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07 16:40:24

무신정권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9zoipyqmm1sqk8veo5_r2_400.png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문벌귀족무신권문세족신진사대부
무신정권
武臣政權
존속 기간1170년 ~ 1270년
정치 체제군정 하의 군주제
수도개경 만월대, 강도 고려궁[1]
집권자이의방(1170년 ~ 1174년)
정중부(1174년 ~ 1179년)
경대승(1179년 ~ 1183년)
이의민(1183년 ~ 1196년)
최충헌(1196년 ~ 1219년)
최우(1219년 ~ 1249년)
최항(1249년 ~ 1257년)
최의(1257년 ~ 1258년)
김준(1258년 ~ 1268년)
임연(1268년 ~ 1270년)
임유무(1270년)
언어중세 한국어
주요 사건1231년 ~ 1259년 여몽전쟁

1. 개요2. 설명3. 성립과 소멸4. 특징
4.1. 이성계와 비교
5. 집권자 및 기간6. 무신정권기의 반란7. 창작물8. 외부 링크

1. 개요

무신정권(武臣政權)이란, 고려시대 중기에 문신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아 불만이 쌓여 있던 무신들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차지한 시기를 말한다. 통일신라 말기 ~ 후삼국시대 초기와 더불어 한국사상 가장 반란쿠데타가 들끓고 혼란했던 시대.

2. 설명

군정 하의 군주정 체제로, 국왕은 명목상의 자리일 뿐 실권자는 무신정권 집권자들이 가지고 있었다.

사실 고려에서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때는 무신정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다. 이전의 사례는 강조, 김훈과 최질 등 현종 때 반란을 일으켜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사례는 있었는데, 강조는 본래 그 출신이 골수 무인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후대 무신정권과 집권 양상이 비슷하기는 했다. 하지만 고려-거란 전쟁 당시 싸우러 나갔다가 포로로 잡힌 뒤, 전향을 거부하고 처형을 당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그리고 김훈과 최질도 둘 모두 상장군으로서 거란()의 2차 침공 직후, 무신의 영업전을 빼앗은 문신 황보 유의·장연우 등을 잡아 유배 보내고 현종을 위협,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몇달 뒤 술자리(정확히는 현종과 서경 유수 왕가도의 책략)에서 싱겁게 토벌했을 만큼 일시적인 권력만 잡았다.

무신정권 이후의 사례로는 이성계가 있었고, 결국 고려는 무신 이성계의 쿠데타로 곧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 중기, 무신정변부터 임유무의 몰락까지 무신정권 시대는 무려 100년간 계속되어 대단히 장기적이었으므로 다른 반란들과 따로 분류해 고려시대 안의 한 시대로 다루는 편이다.

이렇게 고려시대는 쿠데타가 처음부터 끝까지 빈발했었고, 이런 사건의 반복은 고려 왕조가 전 왕조인 신라보다도 더 쿠데타에 취약한 체계였다는 뜻이 된다. 신라에서 일어났던 정변은 같은 진골 귀족 김씨와 박씨, 즉 고려로 치면 왕씨들끼리 다투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례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런 다툼은 물론 어느정도 혼란을 동반했지만 나라가 뒤집어지지는 않는, 제한적인 권력다툼이었다. 그리고 이외 세력이 권력을 움켜쥐려는 시도는 후삼국시대 이전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의민이나 김준 같은 천민 출신이 무력적 소양을 바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까지 오른 사례들은 한국사가 개국된 이래 고려가 독보적이다. 신라 때는 그나마 장보고가 되려나 싶었다가 결국 진골 수뇌부의 견제로 시작도 전에 무너진 것이 유일하다.[2]

기본적인 무신정권의 성립 원인은 고려의 지독하고도 체계적인 문치주의 때문이다. 애초에 강조를 빼면 세 차례의 무신들이 일으킨 난이 모두 무신에 대한 불공정한 처우와 가혹한 차별이 원인이었다. 특히 고려에서의 무신에 대한 차별은 조직적이면서 체계적이었다. 16대 예종 때와 고려 말기 멸망 직전인 공양왕 때를 빼면 과거사 시험에서 무과시험을 치른 적이 없었고, 무관들도 명목상으로는 정1품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조선과 달리[3] 고려라면 무관들은 정3품 상장군이 최고로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강동 6주 서희, 귀주 대첩, 여진족 토벌을 한 강감찬, 윤관 "장군"들도 문관 출신이었다. 야전지휘권은 분명 무관이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총지휘관은 군사문제에서는 비전문가인 문관이었다. 여기까지라면 다행이겠는데 전시과 제도 내에서도 문종이 고치기 전까지 무관들에게는 문관들보다 토지와 시지를 적게 주었고 나중에 가면 현종 때에는 아예 군인전을 몰수하였으며 인종 때에는 무신 교육기관인 무학재까지 폐지하는 등 무신에 대한 차별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

