것일 뿐이란 의견도 일리는 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나름 찌질했던 인격을 생생하게 복원해낸 건 그럭저럭 봐줄만하다.

나무위키의 로마사 분야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견해를 지나치게 자주 인용해 역덕후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삼국시대를 이야기하며 이문열 삼국지를 인용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 한편 반대로 말하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5권은 시중의 삼국지연의 10권처럼 읽으면 해롭지 않다는 말도 된다. 촉빠나 시저빠나 그게 그거다[59] 삼국지연의를 중국사 레퍼런스로 인용하는 대학생은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로마인 이야기를 서양사 레퍼런스로 인용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기실 전공자 관점에서는 이덕일, 박시백 등이 쏟아내는 한국사 교양서보다 나을 것도 없지만 못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수준이라... 애초에 책의 포맷부터가 사서가 아닌데 독자 일반의 교양 백그라운드가 얕은데다 작가와 출판사의 뻥도 더해져서 오용된 것이다. 그리고 유일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로마사를 다룬 책 중에선 국내에서는 독보적으로 많이 팔린 책이다 보니 그 유명세로 이렇게 까이는 것이라 해도 된다. 더 이상하게 써놓은 잡서는 널리고 널렸다.

4. 작품

국내에 출판된 작품은 국내명 중심으로 적었다.
  • 그리스인 이야기(전 3권)

    • -민주주의가 태통하는 순간의 산고
      -민주주의의 빚과 그림자
      -
  •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 원제는 '사람들의 모습'
  •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 남자들에게
  • 남자의 초상 - 국내 미출간
  • 다시 남자들에게 - 국내 미출간
  •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15권 + 2권)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한니발 전쟁
    • 승자의 혼미
    •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루비콘 이전)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루비콘 이후)
    • 팍스 로마나
    • 악명 높은 황제들
    • 위기와 극복
    • 현제의 세기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종말의 시작
    • 위기로 치닫는 제국
    • 최후의 노력
    • 그리스도의 승리
    • 로마 세계의 종언
    • 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
    • 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 원제는 '로마에서 일본이 보인다'
  • 로마에서 말하다 -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와 나눈 영화 이야기
  •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 원제는 '르네상스는 무엇이었는가'
  • 르네상스의 여인들
  • 마키아벨리 어록
  • 바다의 도시 이야기
  • 사랑의 풍경 - 원제는 '사랑의 연대기'
  • 살로메 유모 이야기
  • 선택의 길목에서 - 원제는 '사는 방법의 연습(젊은이들에게)'
  • 세 도시 이야기 - 원제는 '색채로망 3부작'
  • 생각의 궤적
  • 시오노 나나미의 국가와 역사 - 원제는 '일본인에게(국가와 역사 편)'
  • 시오노 나나미의 리더 이야기 - 원제는 '일본인에게(리더 편)'
  • 신의 대리인
  • 십자군 이야기
  •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 어른 2명의 오후 - 국내 미출간
  • 어부 마르코의 꿈
  • 이탈리아 공산당 찬가 - 국내 미출간
  • 이탈리아로부터 - 국내 미출간
  • 이탈리아에서 보내온 편지
  • 전쟁 3부작
  • 침묵하는 소수 - 원제는 '사일런트 마이노리티'
  • 콘스탄티노플의 뱃사공
  •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 국내 미출간

[1] 7월 7일에 태어났다고 七生이라고 했다 한다. 동음이의어로 鹽の七味, 소금의 일곱 맛이라고 장난치기도….[2] 영화 쪽에서 일하는 듯하다.[3] 유럽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재유럽 작가의 것이 일본 내 작가의 것보다는 독자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4] 국내 작가도 이런 성향을 활용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물론 지금도 있다.[5] 시오노 나나미가 '나름대로' 로마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하고 글을 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로마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추측이나 의견을 객관적 역사 사실을 두고 첨언하는 것이 아닌) 객관적 사실과 섞어쓰기에 그녀의 글은 절대 역사 자료가 될 수 없다.[6]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HBO 드라마 Rome이나 기타 따른 메체를 통해서 고대 로마, 르네상스 시대 당시 유럽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7] 시오노 나나미만 그런 건 아니다. 