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19 18:54:07

사대주의

[1]

1. 개요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의견
2.1.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옹호론2.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론
3. 결론4. 사례
4.1. 사대주의의 사례4.2. 반사대주의의 사례
5. 여담6. 같이보기

1. 개요

대국(큰 대, 大)을 섬기(섬길 사, 事)는 사상을 의미 한다. 사대주의와 모화주의를 합쳐 사대모화(事大慕華)라고도 한다.

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의견

최영: 고려 사람이 왜 남의 나라를 지성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오이까?!
정몽주: 그것은 약육강식의 천하에서 소국이 살아남는, 생존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정도전 24화에서 나온 최영과 정몽주의 대화 중 일부이면서 사대주의에 대한 찬반론자의 의견을 간단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2.1.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옹호론

사실 이 용어는 서구의 식민주의 프레임에 동아시아 외교관계를 꿰어 맞추면서 "한 국가가 자율성을 포기하고 강한 국가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사상 또는 외교방침"을 개념화하기 위하여 창안되었다.

본래 국제 관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건 청동기 시대에 고대 국가가 등장한 이래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동서양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적용된다. 중국진시황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인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거대권력이었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뒤쳐지게 된 근대를 제외하면 기나긴 역사 동안 중국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반도 국가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이득이었지, 쓸데없이 대립관계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한반도 국가가 역사상 중국 대륙의 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거나 비등비등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때는 중국이 분열기를 맞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없었다. 중국 대륙의 국가가 한반도를 정복할 만한 군사력을 가진 경우는 한나라당나라, 원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2][3], 중국 대륙 국가와의 교류는 전통적으로 사대의 형식으로만 가능했으며, 형식적으로 신하를 자처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동등한 관계에서의 외교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대"는 외교의 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한족과 맞짱떴던 무수한 이민족 국가들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정복했다가도 대부분 한족에 동화되거나 밀려났지만, 한반도 국가들은 맞짱떠서 중국을 정복한 역사는 없고, "사대"의 형식으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아울러 문화,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저 큰 형님이 실제로 학식도 높고, 귀한 물건도 많고, 저렇게 적당히 비위 맞춰주면 그럭저럭 너그럽게 베풀기도 하는 편이라 보면 된다. 중국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장건과 반초가 개척한 비단길로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서양권과 교역을 했으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수도 장안이 국제도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정도로 다양한 문명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국가였다. 게다가 중국은 명목상 사대의 예로 조공을 요구하기는 했으나, 천자의 체면이라는 명목하에 조공품 이상의 물건을 하사했고, 이는 조선에 있어서는 이득보는 장사였다. 오죽하면, 조선 때 사신이 명나라를 방문하자 '조선의 사신은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 며 사절단 교류를 좀 줄이자고 부탁하던 경우도 있었다. 물론 덕을 베푼다는 유교 사상의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던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조공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았다.[4] 사정이 이렇다보니 현실적인 입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의 질서에서 마치 현재의 미국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의미도 없이 중국과 적대관계를 계속 해왔다면, 고구려처럼 문화가 사그라들어[5] 결국은 만주처럼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대는 형식적이고 명분적인 치레였을 뿐이다.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은 나당전쟁의 예로 알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일본처럼 고립된 섬나라라면 상관없겠지만[6], 한반도의 경우 몽골고원 등지에서 꼬리를 물고 발흥해온 세계 최강의 전투 민족[7] 들과 직접적인 전쟁을 반드시 피해야 했다. 이들 북방 유목민족의 힘은 중국 정도 되니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그나마도 몽골이나 만주(여진)족에게는 본토가 털렸었다. 이런 독보적인 강대국 중국이나, 혹은 이런 강대국 중국조차도 떡실신시키던 몽골족이나 만주족과같은 전투민족들이 한반도로 침공해온다는 것은 한민족국가의 멸망이나 다름없어 사대는 필수적인 전략이었다. 실제로도 세계사를 보면 어떤 지역의 강대국을 박살낸 유목민족은 주변 지역들도 죄다 초토화를 시켜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을 깨부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한 청나라나 원나라만 봐도 리즈 시절 때에 군사적으로 약하지는 않았다. 또한 전력으로 보면 기병은 당시 전차, 장갑차, 험비나 마찬가지라 그런 걸 수만 대 혹은 수십만 대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유목민족들과 그런 유목민족들을 매수하여 이간질, 분열시키거나[8] 고전시킬 수 있는 농경 대제국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역사에서 로마 제국의 사례만 봐도 로마 같은 우수한 문물, 거대한 규모를 가진 농경 제국조차 정상적으로 어느 정도 돌아가는 농경 제국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9] 세계사적으로도 주변의 제국들에게 형식상 사대를 하는 민족들이나 나라는 많았다.

