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의 건국 국가에 대한 내용은 태봉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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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고구려 | 高句麗 고려 | 高麗 Goguryeo (Koguryŏ) Goryeo (Koryŏ) | |||
군기[1] | |||
기원전 37년[2] ~ 서기 668년 12월 3일[3] (705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고조선 | 현도군[4] 고구려현 | 당 안동도호부[5] | 발해[6] |
부여 | 소고구려[7] 고구려부흥운동[8] | ||
예맥계 소국들[9] | 통일신라[10] 패서 호족 • 보덕국 | ||
국호 | 졸본부여[11] → 고구려[12] → 고려[13] | ||
위치 | 한반도 중 · 북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프리모리예 지방 일대[14] | ||
역사 | |||
수도 | 졸본성[17] → 국내성[18] → 평양성[19] | ||
삼경 | 국내성[20] · 평양성 · 한성[21] | ||
종족 | 예맥[22]·말갈[23]·한(韓)·한족 등[24] | ||
언어 |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 ||
문자 | 한자, 구결 | ||
종교 | 토속 종교[25], 불교[26] | ||
정치 체제 | 제가귀족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태왕(太王) | ||
주요 군주 | |||
국성 | 고(高)[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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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는 삼국시대 예맥을 지배층으로 한 고대 다민족 국가이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점유했다. 만주를 지배했던 고대 국가라는 점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의 또 다른 왕조인 발해와도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28] 704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존속한 장수 왕조다.[29]
2. 상징
2.1. 국호
<colbgcolor=#000><colcolor=white> 언어 | 명칭 및 해설 |
한국어 | 고구려(高句麗, Koguryŏ, Goguryeo) / 고려(高麗, Koryŏ, Goryeo) 광개토대왕[30] 또는 장수왕 때부터 '고려'라고 고정하여 불렀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고 부른다. |
중국어 | 가오거우리(高句丽, Gāogōulí) / 가오리(高丽, Gāolí)[31] 현대 관화 기준이다. '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丽'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거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32] 고구려의 경우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kˤaw kˤo rˤe",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kɑu kəu liᴇ"로 발음했다. 고려의 경우 상고한어로는 "kˤaw rˤe", 중고한어로는 "kɑu liᴇ"로 발음했다. |
일본어 | 코쿠리([ruby(高, ruby=こう)][ruby(句, ruby=く)][ruby(麗, ruby=り)], Kōkuri) / 코라이([ruby(高, ruby=こう)][ruby(麗, ruby=らい)], Kōrai) / 코마([ruby(高, ruby=こ)][ruby(麗, ruby=ま)], Koma)[33] 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 등으로 써 놓고 '코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
고대 티베트어 | 케우리(Ke'u-li)[34] |
고대 튀르크어 | 뵈퀼리(𐰋𐰇𐰚𐰠𐰃, Böküli)[35] 고대 튀르크어는 어두에 /m/ 등의 비음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다른 음가로 변화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아래의 산스크리트어 명칭과 비교하면 원래 형태는 뫼퀼리(Möküli)였을 것이다. |
중세 그리스어 | 무크리(Moúkri)[36] |
산스크리트어 | 무쿠리(Mukuri)[37] /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38] |
'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 중 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驪縣)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상이하므로, '고구려'는 일대의 토착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마을 또는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 지명으로 추정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본래 오녀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압록강 지안시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흥경(신빈만주족자치구 일대)으로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푸순현 일대)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이들도 '고구려'라는 지명사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 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고구려(高駒驪), 구려(句麗), 구려(駒驪), 고리(高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주로 고구려(高句麗)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전성기를 맞이한 장수왕 재위기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정책들이 추진됐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보다는 고려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39]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한서》 〈지리지〉에서는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현과 함께 상은태(上殷台)현과 서개마(西蓋馬)현이 소개되는데, 이 둘은 전부 방위어인 상(上)과 서(西)로 시작하므로 고구려 역시 본래 방위어 고(高)와 토착 지명 구려(句麗)의 합성어였을 것으로 보인다.[40] 이렇게 본다면 국호가 '고려'로 변경된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국명의 본래 형태와 유사하게 돌아온 셈으로 볼 수 있다.
