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word-break:keep-all; min-height:2em"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시대 구분 | <colbgcolor=#fff,#1f2023>건국 초기(후삼국시대) → 문벌귀족기 → 무신정권기 → 원 간섭기(몽골복속기) → 말기(반원개혁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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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
호족 → 문벌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
고려 高麗 | ||
무신정권기 | ||
1170년 ~ 1270년 (100년) | ||
무신정변 이전 | 항복 이후 | |
문벌귀족기 | 원 간섭기 | |
<colbgcolor=#000><colcolor=#fff> 수도 | 개경 (1170 ~ 1232) 강도 (1232 ~ 1270)[1] | |
정부형태 | 중방 체제, 전시과 봉건제 | |
국가원수 | 고려 대왕 | |
정부수반 | 문하시중[2] → 교정별감[3] | |
역대 정권 수장 | 이의방 (1170 ~ 1174) 정중부 (1174 ~ 1179) 경대승 (1179 ~ 1183) 이의민 (1184 ~ 1196) 최충헌 (1196 ~ 1219) 최우 (1219 ~ 1249) 최항 (1249 ~ 1257) 최의 (1257 ~ 1258) 김준 (1258 ~ 1268) 임연 (1268 ~ 1270) 임유무 (1270) | |
언어 | 중세 한국어 | |
문자 | 한자, 구결 | |
종교 | 대승 불교[4] | |
주요 사건 | 1231 ~ 1259년 여몽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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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신정권(武臣政權)은 고려 시대 중기에 무신들에 의해 나라가 통치되던 시기와 그 당시의 정권을 일컫는 말이다.[5]1170년, 무신들은 오랜 기간 문신들의 업신여김을 인내하다가 보현원에서[6] 무신정변을 일으켰고, 기존의 고려를 지탱해온 문신들과 지배계층을 학살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한 뒤 명종을 옹립했고 정권을 차지했다. 이후 숙청을 일으킨 무신들의 일가족과 친목파벌들이 돌아가면서 100년의 기간(1170년 ~ 1270년) 동안 고려를 통치하게 된다.
2. 성립과 소멸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7] 당연히 무신정권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지 한참 이후에야, 고려 말기의 각종 인재와 영웅들이 마구 출현한다. 즉 고려는 여전히 잠재력이 남아있는 국가였으나, 무신정권이 새로운 고인 물이 되어서 100년 동안 열심히 고려의 인재 출현을 막았던 셈이다. 본인들이 문신들의 차별 때문에 국가를 점령했다는 프로파간다를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기존의 문신들보다 더욱 원칙 없고 지독하게 친목질을 통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앞뒤 논리도 안 맞는 옹졸한 방식이었다.무신정권은 기존의 쿠데타 정권과는 다르다.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끼리 마피아처럼 권력을 돌려먹기 및 권력 쟁탈을 여러 차례 하면서 군주는 명목상의 국가수반이 되어 필요에 따라 교체와 임명이 되었다. 대대로 세습하는 60년 최씨 정권까지 가면 최씨 가문의 중방으로 변질했다.[8]
결국 무신정권에 끼지 못한 지방 군인들도 국가를 나눠 먹겠다며, 무신정권처럼 군사력을 사유화하면서 이로 인해 무신정권과 똑같은 형식으로 반란이 잦게 되었다. 게다가 무신정권은 중앙의 정치 깡패 집단에 불과했으므로, 지방에 대한 지배력의 한계가 있으니 귀찮으면 지방 통치를 방관했다. 한마디로, 십상시와 세도정치의 더욱 무능했던 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또한, 기존의 문신들보다 훨씬 더 심각한 친목질 때문에, 본인들의 파벌에 끼지 못하는 인재들에게는 권력을 나눠주지 않고 군인끼리 차별하는 경향도 더욱더 강했다. 이로 인해 명색이 무신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군들과 지방군들의 내전이라 볼 수 있는 조위총의 난이 발생하였다. 무신정변 이후 모든 관직과 이권을 중앙군들 특히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들만 나눠먹은 결과로 인해 벌어진 사태였다.
무신정권은 초기에는 무신정변을 일으킨 집단하고 거기에 가담한 중앙군들만이 특혜와 이권을 누리다가 무신정권이 이후 최씨 가문의 독재로 변질되면서 중앙군들마저 이런 특혜와 이권에서 배제당하고 최씨 가문의 사병들인 도방과 삼별초들만이 그것도 최 씨 가문의 집권자들과 그들과 가까운 일부 장교들만 모든 이권을 독차지하는 폐쇄적인 형태로 운영되었다. 결국 도방과 삼별초마저도 폐쇄적으로 운영하다 보니 나중에 도방과 삼별초 집단들 중 이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 집단들은 최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동원되어서 최씨 가문을 멸문지화시켰다.
집권 순서대로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그리고 최충헌 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권력이 안정기에 접어 들었고 이후 최우, 최항, 최의까지 4대 60년간 이어진 최씨 정권과 삼별초 출신의 김준, 임연, 임유무가 연이어 정권을 잡았다. 크게 최충헌까지의 전반부와 최충헌 이후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9]
고려사에서는 무신정권 집권자 중 경대승만 열전에 실려있고, 나머지는 전부 반역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10] 임연과 임유무는 함께 하나의 열전으로 수록했고, 사실상 혼자 집권 못한 이고는 별도의 열전이 없다. 몽골과의 전쟁 끝에 허수아비로 전락해있던 고려의 군주 원종이 원을 등에 업고 친몽주의적인 정책으로 이들을 압박 및 견제한다. 끝내 임유무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가 원종에게 밀명을 받은 배신자 무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다시 개경(개경 환도)으로 돌아오면서 고려는 무신정권 치하에서는 가까스로 벗어나지만 그때부터는 원 간섭기였다.
