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6 19:43:23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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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o3p4bv63LR1sqk8veo2_r1_400.jpg 고구려
역사 사회 문화 인물 왕사 건축 연호
고구려 | 高句麗
고려 | 高麗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Red_flag.svg.png
깃발[1]
파일:고구려의 지도(장수왕 시대).png
장수왕 64년(476년)경 고구려 영역과 삼경[2]
기원전 37년?[3] ~ 서기 668년 9월 21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고조선 현도군[4]
고구려현
안동도호부 발해
부여
원삼국시대
소고구려[5]
고구려부흥운동
신라[6]
국호 졸본부여[7][8] → 고구려[9][10] → 고려[11][12]
위치 한반도 북부 일부 → 한반도 중·북부/만주 → 한반도 북부/만주[1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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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 건국
3년 국내성 천도
194년 진대법 시행
313년 낙랑군 축출
372년 불교 전래
373년 율령 반포
427년 평양성 천도
545년 추군과 세군의 동란
612년 살수대첩
631년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집권
645년 안시성 전투
668년 평양성 함락
수도 졸본성[14]국내성[15]평양성[16][17][18]
삼경 국내성 · 평양성 · 한성[19]
종족 예맥[20], 말갈[21]
언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
종교 불교, 토속 종교[22]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태왕 / 오리코케[23]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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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태조왕
고국천왕
소수림왕
광개토왕
장수왕
영양왕
국성 고(高)[24][25]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중국, 러시아
1. 개요2. 국호
2.1. 표기2.2. 발음
3. 역사4. 사회5. 문화6. 정치 제도
6.1. 초기6.2. 후기
7. 군사
7.1. 편제7.2. 병종7.3. 주력대7.4. 병기
8. 국력9. 영역과 행정구역10. 멸망 이후11. 일본의 고구려 유민12.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12.1. 기원12.2. 계승
12.2.1. 현대
12.2.1.1. 남북한
12.2.1.1.1. 한국12.2.1.1.2. 북한
12.2.1.2. 중국12.2.1.3. 일본
12.2.2. 현대 이전
12.2.2.1. 한국
12.2.2.1.1. 통일신라12.2.2.1.2. 발해12.2.2.1.3. 후고구려와 고려12.2.2.1.4. 조선12.2.2.1.5. 대한제국?
12.2.2.2. 중국
12.2.2.2.1. 당나라12.2.2.2.2. 송나라12.2.2.2.3. 요나라12.2.2.2.4. 원나라12.2.2.2.5. 명나라
12.2.2.3. 일본12.2.2.4. 몽골
12.2.2.4.1. 몽골제국
13. 관련 사료 목록
13.1. 한국13.2. 일본13.3. 중국13.4. 금석문
14. 고구려/문화재
14.1. 금석문14.2. 유적
15. 연표16. 왕사17. 인물18.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19. 고구려부흥운동20. 고구려/창작물21. 기타22. 같이보기23. 둘러보기


1. 개요

고려(高麗) 또는 고구려(高句麗)는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나라 중 북쪽에 위치했던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오늘날 만주의 일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전성기 시절에는 중부와 남부의 일부까지 차지했던, 영토적으로 삼국 중 가장 넓은 강역을 확보했던 국가였고 국력 또한 삼국 중 가장 강한 국가였다. 한국사 전체로 따져봐도 발해와 함께 가장 넓은 통치 영역을 차지했던 국가로 추정되고 있다.[26][27]

2. 국호

2.1. 표기

언어 명칭 및 해설
한국어고구려(高句麗) / 고려(高麗)

장수왕 이후와 고구려 멸망 이후, 대개 고려라는 말이 쓰였지만 현대의 한국어로는 왕건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고구려라고만 불린다.
중국어가오리(Gāolí, 高麗), 가오거우리(Gāogōulí, 高句麗)[28][29]

'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麗'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거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30].
일본어고쿠리([ruby(高,ruby=こう)][ruby(句,ruby=く)][ruby(麗,ruby=り)]), 고라이([ruby(高麗,ruby=こうらい)])

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등으로 써 놓고 '고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고대 티베트어케우리(Ke'u-li)[31]
페르시아어
(11세기)
모크란(Mokraan)[32]
고대 돌궐뵈클리(Bökli)[33]
그리스어무크리(Moúkri)[34]
산스크리트어 무쿠리(Mukuri)[35],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36]
베트남어까오까우리(Cao Câu Ly)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으로 서사되었는데 주로 高句麗(고구려)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편 왕망신나라에서는 왕망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고구려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고구려가 무시한 것에 분노해서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불렀다고 하는 건데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는 '고구려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변경,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37]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냥 이 나라를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이래 700여 년 내내 전부 고구려라고 부르는 관습이 정착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때 국호를 바꿨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38]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句麗)보다는 고려(高麗)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39]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高禮)'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한자어 그대로 '높다', '숭고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40], 또는 그것이 '고'와 발음이 비슷한 당시의 고유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41][42]. 장수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지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 부른다"는 기록에 미루어 고려라는 국호가 성을 뜻하는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는 '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명확한 기록이 아직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또 일각에서는 '뵈클리', '모크란' 등의 표현으로 미루어, '맥(貊)'과 '예(濊)'의 병치형 합성어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뵈클리'가 다시 '뵉(맥)'과 '리(예)'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궁예가 세운 나라를 통째로 후고구려[43],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건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태봉, 고려 문서 참고.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오대십국시대송나라를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의 나라 역사를 상세히 조사하는 것도 아닌데 이름이 똑같은 고려니깐. 고씨고려, 대씨고려, 왕씨고려[44]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일본 측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로 자처했다. 발해라는 국호는 고구려 기피증에 걸린 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외교용 국호이고 발해의 공식적인 국호는 고려라는 설이 있다.[45]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이고.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o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46]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o로 표기했다.

왕건 고려 땐 句高麗(구고려)[47], 駒驪(구려)[48]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後高麗(후고려)[49]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동국이상국집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我高麗(아고려), 즉 우리 고려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50]

2.2. 발음

고구려인들이 자신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 초의 한글 문헌을 보면 고려 시대 후기, 조선 시대에도 高麗를 고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51] 한국 한자음은 중국 중고음과 비교적 가깝기 때문에 이 한자음은 , 무렵에 불렀던 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구려발해학회에서 발표했던 서길수 교수의 高句麗 소리값 연구. 이 연구에 따르면 高句의 소리값은 '고구'가 맞지만 麗의 소리값은 '리'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중국의 경우. 중국에서는 '려'를 '리' 라고 발음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까지 '리' 라고 발음하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려' 라고 발음한다. '麗'는 대체로 중고음에서는 '려'에 가까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다. 삼국시대에 무어라 발음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52] 16세기 조선의 훈몽자회에서는 고구려로 쓰여 있다. 학자들에 따라 다르지만 麗의 중고한어 발음은 일반적으로 /ljɛ/ 혹은 /lje/, 혹은 그 중간인 /lje̞/로 추정된다.[53]

희한하게도 동아시아 쪽 언어들은 발음이 '고구려'와 비슷하고 서역 쪽 언어들은 '말갈'과 비슷하다.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의 원음을 '맥구려'로 추정하는게 일반적이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로 보는 게 통설이다. 당나라 때 편찬된 《범어잡명(梵語雜名)》에 의하면, 고구려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Mukuri라 하고, 한자로는 무구리(畝俱理)라 명시해놨기 때문에,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더라도, 모크란, 뵈클리, 모클리는 고구려가 맞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초기의 공신인 마리를 인명이 아니라 부족명으로 보아 이러한 호칭과 통한다는 의견도 보인다. 한편 막리지의 막리도 이러한 호칭과 같은 계통이고, 광개토대왕비여라는 지명도 같은 계통이라고 한다.

티베트는 서역에 위치했지만 '고구려'와 발음이 비슷한 케우리라고 부른다. 중국어 발음이 티베트에 전해저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麗(려) 자가 나라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리'라고 읽힌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를 고구리, 고려를 고리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최초로 음차 표기된[54] 단어인 高離(고리)의 離(리)는 음차표기 되었던 전한시대 당시에는 rje(례)에 가까운 발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로 《한서》에서는 '알렉산드리아'가 烏弋山離(오익산리)라고 적혀있다. ria를 離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

리(離)자는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등 마한의 국가명에서도 음차로 쓰이는데 비리(卑離)는 백제의 부리(夫里)와 같은 글자로 본다. 려든 리든 혼용해서 발음하고 썼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고구려의 국호와 발음은 천 수백 년 뒤 국가인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장수왕 때 고정한 고려라는 이름을 왕건이 세운 후고려가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 이름이 국제적으로 퍼져 옛 아라비아 상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는 명칭인 코리아로 불리고 있다. 어원을 생각하면 고구려라는 이름이 아직도 살짝 변형되어 살아남아 있는 셈.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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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회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사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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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 제도

6.1. 초기

파일:고구려금관.png
파일:집안 출토 절풍형 금동관.jpg
고구려금관
초기의 고구려는 한반도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아직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일종의 부족 연명체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초기 고구려의 왕들도 사실상 다른 부족 연맹들을 아우르는 일종의 연맹장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중심 세력을 이루었던 다섯 부족은 계루(桂婁), 환나(桓那), 연나(掾那), 비류나(沸流那), 관나(貫那)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소노(消奴)[55]·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 등 이었다. 이 다섯 부족의 부족장 간에 선출된 부족 연맹장이 곧 왕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위는 점차 선출이 아닌 세습제로 이어졌다.

초기는 소노부에서 왕이 배출되었으나, 이후에 소노부의 힘이 점차 미약해져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또는 동명성왕이 아닌 태조왕 이후부터라고도 한다.

