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3 00:45:22

문하시중

고려 문무반 최고위 실무직
문반 무반
종 1품 중서문하성 문하시중 정 3품 응양군 상장군
1. 개요2. 역사3. 상세4. 주요 역임자

1. 개요

아 ~ 문 그까짓 거? 우리 아버지 바로 (門上侍大)인데...
- 하회별신굿탈놀이 중.
門下侍中

고려왕조의 정부기관인 3성 6부제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 고구려대대로, 백제의 상좌평, 신라상대등, 발해의 대내상, 태봉시중[1], 조선영의정과 비슷한 최고위 재상 직이다.

2. 역사

고려에서는 성종 1년에 처음 도입하고[2], 문종 때 정원을 정하고 품계를 종1품으로 정했다.[3]

충렬왕은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첨의부가 될 때 이 관직을 '첨의중찬'으로 고치고 첨의좌중찬, 첨의우중찬으로 나누었다. 두 관직은 첨의좌·우시중 혹은 도첨의시중로 바뀌었다. 충렬왕이 첨의부를 도첨의사사로 바꾸었기 때문. 또 충혜왕이 이를 첨의좌·우정승으로 바꾸었다. 첨의부가 문하부로 바뀌고 공민왕은 좌·우 정승을 문하시중과 수문하시중으로 고친다.

고려 말 문하부 체제에서는 시중 위에 명목상 최고위직인 영문하부사가 생겨나 영의정부사로 이어졌고 시중 2인은 좌·우의정으로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도 정종의정부가 설치되기 전까지 문하성의 문하좌, 우시중(좌시중, 우시중 2인)이란 이름의 정1품 벼슬로 남아있다가 사라진다.

3. 상세

조선시대 영의정과 비슷하게 관료 최고 실권자라는 이미지 보다도 조정의 영수(領袖)라는 차원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같은 정승이라도 6조를 감독하는 판사를 겸임한 좌의정, 우의정의 실질적 권한이 영의정보다 막강했듯이, 중서문하성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정2품의 문하시랑(문하시랑평장사)이 문하시중보다 실질적 권한은 더 막강했다. 실권직이라긴 보단 상징적 의미가 강한 만큼 3성 6부제 도입 이후부터 원 간섭기 관제격하 이전까지의 기간 동안 문하시중이 공석으로 남아있던 기간이 긴 편이다. 고려 후기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이인임이 굳이 한 단계 아래인 수문하시중를 역임한 것과 조선 초기 정도전이 문하좌, 우시중 다음인 문하시랑찬성사와 삼사의 수장인 판삼사사를 겸임했던 이유가 그것.

고려왕조는 초기에 신라 13부를 부분적 계승했다가 성종 대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수입해 대체했다. 그래서 명목상 신라가 아닌 당나라의 시중 제도가 고려 문하시중의 전신에 해당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신라의 시중에서 계승된 직위에 가깝다.

신라 → 태봉 → 고려로 정치체의 연속성이 이어졌고 정치적 위상으로 봐도 실질적으로 신라의 시중에게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와 당나라의 관료체계는 명칭상 유사한 부분이 있으나 전혀 다른 기원과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4]

문하시중은 종 1품의 최고위 관직으로 그와 대응하는 품계는 종 1품의 최고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이다. 즉 개부의동삼사 품계를 지니고 문하시중을 받아야 제대로된 종 1품 관료인 것이다. 하지만 늘 관료의 품계와 관직을 똑같이 맞출 수는 없었고, 이에 행수법이란 제도를 통해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는 경우, 직위 앞에 수(守) 자를 붙혀 관직의 품계가 자신의 품계보다 높다는 것을 명시했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 문하시중과 수문하시중은 같다. 단지 받은 관료의 품계가 종 1품 개부의동삼사인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

그런데 고려 후기 공민왕 대에 크게 바뀐다. 문하시중이란 직위가 두 직위로 찢어지면서 공민왕이 문하시중 - 수문하시중 두 직위로 정했기 때문이다. 즉 공민왕대에는 문하시중 > 수문하시중으로 수문하시중이 한 단계 낮다.

4. 주요 역임자

고려 후기 수문하시중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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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태조 왕건이 바로 즉위 전 궁예에 의해 파진찬 겸 시중에 올랐다.[2] 성종 8년 최승로가 죽기 직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3] 고려에서는 현직 관료로서, 실무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종1품이었다. 정1품은 불교대사가 임명되는 국사(國師)와 같이 지위에 가까운 명예직이 받는 품계였다. 정1품 관직은 삼사삼공, 중서령과 상서령 같은 명예직 뿐이다.[4] 이러한 차이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되는 것은 병부(兵部)이다. 3성과 6부의 관계와 달리 신라의 13부는 위계의 차등은 있으나 각각 별개의 기구이며 병부 역시 3성 6부제에서의 상서병부와 달리 한 기구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된 기구이다. 더욱이 신라의 병부는 상서병부보다 설치시기가 더 이르다. 당 문하성 시중과 신라 집사부 시중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 중국의 3성 6부제에서는 시중이 꼭 수상(首相)이 아닐 때도 있고 애초에 재상의 명칭이 자주 바뀌었다. 하지만 고려 중서문하성에서는 수상의 명칭으로 일관되게 문하시중을 사용하며 문하시중에 임명된 사람이 없을 경우 동급의 중서령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문하시중 바로 밑의 문하시랑동평장사가 수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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