잔당들이 삼별초의 난으로 저항했지만 관군과 몽골군이 진압에 나서면서 제주도의 저항을 끝으로 모조리 전멸하였고 결국 무신정권은 사라졌다. 다만 이들 세력 일부가 오늘날의 일본 오키나와로 탈출했다는 설이 일부 나왔다고 한다. 이 시기에 오키나와에 갑자기 거성이 나오는 등 발달한 건축 기술이 등장하였으며 오키나와 유적지에서 대규모로 고려 기와가 쏟아진다고 한다. 다만 삼별초 세력이 아니라 조선 건국 이후에 옮겨간 유민이라는 설도 있다.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12세기~14세기 사이에 한반도에서 오키나와로 대규모 유민이 건너갔음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관련 기사
3. 특징
3.1. 무너지는 국가 체제
그래도 초기인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삼두 시기 - 이의방 - 정중부 때까지는 균형을 유지했는데, 이는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의 권한이 무신정변으로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뒷날 이고가 이의방에게 살해되면서 삼두 균형이 깨졌으나 중방의 권한이 이의방과 정중부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었다. 하지만 이의방이 정중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한 후에 중방을 무력화시키면서 무신 정권 집정자의 견제 세력이 사라져 버렸고, 이의민[11]을 거쳐 최충헌 대에 이르러선 아예 독재 정권이 되어 아들부터 증손자까지 권력이 세습되었다. 기존의 엘리트층을 제거하고 새로 권력을 잡은 이들은 전임자를 대체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들이었고, 결과적으로 고려의 국정은 파탄나고 만다.무신 정권은 시작부터 문제가 많았다. 무신정변의 주동자들은 중앙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까지는 일사천리로 해치웠지만 정작 그 권력을 사용해 어떤 고려를 만들어 나갈지에 대한 비전은 아예 없었다. 문벌 귀족 시대의 문제점을 일소하고 민생을 활성화하는 이상적이고 정석적인 정치 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신들의 이익을 합법적으로 보장할 이기적인 정치 구조조차 새로 만들지 않았고, 단지 기존의 정치 구조에서 윗자리에 올라타면 자신들이 문제없이 문벌 고관들의 권력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즉 지배층 내부의 권력 배분에 있어서 제도와 정치 구조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것이다. 이들은 왕을 무력으로 위협해 조정의 온갖 높은 작위를 자기 이름 앞에 덕지덕지 붙여 놓았지만, 정작 그 관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세련되게 합법화할 방법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관직은 그저 손에 쥔 권력에 붙일 이름표였을 뿐, 관직이 부여하는 권력의 정치적 역할과 그것의 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일절 몰랐던 것이다.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인들끼리 국가 권력을 배분한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나마 어떻게 나눠먹을지에 대한 합의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권 장악 후 손에 넣은 권력을 어떻게 나눌지, 내부 서열은 어떻게 정할지, 각자의 이권을 견제하거나 동맹을 공고히 하는 수단은 무엇으로 둘지 등에 대한 고려가 전무했기 때문에, 문벌 귀족들을 칼로 죽이고 그들이 갖고 있던 온갖 이권들을 빼앗자마자 자기들끼리 서로 더 많이 가져 가려고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변이 일어난 지 고작 몇 달 만에 소위 '조정 대신'이자 '정변의 일등공신'이라는 이고와 이의방이 맞싸움을 벌이다 이고가 처형된 사건은 정변의 주동자들 간에 권력 분배에 대한 공인된 합의가 전혀 없었음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국가 대신들 간의 권력 투쟁이 정치제도 하에서의 정쟁(政爭)이 아니라 살육전으로 판가름 난 것만 봐도, 결국 무신들 사이에서의 권력 보장이 명분이나 관직이 아니라 대신 개개인이 소유한 폭력의 규모와 망설임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무자비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중부를 역시 사병 세력을 동원해 살해한 경대승은 심지어 관직 하나 없이 자기 집에 머물면서도 도방이라는 사병 조직을 멋대로 창설하고는 이를 통해 나라 자체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조정 관직을 권력의 이름표 역할조차 제대로 못 하는 껍데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무신들은 기껏 손에 넣은 합법적인 관직을 탈법적인 힘(사병과 부정축재)의 크기를 키우는 수단으로만 썼고, 정작 자신의 권력을 제도 내에서 정당화시키기보다 상대보다 더 큰 폭력 집단을 구축해 먼저 공격하는 것에만 골몰했다. 이는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국가가 사분오열되어 군벌들이 발호한 아노미 상태에서 자주 보이는 행태인데, 이들은 일단 제도 자체는 멀쩡한 중앙 조정 안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군웅할거를 지속했다. 좋게 말해 군웅할거이지 이는 숫제 깡패의 논리로, 중앙 정부를 장악하고 조폭 파벌화한 무신들이 오로지 사병들의 머리 수를 통해 고려의 이권을 얼마만큼 나눠먹을지 주먹구구식으로 결정했던 것이 무신정권 초기 정권의 실태이다. 이는 최 씨 일가의 확실한 집권이 이루어져서 국가 체제가 안정되고, 군인들이 문신으로 바뀌고 권력이 평준화되기 이전까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칼 휘두르고 으름장을 놓아서 자기 뜻을 따르게 만드는 조폭식 해결법이, 먼 고대 부족국가라면 몰라도 한반도 전체를 다스리는 중세국가인 고려를 효율적으로 커버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관료제와 율령제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조폭이나 부족국가 수준의 정치능력을 보여준 무신정권은 그 권력의 확장에 필연적인 한계를 보였다. 끽해야 개경 내 친위 쿠데타로 권력 위에 올라탄 이들이 아무리 윽박지르고 향락을 공유해 봤자 고려 전체의 백성과 세력을 사유화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데 깡패의 논리로 보면, 자신이 사유화할 수 없는 병력은 결국 남의 군사 거나, 어차피 남의 군사가 될 존재들이었으므로 그들 개인의 차원에서는 없느니만 못했다. 다른 쪽의 쪽수가 불어나고 고려의 전체적인 국력이 예전처럼 강성해지며 통합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인재와 경쟁자들의 군사력 증가였고, 본인들이 그랬듯이 하룻밤만에 기습을 당해서 정부가 뒤집혀도 아무런 변명거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무신 권력자들은 자신이 직접 손에 쥘 수 없는 군사력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견제했고, 이는 국가 전체 국방력의 허약화를 가져왔다. 군사 동원력과 행정력이 이전 대 거란 전쟁 시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떨어진 것은 물론, 있는 군사들조차 유력자들이 각자 자기 보신을 위해 최대한 자기 곁에 잡아두려고 혈안이었기에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도는 극히 낮으면서 이익과 권력에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일단 무신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의종을 폐위시키면서 벌어졌고 그밖에 명종, 희종, 원종 등이 무인 집권자들에 의해 폐위당한 바 있다.[12] 이렇게 집권자에 오른 군인 출신 두목들의 입맛에 안 맞다 싶으면 군주도 마음대로 폐위할 정도로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극히 낮았지만, 이의민을 제외한 무신들은 실권자에서 만족하고 자신이 직접 군주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는 무신정권의 군사력이 수백 명 ~ 1천 명 단위로 전체 군사력과 비교해 매우 작은 규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신정권은 정부를 점령하는데만 필요한 군사력으로 문신들이 만들어놓은 체제를 하위호환으로 대물림하며 향락을 즐겼을 뿐이다.
