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3 11:22:24

사대주의

[1]

1. 개요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의견
2.1.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옹호론2.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론
3. 결론4. 여담5. 관련 항목

1. 개요

대국(큰 대, 大)을 섬기(섬길 사, 事)는 사상을 의미 한다.

영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한국어 단어 중 하나다. 이전에는 'flunkyism' 및 'toadyism'이라고 했으나 이는 한국에서 말하는 사대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서구의 저 개념들은 강한 자에게 아첨하듯 빌붙어서 호가호위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즉, 결과적으로 자신을 드높이기 위함이다. 반면에 한국의 사대주의는 스스로를 작은 나라로 낮춰서 큰 나라를 자발적으로 섬기는 것을 뜻해서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다르다. 이 때문에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sadaejuui'라고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사대주의'를 발음 그대로 옮긴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서구보다는 동아시아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다.

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의견

최영: 고려 사람이 왜 남의 나라를 지성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오이까?!
정몽주: 그것은 약육강식의 천하에서 소국이 살아남는, 생존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정도전 24화에서 나온 최영과 정몽주의 대화 중 일부이면서 사대주의에 대한 찬반론자의 의견을 간단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2.1.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옹호론

사실 이 용어는 서구의 식민주의 프레임에 동아시아 외교관계를 꿰어 맞추면서 "한 국가가 자율성을 포기하고 강한 국가에 복종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사상 또는 외교방침"을 개념화하기 위하여 창안되었다.

본래 국제 관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이건 청동기 시대에 고대 국가가 등장한 이래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동서양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적용된다. 중국진시황 이래로 유라시아 대륙 동쪽인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거대권력이었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뒤쳐지게 된 근대를 제외하면 기나긴 역사 동안 중국은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반도 국가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문화를 발전시키는 게 이득이었지, 쓸데없이 대립관계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한반도 국가가 역사상 중국 대륙의 국가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거나 비등비등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때는 중국이 분열기를 맞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없었다. 중국 대륙의 국가가 한반도를 정복할 만한 군사력을 가진 경우는 한나라와 당나라, 원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2], 중국 대륙 국가와의 교류는 전통적으로 사대의 형식으로만 가능했으며, 형식적으로 신하를 자처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동등한 관계에서의 외교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대"는 외교의 한 형태로 활용되었다. 한족과 맞짱떴던 무수한 이민족 국가들이 일시적으로 중국을 정복했다가도 대부분 한족에 동화되거나 밀려났지만, 한반도 국가들은 맞짱떠서 중국을 정복한 역사는 없고, "사대"의 형식으로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아울러 문화, 제도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당시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저 큰 형님이 실제로 학식도 높고, 귀한 물건도 많고, 저렇게 적당히 비위 맞춰주면 그럭저럭 너그럽게 베풀기도 하는 편이라 보면 된다. 중국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장건과 반초가 개척한 비단길로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서양권과 교역을 했으며,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수도 장안이 국제도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될 정도로 다양한 문명이 직접적으로 만나는 국가였다. 게다가 중국은 명목상 사대의 예로 조공을 요구하기는 했으나, 천자의 체면이라는 명목하에 조공품 이상의 물건을 하사했고, 이는 조선에 있어서는 이득보는 장사였다. 오죽하면, 조선 때 사신이 명나라를 방문하자 '조선의 사신은 너무 자주 오는 것 아니냐?' 며 사절단 교류를 좀 줄이자고 부탁하던 경우도 있었다. 물론 덕을 베푼다는 유교 사상의 영향력에서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던 나라들은 일반적으로 조공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이익을 보았다.[3] 사정이 이렇다보니 현실적인 입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

