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04:25:04

제3차 요동정벌

1. 개요2. 배경
2.1. 명의 사정2.2. 표전문 사건2.3. 조선의 사정
3. 전쟁 준비
3.1. 명의 준비3.2. 조선의 준비
4. 종결5. 실현 가능성
5.1. 요동정벌 실행자체 가능성5.2. 요동정벌 성공 가능성
6. 요동 통치 가능성
6.1. 가능하다6.2. 불가능하다
7. 번외: 조선과 명의 결혼동맹 논의8.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정축년에 고황제(高皇帝)가 본국(本國)의 표사(表辭)[1] 안에 희모(戲侮)[2] 하는 〈내용의〉 글자[字樣]가 들어있다 하여, 사신(使臣)을 보내 그 글을 지은 사람 정도전(鄭道傳)을 잡아서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였는데, 태상왕준(浚)을 불러 비밀히 의논하니, 대답하기를 보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도전(道傳)이 그때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 있었는데, 병(病)을 핑계하여 가지 아니하고 음모하기를, 국교(國交)를 끊으면 자기가 화(禍)를 면할 것이라 하고, 마침내 건언(建言)하기를,

"장병(將兵)을 훈련하는 것은 군국(軍國)의 급무(急務)이니 진도 훈도관(陣圖訓導官)을 더 두고, 대소(大小) 중외(中外) 관리로서 무직(武職)을 띤 자와 아래로 군졸(軍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습하게 하여 고찰(考察)을 엄중히 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남은(南誾)과 깊이 결탁하여 은(誾)으로 하여금 상서(上書)하게 하기를,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하니, 태상왕이 자못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은(誾)이 여러 번 말하므로, 태상왕이 도전(道傳)에게 물으니, 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論)하여 은(誾)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 준(浚)은 〈병으로〉 휴가〈休暇〉 중에 있은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도전(道傳)과 은(誾)이 명령을 받고 준(浚)의 집에 이르러 이를 알리고, 또 말하기를,

"상감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

고 하였다. 준(浚)이 옳지 못하다 하여 말하기를,

"이는 특히 그대들의 오산이다. 상감의 뜻은 본래 이와 같지 아니하다.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범하는 것은 불의(不義)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나라의 존망(存亡)이 이 한 가지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억지로 병(病)을 이기고 들어와서 〈태상왕을〉 뵙고 아뢰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백성들의 기뻐하고 숭앙(崇仰)함이 도리어 잠저(潛邸) 때에 미치지 못하옵고, 요즈음 양도(兩都)[3] 의 부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피로함이 지극합니다. 하물며, 지금 천자(天子)가 밝고 착하여 당당(堂堂)한 천조(天朝)를 틈탈 곳이 없거늘, 극도로 지친 백성으로서 불의(不義)의 일을 일으키면 패하지 않을 것을 어찌 의심하오리까?"

마침내 목메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은(誾)이 말하기를,

"정승(政丞)은 다만 두승(斗升)의 출납(出納)만을 알 뿐이라, 어찌 기모(奇謀)와 양책(良策)을 낼 수 있겠소?"

하였다. 태상왕이 준(浚)의 말을 좇으니, 의논이 마침내 그치었다. 도전(道傳)이 또 준(浚)을 대신하여 정승(政丞)이 되려고 하여, 은(誾)과 함께 매양 태상왕에게 준(浚)의 단점(短點)을 말하였으나, 태상왕이 대접하기를 더욱 두터히 하였다. 일찍이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준(浚)의 화상(畫像)을 그려서 하사(下賜)한 것이 두 번이고, 도전(道傳)으로 하여금 그 화상에 찬(讚)을 짓게 하였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준(浚)의 집을 지났는데, 준(浚)이 중당(中堂)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인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드리며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알고 받았다.
- 영의정부사 평양 부원군 조준의 졸기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6월 27일 신묘 1번째 기사
처음에 정도전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遼東)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陣圖)》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遼東)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殿下)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遼東)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그 후에 조준이 힘써 간(諫)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4]
- 정도전 등이 요동 공략에 대해 조준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하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8월 9일 임자 1번째기사

조선 태조 이성계정도전요동만주를 획득하기 위해서 계획한 3번째 요동정벌 계획. 하지만 계획과 준비 단계에서 이방원측이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는 1차 왕자의 난이 터지면서 무산 및 폐기된 계획.

2. 배경

조선은 이성계가 제2차 요동정벌에 반대해서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획득 후 자신과 협력하는 신진사대부와 협력해서 세웠다. 기본적으로 친명 정권이었고 요동, 만주 지역에 대한 명의 우위와 영유권을 인정했다. 이 때문에 넘어오는 사람이 있어도 되돌려 보내는 등 관련되지 않으려고 했다. 명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가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고려와 전쟁을 유발했던 철령위 설치에 대해서 철회하면서 우호 관계를 맺는다. 고려말 명과 충돌로 빚어진 양국 관계는 이렇게 개선이 되고 안정이 되어갔다.

2.1. 명의 사정

조선 건국 후 관계 개선으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던 명과 관계는 명태조 홍무제가 갑자기 조선에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이성계부터가 요동정벌에 반대하면서 쿠데타까지 했고, 고려 때 문제인 철령위 설치 문제도 조용하면서 조선은 딱히 명과 대립지을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의심이 병적인 홍무제가 보기에 왕씨 왕실만큼이나 조선의 이씨 왕실과 정도전도 위협적이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위협적인 대상으로 여겼는지 몰라도 홍무제의 적대감은 노골적이었다.

명의 골치거리였던 나하추를 가지고 놀던 상승장군 이성계의 무용과 고조선-고구려-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요동과 만주에 대한 영유권에 대한 권리, 정도전의 중앙집권화 및 진도(진법)을 연습하는 등의 군사력 강화로 인한 불안감이 원인으로 추정된다.[5][6]

2.2. 표전문 사건

양국 관계가 적대적인 계기가 된 건 표전문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과 황태후, 황후, 황태자에게 올리는 전문을 합쳐서 표전문으로 부른다. 즉 외교 문서로, 명은 이 표전문을 트집 잡아서 문제 제기를 한다.

1395년 태조 4년에 예문춘추관태학사 정총을 사신으로 파견해서 고명[7]과 인신[8]을 청했다. 그런데 홍무제는 표문의 표현한 언사가 불손하다며 정총을 억류한다. 이듬해에 정월에 판문하부사 유구, 한성부윤 정신의를 사신으로 다시 파견했는데 또 표문을 문제삼아서 두 사람을 억류한다. 그리고 표전문을 지은 사람을 보내라고 한다.

문제는 표전문 지은이 중에는 개국공신이자 조선 2인자이자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 정도전이 있었다. 표문은 정탁이 쓰고 정도전이 교정했고 전문은 김약항이 썻는데, 정탁은 아프다고 피했고 정도전은 그 위치상 가지 않고 김약항만 갔다가 억류되었다. 그리고 명은 정탁과 정도전을 보낼 것을 요구했다. 당연히 이성계는 그 요구를 무시했고 명은 사신을 계속 보내서 정도전을 보낼 것은 요구했다. 겉으로는 외교적 결례에 대한 문제였지만 점점 홍무제의 목표가 정도전인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나 이게 노골적이 된 것이 권근의 사신 파견이었다.

명이 계속 표전문 책임자를 보내라(=정도전을 보내라)는 요구에 이성계는 난감한 상태였다. 이 때 권근이 자원하여 자기가 표문 작성 책임을 지고 명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홍무제의 행동을 볼 때 억류는 당연하고 돌아오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못 보내고 홍무제의 압박에 전전긍긍하던 이성계는 기뻐하면서도 권근에게 미안해하며 노자까지 두득하게 주면서 배웅했다. 이렇게 권근은 하륜과 함께 명으로 떠났다.

명에 도착한 권근은 역시나 억류가 되는가 싶었는데, 말이 억류고 그냥 사신 대접을 잘 받으면서 잘 지낸다. 명에 도착하자 홍무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홍무제가 내려준 시제로 즉석에서 24수의 시를 짓고 홍무제 이 24수의 응제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마음을 풀고 시 3수를 하사한다. 이후에 명에서 학사들과 교류하고 홍무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나중에는 권근과 함께 억류되었던 사신들을 풀어주면서 권근이 마음에 들어서 풀어주는 거니 권근에게 감사하라는 하는 등 권근에 대한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면 조국의 위기 속에서 충정을 발휘해서 목숨 걸고 호랑이굴에 들어가서 놀라운 문재(文材)로 홍무제의 마음을 돌린 미담이지만... 뒷배경을 살피면 단순하지가 않았다.

표전문 작성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고 정도전은 표문 교정만 했지만, 상국인 명에게 왕으로서 인정을 요구하기 보내는 중요한 외교 문서였다. 기본적으로 조선을 좌지우지 하던 정도전이 총책임자였고 그의 사람들이 작성하고 사신 역시 정도전 일파에서 나왔다. 즉 조선이라는 국가의 중심인 정도전와 그의 동지들이 명의 외교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의 표전문 내용을 문제 삼고 사신을 억류한 것은 표전문을 작성한 정도전과 정도전 파벌의 대명 외교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묻겠다는 의미였다.

