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5 13:34:33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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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韓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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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o3p4bv63LR1sqk8veo2_r1_400.jpg 고구려
역사 사회 문화 인물 왕사 건축 연호
고구려 ・ 고려
高句麗 ・ 高麗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Red_flag.svg.png
깃발[1][2]
파일:고구려의 지도(장수왕 시대).png
-1 ▲ [[장수왕]] 64년(476년)경 고구려 영역[3]
기원전 37년[4] ~ 서기 668년 9월 21일 (705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부여

-2 {{{#fff 원삼국시대}}}
발해
소고구려[5]
-2 [[고구려부흥운동|{{{#fff 고구려부흥운동}}}]]
신라
국호 졸본부여 → 고구려[6][7] → 고려
위치 한반도 북부 일부 → 한반도 중·북부/만주 일부 → 한반도 북부/만주 일부[8]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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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건국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3년 낙랑군 축출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27년 평양성 천도
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
수도 졸본성[9]국내성[10]평양성[11][12] [13]
삼경 국내성 · 평양성 · 한성[14]
종족 예맥[15], 말갈[16] 등.
언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종교 불교, 토속 종교[17]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태왕 / 오리코케[18]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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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태조왕
소수림왕
광개토왕
장수왕
영양왕
국성 고(高)[19][20]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중국, 러시아[21]
1. 개요2. 국호
2.1. 표기2.2. 발음
3. 역사4. 사회5. 문화6. 정치 제도
6.1. 초기6.2. 후기
7. 군사
7.1. 편제7.2. 병종7.3. 주력대7.4. 병기
8. 국력9. 영역과 행정구역10. 고구려가 남긴 것
10.1. 멸망 후10.2. 현대
11. 사료
11.1. 한국11.2. 일본11.3. 중국11.4. 금석문
12. 연표13. 인물14. 고구려/창작물15. 둘러보기16. 기타

1. 개요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세 나라 중 가장 북쪽에 위치했던 국가로, 오늘날 만주의 일부, 한반도 북부와 더불어 전성기 시절에는 중부와 남부의 일부까지 차지했던, 삼국 중 단연 넓은 통치 영역을 확보했던 국가이자 한국 역사상으로도 발해와 함께 가장 넓은 통치 영역을 차지했던 국가다.[22]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도 특히, 대대로 정복 사업을 벌여 광활한 국토를 영유했던 점, 대외 항전에서 보여준 눈부신 역전(力戰) 등을 이유로 역대 한반도 왕조 중 가장 대중적인 인식이 좋은 국가다. 이런 이미지나 성격은 후일 고구려의 국호(고려)를 그대로 딴 고려가 일부 계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전성기 시절의 한국 역사를 꼽으라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국가이다,

2. 국호

2.1. 표기

언어 명칭 및 해설
한국어고구려(高句麗) / 고려(高麗)

장수왕 이후와 고구려 멸망 이후, 대개 고려라는 말이 쓰였지만 현대의 한국어로는 왕건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라고만 불린다.
중국어까오리(Gāolí, 高麗), 까오꼬우리(Gāogōulí, 高句麗)[23][24]

'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麗'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꼬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25].
일본어고쿠리([ruby(高,ruby=こう)][ruby(句,ruby=く)][ruby(麗,ruby=り)]), 고라이([ruby(高麗,ruby=こうらい)])

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등으로 써 놓고 '고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고대 티베트어케우리(Ke'u-li)[26]
페르시아어
(11세기)
모크란(Mokraan)[27]
고대 돌궐뵈클리(Bökli)[28]
그리스어무크리(Moúkri)[29]
산스크리트어 무쿠리(Mukuri)[30],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31]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으로 서사되었는데 주로 高句麗(고구려)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왕망신나라에서는 왕망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고구려가 무시한 것에 분노해서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불렀다고 하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는 '고구려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변경,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32]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냥 이 나라를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이래 700여 년 내내 전부 고구려라고 부르는 관습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때 국호를 바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33]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句麗)보다는 고려(高麗)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34]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高禮)'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한자어 그대로 '높다', '숭고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35], 또는 그것이 '고'와 발음이 비슷한 당시의 고유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36][37]. 장수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지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 부른다"는 기록에 미루어 고려라는 국호가 성을 뜻하는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는 '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명확한 기록이 아직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또 일각에서는 '뵈클리', '모크란' 등의 표현으로 미루어, '맥(貊)'과 '예(濊)'의 병치형 합성어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뵈클리'가 다시 '뵉(맥)'과 '리(예)'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궁예가 세운 나라를 통째로 후고구려[38],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건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태봉, 고려 문서 참고.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오대십국시대송나라를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의 나라 역사를 상세히 조사하는 것도 아닌데 이름이 똑같은 고려니깐. 고씨고려, 대씨고려, 왕씨고려[39]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일본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로 자처했다. 발해라는 국호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외교용 국호이고 발해의 공식적인 국호는 고려라는 설이 있다.[40]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이고.