이 '구려(句麗)'의 정확한 어원은 불명이나, 가장 유력한 설은 《삼국지》 〈동이전〉에 소개된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고유어 '구루(溝漊)' 및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에서 역시 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 '홀(忽)'과 연관짓는 것이다.[41]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대조영이 세운 나라를 발해, 궁예가 세운 나라를 후고구려[42], 그리고 왕건이 세운 나라인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는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언급한 네 국가 모두 궁예가 기분 내킬 때마다 바꾼 태봉을 제외하면 다 고려가 정식 국호였다. 자세한 건 후고구려, 발해, 태봉, 고려 문서로.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왔던 탓에, 5대 10국 시대와 북송을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의 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등으로 부른다.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2000년 이전 남한의 로마자 표기법과 거의 유사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및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ŏ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2000년 이전 남한에서 생산된 문헌에다가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43]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ŏ로 표기했다.
왕씨 고려 때는 구고려(句高麗)[44], 구려(駒驪)[45]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후고려(後高麗)[46]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우리 고려[我高麗]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47]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의 태봉을 멸망시키고 세웠으며 고구려를 계승했다는걸 표방하기 위해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사실 발해라는 국호는 당과의 협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합의된 대외용 국호였고, 어디까지나 공식 국호는 고려였으나 워낙 발해라는 국호 사용 빈도가 평소에도 높다보니 발해인들 스스로도, 적어도 요나라 시대 후기, 금나라 때부터는 본인들이 발해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48]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이외에도 고구려 유민 고모의 묘지명(高牟墓誌銘)에 따르면 별칭으로 동해지동(東海之東, 동해의 동쪽), 한향(韓鄕)이라 부르기도 했고 삼한=삼국으로 여겨지면서[49] 그 중 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겨 그냥 마한이라 불리기도 했다.[50] 근데 보통 고구려는 마한과 동치되긴 했지만 이게 좀 어지러워서 진한이나[51] 변한[52]으로 불리기도 했다.
2.1.1. 발음
학계 일각에서는 고구려 당대의 국호 발음이 '고구리' 또는 '고리'였을 가능성을 주장한다. 호삼성은 《자치통감》을 주해하며 37권의 고구려 관련 기사에서 수말당초 학자 육덕명을 인용하여 "려(驪)는 력(力)과 지(支)의 반절로 발음한다[力支翻]"[53]라고 기록했다. 또 《책부원귀(冊府元龜)》에도 "려는 려(驪)라고도 쓰고 리로 발음한다[亦作驪 音離]"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즉 중국 당·송 시대에는 통상 麗를 거성으로 발음하여 '려'로 읽었지만, 고구려의 국호에서 麗를 읽을 때는 통상적인 발음과 달리 평성으로 '리'라고 읽어야 했기 때문에 음가 주석을 붙인 것이다.이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여말선초 사람들이 직접 저술한 일부 문헌에서도 고구려의 麗는 '리'로 발음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1445)》 제6장에 '麗運이 衰ᄒᆞ거든(고려의 운이 쇠하거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려(麗)는 리(离)로 발음하고 고려를 말한다[麗音离, 高麗也]"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한마디로 '고려'로 읽지 말고 '고리'로 읽으라는 소리다. 조선 후기의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도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었다.
이 연구[54]에 따르면 고구려가 다른 문헌에서 '고리(高離)'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나, 한국을 제외한 타국에서 부르는 '코리아(Korea)'라는 이름, 돌궐에서 뵈퀼리,[55] 인도에서 무쿠리, 중국에서 가오거우리(가오리), 일본에서 코우리 등으로 불렀던 것을 참고하여 '본디 발음이 고리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추정할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글인 《대동지지》에서도 "한나라 현도군에 속한 현에 고구리(高句麗 — 麗[려]자는 离[리]로 읽는다)가 있는데..."라는 대목이 있어 '고구리'라는 음가가 옳다는 인식이 지속되었음을 나타낸다. 《증보문헌비고》에서도 '리'로 읽으라고 주석하고 있다. 즉 조선 전기에 麗 자의 발음이 일반적으로는 려로 읽히는 음가가 제시되었으나, 국명으로서는 리라는 음가가 옳다는 인식이 학자들 내에서는 계속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 간행된 자전을 보면 麗자에 '나라 이름 리'라는 훈음이 계속 병기된다.