당시 중국은 동아시아의 질서에서 마치 현재의 미국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의미도 없이 중국과 적대관계를 계속 해왔다면, 고구려처럼 문화가 사그라들어[4] 결국은 만주처럼 중국의 일개 지방으로 전락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사대는 형식적이고 명분적인 치레였을 뿐이다.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보기 힘든 것은 나당전쟁의 예로 알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일본처럼 고립된 섬나라라면 상관없겠지만[5], 한반도의 경우 몽골고원 등지에서 꼬리를 물고 발흥해온 세계 최강의 전투 민족[6] 들과 직접적인 전쟁을 반드시 피해야 했다. 이들 북방 유목민족의 힘은 중국 정도 되니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그나마도 몽골이나 만주(여진)족에게는 본토가 털렸었다. 이런 독보적인 강대국 중국이나, 혹은 이런 강대국 중국조차도 떡실신시키던 몽골족이나 만주족과같은 전투민족들이 한반도로 침공해온다는 것은 세계멸망이나 다름없어 사대는 필수적인 전략이었다. 실제로도 세계사를 보면 어떤 지역의 강대국을 박살낸 유목민족은 주변 지역들도 죄다 초토화를 시켜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을 깨부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입증한 청나라나 원나라만 봐도 리즈 시절 때에 군사적으로 약하지는 않았다. 또한 전력으로 보면 기병은 당시 전차, 장갑차, 험비나 마찬가지라 그런 걸 수만 대 혹은 수십만 대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유목민족들과 그런 유목민족들을 매수하여 이간질, 분열시키거나[7] 고전시킬 수 있는 농경 대제국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역사에서 로마제국의 사례만 봐도 로마 같은 우수한 문물, 거대한 규모를 가진 농경 제국조차 정상적으로 어느 정도 돌아가는 농경 제국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8] 세계사적으로도 주변의 제국들에게 형식상 사대를 하는 민족들이나 나라는 많았다.

오히려 한반도로서는 차라리 어느 정도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농경 문화권인 중국과 연대하는 것이 여진이나 몽골 같은 유목 민족들의 약탈과 전쟁에 대처하는 데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중세 후반 이후로 갑툭튀하여 동아시아 전 해안을 휩쓸었던 왜구에 대한 대처도 그렇고. 현실적으로 거란이나 몽골의 침략에서 송나라가 고려를 도와준 일은 없었긴 하지만[9], 명나라 같은 경우 이만주 항목에서 보듯 여진족을 공동으로 대처한 경우도 있었고 조선이 왜구를 토벌했다는 명목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명나라에서 이를 치하해 하사한 경우도 있었다.[10]

바다 위에서 대륙과 떨어졌다는 지리 조건 덕택에 강대국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섬나라 일본은 이러한 역사를 비틀어 만든 사대주의라는 개념으로 한국사를 폄하했다.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학자들은 주로 중국과 조선 사이의 불균형한 역학관계와 조선 중후기 조선이 보였던 찌질한 모습들을 들추어 이를 한국사 전반의 특징으로 연관시켰고, 이를 조선총독부 관리들에게 조선통치의 지침서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근대 한국민속학에 상당한 학술 성과를 쌓은 것으로 평가받는 대표 식민사학자인 다카하시 도루는 3.1 운동마저도 중국 사대주의에서 미국 사대주의로 전환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1] 그들이 조선멸시의 전제로 삼은 일본의 자주 독립이 실제로는 지정학 여건의 우위에 말미암은 것임을 고려하지 않았다.[12]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도 구한말에 더 이상 중국이 최고가 아님을 깨닫고, 내셔널리즘의 성장과 함께 일제의 간섭과 식민통치에 맞서 자주성을 강조하다보니 자주성과 맞지 않던 과거 한반도 국가의 사대는 외세 의존으로 폄하하고 비난했다.

사대주의에서 가치경도적인 수사를 제외하고 추려 보면, 패권국가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대주의는 세계 각국의 국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고, 초강대국이 세계 질서를 다스리는 국제 현실에서 모든 국가가 생존 및 발전을 위해서라면 따라야 할 전략인 셈이다.

또한 조선인들이 명나라를 따르고 찬양한 것은 그저 그 나라를 찬양한 게 아니라, 당대 중국의 문명이 이미 조선을 앞서갔기 때문이다. 중국의 선진 문물 등을 다시 조선이 중국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조선에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세종 때 만든 칠정산도 중국의 수시력과 중국을 통해 들어온 아랍의 회회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며, 훈민정음 또한 중국의 언어학 서적과 음운 관련 서적을 연구하여 창제된 것이다.

내셔널리즘이 과거에 비해 옅어진 한국사학계에서도 사대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받아들여, 10여 년 전까지도 국내 학계의 대응은 "우리도 자주 OO가 있었다." 라고 반응했던 것에서 이제는 오히려 "사대주의 그게 무슨 문제인가? 당연한 국가전략 아닌가?"로 생각하는 추세다.

2.2. 사대주의 담론에 대한 비판론

사대주의는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데 기여했다.

