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의 이복동생이자 본 항목 인물의 숙부에 대한 내용은 의안대군(이화) 문서
, 조선 선조의 서3남에 대한 내용은 의안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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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 |||
의안대군묘 전경 | |||
출생 | 1382년[1] | ||
개경 신덕왕후 사저 (現 북한 개성시) | |||
사망 | 1398년 10월 14일[2] (향년 16세) | ||
한성부 경복궁 영추문 밖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
능묘 | 의안대군묘(宜安大君墓)[3] | ||
재위기간 | 조선 왕세자 | ||
1392년 9월 15일 ~ 1398년 10월 14일[4]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방석(芳碩) | ||
부모 |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신덕고황후 | ||
형제자매 | 부황 기준 8남 5녀 중 8남 모후 기준 2남 1녀 중 차남 | ||
배우자 | 현빈 류씨[5], 현빈 심씨 |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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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 | 왕세자(王世子) → 의안대군(宜安大君) | ||
시호 | 소도군(昭悼君)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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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8남.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다. 조선의 초대 왕세자이지만,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목숨까지 잃었다. 즉, 조선 최초의 왕세자이자 최초의 폐세자.2. 형제
동복 형제로 누나인 경순공주와 형인 무안대군(이방번)이 있으며, 이복 형제로 진안대군(이방우), 영안군(이방과, 후의 정종), 익안대군(이방의), 회안대군(이방간), 정안군(이방원, 후의 태종), 덕안대군(이방연) 등 이렇게 6명의 형이 있다.[6]3. 생애
6살이던 1388년(우왕 14) 음력 5월 22일 아버지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문하시중 최영은 이성계를 비롯하여 반란에 동조한 장수들의 가족을 사로잡으려고 했으나 오늘날의 중앙부처 실무 담당인 전리정랑이던 이복형 이방원이 계모와 이방석, 이방번 등을 비롯한 가족들을 피신시켜 겨우 위험에서 벗어났다.[7] 이 때까지는 분명 이방원을 비롯한 이복형들과 사이가 나쁘다고 할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훗날의 일을 생각하면 참 얄밉고 짓궂은 운명이다. 그리고 반란에 성공해 고려 조정 실권을 장악하고 몇 차례 왕을 갈아치우며 정적들을 모두 몰아낸 아버지 이성계가 1392년(태조 즉위년) 7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시켜 결국 고려는 멸망했고 이어서 조선을 건국하며 자연스럽게 왕자로 신분이 상승한다.여기까지만이면 태조의 막내왕자로서 그냥 무난하게 왕족으로 지낼 수 있었겠지만 조선 개국 1달여 만인 8월에 불과 10살의 나이로 신덕왕후의 욕심과 태조의 입김에 따라 장성하고 쟁쟁한 형들을 죄다 밀쳐내고 왕세자가 되는데 이는 훗날 1차 왕자의 난의 계기가 된다.
본디 개국공신들은 유학자들답게 적장자 계승이나 공이 있는 사람을 세자로 올리기를 원했으며, 적장자인 이방우나 공이 가장 큰 이방원이 있었기에 두 사람 중 한 명이 될 처지였다. 그러나 이방우가 술병으로 사망하면서 둘째인 이방과가 그 뒤를 이을 듯 했으나 무예를 좋아하고 실제로 전공이 가장 컸던 이방과는 개국 초기의 유교국가인 조선과는 맞지 않다는 결론[8]으로 인해 세자책봉에 어려움을 겪는 와중 태조가 이방번을 밀었고 결국 그의 형인 이방번이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공신들인 배극렴, 조준, 정도전 세 사람이 "방번은 성격이 더러워서 안 된다"고 간하여 태조가 이방석으로 교체시킨 것이다. 물론 성격 문제는 핑계였고 실제로는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껄끄러운 이유가 있었는데 이방번은 태조가 죽인 공양왕의 조카 사위이기에 이방번이 세자가 됐다가는 공양왕의 형이 조선의 국구(임금의 장인)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기에 그는 자질과 상관없이 세자가 될 수 없었다.[9] 앞뒤 생각 하지않고 이방번을 그냥 이혼시키면 되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단지 사랑하는 계비 신덕왕후 소생을 세자로 삼고 싶었던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는데 정양군 왕우는 태조가 고려 왕실의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왕씨 몰살 가운데서도 끝까지 중앙에 남겨둔 인물이다. 왕씨 남성 130여 명을 제거한 것은 본뜻이 아니었고 불가항력에도 제사를 받들 이를 남겨두었다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밀접하게 이어진 존재였다. 태조와 신덕왕후의 신변에 이상이 없는 동안에는 왕과 왕비의 아들인 이방석의 권위 유지에 큰 문제가 없으며 권위 유지에 유리한 후계자는 곧 태조 자신의 권위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1391년에 이미 사망한 한씨는 건국 후 절비(節妃)라는 시호를 받아 어느 정도 예우되기는 하였으나 당시 신덕왕후가 있기에 제대로 된 왕비로서는 대우받지는 못했다. 죽은 그녀의 권위가 조선의 첫번째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1393년 한씨의 3년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 부인들이 신덕왕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10]에서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11] 왕조 국가에서 세자가 왕의 아들인건 너무 당연한거고 그 다음에는 어머니가 누구인가인데 당연히 왕비의 아들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태종이 정권을 잡은 내내 이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조치를 취했다는 점을 들어 이방석의 정통성이 낮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방석 제거 명분으로 적장자 계승을 내세운 태종은 이 명분 때문에 정종과 정안왕후의 아들이 되는 무리수를 감내해야 했다는 것이다.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선 후궁 출신인 성비 원씨를 모친(이성계의 부인)으로 대우하며 극진히 모심으로서 조선의 첫 대비이자 명목상 어머니였던 정안왕후의 위상을 무너뜨렸고, 신덕왕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태종은 자신의 친모인 한씨를 신의왕후로 추증해 신덕왕후를 대체할 권위의 매개체로 삼았다. 