그런데 이런 문치주의의 원조였던 중국송나라와 이후 한반도의 왕조인 조선은 딱히 이런 일이 없었다. 일단 조선은 양반이라는 용어에서 볼 수 있듯이 무반이 실제적으로 문반보다 낮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지배 계급에 포함시켜 주었다. 그리고 무반직은 고려와 같은 정3품이 끝이었지만, 승진이 필요한 무반에게 문반 작위[4]를 내려서 품계를 올려줌으로 문반에 합류시켰다. 이렇게 무반 대우를 제대로 했기 때문에, 4대 중 1명이라도 관료가 되어야 인정받는 양반 계급의 유지를 위해서 어려운 문과보다는 무과를 시험 보는 경향도 나타났다. 또한 송나라는 고려와는 달리 문벌귀족이 뿌리박힌 체계는 아니었고, 무신들의 품계는 깎았지만 대신 돈은 많이 줬다. 그 밖에도 무관에게는 야전 지휘 권한 정도만 주고 총지휘는 문관 출신에게 맡기며[5], 승진이나 전출을 명분 삼아 무관들을 자주 여러 보직으로 옮기면서 사병화를 막는 등 대비도 철저했다.

참고로, 옆 나라인 일본막부 체제 역시 군주는 명목상의 권위자로만 남고 병권을 장악한 무신들의 우두머리인 정이대장군(쇼군)이 실질적인 통치자 노릇을 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중국 역시 후한 말기에 조정이 외척들과 환관들에게 장악당하거나 군벌인 동탁이나 조조가 군주 노릇을 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군주정 하에서 군부를 통제하는 데 실패할 경우 조정이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일은 유교사상이 군주제의 근간이 되었던 동아시아의 역사에서도 드물지 않다.

3. 성립과 소멸

일단 무신정권은 기존의 무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것과는 좀 다르다. 당장 일개 무인이 권력을 잠시 잡는 일시적인 사례로 끝나지 않고 무신들끼리 돌려먹기를 하면서 왕권과 조정은 완전히 허수아비였다. 왕은 바지사장이나 마찬가지였고 폐위당하기도 했다. 아예 대대로 세습하는 최씨 정권까지 가면 최씨 가문의 독재로 변질하면서 거의 준 막부 체제인데[6], 외척이냐 무신이냐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 1170년(의종 24년) 6월 보현원의 무신정변을 시작으로, 1270년(원종 11년) 5월 임유무의 숙청을 끝으로 한다. 딱 100년.[7]

무신정권의 정권 교체는 기본적으로 쿠데타반란으로 일어났고, 사회에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했다. 때문에 무신정권은 고려 말기 신분제의 근간을 뒤흔든 결정타 가운데 하나인 셈.

파일:attachment/무신정권교체이미지.jpg

정중부의 기간이 긴데, 그 까닭은 이고나 이의방의 시대에도 정중부가 어느 정도 권력을 잡았으며, 무신정변 당시 무신의 실질적인 리더였고, 합의로 정중부가 얼굴마담식으로 집권해서였다. 따라서 정중부의 집권 기간 속에 이고나 이의방의 집권 기간이 들어간다.

집권 순서대로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그리고 최충헌 대에 이르러 어느 정도 권력이 안정기에 들어갔고 이후 최우, 최항, 최의까지 4대 최씨 정권과 삼별초 출신의 김준, 임연, 임유무가 정권을 잡았다. 크게 최충헌까지의 전반부와 최충헌 이후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8] 이들의 기록은 고려사에서 경대승만 열전, 나머지는 전부 반역열전에 있다. 임연과 임유무는 함께 하나의 열전으로 수록했고, 사실상 혼자 못 집권한 이고는 별도의 열전이 없다. 몽골과의 전쟁 끝에 허수아비로 전락해있던 고려왕 원종을 등에 업고 이들을 견제한다. 끝내 임유무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가 처형받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고려는 무신정권에서 벗어나지만 그 때부터는 원 간섭기라 안습.

