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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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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공신호 수여자 목록
3.1. 고려3.2. 조선
3.2.1. 공신회맹축
3.2.1.1. 20공신회맹축 - 영국공신녹훈후3.2.1.2. 20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1. 개요

공신()은 나라를 위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신하이다.

신하는 오직 군주국에만 존재하고 공화국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화국에는 공신이라는 것이 없다.

현대에는 공신이란 제도가 없지만,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훈장, 포장, 기장을 공식 수여받은 사람이거나 국가유공자 및 이와 유사한 각 분야의 공식 유공자, 국가의 표창과 상을 받은 사람들, 국가의 각종 인증서를 받은 사람들이 공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한 건 각 해당 문서 참조.

정치권에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거, 지방선거 등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한 인사들이나 헌법을 제정하거나 또는 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사들, 국가의 경제성장이나 각종 사업에 기여한 관료나 기업인들이나 교수들, 기업이나 언론이나 학교대학에서 창업이나 성장에 기여한 임원들이나 교수들이나 교직원들, 각종 국가의 주요 행사나 각종 국제대회에 나가서 뛰어난 성적을 따온 선수들이나 각종 인사들을 비유적으로 공신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외에도 각종 국제대회를 유치한 인사들이나 각종 중대한 사건들을 해결한 인사들 같은 경우도 비유적으로 공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 공신들 중 높은 사람들에게는 작위나 군호가 내려지고 가문 대대로의 영광이었으며 공음전이나 공신전도 하사받았으며 심지어 조상의 관직 추증이나 공신의 관직 승진 및 요직 등용도 가능했으나, 현대에는 상훈을 받아도 그 영예는 본인 당대로 끝난다. 다만 현대에도 공신급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정부나 기업에서 좋은 요직을 받고 직위 승진도 가능하며 몇 대를 물려받아도 남을만큼의 부귀와 명예를 누리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2. 상세

원래 동아시아에서는 공적을 세운 신하에게는 식읍을 수여하여 보상을 해왔었다. 식읍에는 상당한 독자성이 주어졌으므로 나라의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이상 식읍의 주인이 마음대로 세금을 거둔다거나 징병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었으나, 전한오초7국의 난 이후로는 식읍은 명목상 수여되는 개념이고 실제로는 설정된 호(戶)의 숫자만큼 별도 급여를 받는 개념으로 변경되었다.

당나라 때부터는 급여화 된 식읍을 대신하여 식읍 중 일부를 식실봉(食實封)으로 수여하는 제도를 마련했는데, 식실봉을 지급받은 사람은 수여한 호(戶)에서 조용조(租庸調)를 직접 수취할 수 있었다. 전한 이전의 식읍처럼 독자적인 통치권이 부여된 수준은 아니었으나, 정해진 한도 내에서 부역까지 징발하는 권한이 주어진 것이므로 급여화된 식읍보다는 훨씬 가치가 높은 특전이었다. 식실봉은 정식으로 공신호(功臣號)를 수여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전이었는데, 바꿔서 말하자면 공적을 세운 신하에게 정식으로 공신 칭호를 수여하기 시작한 것은 당나라 때였다.

공신호를 받은 신하는 나라에서 직접 초상화를 그려주고 이를 보관·배포한다거나 신도비를 건립하는 등 명예적 특전도 함께 수여되었다. 정식으로 공신호를 수여받지 않고 공신에게 주어지는 특전의 일부만 받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원종공신(元從功臣)이라 하였다.

공신으로 책록되었음을 증명하고 수여받은 특전들을 정리한 문서를 '녹권(錄券)'이라 하는데, 중원 왕조들에선 이를 단서철권 형태로 지급했다.

조선의 공신호 수여는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다른 왕조들에서는 공신 책록에 관한 업무는 이부(吏部)의 소관이거나 이부의 부속기관이 맡았고 군주의 의지에 따라 수시로 다양한 공신호를 수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조선에서는 공신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는 기관을 별도로 설치하고 왕의 명령이나 신하의 건의로 공신 책록이 개시되면 관료들이 공신의 명단과 등급을 제안하고 왕이 최종적으로 승인하여 결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공신을 책록할 때마다 고유의 공신호도 지정했다.[1] 원종공신도 글자를 바꿔서 '原從功臣'으로 썼는데, 고유의 공신호가 지정되면서 원종공신도 마찬가지로 공신호에 준하는 칭호가 되어버렸다.