정말로 어린 아이를 억지로 세자에 앉힌 명분없고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면 형과 형수의 아들로 즉위했다가 형 부부의 권위를 깎아내린 다음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고 수 년에 걸쳐 지난한 공작을 벌이며 명분을 다질 이유가 없었고, 신덕왕후를 총애해서, 권신 정도전이 영합해서, 적장자 계승 이런거 전부 정종과 태종이 만들어내고 조선 후기를 거쳐 가공된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방번은 그의 혼인관계 때문에 선택받을 수 없다는 데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이상 제끼고, 나머지 이방원, 이방석, 이성계 이름 다 지우고 보면 왕과 왕비의 아들이 왕세자가 된 일반적인 계승일 뿐이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1차 왕자의 난은 본질적으로 창업군주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내세워 철권통치한 태조가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소수의 공신들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실시한 강도 높은 개혁시도에 반발한 고려 구세력, 권력 핵심에서 소외된 온건 개혁파, 자기몫을 빼았긴다고 생각한 무장세력들이 신의왕후 소생들과 손잡고 뒤집어 엎은 사건이지 단순히 후계자 선정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전국의 모든 사대부들에게 공평한 문을 열어준다로 요약할 수 있는 정도전의 개혁, 이를 지지하는 태조가 그들에게 밀어준 권력에 대한 불만이 본질이었다. 세자책봉 문제는 신의왕후 소생들이 난에 가담한 이유는 되어도 난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이방석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한 각종 무리수와 억지는 훨씬 심해서 태종의 신덕왕후 격하따위는 갖다 댈 게 못 되는 수준이라는 것이며, 둘째로 정통성과 크게 관련 없는 문제까지 정통성 강화를 위한 조치로 무리하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당장 태조의 명백한 정처인 신의왕후에 대한 추증은 애초에 당연히 이뤄졌어야 할 정상적인 조치였지 이걸 태조 재위 내내 절비의 시호로 퉁친 것부터가 비정상 그 자체였고, 부마 흥안군 이제와 의안백 이화, 태조의 의형제 이지란 등이 줄줄이 공신책봉을 받는 와중에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이 싸그리 공신록에서 빠진 것은 대놓고 숙청이나 마찬가지였다.[12] 신덕왕후의 묘인 정릉을 도성 안, 그것도 청계천 바로 남쪽에 박아버린 500년 내 초유의 사태로 오면 블랙코미디의 영역이었다. 거기다 왕자들을 분봉하겠다고 한 것, 다른 아들들의 사병은 뺏아가면서 이방번의 사병만은 남겨놓는다든지, 요동정벌에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데려가는 것 또한 비정상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하면 신덕왕후의 시호를 박탈한 것도 아니고 예우만 낮춘 것 정도는 그냥 정치적 보복 수준에서 정리될 문제지 딱히 정통성을 운운할 정도는 아니다. 태종이 정종의 '세자'가 된 것 역시 정종 본인의 입장에서도 이방원을 '적장자'로 삼아 자신의 서자들이 왕위계승 문제에 휘말릴 소지를 완전히 차단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단순히 이방원 측에서만 요했던 것이 아니다.[13]
당장 이것은 종법제에 위배되는 행동으로, 장자 상속을 기준으론 당연히 계승 최후순위고, 연장자 상속으로 기준으로도 당연히 최후순위다. 이성계가 만주와 함경도 변방에서 여진족 대빵 노릇을 했던 경험을 고려하면 유목민 문화에 흔한 말자 상속을 염두에 두고 이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으나, 말자 상속을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방석은 적자가 아닌 서자이기 때문에 계승 우선 순위에서 제일 뒤에 서게 된다.[14][15][16][17] 무언가 정말 압도적으로 특별한 명분이 없다면 이방석이 왕위를 적법하게 상속 받을 수 없는 것. 애초에 태조는 이방석도 아닌 이방번을 밀어주려 했었으니 말자 상속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게다가 말자 상속제는 형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챙겨 독립하고, 가진 게 없는 막내는 독립을 못하니 그 막내에게 아버지의 것을 물려주는 제도인데, 이방석이 세자가 되어버리면 이복 형들은 그냥 시체가 되는 상황이니 말자 상속이라 우길 명분도 없다.
1차 왕자의 난이 여러 공신집단, 구세력, 왕실 종친들의 광범위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과연 세자책봉은 별개의 문제인가? 바로 그 세자책봉이 이 어그로의 시작이었다.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깨버린 이상 4왕자, 심지어 이방번을 포함한 5왕자들은[18] 이방석과 공생, 공존할 방도가 없어진 것이고, 이는 곧 이들과 혼맥 학맥 관맥으로 엮여있는 무수한 공신, 사대부들의 안위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동북면에서부터 동고동락해온 4왕자들의 안위가 위험한 마당에 다른 왕실 종친들은 이 문제에서 손 놓고 관망만 할 수 있는가?
게다가 이방번과 이방석은 1381년생, 1382년생이라 조선이 세워질 때 겨우 10살쯤 밖에 안 되었고 능력 부분에서 아무런 검증이 되어 있지 않았던 반면, 이복형들은 1차 왕자의 난 때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 이외에 이렇다 할 뭔가를 보여준 적이 없는 이방간이나 공과를 알 수 없는 방간의 바로 윗 형인 이방의는 그렇다쳐도 관직에 오래 머무른 이방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이방과, 역대 최연소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관직을 역임했으며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인 정몽주까지 살해하며 조선을 세우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방원 등은 개국의 중요 공신이면서 동시에 능력도 잘 검증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방의와 이방간도 방과, 방원만은 못하더라도 이복동생들과 비교당할 처지는 절대 아니었다.
정통성 면에서도 능력 면에서도 이복 형들을 세자로 안 세울 수가 없는 상황으로, 이방원이 정몽주를 독단적으로 암살[19]한 일로 태조의 눈 밖에 나긴 했으나, 적장자이면서[20] 실력도 검증되어 있는 이방과가 있으므로 뜬금 없이 이방석를 세자로 삼을 명분이 있을리가 없었다.
이방석이 형들 다 제치고 황제가 된 강희제처럼 5살 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는 무서운 자질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모를까[21][22] 딱히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고생한 자식들을 홀대하고 새엄마의 자식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으며 아무리 태조가 무섭더라도 섭섭함과 실망감은 감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방석은 뒷배는 든든해도 권력에 숟가락을 얻을 외척들이 너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인물이었기에, 왕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줘선 안 되었다. 명분도 없는데 계승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고 위험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다.