또한, 절노부에서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여 왕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절노부는 곧 연나부로, 차대왕을 몰아내고 신대왕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명림답부 이후부터 왕비족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을 배출했던 소노부와 계루부, 왕비를 배출했던 절노부등은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다.

고구려 초기의 관등은 다음과 같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56]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東夷傳)
1등 상가(相加) 1등 상가(相加)
2등 대로(對盧) 2등 대로(對盧)
3등 패자(沛者) 3등 패자(沛者)
4등 고추대가(古鄒對加) 4등 고추가(古鄒加)
5등 주부(主簿) 5등 주부(主簿)
6등 우태(優台) 6등 우태(優台)
7등 사자(使者) 7등 승(丞)
8등 선인(先人) 8등 사자(使者)
9등 조의(皂衣)
10등 선인(先人)

상가는 원래 좌보-우보체제에 있었다가 나중에 신대왕 때 국상제가 도입되면서 상가가 국상 자리에 가게된다. 기존의 좌보-우보는 대로로 갔는지 아니면 그대로 상가에 존속하는지는 불명이다. 초기에는 8~10등 관등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 고구려의 특징이다.

초기 지방 행정으로는 성(城) -곡(谷) - 촌(村)으로 나뉘어졌으며 성(城)의 책임자는 태수(太守). 곡(谷)의 책임자는 재(宰)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태수(太守)->재(宰)

의 모습이 나오는데 미천왕 때 압록곡의 관리를 압록재라고 불렀던 언급과 고노자의 승진 사례를 통하여 이러한 지방 행정 관직이 있었음이 보인다.

6.2. 후기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이였던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서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라고 하며, 그 관료 조직이 더 좋게 정비된 것은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한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게 되어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 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 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라 정했으며,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57]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욕살은 대성(大城)에 머물며, 처려근지는 각 부마다 있는 城에 머물며 통치를 했다.

고구려에는 귀족들의 회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소수림왕 때부터 체제가 다시 재편 정리가 되면서 고구려의 중기~후기의 관료 체제도 각각 변화가 되어있는 것이 확인되나 중국 측 기록에서는 당나라 때 저술된 북주의 역사를 다룬 《주서》를 기준으로 중기 후기는 《신당서》와 《수서》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태대형(太大兄) 1등 대대로(大對盧), 토졸(吐捽)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대형(大兄) 2등 울절(鬱折)
3등 대형(大兄) 3등 소형(小兄) 3등 태대사자(太大使者)
4등 소형(小兄) 4등 대로(對盧) 4등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대사자(大使者)
6등 오졸(烏拙) 6등 오졸(烏拙) 6등 대형(大兄)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상위사자(上位使者)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제형(諸兄)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10등 욕사(褥奢) 10등 욕사(褥奢) 10등 과절(過節)
11등 예속(翳屬) 11등 예속(翳屬) 11등 선인(先人)
12등 선인(仙人) 12등 선인(仙人) 12등 고추대가(古鄒大加)
13등 욕살(褥薩) 13등 없음 13등 없음

하지만 북송 때 저술된 책부원귀와 청나라 때 저술된 통전에는 유사하면서도 명칭이 다르게 저술되어 있다.
책부원귀(冊府元龜) 통전(通典)
1등 대대로(大對盧) 1등 상가(相加)/토졸(吐捽)/대대로(大對盧)
2등 태대형(太大兄) 2등 대로(對盧)/태대형(太大兄)
3등 대형(大兄) 3등 패자(沛者)/울절(鬱折)
4등 소형(小兄) 4등 고추대가(古鄒大加)/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5등 의후사(意候奢) 5등 주부(主簿)/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
6등 오졸(烏拙) 6등 우태(優台)/우태(于台)/대사자(大使者)
7등 태대사자(太大使者) 7등 사자(使者)/대형(大兄)
8등 대사자(大使者) 8등 조의(皁衣)/수위사자(收位使者)
9등 소사자(小使者) 9등 선인(先人)/상위사자(上位使者)
10등 욕사(褥奢) 10등 소형(小兄)
11등 예속(翳屬) 11등 제형(諸兄)
12등 선인(仙人) 12등 과절(過節)
13등 욕살(褥薩) 13등 부과절(不過節)
14등 선인(先人) 14등 없음
한원(翰苑)[58]
1등 대대로(大對盧)[59]
2등 태대형(太大兄)[60]
3등 울절(鬱折)[61]
4등 태대사자(太大使者)[62]
5등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63]
6등 대사자(大使者)[64]
7등 대형(大兄)[65]
8등 발위사자(拔位使者)[66]
9등 상위사자(上位使者)[67]
10등 소형(小兄)[68]
11등 제형(諸兄)[69]
12등 과절(過節)
13등 불절(不節)
14등 선인(先人)[70]

고구려 관등 조직에서는 '兄'과 '使者'의 명칭을 중심으로 관등이 분화되어 있다. 兄 계열은 연장자 혹은 가부장적 족장의 뜻을 가진 것으로 종래 족장 세력이 관리로 편제된 것이고, 使者계열은 조부를 거두어 들이는 사람의 뜻을 가진 것으로 행정적 관리 출신이 그들의 지위에 따라 여러 관등으로 분화된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중앙 정치제도에는 관부 및 관직명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는 관등이 곧 관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대체적으로 고구려 중기 이후부터는 거의 13~14등급의 관등제의 운영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 관제를 기준으로 각 5부에 속한 신하들도 유사한 관등으로 나뉘어졌는데 앞에 소속된 부를 뜻하는 형태의 명칭으로 중리대형(中裏大兄)의 경우 중리부에 속한 부의 7등급 관리를 의미하는 형태이기도 했다. 즉 부족장의 가신 체제(家臣體制)가 중앙 관료 체제 속에 흡수되어 일원적인 집권 체제로 정비되었다라고 볼 수 있겠다.

대대로가 수상으로서 국사를 총괄하고, 대대로는 귀족들에 의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로 고구려에는 귀족들의 합좌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도 귀족들의 합좌 정치가 이루어졌고, 따라서 당시 정치가 귀족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 5관등, 조의두대형 이상만이 국가 기밀 사무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귀족들 내에서의 신분 구별을 보여준다.

소수림왕 때 재편 이후로 지방 행정은 기존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6세기부터 재편이 되었다.관련정보
욕살(褥薩) →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 → 가라달(可邏達) → 누초(婁肖)

의 체제의 직책을 두며 성(城)을 기준으로 대성(大城)이라 불리우는 큰 지역의 행정관은 5등급 이상의 욕살(褥薩)이 파견되었고 그 이하 소성(小城)들을 처려근지(處閭近支) 혹은 도사(道使)라고 불리우는 직책의 7등급 이상의 직책이 맡은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개개별 소성(小城)들은 규모 혹은 관할에 따라서 가라달(可邏達)과 누초(婁肖)각각 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욕살이라는 명칭은 13등급의 하위 등급에 있는 직책인 관계로 중앙 관제의 명칭과 지방 관제의 명칭의 음차는 같아도 차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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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안악 3호분의 고구려 행렬도 일부.

7.1. 편제

안악 3호분 행렬도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 from Biggemstone on Vimeo.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 고구려의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 조직도 일원적인 편제 구조로 국내성·평양성·한성(漢城 : 황해도 재령군)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었으며,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실시했다. 대모달의 관직은 5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었던 자리이며 말객의 경우 1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며 7등급 이상의 벼슬아치가 맡을수 있는 직책이었다.

초기에는 고대국가들처럼 5부에서 병력을 차출하고 중앙의 계루부는 중앙군으로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적기군만을 정예로 언급을 하면서 다른 군대는 상대적으로 이런 묘사가 덜하다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국원왕 항목에서도 있지만 고구려군만 적기군으로 두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된 지방민으로서 열악한 무장에 사기가 떨어지는 동원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던 것이 나중에 소수림왕 때 국가적 율령 체제를 거치면서 손을 본 것으로 보이며 그 이후 광개토태왕 때 관군이라는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중앙군 통제하의 지휘 체계와 병력 체제의 집중 운영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시 상비군의 체제가 중앙의 군대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연히 고대의 중앙과 지역의 권력의 균형을 볼 때나 그 이후에 귀족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내전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점을 보아 각 귀족마다 사병 집단은 존속해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예시로 보자면 미군처럼 연방군과 주방위군의 형태와 같은 모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미군과 다른 점은 평시에는 중앙의 통제를 제대로 받지 않는 주방위군 형태의 각 5부를 대표하는 귀족들의 사병 집단이라는 점이다.