2.2. 발음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초의 한글 문헌을 보면 고려 시대 후기, 조선 시대에도 高麗를 고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41] 한국 한자음은 중국 중고음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이 한자음은 , 무렵에 불렀던 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발해학회에서 발표했던 서길수 교수의 高句麗 소리값 연구. 이 연구에 따르면 高句의 소리값은 '고구'가 맞지만 麗의 소리값은 '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려'를 '리' 라고 발음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까지 '리' 라고 발음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려' 라고 발음한다. '麗'는 대체로 중고음에서는 '려'에 가까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다. 삼국시대에 무어라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42] 16세기 조선의 훈몽자회에서는 고구려로 쓰여 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麗의 중고한어 발음은 일반적으로 /ljɛ/ 혹은 /lje/, 혹은 그 중간인 /lje̞/로 추정된다.[43]

희한하게도 동아시아 쪽 언어들은 발음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서역 쪽 언어들은 '말갈'과 비슷하다.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의 원음을 '맥구려'로 추정하는게 일반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로 보는 게 통설이다. 당나라 때 편찬된 《범어잡명(梵語雜名)》에 의하면, 고구려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Mukuri라 하고, 한자로는 무구리(畝俱理)라 명시해놨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는 고구려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초기의 공신인 마리를 인명이 아니라 부족명으로 보아 이러한 호칭과 통한다는 의견도 보인다. 한편 막리지의 막리도 이러한 호칭과 같은 계통이고, 광개토대왕비여라는 지명도 같은 계통이라고 한다.

티베트는 서역에 위치했지만 '고구려'와 발음이 비슷한 케우리라고 부른다. 중국어 발음이 티베트에 전해저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麗(려) 자가 나라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리'라고 읽힌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를 고구리, 고려를 고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최초로 음차 표기된[44] 단어인 高離(고리)의 離(리)는 음차표기 되었던 전한시대 당시에는 rje(례)에 가까운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한서》에서는 '알렉산드리아'가 烏弋山離(오익산리)라고 적혀있다. ria를 離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리(離)자는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등 마한의 국가명에서도 음차로 쓰이는데 비리(卑離)는 백제의 부리(夫里)와 같은 글자로 본다. 려든 리든 혼용해서 발음하고 썼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고구려의 국호와 발음은 천 수백년 뒤 국가인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수왕 때 고정한 고려라는 이름을 왕건이 세운 후고려가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 이름이 국제적으로 퍼져 옛 아라비아 상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는 명칭인 코리아로 불리고 있다. 어원을 생각하면 고구려라는 이름이 아직도 살짝 변형되어 살아남아 있는 셈.

3. 역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회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사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문화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정치 제도

6.1. 초기

파일:고구려금관.png
파일:집안 출토 절풍형 금동관.jpg
고구려금관
초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아직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일종의 부족 연명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 고구려의 왕들도 사실상 다른 부족 연맹들을 아우르는 일종의 연맹장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중심 세력을 이루었던 다섯 부족은 계루(桂婁), 환나(桓那), 연나(掾那), 비류나(沸流那), 관나(貫那)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소노(消奴)[45]·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등 이었다. 이 다섯 부족의 부족장 간에 선출된 부족 연맹장이 곧 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위는 점차 선출이 아닌 세습제로 이어졌다.

초기는 소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소노부의 힘이 점차 미약해져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또는 동명성왕이 아닌 태조왕 이후부터라고도 한다.

또한,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여 왕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절노부는 곧 연나부로,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림답부 이후부터 왕비족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을 배출했던 소노부와 계루부, 왕비를 배출했던 절노부등은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고구려 초기의 관등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46]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東夷傳)
1등 상가(相加) 1등 상가(相加)
2등 대로(對盧) 2등 대로(對盧)
3등 패자(沛者) 3등 패자(沛者)
4등 고추대가(古鄒對加) 4등 고추가(古鄒加)
5등 주부(主簿) 5등 주부(主簿)
6등 우태(優台) 6등 우태(優台)
7등 사자(使者) 7등 승(丞)
8등 선인(先人) 8등 사자(使者)
9등 조의(皂衣)
10등 선인(先人)

상가는 원래 좌보-우보체제에 있었다가 나중에 신대왕 때 국상제가 도입되면서 상가가 국상 자리에 가게된다. 기존의 좌보-우보는 대로로 갔는지 아니면 그대로 상가에 존속하는지는 불명이다. 초기에는 8~10등 관등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고구려의 특징이다.

초기 지방 행정으로는 성(城) -곡(谷) - 촌(村)으로 나뉘어졌으며 성(城)의 책임자는 태수(太守). 곡(谷)의 책임자는 재(宰)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태수(太守)->재(宰)

의 모습이 나오는데 미천왕 때 압록곡의 관리를 압록재라고 불렀던 언급과 고노자의 승진 사례를 통하여 이러한 지방 행정 관직이 있었음이 보인다.

6.2. 후기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이였던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서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라고 하며, 그 관료 조직이 더 좋게 정비된 것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게 되어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 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 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정했으며,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47]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욕살은 대성(大城)에 머물며, 처려근지는 각 부마다 있는 城에 머물며 통치를 했다.