오히려 한반도로서는 차라리 어느 정도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농경 문화권인 중국과 연대하는 것이 여진이나 몽골 같은 유목 민족들의 약탈과 전쟁에 대처하는 데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세 후반 이후로 갑툭튀하여 동아시아 전 해안을 휩쓸었던 왜구에 대한 대처도 그렇고. 현실적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침략에서 송나라가 고려를 도와준 일은 없었긴 하지만[10], 명나라 같은 경우 이만주 항목에서 보듯 여진족을 공동으로 대처한 경우도 있었고 조선이 왜구를 토벌했다는 명목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명나라에서 이를 치하해 하사한 경우도 있었다.[11]

바다 위에서 대륙과 떨어졌다는 지리 조건 덕택에 강대국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 일본은 이러한 역사를 비틀어 만든 사대주의라는 개념으로 한국사를 폄하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학자들은 주로 중국과 조선 사이의 불균형한 역학관계와 조선 중후기 조선이 보였던 찌질한 모습들을 들추어 이를 한국사 전반의 특징으로 연관시켰고, 이를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조선통치의 지침서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근대 한국민속학에 상당한 학술 성과를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 대표 식민사학자인 다카하시 도루는 3.1 운동마저도 중국 사대주의에서 미국 사대주의로 전환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2] 그들이 조선멸시의 전제로 삼은 일본의 자주 독립이 실제로는 지정학 여건의 우위에 말미암은 것임을 고려하지 않았다.[13]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도 구한말에 더 이상 중국이 최고가 아님을 깨닫고, 내셔널리즘의 성장과 함께 일제의 간섭과 식민통치에 맞서 자주성을 강조하다보니 자주성과 맞지 않던 과거 한반도 국가의 사대는 외세 의존으로 폄하하고 비난했다.

사대주의에서 가치경도적인 수사를 제외하고 추려 보면, 패권국가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대주의는 세계 각국의 국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고, 초강대국이 세계 질서를 다스리는 국제 현실에서 모든 국가가 생존 및 발전을 위해서라면 따라야 할 전략인 셈이다.

또한 조선인들이 명나라를 따르고 찬양한 것은 그저 그 나라를 찬양한 게 아니라, 당대 중국의 문명이 이미 조선을 앞서갔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진 문물 등을 다시 조선이 중국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조선에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 때 만든 칠정산도 중국의 수시력과 중국을 통해 들어온 아랍의 회회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며, 훈민정음 또한 중국의 언어학 서적과 음운 관련 서적을 연구하여 창제된 것이다.

내셔널리즘이 과거에 비해 옅어진 한국사학계에서도 사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받아들여, 10여 년 전까지도 국내 학계의 대응은 "우리도 자주 OO가 있었다." 라고 반응했던 것에서 이제는 오히려 "사대주의 그게 무슨 문제인가? 당연한 국가전략 아닌가?"로 생각하는 추세다.

2.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론

사대주의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데 기여했다.