반대로 권근은 1차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 세력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딸(경안공주)과 권근 아들(권규)이 혼인함으로써 사돈까지 된다. 무엇보다 권근과 함께한 사람은 다름 아닌 태종 이방원의 오른팔 하륜이었다. 그리고 홍무제가 문장을 즐겨서 단순히 시문이나 읊으면서 권근과 즐긴 것이 아니었다. 홍무제는 사소한 글귀 하나까지 시비를 걸어서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외교 문서의 표현이 불손하다고 난리를 치다가 시를 보고 마음이 풀린다? 시를 트집을 잡지 않았다는 건 권근의 외교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이방원에게 우호적인 메세지였고 이방원과 그 파벌을 외교적 동반자로 삼겠다는 의미였다.[9]

2.3. 조선의 사정

홍무제의 상상 이상의 까칠한 행동에 조선은 당황스러웠다. 처음에 표전문을 문제 삼았을 때만 해도 성질 더러운 황제의 나쁜 버릇이 또 시작된 것으로 보였지만 뒤이어 사신 억류와 정도전 소환 요구로 이어지자 이것이 단순한 몽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점점 명이 노골적으로 정도전의 제거를 노리는 것이 확실해지자 조선은 난감한 상태가 된다. 정도전은 단순한 개국공신이 아니라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한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로, 현재 조선의 2인자라고 할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보내는 믿음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삼은 상황에서 정도전은 어린 세자의 정치적 후견인이기도 했다. 정도전을 요구대로 명에 보냈다가 화를 당하면 정안군 등이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리게 되는 문제가 된다. 정치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이성계는 정도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명의 압박은 점점 심해지고 명의 외교적 압박에 이성계조차 인내심의 고갈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안군 파벌은 정도전을 보내자고 하고 정도전 파벌은 이에 반대하면서 맞선다. 이런 와중에 권근과 하륜이 자원해서 명에 가서 표전문 문제를 해결하고 오자 정도전의 위기 의식이 강해진다. 단순하게 외교 사절로 문제 해결만 했다해도 그 공이 적지 않았는데 홍무제는 노골적으로 권근을 우대했다. 권근이 마음에 들어서 기존의 사신들의 죄를 사하고 보내니 권근에게 감사하라는 것 하나로도 정도전 파벌은 권근에게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였다.

귀환 전 알현에서 사신을 접견한 홍무제는 대단히 분노하게 된다. 홍무제는 귀환 선물로 옷을 하사하면서 그 옷을 입고 오라고 분부한다. 그런데 당시에 조선에서 현비(신덕왕후)가 죽어서 국상 기간이었다. 기존에 억류되었던 정총은 현비를 추모하는 의미로 상복을 입고 권근은 홍무제가 하사한 옷을 입었다. 당연히 홍무제는 분노하면서 권근을 제외한 나머지의 귀환을 취소시키고 권근만 귀환한다.

무슨 깡으로 황명을 어겼나 싶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정치적인 행위였다. 공개적으로 홍무제는 권근의 공으로 너희들의 죄를 사한다고 했다. 당연히 권근에게 감사하라는 의미이며 또한 정도전 파벌이 이방원 파벌에게 숙이고 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현비는 세자의 친모이며 정도전은 세자의 후견인이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상복을 입은 건 이성계-현비-정도전으로 이루어진 세자파에 대한 충정을 나타내면서 정도전 파벌의 유대감을 확인하고, 권근의 덕을 볼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좀 더 들어가면 '당신이 중원 천자이지만 별개로 우리는 조선의 신하, 그러니 조선의 국모를 추모하는 게 당신 명령보다 우선'이라는 의미에서 조선 왕인 이성계의 의지에 반하는 정도전 대신에 이방원을 지지하는 일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렇게 권근만 귀환했지만 어째든 명과 문제되었던 표전문 문제는 권근의 공으로 해결되었다. 홍무제는 표문 문제 해결 후 화해의 제스처로 양국간 혼사를 추친한다. 이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가마인 금안교를 선물로 보냈는데 홍무제가 안장을 직접보고 안장에 하늘 천(天)가 꺼꾸로 적혀있는 것을 보고 "안장은 사람이 타는 건데 하늘이란 글자를 써서 하늘(=천자)을 탄다고 하는 거 날 모욕하는 거냐?" 라면서 분노한다. 당연히 또 조선은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더럽지만 황제의 진상질이니 어쩌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혀야 했다.

이러던 중 정도전은 권근을 기존에 억류되었던 사람들은 못 돌아왔는데 홀로 돌아왔다는 문제로 탄핵한다. 권근의 공이 커지자 반 정도전 파벌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성계부터 자원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명에 가서 문제를 해결한 권근의 공을 높이 평가하며 탄핵을 무시한다. 여기에 권근이 금을 가지고 있는데 분명히 황제에게 받은 것이니 국문하자고까지 하는데 이 금은 이성계가 노자로 준 것이었다(...). 이러니 이성계부터 반응이 시원찮은 굉장히 무리수인 탄핵이었고 정도전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지지만 잃어버린다.기록

표전문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정도전 파벌인 사신들은 억류돼서 귀환하지 못한 상황. 그리고 홍무제는 이방원을 지지하면서 정도전을 견제하려는 심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성질 더러운 황제가 언제 어떤 트집을 잡아서 자기를 옭아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홍무제는 노골적으로 조선에 정도전을 보내든가 아니면 전쟁을 하든가 택일하라는 서신을 지속석으로 보냈고 정도전 입장에서는 명에 가는 건 죽는 일이니 선택할 수 없었다. 그런 남은 건 전쟁 뿐.

이런 와중에 억류되었던 정총과 김약항 등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국 사신을 억류하고 죽이는 것부터가 외교적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조선은 억류된 사람들을 봉군하는 등 위신의 높이고 지원하면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상국이라도 도를 넘는 일이고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명이 조선을 모욕하는 행동으로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 홍무제 주원장은 가난뱅이 중에서 맨손으로 일어나 끝내 대제국을 세웠다지만 태조 이성계 역시 시골 무장으로 시작해서 여진족과 고려군을 통솔하면서 군공 쌓으며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야전 지휘관이었다. 더구나 고구려의 영역인 동북면에서 나고 자라고 여진족까지 부하로 두었던, 타고나기를 무골(武骨)로 타고난 사람이었다. 또한 명이 영유권을 가진 만주지역과 아직 조선영토가 아닌 후일 4군6진 지역의 여진족의 부족 중에서 이성계 지지부족들이 상당히 있었다.

3. 전쟁 준비

3.1. 명의 준비

명은 엄청난 외교적 압박과 이성계에 대한 모욕과 정도전 보내기와 전쟁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행동 등 위기수위를 높였지만 정작 전쟁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불안 요소인 정도전을 끌고오고 조선을 길들이는 게 목적이었다. 본인이 엄청난 현실주의자였던 홍무제는 멀리 떨어진 영토는 정복해도 손실만 심하고 통치에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서 얻는 이익이 적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리 조선이 명나라에 작다한들 과거 고구려-수나라 전쟁, 고구려 당나라 전쟁, 신라 당나라 전쟁, 고려-요나라 전쟁, 고려- 몽골 전쟁 등에서 보였듯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체급이 결코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체급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 보낸 글에 한과 당의 군대와 비교해서 둘은 수전에 미숙해서 졌지만[10] 내 군대는 수전에도 전문가이니 과거의 일 믿고 덤비면 코피 터진다고 협박하면서도[11] 정작 조선 정벌하자는 의견은 묵살한다. 이제 막 천하를 통일하고 마침내 원을 박살내서 대내외적으로 안정되었는데 굳이 백성들을 힘들게 하면서 전쟁하고 싶지 않다는 게 홍무제의 생각이었다. 홍무제는 전쟁할 생각도 없으면서 블러핑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그토록 무례하고 위기감을 조성하는 행동은 무엇이냐고 할 수 있는데 홍무제는 원래 성질머리가 더러운 사람이다(...).[12] 그리고 2인자이자 이성계의 영혼의 동지인 정도전을 보내게 하려면 그 정도 압박은 필요하기도 했다. 설마 조선이 눈이 돌아가서 진짜로 한 판 뜨려고 할 생각은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을 터였다.

본인이 이미 한과 당의 사례를 들었는데, 보면 알겠지만 중국 왕조의 만주와 한반도 공략의 역사는 실패의 연속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나라는 힘들게 고조선을 멸망시켰는데 한사군낙랑군 빼고는 빠르게 실패했고 그나마 남은 낙랑군도 반독립세력으로 있다가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쓸려버렸다. 수나라는 그 부가 엄청나서 대운하 같은 대공사도 할 정도의 국력을 가졌음에도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원정은 실패하고 지속적인 전쟁의 결과 국가에 망조가 들었다. 당은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군주이자 뛰어난 야전지휘관인 당태종이 친정까지하고 수나라 때 난공불락의 요동성 함락과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야전군을 패배시키는 성과를 올리고도 안시성 전투에서 지면서 실패했다.