그나마 이방석의 나이가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라면 어린 나이부터 유교적 제왕학을 학습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조는 본인이 무장 출신이라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23] 안 그래도 신 왕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계자는 보다 체계적인 준비를 거쳐 즉위하기를 바랐을 테니 어린 이방석에게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가 컸을 것이다.[24] 더하여 든든한 빽들도 있으니 조금씩 정치적 경력을 쌓아주면 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일단 태조 본인이 세자 책봉 당시 이미 환갑으로 인생의 말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25]
그런데 이런 상황에 세자 책봉 이후 현빈 유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으나 어린 세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세자빈이 내시 이만이라는 자와 간통을 했는데[26] 이게 밝혀지자 이만은 참수되고 유씨는 폐출되는 일이 발생했고[27][28] 이후 1394년 심효생의 딸 현빈 심씨를 다시 세자빈으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며 15세에 아들을 낳게 된다.[29][30]
거기다 태조실록을 편찬한 이들이 이방석을 죽인 태종과 그의 측근인 하륜이었던만큼 어느 정도 과장 혹은 왜곡이 되어 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지만 태조실록을 보면 세자로서 이방석의 모습을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세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태조 2년에 요좌(자신의 직속 관원)에게 "나의 거처가 낮고 좁으니 어찌 더위를 견딜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였고 당시 최고 정무 기관이었던 도평의사사에서 이를 듣고 건축을 담당한 선공감에 지시하여 양청(바람이 잘 통하는 방식으로 지은 하계절용 건물)을 짓게 하였다가 태조가 "최근 공사를 어쩔 수 없어서 벌이고는 있으나 이미 적지 않게 진행되고 있는만큼 세자에게 굳이 필요없는 양청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이를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세자가 막 되었을 당시에는 어린 나이였으니 투정부린 것으로 넘길 수는 있다.
그러나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시대에 간행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방석은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도 세자로서 딱히 정무 경험을 착착 쌓아올린 흔적도 보이지 않고[31] 오히려 장군들과 궁 밖에 나가 남의 집 가축을 쏴죽이거나, 궁 안에 창기를 들이거나, 공부를 싫어하고 놀아제치려 해서 태조가 친히 "쟤 놀려고 해도 못하게 해"라고 이르는 등 여러모로 말썽을 일으켰다.[32][33] 이방석이 죽을 때는 16세로 오늘날에 치면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당대 사회 수준을 생각하면 태조와 정도전 일파가 집중 관리해준 세자로서는 여러모로 부족해보인다.[34] 그게 아니라면 세종 대에 했던 것처럼 세자와 대군들 사이의 예법을 확실하게 정한다거나 하는 사전 작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조차도 없었다.[35] 상당히 노는 것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1차 왕자의 난 이후 공신에 해당하는 이들이 그와 이방번의 첩들을 자신들의 소유로 하여 데려갔는데 그 중 2명이 이방석의 첩, 그것도 기생 출신들이었다고 한다.[36] 거기에다 상술했듯 대장군[남지와 신덕왕후의 친척이자 장군인 강유신이란 이들을 따라 말을 타고 궐 밖을 나가기도 했는데 이 때 누가 했는지는 모르나 민가의 염소와 오리 등을 쏴 죽이는 사고를 쳐서 두 장군이 간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37]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시 그의 나이상 사춘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는 해도 좀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 뭐, 본인의 문제도 있었겠으나 위의 두 장군이나 도평의사사도 그렇고 세자가 막 되었을 시점부터 그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은 공신의 자제들이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세자인 그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다가 비난을 받았다고 하니 주변 환경도 그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신덕왕후가 일찍 세상을 뜨기는 했어도 아버지인 태조가 정정했고 후견인인 정도전과 남은 역시 적은 쓸어넘칠 정도로 많았어도 조정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으며 요동정벌의 기치를 앞세워 국론을 규합하고 사병 또한 해체하여 이방원을 위시로 한 반대 세력이 가장 약화되던 무렵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그에게 행운인 듯 했으나 정도전과 태조도 방심했는지 이방원에 대한 경계를 늦추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1차 왕자의 난 참조.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이방석은 궁궐의 수비대를 지휘하여 반란군을 진압해 보려 했으나 이방원이 실록을 통해 수십 명의 막대기를 든 오합지졸이라 너스레 떤 것과는 달리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꽉 들어찰 정도의 군대가 동원된 것을 보고 전의를 상실했다.[38] 이후 정도전, 장지화, 심효생, 남은, 박위 등의 신하들이 살해되고 정국이 이방원에 의해 장악되자 17세 나이로 폐세자된다. 이성계는 폐세자된 이방석을 살려준다는 약속을 믿고 그를 사저로 내보냈는데 그래도 가시면 아니된다고 매달리는 세자빈에게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고 안심시키고 궐문을 나섰다가 이거이 등이 논의하여 보낸 자객에게 그의 형인 이방번과 함께 살해당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권력을 잡은 정종과 태종의 정당화 작업에 의해 서자로 격하당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정실이므로 엄연한 적자가 맞지만 태종은 자신이 난을 일으킨 명분을 이어나가기 위해 이렇게 했다. 태종은 나중에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마저도 후궁격으로 완전히 격하시켜 버렸다.[39][40][41] 1406년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모셔온 이후 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를 소도군(昭悼君)으로 추시하였고 이후 1680년에 숙종에 의해 의안대군으로 추봉되었다.[42][43]
세종은 자기 아버지에게 죽임당한 숙부 이방석에게 자기 6번째 아들 금성대군을 양손자로 입적하여 후사를 잇도록 했다. 그러나 이방석의 수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문종 사후 계유정난이 일어나 수양대군의 편에 서지 않은 금성대군의 이방석 봉사손 지명이 철회되고, 유배된 금성대군은 이후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세조에게 발각되어 사형당한다. 이방석은 생전에 세자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형이 일으킨 반란으로 목숨을 빼앗겼는데, 이방석의 양손자 금성대군도 양조부가 당한 것처럼 야심가 형이 일으킨 반란으로 폐서인이 되고 목숨도 빼앗겼으니 참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금성대군의 자식들은 겨우 살아남아서 금성대군의 핏줄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금성대군의 이방석 봉사손 지명 철회는 되돌려지지 않아서 이방석의 후사는 세종의 서자 밀성군의 아들 춘성군이 잇게 된다.