명청교체기 이후에는 청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이 곧 명나라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정신승리법적인 소중화사상이 대두되었다. 사대주의는 큰 나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명나라가 오랑캐(청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조선이 섬겨야 할 '큰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소중화사상의 정서는 명청교체 이후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14] 조선의 소중화라는 개념은 왕조는 멸망했지만 중화 문화가 여전히 중국 땅에 존재하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보다 대국이니 중화를 여전히 섬기는 우리가 바로 사실상의 작은 중화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소중화주의는 자국우월주의적 면모를 보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소인배 나라, 오랑캐 나라, 정신적으로 작은 나라인 청이 정신적으로 위대한 대인배의 나라 소중화 조선에 사대하는 것이 유교원리에 따르면 옳은 것이지만 청나라 오랑캐들은 무식하면서 힘만 센 야만인들이므로 일단 겉으로만 청을 섬기는 척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당시의 사상으로 보면, 청나라는 겉보기에 크기만 클 뿐 결코 대국이 아니었고 수많은 오랑캐 잡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연히 현실적으로는 조선의 20배가 넘는 인구를 갖고 있고 압도적으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더라도,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관념 상에서는 '작은 나라'인 청이 사대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청 건국 이후에도 조선은 '사대주의의 논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사대를 하는 나라에서 받는 나라로 규정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 사대라는 것을 받아본 적은 없고 오히려 거짓으로라도 오랑캐 나라에 사대하는 우스운 지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경우 역사적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화하면서 청나라와의 교역, 교류를 방해하였다.

조선의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질된 것은 조선의 멸망을 가속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송나라나 원나라를 통해 어느 정도는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던 이전에 비해 후기에 들어서는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고, 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사상(북학파)은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뒤떨어진 조선을 발전시킬 방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은 죽은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 뿐이었고, 이것은 1937년(연도의 착오가 아니다!) 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명나라 황제는 만력제로, 사대주의에 입각해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게 유린당하던 조선을 위해 명나라의 손해를 감수하고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15] 그러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까지 포함시킨 만동묘나 대보단은 결코 쉴드칠 수 없다. 이것은 조선이 저 혼자 잘났다는 소중화주의로도 해석할 수 없고 단순한 중화에 대한 정신적 종속의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사대주의를 가치중립적으로 재정의한 개념으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해서 특별히 단어를 새로 만들 필요도 없는 개념이다. 문제는 사상적 차원을 끌어다 오히려 자국의 입장까지 훼손해가면서 중국을 위해 굳이 사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때 발생한다. 친미외교를 넘어서 트루먼, 맥아더한테 제사지내는 꼴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사대'라는 개념은 일단 유교의 기본 관념 중 하나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식은 부모를 섬기고, 제자는 스승을 섬기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시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충과 효라는 것도 작은 것(신하, 자식)이 큰 것(왕, 부모)을 섬긴다는 사대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사대를 하지 않는 것'은 불효, 불충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상적 이유를 포함하게 되면 현실주의적 외교 논리를 벗어나 후기 조선의 사대주의처럼 욕먹어도 할말없는 꼴로 된다는게 함정.

3. 결론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했던 실질적 이유는 위 항목에서 논하였듯이 현실주의적 외교 논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위와 같은 사상적 이유 역시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사대주의가 극도로 지나칠 경우에는 사상적, 문화적 측면에서 자기 고유의 것은 아예 부정하고 남의 것은 무조건 최고라고 하는 병폐가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사대주의는 실리를 추구하는 데에 활용되어야 하지, 맹목적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4. 사례

4.1. 사대주의의 사례

4.1.1. 고구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영양왕수문제의 침공이 두려워 선제침공한것을 사죄하며 자신을 '요동 똥의 땅에 있는 신하 아무개'[16]라고 용서를 빌며 사죄 하자 수문제가 분노를 풀고 작위를 회복하여 주었으며 영류왕당태종의 침공이 두려워 태자를 직접 당으로 보내 지도를 헌상하였다. 그러자 당태종은 영류왕을 신하로 삼으며 안심시켰다.[17]