한편 무신정권은 자신들의 이익과 신변에 위협이 간다면 국가가 망하든 말든 모든 문제와 책임을 회피하고 숨는 작태도 서슴지 않았다. 최씨 정권은 당시 12C 중반,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 제국의 군대를 맞아 적극적으로 항전할 생각도 혹은 협상을 할 생각도 않고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전도 항복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약 30여 년 동안 질질 시간을 끌었으며 순간순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항복만 반복하며 몽골을 기만하여 외교까지 막장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몽골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몽골이 침략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리고 몽골군이 내륙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하든 말든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몽골에 항복하면 자신들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명목상이나마 국왕이라면 대국에 항복해도 동아시아 전통의 책봉-조공 체제하에 편입되어[13] 제후국 군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지만 무신과 같이 단순한 실권자에 불과하다면 대국에 항복했을 때 보장받을 수 있는 지위가 없다. 실제로 몽골에 항복하고 얼마 못 가 무신정권이 붕괴됐다.
게다가 무신정권은 국정에는 큰 자질이 없는 자들이 기존의 문벌귀족들이 가졌던 부패를 더욱 저열하게 물려받았기 때문에, 국가를 쇠퇴시킨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의 군인들은 태반이 천민이나 까막눈이었다.[14] 덕분에 고위 군인조차 국가통치에 대한 지식 따윈 담쌓고, 본인의 이름만 겨우 쓸 줄 아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다 보니 무신정권부터 고려는 겉모습으로서만 남게 되었고, 국내외에 잘 알려진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허약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3.2. 군벌 세력의 정치화
무신정권은 군사력을 정치화시켜 몽골의 침략을 방관하고, 고려의 지방군대를 해체하여 침략의 자동문을 열어주면서 수시로 고려의 크고 작은 마을과 모든 목조건축을 불타서 사라지고 백성들이 유린당하는 지옥 같은 시대상에 기여를 했다. 무신정권의 군인들은 원래의 본분인 외적들과의 싸움을 극도로 꺼렸고, 정치판에서 무신의 기반이 되는 각지의 군인을 정치싸움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향락과 수탈을 국가 운영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무신정권의 군사력은 국가 전체를 정복할 규모가 아니었기에, 각지의 군인들도 중앙정부를 고깝게 보고 각자의 정치깡패 파벌의 단위로 나뉘어 국력을 사유화했다.그 결과 당연히 국가 전체의 방위력은 크게 쇠퇴했다. 특히, 무신정권은 본인들의 친목질 마피아에 끼지못한 지방군대를 견제했고, 심지어는 지방 군대를 해체했다. 다른 군인들과 인재들이 본인들이 저질렀던 무신정변처럼 하룻밤만에 정권을 뒤엎어버리더라도, 무신정권에는 아무런 명분과 대비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무신정권만이 고려에서 가장 크고 유일한 군사세력으로서 유지되기 위해서는, 본인들의 친목라인이 아닌 종류의 군사력은 국가 전체적으로는 약화된 상태에 머무르도록 견제해야만 했다.
또한, 무신정권의 유력자들은 군인이었으니 자신들의 병졸들을 최고의 인력으로 채웠지만, 이들은 국가 전체를 지키기 위한 대규모 군사력이 아니라 유력자 개인에게만 충성하는 사병들이며 수백명을 넘기기 힘든 정치깡패 혹은 마피아일 뿐이었다.[15] 그래서 고려왕조가 10만단위의 병력을 주구장창 무장시키고 지휘하며 싸우던 강력했던 시대는 무신정권이 아니라, 국가행정과 군사전략을 모두 다룰 수 있는 기존의 엘리트층인 왕실과 문벌귀족. 그리고 뒤이어 신진사대부가 집권했던, 무신정권을 제외한 전후의 시대들이다. 특히, 대규모 군단 육성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전문가들이 제대로 운영하고도 장기간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였다.[16] 그런데, 무신정권의 군사력 규모는 중앙정부를 장악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국가를 위해 엄청난 지출을 할만한 애국자들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대규모 군단을 육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경영능력도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무신정권은 국가 전체의 군사력 증강을 다른 지방의 경쟁자를 늘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멀쩡히 잘 돌아가던 지방군을 해체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한마디로, 무신정권은 중앙의 군인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빼돌리고 사유화하여 조폭으로 만들고, 서로 국가의 이권을 땅따먹기 식으로 해체하여 나눠먹는, 정치와 군사 모두의 약화를 가져왔다. 즉, 군사력을 정치화 하는 결과물은, 모든 국력이 약화된다는 비정상적인 국가 체제의 모든 단점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무신정권은 군벌이 통치하는 정권임에도 고려왕조에서 군사적으로는 가장 허약했던 지배세력이었다. 무신정권에도 어느 정도 사병은 있었지만, 경대승의 도방에서 보듯이 초창기에 직접 조종하는 사병은 고작 1백명 남짓이었고, 그런 경대승을 이의민이 "두려워했다" 라는 기록을 보면 다른 인물들도 경대승보다 군사력이나 능력으로 뛰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신정권의 전성기의 최씨 정권의 사병조차도 많아봐야 '1000명' 정도다. 물론, 친위세력인 삼별초의 규모가 상당하긴 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최씨 정권의 친위대였고, 사실상 유일한 국가의 군대임에도 정치 마피아가 되어버린 무신들의 생명줄이었기에, 국가의 방위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최씨 일가들의 안위만을 위해서 대기해야 했다.