이후에 당은 요동 방어선을 장기간 공략하면서 무력화 + 신라 원군으로 협공 + 고구려 내분까지 이용해서 겨우 멸망시켰지만 지방 통제에 실패해서 고구려 땅에 발해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한반도 남부에는 웅진도독부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면서 지배력을 발휘하려고 했지만 나당전쟁의 패배로 손을 때야했다. 고려의 경우 거란이 세운 요는 3차례나 전쟁을 걸었다가 결국은 귀주에서 정예병만 몽땅 날려버리고 국력만 약해졌다. 여진의 금은 고려와 9성을 놓고 전쟁을 겪은 후 정치적 우위를 인정받자 아예 고려를 건들 생각도 안했다. 세계를 정복하던 몽골도 방치했다지만 30년을 버텼고 초기에 귀주성은 함락되지 않았으며 원정군 사령관 살리타이가 유시를 맞고 전사하는 낭패를 겪었다.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 공략은 장기간의 준비 및 막대한 물자와 병력이 요구되면서 막상 결과물은 시원치 않거나 아무 것도 못 건지는 경우가 많았다. 빈민 출신으로 전쟁이 백성을 고달프게 한다는 걸 알고 피하려는 홍무제 입장에서 장기간 대군을 동원해서 정벌해도 남는 것도 없고 이겨봤자 통치만 힘든 땅에 원정은 꺼렸다. 이겨도 본전치기인데 지기라도 하면? 홍무제가 언급은 안했지만 당 이전에 중원 통일 후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그 여파로 나라가 망한 수의 전례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 중원을 통일하고 어수선한 상태에서 홍무제는 건드려서 재미볼 것도 없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조선 원정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3.2. 조선의 준비

명의 압박에 정도전은 권근 탄핵으로 우선 권근 뒤에 있는 정안군 이방원 세력을 견제하려했지만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남은 건 명과 전쟁 뿐이었다. 다만 자기 생명 때문에 명과 싸운다는 명분을 들 수 없었기 때문에 정도전이 선택한 패는 요동정벌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명분이자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거창한 명분이었고 고려의 뒤를 이은만큼 그 나름대로 명분이야 있었지만, 태조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했었고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 건국을 시작했다. 당연히 이성계의 측근인 정도전도 한 몫했다. 위화도 회군까지도 4불가론으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넘길 수 있겠는데, 그 직후에 친명으로 국가 외교기조를 바꾸고 일부러 되도 않는 후보를 준비해가며 명에게 국호 선택을 요청하는 퍼포먼스를 보였으며 심지어 고려사에 대한 곡필까지 서슴치 않았을 정도로 명에 대해 제후국의 예로 납작 엎드리던 것이 이성계와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삼한의 고토 수복을 명분으로 전쟁을 준비하니 누가봐도 속셈이 뻔했다.

나름 고구려 땅에 자리잡은 호족으로 고구려 계승을 가지고 이름도 고구려와 같은 고려로 짓고 고토 회복을 부르짓던 왕건과 달리, 이성계는 전주 이씨 가문이 남쪽에 있다가 정치적 알력 때문에 북쪽에 터잡은 이주민 집안이라서 딱히 고구려 후예라는 식의 승계 의식도 없었고 전주 이씨 가문 자체가 백제계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이성계 본인이 태어난 곳은 구 백제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제 후예라는 식의 승계 의식조차 없었다. 그렇다 보니 눈치보면서 고려 왕위 양위받고는 슬그머니 조선으로 바꾸는 등 역사의식과 별개로 정치적 승계 의지는 없었다. 이런데 갑자기 고토 회복과 자존심 회복을 내세워서 전쟁하자니 동의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준비하면서 정치적으로 지지를 모으고 군대를 키우기 시작한다. 일단 이성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가면서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인 군사력 강화의 일환으로 그동안 실시한 진도 연습과 훈련을 독려하면서 중앙집권과 통일된 지휘체계를 만들다. 또한 원래 요동에서 사람이 넘어오면 다시 돌려보냈는데 이 시기에는 의복과 음식을 주면서 받아들인다. 군대 강화를 위해서는 각 대신과 종친에게 나누어져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 왕의 명령을 듣는 중앙군으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사병을 가진 세력들의 반발이 엄청났다. 이미 진도 연습 등으로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추면서 중앙에 병권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그나마 있던 병권을 전부 가져가겠다는 행동에 불만을 품는다. 더구나 당시에 막내 의안대군을 세자로 삼으면서 이복형제들은 숙청의 가능성 때문에 불안감이 커진 상황에서 그나마 있던 군대까지 빼앗기니 이대로 가다가는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높이기 충분했다.

정치적으로도 조준, 김사형 등은 정도전의 강경한 자세와 별개로 요동정벌의 불가함을 계속 역설했고 이성계도 조준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등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반대가 컸다. 사실상 정치적으로 요동정벌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은 목숨이 달린 정도전 정도고 이성계야 정도전을 믿으니 밀어주기는 했지만 주변에 반대가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강행하기 어려웠다.[13]더구나 그 당시 이성계가 자주 아프면서 군사 행동에 나서기 더욱 어렵게 되었다.

4. 종결

1398년 6월(음력 5월) 홍무제가 사망하고 황손 건문제가 새 황제가 된다. 그리고 몇 달 후인 8월, 정도전이 열심히 요동정벌을 주장하면서 진법 훈련을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던 와중에 세력을 모은 정안군 이방원이 이성계가 병환으로 자리보전 하는 순간을 노리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그 일파를 모조리 제거한다. 이로써 갈등의 두 주역이 모두 사망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계는 회복되었다. 거기다 훗날 개인적으로 만남이 있던 영락제와 태종 이방원이 각각 즉위하면서 사대를 통한 우호 관계는 깊어지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일도 없어졌다.

보면 알겠지만 조선이 굳이 무리하지 않았어도 얼마 안가 주원장이 사망하면서 해결될 일이긴 했다. 허나 당시야 저 진상(...) 황제가 언제 죽을지 알 수도 없었으니 조선과 정도전 세력이 취할 길은 거의 하나 뿐이긴 했다. 다만 주원장이 죽고 나선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을텐데 요동정벌을 추진한 것을 보면 이를 이용한 종친 등의 사병 혁파와 주원장 사망 직후 벌어지는 명나라 내전인 정난의 변을 염두에 두고 진짜 진지하게 요동정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5. 실현 가능성

5.1. 요동정벌 실행자체 가능성

요동정벌이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데 장애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우선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하며 내세운 4불가론이 고스란히 당시에도 적용되었다. 당장 고려 말 고려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은 왜구는 아직도 해안가를 침범하고 있어서 국가적인 문제였다. 세종 때까지 왜구가 기승을 부려서 세종은 해안가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다가 상왕 태종이 주관해서 대마도 정벌까지 해서야 진정시킬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왜구를 확실히 족칠 정도의 군사력을 준비하는데 세종 즉위년까지의 안정기가 필요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남쪽에 덤비는 왜구는 냅두고 원정군을 편성하는 건 비현실적이었다. 최소한 박위가 한 것 같은 대마도 원정 등으로 남쪽을 안전시키는데 우선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이성계정도전 그리고 정도전을 지지하는 남은 정도를 제외하면 요동정벌에 찬성하는 여론은 강하지 않았다.[14][15] 그럼 반대파를 전부 무시하고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원정군은 누가 이끌고 후방은 누가 책임지는냐는 걸림돌이 생긴다. 원정군의 중요성과 경험과 군사적 능력,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볼 때 최고의 선택은 이성계의 친정과 정도전의 후방 보좌가 이상적이었다. 유방-소하, 조조-순욱과 같은 예에서 보듯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시너지 효과도 높았다. 하지만 요동정벌은 여론도 안 좋았고 정안군을 중심으로 하는 반 정도전 파벌이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이성계가 정도전만 내버려두고 원정을 가기는 불안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성계도 이미 나이가 60세가 넘었고 당시에 병도 자주 앓았다. 건강해도 군대를 이끌기 어렵고 아직 어리고 배경도 미약한 세자를 두고 멀리 나갔다가 변이라도 생기면 살벌한 이복형제들에게 둘려싸인 세자의 지위만 위태롭다. 요동정벌로 정도전에 대한 여론도 안 좋은데 이성계가 없고 정도전과 세자만 둘 수 없었다.[16]