고구려에는 귀족들의 회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소수림왕 때부터 체제가 다시 재편 정리가 되면서 고구려의 중기~후기의 관료 체제도 각각 변화가 되어있는 것이 확인되나 중국 측 기록에서는 당나라 때 저술된 북주의 역사를 다룬 《주서》를 기준으로 중기 후기는 《신당서》와 《수서》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태대형(太大兄) 1등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대형(大兄) 2등 울절(鬱折)
3등 대형(大兄) 3등 소형(小兄) 3등 태대사자(太大使者)
4등 소형(小兄) 4등 대로(對盧) 4등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대사자(大使者)
6등 오졸(烏拙) 6등 오졸(烏拙) 6등 대형(大兄)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상위사자(上位使者)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제형(諸兄)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10등 욕사(褥奢) 10등 욕사(褥奢) 10등 과절(過節)
11등 예속(翳屬) 11등 예속(翳屬) 11등 선인(先人)
12등 선인(仙人) 12등 선인(仙人) 12등 고추대가(古鄒大加)
13등 욕살(褥薩) 13등 없음 13등 없음

하지만 북송 때 저술된 책부원귀와 청나라 때 저술된 통전에는 유사하면서도 명칭이 다르게 저술되어 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통전(通典)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상가(相加)/토졸(吐捽)/대대로(大對盧)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대로(對盧)/태대형(太大兄)
3등 대형(大兄) 3등 패자(沛者)/울절(鬱折)
4등 소형(小兄) 4등 고추대가(古鄒大加)/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주부(主簿)/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6등 오졸(烏拙) 6등 우태(優台)/우태(于台)/대사자(大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사자(使者)/대형(大兄)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조의(皁衣)/수위사자(收位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선인(先人)/상위사자(上位使者)
10등 욕사(褥奢) 10등 소형(小兄)
11등 예속(翳屬) 11등 제형(諸兄)
12등 선인(仙人) 12등 과절(過節)
13등 욕살(褥薩) 13등 부과절(不過節)
14등 선인(先人) 14등 없음
한원(翰苑)[48]
1등 대대로(大對盧)[49]
2등 태대형(太大兄)[50]
3등 울절(鬱折)[51]
4등 태대사자(太大使者)[52]
5등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53]
6등 대사자(大使者)[54]
7등 대형(大兄)[55]
8등 발위사자(拔位使者)[56]
9등 상위사자(上位使者)[57]
10등 소형(小兄)[58]
11등 제형(諸兄)[59]
12등 과절(過節)
13등 불절(不節)
14등 선인(先人)[60]

고구려 관등 조직에서는 '兄'과 '使者'의 명칭을 중심으로 관등이 분화되어 있다. 兄 계열은 연장자 혹은 가부장적 족장의 뜻을 가진 것으로 종래 족장 세력이 관리로 편제된 것이고, 使者계열은 조부를 거두어 들이는 사람의 뜻을 가진 것으로 행정적 관리 출신이 그들의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분화된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중앙 정치제도에는 관부 및 관직명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관등이 곧 관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대체적으로 고구려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13~14등급의 관등제의 운영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 관제를 기준으로 각 5부에 속한 신하들도 유사한 관등으로 나뉘어졌는데 앞에 소속된 부를 뜻하는 형태의 명칭으로 중리대형(中裏大兄)의 경우 중리부에 속한 부의 7등급 관리를 의미하는 형태이기도 했다. 즉 부족장의 가신 체제(家臣體制)가 중앙 관료 체제 속에 흡수되어 일원적인 집권 체제로 정비되었다라고 볼 수 있겠다.

대대로가 수상으로서 국사를 총괄하고, 대대로는 귀족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로 고구려에는 귀족들의 합좌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도 귀족들의 합좌 정치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당시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 5관등, 조의두대형 이상만이 국가 기밀 사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귀족들 내에서의 신분 구별을 보여준다.

소수림왕 때 재편 이후로 지방 행정은 기존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6세기부터 재편이 되었다.관련정보
욕살(褥薩) →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 → 가라달(可邏達) → 누초(婁肖)

의 체제의 직책을 두며 성(城)을 기준으로 대성(大城)이라 불리우는 큰 지역의 행정관은 5등급 이상의 욕살(褥薩)이 파견되었고 그 이하 소성(小城)들을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라고 불리우는 직책의 7등급 이상의 직책이 맡은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개개별 소성(小城)들은 규모 혹은 관할에 따라서 가라달(可邏達)과 누초(婁肖)각각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욕살이라는 명칭은 13등급의 하위 등급에 있는 직책인 관계로 중앙 관제의 명칭과 지방 관제의 명칭의 음차는 같아도 차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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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구려 행렬도 일부.

7.1. 편제

안악 3호분 행렬도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 from Biggemstone on Vimeo.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 고구려의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 조직도 일원적인 편제 구조로 국내성·평양·한성(漢城 :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었으며,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실시했다. 대모달의 관직은 5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었던 자리이며 말객의 경우 1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7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는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고대국가들처럼 5부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중앙의 계루부는 중앙군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기군만을 정예로 언급을 하면서 다른 군대는 상대적으로 이런 묘사가 덜하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국원왕 항목에서도 있지만 고구려군만 적기군으로 두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된 지방민으로서 열악한 무장에 사기가 떨어지는 동원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던 것이 나중에 소수림왕 때 국가적 율령 체제를 거치면서 손을 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광개토태왕 때 관군이라는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군 통제하의 지휘 체계와 병력 체제의 집중 운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시 상비군의 체제가 중앙의 군대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연히 고대의 중앙과 지역의 권력의 균형을 볼 때나 그 이후에 귀족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보아 각 귀족마다 사병 집단은 존속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예시로 보자면 미군처럼 연방군과 주방위군의 형태와 같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미군과 다른 점은 평시에는 중앙의 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주방위군 형태의 각 5부를 대표하는 귀족들의 사병 집단이라는 점이다.