1455년에 식실봉을 폐지하기는 했으나, 이미 고려 때부터 공신전(功臣田)이나 노비 등을 지급하는 경제적 특전이 마련되어 왔었기에 경제적 특전이 사라지진 않았다. 또한 공신으로 책록되면 그 등급에 따라 본인과 직계존·비속 3대에 자급(資級)이 수여되거나 승진했고, 후손들은 공신전을 세습할 수 있었다.[2] 본인의 공적으로 친히 책록된 정공신(正功臣)인 '친공신(親功臣)'은 봉군(封君)의 대상이 되었으며, 친공신의 작고한 부친인 선고(先考)는 보조공신으로 추증되어 봉군되었다.[3] 친공신의 적통 후손인 사손(嗣孫)은 승습을 통하여 자신의 품계가 종2품 이상인 경우에 봉군되었다. 원종공신은 봉군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공신 대다수는 정변을 성공시켜 받는 경우다보니 이름이 무색하게 나라에 오히려 해악을 준 이들이 더 많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때문에 정치적 목적에 좌우되기 쉽고 외적을 무찌른 진정한 공로자는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에 선무공신 1등에 원균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특히 정변 후 공신을 책록 할 땐 딱히 한 일이 없는 사람도 공신이 되곤 한다. 그 이유론 다음과 같다.
  •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인 만큼 민심 수습이나 지지세력 확보를 위하여 명망 높은 대신이나 원로, 혹은 정파를 대표할 만한 사람을 포섭하고 이를 내세우는 목적이다. 이 사례로 조선의 개국공신의 1등 중에는 배극렴이 있는데 배극렴은 옥새 들고 간거 외엔 한거 없었다.[4] 그리고 무인정사의 공신 명단인 정사공신 중에는 실질 공적이 가장 큰 이숙번과 태종의 처남인 민씨 형제들이 2등 공신으로 책록한 반면 본래 태종과 거리가 있었고 무인정사 때 딱히 한 일도 없는 원로 대신인 조준, 김사형이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래도 왕이 병중에 있고, 정도전의 생사가 불분명하기에 당시 재상이던 조준과 김사형은 이를 진압할 책임과 권리가 있었는데, 순순히 나와서 정안군측에 동조했으니, 큰 공을 세우기는 했다.[5]
  • 정통성이 부족할수록 공신을 많이 책록한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는 원종공신으로 2,000명이나 책록했는데 2,000명 정도면 문무관원 거의 다였고 정국공신은 무려 100여명이나 책록되었다.[6] 심지어는 정난공신 목록 중에는 이후 사육신의 명단에 오르는 성삼문도 목록에 있다. 공신들이 과하게 많다보니 대간이 개정을 요구했을 정도다. 그리고 정국공신은 대개 문관일수록 높은 등급에, 무관과 종친일수록 낮은 등급으로 책록되었는데 이것도 말썽을 불렀다. 대간의 요구에 개정을 했는데 문제는 문관은 놔두고 무관과 종친의 일부를 개정한것.
  • 책록하는 사람이 꼴리는대로 공이 없는 경우에도 책록된다. 그 예로 임진왜란 이후의 선무공신과 호성공신이 있는데 선무공신 1등에는 이순신, 권율, 원균 꼴랑 셋뿐이며 뭔가 없어야 할 사람이 있어보인다고 느끼면 정확히 느낀거다. 책록 당시 셋은 죽고 없었으며 원균은 신하들이 눈치를 보아 2등에 배정한것을 선조가 우겨서 1등에 집어넣은거다. 그리고 선무공신들 중에서 의병 출신은 한명도 없고 의병들은 죄다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이것은 사실 선조 입장에서는 흔들린 자신의 왕권을 다시 굳히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임진왜란 시기 의주까지 피난 했다가 그마저도 위험하다는 생각에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가겠다고 난리를 친 인간이다. 이 사람에게 왜군과 싸운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 위협자로만 보이지 자신의 신하가 아니었다. 전쟁 중에 왕의 명령보다는 현지의 지휘관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야 했음에도 도망간 사례가 있다가 보니 먼 곳에서 간섭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다수 관군 지휘관들조차 중앙의 명령에 고분고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조는 명나라의 지원군의 역할을 과대포장하면서 재조지은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결과를 만들어서 자신의 도주행위를 정당화시켰다. 이에 따르면 왜군은 오직 명군이 격퇴한 것이고, 자신은 이 명군을 부르기 위해서 의주로 갔으며, 조선의 군인들은 사소한 작은 공을 세운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소한 작은 공을 과도하게 포상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논리. 왕인 자신을 호종한 공이 훨씬 더 크다는 식으로 호성공신을 책록하였으나, 그 대상이 허준 같은 내의나 내시들은 애교수준으로 견마배나 숙수마저 집어넣었고 심지어 당시에는 연소한 왕자인 신성군정원군까지 포함했다. 신하들이 대부분 공신 책정 기준을 부조리하다고 느낄 정도로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서 자신의 권위를 올리려고 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기 뜻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이 선조에게 사용할 수 있는 정치력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공신을 책록하는 것은 실상 왕이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유력 인사들을 명예적·경제적 보상을 미끼로 포섭하여 친위세력을 구성한 것에 가까웠다. 왕권의 전제화가 확립된 정조 이후로는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농민전쟁 같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했음에도 공신을 책록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흔히 조선 말에 세도정치로 왕권이 약화되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세도 가문 같은 척신이 견제를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붕당정치의 종료로 전제화된 왕권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왕 개인의 권력이 낮았던 것은 그 자신의 권위와 권력 의지가 낮았던 철종 정도였고, 권력 의지와 명망 모두 드높았던 왕실의 종친이 자신의 친아들을 왕위에 올리자마자 기존의 세도 가문이 정치력을 잃어버린 것에서도 볼 수 있듯, 조선 말의 정치 구도는 전제화된 왕권을 기반에 두고 있었다.