로마사 및 유럽 고대사 연구가 활발했던 나라들 중 하나가 독일이고, 바로 그 독일에서 영웅주의 사관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본이 개화시절에 독일을 참고한 걸 생각하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8] 이것 또한 시오노 나나미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대 역사 연구가들 중에서 특정 인물빠가 없지 않아 있다.[9] 시오노 나나미의 가장 큰 문제는 이거다.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뇌피셜이 너무 많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같은 역사소설들도 역시 상상 끼워넣기 및 음모론을 채용하지 않는 건 아니나 어느 정도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소설을 전개한다. 문제는 시오노 나나미는 근거가 없는 뇌피셜을 너무 사용하는다는 거다.[10] '책 마지막에 보면 누가 몇 년에 쓴 무슨 책을 참고했는지 다 나오는데 무슨 소리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전공 서적이나 논문을 아무 것이나 펼쳐 보면 다른 책이나 논문을 참고한 페이지에 주석이 달려 있으며 거기에 저자의 이름이나 출판사, 서명(書名)은 물론이고 페이지 수까지 꼬박꼬박 적혀 있는 걸 알 수가 있다. 즉 시오노의 저작에는 '이 부분은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서 참고한 것' 이라는 각주가 빠져 있으며, 교양 서적이라면 모를까 논문 같은 데에서 이랬다가는 한마디로 출판 불가다. 그렇지만, 교양 서적인 만큼 굳이 참고했던 부분마다 주석 표기를 만들어서 독자의 흐름을 깰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녀의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출판한 책으로 괜히 책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11] 그 앞뒷권인 3권과 6권의 두께가 얇기 때문에, 꽂아두고 보면 더 두꺼워 보인다.[12] 심지어 이쪽은 더 나쁜 독재자였는데도![13] 더불어 <콘스탄티노플 함락>에는 메메드 시대에 역사서를 쓴 투르크인은 그 혼자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아시크파샤자데(Aşıkpaşazade, 1400~1484)나 케말파샤자데(Kemalpashazade, 1468~1536)는 어디다 팔아먹었을까. 다만 그리스 혐오에 가까운 시오노의 '관점'을 생각하면 투르순 베이의 기록을 따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최후의 순간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다가 끔살당했다고 기록했을 법도 한데, 왜 장렬히 전사했다고 해주셨는지 의문.[14] 국내 인터넷의 어느 정도 이유는 있는 전반적인 반개신교적 풍토가 엉뚱하게 이 방향으로 튀어서, 시오노 나나미에게 반일 감정을 품으면서도 반기독교적 서술은 맘에 들어하는 기이한 일반 독자들이 많은데 이는 반드시 고쳐져야 할 비이성적 분위기다.[15]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고, 소재로 쓸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주 내용과 별개로 뜬금없이 등장한다는 것이 문제. 물론 전쟁 3부작의 주제가 '전쟁터에서 피어나는 낭만적(...)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면야 할 말 없다.[16] 다만 종교에 대해서는 '국교인 이슬람이 최고, 나머지는 이슬람보다 한 단계 아래에서 평등' 이었지만 이건 동시대 관점에서는 기독교, 이슬람을 불문하고 상당히 진보적인 정책이다. 당장 서유럽 같은 경우는 이교가 문제가 아니라 같은 기독교 내의 이단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것을 떠올려 보자.[17] 가령 서기 73년에 벌어진 마사다 공방전에 대해 서술할 때 수비군은 천 명도 안 되었는데, 공격 측인 로마군은 만여 명이었다고 소개하며 이와 같이 주장했다.[18]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하권 초반부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대해 언급하며 이와 같이 서술했다. 황제 메메드 2세가 믿을 만한 군대라곤 예니체리 부대 뿐이었으며 거의 매년 군사를 보내어 정복에 몰두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오스만이 팽창에 열심이었던 것은 창건자 오스만 1세 이래로 '이교도를 공격하여 이슬람의 땅을 넓힌다'는 사상이 일종의 국시 비슷한 것이었던 데다, 지방관의 인사고과를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 바로 군공이었기 때문. 그리고 메메드 2세 본인으로 한정하면 그의 평생 꿈이 로마 제국의 재건이었는데,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면 당연히 로마 시를 함락해야 하고. 그러자면 당연히 군사 활동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실제로 말년에는 이탈리아 본토를 해로로 침공하여 오트란토라는 항구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다만 바로 이듬해에 메메드가 죽으면서 로마 진격은 백지화).