7.2. 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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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종은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잘 알려진 중장기병과 중장기병보다 무장이 덜한 중기병(重機兵) 그리고 무장이 가벼운 경기병(輕騎兵)과 기마궁수의 기병 병과가 존속했다. 크게 중장기병과 경마기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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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으로는 부월수(斧鉞手)/환도수(環刀手) /창수(槍手)/궁수(弓手)가 존재해 있다. 환도수(環刀手)/창수(槍手)는 중장보병에 속했으며 부월수(斧鉞手)는 경보병에 속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궁수(弓手)가 별도로 존속했다. 이외에 별도로 쇠뇌를 운영하는 병사나 공병과 같은 존재 그리고 취사 집단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부분적 기록에서만 유추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61]

고구려가 다른 고대국가들처럼 개인의 신분과 경제 수준에 따라서 갑옷과 무장을 각자 갖추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흑색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밀었다는 무사 집단의 경우에는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용어나 조의(皁衣)라는 표현이 나오나 둘다 모두 관등의 문제이고 실존 기록에는 적시돼 있지 않다. 위에 서술되었듯,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경당(扃堂)은 오늘날의 훈련소와 같은 군사학교의 역할을 하여 성인남성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고구려군에 즉각 편입시킬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당(扃堂) 이전에는 좌식자(坐食者)라는 약탈 경제와 전투 목적의 지배 전사집단이 귀족층 내에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들에 대한 연구는 학설이 여러가지이므로 그 존재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들이 계속 존속하여 군사력의 한 축을 차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7.3. 주력대

개마무사(鎧馬武士)라 불리우는 중장기병과 상대적으로 경무장인 경기병과 중기병들이 고구려의 주력이었고, 이들은 고구려의 핵심 방어기지인 산성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산성 기병은 침공군에게는 매우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온 침공군의 배후와 보급로를 이들이 끊임없이 차단하여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방어전략에서 청야전술과 함께 산성과 산성의 주변에 있는 보루와 같은 군소기지들의 협력방어를 매우 중시했다. 덕분에 침공군은 장기 주둔도 어려웠지만 점령한 고구려의 영토를 사수하는 일도 상당히 어렵게 되는 환경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 고국원왕 시절에도 잘 나가던 전연이 국내성을 점령하고도 물러난 이유 중 하나로 이러한 점이 작용했다. 고구려의 이 방어 전략 체계의 우수함은 이후 고수전쟁고당전쟁에서 압도적인 적의 침공군에 맞서 보여준 뛰어난 방어력으로 재차 증명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전쟁시 집단예민(集團隷民)에 속하는 말갈-거란등과 같은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간접 지배지역의 타 종족들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처럼 이들이 보조병 역할을 했을지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도 이들을 동원하면서 로마와 유사한 인센티브를 제시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고구려가 거란-실위-말갈 등을 동원했던 기록들과 거란-실위-말갈족 등이 고구려의 멸망시기까지 함께 했던 사례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7.4. 병기

고구려의 병장기들은 중국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될 만큼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군대가 입는 갑옷만 하더라도 높은 철 생산력과 가공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비록 손질에 손은 많이 가지만 방어력을 확실히 보장하는 찰갑이 고구려 초기부터 보편화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맥궁(貊弓)/고시(楛矢)가 유명했고, 건국신화에서도 주몽이 활의 명수였던 점, 말을 수출하고 대량으로 운영하여 경당(扃堂)에서도 활쏘기과 말타기를 배우게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궁병기병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란 유추가 가능하다. 이러한 바탕에서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의 병장기 수준에 뒤지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는데, 특히 평원왕 때는 고구려의 쇠뇌를 개량하기 위해 수나라의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웃해서 빼돌릴 정도였다. 《수서》에서는 이 대목을 아주 치를 떨며 기록해 놓았다.

다만 수레는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 지역의 전장 환경과 더불어 산성을 기반으로 한 전투를 주 전략으로 펼친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차(戰車)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장기병의 존재가 전차의 충격력과 파괴력을 대신했기에 수레를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8.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장수왕

영명 7년[62]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63]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64]에 세종[65]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66]는 섭라[67]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68]
《위서》 열전 고구려
고구려의 시작은 압록강 근처의 작은 소국이었고 4세기까지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유력한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성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존재감이 뚜렷할 정도로 그 위상이 매우 높아진다.

초창기 고구려는 인접한 중국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 정도 선에서 최고 책임자로서 해결을 보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서 중앙 최고위 요인들이 다발로 뭉쳐서 대륙 반대편까지 박박 긁어와야 할 정도, 중원 대륙이 온 국력을 기울어야 하는 상대가 된 것이다.[69]

여기에 대륙 세력들이 치고받는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난 입지와 착실히 쌓아온 전적까지 더해져서 고구려는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유연, 남조를 쥐어패는데는 망설임이 없던 북위는 고구려에게 압박이나 도발을 받고도 대결을 피하고 오히려 남조와 동등한 의전으로 달랬으며 백제나 탐라, 말갈 등에 대한 패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북제와 북주, 유연을 굴복시킨 돌궐 제1제국을 상대로는 고구려가 승리하여 인국으로서 대등하게 병존하였다. 그 돌궐을 무너뜨린 수나라는 이러한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 새로이 판을 짜다가 고구려를 상대로 수백만의 대군을 쏟아넣는 등 국력을 고갈하여 멸망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는 신하국인 아님을 자각하고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고구려를 상대하다 나라가 휘청였으며 가까스로 멸망시킨 후에도 이를 건사하지 못하고 국방력의 고갈이 현저해진다.