그러나 麗를 '리'로 발음하라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현대 한국 한자음 기준으로 성립할 뿐, 당·송 시대에 쓰인 중고한어 기준으로는 오히려 '례(*lje)'에 가까운 발음으로 재구되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면 오류가 있는 주장이다. 언어학자 윌리엄 백스터의 재구 체계에 따르면 육덕명이 평성 麗의 독음으로 제시한 '력(力)과 지(支)의 반절'에서 운모에 해당하는 支 자는 *tsye, 《책부원귀》에서 麗의 독음으로 제시한 離 자는 *lje 정도로 읽혔다. # 도리어 麗의 일반적인 독음인 '려'는 중고한어 당시에 '레이(*lej)'로 발음되었다.
아울러 《삼강행실도언해(1481)》, 《번역노걸대(1517)》,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 《박통사언해(1677)》, 《오륜행실도(1797)》 등 조선시대에 간행된 다수의 한글 서적에는 고구려와 고려의 발음이 한글로 '고구려', '고려'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이미 '고구려'를 현재와 같이 발음하였음을 알 수 있다.
容齋以爲高麗之麗字本平聲, 而作側字用之, 誤也.
용재(容齋)가 고려의 '麗'자는 본래 평성인데 측자로 만들어 (한시에) 사용한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하였다.
湖陰曰, 初以山高水麗爲國號, 此何害? 華人精於聲律, 豈容有誤. 容齋嘿然.
호음(湖陰)이 말하였다. "처음 고려가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따와 국호를 삼았으니, 이것이 해가 될 것이 있겠는가. 화인(華人)은 성률에 정통하니,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이에 용재는 말이 없었다.
대동야승 패관잡기 권4, 용재총화 中 (1525)
이에 따르면 호음 정사룡(1491~1570)은 고려의 발음을 [고려]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麗는 곱다는 뜻으로서 거성으로 읽어야 하며, [려]로 발음된다. 물론 산고수려 기원설 자체는 많은 비판을 받은 주장이기는 하지만(비판을 받음에도 억지로 인용한 저의를 보라), 그 진위와는 별개로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민간어원에 이끌려 고려의 麗가 [려]로 발음되었던 것이다. 이는 다음 기록들에서도 확인된다.용재(容齋)가 고려의 '麗'자는 본래 평성인데 측자로 만들어 (한시에) 사용한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하였다.
湖陰曰, 初以山高水麗爲國號, 此何害? 華人精於聲律, 豈容有誤. 容齋嘿然.
호음(湖陰)이 말하였다. "처음 고려가 산고수려(山高水麗)에서 따와 국호를 삼았으니, 이것이 해가 될 것이 있겠는가. 화인(華人)은 성률에 정통하니, 어찌 잘못이 있겠는가." 이에 용재는 말이 없었다.
대동야승 패관잡기 권4, 용재총화 中 (1525)
心溪甞謂惠風曰, 高麗之麗, 中原人雖以離讀, 本國則以厲讀, 則爲詩不從平聲, 未爲不可. 余亦以心溪言爲是.
심계(心溪)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풍속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고려(高麗)의 麗 자를 중국 사람들은 비록 리(離)라는 음으로 읽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려(厲)라는 음으로 읽으니,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평성을 따르지 않아도 안 될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나도 심계의 말을 옳게 여긴다.
《청장관전서》 제33, 청비록 2 려(麗) 中 (1795)
심계(心溪)가 일찍이 (우리나라의) 풍속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고려(高麗)의 麗 자를 중국 사람들은 비록 리(離)라는 음으로 읽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려(厲)라는 음으로 읽으니, 시를 짓는 데 있어서는 평성을 따르지 않아도 안 될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 나도 심계의 말을 옳게 여긴다.
《청장관전서》 제33, 청비록 2 려(麗) 中 (1795)
內史侍郞徐熙語契丹蕭遜寧曰, 我國卽高句麗之舊地故號高麗. 按麗音離, 而東史寶鑑作麗音呂, 是未詳何義也. 今華人猶呼音離, 而韻學等書皆從之, 東人變呼音呂.