[19] 오늘날 지명도야 물론 다른 문제지만, 메메드 2세 시대부터 쉴레이만 1세 시대까지 오스만 제국에서 시파히가 무시당했다는 건 단순히 군부대 하나 잘려나간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시오노가 찬양하지 못해 안달하는 로마 제국으로 비유하면,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를 두 번에 걸쳐 원정하고 파르티아까지 침공한 것은 1만여 명의 친위대 외에 믿을 수 있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랑 별반 다르지 않은 소리다. 군단병: 이보시오! 이보시오, 작가 양반...![20] 알바니아어로는 슈코더르.[21] 당시 로마 제국과 현대 한국의 인구가 비슷해서 예시로 들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 둘은 인구를 제하고는 비슷한 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다르므로 비교라는 걸 해서는 안 된다.[22] 이때 이 군단병은 단숨에 칼리굴라의 목을 친 뒤, 곁에 있던 그의 아내도 살해하였고, 심지어 갓난 아기였던 칼리굴라의 딸마저 벽에 던져서 머리뼈를 박살내 죽여버렸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렇게 한단 말인가.[23] 네로 시대의 유명한 장군 코르불로의 딸[24] 학생들이 하도 이 여자의 책을 사료랍시고 참고해대는 바람에 혈압이 오를대로 오른 모 명문 사립대의 서양사 교수는 레포트 주제를 아예 "시오노의 책에 대한 비판"으로 내준 뒤, '가장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비판한 학생'에게 그 학기 최고학점을 주고 레포트를 수업시간에 낭독시킨 적이 있다(...)[25] 하지만 미국의 경우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민주주의를 잘 굴렸다. 사실 넓은 영토를 통치하는 수단이 꼭 제정이어야 되는 이유는 없다. 다만, 미국의 경우 철도를 통한 고속 교통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참고해 두자.[26]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제국 시절, 혈연에 의한 세습으로 물려받은 젊은 황제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칼리굴라네로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그렇게 죽었고, 뒤를 이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도미티아누스도 암살당하였다. 또한 5현제 이후 콤모두스도 암살당했고 뒤를 이은 세베루스 왕조 때의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도 모두 암살된다. 그 뒤 군인황제 시대에 혈연으로 세습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인 갈리에누스도 암살로 살해당한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때까지 양자가 아닌 혈연 계승을 한 황제는 재위한 지 2년 만에 죽어버린 도미티아누스의 형 티투스 정도를 제외하곤 전부 암살로 생애를 마치는데, 혈연 계승이 안정적이라는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이다.[27] 유명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도 노예 반란이다. 굳이 노예 반란까지 가지 않더라도 스파르타쿠스의 출신이 바로 검투사 투노예다. 즉, 시오노 나나미가 말하는 '가족같이 대하는 노예' 의 현실은 로마 시민들의 볼거리를 위해 목숨을 내던져야 하는 장난감에 불과했다.[28] 당장 티베리우스 전설이라는 기록만 봐도, 다른 역사가들은 아예 관심도 갖지 않거나 대충 이런 소문이 있다는 식으로 써놓은 것들을 수에토니우스가 그럴 듯하게 정리한 뒤 출판한 것.[29] Preface를 시오노가 쓰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일이다. 그녀는 아마추어 마키아벨리 연구가라고 할 수는 있어도, 마키아벨리 전공자라고 할 수는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완역 정사 삼국지의 서문을 김운회가 쓰는 격이다.[30] 여담으로 이런 종류의 '무리' 를 하는 사람을 반박해야 할 경우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카이사르가 재창조라는 걸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동시대인이 남긴 사료를 여럿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고 그런 것이 없을 경우에는 상대가 인용한 저자 외에 다른 저자들이 카이사르를 비판한 저서나 논문을 여럿 인용하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다. 자신이 새로운 사료를 발견하여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료나 논문을 인용할 필요가 별로 없지만(그마저도 사료가 제작된 시대적 배경을 설명할 때 인용해야 하고, 문서인 경우 저자에 대한 내용 등을 언급할 때도 인용해야 한다), 이미 발견되어 연구되고 있는 사료들을 가지고 주장을 할 때는 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제아무리 저명한 역사가라고는 해도 한 사람의 저술만을 근거로 특정인이나 사건을 평가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아우구스투스라거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서기 117년에 즉위했다는 등의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고서는 '나 이 부분 지적받고 싶어요' 라고 쓰는 거나 다름없다.