또한 한사군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활동 반경도 비약적으로 늘어나 후기에는 몽골초원의 유연과 중원 남쪽의 남조를 동시에 두고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으며 돌궐과 합종연횡을 시도하여 중원 세력을 견제하는가 하면, 그 너머의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이르기까지 사절이나 인적 교류가 이뤄졌으며 군사활동의 스케일도 몽골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훨씬 커진다.

초창기 고구려는 산지 위주의 영토에서 인구 부양력은 낮지만 특유의 방어력과 전투력을 위주로 국력을 어렵사리 키워나가는 양상이었다.[70] 그리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송화강, 간도 일대와 요하부터 서북한, 황해도와 그 이남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발달하고 생산력을 갖출만한 입지 좋은 땅까지 갖춰 양적으로도 강대국다운 풍모를 갖추게 된다.[71] 비록 중국이 제대로된 정비가 되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중국을 양분하던 남조의 집계 인구가 50~90만호 가량이며 삼국지 위나라의 인구가 67만호 가량임을 고려하면 멸망 당시에도 70만호 가량의 집계 인구를 보유한 고구려가 얼마나 건실하게 국력을 길러왔는지 알 수 있다.[72][73]

이렇게 고구려는 국력을 키우고 제국적인 위상을 갖춰감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복종시켰다 자부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탐라와 백제, 말갈 등을 포함하는 패권을 인정받는가 하면 만주와 내몽골, 연해주 일대에 말갈, 거란, 실위 등을 휘하에 두고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공존하고 혹은 그들에게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여 일부는 멸망 때까지 운명을 같이하고 재건국의 초석이 되기까지 한다. 후대에 이들이 대륙을 어떻게 털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들을 통제한 고구려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방증한다. 한국 역사에서 제국이나 강대국이라는 단어에 가장 부합하는 시대랄 수 있는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은 후대의 한반도 국가들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명성을 선사해주었고 약소국의 비애를 절감할 때마다 강렬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9. 영역과 행정구역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누었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었던 5부족(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이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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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고구려의 영역. 서쪽에는 한사군, 북쪽으로는 선비족이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기를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이천 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이십 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왕이 친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으로는 북부여(현 지린성)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국인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일본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중원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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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본토(직접 통치 영역), 기원후 476년경.,(출처), 5-6세기 고구려의 주요 도성과 진출지.

위 지도에 첨언하자면 직접 지배한 지역 뿐만 아니라 거란, 말갈, 지두우 등 내몽골, 연해주, 북만주 일대에 산재한 세력들을 복속시키거나 군사적인 영향력을 투사해기 때문에 간접지배 지역과 영향력을 행사한 기준으로 폭을 넓히면, 저 지도에서 요서 조양시와 난하 서쪽을 제외한 북방 영토 거의 전부를 석권하는 것을 넘어 서북쪽의 내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의미의 '영토'라 하기는 애매한 분류고, 지도 이상의 방면으로 가면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며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비정하기 어렵다.

직할 통치영역은 위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영역이다. 전성기 때는 동서남북 6천 리에 이른다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서쪽으로는 요서인 난하와 영주를 닿고 북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서북쪽의 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될 만큼 확장된 모습에서 직간접지배를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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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세계지도,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간접 통치구역 및 영향권을 반영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지도가 있다. 그러나 이 지도는 너무 개략해서 그린 나머지 여러가지 오류를 범했다. 당시 일본고훈 시대야마토 정권이 막 규슈 지역에서 간사이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던 시기였고, 동쪽에는 야요이 인과 별개의 민족인 아이누족이 정착해 있었는데, 위 지도에서는 홋카이도[74]는 물론이고 사할린까지 일본 영토로 표시해 놨다(...) 그 밖에도 국가별로 저마다 조금씩 다른 시기의 영토를 한 시점에 표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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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시나 고구려 말기의 영역을 그렸는데 고구려의 말갈 지배를 좀 더 직접적이고 공고한 것으로 간주한 견해를 반영하였다.[75]

고구려 영역들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고조선과 부여의 고대 영역을 차지하는 것으로 영토에대한 정립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가 계승의지를 표방한 고조선과 부여의 의식과 함께 고구려의 천하관에 의해 그 영역의 한계와 확장에 대한 입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스스로가 직접+간접지배지역자체의 국경의 영역으로 서쪽으로는 난하와 영주를 기점으로 국경을 정립하려고 했고 북방은 대흥안령산맥일대의 기준을 잡으면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대한 자신의 영역입장을 갖춘 형태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고구려의 천하관에 입각하여 한반도와 같은 고구려와 동질적 문화와 의식을 갖고 있는 국가들인 백제-신라-가야-탐라와 같은 현재 우리민족의 영역 전체를 자국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꾸준한 노력을 한 모양새가 현존하는 고구려의 직접+간접지배지역의 확대와 한계를 구분짓는 형태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이러한 천하관에 입각한 영역의식은 삼한일통과 같은 삼국통일에 신라가 내세운 슬로건과 같은 형태와 민족적 영역과 민족의 결속을 하는 역할도 한 영역적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에는 흔히 직할 통치하지 않은 지역까지 고구려의 강역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그러한 관점이 북한의 교과서에도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동부, 북-흑룡강남쪽류역, 동북-우쑤리강류역을 넘어 흑룡강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조선력사

10. 고구려가 남긴 것

10.1. 멸망 후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유민들은 , 돌궐, 말갈, , 발해, 신라로 뿔뿔히 흩어졌다.