7.2. 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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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종은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잘 알려진 중장기병과 중장기병보다 무장이 덜한 중기병(重機兵) 그리고 무장이 가벼운 경기병(輕騎兵)과 기마궁수의 기병 병과가 존속했다. 크게 중장기병과 경기병으로 구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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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으로는 부월수(斧鉞手)/환도수(環刀手) /창수(槍手)/궁수(弓手)가 존재해 있다. 환도수(環刀手)/창수(槍手)는 중장보병에 속했으며 부월수(斧鉞手)는 경보병에 속했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궁수(弓手)가 별도로 존속했다. 이외에 별도로 쇠뇌를 운영하는 병사나 공병과 같은 존재 그리고 취사 집단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부분적 기록에서만 유추할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71]

고구려가 다른 고대국가들처럼 개인의 신분과 경제 수준에 따라서 갑옷과 무장을 각자 갖추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흑색옷을 입고 머리를 짧게 밀었다는 무사 집단의 경우에는 조의선인(皁衣先人)이라는 용어나 조의(皁衣)라는 표현이 나오나 둘다 모두 관등의 문제이고 실존 기록에는 적시돼 있지 않다. 위에 서술되었듯,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경당(扃堂)은 오늘날의 훈련소와 같은 군사학교의 역할을 하여 성인남성에게 특별한 훈련을 시키지 않아도 고구려군에 즉각 편입시킬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경당(扃堂) 이전에는 좌식자(坐食者)라는 약탈 경제와 전투 목적의 지배 전사집단이 귀족층 내에 존속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들에 대한 연구는 학설이 여러가지이므로 그 존재가 아직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들이 계속 존속하여 군사력의 한 축을 차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7.3. 주력대

개마무사(鎧馬武士)라 불리우는 중장기병과 상대적으로 경무장인 경기병과 중기병들이 고구려의 주력이었고, 이들은 고구려의 핵심 방어기지인 산성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산성 기병은 침공군에게는 매우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온 침공군의 배후와 보급로를 이들이 끊임없이 차단하여 혼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방어전략에서 청야전술과 함께 산성과 산성의 주변에 있는 보루와 같은 군소기지들의 협력방어를 매우 중시했다. 덕분에 침공군은 장기 주둔도 어려웠지만 점령한 고구려의 영토를 사수하는 일도 상당히 어렵게 되는 환경을 강요받는 상황에 처했다. 고국원왕 시절에도 잘 나가던 전연이 국내성을 점령하고도 물러난 이유 중 하나로 이러한 점이 작용했다. 고구려의 이 방어 전략 체계의 우수함은 이후 고수전쟁고당전쟁에서 압도적인 적의 침공군에 맞서 보여준 뛰어난 방어력으로 재차 증명되었다.

한편 고구려는 전쟁시 집단예민(集團隷民)에 속하는 말갈-거란등과 같은 고구려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간접 지배지역의 타 종족들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군처럼 이들이 보조병 역할을 했을지 여부는 확인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도 이들을 동원하면서 로마와 유사한 인센티브를 제시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제 고구려가 거란-실위-말갈 등을 동원했던 기록들과 거란-실위-말갈족 등이 고구려의 멸망시기까지 함께 했던 사례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7.4. 병기

고구려의 병장기들은 중국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평가될 만큼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군대가 입는 갑옷만 하더라도 높은 철 생산력과 가공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비록 손질에 손은 많이 가지만 방어력을 확실히 보장하는 찰갑이 고구려 초기부터 보편화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맥궁(貊弓)/고시(楛矢)가 유명했고, 건국신화에서도 주몽이 활의 명수였던 점, 말을 수출하고 대량으로 운영하여 경당(扃堂)에서도 활쏘기과 말타기를 배우게 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궁병기병이 상당히 뛰어났으리란 유추가 가능하다. 이러한 바탕에서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의 병장기 수준에 뒤지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했는데, 특히 평원왕 때는 고구려의 쇠뇌를 개량하기 위해 수나라의 기술자들을 대거 스카웃해서 빼돌릴 정도였다. 《수서》에서는 이 대목을 아주 치를 떨며 기록해 놓았다.

다만 수레는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토인 만주 지역의 전장 환경과 더불어 산성을 기반으로 한 전투를 주 전략으로 펼친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차(戰車)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장기병의 존재가 전차의 충격력과 파괴력을 대신했기에 수레를 전투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8.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본기 장수왕

영명 7년[72]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73]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74]에 세종[75]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76]는 섭라[77]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78]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79]
《수당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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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시작은 압록강 근처의 작은 소국이었고 4세기까지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유력한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성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존재감이 뚜렷할 정도로 그 위상이 매우 높아진다.

초창기 고구려 관련 외교는 인접한 중국 군현의 태수, 일개 주의 자사 정도 선에서 최고 책임자로서 해결을 보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서 천자를 위시한 중앙 최고위 요인들이 다발로 뭉쳐서 대륙 반대편까지 인력과 물력을 박박 긁어와야 할 정도로 중원 대륙이 온 국력을 기울여야 하는 상대가 된 것이다.[80]

여기에 대륙 세력들이 치고받는 중심지에서 살짝 비껴난 입지와 착실히 쌓아온 전적까지 더해져서 고구려는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유연, 남조를 쥐어패는데는 망설임이 없던 북위는 고구려에게 압박이나 도발을 받고도 대결을 피하고 오히려 남조와 동등한 의전으로 달랬으며 백제나 탐라, 말갈 등에 대한 패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북제와 북주, 유연을 굴복시킨 돌궐 제1제국을 상대로는 고구려가 승리하여 인국으로서 대등하게 병존하였다. 그 돌궐을 무너뜨린 수나라는 이러한 병존적인 질서를 뒤엎고 새로이 판을 짜다가 고구려를 상대로 수백만의 대군을 쏟아넣는 등 국력을 고갈하여 멸망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가 실질적으로는 신하국이 아님을 자각하고 중화사상을 배제한 대우를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고구려를 상대하다 나라가 휘청였으며 가까스로 멸망시킨 후에도 이를 건사하지 못하고 국방력의 고갈이 현저해진다..

초창기 고구려는 산지 위주의 영토에서 인구 부양력은 낮지만 특유의 방어력과 전투력을 위주로 국력을 어렵사리 키워나가는 양상이었다.[81] 그리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송화강, 간도 일대와 요하부터 서북한, 황해도와 그 이남에 이르기까지 문명이 발달하고 생산력을 갖출만한 입지 좋은 땅까지 갖춰 양적으로도 강국다운 풍모를 갖추게 된다.멸망 당시에도 70만호 가량의 집계 인구를 보유했을 정도니 고구려가 얼마나 건실하게 국력을 길러왔는지 알 수 있다..[82][83]또한 한사군을 중심으로 이뤄지던 활동 반경도 비약적으로 늘어나 후기에는 몽골초원의 유연과 중원 남쪽의 남조를 동시에 두고 국제 정세에 영향을 끼쳤으며 돌궐과 합종연횡을 시도하여 중원 세력을 견제하는가 하면, 그 너머의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이르기까지 사절이나 인적 교류가 이뤄졌으며 군사활동의 스케일도 훨씬 커진다.

이렇게 고구려는 국력을 키우고 제국적인 위상을 갖춰감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복종시켰다 자부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 탐라와 백제, 말갈 등을 포함하는 패권을 인정받는가 하면 만주와 내몽골, 연해주 일대에 말갈, 거란, 실위 등을두고 요긴하게 활용하거나 공존하고 혹은 그들에게 강력한 패권을 행사하여 일부는 멸망 때까지 운명을 같이하고 발해의 초석이 되기까지 한다. 후대에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를 생각한다면 이들을 통제한 고구려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방증한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멸망이 한국사,중국사,몽골사,일본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견이 존재하며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을 경우 조금 과장해서 아시아의 역사가 굉장히 달라졌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도 한다.####

한국 역사에서 제국이나 강대국이라는 단어에 가장 부합하는 시대랄 수 있는 고구려의 강력한 국력은 후대의 한반도 국가들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명성을 선사해주었고 약소국의 비애를 절감할 때마다 강렬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중국에도 고구려의 인상은 그 뒤로도 깊게 남아있어서, 원나라쿠빌라이고려가 항복하자, 당태종도 정복 못 한 국가를 정복했다며 기뻐했고,[84] 조선조준(조선)을지문덕살수대첩으로 시를 써놓자 명나라 사신이 굴욕을 느꼈으며, 임진왜란당시 명나라에 지원요청하니 고구려의 후예들이 10일만에 수도 뺏기고, 의주까지 도망쳤을 리 없다며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 헤프닝(...)도 있었다. 물론, 이 뒤로 명나라 사람들이 직접 보게 되면서 조선의 국방력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지만.

9. 영역과 행정구역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누었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었던 5부족(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이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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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과 초기 고구려의 영토 확장.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기를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이천 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이십 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왕이 친히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쪽으로는 북부여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고 일대의 말갈 및 실위를,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의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충주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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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구당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후한 때에 사방 2천여 리였다. 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천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위 지도에 첨언하자면 직접 지배한 지역 뿐만 아니라 거란, 말갈, 지두우 등 내몽골, 연해주, 북만주 일대에 산재한 세력들을 복속시키거나 군사적인 영향력을 투사해기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한 기준으로 폭을 넓히면, 저 지도에서 요서 조양시와 난하 서쪽을 제외한 북방 영토 거의 전부를 석권하는 것을 넘어 서북쪽의 내몽골지방, 동북쪽 삼강평원, 연해주 일대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의미의 '영토'라 하기는 애매한 분류고, 지도 이상의 방면으로 가면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며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비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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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세계지도, 7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간접 통치구역 및 영향권을 반영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지도가 있다. 그러나 이 지도는 너무 개략해서 그린 나머지 여러가지 오류를 범했다. 당시 일본고훈 시대야마토 정권이 막 규슈 지역에서 간사이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던 시기였고, 동쪽에는 야요이 인과 별개의 민족인 아이누족이 정착해 있었는데, 위 지도에서는 홋카이도[85]는 물론이고 사할린까지 일본 영토로 표시해 놨다.(...) 그 밖에도 국가별로 저마다 조금씩 다른 시기의 영토를 한 시점에 표현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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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시나 고구려 말기의 영역을 그렸는데 고구려의 말갈 지배를 좀 더 직접적이고 공고한 것으로 간주한 견해를 반영하였다.[86]

고구려 영역들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고조선과 부여의 고대 영역을 차지하는 것으로 영토에 대한 정립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구려가 계승의지를 표방한 부여의 의식과 함께 고구려의 천하관에 의해 그 영역의 한계와 확장에 대한 입장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스스로가 직접+간접지배지역자체의 국경의 영역으로 서쪽으로는 난하와 영주를 기점으로 국경을 정립하려고 했고 북방은 대흥안령산맥일대의 기준을 잡으면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대한 자신의 영역입장을 갖춘 형태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고구려의 천하관에 입각하여 한반도와 같은 고구려와 동질적 문화와 의식을 갖고 있는 국가들인 백제-신라-가야와 같은 현재 한국의 영역 전체를 자국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꾸준한 노력을 한 모양새가 현존하는 고구려의 직접+간접지배지역의 확대와 한계를 구분짓는 형태로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이러한 천하관에 입각한 영역의식은 삼한일통과 같은 삼국통일에 신라가 내세운 슬로건과 같은 형태와 민족적 영역과 민족의 결속을 하는 역할도 한 영역적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에는 흔히 직할 통치하지 않은 지역까지 고구려의 강역으로 적극적으로 해석하며 그러한 관점이 북한의 교과서에도 드러나고 있다.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동부, 북-흑룡강남쪽류역, 동북-우쑤리강류역을 넘어 흑룡강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조선력사

10. 멸망 이후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유민들은 , 돌궐, 말갈, , 발해, 신라로 뿔뿔히 흩어졌다.

