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을 확인하세요.
1. 개요
한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나 최근엔 3의 의미로 통한다.2. 賦役
국가나 공공 단체가 특정한 공익 사업을 위하여 보수 없이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노역. 옛날로 치면 역(役)과 같다. 성곽이나 관아를 공사하는데 백성들을 뽑아서 무보수로 시켰던 일로, 흔히 평시 징발의 일종으로 취급하여 '부역 징발'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자기가 먹을 것도 자기가 들고와야 했다. 일시적인 동원 사업의 경우 부역이라 하며, 이를 제도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징용이라 한다.한민족의 역사에서는 조선 시대를 끝으로 사라졌다고 생각들 하지만, 통금처럼 은근히 현대까지 남아 있었고 현재도 남아 있다. 군사정권 당시에 추진된 새마을 운동이나 산림녹화 사업 등을 할 때 주민들을 동원하였고[1], 최근에도 홍수나 산사태 같은 재해가 발생하면 해당 지역에 민방위 소집 등을 통하여 인력을 확보하여 일을 시킨다. 의도에 다소 차이가 있다지만, 국민들을 노역으로 국가 사업을 진행하거나, 재해를 극복하는 점에서는 조선시대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를 징병제라는 이름으로 잘 활용중이다. 북한에서도 모내기철과 수확철에는 농기계가 비싸다보니 주민들을 동원해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외에도 주민들을 동원해서 행사를 벌이는 경우도 잇는데, 이 경우에는 질병같은 이유가 아닌 이상 의무적으로 참석해야되기 때문에 회식 비슷하게 취급된다.
3. 赴役
1. 병역이나 부역(賦役)을 치르러 나감.2. 사사로이 서로의 일을 도와줌.
4. 附逆
국가에 반역이 되는 일에 동조하거나 가담함. 요새는 보통 전쟁 중의 점령당한 지역에서 점령군에 협조하거나 식민지에서 지배국가에 협조한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를 얘기한다. 부역을 한 사람을 가리켜 부역자라고 한다.4.1. 부역자
附逆者, collaborator, quisling전쟁 중의 점령당한 지역에서 점령군에 협조하거나 식민지에서 지배국가에 협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유명한 부역자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 협조한 유럽인들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부역자가 꽤 있었는데 문제는 부역자를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2]가 많았다. 자발적인 부역과 강제 부역을 구분하지 않고 도매금으로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부역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부역자로 몰아서 처형하는 일도 있었다.
4.1.1. 자발적 부역자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점령 당시 인도네시아 세력에 부역한 일부 소수민족이나 나치 독일이 동유럽을 점령했을 때 유대인이나 저항군을 솎아내는데 협조한 현지민 등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비시 프랑스가 끝나자 부역자들을 강하게 처벌했다.4.1.2. 강제 부역자
자발적으로 부역에 나서는 사람으론 부족하기 때문에 점령군이나 식민정부에서는 강제징용이나 강제징병 같은 강제적 수단을 사용한다.4.1.3. 부역자들 사례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북아프리카나 유럽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뒤에 재구성된 독일 소속의 자유 인도 군단(Free India Legion). 영국 식민제국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자유 인도 군단이라고 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했다.
나치 소속의 군으로 소련을 공격한 프랑스인들.
유대인들을 불러내는 라트비아의 보조경찰.
작전회의를 하는 카민스키와 그의 부하들. 특히 그가 속한 카민스키 여단은 범죄 행위가 워낙 막장이여서 러시아계 부역자 중에선 ROA 뼘칠 정도로 유명하다.
하인리히 힘러와 악수하는 안드레이 블라소프. 블라소프는 동부전선 중 러시아 포로와 지원자들이 모인 ROA를 이끌었다. 러시아 부역자 하면 카민스키 다음으로 생각나는 사례. [3]
알바니아에서 훈련을 받는 나치 소속 무슬림.
독일-아랍 군단의 병사들. 이들은 지원병이었다.
4.1.4. 부역자의 처벌
독일인과 관계를 맺었다며 삭발당하는 프랑스 여자 |
독일 군인과의 연애, 매춘 그리고 청소나 접시닦이 같은 잡역도 처벌되었는데 독일군에게 강간당한 여성피해자도 부역자로 몰리는 일이 있었다. 이들은 정식 재판도 없이 레지스탕스에 의해 사적제재를 당했고 특히 좌익과 우익이 상대방을 부역자로 몰아서 처벌하거나 사적인 원한으로 무고한 사람을 부역자로 모함하여 죽이는 일도 많았다. 보통은 위의 사진처럼 삭발을 하고 조리돌림 시켰으며, 일부는 처형당했다.
비시 프랑스에서 밀리스 경찰로 복무하여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의해 즉결처형되는 부역자들 |
게슈타포에 협조했던 덴마크인이 조리돌림되고 있다. |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협조했던 부역자들은 무려 55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 머슴 같은 하층 계급들이 많았는데, 이 머슴들은 공교롭게도 1950년 3월에 있었던 토지개혁에서 제외되어 토지를 분배받지 못해서 불만이 높았는데, 때마침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머슴들한테도 땅을 나눠준다고 약속하자 많은 수가 북한군에 협력하였다.링크 이들은 벌인 행각은 인민재판 항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점령지역이 하나둘 수복되자 부역에 대한 보복으로 군경과 우익 민병대에 의해 부역자와 부역자로 의심되는 자들, 그리고 그 가족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이 '부역 혐의 학살'의 규모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 다음가는 규모이거나 혹은 보도연맹 학살을 뛰어넘는 규모였다.[4]
4.1.5. 창작물에서의 부역자들
- 트랜스포머 시네마틱 세계관
- 퍼시픽 림 시리즈
- 뉴턴 가이즐러 - 그 부역자 과학자의 부역 행위도 사실은 프리커서가 배후에 있었다. 그래서 프리커서의 바지사장 노릇을 한 것이다.
[1] 이 시절에는 동원 참여자에게 대가로 밀가루나 쌀을 지급했다.[2] 동네 머슴이 완장 차고 지주 일가를 박살 내놓은 사례가 제일 흔하고, 일제강점기 친일파라고 쫓겨난 동네 순사나 지주가 완장 차고 와서 멀쩡한 동네 주민들을 반동으로 몰거나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일도 많다.[3] 그러나 카민스키 여단과 달리 맹목적인 전범만 저지른 사례는 아니고, 블라소프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그래도 카민스키보단 평가가 낫다.[4] 이렇게 학살 규모를 애매하게 설명한 까닭은 '부역 혐의 학살'로 희생된 희생자들 수를 추산하는 것조차 어렵기 때문. 진실화해위원회가 전체 피해 규모 파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5] 자세하게 말하자면 매성노(賣星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