내사시랑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기에 고려라 이름하였다." 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麗의 음은 리(離)이다. 그러나 동사보감은 麗의 음을 려(呂)라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인은 리(離)라고 부르고 음운학 책은 모두 그것을 따르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려(呂)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대동지지》 방여총지(方輿總志) 권4 中 (1861~1866)
정리하자면 고구려 당대에는 국호를 현대 한국 한자음의 '고구리'에 대응되는 형태로 발음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후대에는 평성 麗의 기존 독음이 '려'와 유사하다는 사실과 산고수려 기원설 등의 영향으로 국호 발음이 '고구려'로 정착하여 현재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내사시랑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기에 고려라 이름하였다." 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麗의 음은 리(離)이다. 그러나 동사보감은 麗의 음을 려(呂)라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오늘날 중국인은 리(離)라고 부르고 음운학 책은 모두 그것을 따르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려(呂)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대동지지》 방여총지(方輿總志) 권4 中 (1861~1866)
한편 일각의 내용을 근거로 '고구리'만이 정당한 발음이라 단정짓고, 나아가 현대에 통용되는 표기까지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적절한 담론이다. 애시당초 고구려 당시의 한자음 대다수가 현대의 것과 완전히 같지 않아 본래 음가를 현대 국, 한문으로 정확하게 전사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언어학계에서 재구한 당대 발음은 오히려 '고구려'에 가까울 뿐더러 '고구려'와 '고려'라는 발음 역시 상술한 바와 같이 상당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고구리', '고리' 등으로 표기를 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가운데에는 환단고기 추종자(환빠)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자들이 섞여 있는데, 이들이 오늘날에 와서 교과서 등지의 표기 정정을 주장하고 예찬하는 이유는 역사 용어를 주류 사학계에서 쓰이던 명칭에서 분리함으로써 고구려사 전체를 자신들의 이론대로 재인식하게끔 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 동시에 '고구려', '고려' 등을 '외세의 영향을 받은 근본없는 독음' 취급하려는 국수주의 사관의 영향도 들어 있다.[56] 환빠의 경우 역사학계의 연구부정행위와 밀접하게 닿아 있어, 단순한 사료 외 주석이나 해설에서도 이러한 명칭을 의도적으로 유지하는 서적이 있다면 저자와 인용출처 등 확인에 주의가 필요하다.
2.2. 군기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제24 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 원년 11월 첫번째기사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제24 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 원년 11월 첫번째기사
고구려군은 스스로를 상징하는 깃발로 붉은 기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고구려의 계루부 내지 중앙군만 붉은 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시기가 뒤로 움직이며 고구려군의 깃발은 붉은 깃발로 통일되어 갔다.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만 근대적인 국기(國旗)의 개념이 없었던 만큼 국가의 상징은 아니었을 것이다.
2.3. 옥새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宿, 夜聞金聲. 向明使人尋之, 得金壐·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동틀 무렵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니, 금새[金壐]와 병장기 등을 얻었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고 절한 다음 받았다.
삼국사기 권제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4년 12월 첫번째기사
동틀 무렵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니, 금새[金壐]와 병장기 등을 얻었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고 절한 다음 받았다.
삼국사기 권제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4년 12월 첫번째기사
고구려는 금새(金璽)를 하늘에서 받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양 세계에서 새(璽)라는 단어는 원래 오직 황제의 옥새에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제후는 인(印)을 사용해야 했다. 물론 제후의 의미가 비중화 주변국으로 확장된 뒤로는 그런 거 없고 개나소나 (대중외교 문서를 제외한) 모든 문서에 옥새를 쾅쾅 찍어대긴 했다. 심지어 류큐(...)조차 금인은 구석에 처박아두고 옥새를 마구 휘둘러 썼으니 별 의미 없는 규정.
