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려에서 공신 칭호를 수여받은 인물의 목록이다.2.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고려 삼한벽상공신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개국공신 | |||
1등 | ||||
홍유 | 배현경 | 신숭겸 | 복지겸 | |
2등 | ||||
견권 | 능식 | 권신 | 염상 | |
김락 | 연주 | 마난 | ||
3등 | ||||
2천여 명(사서에 전하지 않음) | ||||
삼한공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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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공신(三韓功臣)은 고려의 삼한일통에 공을 세운 공신을 일컫는다. 940년 신흥사를 중수할 때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건물 내부 동·서쪽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삼한벽상공신이라고도 한다. 한편 삼한벽상공신이 삼한공신 중에서도 벽에 그려진 공신들을 따로 지칭하는 상위 등급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삼한공신들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지칭한다. 삼한공신은 기록에 대체로 삼한공신, 삼한벽상공신, 개국공(開國公) 등의 칭호로 나타난다.
이들은 숫자가 많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금석문 등의 자료를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러 문제가 겹쳐서 세간에 전해지는 삼한공신 명단이나 특정 가문과 삼한공신과의 연관성은 조선 시대까지만 와도 보증되지 않는다. 삼한공신이 되어 중앙으로 진출한 호족 중 다수가 광종의 공포정치로 인해 경우에 따라 후대에 천역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나올 정도로 가문의 부침을 겪은 데다, 여요전쟁으로 공문서 등 각종 사료가 소실된 것의 영향까지 겹친 탓인지 문종 연간에 이르러서는 증명서를 분실한 경우라도 어떻게든 삼한공신 후손이라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음서 혜택을 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여요전쟁 이전의 왕실 및 중앙 기록을 복원한 7대 실록조차 극도로 부실한 내용만 남았으리라고 추정되는 마당에 기존의 상훈 체계를 복원하는 과정이 순탄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에서는 실질적으로 삼한공신이라는 용어가 개국공신이라는 용어를 대신했다. 《고려사》는 918년 왕건은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건국한 후에 쿠데타를 통한 건국 과정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부득이하게 쿠데타 구성원을 포상했다고 말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삼한일통 프로파간다와 통일 과정에서 새로 포섭된 호족들에게 중점을 두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종 때 개국공신에게 공음전을 하사하였다는 기사를 제외하면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기록에서 개국공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쿠데타 당시의 개국공신 2등 중 그나마 통일 전쟁 과정에서의 행적이 풍부한 김락(金樂)은 충렬왕 때의 기록에는 태조통합공신(太祖統合功臣)으로 나온다.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한 후 당시 포상을 받은 무리들을 개국공신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를 정할 때의 기록도 정확히는 개국이나 공신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단지 포상의 등급만 나눠놓고 있다. 애초에 3등이 2천여 명이나 되어 명단조차 알 수 없던 것을 보면 실제로 의미있는 공을 세웠다기보다 단순히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 전원이나 기존 행정 및 치안 조직이 포섭 대상이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대신 왕건에게 배향된 6공신(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 최응)과 삼한공신이 한 묶음으로 국가 보훈 차원에서 사실상 개국공신 대우를 받았다.[1] 고종 때 실시된 보훈 행정에서는 구체적으로 6공신 및 삼한공신이 최고 등급, 삼한후벽상공신이 그 다음, 그 외 배향공신이 또 그 다음 등급의 대우로 나타난다.