3.1. 홍무제의 사위가 될뻔하다
홍무제 시절 명나라의 황녀와 혼인할 뻔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있었던 혼담으로 1396년 6월~1397년 4월까지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이었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이방석의 세자빈이 명나라 황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먼저 이성계에게 사돈 관계를 맺자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44] 그 이후 진지하게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혼담이 오가면서 서로 잘 풀리는 듯 싶었다. 그러나 1397년 4월에 주원장이 갑자기 자신은 진지하게 사돈 맺으려고 했지만 이성계가 문제라는 식의 공문을 보내면서 결국 혼담은 파투가 났다고 한다."본부(本部)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중국 주변에 인접한 사이(四夷)가 멀고 가까운 것이 같지 않는데, 오직 조선(朝鮮)이 동쪽 변경에 가까이 있어 다른 곳과 비교하면 심히 절근(切近)하다. 전자에 왕씨(王氏)가 정사를 게을리 하여 망하고 이씨(李氏)가 새로 일어났는데, 자주 변경에서 흔단(釁端)을 내므로 짐(朕)이 두세 번 말하였으나, 마침내 그치게 하지 못하였다. 오래되면 병화가 생길까 염려하여 실은 서로 혼인을 하여 두 나라의 생민을 편안히 하고자 했고, 이런 생각을 가진 지 여러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29년 6월에 다만 행인(行人)으로 이 뜻을 통하게 하였는데, 사자(使者)가 돌아오매, 왕이 나와 영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짐(朕)이 장차 반드시 혼인의 일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30년 봄에 조선에서도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안장 갖춘 말까지 바치어 성의를 표하였는데, 다음날 안장 갖춘 말을 조사하여 보니, 기구와 짐승에 모두 흠이 있었다. 물건에 대해 용심한 것을 보니 처음 사귀는 데에도 오히려 이렇거늘, 오래되면 반드시 그렇지 못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좋은 벗이라는 것은 각각 하늘의 한쪽에 있어 모이고자 해 모일 수 없더라도, 반드시 천리(千里)에 정신으로 사귀어 뜻을 통하게 하는데, 지금 조선은 짐이 성의로 보냈는데도, 그쪽에서는 거짓으로 응하니, 천리라 하지만 정신으로 사귀고 뜻으로 통할 수 있겠는가? 일은 처음에 잘 판단하지 못하면 뒤에 반드시 뉘우치는 법이다. 조선과 혼인하는 일은 두 번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너희 예부(禮部)는 조선에 이문(移文)하여 인친(姻親)의 의논은 파하고, 행인(行人)을 잘 대접하되, 돌아가서라도 변경의 흔단을 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 설장수 등이 남경에서 돌아오다. 인친 의논을 파한다며 흔단을 내지 말라는 자문
정황상 추측하면 주원장은 "혼례까지 할 정도면 이성계가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이성계는 "혼례를 하게 된다면 요동 정도는 지참금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로 생각했다. 결국 서로 정반대로 오해하는 바람에 파투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45] 이렇게 혼담이 완전히 파투나자마자 조선에서는 거의 직후인 1397년 6월부터는 요동정벌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했다. 이에 조준이 반대의 의견을 피력했고, 반면 남은은 "조준은 셈은 잘 세도 큰 일을 도모할 수 없다"며 비판하는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실제로 이 국혼이 성사되었다면 그 이후의 역사는 상당히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이유는 국혼이 성사되었으면 주원장이 1398년 5월에 붕어한 이후 8월에 일어난 정난의 변, 마찬가지로 8월에 발생한 1차 왕자의 난에서 조선의 입장이 미묘해진다. 처갓집이 명나라 황실인 만큼 세자 이방석이 그간 안고 있었던 태조의 막내라는 점이나 후처의 아들이라는 약점을 상쇄하고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졌을 것이다. 이방석을 대상으로한 반정은 곧 황제의 사위를 치는 것과 다름 없으니 명나라와 척질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1차 왕자의 난은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면 명나라 황실이랑 가까워진 상태라면 정난의 변에서는 조선이 건문제의 편을 들 수 밖에 없게 된다. 주원장도 말년에 번왕들이 할거하는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한 것도 아니니 저 시점에 조선과 결혼 동맹을 했다면 당연히 건문제와 가까운 혈연으로 맺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장인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내란인 정난의 변에 조선이 개입을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원래 역사대로 영락제가 승리한다면 조명관계는 상당히 불편해질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명관계에 있어서도 여몽관계처럼 조선이 명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조선의 국위선양과 후계자 이방석의 지위가 공고해지고 명나라 국정과 요동에 지분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반면 강대국인 명나라가 후견국이라는 명목으로 더많은 간섭을 하게된다면 건국 직후 불안했던 조선 초기의 정국이 더욱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다.
4. 가족관계
5. 특징
- 의안대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생전에 의안대군으로 불린 적은 없다. 사후 8년이 지나서 태종은 이방석을 소도군으로 추증하였다. 왕의 적자를 의미하는 대군이 아닌 서자를 의미하는 군으로 격하된 이방석은 사망하고 271년이 지나서 현종이 신덕왕후를 복권시키자 비로소 종묘에 위패가 모셔지고 묘도 왕릉으로 수복되었다. 이후 숙종이 이방석을 의안대군으로 봉하면서 태조의 적자로 인정받고 대군의 지위에 오른다.
- 같은 나이에 사망한 단종에 비해 국민들의 동정이 없다. 삼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단종은 내려오는 전설도 많고 무속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하지만 의안대군은 그러한 인식도 없고 영화나 드라마에서의 묘사도 부정적이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의안대군의 이미지가 원인인데 단종은 압도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단종에게 충성하는 사육신과 생육신이 완강하게 단종을 지지하고 세조를 반대한 것과 다르게 의안대군은 조선의 건국에 공을 세운 이복형들이 차지할 세자의 자리를 권력을 향한 어머니의 탐욕으로 자신이 차지하였다. 의안대군의 세자 책봉에 반발한 회안대군과 태종에게 폐위당하고 목숨을 잃은 의안대군은 후손들에게 가계의 위상과 정통성을 살리려는 태종에 의해 위상이 격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방번이와 방석이가 모두 죽었다. 내가 잊고자 하나 잊을 수가 없구나!