잔당들이 삼별초의 난으로 저항하지만 제주도의 저항을 끝으로 모조리 전멸하면서 무신정권은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이들 세력 일부가 오늘날의 일본 오키나와로 탈출했다는 설이 나왔다. 이 시기에 오키나와에 갑자기 거성이 나오는 등 발달한 건축 기술이 등장하였으며 오키나와 유적지에서 대규모로 고려 기와가 쏟아진다고 한다. 다만 삼별초 세력이 아니라 조선 건국 이후에 옮겨간 유민이라는 설도 있다.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12세기 ~ 14세기 사이에 한반도에서 오키나와로 대규모 유민이 건너갔음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관련 기사

4. 특징

원래 무신정권의 초기라면 일인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독재 체제가 아니었다. 당장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삼두 시기 - 이의방 - 정중부까지는 그나마 균형을 유지했는데, 이는 무신들의 합좌기관인 중방의 권한이 무신정변으로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뒷날 이고가 죽으면서 삼두 균형이 깨져도 중방의 권한이 이의방과 정중부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나름 균형을 지켰다. 하지만 경대승이 이를 무시하고 중방을 무력화시키면서 무신 정권 집정자에 건 최고의 견제 세력이 사라졌고, 이의민을 거쳐 최충헌 대에 이르러선 독재정권이 되어 아예 아들에게 권력 세습까지 한다.

덕분에 사회 체계는 막장으로 치닺게 되었다. 원래 국초부터 무신을 배제한 상태라 내정 경험이 없던 무신들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니 당연했으며, 그리고 경대승의 중방 무력화가 무신정권이 집단지도체제로 못가게 막아서 문제였는데, 집단 지도 체제의 불안정성을 생각하면 무신정권이 빨리 끝날 수도 있었다.

또 이들 무신정권은 국가와 국왕에 대한 충성도는 극히 낮으면서 개인의 이익과 정권 수호에는 굉장히 민감했다는 것이다. 일단 무신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의종을 폐위시키면서 발생하였고 그밖에 명종, 희종, 원종 등이 폐위당한 바 있다.[9] 이렇게 집권자의 입맛에 안 맞다 싶으면 국왕을 함부로 폐위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충성도가 극히 낮았다.

반면에 자신의 이익과 신변, 정권 수호에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여몽전쟁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최씨 정권은 당시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몽골의 군대를 맞아 적극적으로 항전할 생각도 혹은 협상을 할 생각도 않고 강화도에 틀어박혀 항전도 항복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30년 동안 질질 시간을 끌었으며 순간순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 항복만 반복했다. 그리고 몽골군이 내륙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무참히 살육하든 말든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들이 이런 짓을 한 이유는 몽골에 항복하면 자신들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끔 이의민, 김준이란 천민 출신 권력자의 출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도 출신이 천민일 뿐 권력을 쥔 다음에 백성들을 위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개혁한건 전혀 없다. 그외에 만적,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 · 효심의 난 등의 민란이 계속 일어나 국가가 혼란스러웠다.

고려 말기 공양왕정몽주마저 죽고 더 방법이 안 보이자 이성계에게 군신의 동맹을 맺자고 요청하여, 무신정권을 재현해서라도 왕조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쓸모없었고 결국 고려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4.1. 이성계와 비교

무신정권은 후대에 비슷한 배경환경(권력을 겉돌던 무신집단, 잦은 외부 침략)을 가진 이성계와 자주 비견되고는 했다. 특히 최씨 무신정권의 경우 왕도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몇대에 걸쳐 집권할 정도로 이성계 못지않은 강력한 권력을 장악했는데, 당연히 양자를 비교하면서 왜 무신정권은 이성계보다 강력한 권한을 휘두르고 집권기간도 더 길었던 사람이 많았는데[10]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논의가 자주 벌어졌다.