3.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삼한벽상공신은 고려 시대 공신 등급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현종 이후에 이에 버금가는 큰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이라고 해서 맞먹는 등급으로 해주었다.- 양규(楊規), 김숙흥(金叔興)
1011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함께 1,700명[3]의 결사대를 이끌고 20만의 거란군 후미를 흔들며 2차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 퇴각하는 거란군 본대를 맞이해 애전에서 싸우다 전사.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무신정권을 열은 인물들로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후 벽상공신으로 봉해졌으나 이들이 실각한 후 모두 삭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의민(李義旼)
경대승이 죽고난 뒤에 권력공백이 발생하자 명종이 자신을 지지하는 정권을 이룰만했던 이의민을 개경으로 불러왔다. 이후 출세를 거듭하며 1194년에 벽상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이의민이 죽고난 뒤에 삭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경승(杜景升)
이의민 집권 시기의 인물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등의 활약과 집권층과의 친분으로 인해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다 명종이 이의민을 견제하기 위해 두경승에게 지지를 보냈는데, 그 결과가 삼한후벽상공신 책록이었다. 양규와 김숙흥의 사례와 달리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는 승진인셈. 최충헌(崔忠獻),최우(崔瑀)
최씨 정권이 숙청된 뒤에 삭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김방경과 강감찬이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잘못 언급되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4. 무오공신(戊午功臣)
고종 45년(1258) 무오정변으로 최씨 정권을 무너트리는데 공을 세운 공신.참고로 김준 일가 및 이공주 등은 원래 최씨 가문의 가노(家奴)였기에 본관이 없다.[5]
고려 무오공신 | |||||
봉호 | 시호 | 성명 | 본관 | 생년/몰년 | 비고 |
위사공신(衛社功臣) | |||||
해양후 海陽侯 | 김인준 金仁俊 | × | ? 1268 | 이후 김준(金俊)으로 개명. | |
박희실 朴希實 | 문의 | ? ? | |||
이연소 李延紹 | ? | ? ? | 이후 이인환(李仁桓)으로 개명. | ||
김승준 金承俊 | × | ? 1268 | 이후 김충(金冲)으로 개명. | ||
박송비 朴松庇 | 덕원 | ? 1278 | |||
문정공 文正公 | 류경 柳璥 | 문화 | 1211 1289 | ||
김대재 金大材 | × | ? 1268 | |||
김용재 金用材 | × | ? 1268 | |||
김식재 金植材 | × | ? ? | 김석재(金碩材)로도 표기됨. | ||
차송우 車松祐 | 연안 | ? 1268 | |||
장열공 莊烈公 | 임연 林衍 | 진주 | 1215 1270 | ||
이공주 李公柱 | × | ? ? | |||
김홍취 金洪就 | 강릉 | ? ? | |||
동력보좌공신(同力輔佐功臣) | |||||
백영정 白永貞 | 수원 | ? ? | |||
박천식 朴天植 | ? | ? ? | |||
이제 李梯 | ? | ? 1268 | 이제(李禔)로도 표기됨. | ||
서정 徐挺 | ? | ? ? | |||
조문주 趙文柱 | ? | ? 1269 | |||
박성대 朴成大 | 덕원 | ? ? | |||
신윤화 辛允和 | ? | ? ? | |||
오수산 吳壽山 | ? | ? ? | |||
서균한 徐均漢 | ? | ? ? | |||
송송례 宋松禮 | 여산 | 1207 1289 | |||
김정려 金貞呂 | ? | ? ? | |||
여우창 呂遇昌 | 함양 | ? ? | |||
유존혁 劉存奕 | ? | ? 1273 | |||
강국승 康國升 | ? | ? ? | |||
전취천 田取千 | ? | ? ? |
5. 수종공신(隨從功臣)
원 간섭기에 고려의 왕 또는 세자가 원나라에 갔을 때 수행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록했는데, 이를 수종공신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원종 때부터 책록을 시작하여 공민왕 때까지 이어졌다.
5.1. 충혜왕(1342년)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한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소환당하자 이때 왕을 수행하여 보필한 신하들이 책록되었다.1등 공신
- 윤석(尹碩)
- 채하중(蔡河中)
- 김석견(金石堅)
- 이능간(李凌幹)
- 홍빈(洪彬)
- 김영돈(金永旽)
- 임자송(任子松)
- 김인연(金仁沇)
- 김륜(金倫)
- 이제현(李齊賢)
- 이조년(李兆年)
- 한종유(韓宗愈)
- 김영후(金永煦)
- 이몽가(李蒙哥)
- 이운(李雲)
- 윤신계(尹莘係)
- 이엄(李儼)