4.1.2. 신라

  • 통일 이전 신라는 관복의 양식을 바꾸어 당과 같이 하였으며, 그간 행해왔던 신라 고유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는 신라가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4.1.3. 고려

  • 광종은 연호를 광덕(光德), 준풍(峻豊)으로 삼고 잠시 칭제건원 하였지만 송나라거란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결국 뜻을 거둔 채 칭제건원을 취소하였고 송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하고 송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하였다.[18]
  • 성종은 994년 6월,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보냈다. 단순히 외교적 유불리 때문뿐만 아니라 성종은 중빠로서 유교의 사상을 따르고 중국의 제도를 들여오길 좋아했다.
  • 목종이 997년에 이부시랑 주인소를 송에 파견하여 고려가 중화를 사모하고 있으나[19] 오랑캐 거란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국서를 보냈다.
  • 목종서경의 이름을 호경(鎬京)으로 바꾸었다. 호경(鎬京)은 주나라의 수도였다. 이후에 호경은 다시 서경으로 이름이 돌아오나 광종이 바꿨던 이름인 서도(西都)와 같이 서경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인종 시기의 대화궁 치어에서도 서경이 '호경(鎬京)'으로 나오고 의종이 인종에게 만들어 올린 옥책에도 묘청의 난이 '호경지란(鎬京之亂)'이라 나온다.
  • 1125년 금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접수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表)가 아니고 또 고려 왕이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1126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협의했다. 대다수는 여진족이 오랑캐이므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실권자 이자겸과 여진 정벌에 참여했던 척준경 등이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20]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 해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 무신정권 기간 중 임연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준을 죽이자 사대주의적이었던 원종은 전임 집권자인 김준 때부터 무신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안경공 창에게 선양을 하였다. 그리고 몽골제국에는 원종이 병 때문에 양위했다 하였다. 하지만 몽골에 있던 세자가 쿠빌라이 칸에게 알리자 몽골에 사대적이었던 원종을 지지하던 몽골이 반발하였고 세자가 몽골군까지 끌고 귀국하자 임연은 결국 힘에 굴복하여 다시 원종을 왕위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복위된 원종대에 개경으로 환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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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 조선

  • 이성계가 고려 왕위를 찬탈하고 나라를 세우자 명나라는 이성계를 권지고려국사라며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개국세력은 명나라 황제에게 왕으로 임명되기 위해 노력하며 기자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로 조선이란 국명을 제시하여 윤허받고 조선을 세우며 이후 명나라에 사대한다.
  • 태종이 제후국의 제도로 자체적인 제후를 책봉하는것은 예법상 맞지 않다고 한 이후 조선은 '황제'에게 책봉 받은 작위인 조선왕 왕작(王爵)하나만을 제외하고 중국 군주가 아닌 한국 군주가 자체적으로 임명하는 일체의 공후백자남 제후작위를 없애 버린다. 그리고 오로지 제후가 가신에게 봉작하는 작위군호만 썻다.[21]
  • 태종은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어서는 안되며, 마땅히 왕보다 높여 지성(至誠)으로 천자의 사신(天使)을 섬겨야 한다."는 유훈을 내리며 '은혜를 맞이 한다'는 의미의 영은문(迎恩門)을 세웠다. 또한 바로 옆에는 '중화를 흠모한다'는 의미의 사신 영빈관이었던 모화관(慕華館)도 있었다. 이 둘은 중국에서 황제의 사신이 올 때 거처가는 곳이었으며 황제의 신하였던 제후국 조선의 왕은 이곳까지 직접 마중을 나가서 사신을 맞이 했다.
  • 임진왜란정유재란이라는 망국의 위기를 명나라만력제가 고려천자(高麗天子) 또는 조선황제(朝鮮皇帝)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22만 대군과 쌀 100만섬이라는 국고금에다 내탕금까지 소모해서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조선을 기사회생 시키며 살려주자 조선에는 재조지은이라는 의리의 관념이 피어난다. 이후 청나라가 강해져서 명나라 노선이 외교적으로 불리해져도 맹목적으로 오직 명나라만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였고 명이 청에 망하자 은혜를 갚자는 북벌론도 일어난다. 민간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사대하여 청국황제를 상국으로 모시지만 진정한 천자는 오직 명나라 황제라며 마지막 명나라 황제였던 숭정제의 연호를 사용하고[24] 비석에는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며 명나라에 있는 조선국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며 만력제를 추모하는 대보단만동묘[25]를 세우며 신앙에 가까운 명나라 숭배의식이 생겨난다.
  • 세계 최초의 아동용 교과서인 동몽선습에는 '중국인이 작은 중화라고 칭찬하니 이 어찌 기자가 남긴 교화가 아니겠는가? 아! 어린이들은 마땅히 이 것을 보고 감동하여 분발해야 한다.'[26]라는 대목이 있다.
  • 개화기에 서양 여러나라의 이양선들이 조선에 통상을 하자 청하면 조선은 항상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므로 자체적인 외교 결정권의 권한이 없어서 청나라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것이 외교상의 공식답변이었다.[27]
또한 청나라와 우리나라는 다같이 동양에 있으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로마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6일 양력 4번째 기사