당은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그 지역의 유민들은 퉁구스계의 말갈족과 함께 탈출하여 발해를 건국한다. 발해는 926년 거란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발해인들은 보통 세갈래로 갈라져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의하거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로 갔으며,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그냥 그 땅에 그대로 남아서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되었다.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은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의 건국에 기여하였고 이는 왕건이 세운 고려로 이어진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사에 남긴 발자취와 비중은 꽤 크다.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700년간 통합된 고대국가로서 존속한 나라로 이후 이 지역에 할거, 등장한 갖가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요는 고려와의 분쟁에서 고려가 아닌 자신들이 고구려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하였고,[87] , 후금, 청나라로 이어지는 여진족, 만주족에게도 모델이었다.

11. 일본의 고구려 유민

일본에는 고구려 유민들의 영향이 엿보이는 곳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구려 유민 마을이 그것인데, 고구려 말기에 고구려의 왕족(이 아니더라도 고구려인임은 확실해보임)이라는 약광(若光)[88]과 고구려 유민 수천이 정착하여 고마(高麗)군을 이루었다고 한다. 약광은 716년 무사시노쿠니(武蔵国)에 신설된 고마군의 수장으로 부임했는데, 당시의 고마군은 미개척된 들판이었다고 하며 각지에서 몰려 든 고려인(고구려인) 1,799명과 함께 개척하였다. 약광이 숨을 거두자 고마군민이 그 덕을 기려 고마 신사([ruby(高麗,ruby=こま)][ruby(神社,ruby=じんじゃ)])를 세우고 영령을 고마 명신([ruby(高麗,ruby=こま)][ruby(明神,ruby=みょうじん)])으로 모셨다. 메이지 유신 때 현재의 히다카(日高, 일본고려히와다 산+고려)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지금은 행정구역 상 없으나,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은 여전히 유지하여 약광을 모시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오늘날로 치면 코리아타운 같은 형태로 사이타마 인근에 거주했는데 11세기 중엽까지 고구려인끼리 통혼했다고 한다. 고구려가 망한 지 500여 년 동안 고구려 혈통을 이어나간 셈이다. 하지만 500여 년이 한계였는지(...) 이후 일본인 사회에 흡수되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500년 동안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을 정도로 배타성이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고마 신사와 그 일대를 가보면 산과 구릉 언덕이 꽤 많다. 왜 고구려인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누볐던 만주벌판과 한반도 북부와 유사한 지형이다. 역사학자 임용한의 일본 여행기에서도 고마 신사를 방문한 챕터가 나온다.

고마 신사 주위에는 코마(高麗)역코마가와(高麗川)역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와 연관이 깊다.

이들은 가마쿠라 막부 때에 무사로 활용되었으며 어떤 계기로 멸문지화를 입을까봐 전쟁에 나서는 것을 멈춘다. 이들은 고구려의 국명을 그대로 성으로 삼은 코마(高麗)씨를 칭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에 코마 후미야스와 같이 코마씨를 쓰는 가문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 코마씨의 일부는 고마 신사를 중심으로 여전히 고구려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코마씨 중에도 자신의 조상을 망각한 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고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으며 일부는 적극적으로 고구려 관련 활동에 나서고 있다. 코마씨 외에도 무사시, 무라카미 등 고구려 계통의 성씨가 꽤 있다. 고구려계 유민들은 간토지방의 무사시에 터를 잡았다. 이런 이유로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친연성을 주장할 때 고구려 유민들이 일본의 중심지방에 대거 이주한 게 원인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관련기사.

사이타마현 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의 마을 이름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토에서의 흔적.

12.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12.1. 기원

고구려는 맥족이 기원이 된것으로 보이며 신화를 볼 때 예족부여와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삼국유사 고구려 조 중
북부여에서 어려움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중

고구려 초기 수도 졸본성으로 비정되는 오녀산성 부근의 망강루 고분군 6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 귀걸이는 부여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유수현의 노하심(老河深) 고분군 출토품과 동일하여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여긴다.

또한 초기에는 현도군고구려현이라는 이름이 사서에 보여 현도군과도 연관성이 있었을수도 있다.

12.2. 계승

12.2.1. 현대

12.2.1.1. 남북한
조선시대에는 삼국중 하나로 여겼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루워졌던 북벌도 고구려 계승의식에서 비롯된것이지만 4군 6진이 상당한 희생을 낳은데다가 성종대의 간도개척도 논의만 이루워졌기에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적었기는 했지만 정묘호란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으로 굴욕을 당하면서 북벌론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성화되었고, 반청흥한 의식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북벌을 해야되니만큼 민간에서 만주지역을 점유했던 고구려에 대한 인식도가 크게 높아졌고, 민간반란세력에서도 고토회복과 멸청을 내걸고 종종 북벌론을 내걸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이러 저러한 사정때문에 이루워진일은 없엇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외세의 침탈에 대한 반작용으로 근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고구려에 대한 평가가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사관에 따라 고구려에 대한 연구과 가치관 정립이 이루어졌고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제국의 식민사관인 타율성론에 대한 반발으로 중국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던 고구려에 주목하였다.
12.2.1.1.1. 한국
현대 대한민국은 고구려를 한국사로 보고 있으며 근대 민족주의적 사관으로 인해 민간에서는 북한 못지 않게 중국에 자주적이었던 고구려나 고려를 중시하고 신라, 백제, 조선을 경시하는 경향도 있다.[89] 다만 영토가 지역적으로 대부분 북한에 있는 상황이어서 경상도는 신라의 계승의식이 있고 충청도[90]와 전라도는 백제의 계승의식이 있는 반면 딱히 고구려의 계승의식이 있는 지역은 없다.[91]

현대 한국에서는 중국동북공정과 그에 대한 반발, 민족주의의 강화로 대륙에 대한 로망이 강해지면서 그런 사상에 반하는 신라, 조선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이 강해졌고[92] 중간에 끼인 부여, 백제, 가야, 고려는 묻혀가는 데 반해,[93] 고구려와 발해의 경우는 만주 근역을 아우른 영토와 중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역사 덕분에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이 시각을 극대화하여 논란이 생길 정도의 주장을 펼치는 경우도 존재하다보니 일본제국 같은 제국주의 국가는 까면서 정복전쟁 벌이던 자국왕조는 좋아하냐며 이중잣대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 고구려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이 환빠는 아니지만, 반대로 환빠들은 고구려와 대륙영토를 좋아하는 경우가 100%라고 봐도 무방해 이미지가 겹치기 때문에, 순수한 고구려 애호자가 극단적 민족주의자나 환빠로 종종 오해받기도 한다.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지상파 대하드라마 등 창작물들도 각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빠적 요소가 전혀 안 들어간 걸 찾기가 더 힘든 시기도 있었고[94] 이로 인해 작품 전체가 저평가당하기도 하는 등 고구려도 후대의 이런 인식에 의한 피해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12.2.1.1.2. 북한
남한이 백제, 신라의 강역과 조선왕조의 수도인 서울을 점유하고 있는 역사적 정통성에 대비되어 북한은 고조선, 고구려의 강역과 고려왕조의 수도인 개성을 점유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을 잇는 계보를 강조한다.[95] 특히 이들 중에서도 수도가 평양이고[96] 가장 당대 위상이 높은 고구려에 대한 관심과 계승의식이 무척이나 높고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신으로 바라보며 당시 초강대국 중국에 맞서던 고구려를 현재 초강대국 미국에 맞서는 자신들 처지와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다. 한편 남한은 미국의 동맹이고 위치도 위치인지라 중국과 동맹을 맺은 신라 취급한다.[97] 그래서 동명왕릉과 그 능침사찰인 정릉사를 개건하고 평양의 고구려 유적을 정비하는 등 계승의식을 천명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이 통구 고분군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단독 등재하려는 시도를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북한 내의 고구려 고분군을 신청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같이 등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안악 3호분이나 동명왕릉에 대해서 무리한 해석을 국가적 차원에서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12.2.1.2. 중국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동북공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중국은 196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하고 있았으나 비교적 근래들어 사관을 바꿔서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대 중국은 주변국가와의 접경지역에서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국가(공산당) 차원에서 이론 기반을 구축하는 노력을 하는데, 이를 역사공정이라고 한다.[98] 한국과 맞닿아 있는 동북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동북아 지역사로서 공유되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도 이 공정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를 중국의 동북공정이라고 하여 한국, 북한은 물론 동북아 지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글로벌 역사학계에서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한 역사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한국 학자들의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 관련 연구와 답사 역시 자유롭지 못한 편인 상황.[99]