4. 평가
무신정권은 군사적으로는 군사를 정치화하여서, 유일한 정규 군사세력 삼별초와 군인들을 국가가 아닌 본인들의 안위만 지키는 친위대로서 만들었고, 정치적으로는 고려 왕실을 혈통자판기 정도로 우습게 만들었다. 이후의 집권세력들인 권문세족들도 무능하고 부패한터라 무신정권이 망쳐놓은 고려의 군사력, 정치구조를 이용해서 고려를 갖고 놀았다. 그래서 무신정권 이후에도 고려의 강건함은 멸망할 때까지 회복되지 못했다.[17]무신정권은 기존에 고려를 이끌었던 엘리트층을 사실상 몰락시켰다. 그 덕분에 계급제가 초기화되고, 정계진출이 막힌 문벌귀족들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그러한 일도 무신들보다는 실무 역할을 맡은 문신과 귀족 출신들이 주도한 것이다. 즉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의 영향력은 단순히 군인 친목 향우회의 이권 문제를 위해서 일어난 죄질이 깊은 개적이 직접적인 결과물들이었으며, 무신정권이 고려를 위한 긍정적인 의도에서 벌인 활동은 집권기인 100년 동안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본인들의 사유물로 전락한 중앙의 병력을 제외하면 각 지방의 정규군을 해체하고, 민중을 가혹하게 착취하며 몽골 제국의 침략을 간접적으로 돕는 악영향을 낳는다.
무신정권 시대는 중앙부터 각 지방의 군인들이 그 지역의 군벌로 난립하며 군사력을 사유화하고 민중을 수탈하며 반란이 자주 벌어졌다. 이는 군인들의 본분인 국가방위가 중앙(권력)과 멀어지는 3D업종에 불과해졌을 뿐더러, 각 지역의 군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호감을 사는 잔치와 로비를 일삼는 것이 새로운 성공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의 중앙에서부터 그러한 풍조로 권력을 잡고 유지했고, 이러한 흐름은 최씨 일가의 세습정권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통제를 못하고 반복되었으며, 그리고 최씨 일가 집권기, 원 간섭기로 인한 최씨 일가 정권의 붕괴 이후의 잔당들에 이르기까지도, 군인들끼리의 친목질과 향락으로 전국 각지의 군사력을 각각의 파벌에서 영입하고 권력을 독점하여 돌려먹는 친목질은 무신정권의 군벌정치가 보여주는 근본적인 성질이었다.
조폭이나 다름없는 정치세력에 불과했던 초기 무신정권에서 국정이 점점 정상적으로 돌아가면서, 무신들도 결국 문신처럼 바뀌고 국가 전체를 위한 합리주의에 의해 쇠퇴한다. 또한, 고려의 계급제도가 다시 한 번 리셋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점은, 그것도 군인들의 친목질이 해소되고 난 이후부터 상식적인 문신들과 행정관료 위주의 정부로 돌아가면서 점점 효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주요 사건으로는 몽골군의 침입, 문인들의 정계진출이 막혔을 때 주체적인 문화의 발전, 토지제도와 등용제의 정비같은 개혁정책도 있었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신경을 쓴 것은 그저 군벌세력들의 이권문제 뿐이었다.
이 때문에 후대의 조선왕조에서는 무신정권을 반역집단으로 취급했고, 조선에서 펴낸 고려사에서도 경대승과 두경승을 제외한 모든 무신정권의 집권자들이 반역열전에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무신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제신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군부 독재정권 체제에서 무신정권이 정당한 무인들의 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이전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의 위인전 모음집에도 최충헌 편이 버젓이 발간될 정도였으며[18] 최씨 일가 군벌에 대해서도 단점이나 악영향을 숨기고 고려를 안정화시켰다고 왜곡을 하고 삼별초까지 대몽항쟁의 영웅으로서 미화까지 했었다. 물론, 이는 군사독재정권이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없어진다.
4.1. 이성계와의 비교
고려의 무신정권은 약 100년 후인 여말선초 시기에 비슷한 배경[19] 과 집권과정을 가진 이성계와 자주 비교되고는 했다.[20] 특히 최씨 정권은 군주도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4대에 걸쳐 집권할 정도로 이성계만큼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연히 양자를 비교하면서 왜 무신정권은 이성계처럼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고 집권기간도 더 길었던 사람이 많은데도[21] 이성계처럼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창건하지 못했는지 논의가 자주 있었다.일단 집권 수뇌부의 성격에 매우 큰 차이가 있었다. 무신정권은 일개 중앙 군벌 조직일 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무능했으나,[22] 이성계는 나라의 수호자로 평가받던 명장으로 무력뿐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무신정권은 견제세력이 없는 100년 동안 국가 운영에 대한 비전 없이 행패만 일삼아 국가를 퇴보시켰지만, 이성계는 고작 4년만에 국가를 통합하고 낡은 고려를 대신할 나름대로의 비전을 제시하며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여 질서와 안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이성계의 시대는 무신정권이 쉽사리 학살한 문신들과는 달리 매우 강성한 라이벌인 최영과 권문세족들이 남아있는 시대였다.
무신정권은 별다른 기반 없이 중앙을 장악할 수 있는 수준의 군사력만 있었지, 이성계와 같이 외적을 자기 사병으로 토벌할 정도의 압도적인 군사적인 능력은 없었다. 무신정권의 핵심 친위대도 딱 수도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깡패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고려 말기는 별 세력도 없었던 문신 조반이 염흥방의 노비에게 받은 수모를 복수하려고 겨우 수십 기의 병사를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다. 최충헌은 이 점을 염려했는지 집권한 뒤에 고향 진주에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었고 그 덕에 최씨 정권이 4대나 간 것이지만 몽골 제국의 침략이라는 변수 때문에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이성계는 고려 말기에 자기 휘하의 사병들인 가별초만 2천여명이나 되었고, 이들을 이끌고 다니며 외적들을 만날 때마다 박살내버렸고 이는 중국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만큼 의문의 여지도 없다. 사실 이성계의 가별초도 그들만의 특수성[23]을 제외하고 규모로만 따지면 이성계와 비슷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춘 라이벌이 상당수 있었다.