백운사의 승려 신강에게 아들들의 죽음을 한탄하는 태조.
* 태조가 세자로 책봉할 정도로 사랑한 아들이라 이방번과 이방석의 죽음을 한탄하였다.백운사의 승려 신강에게 아들들의 죽음을 한탄하는 태조.
- 태종 11년에 장흥부사에서 해임된 김기가 신문고를 울리더니 무인정사 당시 15명을 이끌고 의안대군을 사사한 공이 있다며 자신을 원종 공신으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하였다. 태종은 김기를 사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의안대군을 살해하라고 명령한 적도 없다며 김기를 투옥하고 국문을 주도하여 자작극이라는 자백을 받아낸다. 김기에게 곤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낸 태종은 무인정사 당시 김기의 상관인 첨총제 차지남과 대호군 전흥을 불러 김기가 당시 맡은 직책을 물어본다. 하지만 차지남과 전홍은 김기의 직책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김기가 관직에서 해임당한 후 생활고를 이유로 일으킨 해프닝에 가깝지만 실제로 의안대군의 사사를 지시받고 수행하였는데 사건을 덮어두고 싶은 태종에게 버림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태종은 무안대군, 의안대군, 이제를 사사한 일로 태조에게 "내가 왜 불교를 좋아하는지 아느냐? 두 아들과 사위 하나가 공중에서 '저희는 서방정토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라는 면박을 들었다. 그만큼 의안대군은 태종에게 민감한 존재인 것이다.
6. 대중매체
죽을 당시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정도 되는 청소년이었고 자식까지 봤지만 대체적으로 드라마에서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 연령대의 아역 배우들이 맡아서 어린 아이 이미지가 강하다.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게 10세 때인데 16세에 죽은 인물이라 중간에 교체하기도 애매하고 장성한 형들을 밀어낸 어린 동생 이미지가 강해 처음부터 청소년 배우를 넣기도 애매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첫 등장 때는 아역 배우를 캐스팅하고 무인정사를 앞둔 시점에서는 청소년 배우나 20대 배우를 캐스팅하여 나이 고증을 맞추는 작품도 나오고 있다.-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양희석[46]이 연기했다. 처음에는 학문에 열심이나 세자빈이 내시 이만과 정을 통한 사건[47][48] 이후 방황하다 정신을 차리지만 이방원에 의해 죽고 만다. 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극중 이방원은 살려달라 애원하는 방석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수하들에게 빨리 처리하라는 손짓을 보내고 결국 궁궐 밖으로 끌려가 참살당한다. 이후 126회에서 이성계가 임종 직전 꾼 꿈에서 어머니 신덕왕후, 형 이방번, 누나 경순공주, 매형 이제와 함께 이성계를 맞으러 나타난다. 일찍부터 똘똘한 대답을 하여 태조를 감탄시키거나 빈궁을 홀대할 정도로 공부에 의욕을 보이고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등 전반적으로 총명하고 왕재가 있으며 순수하게 묘사되었다. 기생을 부르는 듯 사고 친 것도 당연히 생략되는 등 상당히 미화된 셈. 때문에 뭣도 모르는 나이에 세자 자리에 올라서 공부하다가 왕실의 권력 암투 때문에 희생된 피해자처럼 보인다.
-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장재하(아역) 및 김진성(10대)이 연기했다. 이방석(태종 이방원) 문서 참고.
[1] 음력 우왕 8년[2] 음력 태조 7년 8월 26일[3]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엄미리[4] 음력 태조 1년 8월 20일 ~ 태조 7년 8월 26일[5] 전처[6] 조선 초기에는 대군이라는 칭호가 없었다. 세자 외의 왕비의 아들을 칭하는 대군 칭호는 태종 때 제정된 것으로, 이 문단에서 영안군과 정안군만 군으로 쓰는 것이 맞다. 다만 태종 이후의 문서에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시절을 정안대군이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다.[7] 심지어 몇몇 2차 매체에선 이 때 방원이 막내동생인 방석을 업고 도망쳤다고 묘사하기도 한다.[8] 사실 이후의 일을 봐도 태조나 사대부들이나 정통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아들의 탄생일에 대해 사실상 신경쓰지 않는데, 사대부들은 무예적 능력에 비해 부족한 능력이 눈에 밟혔을 것이고, 태조는 학식과 정치력이 부족한 이방과가 왕의 책무를 감당하기 어려울거라 생각하여 꺼린 듯하다.[9] 이방번은 처가가 공양왕의 형이자 신료들이 수시로 제거를 노리던 정양군 왕우라서 자질과 상관없이 후계자는 될 수 없으니 남은건 이방석 뿐이다.[10] <태조실록> 1권 태조 원년(1393년) 8월 19일.[11] 후대에 정식 왕비인 인목왕후 소생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가볍게 제친 서자 광해군의 케이스가 있지만 인목왕후는 임진왜란 후에 새로 들인 어린 왕비라 권위가 약했던 반면 광해군은 이미 10년 넘게 세자 경력을 쌓고 전란 당시 공적이 많아 당파를 막론하고 고른 지지를 얻고 있었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이기는 했지만 선조 승하 당시 나이가 겨우 2살밖에 안된데다가 모후인 인목왕후가 오히려 광해군을 지지하며 자신들의 보호를 호소한 케이스라 상황이 전혀 다르다. 국초와 조선 중기의 종법 해석도 다르니 직접 비교할 수도 없다.[12]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을 문제삼으려면 여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제나 이화도 빠져야 했다. 명백히 왕자들을 겨냥한 숙청이다. 무엇보다 이방원은 정몽주 살해의 원죄가 있으니 그렇다 해도 이방과는 태조의 부관으로서 아버지이자 상관인 태조와 함께 전쟁터를 누비던 인물이었다.[13] 그리고 이미 이 시점에서 이방석의 위치는 후궁의 자식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이방원과 정통성을 다툴 자격따윈 없었다. 이방원이 굳이 형 정종의 양자로 들어간 것은 어디까지나 신의왕후의 아들 중에서 막내라는 자신의 입장을 형의 아들이 되어 강화하기 위함이지(아직 형 방의와 방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교적 종법제에 맞추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 이미 죽은 이방석과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14] 다만 이방석을 서자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태종(이방원)에게 유리하도록 치우친 해석이다. 엄연히 조선의 왕후로 봉해진 신덕왕후의 소생인 이방석(및 이방번)은 명백히 적자라고 보아야 하며 이것까지 부정하려 드는 것 역시 심한 무리수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장 이방원 자신도 집권 이후 신덕왕후의 대우를 격하했을지언정 왕비의 지위 자체는 부정하지 못했다.) 