우리나라의 강토한나라 당나라의 옛 땅에 붙어있고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은 다 송나라명나라의 옛 제도를 따르고 있으니, 그 계통을 잇고 그 칭호를 그대로 쓴들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가 다같이 로마의 계통을 이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독립과 자주는 이미 여러 나라가 공인하였으니 당당한 존호(尊號)에 거하는 것은 응당 실행해야 할 큰 법도인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9월 29일 양력 2번째 기사||
조선후기에는 북방의 반농반목의 기마민족인 청나라한족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점거하자 소중화사상적인 태도가 생겨났는데 고종때에는 유럽이 고대 로마에서 이어진것과 같이 조선은 그 정신적 문화의 계통이 중화문명에서 이어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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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반사대주의의 사례

4.2.1. 고구려

  • 고구려는 중국 천자의 세계관과 다른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태왕의 칭호를 만들고 주변 민족 위에 군림하려 들었다.
  •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기간 동안 비록 일시적으로는 중국에 수구리거나 형식적으로 사대를 하여 칭신하기는 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 끝내 굽히지 않고 저항하였다.

4.2.2. 고려

  • 고려는 중국에게 칭신하였지만 내부적인 상황은 비록 군주가 황위에 오르지는 않았을지라도 거의 모든 제도와 법식은 황제식으로 하여 실질적으로는 천자국으로 군림하며 외왕내제 하는 체제였다.
  • 성종의 친중화 정책에 이지백송나라의 제도를 타방이법(他方異法)[28]이라고 부르며 성조(聖祖)의 전통이 없어졌다며 비판했다. 또한 고려사 서희 열전에 화풍(華風)을 좋아하는 성종을 고려 사람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 예종 시기에는 요나라가 쇠멸하고 금나라가 흥기 하였는데 칭제건원금태조가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국왕(高麗國王)에게 글을 보낸다."며 고려왕이 금황제의 아우로 입조하라 하였으나 무시하였으며 2년 후에는 사신을 보내 "너(彼)의 근원은 내 땅(吾土)에서 시작되었다."며 처음부터 사대하지는 않았다.
  • 인종 시기 묘청과 서경파[29]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멈추고 인종의 칭제건원할것을 주장하며 서경으로 천도 하고 북벌을 하자고 주장하였으나 김부식을 필두로한 개경파 내지는 동경파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묘청과 서경파는 대위국을 세우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신채호는 이 사건이 한국사에서 '일천년래 제일의 대사건'이라 평가하였다.
  • 김부식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제후국이면서 세가가 아닌 제국의 역사인 본기에 역사를 저술하였다.[30] 또한 최치원제왕연대력에서 차차웅이나 마립간 같은 우리 고유의 용어를 왕으로 바꿨다고 비판하였다.
  • 고려의 무신정권은 당대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 제국에도 굽히지 않고 여몽전쟁 기간 동안 수도를 강화도로 이전하면서 까지 저항하였으며 고려 왕실이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하고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고 원의 보호국이 되자 무신정권의 잔당이라 할 수 있는 삼별초는 진도, 탐라로 본거지를 옮겨가며 끝내 항전하다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4.2.3. 조선