명청교체기 이후에는 청나라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이 곧 명나라의 정신을 계승했다는 정신승리법적인 소중화사상이 대두되었다. 사대주의는 큰 나라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명나라가 오랑캐(청나라)에게 멸망하면서 조선이 섬겨야 할 '큰 나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소중화사상의 정서는 명청교체 이후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13] 조선의 소중화라는 개념은 왕조는 멸망했지만 중화 문화가 여전히 중국 땅에 존재하고 있고, 정신적으로는 오랑캐의 나라인 청보다 대국이니 중화를 여전히 섬기는 우리가 바로 사실상의 작은 중화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소중화주의는 자국우월주의적 면모를 보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파생된 것이다.

즉 '소인배 나라, 오랑캐 나라, 정신적으로 작은 나라인 청이 정신적으로 위대한 대인배의 나라 소중화 조선에 사대하는 것이 유교원리에 따르면 옳은 것이지만 청나라 오랑캐들은 무식하면서 힘만 센 야만인들이므로 일단 겉으로만 청을 섬기는 척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당시의 사상으로 보면, 청나라는 겉보기에 크기만 클 뿐 결코 대국이 아니었고 수많은 오랑캐 잡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연히 현실적으로는 조선의 20배가 넘는 인구를 갖고 있고 압도적으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더라도, 현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의 관념 상에서는 '작은 나라'인 청이 사대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청 건국 이후에도 조선은 '사대주의의 논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사대를 하는 나라에서 받는 나라로 규정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 사대라는 것을 받아본 적은 없고 오히려 거짓으로라도 오랑캐 나라에 사대하는 우스운 지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한반도의 경우 역사적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까지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화하면서 청나라와의 교역, 교류를 방해하였다.

조선의 사대주의가 소중화주의로 변질된 것은 조선의 멸망을 가속시켰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나마 송나라나 원나라를 통해 어느 정도는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던 이전에 비해 후기에 들어서는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고, 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사상(북학파)은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은 뒤떨어진 조선을 발전시킬 방안은 내놓지 않으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은 죽은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 뿐이었고, 이것은 1937년(연도의 착오가 아니다!) 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명나라 황제는 만력제로, 사대주의에 입각해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게 유린당하던 조선을 위해 명나라의 손해를 감수하고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14] 그러나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제사까지 포함시킨 만동묘나 대보단은 결코 쉴드칠 수 없다. 이것은 조선이 저 혼자 잘났다는 소중화주의로도 해석할 수 없고 단순한 중화에 대한 정신적 종속의 결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사대주의를 가치중립적으로 재정의한 개념으로 본다면, 너무나 당연해서 특별히 단어를 새로 만들 필요도 없는 개념이다. 문제는 사상적 차원을 끌어다 오히려 자국의 입장까지 훼손해가면서 중국을 위해 굳이 사대주의적 입장을 취할 때 발생한다. 친미외교를 넘어서 트루먼, 맥아더한테 제사지내는 꼴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긴다는 '사대'라는 개념은 일단 유교의 기본 관념 중 하나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식은 부모를 섬기고, 제자는 스승을 섬기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고, 지어미는 지아비를 섬기고, 나이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조선시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충과 효라는 것도 작은 것(신하, 자식)이 큰 것(왕, 부모)을 섬긴다는 사대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큰 나라에 사대를 하지 않는 것'은 불효, 불충과 다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상적 이유를 포함하게 되면 현실주의적 외교 논리를 벗어나 후기 조선의 사대주의처럼 욕먹어도 할말없는 꼴로 된다는게 함정.

3. 결론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했던 실질적 이유는 위 항목에서 논하였듯이 현실주의적 외교 논리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위와 같은 사상적 이유 역시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사대주의가 극도로 지나칠 경우에는 사상적, 문화적 측면에서 자기 고유의 것은 아예 부정하고 남의 것은 무조건 최고라고 하는 병폐가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사대주의는 실리를 추구하는 데에 활용되어야 하지, 맹목적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4. 여담

현재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는 (구체적인 방도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지만) 필요에 따라 외세에 적절히 양보하거나 그들을 본받으려고 하며 그 태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도 21세기 들어 중국의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력이 커지는 와중에도 미국과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외국 군대인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이를 전략적인 지렛대로 활용하기도 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기 위해 국내의 법과 제도를 고치고 선진국의 사례를 본받으려고 노력한다. 오늘날의 이러한 모습에 기초해 근대 이전 한반도 국가의 '사대주의'를 근대 이전의 '세계화'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15]