또한 이성계는 조준과 남은, 정도전, 윤소종 같이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할 유능한 문신들도 있었지만, 무신정권은 입지를 공고하게 할 훌륭한 공로도 없었고, 새로운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구현할 능력을 지닌 조력자도 없었다. 무신정권에서 그나마 좀 깨어있고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경대승 또한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 말고는 별다른 정치적 비전이 없었다. 그나마 이 복귀 정책도 당시 무신정변 덕분에 군주 자리에 오른거나 마찬가지인 명종에게 심한 불쾌감과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4.2. 일본 막부 체제와의 비교
무신정권은 무인들이 국왕과 문신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인들이 국가의 실권을 장악한 체제라는 점에서 일본의 막부(바쿠후)와 종종 비교된다. 공교롭게도 당대 일본 역시 가마쿠라 막부가 집권 중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 체제는 교토의 덴노가 여전히 군주로 군림하며, 이를 중심으로 하는 조정과 관직, 특히 제사와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기능은 그대로 두고, 무인들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하는 막부라는 정부를 따로 만들어서 이원화된 정부로 국가를 운영했다. 반면 무신정권은 국왕을 실권없는 허수아비로 내세워 상징적인 존재로만 두었다는 점은 일본과 같았지만, 기존 문신을 대신해 무신들이 중앙 정계의 실권을 장악한 형태여서 가마쿠라 막부처럼 독립적인 정부를 세워 국정의 이원화를 꾀하지는 않았다.한국의 무신정권과 굳이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가마쿠라 막부 이전에 세워진 헤이케의 로쿠하라 정권이 있다. 로쿠하라 정권 역시 중앙권력을 장악해 수도 교토에 머무르며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 하지만 로쿠하라 정권은 겐페이 합전에서 패배하여 지방세력이었던 미나모토 세력에게 무너졌고, 미나모토는 조정을 장악하는 대신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했다. 따라서 일본은 기존의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지방에 전혀 다른 형태의 무신정권(막부)로 교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반면 고려는 조위총의 난이라는 지방세력이 중앙의 무신정권에 도전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개경의 무신세력에 의해 진압됐고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공으로 붕괴할 때까지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계속 이어진다. 이후로도 일본은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부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는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한국사에서는 최후의 전제군주국가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 까지 비슷한 무신정권이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5. 집권자 및 기간
무신정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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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조원정 · 두경승 · 안경공 · 이소응 · 정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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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기타 |
1170년 ~ 1196년 (26년) | 무신정권 초기 | ||
- | 이고 | 1170년 8월 ~ 1171년 1월(5개월) | ◎ 사실 세력이 강했지만 서로 견제하던 시기라서 집권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이 시기는 엄밀히 말하자면 이의방, 정중부, 이고의 연립 정권(과두정치)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 무신 강경파로 문신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지만 정중부 등이 말려 무산. ◎ 역성을 꾀하다 이의방에게 암살됨. |
초대 | 이의방 | 1171년 1월 ~ 1174년 12월(4년) | ◎ 이고를 척살하고 실권자가 됨. ◎ 딸을 태자비로 삼음. ◎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러 갔다가 실패하여 돌아오던 중 정균에게 암살됨.(갑오정변) |
2대 | 정중부 | 1174년 12월 ~ 1179년 9월(5년) | ◎ 문하시중에 올라서 국사를 일체 자신에게 먼저 고하여 처결할 정도로 독재자급 권력을 누렸지만, 문신들을 우대하여 지지기반으로 삼음. 이후 나이로 인해 은퇴한 후에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이 본격적으로 실권을 쥐고 휘두름.[24] ◎ 이후 경대승의 쿠데타로 암살됨.(기해정변) |
3대 | 경대승 | 1179년 9월 ~ 1183년 7월(4년) | ◎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 차지. ◎ 자신의 경호를 맡기러 도방을 만듦. ◎ 무신정권 전기 집권자들 중 유일하게 무신정변을 부정하고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침. ◎ 무신 정권 집권자 중 유일하게 고위직에 오르지 않았으나 실권은 여전히 지님. ◎ 젊은 나이에 병사. 고려사에 적힌 것에 따르면 죽기 전에 정중부가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꿈을 꿨다고 하는데, 평소부터 정중부를 추종하던 잔여 세력을 크게 경계했기 때문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볼 수 있다. |
- | 조원정 | 1183년 7월 ~ 1187년 7월(4년) | ◎ 조원정은 경대승 집권기에도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거쳐 1183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까지 올라가는 등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여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권력의 한 축으로 있었으며 경대승 사후 이의민 집권 전까지의 약 6개월 간의 공백 기간 동안 자신의 세력 기반을 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 후에 명종이 이의민을 상경시켜 집권시켰고 이때에도 이의민과 연합정권의 성격으로 두경승과 함께 정권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 ◎ 공해전(公廨田)의 조세를 횡령하려다가 두경승과 문극겸에게 탄핵 당했고 이에 반기를 들어 군대를 동원해서 70여명이 수창궁에 들어와 추밀사 양익경과 내시원낭중 이규, 이찬 등 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등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