- 윤환(尹桓)
- 박청(朴靑)
- 강윤충(康允忠)
- 안천길(安千吉)
- 노영서(盧英瑞)
- 한의신(韓義臣)
- 배전(裵佺)
- 최유(崔濡)
- 황석기(黃石奇)
- 손수경(孫守卿)
- 윤원우(尹元祐)
- 김첨수(金添壽)
- 김선장(金善莊)
- 남궁 신(南宮信)
- 임성(林成)
2등 공신
- 김승택(金承澤)
- 박인수(朴仁壽)
- 안자유(安子由)
- 김경(金鏡)
- 전윤장(全允藏)
- 손원(孫遠)
- 이광원(李光遠)
- 김장(金莊)
- 진교화(陳敎化)
- 승신(承信)
- 이헌(李軒)
- 손습(孫襲)
- 왕석(王碩)
- 이충(李沖)
- 이원룡(李元龍)
- 이광계(李光桂)
- 전경(全卿)
- 홍매노(洪買奴)
5.2.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352(공민왕 원년), 공민왕이 왕자 시절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신.고려 연저수종공신 | |||||
봉호 | 시호 | 성명 | 본관 | 생년/몰년 | 비고 |
일등상공신(一等上功臣) | |||||
조일신 趙日新 | 평양 | ? 1352 | |||
금녕부원군 金寧府院君 | 충간공 忠簡公 | 김보 金普 | 김해 | ? ? | |
평성부원군 平城府院君 | 김일봉 金逸逢 | ? | ? 1365 | ||
서령군 瑞寧君 | 문희공 文僖公 | 류숙 柳淑 | 서산 | 1316 1368 | |
정환 鄭桓 | ? | ? ? | |||
영원부원군 寧原府院君 | 충희공 忠禧公 | 신소봉 申小鳳 | ? 환관 | ? ? | |
일등공신(一等功臣) | |||||
평해부원군 平海府院君 | 손기 孫琦 | ? | ? ? | ||
이몽가 李蒙哥 | ? | ? ? | |||
하성부원군 夏城府院君 | 양평공 襄平公 | 조익청 曺益淸 | 창녕 | ? 1352 | |
안성군 安城君 | 김용 金鏞 | 안성 | ? 1363 |
6. 중흥공신(中興功臣)
폐가입진의 논리로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이른바 흥국사 9공신이라 불린다.고려 중흥공신 | ||||
1389년 12월 18일 공양왕 책록 | ||||
봉호 | 성명 | 본관 | 생년/몰년 | 비고 |
화령군개국충의백 和寧郡開國忠義伯 | 이성계 李成桂 | 전주 | 1335 1408 | |
청성군충의백 靑城郡忠義伯 | 심덕부 沈德符 | 청송 | 1328 1401 |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 |
익양군충의백 益陽郡忠義伯 | 정몽주 鄭夢周 | 연일 | 1337 1392 | 영원군(永原君)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으로 봉군→1390년 승격 |
조선군충의군 朝鮮郡忠義君 | 조준 趙浚 | 평양 | 1346 1405 | |
○○○忠義君 | 池湧奇 | 충주 | ? 1392 |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봉호 미상(삭훈) |
○○○忠義君 | 偰長壽 | ×[6] | 1341 1399 | 완성군(完城君) 봉호 미상(삭훈), 조선 초기에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으로 봉군 |
○○○충의군 ○○○忠義君 | 박위 朴葳 | 밀양 | ? 1398 | 봉호 미상(삭훈 후 복권) |
창성군충의군 昌城郡忠義君 | 성석린 成石璘 | 창녕 | 1338 1423 | |
봉화군충의군 奉化郡忠義君 | 정도전 鄭道傳 | 봉화 | ? 1398 |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 봉작 후 개정 1392년 삭훈 후 복권 |
7. 회군공신(回軍功臣)
1388년 위화도 회군 및 개성 시가전에 가담한 인물들로, 당초 공신으로 선정된 것은 45명이고 추가로 변안열 등 고인 7명과 윤소종·남재에 대한 포상이 검토되었다. 옥사에 연루된 조민수·왕안덕·지용기·최공철·변안열·김백흥 등 6명이 삭훈되면서, 최종적으론 48명에게 공신전이 수여되었다. 회군공신은 조선 때에도 재책록되었기에 회군공신전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이 중에서 3명이 제외되었다. 《고려사》에는 박총·안경·김상·윤소종·남재 등이 추록 명단에 거론되고 있으나, 이들은 조선 때 회군공신으로 추록된 점으로 보아 고려 당시에도 논의는 있었으나 실제 추록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성리·이지·장자충·최윤수·황순상 등이 실제 추록된 인물로 판단된다.고려 회군공신 | ||||
1390년 4월 9일 공양왕 책록 | ||||
봉호 | 성명 | 본관 | 생년/몰년 | 비고 |
1등 공신 | ||||
화령군개국충의백 和寧郡開國忠義伯 | 이성계 李成桂 | 전주 | 1335 1408 | |
창성부원군 昌城府院君 | 曺敏修 | 창녕 | ? 1390 | 삭훈 |
2등 공신 | ||||
청성군충의백 靑城郡忠義伯 | 심덕부 沈德符 | 청송 | 1328 1401 |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 |
강원군 江原君 | 王安德 | ? 1392 | 삭훈 | |
○○○忠義君 | 池湧奇 | 충주 | ? 1392 |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삭훈 |
배극렴 裵克廉 | 성산 | 1325 1392 | ||
윤호 尹虎 | 파평 | ? 1393 | ||
정지 鄭地 | 나주 | 1347 1391 | 삭훈 후 복권 | |
유만수 柳蔓殊 | 문화 | ? 1398 | ||
○○○충의군 ○○○忠義君 | 박위 朴葳 | 밀양 | ? 1398 | 삭훈 후 복권 |