이성계가 이전의 무신집권자들과 다른 점은, 우선 무신집권자들은 군부의 주요 장군이었으나 이성계와 같이 처음부터 호족으로서 자신이 독점적으로 부릴 강력한 지방 권력자의 지위까지는 없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앙 군부에 있는 장군으로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할 뿐이었다. 다만 최충헌은 이 점을 염려했는지 집권한 뒤에 고향 진주에 어느 만큼 기반을 만들기는 했는데, 이런 비교적 용의주도함 덕분에 최씨가 4대나 간 것이기도 하지만 몽골의 침략이라는 변수 때문에 그리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군사력도 사실 고려 후기의 권문세족들보다 무신정권기 무신들은 좀 많이 초라했다. 이들도 어느 정도 사병은 있었지만, 경대승의 도방에서 보듯이 초창기에 직접 조종하는 사병은 고작 100여명 남짓이었고, 이의민이 경대승을 두려워했다는 기록을 보면 다른 인물들도 경대승보다 그리 숫적으로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씨 무신 정권의 전성기에도 정점이었던 최씨 무신 정권의 사병은 천명 정도였다. 이들은 그 이상으로 고려의 중앙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지만, 고려 말기의 이성계처럼 실전에서 사병으로만 2000명(...)를 이끌고 오는 무지막지한 짓은 기록에 없다. 사실 이성계의 가별초도 그들만의 특수성[11]을 제하고 규모만 따지면 다른 권문세가의 사병보다 압도적으로 많지는 않았으니, 고려 말에 비슷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춘 장군은 상당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12] 끝내 국가를 들어엎었던 무신 집권자들도, 그 정점에 달한 전성기 최씨 가문 정도를 빼면 고려 말기 권문세족보다 세도가 강성했을지 의문이다. 권문세족의 권력은 나름의 명분과 더불어 원나라라는 막강한 배경을 등에 업었던 반면, 무신 정권기의 무신 세력은 이런 뒷배 없이 자신들끼리 이룬 자수성가형 세력임도 생각해야겠지만.

또한 국가의 수호자로서 정당성을 거둘만큼 외적을 격퇴해 화려한 "군공"과 정도전과 남은, 윤소종 같은 유능한 문신들이 있던 이성계와 달리, 순전히 군공이 없고 받혀줄 세력이 없는 무신들만 나왔으니 통치 능력이나 이상적인 국가에의 비전이 없었고, 권력만 잡았지 그 이상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나마 좀 다르다는 경대승 또한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 말고는 별다른 정치적 비전이 없었다. 그나마 이 복귀 정책도 당시 무신정변 덕분에 왕에 오른거나 마찬가지인 명종에게 심한 불쾌감과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신진 사대부들의 무신정권 비난도 짚고 넘어갈 것이 신진 사대부들은 무신정권을 비난하면서 고려 광종도 비난하는데 어차피 저 상황을 수습할 방법은 사람은 광종 같은 왕 말고는 없으며 방법은 향, 소, 부곡민 정리와 음서 범위 축소, 그리고 무과제를 세워서 저들을 숙청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사실 당시 고려는 붕당정치 못지 않게 문신들간 갈등이 엄청 심했다. 문신들끼리 각기마다 문생이 있는데 문제는 이것이 문신들간 패거리 정치의 장이었다. 무신정권의 빌미를 준 의종은 문신들을 견제하려 무신들을 중용한 적이 있었고 이의방 등은 사실 이 때 발탁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시도가 문신들의 반발로 좌절된 후 이전으로 돌아갔고, 이후 무신과 문신의 갈등이 심해졌다. 문신들의 갈등엔 의종의 어머니 공예왕후도 일조했는데, 원래 그녀는 장남 의종이 아닌 차남 대령후를 태자로 지지했었으나, 실패한 후 의종이 왕이 되자 의종과 급친해졌다. 이에 공예왕후의 아버지 임원후가 특혜를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또 문신들끼리 파를 갈라 싸웠다. 특히 삼국사기 편찬자들만 봐도 임원후가 없을만큼 잘 지내다가 정지상을 같이 진압한 김부식과 이미 멀어진 상태였다. 의종은 즉위한 후로도 대령후와 갈등했는데, 문신들끼리의 싸움도 이 두 사람의 갈등에 영향을 줬다.