  • 조선은 국호를 조선이라 지으며 기자를 숭배하기도 하였지만 단군 역시도 숭앙하였다. 고려시대까지는 단군이 기자에 비해 숭배의식이 낮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 둘을 동일하게 모시게 되었다.[31]

5. 여담

  • 현재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는 (구체적인 방도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지만) 필요에 따라 외세에 적절히 양보하거나 그들을 본받으려고 하며 그 태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도 21세기 들어 중국의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지는 와중에도 미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외국 군대인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이를 전략적인 지렛대로 활용하기도 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기 위해 국내의 법과 제도를 고치고 선진국의 사례를 본받으려고 노력한다. 오늘날의 이러한 모습에 기초해 근대 이전 한반도 국가의 '사대주의'를 근대 이전의 '세계화'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32]
  • 영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어 단어 중 하나다. 이전에는 'flunkyism' 및 'toadyism'이라고 했으나 이는 한국에서 말하는 사대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서구의 저 개념들은 강한 자에게 아첨하듯 빌붙어서 호가호위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즉, 결과적으로 자신을 드높이기 위함이다. 반면에 한국의 사대주의는 스스로를 작은 나라로 낮춰서 큰 나라를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을 뜻해서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 때문에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sadaejuui'라고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사대주의'를 발음 그대로 옮긴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서구보다는 동아시아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다.