5. 관련 항목



[1] 여기서 는 '섬기다'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큰 나라를 섬긴다'.[2]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다가 자국 내부 문제와 겹쳐서 39년만에 망해버렸고, 송나라는 문치주의와 약한 군사력, 요나라와 금나라라는 강력한 이웃 국가들 때문에 내내 강대국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철령 이북의 땅을 주장하며 몽니를 부렸으나, 태종 이방원과 영락제 주체의 인연으로 양국의 관계가 원만해진 이후로는 한번도 조선을 침략하려 시도힌 적이 없다. 조선 중후반기의 청나라는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명나라와 전쟁하는 동안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정묘호란), 부족해진 식량과 불어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어서 급하게 자원확보가 필요해서(병자호란) 조선과 전쟁을 한 것이었다.[3]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1&cp_code=cp0301&index_id=cp03010473&content_id=cp030104730001 본래 춘추전국시대에서는 정말로 조공으로 삥뭔 좆도 아닌 걸 주고 영토, 성 같은 걸 내놓으라고 협박질하고 다녔다.을 뜯고 있었고 한나라 이후에 등장한 왕조부터 유교 사상이 점점 성장함에 따라 조공 무역이 점차 이익이 되어갔다.[4] 고구려도 중국에 대하는 자세 역시 기본적으로 사대였다. 장수왕같이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도 중국에게 신하를 자처하며 조공을 바쳤다. 태왕이라 부르고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동시에 외왕내제를 하는 형식으로. 물론 기본적인 의도는 조선의 그것과 비슷했다. 명분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대신 실리를 챙기는 그것. 다만 중국에서 다시 한족 왕조인 통일 왕조가 들어서자 이전의 사대는 무시하고 한사군의 옛 땅임을 명분으로 고구려를 정복했을 뿐이다.[5] 그러나 그 일본조차도 스스로 중화질서에 편입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했다. 나라 시대 때 견수사, 견당사를 파견하며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던 점과, 감합무역 등의 방식으로 중국과 교류를 했던 점 등을 보면 알 수 있다.[6] 흉노, 선비, 거란, 여진족, 몽골 등은 모두 당대 최강의 무력집단들이었다.[7] 물론 돈지랄이기는 하지만 재력과 외교술을 동원하는 것도 엄연한 국가의 능력이다.[8] 유목 제국이든 농경 제국이든 리즈 시절 때를 보면 굳이 그런 막강한 상대와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그런 넓은 영토를 아무 이유 없이 갖게 된 것도 아니라 화약 무기가 퍼지기 전까지는 "훨씬 우수한 문물로 대제국을 지배하는 이웃 민족을 쓰러뜨린다." 이런 것들은 이웃이 자멸 혹은 시대적 변화에 대한 적응 실패 등에 의한 것들로 인하여 무너지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농경민족의 경우에는 유목민족보다 군사적 효율(유목민족은 남자는 곧 전사인 경우가 많아 따로 직업적 전문 군인 양성 비용이 들지도 않으며 그 전문 군인 하나하나가 대부분 기병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심지어 내전이나 대패로 인하여 인구가 많이 줄어도 전력만큼은 빠르게 잘 모은다.)이 좋지 않았다. 이는 한 지역에 정착해서 별다른 전쟁 없이 풍족한 자원을 향유할 수 있던 농경민족과 달리, 유목민족은 유목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지역을 이동하며 다녀야 하는데다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끊임없이 약탈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9] 이 당시 송나라도 거란과 몽골 눈치를 보느라 도울 여력이 되지 않았다.[10] 명사 조선전 정통 9년, 10년 및 가정 35년 등 항목 참조.[11] 3.1 운동이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 발언에 영향받은 것을 이런 식으로 비틀어 놓았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3.1 운동의 내부 요인(일제가 저지른 조선에 대한 억압 통치 등)을 무시하고 외부 요인을 강조하는 시각이 상당하다.[12] 섬나라라는 지리 조건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데 상당한 이득이다. 국경을 접한 국가보다는 바다를 끼고 한 발자국 떨어진 국가를 정복하는 것이 훨씬 어렵기 때문.섬나라라는 지리 이점 등의 요인들이 일본을 중화중심의 사대질서에서 한 발자국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13]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14] 만력제는 중국에서 최악의 황제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의 경제 사정이 넉넉한 편이기는 하지만, 명나라의 안보와 별로 관계가 없는 조선에게 불필요하게 막대한 군사비를 들여가면서 지원을 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이익과 무관한 만력제의 개인적인 의지에 따라 수행한 전쟁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만력제의 별명이 고려천자, 또는 조선의 황제다.[15] "한국 발전은 사대주의(事大主義), 즉 글로벌 스탠더드 따른 덕분", 오코노키 마사오,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