4대 | 이의민 | 1184년 2월 ~ 1196년 4월(12년) | ◎ '족보에 따르면' 리 왕조 황자의 후손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의민은 본래 천민 출신인 데다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고, 교차 검증도 전혀 되지 않아 해당 부분은 날조라고 봐야 한다.[25] 이의민은 소금 장수인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무신정변 동안 가장 많은 문신들을 죽여 악명을 떨쳤으며 이후 이의방의 명에 따라 의종을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의종의 척추를 꺾어 시해함. ◎ 경대승 집권 이후 의종을 시해했다는 이유 때문에 경주로 도망가 틀어박히나 경대승 사후 명종이 그를 불러 실권을 주면서[26] 무신정권의 4번째 집권자가 됨. ◎ 도방을 폐지했고, 경주를 기반으로 "신라부흥운동" 및 황제 즉위를 계획했다는 설도 있음.[27] ◎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게 암살됨.(병진정변) |
- | 두경승 | 1184년 2월 ~ 1196년 4월(12년) | ◎ 이의민의 집권기는 조원정, 두경승과의 연합정권이었다. ◎ 두경승은 이의민 집권의 시기에 '삼한벽상공신'으로 공신의 반열에 올랐고[28]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이르렀다. ◎ 서열상 오히려 이의민보다 높았으며 이의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바지사장이 아닌 서로 힘을 겨루는 대등한 관계였다. ◎ 1197년 최충헌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명종을 폐위시키면서 두경승도 자연도[29]로 유배보냈으며 그 곳에서 의문사했다.[30] |
1196년 ~ 1258년 (62년) | 최씨 정권 | ||
5대 | 최충헌[31] | 1196년 4월 ~ 1219년 9월(23년) | ◎ 미타산에서 이의민 과 그 일족을 척살하고 정권을 잡음. ◎ 도방을 재설치하고,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내세우는 동시에 교정도감을 세움. 최충헌 이후 임유무까지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은 모두 교정별감을 맡았다. ◎ 4명의 군주(신종, 희종, 강종, 고종)가 재위했고 2명의 군주(명종, 희종)를 폐위시킴. ◎ 최종 직위는 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
6대 | 최우[32] | 1219년 9월 ~ 1249년 11월(30년) | ◎ 정방을 자택에 설치. ◎ 그 밖에도 서방, 야별초와 마별초 설치. ◎ 몽골 제국이 침입하자 강화도로 천도를 주도하면서 30여년의 여몽전쟁으로 이어짐.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대구 부인사에서 불탄 것을 복원하고 다시 만들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최우와 승통 수기대사가 주도해서 만듦. |
7대 | 최항[33] | 1249년 11월 ~ 1257년 4월(8년) | ◎ 상복을 이틀 만에 벗고 아버지의 첩(연화)과 간통한 패륜아. ◎ 대몽항쟁 중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경손을 자신의 계모 대씨부인과 의붓동생이었던 오승적을 죽일 때 연관이 되어 있어 독주를 마시게 한 후 대장군 송길유의 손을 빌어 백령도 앞 바다에다 던져 익사시킴. |
8대 | 최의 | 1257년 4월 ~ 1258년 3월(1년) | ◎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 아버지가 죽은 날 아버지의 폐첩과 간통한 아버지 최항보다 더한 패륜아 ◎ 아버지의 가신이자 옛날에는 증조할아버지 최충헌의 가노였던 김준의 주도로 박송비, 류경, 이공주, 임연, 차송우 등이 참여한 무오정변으로 자신의 측근이었던 선인렬(宣仁烈), 류능(柳能)과 함께 암살됨.(무오정변) |
1258년 ~ 1270년 (12년) | 무신정권 말기 | ||
- | 류경 | 1258년 3월 ~ 1258년 11월(8개월) | ◎ 무신정권의 유일한 문인 실권자. ◎ 일반적으로 문인 출신이기에 무신정권 계보에서 빠진다. |
9대 | 김준[34] | 1258년 11월 ~ 1268년 12월(10년) | ◎ 이의민처럼 천민 출신[35]이었고, 최우의 눈에 들어 9품 전지승지에서 5품 별장 직까지 파격적인 인사로 오르지만 최항의 아들 최의가 가신 최양백을 우대하고 본인과 박송비, 이공주, 임연 등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하고 심하게 견제하자, 무오정변을 일으켜 최의를 제거하며 4대 60년 최씨 정권을 무너뜨림. ◎ 최씨 정권에 이어서 대몽항쟁을 주장하지만 원종의 즉위로 실패. ◎ 양자인 임연과의 대립 끝에 원종의 밀명을 받은 임연과 강윤소에 의해 강화도 고려궁 본전에서 암살됨.(무진정변) |
10대 | 임연[36] | 1268년 12월 ~ 1270년 2월(1년 3개월) | ◎ 양아버지 김준을 원종의 명을 받고 죽이고 집권하여 반역이 아닌 열전에 올랐다. ◎ 그러나 양아버지처럼 개경환도에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임연은 친몽적인 원종을 폐위시키고 안경공 창(영종)을 잠시 세우는 등 대몽항전을 주장했으며, 몽골 원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2년만에 병사. |
11대 | 임유무 | 1270년 2월 ~ 1270년 5월(3개월) | ◎ 임연의 차남. 실권은 외조부 이응렬, 임연의 심복 송군비가 휘두름. ◎ 아버지 임연처럼 끝까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 원종에 의해 밀명을 받은 배신자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됨.(경오정변) |
보면 알겠지만 최씨 정권이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한다. 간략화하면 (혼란) - 이의민 - 최충헌 - 최우 - 최항 - 김준인데, 이들의 집권 기간이 84년이다. 한국사에 수백년 왕조가 너무 많아서 안 와닿을 수 있는데 이 정도면 길다. 중국에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 삼국시대나 수나라 등 최씨 4대 세습보다 오래 못간 왕조들이 넘쳐난다. 전세계로 넓혀보면 훨씬 더 많다.
6. 무신정권기의 수많은 반란
역사상 반란이란 건 늘 있어왔지만 무신정권 시기는 반란의 빈도수가 당연히 그 정점에 달해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무신정권 자체의 정권 찬탈 프로파간다부터가 무려 사소한 원한 때문에 홧김에 국가 권력을 찬탈했다는 형식으로, 깡패들의 나와바리 칼싸움 변명 수준의 주먹구구 설명으로 국가 정권을 차지해버린 점이 있다.한마디로 무신정권이 하룻밤만에 정권을 차지했고, 본인들이 더욱 치졸하게도 친목질 라인으로 강력하게 권력을 독점했으므로, 기존의 문신시대보다 더욱 더 국력의 배분에 있어서 차별을 받은 각지의 군인들과 백성들도 똑같은 방식으로 무신정권을 뒤엎어도 전혀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에도 소말리아 같은 막장국가들이 내전으로 망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군사찬탈 논리 때문이다. 그나마 통치가 정상이면, 적어도 통제력이라도 갖춘다면 감히 반란까지는 못 가지만 통치도 엉망이고 통제력도 없으면 반란행이다. 무신정권 역시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무신 권력자들은 간신히 중앙의 이권싸움만 틀어 쥐고 있는 바람에 지방의 군벌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군사력이 허약했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토지겸병' 등을 하기도 했으며, 자리보전을 위해 대권에 도전해오지 않으면 지방세력이 이탈해도 그냥 무시해버렸다. 이 외에도 무신들의 착취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못 살겠다고 분노하여 민중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서는 민란도 많았으며, 몽골의 침입으로 국토가 싸그리 불타버렸는데도 외국의 침략을 방관해버리는 무신정권에 대한 불만이 많이 쌓여서 터져버린 지방 군인들의 반란도 많았다. 사실상 한나라 말기의 십상시때문에 생겨난 황건적의 난,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국가운영 방관과 외부침략 때문에 일어난 동학과 판박이로 똑같다. 결국, 무신정권의 부정부패와 무능함으로 인한 최씨 일가 군벌 그 자체가 반란의 원인이었다.