이에 대한 일환으로 동북공정을 실시 하였고 통구 고분군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쪽은 남북한의 합작으로 사실상 동북공정을 부정하는 방향[100]으로 등재된, 중국 입장에선 실패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12.2.1.3. 일본
전근대 일본에서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정보 업데이트 및 파악이 늦은 편이었다.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에 고려로 국호를 바꾸어서 현재의 삼국시대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의 구분은 후대의 편의적인 것으로 高麗라고 자칭하는 한반도 세력이 워낙 많다보니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던 점도 있다.(삼국시대 고려도 발해도 왕건의 고려도 다 高麗를 자칭했으니)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조선 대신 高麗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한반도 세력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일본도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고구려를 한국사로 인식하고 있었으나[101]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북부의 예맥계 종족과 남부의 한계 종족을 언어,민족적으로 분리하려는 시도의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고(사실 이런 시도는 당시의 대륙진출의 사전 포석으로서 역사적으로 중국 한족이 장악하지 못했던 만주지역을 중국에서 역사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로서 아이러니하게도 이에 대항한 중국측 학자들의 연구(만주사가 중국의 일부인 근거를 찾으려는) 중국측 동북공정의 역사적 기원이 된다. 현재는 우익세력을 중심으로 고구려를 만주족)(숙신-말갈-여진-만주로 이어지는 퉁구스어족) 정권으로 왜곡하여 주장하는 일이 많아졌다.[102] 물론 퉁구스계 만주족과 예맥계 고구려인은 고대부터 언어부터 다르고 서로 이질적 존재였음은 중국측 우리측 사서에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의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시도로 보이며 고구려뿐 아니라 왕건이나 이성계 등 역대 통일 왕조의 시조도 만주족으로 각색(...)하는 등 인터넷상으로 일본판 유사역사학에 기반하여 가관인 작태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한국사의 적통을 진국 - 삼한 -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삼한 계통 중심으로 보고 부여나 고구려, 발해와 같은 북방의 예맥족 계통은 한국사 바깥의 이민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이는 열등한 한국인이 자기보다 먼저 만주에 진출했다는 점에 열등감을 가진 일본 우익 사관의 왜곡으로 보인다.

12.2.2. 현대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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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1. 한국
한국사에서는 삼국시대라는 시대 구분의 중심축을 담당한 국가였으며,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이후의 고려라는 국호 자체가 장수왕시기에 바뀐 고구려의 국명인데, 영어 및 비아시아권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리키는 이름인 영문 국호 "Korea"의 어원이 되었던 것에서 보이듯이 국호에서 볼 수 있듯 이후 한반도 국가들에게 계승의식을 남겼다.

특히 고려조선에 들어와 고구려를 개창한 시조 동명성왕은 국가와 왕실에서 올리는 제사 대상 가운데 포함될 정도였으며, 특히 민족주의 관학파의 주도 아래 중국과 맞선 고대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지닌 모델로 집중적 각광을 받게 되었다.[103]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백의(白衣)를 즐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후계 한국사 국가들도 백의를 즐겨입는 성향이 있어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광개토대왕비문한글 전 한국어 표기 중 하나인 이두[104]가 사용된 글으로서 한문의 어순과 다른 일종의 변체한문(變體漢文)이 쓰여져 있어 한국어의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음이 확인된다. 구체적으로 '지(之)'나 '상(上)' 같은 이두식 표현이 그것이다.

고구려는 수도가 졸본성오녀산성, 국내성환도산성, 평양성대성산성 같은 평지성과 산성의 이중수도 체제였는데 이는 전형적인 한국계 국가의 수도 체제이다.

한국 고유의 문화인 온돌은 고구려에서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후계 한국계 국가들에 자리잡았다.

중국의 성들은 벽돌을 이용하며 평지에 지형과 상관없이 인공적으로 네모 반듯한 형태로 쌓지만 한국의 성들은 분지지형에 주변 산맥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쌓으며 벽돌이 아닌 돌과 흙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구려 성은 중국식 성벽과는 차이가 큰 한국식 한국식이다.
파일:안시성_역사스페셜 복원 이미지1.png
역사스페셜에서 복원한 안시성 이미지

고구려의 초기 고분 형태는 돌무지무덤으로 중국식인 굴식 돌방무덤하고 차이가 있다. 이는 북방 시베리아 계통이나 중국 동북지방, 한반도와 친연성이 강한 양식이다.[105]
12.2.2.1.1. 통일신라
통일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삼한일통을 내세우며 고구려 역시도 계승한다고 선언하였다. 영토 역시 평양, 원산 아랫부분을 점하여 고구려의 강역 일부를 획득하였다. 현재의 서울은 고구려가 '남평양성'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요지였으며 패서는 고구려의 3경[106] 중 하나였던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 중 많은 수는 신라로 합류하였다. 전쟁포로로는 문무왕제3차 고당전쟁에 참전하였을때 평양성 전투에 합류하러 북상하다가 평양성이 당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구려 포로 7,000명을 이끌고 서라벌로 돌아간 기사가 있다. 항복한 지역으로는 연정토가 신라 접경 남부 국경 방어선의 책임자이면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을 신라에 바치면서 항복 했다는 기사가 있다.[107] 또한 대곡(大谷)[108]과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109]을 포함한 2군 12성이 추가로 귀순하여 항복하였다. 그래서 패서 지역은 신라와 전투 한번 벌이지 않고 바로 항복한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제3차 고당전쟁에서 신라가 최초로 전투를 벌인것은 평양성 인근에서 일어난 사천 전투 였다. 또한 반당적이었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대부분 신라군으로 합류하였다. 또한 신라에 대한 내투 집단에도 차이가 있는데, 고구려 멸망 직후 내투한 부류와 대조영 집단과 함께 영주 지역에서 탈주하다가 요동 방면에서 남쪽으로 빠져 같은 고구려계들이 널리 분포했던 패서 일대로 복귀한 부류가 그것이다.

친신라 반당적 성격의 고구려부흥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나당전쟁에서 당나라에 대항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며 함께 싸웠다. 그리고 신라는 패서고구려부흥운동 유민집단을 남방에 위치한 금마저[110]에 안치하여 신라의 괴뢰국인 보덕국을 설치 하였고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111]을 그 군주로 삼아 '고구려왕'이라는 봉작명을 주어 신라왕의 신하인 제후왕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는 보덕국을 684년에 해체시켜버리고 신라에 완전히 흡수하였다. 이때 안승에게 문무왕의 조카를 베필로 삼게하는 국혼을 하는 한편 김씨사성하여 진골로 편입시켰다. 이는 정통성의 측면에서 볼때 신라가 고구려를 통합하여 삼한일통을 이루었다는 증거가 된다.

중대 신라 왕실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했다는 삼한일통을 그 정통성의 근저로 삼아 강조하였다. 신문왕 대에 당의 사신이 무열왕의 시호 태종당태종과 같다며 바꿀 것을 요구하자, 무열왕이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위업을 달성하였음을 들어 거부한 사건이나, 혜공왕대에 행한 5묘제에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대공을 세운 임금'이라며 태조 격의 불천지주(不遷之主)(영원히 제향을 받드는 임금)로 종묘에 모신 것은 그런 면을 말해준다.

삼한일통 의식은 주요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신라 조정은 전국을 9주로 나누었는데, 소백산맥 이남 지역을 신라 영역으로 설정해 3개 주를 설치하고, 옛 백제 지역에 3개 주, 한강 유역 등을 고구려 남계라고 하여 3개 주를 두었다. 그리고 왕 직속의 중앙 군단인 9서당(九誓幢)을 만들면서 고구려인으로 3개, 백제인으로 2개, 신라인으로 3개, 말갈인으로 1개 서당을 편성하였는데, 이 또한 같은 의식이 배경이 되어 행해진 조처였다.

신라 하대의 금속문을 통해서도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했다는 의식을 확인 할 수 있다.
지난날 우리 태종대왕께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무력과 예로서 삼한을 일통할 때에……
월광사(月光寺) 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112] 中.
과연 여·제(麗濟)를 크게 무찔러서 재앙을 제거하도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113]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114]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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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1.2. 발해
일본에 국서를 보낼때 스스로를 '고려국왕'으로 칭하였고 부여의 풍습을 이었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석실은 독특한 천장형태로 유명하다. 궁륭형이라 불리는 아치형 천장에서 시작하여서 모서리가 있는 절천정형 천장, 집모양을 딴 맞배지붕형 천장, 고임천장, 고임천장 가운데서도 삼각고임, 평행고임이 있으며 고임천정의 형태는 이중, 삼중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고구려가 멸망할 즈음의 고구려 석실들은 대부분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이 이중으로 베풀어진 양상의 천장을 보이고 있다. 발해의 고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삼각고임과 평행고임을 조합한 천장으로 축조하며, 벽화의 재제 또한 고구려 멸망시점의 벽화들과 같은 주제로 그려진다. 구조적으로도 초창기의 발해 고분은 고구려 고분과 거의 같다.

발해가 고구려인들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어있지만 분명 고구려의 별종인 말갈이라고 되어있는 것처럼 발해의 초기 고분문화도 고구려의 고분문화와 거의 같고 사실상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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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1.3. 후고구려와 고려
고구려의 3경[115] 중 하나였던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이 있던 패서 지역은 평양성에 비해 강제 이주가 그렇게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데다가 영주 방면에 있다가 탈주한 유민 집단의 합류로 더욱 고구려색이 짙어지게 되었고, 훗날 신라의 영향권 안에는 들어갔으나 경주에서 워낙 거리가 먼데다 신라가 세력을 뻗치기 전까지의 시간도 길었고 신라 정부 자체도 그렇게까지 중앙 행정력을 강하게 투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신라 치하 옛 백제 지역보다는 자율성을 더 누리게 되었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후일 고려의 건국세력이 태동하게 된다. 고려의 창업자인 왕건의 선조인 강충이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패서를 기반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쌓고 세력을 키웠다. 그래서 신라가 혼란기에 빠져들자 고려를 건국하고, 궁예의 힘을 빌려 옛 통일신라 영토의 절반 이상을 석권하고 이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서 신라위주의 삼한일통에서 고려 위주의 삼한일통을 이루게 된다.