당은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그 지역의 유민들은 퉁구스계의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한다. 발해는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발해인들은 보통 세갈래로 갈라져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의하거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갔으며,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그냥 그 땅에 그대로 남아서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되었다.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은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의 건국에 기여하였고 이는 왕건이 세운 고려로 이어진다.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장수왕시기에 바뀐 고구려의 국명인데,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영문 국호 "Korea"의 어원이 되었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사에 남긴 발자취와 비중은 꽤 크다.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700년간 통합된 고대국가로서 존속한 나라로 이후 이 지역에 할거, 등장한 갖가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요는 고려와의 분쟁에서 고려가 아닌 자신들이 고구려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고,[76] , 후금, 청나라로 이어지는 여진족, 만주족에게도 모델이었다.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의 중심축을 담당한 국가였으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이후의 고려, 그리고 영어 및 비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KOREA라는 국호에서 볼 수 있듯 이후 한반도 국가들에게 계승의식을 남겼다. 특히 고려조선시대에 들어와 고구려를 개창한 시조 동명성왕은 국가와 왕실에서 올리는 제사 대상 가운데 포함될 정도였으며, 특히 민족주의 관학파의 주도 아래 중국과 맞선 고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모델로 집중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 각 당대의 외국에서도 고려와 조선을 고구려의 후손들로 보았으며, 그들을 강군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 인식했다.[77]

고구려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좀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 하는 요양 고씨. 한국에는 고주몽을 시조,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그것이다.

오늘날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명맥이 이어지는 곳은 의외로 일본에 있다.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구려 유민 마을이 그것인데,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의 왕족(이 아니더라도 고구려인임은 확실해보임)이라는 약광(若光)[78]과 고구려 유민 수천이 정착하여 고마(高麗)군을 이루었다고 한다.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쿠니(武蔵国)에 신설된 고마군의 수장으로 부임했는데, 당시의 고마군은 미개척된 들판이었다고 하며 각지에서 몰려 든 고려인(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개척하였다. 약광이 숨을 거두자 고마군민이 그 덕을 기려 고마 신사([ruby(高麗,ruby=こま)][ruby(神社,ruby=じんじゃ)])를 세우고 영령을 고마 명신([ruby(高麗,ruby=こま)][ruby(明神,ruby=みょうじん)])으로 모셨다. 메이지 유신 때 현재의 히다카(日高, 일본고려히와다 산+고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지금은 행정구역 상 없으나,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여 약광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오늘날로 치면 코리아타운 같은 형태로 사이타마 인근에 거주했는데 11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인끼리 통혼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망한 지 500여 년 동안 고구려 혈통을 이어나간 셈이다. 하지만 500여 년이 한계였는지(...) 이후 일본인 사회에 흡수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500년 동안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배타성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고마 신사와 그 일대를 가보면 산과 구릉 언덕이 꽤 많다. 왜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누볐던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와 유사한 지형이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일본 여행기에서도 고마 신사를 방문한 챕터가 나온다.

고마 신사 주위에는 코마(高麗)역코마가와(高麗川)역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와 연관이 깊다.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 때에 무사로 활용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멸문지화를 입을까봐 전쟁에 나서는 것을 멈춘다. 이들은 고구려의 국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은 코마(高麗)씨를 칭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코마 후미야스와 같이 코마씨를 쓰는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코마씨의 일부는 고마 신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코마씨 중에도 자신의 조상을 망각한 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고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다. 코마씨 외에도 무사시, 무라카미 등 고구려 계통의 성씨가 꽤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은 간토지방의 무사시에 터를 잡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주장할 때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의 중심지방에 대거 이주한 게 원인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관련기사

사이타마현 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의 마을 이름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교토에서의 흔적

10.2. 현대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중국동북공정과 그에 대한 반발, 민족주의의 강화로 대륙에 대한 로망이 강해지면서 그런 사상에 반하는 신라, 조선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이 강해졌고 중간에 끼인 백제, 가야, 고려는 묻혀가는 데 반해,[79] 고구려와 발해의 경우는 만주 근역을 아우른 영토와 중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역사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 중 가장 역동적인 시기로 표현되는 경우도 잦고 세간의 인식도 그러하다. 광개토대왕의 경우에도 우리나라 위인들 중 순위권에 들 정도로 많은 존경을 받는 편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이 시각을 극대화하여 논란이 생길 정도의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존재한다. 고구려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환빠는 아니지만, 반대로 환빠들은 고구려와 대륙영토를 좋아하는 경우가 100%라고 봐도 무방해 이미지가 겹치기 때문에, 순수한 고구려 애호자가 극단적 민족주의자나 환빠로 종종 오해받기도 한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지상파 대하드라마 등 창작물들도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빠적 요소가 전혀 안 들어간 걸 찾기가 더 힘들 정도고[80]이로 인해 작품 전체가 저평가당하기도 하는 등 고구려도 후대의 이런 인식에 의한 피해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한편 앞서 말했듯 현대 중국은 주변국가와의 접경지역에서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가(공산당) 차원에서 이론 기반을 구축하는 노력을 하는데, 이를 역사공정이라고 한다.[81] 한국과 맞닿아 있는 동북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동북아 지역사로서 공유되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도 이 공정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를 중국의 동북공정이라고 하여 한국, 북한은 물론 동북아 지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전세계 역사학계에서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한 역사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이 강해 한국 학자들의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 관련 연구와 답사 역시 자유롭지 못한 상황.[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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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료

11.1. 한국

11.2. 일본

11.3. 중국

11.4. 금석문

12. 연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인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고구려/창작물