- 1172년 - 철주민란, 창주민란, 성주민란
- 1173년 - 김보당의 난
- 1174년 - 제1차 개경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
- 1175년 - 석령사의 난
- 1176년 - 망이·망소이의 난, 손청의 난
- 1177년 - 김순부·김숭의 난(제1차 의주적의 난)
- 1182년 - 관노비의 난, 관성현·부성현 농민반
- 1187년 - 조원정의 난
- 1190년 - 동경민란
- 1193년 - 김사미·효심의 난
- 1198년 - 만적의 난[37]
- 1199년 - 명주 민란, 김준거·김준광의 난, 금초의 난
- 1200년 - 정방의의 난, 금주 잡족의 난, 진주 노비의 난, 밀성 관노의 난, 광명·계발의 난
- 1202년 - 이비·패좌의 난, 경주 별초군의 난
- 1204년 - 신라부흥모의
- 1217년 - 최광수의 난,[38] 제2차 개경승도의 난
- 1218년 - 이장대의 난
- 1219년 - 한순·다지의 난(제2차 의주적의 난)
- 1231년 - 충주 노군의 난
- 1232년 - 이통의 난, 서경 반란
- 1233년 - 필현보의 난
- 1237년 - 이연년 형제의 난[39]
- 1257년 - 안열의 난
- 1258년 - 조휘·탁청의 난, 위도 민란
- 1259년 - 애도·갈도 민란
- 1260년 - 원진의 난
- 1269년 - 최탄의 난
- 1270년 - 삼별초의 난(삼별초 항쟁/강화도->진도->제주도)
- 1271년 - 숭겸의 난
7. 관련기구
8. 관련인물
8.1. 무신
- 기탁성
- 김경손
- 경대승
- 경진
- 김준
- 김방경
- 김약선
- 김통정
- 노영희
- 두경승
- 대집성
- 박존위
- 박진재
- 배중손
- 서균한
- 서유
- 서민경
- 서준
- 서찬
- 서돈경
- 서응려
- 서광순
- 서칭
- 서긍
- 석린
- 송군수
- 송유인
- 양숙
- 우학유
- 이고
- 이광정
- 이린
- 이소응
- 이영진
- 이의민
- 이의방
- 이준의
- 이춘부
- 임연
- 임유무
- 정균
- 정세유
- 정중부
- 조원정
- 진준
- 채원
- 최우
- 최의
- 최충수
- 최충헌
- 최항
- 한순
- 허승
8.2. 문신
8.3. 왕실
8.4. 환관
8.5. 승려
8.6. 평민, 천민
9. 유사사례
- 강조의 정변
- 김훈·최질의 난
- 연개소문과 그 아들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연씨 정권)
- 대한민국 군사정권
- 일본 - 헤이케(로쿠하라 정권),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 오다 정권, 도요토미 정권, 에도 막부
- 후한 - 동탁, 조조
- 대월 - 찐씨 정권
- 네팔 왕국 - 라나 가문
- 마라타 제국 - 페슈와 바트 가문
- 프랑크 왕국 - 피핀 가문
- 로마 - 삼두정치[41]
10. 창작물
- 드라마 <무인시대>는 무신정변부터 최충헌의 사망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록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단편적인 캐릭터 성에서 벗어난 매력적인 캐릭터들 묘사, '방향성 없는 절대 권력은 타락한다'라는 중후한 주제에 충실한 전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이 가득한 화려한 캐스팅 등으로 인해 대한민국 대하 사극의 명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1. 외부 링크
12. 같이보기
[1] 대몽 항쟁기에는 강도(강화도)가 임시수도였다.[2]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최항.[3] 최충헌 이후. 그 이전의 집권자들은 권신으로서의 통일된 관직을 가지지 않았으며, 이런저런 고위직을 겸하면서 그 이상의 실권을 휘둘렀다. 경대승의 경우 심지어 관직에서 물러난 서민의 신분으로 도방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4]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긴 했지만 이슬람 등 타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건국 초기부터 유학이 들어오기 시작해서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하기도 하였으며 원 간섭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고려 내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5] 다만 고려 초기에도 무신정권이 세워진 적이 있었다. 즉 해당문서의 무신정권은 두 번째로 세워진 무신정권이다. 첫 번째 무신정권은 고려 현종 시절에 탄생했는데 원인은 무신들의 영업전을 회수해서 문신들의 녹봉으로 충당하려고 하자 이에 분노한 김훈, 최질이 주도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서 무신정권을 세운 적이 있었다. 다만 이들이 세운 첫 번째 무신정권은 약 4개월 정도만 지속되고 무너졌는데 현종이 신하였던 이자림의 계책을 받아들여 서경에서 수뇌부들을 잡아서 주살하였다.[6] 오늘날의 개성 근처 장풍군 남단에 있었던 사찰이다. 춘천의 청평사 역시 보현원이라 불렸던 적이 있어서 혼동되기도 한다.(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신동국여지승람 12권 장단도호부 편에서 보현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다.[7] 여담으로 고려는 918년 ~ 1392년간 존속 중, 100년마다 큰 격변기를 겪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즉 918년 건국, 1000년 거란 침략, 1100년 여진 침입, 1200년 무신정권, 1300년 원 간섭기, 1392년 멸망.[8]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종종 '최씨 막부(崔氏幕府)'라고 부르기도 한다.[9] 무신정권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 사극도 무인시대와 무신이 각각 전반기와 후반기를 배경으로 비슷하게 했다. 두 시기의 가운데에 비교적 길고 안정적이었던 최충헌 ~ 최우 집권기가 끼어있어 이야기가 한 번 맥이 끊기기 때문.[10] 경대승은 특별히 전횡을 저지르지 않았고 나름대로 왕을 공경하는 등 고려사의 저자들인 사대부에게 밉보일만한 일이 별로 없어서 따로 분류된 것으로 여겨진다.[11] 단 이의민은 조원정, 두경승과 공동집권했다.[12] 물론 원종의 경우 임연이 멋대로 폐위시키긴 했으나 원종의 사돈이자 후원자였던 몽골 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압력을 행사하면서 얼마 후 복위했다.