그런데 고구려의 금새가 여타 제후국의 옥새와 차별화되어 중요한 것은, 고구려는 중원왕조에게 도장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제후국들은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만 중국이 준 도장을 찍고 자기들의 문서엔 자기들의 옥새를 찍었다면, 고구려는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도 자신들의 금새를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의 고구려와 중국 왕조들의 관계를 본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고구려의 금새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아서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3. 역사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역사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사회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사회 문서 참고하십시오.5. 문화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문화 문서 참고하십시오.6. 정치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정치 문서 참고하십시오.7. 경제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경제 문서 참고하십시오.8. 군사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군 문서 참고하십시오.한민족계 국가 중에서는 통일 중국과 총력전을 벌여 승리한 유일한 국가이다.[57] 심지어 수나라는 그 패배가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어 고구려의 기억은 이후 천 여년이나 동아시아 문명에서 한국의 국력을 고평가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58][59]
9.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영명 7년[60]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 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61]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 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61]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62]에 세종[63]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64]는 섭라[65]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66]
《위서》 〈열전〉 고구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64]는 섭라[65]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66]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67]
《전당문》
《전당문》
초기의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다. 졸본의 성읍 국가였으며, 4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의 유력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를 거치면서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과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한편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다. 북으로는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말갈 세력 대부분과 요서, 내몽골 일대의 거란 세력 일부를 복속시켜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요동을 차지한 후에는 중국 왕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할 만큼 위상이 높았고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방의 지역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70여 년 가량 막아내면서 국력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68], 진흥왕 이후 급성장해 백제를 밀어내고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함과 동시에 군사 면에서도 신라 방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좌절로 인해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의 분열이 겹치면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크게 발생했으며 결국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 생산력
- 군사력
- 국제적 위상
이렇듯 고구려는 당시 동아시아의 기준에서, 국지적인 패권을 넘어 동아시아적인 영향력을 끼칠 힘이 있던 나라였다. 고구려의 영향력은 동쪽으로 몽골 사막, 연개소문 시대에는 북경 유역에 이르렀고, 남쪽으로는 신라, 백제, 가야, 왜까지 공포에 떨게 했으며, 북쪽으로는 훗날 유목제국으로 발전해 중국사의 절반을 차지해 버리는 거란, 실위, 말갈 등을 자기 뜻대로 통제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멸망하는 전례를 똑똑히 봤음에도 당나라가 건국 직후 고구려를 공격하는 데에 국력을 쏟아부은 것은, 여론이나 역사적 교훈의 중요성보다 고구려의 영향력에 의한 위험성이 더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이나 고려 등 이후 왕조들이 북방 유목민족들에게서 강역을 사수하는 데에 전념해야 했던 것과 달리, 고구려는 그들을 직접적으로 복속하고 통제했으며 심지어 전쟁에서 자기 군대로 동원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77] 그 수준의 차이는 가볍지 않다. 이후의 왕조 가운데 군사적으로 가장 고평가받는 고려조차도 거란을 상대로 고전하는가 하면, 고구려에게는 영토의 오차범위 수준에 불과한 함경도에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하고도 끝내 정복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은 초기 강군을 거느렸던 시기에는 함경도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결국 이후 고구려의 속국이던 말갈의 후예인 여진족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역시 전 세계적으로 보면 대단한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등하게 겨루기는커녕 최빈국으로 추락한 북한 하나를 뜻대로 통제하지 못한다.[78]중원 왕조와 대등하게 겨룰 정도의 패권을 잡았던 고구려의 저력은 세계적 기준으로도 엄청났던 것이다.
만주를 기원으로 제국을 세워 중국을 위협한 민족이 대부분 유목제국이었던 데 반해 고구려는 유목제국이 아니었고 훗날 유목제국을 세우게 되는 만주의 유목민들을 통제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이질성이 두드러진다. 이는 고구려의 선대였던 고조선, 부여에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는데 만주 일대에서 중원의 경계를 살 정도로 세력을 떨친 비유목민 세력은 주로 예맥계였다. 고조선도 전성기에 요녕성을 중심으로 중원의 경계를 사 전한에게 멸망당했으며 전한은 고조선을 "흉노의 왼팔"이라 부르는 등 북방 유목민과 합세해 중원 왕조를 견제하는 선례를 보여주었고 동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한 부여는 사서에서 중원 왕조가 각별히 신경 쓸 정도의 국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가 강성해질 때까지 만주 일대에서 유목제국이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부여도 상당한 수준의 유목민 통제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요동과 만주의 예맥계가 유목민들에게 흡수된 중세시대 예맥계를 대신해 만주의 패자로 떠오른 유목제국(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은 차라리 예맥계가 나았다 싶을 정도로 중원 왕조에 예맥계보다 더한 악몽을 선사했다. 중원 왕조의 입장에서 예맥계는 동방의 성가신 적이었지만, 동시에 유목민 노이로제로부터 중원을 보호하는 브레이크이기도 했던 셈.