따라서 말자상속 원칙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적자 중 막내인 이방석이 우선계승권을 가지는 것이 맞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농경민에 비해 권력과 재산의 집중도가 극히 낮은 유목민의 상속제도인 말자상속제를 농경민 중앙집권국가에서 도입한 것 자체가 무리수라는 반론이 더 적절할 것이다. (당장 유목제국인 몽골 제국에서도 말자상속제는 부족 시절에나 따르던 상속제도이고, 제국이 탄생한 이후에는 장자가 더 큰 상속의 지분을 가지는 경향이 강해졌다.)[15] 하지만 신덕왕후의 입장이 굉장히 애매한 것 또한 사실이다. 엄밀히 말해서 유교적 질서가 제대로 돌아가는 시절이라면 원래 신덕왕후는 첩(후궁)이고 이방석은 서자라는 주장이 반드시 틀리다고 할 수만은 없다. 원래 고려는 일부일처제였기 때문. 단지 고려 말기에 가면서 유교 질서가 어지러워졌고 이 틈을 타 향처와 경처를 동시에 두는 풍속이 생겼고 이로 인해 종법 질서가 무너진 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그리고 이방석을 적자로 치는 것과는 별개로 계처의 자식인 이상 정처의 아들에게 우선권이 가야 하는 건 당시 상황에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16] 설령 이것까지 넘어간다고 쳐도 이방원은 다섯번째 아들이고 이방석은 막내, 여덟번째 아들이다. 당연히 순서가 높은 쪽에게 우선권이 있다. 그리고 나이어린 왕은 그 자체로 문제의 근원이 될 수 있는데 거기다 나이도 많고 계승권도 더 높은 형이 있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 수양대군은 원래라면 계승권에서 단종에 한참 밀리는 데도 야심을 위해 조카를 쫒아내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이건 명분이라도 희박했지 이 경우는 방원이 방석보다 명분 면에서도 더 합당하다.[17] 또한 신덕왕후의 입장이 가지는 애매함이라는 것도 복잡한 면이 있는 것이, '원래 고려는 일부일처제가 원칙이므로 정처가 두 명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강씨가 둘째 부인이라면 그 지위는 첩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은 물론 사실이기는 하다. 처첩제나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거의 모든 사회에서는 그 부인들 사이의 입장에서 먼저 결혼한 부인 (특히 첫째 부인)의 지위와 정통성을 더 우월하게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는 고려등 한국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 그러나 고려 말기의 향처/경처 풍습에서는 향처는 출세하기 전에 고향에서 한 결혼, 경처는 출세한 이후 중앙(수도)의 유력한 가문과 한 정략결혼인 경우가 많았기에 둘째 부인인 경처가 오히려 향처를 밀어내고 정식 부인의 입장을 차지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이성계의 경우 조선의 개국군주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원래 왕이 될 예정이 아니었던 이성계가 정치적 성공을 거듭한 끝에 즉위라는 절차를 거쳐 왕으로 '승격'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우자 역시 일정한 절차를 거쳐 왕비로 '승격'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 먼저 성공한 것은 강씨였다. 이성계의 즉위 직전 사망한 한씨(후일의 신의왕후)가 '절비'라는 애매한 호칭밖에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강씨는 신덕왕후의 호칭을 받고 조선 왕조의 첫 중전 자리에 공식적으로 오른 것. 이는 신덕왕후 강씨의 입장에서 일종의 명백한 정치적 성공을 거둔 셈이고, 이 기준으로 보면 "신덕왕후의 자식인 방번, 방석만이 적자이다" 라는 주장조차도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왕의 적자는 당연히 왕비의 자식이어야 하는데, 신덕왕후 생전까지 신의왕후는 아직 추존을 받지 못한 사태였기에 조선의 유일한 공식적 왕비는 신덕왕후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과, 방원등 신의왕후의 자식들은 이 정통성 문제를 방과(정종)의 즉위 후 생모인 절비(한씨)를 공식적으로 왕비로 추존함으로써 해결한 것이다. 그러니까 후대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조선 태조 이성계의 정비(정처)는 신의왕후 한씨, 계비(계처)는 신덕왕후 강씨인 것이 맞다. (둘 다 왕비, 즉 왕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되었으니 당연히 먼저 결혼한 쪽이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대부터 당연했던 것이 아니라 신의왕후의 자식들이 정치적으로 싸워서 얻어낸 성과인 것이다. 만약 이 싸움에서 방과와 방원이 패배했다면 한씨는 십중팔구 왕비로 추존되지 못했을 것이니 태조 재위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이성계의 정처(왕비)로써 공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것은 강씨인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고 한씨의 지위를 공고한 것, 강씨의 지위를 애매한 것이었다고 보는 해석이 썩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해석의 근거로 흔히 '유교적 질서'를 이야기하지만 애초에 여말선초의 유교적 질서란 조선 중후기 이후처럼 견고하고 엄격한 것이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정통성과 명분 자체를 얻기 위해서 정치적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이 이 당시의 상황이었는데, 그 싸움의 결과로 얻은 정통성을 마치 원래부터 당연히 가지고 있던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해석이라는 것이다.[18]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방번. 원래 적장자인 이방우는 호적에서 파였고(정확히는 태조가 이방우에게 적장자 자격을 주지 않은 것이지만.)[50] 이방연은 이미 사망했다.[19] 물론 다른 형제와 친척들도 정몽주 암살에 찬동하기는 했지만 정작 이성계가 실행에 옮기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이방원 혼자서 정몽주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책임 또한 이방원 혼자 오롯이 뒤집어썼다. 즉, 정몽주 암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총대를 멘 사람은 이방원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정몽주의 존재는 조선 개국에 도움은 안 되고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인 상황에서 이성계든 정도전이든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있던 터라 결국 이방원이 나서서 손을 쓰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 개국을 안 한 것도 아니고 할 건 다 해놓고 이제와서 넌 정몽주를 죽였으니 안 된다는 식이면 당연히 어이가 없을 노릇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깔끔한 암살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상갓집에서 나온 사람을 다른 사람들 다 보는 데에서 때려죽였다는 패륜을 저질렀긴 하지만 애시당초 태조가 결단을 못 했기 때문에 그 자식이 이런 짓을 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걸 가지고 탓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20] 차남이었던 이방과가 적장자였던 이유는 당시 장남 이방우가 이미 고인이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이방우가 호적에서 파였기 때문이었다.