5. 집권자 및 기간

역대 무신정권 집권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연립정권 제1대 제2대
이고 이의방 정중부 이의방 정중부
제3대 제4대 제5대 제6대제7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제8대제9대-제10대 제11대
최의 김준 유경 임연 임유무
주군: 역대 고려 국왕
}}} ||
대수 이름 재임 기간 기타
1170년 ~ 1196년
(26년)
무신정권 전기(초기)
- 이고 1170년 8월 ~ 1171년 1월
(5개월)
◎ 사실 세력이 강했지만 서로 견제하던 시기라서 집권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이 시기는 엄밀히 말하자면 이의방, 정중부, 이고의 연립 정권(과두정치)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 무신 강경파로 문신을 모조리 죽이려고 했지만 정중부 등이 말려 무산.
◎ 역성을 꾀하다 이의방에게 살해당함.
초대 이의방 1171년 1월 ~ 1174년 12월
(4년)
◎ 이고를 척살하고 실권자가 됨.
◎ 딸을 태자비로 삼음.
◎ 조위총의 난을 토벌하러 갔다가 실패하여 돌아오던 중 정균에 의해 살해당함(갑오정변).
2대 정중부 1174년 12월 ~ 1179년 9월
(5년)
◎문하시중에 올랐지만 실권은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이 휘두름.
◎ 이후 경대승의 쿠데타로 몰살(기해정변).
3대 경대승 1179년 9월 ~ 1183년 7월
(4년)
◎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실권 차지.
◎ 자신의 경호를 맡기러 도방을 만듦.
◎무신정권 전기 집권자들 중 유일하게 무신정변을 부정하고 문신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침.
◎무신 정권 집권자 중 유일하게 고위직에 오르지 않았으나 실권은 여전히 지님.
◎ 젊은 나이에 병사. 야사에 따르면 정중부의 꿈을 꿨다고 하는데, 평소부터 정중부를 추종하던 잔여 세력을 크게 경계했던 데에서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볼 수 있다.
4대 이의민 1183년 7월 ~ 1196년 4월
(13년)
◎"족보에 따르면" 안남국 왕자의 후손이지만,[13] 실상은 천민 출신으로 이의방의 부하로서 무신정변 동안 가장 많은 문신들을 죽여 악명을 떨쳤으며 이후 이의방의 명에 따라 의종을 직접 시해함.
◎ 경대승 집권 이후 의종의 시해자란 이유 때문에 경주로 도망가 틀어박히나, 경대승 사후 명종이 그를 불러 실권을 주면서 무신정권의 4번째 집권자가 됨.
◎ 도방을 폐지했고, 경주를 기반으로 "신라 부흥" 및 황제 즉위를 계획했다는 설도 있음.[14]
◎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게 살해됨(병진정변).[15]
1196년 ~ 1258년
(62년)
최씨 정권
5대
최씨 정권 1
최충헌
(최난)
1196년 4월 ~ 1219년 9월
(23년)
◎ 미타산에서 이의민을 척살하고 정권을 잡음.
◎ 도방을 재설치하고, 봉사 10조를 내세우는 동시에 교정도감을 세움. 최충헌 이후 임유무까지 무신정권의 권력자들은 모두 교정별감을 맡았다. 정이대장군
◎ 네 임금(신종, 희종, 강종, 고종)을 세우고 두 임금(명종, 희종)을 몰아냄.
◎ 최종 직위는 壁上三韓三重大匡開府儀同三司守太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上將軍上柱國兵部御史臺判事太子太師(벽상삼한삼중대광개부의동삼사수태사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상장군상주국병부어사대판사태자태사)
6대
최씨 정권 2
최우
(최이)
1219년 9월 ~ 1249년 11월
(30년)
◎ 정방을 자택에 설치.
◎ 그 밖에도 서방, 야별초(이후 삼별초로 바뀜)와 마별초 설치.
◎ 몽골이 침입하자 강화도 천도를 주도함.
7
최씨 정권 3
최항
(최만전)
1249년 11월 ~ 1257년 4월
(8년)
◎ 상복을 이틀 만에 벗고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패륜아.
◎ 대몽항쟁 중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경손을 처형.
8대
최씨 정권 4
최의 1257년 4월 ~ 1258년 3월
(1년)
◎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아버지가 죽은 날 아버지의 폐첩과 간통한 아버지 최항보다 더한 패륜아
◎ 아버지의 가신이던 김준의 주도로 살해됨(무오정변).
1258년 ~ 1270년
(12년)
무신정권 후기(말기)
- 유경
(류경)
1258년 3월 ~ 1258년 11월
(8개월)
◎ 무신정권의 유일한 문인 실권자.
◎ 일반적으로 문인이기에 무신정권 계보에서 빠진다.
9대 김준
(김인준)
1258년 11월 ~ 1268년 12월
(10년)
◎ 최의를 제거하며 최씨 정권을 무너뜨림.
◎ 대몽항전을 주장하지만 원종의 즉위로 실패.
◎ 임연과의 대립 끝에 살해됨(무진정변).
10대 임연
(임승주)
1268년 12월 ~ 1270년 2월
(1년 3개월)
◎ 김준을 죽이고 집권.
원종을 폐위 시키고 안경공 창(영종)을 잠시 세우는 등 대몽항전을 주장하며 권력 유지에 노력. 원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다가 등창으로 사망.
11대 임유무 1270년 2월 ~ 1270년 5월
(3개월)
◎ 임연의 아들. 실권은 외조부 이응렬, 임연의 심복 송군비가 휘두름.
◎ 끝까지 개경 환도에 반대하다 원종에 의해 살해됨(경오정변).