10. 지리
10.1. 영역과 행정구역
전성기 고구려의 강역을 나타내는 검정 역사 교과서의 지도들. 천재교육 역사 교과서의 고구려 영토 지도(좌), 비상 역사 교과서의 고구려 영토 지도(우). |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눴다.[79]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부족집단이었던 5부(계루부, 연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가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을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쪽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했고,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000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 본기〉 제5(미천왕)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000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 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太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태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20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太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태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 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광개토대왕)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태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20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太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태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 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太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태왕이 친히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장수왕)
(재위 63년) 9월, 태왕이 친히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쪽으로는 북부여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고 일대의 말갈 및 실위를,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의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왜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충주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구당서》
《구당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후한 때에 사방 2,000여 리였다. 위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000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000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후한 때에 사방 2,000여 리였다. 위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000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000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고구려의 주요 도성. |
고구려는 전성기 이래로 서쪽 국경선은 요하~송화강 선을 국경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거란, 말갈, 실위, 지두우 등을 복속시키거나 군사적인 영향권 안에 두고 중원 세력과 요서의 지배권을 다투면서 동몽골, 북만주, 요서 등지의 진출을 단행하였다. 또한 남쪽 국경선은 임진강 및 남한강 줄기를 따라 백제, 신라와 대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강 유역, 삼각형 모양의 자연절벽 위에 자리한 고구려 서남쪽 국경요새들(영상) 그러나 사료의 부족으로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고,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구체적인 비정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 역사 교과서(이인철)의 고구려 지도 말갈 영역 상당 부분을 고구려 영토에 포함시킨 지도이다.[80] |
고구려의 강역은 성곽을 깔아놓고 조밀하게 통치하는 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거점을 두고 통치하는 구역, 세력들의 복속을 통한 간접지배를 통해 통치되는 구역도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상이한 강역 비정이 나오곤 하는데 이 지도는 후기 부여, 말갈이 위치한 연해주와 동북만주 일대에만 신경을 썼지만 흥안령, 동몽골, 요서 등 다른 지역에도 비슷하게 견해 차이로 강역 비정이 달라지곤 한다.
고구려의 천리장성 위치만 보더라도 요하강이 있는 곳에 쌓았다는 점. 송화강쪽에는 장성을 쌓지 않았다. 요하강과 송화강 사이에 강이 없는데 결정적으로 거란이 이쪽으로 우회해 쳐들어와 발해가 함락되었다. 4군 6진의 압록강과 두만강처럼 방어하기는 좋지만 국경이 넓어져 여러 문제가 생긴다. 이를 다 해결한다고 해도 후에 만주족(후금)이 청나라까지 세우게 되어 요동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대 지도부들도 어쩔 수 없이 이를 포기하고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서 한반도만 지키기로 결정했었다는 것. 진시황때 부터 쌓은 만리장성 조차도 북방유목민족이 넘어와 매번 침략을 당했으니.
차지했던 남만주 지역은 산지 비율이 많다. 그렇기에 사람이 살기 어렵다. 북만주나 요동쪽이 평야 비율이 많다.#
북한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 나타난 고구려 강역. 왼쪽은 1960년대, 오른쪽은 비교적 최근의 것이다. |
한편, 북한의 경우 당국의 정책에 따라 역사관이 변화하였다. 서울특별시를 아직 명목상의 수도로 정하고 있던 1960년대의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그렇듯 유물론적 역사관을 채용하여 고대 노예제 국가에 불과한 고구려를 크게 평가하지 않았고, 영토 비정에서도 사료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사항외의 추측은 자제하는 것이 관찰된다. 그러나 김일성이 1인 독재 체제를 완전히 굳히고 휴전이 장기화된 70년대 이후 북한에서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역사적,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제고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한 예로 단군 신화가 미신에 불과하다고 여기던 것에서 단군릉을 피라미드 형태로 개축하고 실존 인물임을 인정한 점 등이 있다. 최근의 역사 교과서에서 북한은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 동부, 북-흑룡강 남쪽 류역, 동북-우쑤리강 류역을 넘어 흑룡강 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 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고 서술하며, 말갈, 거란, 실위 등 북방 민족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통합시켜 매우 방대한 영토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 #
아래 표는 《삼국사기》 권37, 지리지#에서 확인가능한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시대의 성이다.