15. 둘러보기

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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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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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기타

  •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가 만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83]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으로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 고구려의 도읍을 알지 못하겠다는 세종조 이조판서의 보고 기록이 있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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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약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붉은 깃발이 단순 군 내부에서 구분을 위한 깃발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고구려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안악 3호분의 벽화에도 붉은 색이 첨부된 깃발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일수도 있다.
파일:external/pds27.egloos.com/a0053134_56bca6033be9d.jpg
안악 3호분 벽화 중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이 붉은 깃발인 것을 알수가 있다.
[2] 사실 이것이 실제 고구려 깃발인지가 불분명한게, 상술하였듯이 근초고왕 본기에는 위와 같이 저술되어있지만, 고구려에는 '철기군(鐵騎軍)'이라는 정예기병 개마무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적기(赤旗)가 고구려의 국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3] 자세한 내용은 영역과 행정구역 문단을 참조.[4]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건국 연도 항목 참조.[5] 소고구려의 실존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6] 구려, 고리 등[7] 동명성왕(주몽)이 건국할 당시의 명칭은 고구려였으나, 장수왕 대에 이르러 국호가 고려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는 왕건고려와의 구분을 위하여 고구려로 부른다. 후고구려(태봉)도 최초 국호는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였다.[8]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 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다만, 장수왕 대에 유연과의 지두우 지역 일시적 분할에 통치에 따른 것으로 학계에서는 공식적인 영역으로 비정하지는 않는다.[9]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으로 기록됨.[10] →환도성→국내성[11] →장안성[12]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13]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엔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여 국내성, 평양성의 순서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유리왕 대에 국내성(위나암성)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 대에 환도성으로 천도하고, 이후 동천왕 대에 조위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장수왕 대의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남평양이 이곳일 가능성이 있다.)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국원왕 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환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오나, 전연의 침입을 받아 평양 동황성(혹은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도읍을 옮겨간다. 이후 다시 소수림왕 대에 국내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후 근 60년을 지내다가 장수왕 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원왕 대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다.[14] 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15] 고구려족, 옥저, 부여 등.[16] 백산말갈, 속말말갈[17] 보통 연개소문의 도교 수입을 현재의 정설로 인정하지만 이전에 자체적인 도교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일신(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기자신, 부여신「유화」, 고등신「주몽」 등을 섬기며 요동성 추모왕의 사당에 쇄자갑을 비치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18] 일본서기 기록[19] 소노부 → 계루부[20] 건국 초기에는 소노부의 권력이 막강해 계루부와 서열 다툼이 있었으나, 6대 태조왕 또는 그 이후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소노부 또는 태조왕 이전 국왕들이 해(解)씨 였다는 주장은 해씨 고구려설 문서 참조.[21] 최근에는 몽골 다리강가에 고구려 양식으로 유추되는 고분이 발견되어 몽골 동부까지 지배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만 이후 추가적인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서 현재는 가설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2] 두 국가 중 하나가 분명 한국사상 가장 넓은 통치 영역을 가졌음은 분명하나 고구려도 그렇고 특히 발해의 영역 기록이 워낙 모호해서 누가 더 넓었는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판독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통치영역 자체는 발해가 고구려 보다 넓었다 보는 쪽이 조금 많긴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보다 북동쪽 변방에 중심지를 둬서 인구밀도가 낮았으므로 직접지배 영역은 고구려보다 못 미쳤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일당 그당시 살았던 발해인 대문예부터 고구려보다 우리가 약하다고 주장했으니..[23] '高驪', '高句驪'로 쓰기도 한다.[24]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인 까오리방쯔(高麗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25] 물론 상대적인 의미이다. 현재 한국의 한자음은 구어 사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중국 한자음과 달리 대체로 당나라 시절의 장안음이 큰 변화 없이 고착된 것으로 본다. 상세한 것은 아래를 참조.[26] 돈황문서 '북방 몇몇 나라의 왕통에 관한 기술'(Pelliot Tibetain 1283)[27] 샤나메[28] 돌궐 궐특근 비문[29] [30] 범어잡명[31] 한자 음차로는 '구구타의설라(俱俱陀醫說羅)', 의미는 '계귀(鷄貴)'. 즉 '쿠쿠테'는 ''이라는 의미이고(닭의 울음소리에 대한 의성어라는 설이 있다.) '스바라'는 '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닭의 깃을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는 해설과 함께 기록된 호칭이다. - <대당서역구법고승전>[32] 흔히 중원고구려비라 불리는 비석.[33] 이러한 추측으로 명칭의 변화를 통해 고구려 유물의 추정 연대를 파악하기도 한다. 