통일신라가 쇠퇴하자 궁예는 나라를 건국하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며 국명을 고려라 하였다.

왕건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폐위시킨후 다시 국호를 고려로 되돌리고 고구려의 수도 였던 평양을 수도로 삼고 서경이라 명명하며 분사제도(分司制度)를 시행하여 평양에 조정을 설치하는 등 고구려 계승의지를 나타냈다.

고려의 건국세력 중에는 예전 고구려 남부영토의 패서 호족이 있었는데 왕건부터가 개경의 호족으로서 패서 호족 중 하나였고 황주[116]의 호족인 황보제공의 집안은 고려 초 신정왕후 황보씨, 천추태후, 헌정왕후 등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정종서경으로 천도를 계획할 당시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고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이유로 댔다.

성종의 아버지인 왕욱은 사후 성종이 즉위하자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묘호는 대종(戴宗), 시호는 고려사절요 기준으로 현헌공신화간예성선경대왕(顯獻恭愼和簡睿聖宣慶大王)인데 고려사 종실 열전에는 끝에 '대왕(大王)'이 '태왕(太王)'으로 되어 있다. '태왕(太王)'은 고구려에서 군주를 호칭할때 자주 사용한 호칭이다.[117]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 :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이니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 하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겠습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서희〉

여요전쟁 시기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면서 북한산 이북이 고구려의 옛땅이라고 했는데 이는 중국등에서 주장하는 식으로 고려가 단지 신라의 계승인 나라가 아닌 패서 지역 세력이 주축이 된 나라로서 고구려의 옛땅에서 그 유민들이 일어난 나라임을 고려인들 스스로도 인식 할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서희는 외교적 담판에서 고려가 고구려를 잇는 나라임을 밝혔다.

서희는 고려가 강동6주를 얻은 후에도 소손녕이 약속한 땅은 압록강 양안이라면서 이제 압록강 이남을 회복했고 강북은 아직이니 압록강 이북을 점유한 후에 거란과 국교를 맺자고 했는데 반려되었다. 이때 서희는 '옛땅을 수복한다.'라고 하여 고구려 계승의식을 드러내었다.

숙종은 죽기 얼마전인 1105년 8월, 고려의 또하나의 수도였던 서경장락궁에 머물르면서 태자였던 예종에게 동명왕릉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여진은 본래 구고려(勾高麗)의 부락(部落)으로, 개마산(盖馬山) 동쪽에 모여 살았다. 세세토록 공물을 바치고 직위를 받으니,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을 깊히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하루만에 우리를 배반했고 무도(無道)해졌으니, 선고(先考)께선 심히 분노하셨다. 늘 듣길 고인(古人)이 말하는 '대효자(大孝者)'란 '뜻을 잘 계승한 자'라고 한다. 짐(朕)이 오늘날 다행스럽게 제사를 끝마쳐 국사(國事)를 돌보게 되었으니, 마땅히 의기(義旗)를 들어 무도함을 벌하고 선군(先君)의 분노를 풀 것이다!
고려사, 열전, 윤관 中
여진은 고구려의 속해있는 한 부락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118]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고려사, 열전, 윤관, 윤관이 임언에게 영주 관청의 벽에 전적을 기록하게 하다. 中

윤관이 여진을 공략한 뒤 성벽에 적은 글귀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이 드러난다.

중국에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전근대 왕조들은 이전 왕조의 사서를 국가의 관찬사서로 집필함으로서 계승의 정통성으로 삼았다. 그래서 고려왕조는 구삼국사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을 고려의 이전왕조로 표방하였다.
논하여 말합니다:
...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中.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당나라에 고구려를 바친 연남생 부자에 대해 중국 입장에서야 공신일수 있겠지만 우리 고려의 입장에서는 중국에 나라를 팔은 매국노라 생각함을 알 수 있는 글로 고려의 고구려에 대한 계승의식을 엿볼수 있고 고구려와 중국과의 관계를 지방정권으로서 하나의 동류로 보지 않고 외국으로 인식한다는것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 시기 최광수서경에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사(平章事) 유익(劉益)과 우승(右丞) 왕카라부카(王哈刺不花)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공민왕 시기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을 본래 자신들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다.

공민왕릉은 석실 벽화묘인데 천장에 별자리가 그려져있다. 그 별자리는 남두육성인데 고구려왕릉의 벽화에도 많이 그려져 있는 별자리로 특히 그 형태가 쌍령총의 남두육성의 형태와 완전히 같다. 무덤양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 그 종족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유적으로 이는 고려가 고구려와 이어지는 국가라는 것을 나타낸다.
12.2.2.1.4. 조선
"사졸(士卒)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軍糧)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
#
제3차 요동정벌 당시에 조선 관료들이 동명왕의 옛 강토 등을 언급하는 것을 볼 때, 고구려 계승의식이 요동 정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9]

예종은 고구려의 여당전쟁을 언급하며 조선이 옛 삼국을 합친 나라인데 어째서 강역이 평안도에 불과했던 고구려 보다 조선의 군사수가 적은지 신하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조선은 신라를 제외한 고구려와 백제는 수도의 위치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며 본류는 신라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 모두의 계승의식이 있기는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정사를 보았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9년 3월 13일
12.2.2.1.5. 대한제국?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099&cid=51384&categoryId=51385
독립신문에서 우리도 빨리 근대화를 성공시켜 요동과 만주를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고구려 계승의식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명.
12.2.2.2. 중국
현대 이전의 중국 국가들도 고려와 조선을 고구려의 후손들로 보았으며, 그들을 강군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 인식했다.
12.2.2.2.1. 당나라
제3차 여요전쟁의 주공이었고 평양성 전투를 통해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멸망시켰으며 통치기관인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영토의 상당부분을 일시적으로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군주였던 보장왕에게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의 벼슬을 내리고 후에는 지방관인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제후왕인 조선왕(朝鮮王)에 책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은 배반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획책하였다가 발각되어 쓰촨으로 유배보냈고 안동도호부나당전쟁의 패전으로 폐지하였으며 점령지는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의 발흥으로 거의 빼앗겼다.
12.2.2.2.2.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의 역사가가 고구려에서 계속 이어진것으로 설명하고 있어, 고려의 역사를 고구려와 뒤섞어 설명하고 있다.
貊賊入貢 無絲髮利而有五害 今請諸書與收買金箔 皆宜勿許.

"맥적이 들어와 조공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 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북송의 소동파가 한 말로 고려를 맥적이라 표현하였는데 은 고구려를 뜻한다.
12.2.2.2.3. 요나라
여요전쟁 당시 1차 침입때 정벌군의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영역에서 일어난 국가라고 하였다. 회담 상대편인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잇는 국가라고 주장하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요나라가 국서에서 문종을 언급할 때 '주몽(朱蒙)의 후사', '일중유자(日中有子)'[120]라고 불렀다.

요나라가 국서에서 숙종을 언급할때 삼한(三韓), 오부(五部)[121]의 주인으로 불렸다
12.2.2.2.4. 원나라
카다안의 침입시에 고려가 쩔쩔매자 원세조는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라 하였다.
12.2.2.2.5. 명나라
최부(崔溥)의 표해록에는 중국의 관인(官人)들이 조선에서 온 최부에게 여수전쟁여당전쟁에서 고구려가 어떻게 중국 국가들에게 그렇게 강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일본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엔 당의 침입을 막아냈을 정도로 강했다며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12.2.2.3. 일본
12.2.2.4. 몽골
12.2.2.4.1. 몽골제국
쿠빌라이 칸은 고려 원종이 자신에게 항복하자 "당태종도 굴복 시키지 못한 고구려의 후손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며 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13. 관련 사료 목록

13.1. 한국

13.2. 일본

13.3. 중국

13.4. 금석문

14. 고구려/문화재

14.1. 금석문

14.2. 유적

15. 연표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 왕사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구려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좀 존재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 하는 요양 고씨. 한국에는 고주몽을 시조,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그것이다.

17. 인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19. 고구려부흥운동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부흥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 고구려/창작물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 기타

  •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가 만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122]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으로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22. 같이보기