여기에 이성계가 후방 지휘를 한다면 누구에게 원정군을 맡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이성계 본인이 요동 원정군을 이끌고 가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경력자였다. 이번 요동정벌도 똑같이 반대여론을 등에 업고 나서는 행복한 군인이 또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정도전이 야전지휘를 한다? 백면서생의 정도전은 진도훈련과 같은 군사적 지식은 있었지만 실전 즉 야전 지휘는 다른 문제다. 제갈량 같은 군재를 보이지 않는 이상에 패망은 확실했고, 실제로도 조괄이라는 이론만 빠삭하고 실전에 무지한 사례가 있었다. 야전 지휘관으로 잔뼈가 굵은 이성계가 아무리 정도전을 신임한다 해도 국내행정이 아닌 전장 지휘를 맡기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성계를 제외하고 그 누가 중대한 원정을 지휘할 군사적 재능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맡기더라도 불안요소는 결국은 남았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종친을 붙이는 게 제일 효과적인데, 만약에 원정군에 따라간 종친이 공을 세우고 군심을 모아서 왕위를 노린다면 그것도 문제이고 정종 이방과처럼 우직하고 군사적 능력도 있는 사람은 믿을 수 있지만 이미 출정은 고사하고 진도강습조차 사병을 빼앗겨 이 가는 소리가 도성에 울려퍼지는 종친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던 것이 당시 요동정벌 준비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의 친구들조차도 사병혁파가 아닌 요동정벌 자체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정황이 보이는데, 태조 7년 8월의 진도강습 태만 처벌대상자 명단을 보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은, 이제, 이방번, 유만수, 이무, 이지, 정신의 같은 친정도전파 인사들이 잔뜩 포함되어 있다. 특히 남은은 정도전과 함께 대놓고 조준 등 반대파를 막으러 다녔던 사람인데도 강습태만으로 처벌받을 지경이었으니[17] 나름 추진세력이라는 이들부터가 이모양인데 반대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고려하면 할수록 정치적으로 한계가 있고 세자의 지위가 불안하고 반대파가 강성한 상황에서 소수만으로 전쟁을 강행하기에는 무리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다 김사형의 말마따나 도성 공역으로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린지도 얼마 안 되는데다가 조준의 말대로 대외적으로 왜구의 침입으로 내부적으로 어수선하고 피해가 속출하는 와중에 전쟁을 벌이는 건 힘들었다. 제일 중요한 이성계는 와병 중이어서 정치적으로 안정도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실록을 보면 문제의 태조 7년은 툭하면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는 악천후가 이어져 몇번이나 법회를 열어댔고, 심지어 태조 본인도 우박이 내리고 강풍이 부는 날 무리하게 흥천사에 거둥했다가 무인정사의 빌미가 되는 병이 들었을 정도다.

병력을 소집하여 훈련시키는 자체가 막대한 재원을 소모하는 일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노동력은 곧 생산력으로 직결되는데 보인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태종시기 정병:보인의 비율은 1:3이었으니 이 정병을 모두 소집하면 15~60세 양인남성의 1/4이 병영에 꽁꽁 묶인다는 소리다. 농한기에야 그렇다 쳐도 농번기에 이랬다간 난리난다.[18] 하지만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듯이 요동 주둔병력만 10만에 그 뒤에는 주체가 이끄는 최정예 연군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이 정도의 병력이 있어야 뭐라도 해 볼 수 있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게다가 방어전도 아니고 공격전이니 병력들의 훈련도도 일정수준 챙겨야 했고 그러자면 농한기에만 반짝 소집하는것으로는 부족했다. 정난의 변에 맞춰 공격하면 요동군을 조선과 연이 동시에 협공할 수 있다는 주장들이 횡행하지만, 정난의 변 당시 연군의 상황을 보면 수십만씩 몰려오는 적을 요격하기에 바쁘지 요동군에게 선공을 걸거나 할 태평한 상황이 전혀 아니다. 게다가 연왕이 조선과 상대할테니 꿀빠는건 건문제지 조선이 아니다. 또 어느쪽이 이기더라도 명나라의 내전이 끝난 뒤 그 후폭풍이 상당할 것이다.

이렇다보니 정도전의 요동정벌이 진심으로 요동으로 정벌하는 게 아니라 명의 압박으로 불안해진 지위를 보장받기 위한 행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명의 요구를 빌미로 정도전을 어떻게든 실각시키려는 세력에 대항해서 명과 전쟁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실각의 빌미인 명의 요구를 차단하고(전쟁 상대의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으니) 전쟁을 상황에서 국가적 단결을 촉구하고 반대파를 누르고, 진법 훈련과 군사력 강화를 이유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회수해서 위협요소를 제거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일 뿐 실제로 싸울 생각은 없는 전형적인 정치인의 위기 조성으로 돌파하는 방법이라는 것. 그러나 이건 이것대로 너무 속이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차라리 진짜 출병이면 요동 영지나 군공이라는 떡고물로 온건파 종친들을 회유할 가능성이라도 있지, 출병이 없다면 종친들로써는 아예 어떤 떡고물도 없이 그냥 눈 뜨고 자기 세력기반만 뺏기는 꼴이 된다.

다만 준비하고서 얼마 안돼서 정도전과 일파가 숙청되고 중국도 황제가 교체되는 등 전쟁을 준비한 시간이 길지는 않고 반대도 심하다보니 실제로 어느 선까지 나아갈 지 세부적인 전쟁 계획은 어떻게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5.2. 요동정벌 성공 가능성

요동정벌 자체가 성공하고 그 유지의 성공 가능성인데, 가능성은 자체는 추정의 영역이므로 여러 의견들이 혼재하는 상황이다. 일단 3차례의 요동정벌 시도 중에 1차 때는, 명은 나하추의 존재로 인해 요동과 만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원은 북원이라는 형태로 건재했고 명의 군대를 격파할 만큼의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는 요동에 영향력 발휘할 수 있었고 고려 왕실이 물려받았던 심왕 작위로 법적 근거로 나름있었다. 명목상 원에게 다시 심왕 작위를 받으면서 공인받고 원-나하추-고려로 이어지는 동맹을 통해서 명을 견제하면서 요동에만 집중한다면 가능성은 있었다. 물론 이 때는 군량미를 태워먹어서 실패했고 무엇보다 고려 말을 지옥으로 만든 왜구가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집중하기는 거의 불가능했지만 그나마 무주공산인 이 지역에 통치력을 발휘할 기회였다.

하지만 나하추는 결국은 명나라의 지속적인 공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명에게 항복하고 여세를 몰아서 명은 기어코 원을 깨부수고 과거와 같은 부족제 국가로 되돌려버린다. 이 상황에서 명과 전쟁은 더 이상 명을 견제 가능한 세력없이 조선 혼자서 동맹없이 동북아에서 명과 싸워야 한다. 쓸만한 동맹인 타타르오이라트가 발흥할 때까지 수십년을 말이다.
각도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다. 이보다 먼저 남은(南誾)·박위(朴葳)·진을서(陳乙瑞) 등 8명의 절제사(節制使)를 보내어 왜구(倭寇)를 방비하게 하였는데, 왜구가 물러가매, 남은은 경상도에서, 박위는 양광도 에서, 진을서는 전라도에서 군사를 점고(點考)하여 명부(名簿)를 만들게 하고, 그 나머지 여러 도(道)에는 안렴사로 하여금 군사를 점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군적(軍籍)을 만들어 올리게 되니, 경기 좌우도와 양광도 ·경상도·전라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등 8도에 마병(馬兵)·보병(步兵)과 기선군(騎船軍)이 합계 20만 8백여 명이고, 자제들과 향리(鄕吏)·역리(驛吏)와 여러 유역자(有役者)가 10만 5백여 명이었다.
- 각도에서 군사를 점고하여 군적을 올리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5월 26일 경오 3번째기사 (1393년)

일단 병력 규모부터 본다면 요동정벌 시기에 조선은 태조 이성계 시절 조선군의 총 규모가 20만명이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병력 규모로 봤을때 확실히 조선 입장에서는 요동정벌이 아예 불가능하지만은 않아보이는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정난의 변으로 명군이 서로 연왕측과 건문제측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는 통에 요동에 추가적인 명군의 지원이 더 없을거라는 점도 그 자체로 크게 유리한 부분이었으며 또한 당시 조선측에는 한가지 유리한 점이 더 있었는데 바로 정난의 변 당시의 명군은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으로 인해 명나라 초기 명나라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던 남옥(藍玉) 같은 우수한 명장들이 대거 숙청[19]을 당하여 군 지휘부의 기량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20]

다만 3차 요동정벌 시기의 요동은 무주공산이 아니었다는 점 또한 감안은 해야 한다. 3차 요동정벌을 아쉬워하는 이들은 주체의 영지가 요동까지이며 주체가 정난의 변 일으키면 요동이 텅텅 비는 줄 아는데, 요동은 주체의 영지가 아니며 중앙의 총병관이 따로 파견되어 있었다. 애초에 명이 나하추를 물리적으로 격파하고 복속시킨 요동땅을 무주공산으로 내버려둔다는 주장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다. '명사 철현전'의 기록을 보면 정난의 변 당시 요동총병관 양문이 거느린 병력을 10만으로 적고 있는데, 조선에게 그나마 유리한 상황을 가정해 요동도지휘사사 예하 25위 중 홍무, 건문기에 폐지된 광녕6위와 심양좌우위, 영락기에 설치되는 안락주를 제외하면 16위, 1개 위는 5,000~6,000명이므로 실제로도 규정상 약 90,000명의 병력이 연왕과 별개로 요동에 상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比燕兵漸逼,帝命遼東總兵官楊文將所部十萬與鉉合,絕燕後。文師至直沽,為燕將宋貴等所敗,無一至濟南者

연왕이 경사에 점차 육박해오자, 황제가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 양문(楊文)에게 명하여 거느린 부(部) 10만을 거느리고 철현을 합쳐, 연의 후방을 끊게 하였다. 양문의 군대가 직고(直沽)에 이르러, 연의 장수인 송귀(宋貴)에게 패배하여, 단 한사람도 제남에 이르지 못했다.
- 명사 철현전
建文三年,燕兵掠大名。王聞齊、黃已竄,上書請罷盛庸、吳傑、平安兵。孝孺建議曰:「燕兵久頓大名,天暑雨,當不戰自疲。急令遼東諸將入山海關攻永平;真定諸將渡盧溝搗北平,彼必歸救。我以大兵躡其後,可成擒也。今其奏事適至,宜且與報書,往返逾月,使其將士心懈。我謀定勢合,進而蹴之,不難矣。」