정조는 공식적으로 공신을 책록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공신처럼 여긴 신하들이 있었는데, 자신이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도와준 서명선·홍국영·정민시 등을 모아 동덕회를 만들어 매년 이들과 술자리를 가지고 이들의 공적을 기렸다. 이 덕분에 서명선은 정조 시절에는 물론 죽은 후인 순조 시절에도 무탈했는데, 벽파 집권 후 남인·시파 등에 대한 숙청바람이 불면서 소론이었던 서명선도 공격을 당하자, 이에 당시 수렴청정중인 정순왕후 김씨가 서명선이 상소를 올렸던 날[7]을 골라 "오늘은 고 서명선이 상소를 올려 정조대왕을 도운 날이다. 그런데 지금 서명선을 벌주자고 하는 소리가 있던데 설령 이 사람에게 죄가 있어도 공이 더 큰데 그정도는 눈 감아줘야 하는거 아니냐?" 라는 식으로 처벌하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고, 이후 서명선 처벌 건은 쏙 들어갔다.

2.1.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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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는 처음 제후에 봉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단서철권'을 하사하고 말하였다. "황하가 모두 마르고 태산이 모두 닳아 없어지더라도, 한왕실의 종묘가 이어지는 한 너희는 대대로 끊김이 없으리라!"
태평어람》권633 中(高帝初, 封侯者皆賜丹書鐵券. 曰:"使黃河如帶, 太山如礪, 漢有宗廟, 爾無絶世.")
한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 공신들 중에 분봉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태초(太初, 한무제의 연호) 연간에 이르기까지의 1백 년 동안, 작위를 보전한 자는 겨우 다섯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법을 어겨 목숨을 잃거나 봉국을 몰수당하고 말았다.
사기》고조공신후자연표 中(漢興, 功臣受封者百有餘人. …… 至太初百年之閒, 見侯五. 餘皆坐法隕命亡國秏矣.)
개국공신의 경우 이름은 번지르르한데 열의 아홉은 왕권 강화를 위한 희생양이 되는 것이 다반사이며, 개국 공신이 큰 권세를 누렸다는 것은 정말 능력이 아까울 정도로 뛰어났거나, 정치질을 잘했거나, 큰 신임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냥 왕 말을 잘들어서다. 그 외에는 숙청 대상 1순위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바로 이 '공신'들이다.[8] 문자 그대로 반역죄 씌워서 죽이는 경우도 있다. 주원장이나 한 고조 유방, 고려 광종이 이 방면에선 너무 유명하다. 지방에 봉토를 하사하여 내려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의 대표적인 예는 송 태조 조광윤. 어쨌든간 죽지 않으면 허튼 의심받지 않도록 중앙 정계엔 알아서 눈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2.2. 배향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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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공이 많은 명신들은 종묘에 임금의 신주와 함께 모셔졌는데, 이들을 배향공신이라 부른다. 이들 중에는 공신으로 정식 책록되지 않은 인물도 종종 있어서 공신호가 없는 경우도 있다.