[31] 따지고 보면 사실 전혀 불가사의 할 것도 없다. 시오노 나나미 같은 입 좀 터는 아마추어들이 가장 명백하게 아마추어적 한계를 보여주는 분야가 단순히 전반적인 인문학적 소양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내용도 다루어야 하는 경제사, 군사사나 비물리적인 반면에서는 현대 사회주의 사상사, 종교사 같은 해당 집단만의 전문용어가 남발하는 분야들이다. 밀덕들 보기에는 아무리 가벼운 내용이라도 어쨌든 상비군과 보조병의 구분, 양동 전술, 망치와 모루 같은 건 전쟁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알 법한 기술적인 내용인데, 어떤 면에서 아무리 봐도 자기만의 심도 있는 1차 사료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백한 시오노 할망구가 상당히 얆은 수준에서도 기술적인 내용에서 틀려 먹는건 전혀 신기할 게 없다.[32] 고대 로마 항목 참고.[33] 이때 암살자들은 콤모두스를 죽이지 않으면 다음 날 처형되는 신세였다. 로마인 이야기 참고.[34] 로마인 이야기 참고.[35] 사실 강자에 대한 굴복은 21세기 현재에도 존재한다. 그저 세계대전 이후로 정복전쟁 자체가 사실상 금지되고, 국제 정세가 약소국 병합이나 식민지 확보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변하면서 예전처럼 대놓고 두들겨패지만 않을 뿐, 여전히 강대국들은 주변 약소국에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경제적, 정치적 압력을 가하며, 약소국들은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외교정책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에 과거 제국주의 열강 출신 국가들이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36] 쉽게 말하자면, 역사를 다루고, 나름 전문가랍시고 자칭하는 사람의 입에서 '역사 왜곡은 은밀한 즐거움' 이라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진짜 전문가들인 역사학자들이 역사 왜곡을 최대한 막기 위해 주변국들의 사료들까지 연구하면서 몇 번이고 교차검증을 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야말로 아마추어 출신이라는 기만의 극치이자 역사를 다루는 사람으로써의 자질까지도 의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37] 사실 현대까지 아직 남겨져 오는 문헌만으로 고대사를 연구한다는 건 2010년대 현대 들어 한계에 부딪쳤다. 이미 대부분의 문헌사료들은 기존의 역사학자들에 의해서 분석이 끝난 데다가, 교차검증을 위해서는 사료의 모순을 증명할 수 있는 물적 증거 역시 필요하다. 당장 우리나라도 고조선의 강역을 연구할 때는 단순히 '한서' 와 같은 사료에만 의존하지 않고,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덧띠새김무늬토기와 같은 유물도 같이 연구한다. 새로운 발견을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고고학에도 발을 들여야 한다.[38] 이것도 사실 로마사 기준으론 양반이다. 애초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같이 날씨도 좋고 풍광도 좋아 역사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휴가차 방문할 법한 나라에서 빠방한 정부나 기관 지원 받아 파해쳐낼 유물은 이미 백년 넘게 연구할 만큼 연구가 되서, 즉 고인물 주제가 되버려서 저런 희소성, 참신함이 많이 떨어지고, 진짜 로마사로 뭔가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려면 시리아, 북아프리카, 터키 내륙 지방, 이스라엘 같은 일반적인 학자들이 다녀가기 힘든 중동의 분쟁 지역에서 총폭탄 피하면서 고고학적 발굴해야 한다.[39] 유사한 사례가 바로 일본 극우 미디어물에 대한 비판이다. 오덕들 중에는 '어차피 허구라는 걸 뻔히 아는데 극우 미디어물이라도 재밌으면 그뿐이다.' 라는 논리로 이를 옹호하곤 한다. 그러나, 아무리 허구임을 명백하게 밝히더라도 실존했던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그대로 소재로 삼은 이상 잘못된 사상을 옹호하거나, 필요에 따라 한쪽의 평가를 일부러 숨기거나 왜곡해서 일방적으로 결론지어버리는 짓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40] 대놓고 타키투스의 저술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다른 의견을 내는 방식으로 집필 했다고 한다.[41] 왜냐하면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사상은 필연적으로 독재로 수렴하게 되고, 독재는 특정인 1명에 의해서 정치가 이루어지는 만큼 그 1명의 영웅적인 카리스마나 능력에 의존하게 되기 때문이다.[42] 당장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연좌제를 금지한다.[43] 무엇보다 한국이 계속해서 일본에 과거사 책임을 묻고, 이게 세계에서 먹히는 이유는 일본 정부의 지속적인 망언, 일본의 역사교육 왜곡 때문이다.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은 일이지만, 만일 일본이 '우리가 옛날에 만행을 저지른 건 맞지만 그 땐 어쩔 수 없었다.' 식으로만 나왔어도 이정도로 전 세계적인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국주의의 만행을 저지른 건 일본뿐만이 아닌 열강들 모두였으니까. 그러나 일본은 이 차원을 넘어서 아예 '근대화의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느니하는 망언을 국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 하고, 뻔히 증거자료가 존재함에도 그런 적 없다고 역사를 왜곡하니 욕을 먹는 것이다. 