최윤지 崔允沚 | 해주 | 1331 1403 | ||
황보림 皇甫琳 | 영천 | 1333 1394 | ||
이무 李茂 | 단양 | 1355 1409 | ||
이빈 李彬 | ? 1410 | |||
용성군 龍城君 | 조인옥 趙仁沃 | 한양 | 1347 1396 | |
남은 南誾 | 의령 | 1354 1398 | ||
봉복군 奉福君 | 신조 神照 | ? 승려 | ? ? | |
경보 慶補 | 청주 | 1314 1406 | ||
동천군 東川君 | 조희고 趙希古 | ? ? | ||
邊安烈 | 원주 | 1334 1390 | 추록, 삭훈 | |
용성군 龍城君 | 조인벽 趙仁璧 | 한양 | ? 1393 | 추록 |
척산군 陟山君 | 이원계 李元桂 | 전주 | 1330 1388 | 추록 |
3등 공신 | ||||
경의 慶儀 | 청주 | ? 1395 | ||
이화 李和 | 전주 | 1348 1408 | ||
최단 崔鄲 | 경주 | ? ? | ||
최운해 崔雲海 | 통천 | 1347 1404 | ||
이두란 李豆蘭 | 청해 | 1331 1402 | ||
육려 陸麗 | 옥천 | ? ? | ||
이승원 李承源 | ? ? | |||
윤사덕 尹思德 | ? 1394 | |||
구성로 具成老 | ? ? | |||
박영충 朴永忠 | 죽산 | ? ? | ||
정요 鄭曜 | 초계 | 1331 1414 | ||
황희석 黃希碩 | 평해 | ? 1394 | ||
유광우 兪光祐 | ? ? | |||
김인찬 金仁贊 | 양근 | ? 1392 | ||
장사길 張思吉 | 안동 | ? 1418 | ||
崔公哲 | ? 1390 | 삭훈 | ||
왕빈 王賓 | ? ? | |||
박가실 朴可實 | ? 1410 | |||
김천장 金天莊 | ? ? | |||
정자의 鄭子義 | ? ? | |||
이백 李伯 | ? ? | |||
조온 趙溫 | 한양 | 1347 1417 | ||
정송 鄭松 | ? ? | |||
이덕림 李德林 | 경주 | ? ? | ||
백영우 白英祐 | ? ? | |||
장철 張哲 | 안동 | ? 1399 | ||
남성리 南成理 | ? 1398 | 추록 | ||
이지 李至 | ? 1414 | 추록 | ||
장자충 張子忠 | ? ? | 추록 | ||
최윤수 崔允壽 | ? ? | 추록 | ||
황순상 黃順常 | ? ? | 추록 | ||
金伯興 | ? 1390 | 추록, 삭훈 |
8. 공신호
- 왕식렴: 광국익찬공신(匡國翊贊功臣)
- 강감찬: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 최충
- 1050년: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 1053년: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 1055년: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
- 윤관: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 이자겸
- 1115년: 익성공신(翼聖功臣)
- 1121년: 동덕추성좌리공신(同德推誠佐理功臣)
- 1122년: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
- 1124년: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 김부식
- 1136년: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
- 1145년 무렵: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 최우: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
- 최항: 강민제세공신(康民濟世功臣)
- 김방경
- 1282년: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 추증: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 송분(宋玢): 추성찬화안사공신(推誠贊化安社功臣)
- 정인경(鄭仁卿): 추성정책안사공신(推誠定策安社功臣)
- 최성지(崔誠之):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 이제현
- 1320년: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
-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 1342년: 수종공신(隨從功臣)
- 1351년: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
- 1352년: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
- 최안도: 협모동덕공신(協謀同德功臣)
- 윤환(尹桓)
- 1342년: 수성양절보리공신(輸誠亮節輔理功臣)
- 1356년: 수충협의동덕익찬공신(輸忠恊義同德翊贊功臣)
- 1371년: 추성병의동덕섭리익찬공신(推誠秉義同德變理翊贊功臣)
- 조일신
- 1352년: 수충분의동덕좌리공신(輸忠奮義同德佐理功臣)
- 1352년: 수충분의동덕좌리찬화안사공신(輸忠奮義同德佐理贊化安社功臣)
- 홍언박(洪彦博)
- 1352년: 추성양절좌리공신(推誠亮節佐理功臣)
- 1354년: 단성양절보리안사공신(端城亮節輔理安社功臣)
- 최원(崔源): 진력협모공신(陳力協謀功臣)
- 류숙(柳淑): 안사공신(安社功臣)
- 이색
- 1363년: 단성보리공신(端誠保理功臣)
- 1371년: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
- 1377년: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