한가지 예시를 들자면 중국 요녕성 의현에서 발굴된 불상에는 대고구려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이 불상은 아직 시기나 국적 등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게 없어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이나 망한 후에 대고구려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도 않았을 테니 고구려 시기에 쓰인 불상임은 확실해 보이고, 굳이 '대'고구려라고 주변국에서 높여줬을 리도 없으니 고구려에서 만든 불상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좀 더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아마 장수왕 때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호를 바꾼 게 사실이라면 국호 변경 이전 시기의 불상일 것이다.[34]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35] 한자 문화권에서 정식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듯이[36] 뜻은 아직 알 수 없지만.[37] 이병도 교수는 고(高)의 한국어 고유 어휘인 '수리'와, 고을을 뜻하는 '골'을 연결시켜 고구려의 고유어 명칭을 '수릿골'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38] 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음.[39] 실제로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식으로 쓰지만.[40] <발해 국호 연구>[41] 다만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국어 표현의 고릿적, 고린내 등의 어원이 高麗라는 설도 있기 때문.[42] 고대 국어 시기 /ㅓ/는 [e\]에 가깝게 발음되었다고 본다.[43] 정장상팡(郑张尚芳)은 /lje̞/, 베른하르드 칼그렌(Bernhard Karlgren) 등은 /lje/, 판우윈(潘悟云)과 사오룽펀(邵榮芬)은 /ljɛ/로 추정했다.[44] 전한시대의 서적인 '논형'.[45] 연노(涓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46] 고구려전 항목[47] 도사(道使)라고도 한다.[48] <<한원>> 번이부 고려조옹씨괘의 <<고려기>> 출처. 이 14관등은 고구려 후기의 완성된 모습일 것이다.[49] 토졸(吐捽)이라고도 한다.[50]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라고도 한다.[51] 주부(主簿)라고도 한다.[52] 대부사자(大夫使者)라고도한다.[53] 중리조의두대형(中裏皂衣頭大兄)이라고도 한다.[54] 대사(大奢)라고도 한다.[55] 힐지(纈支)라고도 한다.[56] 유사(儒奢)라고도 한다.[57] 계달사자자(契達奢使者), 을기(乙耆)라고도 한다.[58] 실지(失支)라고도 한다.[59] 예속(翳屬), 이소(伊紹), 하소환(河紹還)이라고도 한다.[60] 실원(失元), 서인(庶人)이라고도 한다.[61] 전문 취사집단의 경우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이 부여 정벌 때 '거대한 솥을 발견하여 밥을 지을 수 있었다'는 대목을 해석한 것이다.[62] 남제의 연호, 서기 489년, 장수왕 77년[63] 풀어쓰자면 남제가 '뭐? 북위면 모를까 고구려와 맞먹으라고?'라고 따지자 북위가 '이정도도 많이 대접해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어…'라고 면박을 주는 상황이다.[64]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65] 생몰년 499~515. 북위의 8대 황제로 북위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66] 마노 혹은 옥[67] 탐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68] 얼핏 보면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는 고구려를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타이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말갈과 백제를 포함한 중국 동쪽의 세계를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인식도 은근히 드러나는 은유이기도 하다. 관념적으로는 천하에 중화질서 하나로만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69] 북위는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대륙 서쪽의 농우 지역의 기병을 동원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당나라의 경우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다가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70] 그리고 강대국이 된 후기에도 이러한 시절의 전통에 따라 평시의 평지성과 전시의 산성의 이중적인 수도 체계를 유지하였고 강력한 수성 능력과 방어 체제를 운영하였다.[71] 고구려 초기에는 2~3만 병력에 나라가 휘청였지만 이정도는 말기에는 내몽골 같은 외지에 여유롭게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이며 수십만 단위의 대군을 야전에 동원할 정도에 이른다.[72] 중국 옆에 있으니 작다 보일 수 있는데 70만호의 인구를 행정체계 아래 두고 통치할 수 있는 국가는 동시대 기준으로 한 손에 꼽힐 정도다. 또한 막상 통일 중국이 아니라 분열기라면 중원 대륙 한복판에서 떨어져도 손꼽히는 강자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체급이다.[73] 당시 당서를 비롯한 중국 정사 외국 열전에서 사산조, 발해, 일본 등 방귀 좀 뀐다 싶은 수준을 묘사할 때 붙이는 숫자가 겨우 10만호다. 실제적인 체급일 리는 없겠지만 10만호라는 숫자가 어느정도 대세력을 수식하기에 충분한 수치로 인식되었음은 분명해보인다.[74] 19세기에 이르러서 완전히 복속되었으며, 이후에도 일부는 불모지로 남아있다가 그 개척은 20세기 초에야 끝났다.[75] 말갈부의 위치가 잘못된 곳이 조금 있다.[76] 단, 이때 요의 태도가 상당히 애매하여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고려가 자신이 적통이라고 하자 별 다른 항의없이 순순히 인정해준다.[77]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고려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하며, 옛 당 태종조차 굴복시키지 못했던 나라가 직접 항복해왔다며 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대의 명나라 역시 조선이 일본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엔 당의 침입을 막아냈을 정도로 강했다며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78] 일본명은 고마노코키시 잣코([ruby(高麗王,ruby=こまのこきし)][ruby(若光,ruby=じゃっこう)]).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79] 그러나 고려는 고려시대 중후기 무신정권권문세족 등 당시 막장 지배층들의 폭정과 전횡으로 인한 왕조 멸망, 국가 막장 테크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80] 특히 치우 드립은 그야말로 단골 소재다. 자세한 것은 치우 문서를 참조.[81] 단순히 패권뿐만이 아니라 내부 소수민족의 독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며, 티베트나 회족, 조선족 등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소수민족들은 아직까지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한 채 중화로의 완전 편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중국은 소수민족과 한족간의 갈등 문제을 계속해서 겪게 된다. 그래서 중국 정부에서 생각해낸 것이 현재 중국 영토에 해당하는 땅의 역사를 모조리 중국의 역사라고 왜곡을 한 후 '그러니까 지금 중국인들은 모두 같은 중화민족' 이라고 무마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티베트, 내몽골의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82] 현지 답사를 갔다가 출입을 금지당하거나 방해를 받았다는 경험담이 많다.[83]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