6. 같이보기


[1] 여기서 는 '섬기다'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큰 나라를 섬긴다'.[2]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다가 자국 내부 문제와 겹쳐서 39년만에 망해버렸고, 송나라는 문치주의와 약한 군사력, 요나라금나라라는 강력한 이웃 국가들 때문에 내내 강대국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철령 이북의 땅을 주장하며 몽니를 부렸으나, 태종 이방원과 영락제 주체의 인연으로 양국의 관계가 원만해진 이후로는 한번도 조선을 침략하려 시도힌 적이 없다. 조선 중후반기의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명나라와 전쟁하는 동안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부족해진 식량과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서 급하게 자원확보가 필요해서 조선과 전쟁을 한 것이었다.[3] 이는 의외로 간단한 문제인데, 당시 중국에서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바로 서쪽과 남쪽으로의 확장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고구려를 멸망시킨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당의 위치를 넘볼 수 있었던 유일한 나라였기 때문이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고려시대가 되면서 한반도가 중국 대륙의 패권을 넘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졌다. 거기다가, 한반도를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것은 보급로 문제나, 당시 항해 기술 등의 문제로 중국에서도 상당히 국력을 소모하는 일인데다가, 한반도를 직접적으로 공략하는 이득에 비해, 한반도 공략한다고 군사냈다가 토번이나 몽골 등의 이민족들에게 본토를 위협받는 리스크가 훨씬 컸다. 그러다보니 주권과 독립국으로써의 지위를 인정해주고 적당히 말 잘 들으면 굳이 한반도의 정세에 터치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4]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0473&content_id=cp030104730001 본래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정말로 조공으로 삥뭔 좆도 아닌 걸 주고 영토, 성 같은 걸 내놓으라고 협박질하고 다녔다.을 뜯고 있었고 한나라 이후에 등장한 왕조부터 유교 사상이 점점 성장함에 따라 조공 무역이 점차 이익이 되어갔다.[5] 고구려도 중국에 대하는 자세 역시 기본적으로 사대였다. 장수왕같이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도 중국에게 신하를 자처하며 조공을 바쳤다. 태왕이라 부르고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동시에 외왕내제를 하는 형식으로. 물론 기본적인 의도는 조선의 그것과 비슷했다. 명분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대신 실리를 챙기는 그것. 다만 중국에서 다시 한족 왕조인 통일 왕조가 들어서자 이전의 사대는 무시하고 한사군의 옛 땅임을 명분으로 고구려를 정복했을 뿐이다.[6] 그러나 그 일본조차도 스스로 중화질서에 편입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했다. 나라 시대 때 견수사, 견당사를 파견하며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던 점과, 감합무역 등의 방식으로 중국과 교류를 했던 점 등을 보면 알 수 있다.[7] 흉노, 선비족, 거란, 여진족, 몽골 등은 모두 당대 최강의 무력집단들이었다.[8] 물론 돈지랄이기는 하지만 재력과 외교술을 동원하는 것도 엄연한 국가의 능력이다.[9] 유목 제국이든 농경 제국이든 리즈 시절 때를 보면 굳이 그런 막강한 상대와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그런 넓은 영토를 아무 이유 없이 갖게 된 것도 아니라 화약 무기가 퍼지기 전까지는 "훨씬 우수한 문물로 대제국을 지배하는 이웃 민족을 쓰러뜨린다." 이런 것들은 이웃이 자멸 혹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적응 실패 등에 의한 것들로 인하여 무너지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농경민족의 경우에는 유목민족보다 군사적 효율(유목민족은 남자는 곧 전사인 경우가 많아 따로 직업적 전문 군인 양성 비용이 들지도 않으며 그 전문 군인 하나하나가 대부분 기병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심지어 내전이나 대패로 인하여 인구가 많이 줄어도 전력만큼은 빠르게 잘 모은다.)이 좋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 정착해서 별다른 전쟁 없이 풍족한 자원을 향유할 수 있던 농경민족과 달리, 유목민족은 유목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지역을 이동하며 다녀야 하는데다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끊임없이 약탈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10] 이 당시 송나라도 거란과 몽골 눈치를 보느라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다.[11] 명사 조선전 정통 9년, 10년 및 가정 35년 등 항목 참조.[12] 3.1 운동이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 발언에 영향받은 것을 이런 식으로 비틀어 놓았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3.1 운동의 내부 요인(일제가 저지른 조선에 대한 억압 통치 등)을 무시하고 외부 요인을 강조하는 시각이 상당하다.[13] 섬나라라는 지리 조건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데 상당한 이득이다. 