- 이공수(李公遂): 추충수의동덕찬화공신(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
- 김선치(金先致)
- 1365년: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 1378년: 추충보절찬화공신(推忠保節贊化功臣)
- 최원직(崔元直):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 추증
- 이무방(李茂芳):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 설장수
- 1362년: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
- 1391년: 추성보리정난공신(推誠輔理定難功臣)
- 최영
- 1364년: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
- 1378년: 진충분의좌명안사공신(盡忠奮義佐命安社功臣)
- 이성계
- 1364년: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
- 1385년: 정원단성양절익대공신(定遠端誠亮節翊戴功臣)
- 1388년: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善威同德安社功臣)사양 - 1389년: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 1391년: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안사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安社功臣)
- 조민수
- 1374년: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
- 1388년: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善威同德安社功臣)
- 성석린
- 1374년: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
- 1380년: 단성익조좌리공신(端誠翊祚佐理功臣)
- 1391년: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
- 1391년: 단성보절찬화정조공신(端誠保節贊化定祚功臣)
- 조준
- 1383년: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
- 1388년: 추충여절좌명공신(推忠勵節佐命功臣)
- 1389년: 충근여절좌명정조공신(忠勤勵節佐命定祚功臣)
- 1391년: 충근여절좌명정조정난공신(忠勤勵節佐命定祚定難功臣)
- 우현보: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
- 심덕부
- 1389년: 충근양절익찬좌명공신(忠勤亮節翊贊佐命功臣)
- 1391년: 충근양절익찬좌명안사공신(忠勤亮節翊贊佐命安社功臣)
- 정몽주
- 1389년: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
- 1391년: 순충논도좌명안사공신(純忠論道佐命安社功臣)
- 정도전
- 1389년: 추충논도좌명공신(推忠論道佐命功臣)
[1] 6공신 중 최응을 제외한 나머지는 삼한공신에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최응은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태조 6공신은 실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더라도 대개 삼한공신 앞에 별도로 언급된다.[2] 신라 병부령 이금현(李金現)의 아들로, 고려에 귀부한 신라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 사이의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와 혼인하였다. 1375년 목은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文忠公李氏墓誌銘, 문충공이씨묘지명)에서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문충공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선계(先系)를 기록하면서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를 언급하였다. 그동안 문헌으로만 내용이 전했으나 2007년 12월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있는 이제현 무덤에서 청석(판암)을 다듬어 만든 세로 1.68m, 가로 63.2cm, 두께 20.5cm, 무게 600kg의 역대급 규모의 묘지석이 실제로 출토되었다.[3] 1,000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4] 1308년에 충선왕이 개편한 산계로,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과 종1품 중대광(重大匡)의 상계(上階)로 그 앞에 '벽상삼한(壁上三韓)'을 덧붙였다. 바로 이듬해에 폐지되었으나, 공민왕이 1362년에 재도입했다.[5] 《고려사》 지리지에서 해양현은 김준의 외향(外鄕)이라고 한 것을 볼 때, 본관이 아니라 모계 혈통의 출신지로 보인다.[6] 아버지 설손이 원나라 출신 색목인 관료였다가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었기에 원래 본관이 없었다. 설장수의 본관은 조선 때인 1369년에 계림(경주)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