[51] 단순히 이방우가 고인인 게 문제라면 적장자는 이복근이지 이방과가 아니다.[21] 이 자질도 강희제의 조모이자 순치제의 생모이고 홍타이지의 적복진이였던 효장문황후가 공인하고 뒤에서 버텨주었기에 인정받았다. 당시 순치제의 황후는 몽골 보르지기트씨였는데 시어머니인 효장문황후의 조카였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자질은 고려 최연소 과거합격자인 이방원이 보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22] 게다가 강희제는 자질도 자질이지만 능력도 우수했다. 그의 나이 23세에 삼번의 난이 벌어지는데 당시 아무리 강희제가 성인이었다 하나 상대인 오삼계는 강희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활약한 잔뼈가 굵은 노장이었고 실제로 반란 초기에 오삼계는 운남, 귀주, 사천, 섬서, 호북, 호남 등 청나라 서남부를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침착하게 반란 진압에 나섰고 끝내는 오삼계를 토벌하는데 성공했다. 만일 이방석이 강희제만한 자질이 있다면 어떻게든 이방원을 상대로 분전이라도 해야 마땅한 일이나 이방석은 이방원 측의 군사가 많다는 말만 듣고도 주눅이 들어버렸다.[23] 사실 태조는 학문적 소양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괜히 이방원이 과거시험에 붙었을 때 그렇게나 기뻐한 게 아니다.[24] 태조는 놀라울 정도로 세자 책봉에 있어 적장자 세습의 원칙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정도전조차도 처음에는 나이와 경력에 따른 책봉을 건의했다가 태조가 강씨의 아들을 강력하게 주장하자 데꿀멍하고 입을 닫았을 정도며 이방석 책봉에 뽐뿌를 넣는 악역은 정도전이 아니라 배극렴에게 돌아갔다. 왕 옆의 간신 제거라는 명분을 내세운 이방원 입장에서 차라리 태조가 적장자 세습을 고민하고 강씨나 죽은 정도전이 이를 부추기는 그림이 훨씬 자신에게 유리했을 텐데도 실록은 정도전이 죽기 전까지는 일관되게 강씨 아들의 책봉이 태조의 의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무장 출신의 이방과가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미래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였을지도 모른다.[25] 태조는 일단 약 73세(72세 7개월여)에 사망하여 역대 조선왕 중 2위의 장수 기록을 가지고 있다. 3위는 고종(67세), 4위는 광해군(66세), 5위는 아들 정종(62세)이다. 그런데 잘 보면 순위권들 중에서 태조 밑으로는 나라 망해서 당구치며 여생을 보내다가 죽거나(고종), 반정으로 쫓겨나 유배지에서 할일없이 지내다 죽거나(광해군), 2년간 실권없는 왕 노릇하다가 뒷방으로 물러나서 격구나 치고 유람이나 다니며 인생 즐길만큼 즐기다 죽은(정종) 케이스들이다. 사실 태조도 6년의 재위 기간보다 10년에 가까운 태상왕 시절이 훨씬 길었고 원래 강골인 몸이 원치 않게 정치 스트레스에서 일찍 벗어난 덕에 저만큼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신덕왕후가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다 해도 태조 본인이 어린 세자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나날을 지속했다면 무인년의 그 병환이 언제 어떻게 커져서 태조를 저세상으로 이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26] 고려의 내시는 거세한 남성 신료를 의미하는 환관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 이 당시가 여말선초로 대부분 고려의 관습이나 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이만이라는 내시는 거세한 환관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27] <조선왕조실록>에는 갑자기 '내시 이만을 죽이고 현빈 유씨를 내쳤다.'고만 써있다. 이에 대해서 자세한 사정을 밝혀달라고 한 대간들을 감옥에 가두고 이 일에 대해서 논의한 관리들도 가둬버리고 관련된 자들도 모조리 귀양보내 버리는데 실록에 기록조차 남기지 않게 할 정도로 꺼림칙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개 이렇게 추측된다.[28] 일각에서는 폐세자빈 유씨가 실은 간통죄 누명을 뒤집어쓰고 축출됐다는 의견이 있다.[29] <조선왕조실록>에 이방석이 세자빈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아들은 후에 일찍 죽었는지 그의 대는 끊겼고,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이 그의 양자로 입적되지만 금성대군 역시 세조 때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처형된다. 그래서 이방석의 제사는 세조의 이복 동생인 밀성군 집안에서 맡고 있다.[30] 1차 왕자의 난 이후 이방석의 아들에 대한 기록이 사라져서 이방석의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명나라 정난의 변 때 영락제가 건문제의 1살짜리 아들은 차마 죽일 수 없어서 평생 유폐시켰는데 이 아들도 살아 있었다면 똑같이 되었을 수도 있다.[31] 대군들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도성 밖에서 어가를 맞이하거나 법회를 열게 하는 정도가 전부다.[32] 그럴 만도 한 게 왕실의 후계자 교육이라는 것은 원·세자가 5살이 되면 강학청을 설치해서 조기 교육으로 체화시켜야 할 정도로 빡빡한 커리큘럼이었다. 그걸 10살이 되도록 호랑이 같은 형님들을 두고 권신의 막내둥이로 어리광부리며 자유롭게 지냈을 이방석이 소화하자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33] 조선 왕조를 통틀어 이방석 외에 10세가 넘어 원자, 세자, 세제로 책봉된 사례는 정종(42세), 태종(31세), 세종(21세), 의경세자(19세), 광해군(17세), 소현세자(11세), 효종(26세), 영조(27세)의 8명이다. 그런데 이 세자, 세제들은 효종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혈통, 야심, 재능 등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후계자로 거론은 되던 사람들이다. 의경세자조차도 왕위에 욕심 만땅인 세조가 잠저에서부터 후계자로 키워왔던 장남이고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간 이래 줄곧 아버지 인조와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어 어느 정도 낌새는 있었다. 정말로 이방석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세자가 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34] 일례로 세종이 진양대군에게 활자 간행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 진양대군이 만 16세 때였다. 문종은 세종이 하도 건강이 안 좋아서 이미 10대 초반 때부터 툭하면 사신을 접대해야 했다. 