2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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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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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무제기(武帝紀)」 2권 「문제기(文帝紀)」 3권 「명제기(明帝紀)」
조조 ,조등, ,왕준, 조비 조예 ,학소, ,진랑, ,맹타,
4권 「삼소제기(三少帝紀)」 5권 「후비전(后妃傳)」
조방 ,장특, · 조모 · 조환 무선황후 · 문소황후 · 문덕황후 · 명도황후 · 명원황후
6권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7권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8권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동탁 ,이각, ,곽사, ,마등, ,한수,
원소 ,저수, ,전풍, ,원담, ,원희, ,원상, · 원술
유표 ,유종, ,부손, ,괴월, ,한숭, ,채모,
여포 ,장막, ,진궁, ,진등, · 장홍 공손찬 ,유우, · 도겸 · 장양 · 공손도 ,공손연,
장연 · 장수 · 장로
9권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10권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하후돈 ,하후무, ,한호, ,사환, · 하후연 ,하후패, · 조인 ,조순, · 조홍 · 조휴 ,조조(肇),
조진 ,조상, ,이승, ,환범, ,하안, · 하후상 ,하후현, ,이풍, ,허윤,
순욱 ,순의, ,예형, · 순유 · 가후
11권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12권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13권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원환 · 장범 ,장승, · 양무 · 국연
전주 · 왕수 · 병원 · 관녕 ,왕렬, ,장천, ,호소,
최염 ,공융, ,허유, ,누규, · 모개 · 서혁
하기 · 형옹 · 포훈 · 사마지
종요 ,종육, · 화흠 · 왕랑 ,왕숙,
14권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15권 「유사마량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16권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정욱 ,정효, · 곽가 · 동소
유엽 ,유도, · 장제 · 유방 ,손자,
유복 ,유정, · 사마랑 · 양습 ,왕사,
장기 ,유초, ,장집, · 온회 ,맹건, · 가규 ,가충,
임준 · 소칙 · 두기(畿) ,두서, ,악상,
정혼 ,정태, · 창자 ,안비, ,영호소,
17권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18권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藏文呂許典二龐閻傳)」
장료 · 악진 · 우금 · 장합 · 서황 ,주령, 이전 · 이통 · 장패 ,손관, · 문빙 · 여건 ,왕상,
허저 · 전위 · 방덕 ·방육 ,조아, · 염온
19권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20권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창 · 조식 ,양수, ,정의, ,정이, · 조웅 조앙 · 조삭 · 조충 ·조거 · 조우 ·조림(林) · 조곤 · 조현 ·조간 ·조표 ·조정 ·조림(霖)
21권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傳)」 22권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23권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왕찬 ,진림, ,완우, ,유정, · 위기 · 유이 · 유소 · 부하 환계 · 진군 ,진태, · 진교 · 서선 · 위진 · 노육 화흡 · 상림 ,시묘, · 양준 ·두습 · 조엄 · 배잠 ,배수,
24권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25권 「신비양부고당륭전(辛毗楊阜高堂隆傳)」 26권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한기 · 최림 ·고유 · 손례 · 왕관 신비 ,신헌영, · 양부 ,왕이, · 고당륭 ,잔잠, 만총 · 전예 · 견초 · 곽회
27권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28권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서막 · 호질 ,호위, · 왕창 · 왕기 왕릉 ,선고, ,영호우, · 관구검 ,문흠, · 제갈탄 ,당자, · 등애 ,주태, · 종회 ,장창포, ,왕필,
29권 「방기전(方技傳)」
화타 · 두기(夔) ,마균, · 주건평 · 주선 · 관로
30권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족 · 선비족 ,가비능, · 부여 ·고구려 · ·읍루 · 예맥 · 동옥저 ·마한 ·진한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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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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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color:#181818"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41권 「후비전(后妃傳)」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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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tablewidth=100%><tablebgcolor=#3c3c3c><-3><width=50%>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3><width=50%>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44권 「사회전(謝晦傳)」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사회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 제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51권 「종실전(宗室傳)」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유도린 · 유도규 · 유존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 · 원담 · 저숙도 · 저담지 장무도 · 자영 · 유등지 · 제병지 · 사방명 · 강이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55권 「장수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장수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57권 「채곽전(蔡廓傳)」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채곽 왕혜 · 사홍미 · 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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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순 · 장창 · 하연 · 강지연 범진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왕경홍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소(劉紹) · 유굉 · 유후인 · 유후우 · 유후업 · 유후천 · 유이부 · 유후약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왕승달 · 안준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77권 「유경원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유경원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후무 · 유후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수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원 · 유자맹 · 유자산 · 유자여 · 유자사(劉子師) · 유자사(劉子嗣)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종월 · 오희 · 황회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 은중감 · 양전기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사장 · 왕경문 은효조 · 유면 소혜개 · 은염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고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93권 「은일전(隱逸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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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근초고왕 본기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약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붉은 깃발이 단순 군 내부에서 구분을 위한 깃발인지 왕실의 상징인지 고구려의 국기인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안악 3호분의 벽화에도 붉은 색이 첨부된 깃발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역시 추측의 영역.
파일:external/pds27.egloos.com/a0053134_56bca6033be9d.jpg
안악 3호분 벽화 중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이 붉은 깃발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사실 고구려에는 '철기군(鐵騎軍)'이라는 정예기병 개마무사로 이루어진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적기(赤旗)가 고구려의 국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애초에 그 시절 국기라는 개념이 있었는지도 불분명하고.
[2] 평양성, 국내성, 한성. 자세한 내용은 영역과 행정구역 문단을 참조.[3] 일반적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기원전 37년에 건국했다고 표현하지만 초기 국가가 아닌 군장 사회로 존재한 고구려라는 지명 및 지역 정치체는 그 전부터 있었을 수도 있다.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여러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건국 연도 항목 참조.[4] 엄밀히 얘기하면 현도군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기원전 75년경 치소인 고구려현을 포함하여 흥경 일대로 이현하였고, 이후 압록강 유역에는 비류, 졸본, 조나, 구다 등의 소국들이 군장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유민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5] 소고구려의 실존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6] 나중에 삼국통일을 달성하는 그 신라가 맞다. 이후 935년 고려에게 항복.[7] 동명성왕 ~ 동명성왕.[8]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기록.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9] 동명성왕 ~ 장수왕.[10] 구려, 고리 등. 초기 고(구)려는 신라처럼 국가명이 공인된 한자 표기가 없었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11] 장수왕 ~ 보장왕.[12] 이 국호는 후 발해, 궁예, 왕건이 이어간다.[13] 한국에서 자생연대 고고학의 1세대인 손보기가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 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가늠되는 유적들이 발견했다.# 장수왕 대에 유연과의 지두우 지역 분할 시도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다만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되지 않았다. 이외에 거란이나 실위, 말갈 등 내몽골, 흑룡강성, 연해주 남부의 종족들에게도 지배력이 미친 게 문헌적으로 확인된다.[14]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으로 기록됨.[15] →환도성→국내성[16] →장안성[17]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18]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엔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여 국내성, 평양성의 순서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유리왕 대에 국내성(위나암성)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 대에 환도성으로 천도하고, 이후 동천왕 대에 조위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장수왕 대의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남평양이 이곳일 가능성이 있다.)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국원왕 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환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오나, 전연의 침입을 받아 평양 동황성(혹은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도읍을 옮겨간다. 이후 다시 소수림왕 대에 국내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긴 후 근 60년을 지내다가 장수왕 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원왕 대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다.[19] 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20] 고구려족, 옥저, 부여 등.[21] 백산말갈, 속말말갈 등.[22] 보통 연개소문의 도교 수입을 현재의 정설로 인정하지만 이전에 자체적인 도교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일신(태양신), 영성신, 가한신, 기자신, 부여신 「유화」, 고등신 「주몽」 등을 섬기며 요동성 추모왕의 사당에 쇄자갑을 비치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23] 일본서기 기록.[24] 소노부 → 계루부[25] 건국 초기에는 소노부의 권력이 막강해 계루부와 서열 다툼이 있었으나, 6대 태조왕 또는 그 이후로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소노부 또는 태조왕 이전 국왕들이 해(解)씨 였다는 주장은 해씨 고구려설 문서 참조.