건문 3년, 연의 군대가 대명(大名)을 약탈하였다. 연왕은 제태와 황자징이 이미 내쳐진 것을 알고, 글을 올려 성용과 오걸, 평안의 군대를 파해달라고 청했다. 방효유가 건의하길 "연의 군대는 오래동안 대명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날이 무덥고 장마까지 지고 있으니, 응당 싸우지도 못하고 절로 질병에 시달릴 겁니다. 급히 요동의 여러 장수들에게 영을 내려 산해관을 들어와 영평(永平)을 공격하게 하고, 진정(真定)의 여러 장수들은 노구(盧溝)를 건너 북평을 치게 한다면, 저들은 필히 돌아가 구원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군으로 그 후방을 짓밟으면, 가히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연왕의 주청하는 자가 마침 왔으니, 의당 또한 그에게 답서를 주어, 왔다가 도로 돌아가게 하여 달을 넘기면, 그 장수와 군사들의 마음은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의를 확정하고 세력을 합쳐서, 진군하여 뒤쫓으면 어렵지 않습니다"라 했다.
- 명사 방효유전

물론 위의 사료를 참고하면 위에도 나와있듯이 요동군이 건문제의 명을 받들어 연의 후방을 치려다 패하기도 한걸 보면 평상시보단 수월하게 요동을 점령했을 가능성은 높긴 했다. 왜냐하면 연왕에게 패배하면서 줄어든 병력과 연왕측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요동군의 모든 신경은 연왕측을 경계 감시하는데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습적인 조선군의 요동군 후방 공격은 분명 조선군에게는 굉장히 유리한 부분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군이 20만이라고 해서 20만을 모두 투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숫자만 가지고 따지는 건 전형적인 초보자의 셈법이다. 전기 조선의 인구는 최대 750만 정도로 추정하는데#, 위에서 제시한 20만은 아무리 잘 쳐줘도 전 인구의 3%에 육박한다. 물론 고려가 기록상 17만(심지어는 30만이라고도 하는)에 달하는 별무반을 운용한 적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2~3년쯤 굴리다가 결국은 못해먹겠다고 때려치고 9성 전체를 여진족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끝났을 정도다. 요동 원정은 9성 개척과는 비교가 안되는 난이도인데다가 고려의 국력이 최고조였던 1100년대 초와는 달리 14세기 말 조선은 14세기 내내 개판이 난 고려 체제를 수습하기에도 정신이 없던 시절이다. 애초에 저 기록은 '군적'의 숫자가 실제와 일치하는지를 파악한 것이지 실제 복무중인 인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군복무제도가 기본적으로 번상병이었음을 감안하면 실제 현역으로 복무하는 인원은 당연히 이보다 훨씬 적다.

숫자놀음을 할거라면 고려 역시 1362년 개경 수복전 당시에 실병력 20만을 동원해봤지만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제2차 요동정벌 때에는 고작 4만을 출병시키는 데 그쳤다. 방어전이면 모를까 공자(攻者)인 입장에서는 기동력과 전투력을 갖추지 못한 채 숫자만 채우는 어중이떠중이 보병은 고기방패로도 못 써먹는 식충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장 위의 장계에서도 보이듯이 왜구의 위협은 여전했기 때문에 삼남의 병력은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올려보내려면 막대한 비용을 감내해야 하는데 요동 정벌하다가 국가가 파산이나 안 하면 다행인 상황이다. 조선의 군비가 최고조에 달했던 세종 시기 전마 확보량은 4만필 정도였고 성종 시기에는 3만필 미만으로 떨어졌으니 건문 연간에도 조선군 기병전력이 3만을 넘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나마도 동북과 삼남, 도성 방위를 고려하면 조선이 요동에 투입 가능한 기병 전력은 잘해야 2만 정도인데 이는 군마 2만여필을 동원한 제2차 요동정벌과 비교해도 그다지 낫다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요동군이 아무리 연과의 교전에서 상당수의 병력을 상실한다 한들 조선군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닐 뿐더러, 아예 요동군이 연 공격을 포기하고 조선군과의 교전에 올인한다면 이 때는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애초에 이 정도 군세가 움직이면 그건 기습도 뭣도 아닐 뿐더러,[21] 실제로도 요동군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투입을 미루다가 연군의 마지막 한방러시때에서야 부랴부랴 호출되었다.

6. 요동 통치 가능성

6.1. 가능하다

요동정벌은 어찌어찌 쥐어짜서 실행한다고 쳐도 문제가 여진족을 어떻게 포섭하고 통치하느냐의 문제가 있었다. 완전한 정주민인 조선이 반농반유목 성향의 수렵채집인에 오랑캐인 여진족을 어떻게 회유하고 통치할 수 있을까? 조선이 내내 여진족의 귀화를 장려하고 벼슬을 내리는 등 회유를 했지만 결국은 여진족은 조선 변경의 위협으로 존재하며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그 광대한 영역의 여진족 통치의 가능성이 있는가? 일단 이 지역에 명의 통치가 들어섰다는 점에서 명과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여진족은 직할통치가 아니라 자치를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고 홍무제 때는 통치 정비도 덜 되었고 여진족에 대한 본격적인 회유가 있지 않았다. 그 틈을 노리고 여진족에 대한 헤게모니를 선점해서 만주 일대에 지배력을 두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건 여진족의 향방인데 힘들게 땅따먹기 할 필요없이 원정이라는 형태로 무력 시위를 겸하면서 여진족의 복종을 받아내면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방식으로 명과 직접 충돌은 피하면서 여진족만 끌어들이면서 명의 지배력 약화를 노리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 경우 가능성이 있는데 이성계가 가지는 여진족 내 위상이었다. 이성계의 기반인 동북면-동만주 일대에서 적지 않은 여진족 세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고 그중에는 누르하치의 조상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있었다. 동만주에서 이성계의 위상은 단순한 윗사람이 아니라 여진족의 지배자 수준이었다. 비록 만주 전역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이성계에게 충성하는 동만주 여진족을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여진족을 회유한다면서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일이었다. 다른 여진족 입장에는 조선의 왕 이성계는 남이지만 동만주 여진족의 대추장 겸 조선왕 이성계라면 말이 달라진다. 거기다 이성계는 여진족을 이미 무력으로 제압했으며 군사적 경력도 화려한 인물로 여진족의 복종을 받아내기에 적당했다. 당이 북방 유목민에게는 천가한(카칸) 작위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 비슷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22]

무엇보다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다. 아무 것도 없이 군사적 위용만 있다면 약탈 외 줄게 없지만 이성계는 조선의 생산물을 여진족에게 합법적으로 줄 수 있었다. 만주의 빈약한 생산력 때문에 여진족이 반농반목을 하면서 수시로 조선 땅을 약탈했고 나하추도 경제적 문제로 고려에게 지원을 받으려했고 결국은 식량 부족으로 명에게 투항했다. 훗날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해서 금을 세울 수 있던 원동력도 명과 교역으로 얻어진 부 덕분이었다.[23] 여진족 사이에서 높은 명성과 조선의 부를 결합한다면 영향력 확대는 가능했다. 동만주 여진족을 지원해서 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여진을 포섭하거나 반항하면 때려잡으면 되니까. 결국은 누가 먼저 회유하고 유지하느냐의 문제였고 이성계는 분명히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엄청난 비용을 들이면서 장기 주둔할 필요도 없고 방어를 위해서 군대를 따로 쓰는 대신에 회유한 여진족을 번병으로 삼으면서 명을 견제가 가능하다. 이렇게 하면 단기 원정으로 끝내고 왜구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밑작업만 해놓으면 여진족을 통해서 통치와 확대가 가능했다.

여진족은 조선에 비하면 반유목민답게 전투력은 강했지만 통일되지 못한 상황과 경제적 빈곤으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만일 성공만 한다면 조선국왕을 중심으로 통일되고 조선의 부로 무장하고 배부른 강력한 여진족 군대를 보유할 수 있다. 중국 왕조에게 악몽같은 고구려의 재현이나 다름없었다.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전쟁을 한다고 쳐도 만주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여진족의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한반도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홍무제도 알았지만 한반도에 발 들인 국가치고 재미본 국가가 없었다. 홍무제 본인부터 전쟁반대에 조선은 정벌하지 말라고 유훈까지 남겼다.

조선의 개입으로 정난의 변 자체가 훨씬 더 장기화되어서 명나라가 북명과 남명으로 아예 분단되거나 영락제가 아닌 훨씬 더 온순한 성격의 건문제가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되었다면 그 이후의 전개는 조선에게 훨씬 더 유리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정도전남은 일파를 지지하는 측은 이들이 요동정벌을 구상하게 된건 명과 잘 지내려 하는데도 지나친 의심증으로 어그로를 끈 주원장의 태도 때문이며[24], 가능성 역시 주체가 결국 내전에서 승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먼저 전제로 깔아놓고 내린 결론일 뿐으로 만약 정난의 변 당시 조선이 연왕의 뒤통수를 갈기는 식으로 양측의 전력을 엇비슷하게 유지시키는 쪽으로 지속적으로 중원의 정세에 깊숙히 개입했다면은 명의 내전은 훨씬 더 오래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중국 대륙의 판도 역시 조선의 개입으로 여러 변수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의 개입으로 중원이 '북명'과 '남명'으로 영구 분단되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가능성을 말하자면 조선이 명나라 건문제의 편을 확고히 들어 요동을 받는 댓가로 연왕측의 후방을 공격하여 연왕 세력들을 건문제의 명나라와 함께 협공으로 완전히 멸망시키거나 혹은 건문제와 내전중인 연왕측과 강화를 맺어 결론적으로 중원세력으로부터 요동을 완전히 할양받는 그런 시나리오들도 예상해 볼 수 있겠다.