당장 한국인들에게 일본에 대해서 물어보면 정상적인 대다수는 '일본 정부나 일본의 역사왜곡이 싫은 거지 일본인이라는 사람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라고 한다.[44] 로마인 이야기 자체도 제국주의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계속 받아 왔으며, 특히 로마인이 "진출"하면서 저지른 여러 잔혹행위들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이런 "진출"(실제로는 침략)에서 "문명화"된 로마인이 저지른 주민학살이나 인질포획, 노예화와 같은 잔인함은 야만족이랑 별반 다를바 없었으며, 켈트족이나 게르만족, 그 밖의 여러 "야만족"들이 괜히 로마인의 지배를 거부하고 저항한게 아니다. 그런데 시오노의 저서에는 이런 진출은 야만족들을 개명시키기 위한 것쯤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옛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대규모 만행을 저지른 것을 대동아를 개명하기 위함이었다고 내세우는 핑계와 다를 바가 없다.[45] 기고문 제목은 "慰安婦大誤報 日本の危機を回避するための提言-朝日新聞の“告白”を越えて"(위안부대 오보 일본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제언-아사히신문의 "고백"을 넘어서)이며, 문예춘추 홈페이지에서도 본문 확인은 할 수 없다.[46] 이 종군(從軍)이라는 표현은 "종군 기자"처럼 "군(軍)을 따라다녔다"는 뜻으로, 위안부 피해 여성분들이 구(舊)일본군을 자의로 따라다녔다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으므로 사용을 하지 말아야한다. '종군 위안부'라는 단어는 위안부 문제와 명칭이 공론화 되면서 등장한 단어 중 하나이며 현재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쓰이는 경우가 있지만, 다시 강조하듯이 사용하지 말아야한다.[47] 심지어는 피해여성이 매독에 걸리자, 음부에다가 강제로 수은 증기를 쐬게 해서 해당 여성을 불임으로 만들기도 했다.[관련자료] 일본군 출신 일본인 노인의 솔직한 증언 한국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49] 일본에서는 종업원의 사기 진작을 위한 사원 여행을 '위안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50] 만일 정말로 이랬다가는 그야말로 희대의 자폭이 된다. '피고 측이 유능한 변호인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피고인이 유죄가 확실하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당장 미국이 '치치시마' 나 '바탄' 을 입에 담기만 해도 일본은 깨갱할 수 밖에 없다.[51] 당연히 일말의 가치도 없는 개소리인게 이탈리아는 지정학적으로나 민족(언어)로나 고대 로마와 접점이 많은 명실상부한 후예다.[52] 이 때문에 서로마의 교황은 동로마의 황제로부터 독립된 종교적 권위와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서 카롤루스 대제를 서로마 황제에 임명하는 등의 술수를 쓴 것이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과 길게 치고받은 사산 조 페르시아 역시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라고 불렀다.[53]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둔 2001년에 이루어진 인터뷰. 관심있는 위키러는 읽어보기를. #[54] 무조건적인 칭찬은 아니고, "성격이 다혈질이라 총사령관감이 아닌 백인대장감"이라는 뉘앙스의 발언이 뒤에 붙었다.[55] 비록 델 피에로가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활약하지는 못했어도, 3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진출과 유벤투스칼치오폴리 사건과 세리에 B로의 강등 이후에도 이를 딛고 일어나 다시 유벤투스에 리그 우승을 안겨준, 유벤투스의 레전드로 남은 선수이다.[56] 나나미가 델 피에로의 플레이스타일을 보고 소심하다는 것은 "몸싸움을 걸어서 이길 생각은 안하고 도망다니는" 플레이를 보고 이야기를 한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 세리에에 있던 센터백들은 야프 스탐, 알레산드로 네스타, 지오르지오 키엘리니, 마르셀 드사이, 파울로 말디니, 파비오 칸나바로 등 역대 최고의 수비진을 가진 리그였다. 이런 리그에서 살아남은것 만으로도 대단하다고 평할 수 있다.[57] textual attitude. 말하자면 해당 주제에 대해 본인이 심도 있는 연구와 끈기를 통해 1차적인 정보로 그 자체의 진리를 탐구하는게 아니라, 피상적인 편견과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태도.[58] 기본적으로는 우파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59] 굳이 비유하자면 촉빠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쪽의 조조빠라고 할 수 있다. 촉한이 정통성을 강조하는 로마의 공화주의자(원로원)에 가깝고, 신흥권력의 입장인 조조가 카이사르와 유사점이 많다. 실제로 이문열 삼국지 역시 원작에 비해 조조에 심각할 정도로 우호적이라는 평이다.[60] 국내판은 '~살인사건'이라는 부제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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