3. 공신호 수여자 목록

3.1.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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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공신호를 수여받은 인물의 목록이다.

3.2.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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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공신호를 수여받은 인물의 목록이다.

3.2.1. 공신회맹축

3.2.1.1. 20공신회맹축 - 영국공신녹훈후
1646년(인조 24년) 영국공신을 녹훈한 후 개국공신부터 영국공신까지 20종의 공신 및 그 자손들과 함께 회맹제를 거행하고 작성한 관찬문서로 회맹문과 명부인 회맹록 등을 하나의 축으로 만들고 천지산천과 종묘사직에 고하였다.
3.2.1.2. 20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에 공을 세운 서인들을 주축으로 한 신하들에게 보사공신이 녹훈되었으나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면서 일부에 대해 공신호가 취소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 공신호를 회복시켰다. 이전의 공신회맹축과 형식은 같으나 보사공신 녹훈 시의 회맹문과 함께 복훈됐을 때의 축문 등을 하나의 권축장으로 꾸몄다는 특징이 있다.


[1] 일례로 고려 말 중흥공신으로 책록된 이른바 '흥국사 9공신'의 공신호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이성계는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심덕부는 충근양절익찬좌명공신(忠勤亮節翊贊佐命功臣), 정몽주는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조준은 충근여절좌명정조공신(忠勤勵節佐命定祚功臣), 설장수는 정난공신(定難功臣), 성석린은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 정도전은 추충논도좌명공신(推忠論道佐命功臣)이었다. 지용기와 박위는 공신호를 알 수 없다. 조선에서도 당초 개국공신에게는 개별 공신호를 붙였으나,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공신호를 등급별로 통일했다.[2] 공신전은 조선 초기에는 지급이 축소되다가 세종이 세습을 중단했으나, 세조가 공신전 세습을 규정했다.[3] 친공신 선고(先考)의 공신호는 1등공신의 경우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2등공신의 경우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3등 및 4등공신의 경우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이다.[4] 다만 개국 과정에 눈에 띄게 직접 기여한 것이 적을뿐, 배극렴은 이성계 일파에 들어온 무관들 중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기에 군부를 통제하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5] 공신은 아니지만 인조반정이원익영의정에 임명한 것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6] 그것도 반정 일으킨 핵심부에게 로비 잘 해서 친인척들을 집어넣은 이들도 있었다.[7]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 서명선이 홍인한을 공격한 일을 가리킨다. 당시 홍인한은 영조가 "세손이 이판은 누가 할 지 병판은 누가 할 지 남인을 알고 서인을 알겠는가?"라는 식으로 대리청정을 맡기려고 하자 "세손은 이판을 누가 할 지 병판을 누가 할 지도 알 필요 없고 남인도 서인도 알 필요 없습니다." 라고 반대했으므로, 이에 세손(정조)이 반격하려고 했는데 홍국영이 직접 나선다면 위험해질 수 있다며 정조 대신에 상소를 올려줄 사람을 찾았는데 그 사람이 서명선이었다. 여담으로 서명선은 소론임에도 정치적 스탠스는 오히려 노론벽파와 유사했다. 정작 벽파끝판왕인 심환지에게는 그래도 배척당했지만...[8] 어차피 나눠줘봤자 너무 적으면 불만 너무 많으면 딴생각 할거고 둘 다 위험해지긴 마찬가지니 깔끔하게 숙청하는게 당연히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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