당장 이방석의 형인 이방번도 13살에 삼군부 절제사 노릇을 했고 무인정사 직전에도 한창 진도 훈련에 투입되었으니 세자 역시도 군사 훈련 등에 얼굴을 내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35] 사례 1: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던 듯 공부를 소홀히 해서 간관이 이를 아버지인 태조에게 알리자 태조가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분부를 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죽하면 태조가 아내이자 세자의 어머니였던 신덕왕후와 함께 유후사(개경. 한성부으로 천도하면서 옛 수도인 개성부를 개성유후사로 승격시키고 후에 개성유수부로 개편하였다)에 가게 되었을 때는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의 수장인 판사복시사에게 세자가 나가 놀려고 해도 말을 주지 말라는 자신이 없는 동안에 세자를 잘 감시하라는 식의 명을 미리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사례 2: 기생을 궐 안으로 들여서 이를 안 우보덕 함부림이 서연 중에 사실 확인을 하자 무안해하며 다시는 그리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기록에 밤에 몰래 나가 한 관원의 집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기록도 존재한다.[36] 특히 이방원의 매부이자 공신 이거이의 아들이기도 한 태조의 부마인 상당군 이백경(후에는 이저로 불림)은 ‘효도’라는 방석의 기생첩을 데리고 갔는데, 문제는 이 효도라는 여인이 이백경의 아버지인 이거이와 관계를 가졌던 여인이었던 것. 후에 이를 알게 된 사헌부에서 이를 비난하며 이거이 부자를 논핵했는데, 오히려 당시 대사헌이자 이방원의 동서였던 조박과 사헌부 관원들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백경과의 관계라든지 그와 부친 이거이가 공신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리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37] 다만, 고려사의 우왕의 기사도 왕이 사냥을 나가며 민가의 가축을 쏘았다는 기록으로 폭군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태조실록이 태종 시기 완성되고, 태종실록과 고려사가 세종 시기 완성되었던 것을 보면 진위에 대한 의혹을 가질 수 있는 부분.[38] 물론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한 태종의 입장상 그냥 자신의 상황에 맞게 해놨을 수도 있다. 사실 공식적으로 사병이 폐지된 상황이라 왕자들이 직접 거느린 인원은 수십 명 수준이고 그 외에는 대부분 친이방원파 지휘관들이 동원한 중앙군일 가능성이 높다.(당장에 한강 이남 가까운 곳에 고을수령으로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이 있는데, 용재총화에 따르면 지금의 정동에 있었던 정릉{신덕왕후릉}숙위에 맞춰서 올라왔다고 한다.)[39] 신덕왕후의 권위와 존재감을 유지하기 위해 도성 안에 그녀의 능을 조성한 태조의 뜻을 알아채고 신덕왕후의 묘와 석물을 들어내버리고 제사마저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치르다가 태조 사후에는 제대로 된 제사조차 지내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도 신덕왕후를 폄하하는 발언을 누차 함으로서 그녀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떨어뜨렸다.[40]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신덕왕후가 후궁이라는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멀쩡히 신의왕후가 살아있을 때 맞이한 것이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고려시대는 공식적으로 엄연한 일부일처제였다.물론 원 간섭기에 일부다처제적인 성향이 나타나며, 향처와 경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만, 이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확대된 것은 아니다.[41] 정확히는 그녀의 입지는 결국 이성계의 후처이다. 어쨌거나 정식으로 들인 처인 건 맞으므로 그녀가 정실부인인 건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그녀가 후처인 이상 왕의 자리는 죽은 신의왕후의 아들들에게 넘겨주는 게 맞다. 유교상의 명분이든 왕조를 이끌고 나갈 실질적인 능력이든 이방석은 도저히 왕세자가 될 만한 여지가 없었는데 그걸 억지로 올린 것이다.[42]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그를 의안군에 봉했다고 나왔었는데 창작물의 반영 오류이다. 왜냐면 이성계가 즉위한지 얼마 안 돼서 바로 세자로 책봉되었기 때문에 따로 군(君)이나 기타 존호를 받지 않았다.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항목을 참고할 것.[43]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사후 시점에 의안군이라고 부르는데, 1680년 숙종 이전까지는 소도군(공)으로 불리었다.[44] , 태조 5년 6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황제가 혼사 맺자고 했다는 것을 종묘에 고유하였다. 태조실록 9권.[45] 다만, 설령 이방석이 명나라 공주와 결혼했어도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다. 이미 대다수 사대부들은 자질이 검증된 이방원을 더 선호하고 있었고 명나라에서는 정난의 변이 벌어지면서 조선에 신경쓸 여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46] 양희석의 경우 출연 기간 동안 16세였기 때문에 얼추 나이가 들어맞는다. 살아있을 때는 변성기가 안 와서 목소리가 하이톤인데 이성계의 꿈에서 나올 때는 변성기가 와서 굵직굵직하다. 동복형으로 나오는 이방번을 연기한 정태우가 양희석보다 2살 어리다.[47] 사실 세자빈이 간통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게 바로 세자 본인의 과한 교육열이였다. 극중 세자빈은 어린 나이에 세자빈이 되자 외로워 세자에게 여러번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고 하지만 세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놀러가자고 해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잠을 청하자고 해도 먼저 가서 자라고 한다. 오히려 이 시기에 세자는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침소에서 잠을 자고 싶다고 어리광을 부렸다. 간통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세자는 세자빈의 감정에 전혀 신경을 쓰지를 않았다. 세자빈이 울면서 청을 해도 미안하게 쳐다만 볼 뿐 그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 결국 세자빈은 간통이 드러나고 내시 이만이 처형당한 뒤 거의 반강제로 자살한다.[48] 남자와 여자의 2차 성징 시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갈법한 상황이기도 하다.[49] 위같은 문제를 의식했는지 1398년을 다룬 10화부터는 실제 역사에 맞는 나이 대의 배우로 교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