평야가 대부분인 만주 지역보다도 훨씬 더 척박한 함경북도에서도 조선은 수백년간 어떻게든 농사를 짓고 계속 유지했다는 점과 성종 시절에 만주 지역의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인 '여자신'이 조정에 직접 와서 성종에게 야춘(현재 연변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의 방천지역)과 훈춘(현재 훈춘시의 도심지역)을 위시로 한 남만주(지금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해당) 지역 일대에 대한 개척을 주장하여[25] 이에 성종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여자신과 성준 등에게 명해 연변 일대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장성들을 조사하게 하고 동시에 장성 축조 사업 또한 시작하게 했던 사실들을 미루어봤을때 만주가 계속 척박한 지역으로만 남아있을 가능성도 매우 낮다라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여진족들도 만주에서 농사를 짓고 호수와 강에서 수산물들을 잡아서 인구를 늘렸으며 규모가 컸던 여진족들의 위세는 전부 만주에서의 농사를 통한 인구 증가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봤을때 조선이 만주의 넓은 평야지역들을 계속 방치하여 척박한 지역으로만 계속 남겨두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라고 볼 수 있으며 어떻게든 농사를 짓고 개척을 하였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조선의 통치는 세종 시기에나 완성이 되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여진족이 조선에 계속 충성을 바치기를 기대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는 추정도 가능은 하기는 하다. 즉, 아직 한반도에 대한 통치도 완전하게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리한 요동 정복 이후 혹여라도 여진족에 대한 통제에 실패한다면 조선의 하사품과 교역으로 부를 쌓은 여진족의 부흥이 수백년은 더 앞당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문제는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그 반대의 추정도 당연하지만 가능하다는데 있다. 이성계가 계속 왕위를 유지하면서 요동과 만주에 대한 정벌에 성공하고 거기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진족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 또한 1차 왕자의 난이 없을테니 무난하게 후대에 물려주었을테고 무엇보다 만주로 수 많은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전가사변 시켜서 계속 이주시켜 보낸다면 인구수에서 소수인 여진족들은 조선인들에게 빠르게 동화되어서 흡수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만주 통치의 부담은 확연하게 줄어들면서 반대로 확고한 만주 지배는 거의 완성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요동정벌 이후의 나비효과와 그 이후의 역사의 전개는 사실상 어느쪽으로 추정하느냐에 따라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밖에는 추정 할 수 없는 것이다.

6.2. 불가능하다

고령의 이성계가 어떻게든 여진족을 회유하고 동만주는 확실히 먹고 들어간다고 쳐도 그 다음 문제는 명과 만주 지역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떻게든 외교적으로 지배를 인정받는 게 최상이지만 홍무제 성격상 어림도 없었고,[26] 홍무제가 요동정벌 준비 중에 죽었으니 그 틈을 노리고 어찌해서 황손 건문제의 즉위와 이후 정난의 변이라는 명나라가 역대급 내전에 휩싸인 틈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요동을 정복하고 요동에 영역 다지기를 하려고 한다고 쳐도 고작 4년이었다. 영락제가 결국 정난의 변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면 그 다음 통일 명나라의 황제는 영락제가 되게 된다. 알다시피 영락제는 확장에 소극적인 홍무제와 달리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펼치고 몽골은 물론 저 남쪽 끝의 베트남까지 멸망시켜 명의 직할령으로 편입했을 정도의 호전적인 정복 군주였었다. 영락제의 친정으로 몽골 세력은 약해져서 조선이 동맹을 구할 길은 더 요원해지고 그렇다고 몽골과 손잡고 명을 칠 수도 없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정난의 변 이후 영락제는 자기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를 하는데, 이로써 요동과 만주는 단순한 명의 변방이 아니라 수도 방위 및 안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지역이 된다.[27] 수도가 남경일 때야 중심지와 한참 떨어진 변경이니 명의 제후국을 차처하는 조선은 과거 고구려와 달리 적당히 합의할 가능성이 있지만 수도가 북경이 돼버리면 말이 달라진다. 실제 역사에서도 영락제는 만주 여진족을 회유하고 만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이는 더 '온건한' 성향의 건문제가 승리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조선의 요동통치를 인정하는 것은 곧 추후 타 이민족이 명의 영토를 침탈해도 이를 인정 내지 묵인할 빌미를 주는 일이다. 당장 몽골이 언제 장성을 돌파해 화북을 침공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조선의 요동 통치는 장기적으로 몽골-조선의 동맹이 구축되어 화북이 휩쓸릴 가능성으로 이어진다.[28] 연운 16주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뻔히 아는 명의 입장에서 단지 황제 한 사람의 성향만으로 이 문제를 간단히 뒤엎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신하들이 매국노 황제를 폐위 내지 유폐해버리고 황태자나 다른 황손을 옹립할 가능성이 백만배는 높다. 조선처럼 힘들게 군대를 파견할 것도 없이 그냥 돈으로 쳐바르면서 현지 여진족들을 회유해버려도 된다. 당연히 명은 조선보다 수백배는 부유한 국가인데 돈빨로 경쟁이 붙으면 이성계의 오랜 영역이고 명과 거리가 있으며 실제로도 명나라가 영향력을 확고히 가진적이 한번도 없던 동만주는 건진다 하더라도 조선의 영역이 된지 얼마되지 않은 나머지 지역들은 못 지킬 확률이 높다. 게다가 동만주를 어찌 건진다 한들 당장 몇십년 뒤에 설치된 평안도 4군조차 유지가 어려워 폐4군이 된 마당에[29] 그보다 훨씬 거리가 멀고 접근성도 좋지 않은 동만주를 조선이 유지할 여력이 있는지도 문제다. 명조차도 북경으로 천도하고 나서도 요동 바깥 지역은 직접 통치를 못하고 여진 부족들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하물며 조선이 이 지역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지 의문으로 게다가 건문제가 승리해서 이후 영락제의 대원정같은 데 돈을 퍼붓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이 어설프게 요동까지 치고 올라왔다면 이 자금력으로 뭘 할지는 뻔한 일이다.

남명과 북명의 분할은 서로 다른 가문이 할거하는 것도 아니고 통일제국의 가문 내 내전이 분단이라는 형태로 종결된 사례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야 말 할 것도 없고 반란군 역시 통일제국의 정권이 목표지 애매한 할거정권 따위가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분단각을 잡으려면 어느정도의 영역은 확보를 해야 하는데 정난의 변 내내 주체는 보통 남북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회수는 고사하고 황하나 대운하 근처도 못가본 채 3년 내내 좁은 연국 3부 내에서만 죽어라 싸우다가 한방러시로 승리했을 뿐이다. 차라리 건문제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지 연국 3부만으로 분단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게다가 이미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을 압살한지가 한세기가 넘고 주체가 등 뒤의 몽골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라 할거정권으로 가봤자 결론은 뻔하다. 그렇다고 이제 막 요동을 점령하고 인적 물적 피해를 수습하기도 바쁜 조선이 요하를 건너 중원까지 10만의 병력을 지원해줄 능력은 더더욱 없다.

이런 상황까지 어떻게 다 타파하고 헤게모니를 유지한다고 쳐도 조선이 만주를 제대로 지배할 수 있느가에 대한 문제도 고민해 볼 필요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이성계는 태종 이방원의 쿠데타인 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빼앗기고 유폐되었고 나중에 자기 기반인 동북면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 와중에 이성계 개인에게 충성하는 여진족 세력은 조선에서 상당수 떨어져 나갔고 그렇게 조선은 동만주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럼 만약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아서 이성계가 3차 요동 정벌을 성공시킨다면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데 이렇게 되면 이성계의 후계자는 이방석이고, 그는 동북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곡산 강씨 귀족집안의 외손이다. 그를 보좌할 이들 역시 조준 같은 개경 중앙 권문세족 출신이든 정도전 같은 지방 향리 출신이든 간에 동북면과는 별 접점이 없는데 이성계의 사후 이들이 여진족을 제대로 통제할만한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명백한 동북면 출신인 태종대만 가도 이성계가 죽자마자 곧바로 여진인들이 대놓고 분탕을 쳐대는 통에 목조 이안사의 묘를 함흥으로 옮기기까지 하면서 경원부를 경성으로 후퇴시켜야 했으며 세종대에는 조정에서 아예 경원부를 용성(함흥시 룡성구역 일대)까지 후퇴시키자고 할 정도였다. 조선과 여진의 연계성은 어디까지나 이성계라는 한 개인의 초월적인 무용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조사의의 난이 터지고 말고와는 상관 없이 그저 이성계의 수명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날수밖에 없는 구조다. 혹 만에하나 가별초를 이끄는 이방과가 이성계 수준의 무공을 보여주며 그 영향력을 이어간다면 또 모를까. 게다가 이성계가 계속해서 막내의 승계 문제와 요동정벌 등을 챙기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낸다면 이성계의 죽음과 여진족의 분탕은 더 일찍 터질 가능성이 높다.