[26] 충분히 검증된 성곽 유적의 분포나 주현이 설치된 본토의 면적을 보자면, 상대적으로 척박하긴 하지만 연해주 전역을 개척했던 발해가 강역은 더 넓었을 확률이 높으며, 흑룡강 이북에서도 발해의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에 더 넓게 책정할 여지도 있는 편이다.[27] 반면 고구려의 경우에는 내몽골, 북만주 일대의 북방민족을 세력화시킨 정황이 발해보다 더 뚜렷하게 남아있는데, 이들에 대한 지배력을 형식적인 간접지배냐 실질적인 뭔가가 있었냐 등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고구려의 판도도 더 넓게 볼 여지는 있다. 다만 지리 문제 등으로 발해와 달리 문헌상의 진출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인 검증이 상당히 애를 먹고 있는 편이다.[28] '高驪', '高句驪'로 쓰기도 한다.[29]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高麗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30] 물론 상대적인 의미이다. 현재 한국의 한자음은 구어 사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중국 한자음과 달리 대체로 당나라 시절의 장안음이 큰 변화 없이 고착된 것으로 본다. 상세한 것은 아래를 참조.[31] 돈황문서 '북방 몇몇 나라의 왕통에 관한 기술'(Pelliot Tibetain 1283)[32] 샤나메[33] 돌궐 궐특근 비문[34] [35] 범어잡명[36] 한자 음차로는 '구구타의설라(俱俱陀醫說羅)', 의미는 '계귀(鷄貴)'. 즉 '쿠쿠테'는 ''이라는 의미이고(닭의 울음소리에 대한 의성어라는 설이 있다.) '스바라'는 '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닭의 깃을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는 해설과 함께 기록된 호칭이다. - <대당서역구법고승전>[37] 흔히 중원고구려비라 불리는 비석.[38] 이러한 추측으로 명칭의 변화를 통해 고구려 유물의 추정 연대를 파악하기도 한다. 한가지 예시를 들자면 중국 요녕성 의현에서 발굴된 불상에는 대고구려라는 명칭이 적혀 있다. 이 불상은 아직 시기나 국적 등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게 없어서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고구려가 세워지기 전이나 망한 후에 대고구려라는 표현을 굳이 쓰지도 않았을 테니 고구려 시기에 쓰인 불상임은 확실해 보이고, 굳이 '대'고구려라고 주변국에서 높여줬을 리도 없으니 고구려에서 만든 불상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좀 더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아마 장수왕 때 고구려에서 고려로 국호를 바꾼 게 사실이라면 국호 변경 이전 시기의 불상일 것이다.[39]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40] 한자 문화권에서 정식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듯이[41] 주변의 말갈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역사를 생각해볼 때 만주어로 '나라'를 뜻하는 '구룬'과 연관이 있다는 설도 있다. 비슷한 예로는 신라의 왕호인 간과 유목민들의 왕호인 칸의 유사성이 있다.[42] 이병도 교수는 고(高)의 한국어 고유 어휘인 '수리'와, 고을을 뜻하는 '골'을 연결시켜 고구려의 고유어 명칭을 '수릿골'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43] 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음.[44] 실제로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식으로 쓰지만.[45] <발해 국호 연구>[46] 구글 검색결과도 서로 비슷한 편이다.[47] 고려사 윤관 열전.[48] 고려사 묘청 열전. 대화궁 팔성당에 모신 신의 명칭에 붙어있다.[49] 태자사낭공대사비. 대각국사문집.[50]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장군문.[51] 다만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국어 표현의 고릿적, 고린내 등의 어원이 高麗라는 설도 있기 때문.[52] 고대 국어 시기 /ㅓ/는 [e\]에 가깝게 발음되었다고 본다.[53] 정장상팡(郑张尚芳)은 /lje̞/, 베른하르드 칼그렌(Bernhard Karlgren) 등은 /lje/, 판우윈(潘悟云)과 사오룽펀(邵榮芬)은 /ljɛ/로 추정했다.[54] 전한시대의 서적인 '논형'.[55] 연노(涓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56] 고구려전 항목[57] 도사(道使)라고도 한다.[58] <<한원>> 번이부 고려조옹씨괘의 <<고려기>> 출처. 이 14관등은 고구려 후기의 완성된 모습일 것이다.[59] 토졸(吐捽)이라고도 한다.[60] 막하하라지(莫何何羅支)라고도 한다.[61] 주부(主簿)라고도 한다.[62] 대부사자(大夫使者)라고도한다.[63] 중리조의두대형(中裏皂衣頭大兄)이라고도 한다.[64] 대사(大奢)라고도 한다.[65] 힐지(纈支)라고도 한다.[66] 유사(儒奢)라고도 한다.[67] 계달사자자(契達奢使者), 을기(乙耆)라고도 한다.[68] 실지(失支)라고도 한다.[69] 예속(翳屬), 이소(伊紹), 하소환(河紹還)이라고도 한다.[70] 실원(失元), 서인(庶人)이라고도 한다.[71] 전문 취사집단의 경우 고구려 초기 대무신왕이 부여 정벌 때 '거대한 솥을 발견하여 밥을 지을 수 있었다'는 대목을 해석한 것이다.[72] 남제의 연호, 서기 489년, 장수왕 77년[73] 풀어쓰자면 남제가 '뭐? 북위면 모를까 고구려와 맞먹으라고?'라고 따지자 북위가 '이정도도 많이 대접해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어…'라고 면박을 주는 상황이다.[74]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75] 생몰년 499~515. 북위의 8대 황제로 북위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76] 마노 혹은 옥[77] 탐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78] 얼핏 보면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는 고구려를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타이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말갈과 백제를 포함한 중국 동쪽의 세계를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인식도 은근히 드러나는 은유이기도 하다. 관념적으로는 천하에 중화질서 하나로만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79] 645년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침공 당시 고구려에서 이에 맞서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한 모습이다.[80] 북위는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대륙 서쪽의 농우 지역의 기병을 동원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당나라의 경우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다가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81] 그리고 강대국이 된 후기에도 이러한 시절의 전통에 따라 평시의 평지성과 전시의 산성의 이중적인 수도 체계를 유지하였고 강력한 수성 능력과 방어 체제를 운영하였다.[82] 고구려 초기에는 2~3만 병력에 나라가 휘청였지만 이정도는 말기에는 외지에 여유롭게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이며 상기된 것처럼 수십만 단위의 대군을 야전에 동원할 정도에 이른다.[83] 당시 당서를 비롯한 중국 정사 외국 열전에서 방귀 좀 뀐다 싶은 수준을 묘사할 때 붙이는 숫자가 겨우 10만호다. 실제적인 체급일 리는 없겠지만 10만호라는 숫자가 어느정도 대세력을 수식하기에 충분한 수치로 인식되었음은 분명해보인다.[84] 고구려와 고려를 착각했거나, 고려의 항복이 기뻐서 립 서비스를 더해준 것으로 보인다.[85] 19세기에 이르러서 완전히 복속되었으며, 이후에도 일부는 불모지로 남아있다가 그 개척은 20세기 초에야 끝났다.[86] 말갈의 비정에 심각한 오류가 하나 있다. 흑수말갈이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위치한다는 사료들의 기록들과는 상반되게 중국과 한국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안거골부를 흑수말갈의 서남쪽에 비정한다.[87] 단, 이때 요의 태도가 상당히 애매하여 직접적으로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고려가 자신이 적통이라고 하자 별 다른 항의없이 순순히 인정해준다.[88] 일본명은 고마노코키시 잣코([ruby(高麗王,ruby=こまのこきし)][ruby(若光,ruby=じゃっこう)]).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89] 아이러니하게도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고구려와 고려의 수도는 북한령이라는 점이다.[90] 다만 충청북도는 약간 미묘하다. 백제령이었던 기간도 꽤 길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지배도 받아본 경험이 있고 실제로 충주에는 고구려비와 신라 중앙탑이 위치하고 단양에도 신라 적성비가 존재한다. 그외에도 성왕 이후 충북 지역은 신라의 입김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에 충남과 충북의 백제에 대한 정서적 차이는 고려할 필요가 있다.[91] 통일 이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가 계승의식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92] 물론 이것도 주관적인 시선이 강하다고 봐야 된다. 당장 한국사 최고의 명군 중 한명으로 취급받는 세종만 해도 조선시대 왕이다.[93] 다만 고려는 현종 이후 100여년의 전성기를 지나 고려시대 중후기 무신정권권문세족 등 당시 막장 지배층들의 폭정과 전횡으로 인한 왕조 멸망, 국가 막장 테크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런 식이면 백제나 가야는 진짜 묻혀서 가는, 특히 가야는 진짜 기록도 드물어서 평할 거리도 부족하다는게 더 정확하겠지만.. 부여는 가야보다 더 기록이 없는데다, 남북한 모두 부여 영토와 겹치지 않아서 고고학 자료조차 중국에 의존해야한다.[94] 특히 2천년대만 해도 치우 드립은 그야말로 단골 소재였다. 자세한 것은 치우 문서를 참조.[95] 때에 따라서는 발해도 넣는다. 다만 발해는 역사도 짧고 중심지도 북한이 아니라 고조선, 고구려, 고려만큼 언급되지는 않는다.[96] 고조선 역시 수도는 평양이지만 워낙 역사 기록이 없는지라...[97] 실제로 북한의 조선력사 등의 역사 서적을 보면 고구려를 치켜세우며 남한 세력인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 중심의 민족 통일을 반대한다는 해괴한 논리로 폄하하는 경향이 짙다. 그나마 백제는 나당연합에 같이 멸망한지라 말기에는 동병상련 취급은 해주지만 신라는 그런 것도 없고 아예 민족을 팔아먹은 봉건통치배라며 노골적인 비난적 서술을 서슴지 않는다.[98] 단순히 패권뿐만이 아니라 내부 소수민족의 독립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은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며, 티베트나 회족, 조선족 등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소수민족들은 아직까지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한 채 중화로의 완전 편입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다 보면 중국은 소수민족과 한족간의 갈등 문제를 계속해서 겪게 된다. 그래서 중국 정부에서 생각해낸 것이 현재 중국 영토에 해당하는 땅의 역사를 모조리 중국의 역사라고 왜곡을 한 후 '그러니까 지금 중국인들은 모두 같은 중화민족' 이라고 무마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북공정 뿐만 아니라 티베트, 내몽골의 역사까지도 중국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중화민족이란 거창한 말도 결국 한족이나 소수민족 그 이상을 바라보고 민족 통합의 일환으로 나온 개념인 것.[99] 현지 답사를 갔다가 출입을 금지당하거나 방해를 받았다는 경험담이 많다.[100]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닌 과거 중국 동북구에 존재했던 지방세력으로 등재되었다.[101] 여몽 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의 무쿠리 고쿠리 괴담만 봐도 몽골, 고구려를 뜻하는 말이었다.[102] 만주족은 자신들의 원류에 부여,백제,발해,신라(...)를 끼워놓으면서 연구하긴 했지만 고구려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103] 일례로 고구려가 안시성 전투에서 당 태종과 휘하 군대를 패퇴시킨 사실로 인해 쿠빌라이 칸이 자신에게 입조해 온 태자를 보며 '예전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 스스로 항복을 청해왔다'며 좋아했고 조선의 여러 문인들 역시 이 공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등 고려와 조선은 당 태종을 물리친 강국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104] 이두는 한문을 우리말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중간 삽입한 글자체계를 뜻한다.[105] 단 후기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뀐다. 백제와 신라도 후대에는 중국식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화한다.[106] 평양성, 국내성, 한성[107] 다만 연정토는 이후 당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지 않았다. 이후의 기록은 없다.[108] 황해도 평산군[109] 황해도 재령군[110] 오늘날의 전북 익산[111] 연정토의 아들이거나 보장왕의 외손이라는 기록도 있다.[112] 890년 세워짐[113] 고구려가 후기신라보다 훨씬 컸지만 작았다고 하는 최치원의 신라인다운 아전인수식 해석.[114] 924년 최치원(崔致遠)에 의해 세워짐[115] 평양성, 국내성, 한성[116] 현 황해북도 황주군으로 평양 바로 옆이다.[117] 물론 그냥 단순히 태상왕의 의미로 붙였을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고려는 신성제왕 같은 호칭은 많이 사용한것 같으나 태왕은 이 경우 말고는 없는데 추존왕에 붙였으니 상왕의 의미가 클것이다.[118] 예종을 뜻한다.[119] 요동에 대한 주권의식은 고려 때도 존재했다.[120] 역시 주몽의 후손을 뜻함[121] 오부는 옛 고구려의 비류부, 환나부, 관나부, 연나부, 계루부를 의미한다.[122]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이다.[123] 칭호는 주관적인 평가의 영역이긴 하다.[124] 다만 생각해보면 다른 왕조도 다들 한번씩은 겪던 일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