[13] 몽골 제국이 중원 지역에 세운 원나라는 일반적인 한족 왕조는 아니었으나 책봉-조공 체제를 표방하고 있었다.[14] 근데 사실 이는 당시 다른 국가들의 군인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군인들이 좀 특이한 케이스였다. 특히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한 윤관, 강감찬같은 사람들은 장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문신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무신들을 뽑는 무과도 엘리트 군인을 뽑기 위한 시험으로 군인들이 기본적인 학식은 갖추었지만 고려시대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이 때는 지휘부 쪽은 문신들이 맡아서 문신들도 대장급 위치로 전장에서 뛰고, 그 아래 군인들(무신들 포함)은 천민 출신이거나 못해도 일자무식인 경우가 많았다. 무신들이라 해봤자 결국 전쟁 때는 문신의 부하로써 군대를 부리는 위치 정도에나 있었기 때문.[15] 한국사 최강의 군벌로 동북면을 사실상 사유화했던 이성계의 그 가별초도 최대 3천 정도였다. 전통적인 문벌귀족도 아닌 하급귀족 혹은 평민 출신의 무신정권 집권자들이 부릴 수 있는 병력은 당연히 그보다도 적었다.[16] 여진정벌에서 윤관이 여진에게 패한 뒤 고려 조정에서 바로 정벌을 포기하고 9성을 돌려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다. 갈라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이미 개경 민심조차 흉흉해져 전쟁을 더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17] 여진족 정벌 당시 수십만 대군을 원정 보낼 정도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졌는데 수백년뒤 고려의 요동정벌은 여진족 정벌 당시보다 더욱 무리하여 군사를 아주 긁어 모아도 채 5만명이 전부였다.[18] 현재도 최충헌을 다룬 서적은 이따금씩 발간되고 있으나 최충헌을 '위인' 즉, '훌륭한 사람'으로 정의한 서적은 찾아볼 수 없다.[19] 비주류 무인집단 출신[20] 공교롭게도 초대 집권자인 이의방은 이성계의 방계 조상이다.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이 이성계의 6대조이기 때문이다.[21]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부터 조선건국까지 걸린기간은 4년으로 짧다고 평가받던 경대승 집권기간 만큼이나 짧은 기간이었다.[22] 정중부를 제외하고 무신정권 집권자 가운데는 보현원사건 이전까지 장군(정4품)급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23] 이성계의 병력은 고려인, 몽골인, 여진족을 아우른 다민족 혼성 기병 군단이자 동북면을 중심으로 원나라 정규군, 여진족, 왜구, 홍건적, 나하추 군대 등 온갖 적군을 격파하고 살아남은 백전연마의 최정예였다.[24] 그러나 둘은 정중부와 달리 문신들의 신망을 잃었다.[25] 정선(旌善) 이씨(李氏) 문중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이양곤(李陽焜)이고 이의민은 그의 5대손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양곤은 베트남 리 왕조의 제5대 황제인 신종(神宗)의 동생이며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귀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먼저 이양곤의 망명 자체를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는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후 송나라로 망명했다가 1123년 금나라와의 전쟁을 피해 고려로 재차 망명했다고 하는데 신종이 1116년생이므로 이양곤은 아무리 일찍 태어났어도 1117년생이고 이 말은 7살에 불과한 어린이가 2번이나 망명을 했다는 말이다. 또한 이의민의 생년이 분명하지 않지만 1160년대부터 활동하고 무신정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 1117년생의 아들이라면 모를까, 5대손 씩이나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42] 부자 관계라면 납득이 되지만 이의민의 아버지는 《고려사》 <이의민 열전>에 떡하니 기록되어 있는 것이 문제. 마지막으로 베트남 황손설은 정선 이씨 문중의 족보에만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인데 정선 이씨의 첫 족보는 조선의 숙종 재위기인 1677년에 가서야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의민이 베트남의 황손이라는 설은 허황된 이야기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중국의 사서를 구해 읽어보는 게 어렵지 않았으므로 숭조(崇祖) 과정에서 《송서》 등을 참고하여 만든 이야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26] 정통성 문제 때문에 이의민의 지지를 받아야 했다.[27] 이와 관련해서 이의민이 김사미·효심의 난과 관련있다는 소문도 돌았다.[28] 정중부, 이의방, 이고와 같다.[29] 지금의 인천광역시 영종도.[30] 《고려사》에는 최충헌이 죽였다는 설과 그의 재산을 노린 노비가 죽였다는 설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31] 개명 전 이름은 최난.[32] 이후 최이로 개명함.[33] 개명 전 이름은 최만전.[34] 개명 전 이름은 김인준.[35] 김준의 아버지는 김윤성으로 최충헌의 가노였다.[36] 개명 전 이름은 임승주.[37] 한국사 최초의 노비들의 신분해방운동이다.[38] 평양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명분으로 봉기했다.[39] 백제부흥운동 성격을 가진 민란이다.[40] 잘 부각되지는 않는 사실이지만 30대 중반까지 무신정권을 겪었다.[41] 정중부, 이의방, 이고의 연합정권기 시절과 비슷하다.
[42] 무슨 리나 메디나도 아니고 5대조와의 활동 시기 차이가 너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