보면 알겠지만 최씨 정권이 절반을 훨씬 넘게 차지한다. 간략화하면 (혼란) - 이의민 - 최충헌 - 최우 - 최항 - 김준인데, 이들의 집권 기간이 84년이다. 한국사에 수백년 왕조가 너무 많아서 안 와닿을 수 있는데 이 정도면 매우 긴 것으로 봐야한다. 중국에는 4 다.

6. 무신정권기의 반란

역사상 반란이란 건 늘 있어왔지만 무신정권 시기의 반란의 빈도수는 당연히 그 정점에 달해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천대받던 무신(특히 아예 태생 자체가 천박하디 천박했던 이의민)이 반란으로 권력을 휘어잡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자신들도 신분 상승을 꿈꾸면서[16] 반란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고, 이외에도 무신들이 문신을 향한 적개심으로 틈만 나면 문신들을 학살하려 해 문신들이 살고자 반란을 일으킨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무신 권력자들도 자기의 힘이 없다보니 국가통제가 잘 안되었고 자기세력을 키우기 위해 토지겸병 등을 하기도 했으며 자리보전을 위해 대권에 도전해오지 않는 한 다른 세력들이 일탈행동을 하는 것을 눈감아주기도 했다(사실 위 문단들에서도 나오듯이 기본적인 사병부터가 거의 없다시피해서 때려잡고 싶어도 못잡았다). 이 외에도 몽골군의 침입으로 사회가 혼란해졌고 이에 대해 야심과 불만이 가득쌓여 터진 반란도 많다.
  • 1172년 철주민란, 창주민란, 성주민란
  • 1173년 김보당의 난
  • 1174년 제1차 개경승도의 난, 조위총의 난
  • 1175년 석령사의 난
  • 1176년 망이·망소이의 난, 손청의 난
  • 1177년 김순부 · 김숭의 난(제1차 의주적의 난)
  • 1182년 관성민란, 부성민란, 죽동의 난
  • 1187년 조원정의 난
  • 1190년 동경민란
  • 1193년 김사미 · 효심의 난
  • 1198년 만적의 난
  • 1199년 명주 민란, 김준거 · 김준광의 난, 금초의 난
  • 1200년 정방의의 난, 금주 잡족의 난
  • 1202년 이비 · 패좌의 난
  • 1217년 최광수의 난
  • 1218년 이장대의 난
  • 1219년 한순 · 다지의 난(제2차 의주적의 난)
  • 1200년 밀성 관노의 난, (밀성 관노 투속 사건) 진주민란, 광명 · 계발의 난
  • 1217년 제2차 개경승도의 난
  • 1231년 충주 노군의 난
  • 1232년 이통의 난
  • 1237년 이언년 형제의 난(백적의 난)
  • 1257년 안열(安悅)의 난
  • 1270년 삼별초의 난
  • 1271년 숭겸의 난

7. 창작물

  • 드라마 무인시대는 이 무신정변 전반부 약 5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비록 흥행하지는 못했지만,[17] 단편적인 캐릭터 성에서 벗어난 매력적인 캐릭터 묘사, '방향성 없는 절대 권력은 타락한다' 라는 중후한 주제에 충실한 전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이 가득한 화려한 캐스팅 등으로 인해 한국 사극의 수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드라마 무신은 시대적으로 무인시대와 바로 이어져, 최충헌 정권 말기부터 김준 정권까지를 다루었다. 그러나 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고증도 영 좋지 않아서[18], 걸작이나 수작이라고 부르기에 한참 떨어지는 수준.