국경을 접한 국가보다는 바다를 끼고 한 발자국 떨어진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섬나라라는 지리 이점 등의 요인들이 일본을 중화중심의 사대질서에서 한 발자국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14]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15] 만력제는 중국에서 최악의 황제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의 경제 사정이 넉넉한 편이기는 하지만, 명나라의 안보와 별로 관계가 없는 조선에게 불필요하게 막대한 군사비를 들여가면서 지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이익과 무관한 만력제의 개인적인 의지에 따라 수행한 전쟁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만력제의 별명이 고려천자, 또는 조선의 황제다.[16] (遼東糞土臣某: 요동분토신모)[17]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논했던 고구려가 왜 이러냐고 할 수 있지만, 독자 연호를 채택하며,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고구려는 당시 광개토대왕부터 문자명왕에 이르기까지의 국력 최전성기였고,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의 분열기였던 특수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영양왕 시기의 고구려는 전성기에서 내려와 있었던 반면, 수문제당태종수나라당나라는 중국 대륙을 재통일 하였고, 한창 국력이 상승하던 시기였다.[18] 다만 대외적으로만 내세우지 않았을 뿐 내부 신민들에게는 그냥 계속 황제로 군림했다. 전형적인 외왕내제를 칭한 것.[19] 모화사상(慕華思想)의 모화의 의미에 딱 들어맞는다.[20] 이성계제2차 요동정벌 4불가론중 하나와 유사하다.[21]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의 오등작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표적 예로 봉화백 정도전, 청해백 이지란이 있다. 태종 이방원의 경우도 원래의 작위는 정안대군이 아닌 정안공이였다.[반론] 사실이 아니다.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에게 책봉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깽판을 넘어 사이코패스 짓거리를 하던 형제들과 의주를 넘어 명나라로 도망가자고나 하고 있는 선조 대신 조정과 군을 지휘하며 임진왜란애 반격하던 모습으로 당시 광해군은 이미 조선의 차기 세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심지어 명나라 역시 공식적인 책봉만 하지 않았을 뿐, 외교문서에서도 '조선의 세자 광해' 라며 공식적으로 세자 지위를 인정했다. 오로지 소북 중에서도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 만이 정비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밀었고, 탁소북을 제외한 대북, 소북, 남인들까지 모조리 광해군을 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의 폐모살제가 정통성을 위협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이 헛소리라는 것이 반박되었다.[재반론] 물론 반론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맞는 말이고 광해군이 다음 왕으로 유력했던것은 분명 사실이었으나 현임 왕인 선조가 광해군을 탐탁지 않아 하였고 의인왕후가 죽었을 때 신하들이 명나라에게 세자책봉을 다시 올리자고 건의 하였지만 선조는 신하들의 주청을 거부하는 정치적인 행위를 하였다. 선조는 그후 인목왕후와 새장가 들어 영창대군을 낳았다. 분명히 광해군은 많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신하들이 다시 만력제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받자고 주청하였고 그래서 명나라에 다시 올리지만 명나라는 또 다시 거부해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선조도 내심 갓난아기 영창대군에 마음을 두는 티를 내기 시작하였고 조정에서도 영창대군에게 줄서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탁소북 유영경 일파다. 사실이 이러한데 아주 조금이라도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았라고 한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분명 광해군은 매우 유력했고 결국 다음 왕이 됬을 가능성이 매우 컷던것은 사실이나 분명 상국인 명나라의 세자 책봉거부는 명나라의 속방 조선 정계에 파장이 되었음은 명명백백한 역사의 사실이다.[24] 보통 황제가 죽으면 연호사용이 거기서 끊나지만 숭정제는 이미 죽었는데도 진정한 천자라며 계속 숭정연호를 쓰니 이 연호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연호였다.[25]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유래한 말로 황하의 물이 만 번을 꺾여도 결국 동쪽인 조선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으로 자신이 숭정제의 친필을 얻어 바위에 새긴 충청도 괴산의 화양리에 만력제숭정제의 사당을 지으라고 하여 후학들에 의해 건립되었다.[26] 華人이 稱之曰小中華라하니 玆豈非箕子之遺化耶리오 嗟爾小子는 宜其觀感而興起哉인저[27] 근데 그래서 막상 서양각국이 청나라에게 조선과의 통상 허락을 요구하면 조선은 내지가 아닌 속방이라 청나라는 권한이 없고 조선이 결정할일이라고 답변했다. 이건 뭐 어쩌라고;;;;[28] 다른 나라의 이상한 법률[29] 대표적인 인물로 윤언이, 정지상이 있다.[30] 사대주의적인 조선에서는 이것을 비판하였고 고려사 저술도 세가로 한다.[31] 당시 조선에서는 국호 문제로 이성계의 고향인 화령과 조선 둘 중에 골라달라고 명에 부탁했는데, 물론 명나라에 국호 선택을 부탁할 땐 기자조선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라고 구라치긴 했다.[32] "한국 발전은 사대주의(事大主義), 즉 글로벌 스탠더드 따른 덕분", 오코노키 마사오,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