설령 천만다행으로 명과의 군사적 대립은 어떻게 해결해서 군사비를 줄인다 해도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나지도 않는다. 요동을 지배한다면 빈곤한 만주 지역을 한반도가 먹여살려야 한다.[30] 조선 백성인데 여진족을 오랑캐 취급하면서 냅둘 수는 없고 통치 체계도 세우고 관료제에 여진족도 편입하고 해야 하는데 이게 다 돈이다.[31] 거기다 식량이 부족하면 식량도 공급해주어야 한다. 더군다나 당시 여진족들은 이러한 척박한 환경 때문에 제한적인 원시 농업이었던데다 조선이나 중국에 비하면 덜 발전되었다. 여진족의 본격적 농업은 청나라 건국 이후였다. 빈약한 만주 농업을 고려하면 거의 매년 식량이 들어가야 하는데 한반도도 식량이 썩어넘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태종이 죽을 때 태종우 고사나 태종이 곡식을 먹어치는 메뚜기를 먹어서 사라지기 원했다는 야사는 둘째치고, 세종조에 가면 유민 진휼이 큰 문제가 되고 사람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실록에까지 실릴 정도로 조선도 수많은 재해 상황에서 기근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서 물자를 받지 못하게 되면 여진족의 충성심도 급격하게 약화된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여진족을 통치하다가는 조선이 먼저 나가떨어진다. 명나라야 덩치가 워낙 크니 여진족에 돈을 퍼부어도 끄떡없지만 명나라보다 인구가 1/20도 안되는 조선이[32] 그 부담을 짊어진다는건 실질적 부담이 20배 이상이라는 소리다.[33]

농사를 짓고 개척을 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당장 평안도 4군은 설치 20여년만에 폐군되어 복설에 무려 200년이 걸렸고, 6진은 청 건국까지 수백년간 조선의 최전선으로 침공에 시달리다가 가혹한 방위 부담과 수탈 등으로 몇번이나 반란이 일어났다. 아무리 개척을 해도 기후나 토질의 문제는 근대 화학비료의 발명 이전까지는 답이 없다. 척박한 만주땅에서 그나마 농사를 지을만한 감자, 옥수수 등의 작물은 이로부터 200년이 지나야 본격적으로 도입된다. 오늘날 동북3성 지역 농업의 절반 이상을 옥수수와 밀이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 동북3성의 쌀농사는 주로 하얼빈 옆 우창이나 무단장 인근지역에서 짓는데 압록-두만강 연선도 아니고 이 지역을 농경지로 개척하려면 하세월이다. 그 와중에 개간지를 둘러싸고 여진족을 비롯한 현지 원주민과 충돌이라도 일어나면 이것도 견적이 안나오는 노릇이다. 이쪽동네 원주민과의 충돌은 어디 동남아권 부족민과의 충돌과는 궤를 달리하는 문제다.

흔히 '요동'이라 부르는 남만주 지역은 드넓은 평야가 아니라 휴대폰 전파도 안 잡히는 장백산맥의 첩첩산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넓은 벌판은 그 산맥을 뚫고 요하에 거의 다다라서나 나타나고 본격적인 벌판은 요하를 넘어서서야 볼 수 있는데, 요하를 넘어서는 건 언감생심이고 아니면 이 산투성이 땅 깔고 앉아서 얼마 되지도 않는 농업생산물로 서쪽의 요하 방어선을 힘겹게 지키며 등 뒤의 여진족을 통제해야 한다. 당장 한국인들의 영원한 워너비인 고구려와 발해도 물길, 거란, 흑수말갈 등의 이민족을 통제하는데 그렇게 애를 먹었고, 한반도보다 몇배는 풍요로운 북중국을 뭉텅 차지했던 금나라조차 몽골고원의 통제에 실패하고 대재앙을 맞이한 마당에 조선이 이걸 성공한다는 것은 기적을 넘어서서 그냥 공상의 영역이다.[34]

7. 번외: 조선과 명의 결혼동맹 논의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성계주원장이 서로 사돈을 맺을뻔한 적도 있었다는 사실인데, 잘 안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양국간에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 ~ 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라고 한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사돈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실록 9권,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 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허나 결국 혼인은 파투가 났다.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진지하게 혼담이 오가며 서로 잘 풀리는 듯 싶었으나 갑자기 1397년 4월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내온 물건에 흠이 있다니 짐의 성의에 거짓으로 응답한다면서 혼인은 없던 일로 하자는 공문을 보낸다.
"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이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혼담이 완전히 파투난 직후 조선에서는 1397년 6월부터 요동정벌 논의가 본격화된다. 그리고 조준이 이를 반대하자 남은이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비꼬는 일도 일어난다.

만약 실제로 저때 조선과 명의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그 이후의 나비효과가 대단히 흥미진진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만약 1397년 혼인이 성사되었다면 주원장은 1398년 6월 사망하는데 직후 1차 왕자의 난정난의 변 등 역사적 격동이 연달아 벌어지기 때문. 처갓집이 명나라 황실이 되면 당시 세자 이방석의 위상은 엄청 높아졌을테고, 요동정벌로 명나라랑 척지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요동정벌은 중단되고, 이를 빌미로 일어난 1차 왕자의 난도 시행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이방석이 주원장의 부마가 된 만큼 이방원이 섯불리 해를 가하지도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후계구도도 지금의 역사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다만 이렇게 명나라 황실과 환인관계로 연결 된다면 정난의 변 당시 조선의 입장도 난처해질 수도 있다. 일단 주원장이 주선하는 만큼 당연히 손자 건문제에 가까운 혈족을 조선 세자와 맺어줬을테고, 그렇다면 조선은 건문제 편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대로 연왕(燕王) 주체의 정난군이 승리하고 건문제가 실각했다면 조선은 상당히 난처해진다. 영락제는 자신의 텃밭인 연경, 현 북경 일대로 천도를 했다. 만약의 영역이지만 조선이 북경과 지척에 있는 만큼 도읍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영락제가 조선 정벌을 시도한다면 조선은 크게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건문제 세력이 승리한다는 쪽으로 가정하면 건문제의 요구로 조선이 연왕 세력을 공격하여 승리에 기여한다면 그 대가로 요동이나 만주를 명나라로부터 선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거의 행복회로에 가까운 주장도 있다.[35] 다른 방식으로 요동을 확보하였을지도 모른다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8. 대중매체에서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후 모든 사극을 통틀어 가장 세밀하고도 구체적으로 나오며 작중에서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된다. 요동정벌을 계획하면서 자연스레 정도전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권력의 집중이 시작되었고 그 연쇄 작용으로 정도전이 초기부터 밀어붙여왔던 대명 강경책, 사병 혁파, 제후국의 형식을 따른 대군들의 지방 분포 계획들이 마치 왕권과 왕족의 권위를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36]

이에 대군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갔고 이지란 역시 그에 대해서 과하다고 생각해 불만을 표할 정도로 모든 신하와 왕족들과 요동정벌 중심 관료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어 갔으며 이성계가 주도했던 한양 천도와 명나라에 대한 대응 거기에다가 전쟁 준비와 병사 훈련등까지 해야하는 백성들도 그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하자 이성계마저도 고민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도전은 이에 고민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점점 강압적으로 그에 대하다가 결국 파멸하는 원흉이 되었다.

위의 내용들은 정도전이 요동과 만주까지 가서 그 주변 지형을 관찰하면서 언급되는데 "명나라의 영향력은 약하며 조선의 병력들은 동북면 병력을 위주로 오랜 시간 동안 배운 실전형 병사들과 장수들이 많으며 이성계와 이지란같은 명장과 더불어 요동의 여진족들을 통제하고 호령할 수 있는 이들도 있기에 요동 벌판을 우리가 가져갈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려 이지란이 그에 대해서 "현 조선은 단결되지 못하고 왕의 의지가 약해졌으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조선 외부의 여진족들의 충성심도 예전과 다른 문제도 있다."를 정도전이 보는 시점이 아닌 여진과 다른 시점에서 냉철하게 언급하며 "요동정벌은 어려울 것이 명백하다"고 작게나마 설명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언급되는 계획으로서 <용의 눈물>보다도 그 화가 짧다보니 급하게 진행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성계가 동의하고 정도전이 강압적으로 행하는 모습과 그 사이에서 이방원 등과 너무 크게 대립하는 중요한 부분을 묘사했고 이후에 파멸하는 원흉으로 드러나는 것은 동일하다.