8. 외부 링크



[1]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임시수도였다.[2] 그나마도 이 난이 조작된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3] 다만 품계의 명칭이나 직위 등을 보면 고위 무관이 문관으로 편입되었다고 봐야 한다. 오위도총관처럼.[4] 이런 문반 작위에 관한 일화로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기 파직 직전의 작위는 정 2품 정헌대부였다. 하지만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후 그를 불신한 선조가 정 3품 절충장군으로 품계를 낮추는 바람에 전쟁의 공으로 자신보다 높은 작위인 부하들 탓에 지휘 때 어려움을 겪었으며 명량해전 직전에 배설은 이순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탈영까지 한다.[5] 다만 나중에 가면 이 제도가 실전에서 가장 큰 문제로 드러나고 만다.[6]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일본에서는 종종 '최씨 막부(崔氏幕府)'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사의 친숙한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빗대는 것에 가깝다.[7] 여담으로 고려는 918년 ~ 1392년 간 존속 중, 100년마다 큰 격변기를 겪었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즉 900년 건국, 1000년 거란 침략, 1100년 여진 침입, 1200년 무신정권, 1300년 원 간섭기, 1400년 멸망.[8] 무신정권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도 무인시대무신(드라마)이 각각 전반기와 후반기를 배경으로 했다. 두 시기의 가운데에 비교적 길고 안정적이었던 최충헌 ~ 최우 집권기가 끼어있어 이야기가 한 번 맥이 끊기기 때문.[9] 물론 원종의 경우 임연이 멋대로 폐위시키긴 했으나 원종의 사돈이자 후원자였던 몽골 제국쿠빌라이 칸이 압력을 행사하면서 얼마 후 복위했다.[10]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부터 조선건국까지 걸린기간은 4년으로 짧다고 평가받던 경대승 집권기간 만큼이나 짧은 기간이었다[11] 고려인, 여진인, 몽골인, 중국인을 아우른 다민족 혼성 기병군단이자 동북면을 중심으로 원 정규군, 여진족, 왜구, 홍건적, 나하추 등 온갖 적군과 싸운 백전연마의 최정예.[12] 심지어 이 당시에는 별 세력도 없었던 문신 조반염흥방의 노비에게 받은 수모를 복수하려고 "수십 기"의 병사를 움직였다는 기록도 있다.[13] 족보는 가문의 위상을 위해 조작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천민 가문인데 황실 출신이라는 등 쉽게 믿기 어렵다면 안 믿어도 좋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이렇듯 믿기 어렵다면 신뢰하지 않는 편이며, 족보에 대해서는 그 신빙성보다 기록 방식(가령 아들을 일괄적으로 먼저 기록했는지,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고 나이 순대로 기록했는지 등) 등에 더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14] 이와 관련해서 이의민이 김사미 · 효심의 난와 관련있다는 소문도 돌았다.[15] 아들인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아갔다가 최충수가 항의하자 그를 구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단지 비둘기를 빼앗았다는 이유만으로 일가족을 몰살시켰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의민을 처음부터 아니꼽게 보고있다가 이 사건이 터지자 그건 그냥 명분으로 삼고 이참에 싹 쓸어버리기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16] 특히 만적의 난이 이런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그만큼 무인들의 정변이 당시 고려 사회에 가져다 준 "천것들도 힘(무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는 충격이 어마어마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도 피지배층의 반란은 종종 있어왔지만 대부분이 후세의 동학농민운동처럼 "이대로는 못 살겠다 우리의 처우를 개선해달라"는 정도의 취지였지 "우리도 짱이 되어보자"는 취지로 일어난 반란은 이 시기가 유일했다.[17] 결국 무인시대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무인시대를 끝으로 KBS의 고려 사극 10년 계획은 예산 문제와 태조왕건 이후에 나온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 고려 사극 후속작들의 당시 흥행 저조까지 겹치면서 폐기되었다. 그리고 무인시대 종영 후 KBS에서는 무인시대 다음 KBS 대하드라마의 새 후속작으로 다시 조선 왕조 시대로 돌아가 임진왜란을 맞이한 조선을 구한 이순신을 다룬 사극을 만들게 된다.[18] 사실 고증이 좋지않은 것은 무인시대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