[1] 표문(表文).[2] 희롱하고 업신여김.[3] 개성과 한양.[4] 실제로는 이성계가 조준의 말을 따르지 않았는데 태종1차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이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기록을 일부러 남겼다는 의견도 있다.[5] 당시 조선은 고려말부터 시작된 홍건적의 침입, 왜구와의 전쟁 등으로 국방력이 소진 된 상태라 국방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이었지 타국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력 강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홍무제가 갑작스런 의심병으로 긴장을 유발시켰기 때문에 일종의 선제적 대응으로서 요동정벌에 대한 논의가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6] 설령 진짜로 출병할 준비를 마쳤더라도 군사력을 회복했으니 진짜로 전면전을 벌이기보단 명나라일지라도 조선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강력한 메세지를 주기 위한 의도로 군사력 과시를 했을 것이다. 또 홍무제의 진짜 의도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조선의 '블러핑'이 통했을 수도 있다.[7] 왕위를 승인하는 문서.[8] 도장.[9] 실제로 한창 표전문 논란이 진행되던 시기에 명나라 사신 유우가 이방원의 집에 와서 그에게 고두례(叩頭禮)를 행한 일이 있었다. 세자(이방석)이 멀쩡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외교관이 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은 명나라가 대놓고 세자 이방석이 아닌 정안군 이방원을 차기 권력자로 인정하겠다고 밝힌거나 다름없다.[10] 흥미로운 점은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와 전쟁할 때 오히려 수군 때문에 정말 큰일날 뻔했다. 수나라와 당나라 해군이 황해를 건너 비사성을 함락시키거나 평양성 코앞에 상륙하여 고구려를 위기로 내몰기도 했다. 오히려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의 청야전술과 휘하의 유목민족을 활용한 배후 공격에 고생을 했다.[11] 명나라가 당시 전쟁할 만한 상태는 아니였지만 수전에 익숙하다고 한 것은 블러핑이 아니였다. 실재로 홍무제의 아들대에서는 명나라가 20만대군으로 베트남 점령에 성공하고 20년동안이나 식민지배를 한다. 뭣보다 홍무제 자신부터가 파양호 대전이라는 수전을 이끈 바 있다. 물론 그래도 해전은 수전과 다르지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는 것.[12] 성질머리도 성질머리지만 잘 생각해보면 오히려 전쟁할 생각이 없으니까 저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짜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대놓고 '나 전쟁하고 싶다'고 해석될만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본인도 알듯 한반도는 단단히 준비하고 쳐들어가도 변변치않은 결과만 가져오는데 대놓고 전쟁하겠다고 보여서 대비할 틈을 줘버리면 애매한 성과는커녕 그냥 고수전쟁처럼 말아먹고 끝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전쟁은 안 일으키되 언제라도 전쟁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내놓는 게 최선. 당장에 대마도 정벌 이후 조선이 대마도에 이랬다. 당연히 진짜 대마도를 또 공격할 생각은 없지만 대마도가 딴마음 못 품게 협박한 것.[13] 이성계가 확실하게 밀어줬다는 증거자료는 없고, 단지 이성계의 행동을 보고 추측만 할 뿐이다.[14] 요동정벌을 주장하던 태조도 조준이 "큰 나라를 섬기는건 사대의 예이며(달리 말하면 집권의 정당성을 생각해보란 말이 된다.) 신생국으로서 명분없이 군사를 일으켜선 안되며(나라 안정이 시급한데 큰 군사를 일으키는건 무리라는 의미) 명나라는 당당하고 허점이 없으며(실제로 명나라는 당연히 조선보다 강국이었다.) 즉위 후 전하에 대한 칭송이 잠저때만 못합니다.(우왕,창왕,공양왕을 갈아치우고 최영 죽이고 정몽주 죽였으니 당연한 일)" 라고 하였고 여기에 김사형도 "각종 부역으로 백성이 지쳐서 안됩니다." 라고 하자 위축되었다. 비록 정도전의 열렬한 지지자인 남은이 조준, 김사형을 비웃었지만 명분상 반대론자가 우세했다.[15] 그렇다고 정도전의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열성적으로 요동정벌을 추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정도전과 함께 조준 김사형을 까고 다녔던 남은, 세자의 매형인 이제 등 친정도전파의 핵심 인사들마저 태조 7년 8월의 진도강습태만 처벌대상자 목록에 줄줄이 들어있다.#[16] 여기에 신생국의 왕으로서 친정은 위험천만하다. 왕씨 몰살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만일 태조가 전사하기라도 한다면 고려 복위를 꿈꾸는 이들의 음모도 신경써야 한다. 당장에 후삼국시대에만 해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전사할 뻔했지 않았던가.[17] 실제로는 개국공신이라 하여 휘하 사람에게 태형을 내렸다.[18] 더욱이 전쟁이 농한기에 끝난다는 보장도 없다. 사실 농한기라는게 보통 상강~청명 사이, 즉 11~3월 사이의 사실상 겨울철인데 당장 제2차 요동정벌만 해도 이성계는 정 갈거면 농한기에 출정하자고 주장했지만 이조차 씹히고 폭우로 활의 아교가 풀려버리는 장마철에 부득부득 출병했다.[19] 남옥(藍玉)만 하여도 남옥의 옥(藍玉案)으로 주원장 손에 죽었는데 이때 연루되어 죽은 자가 모두 1만 5천명이었을 정도로 그 숙청의 규모가 매우 컸었고 남옥이 무장 출신이었던 탓에 군부에서의 숙청도 대규모로 이루어졌었다.[20] 당시 명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장군인 남옥, 서달, 상우춘 등은 다들 주원장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陳友諒) 또는 원나라의 몽골군을 격파한 명장들이었고 그 외의 풍승, 목영, 탕화, 장옥 등을 보면 능력이 결코 부족하지 않은 장수들이었는데 주원장의 대규모 숙청의 영향과 기타 이유 등으로 3차 요동정벌 시기에 이들은 대부분 사망한 상태였었다.[21] 심지어 그 병자호란조차도 진군속도를 예측하지 못했을 뿐이지 침공 자체를 모르진 않았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조선군에게 그 정도의 기동성은 없다.[22] 이를 조금 쉽게 얘기하자면 동군연합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23] 반대로 그랬기에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한 후에는 그 교역이 다 끊어진 반면 요동에 있던 한족에 홍타이지 대에이르면 서쪽의 몽골까지 정벌하여 병자호란 직전의 시기에 청나라는 심각한 물자 위기를 겪어야 했다.[24] 당시 표전문 사건 관련해 명에 파견된 조선 사신 김약항 등이 죽임을 당하는데(참수설과 귀양 병사설이 있다), 타국의 사신을 함부로 죽인다는건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다.[25] 절도사 여자신은 혼춘 지역을 점령하면 주변의 여진족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여진족의 발흥 자체를 아예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혼춘 일대에는 야춘해와 근접해 해산물 또한 풍부했고, 거기다 농경지로 쓸 만한 평평하고 넓고 기름진 토지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안보와 경제적 이점 이 2가지의 측면에서 혼춘 개척을 주장한 것이었다.[26] 성격도 성격이려니와 이러면 거의 고구려의 재림이다.[27] 임진왜란때 파병한 이유 중 하나도 조선이 일본에 먹히면 우리 앞마당인 요동도 위험해진다는 논리였다.[28] 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명은 영락 연간 내내 지속적인 막북친정으로 몽골이 때마다 본거지를 비우고 이동하게 만들고, 북경에서 상대적으로 먼 서몽골의 오이라트를 지원하여 동서몽골의 분열을 획책했다. 이렇게 해도 결국 영락제의 증손자인 정통제 대에 가면 몽골은 그 명의 지원을 받은 오이라트에 의해 통일되고 북경이 공격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29] 심지어 당시 조선은 딱히 국력이 피폐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애써 개척해 놓은 영토의 유지가 어려울 정도 였던 것. 물론 그 4군의 위치가 한반도에서 가장 춥고 척박한 곳중 하나라는 것도 이유[30] 남북국시대에도 발해의 맥힐이 주요 쌀 산지였을 만큼 만주의 생산력은 괜찮았지만 그 이후로는 한랭화되어 조선 전부터 만주땅은 생산력이 바닥이었다.[31] 조선은 각 도 소재지의 부윤, 목사직도 돈 아깝다고 감사에게 겸임시켜버리고 아전들은 아예 무보수로 굴려먹던 나라다. 요동 통치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32] 훨씬 이후인 건륭제 말, 중국 인구는 4억명이었는데 조선은 그 시기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구한말에도 인구가 2천만 수준이었다.[33] 한 마디로 한명당 짋어지는 부담이 20배 이상이라는 소리다. 그나마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조선이 월등히 대단하면 모르겠지만 그나마 명나라하고 비슷한 비율이 되려면 20배 가까운 생산량을 보여야 하는데 중국은 이미 송나라 시절 강남지역의 개발이 잘 되어 북송 시절 거란과 서하 양국에게 삥뜯김에도 송나라가 어떻게든 지탱되게 해줄 정도인데 그 생산량을 조선이 어떻게 따라잡을지도 의문이고 게다가 그 강남은 조선보다 위도도 낮아 농사가 더 잘된다.[34] 사실 좀 더 강하게 말해서, 중국의 정권이 당대 명나라보다 훨씬 더 위태롭고 사분오열되어 있던 시기에, 당시 조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강성하여 전 지구적으로 손에 꼽히는 군사 대국조차도 요동을 넘어서는 순간 국가 역량이 과부하로 터져 패망하는 엔딩을 맞은 사례가 있다. 바로 중일전쟁이다.[35] 실제 원 간섭기 시절 부마국이 된 고려왕이 심왕(심양왕)을 겸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이땐 사실상 명예직이긴 했다만.[36] 이성계가 동의했지만 비밀리에 하다보니 대부분이 정도전의 계획으로만 보았던게 많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