명칭 | 명칭 | 비고 |
[ruby(助利, ruby=조리)][ruby(非西, ruby=비서)] | [ruby(北, ruby=북)][ruby(扶餘, ruby=부여)][ruby(城, ruby=성)] | 끝까지 항복 안 한 11성 중 한 곳 안동도호부 북부여성주(北扶餘城州)? |
[ruby(蕪子, ruby=무자)][ruby(忽, ruby=홀)] | [ruby(節, ruby=절)][ruby(城, ruby=성)] | 끝까지 항복 안 한 11성 중 한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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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암성 | 안동도호부 창암주 | |
목저성 | 안동도호부 목저주 | |
수구성 | ||
남소성 | 안동도호부 남소주 | |
감물이홀 | 감물주성 | 안동도호부 가물주도독부 |
능전곡성 | ||
거시압 | 심악성 | |
불내 | 國국內내城성/위나암성 | 안동도호부 국내주(國內州) |
초리파리홀 | 설부루성 | |
골시압 | 후악성 | |
자목성 | ||
내물홀 | 연성 | |
면악성 | ||
개서압홀 | 아악성 | |
감미홀 | 취악성 | |
적리홀 | 적리성 | 안동도호부 적리주 |
소시홀 | 목은성 | |
가시달홀 | 이산성 | |
甲갑忽홀 | 穴혈城성 | 뚫은 3성 중 1곳 |
折忽절홀 | 銀은城성 | 뚫은 3성 중 1곳 |
소시홀 | 사성 | 뚫은 3성 중 1곳 |
안동도호부는 9도독부+42개 주=51개 주[81]로 구성되어 있지만 32개만 확인되는데, 압록강 이북으로 서술을 한정한 영향으로 보인다. 나머지 19개 주는 확실하지 않지만 압록강 이남 한사군의 현을 그대로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82]. 또한 발해의 행정구역으로도 족보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1. 외교
고구려의 대외관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옥저 | 동예 | 백제 | 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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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멸망과 유민
중원 왕조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간 총력전부터 시작해서 이남의 신라와 전선을 수십년간 맞대었던 고구려는 멸망 시점인 668년에 인구가 69만 7천여 호(戶)로 급감하게 된다.[83] 그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주로 신라, 발해, 당 등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고토에 잔류하거나 당을 탈출해 발해에 합류한 유민들은 훗날 발해 유민의 형태로 고려, 요나라, 금나라 등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더러는 말갈, 돌궐, 왜국 등으로 도피하였지만 수는 위의 세 부류[84]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았다. 이렇듯, 고구려 유민들의 거취는 대규모 망명, 강제 이주, 부흥운동의 여파로 여러 국가에 걸쳐져 있었다.[85][86] 타향으로 끌려가거나 객지에 머물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의식이 희석돼 현지 사회에 동화되는 양상이었다. 그렇기에 최종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을 잇게 된 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보존해 종국에는 고려를 건국한 신라 내의 일파들이다.[87] 이들은 동족인 발해인들의 합류에 힘입어 백제인, 신라인과 더불어 한민족(韓民族)의 원류(原類)를 구성하는 세 축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나아가 통일신라가 실패했던 세분화된 종족 정체성의 통합을 이루어내게 된다.[88]- 신라 ➪ 고려
- 발해 ➪ 거란 ◦ 고려 ◦ 금나라
- 당나라
- 잔류 고구려인
- 북방 초원
- 왜국
13.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역사귀속과 계승인식 문서 참고하십시오.14. 관련 사료 목록
고구려 관련 사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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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한국
14.2. 중국
14.3. 일본
14.4. 금석문
15. 고구려/문화재
※ 비석 문화재 목록은 금석문 문단 참조.15.1.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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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 우산하 고분군 | 장군총 장군총 1호 배총 | 태왕릉 광개토대왕릉비 | 임강총 | 우산하 992호 | 우산하 2110호 | |
마선구 고분군 | 천추총 | 서대총 | 마선구 626호 | 마선구 2100호 | 마선구 2378호 | ||
산성하 고분군 | 산성하 전창 36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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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 고분군 | 장천 1호 ■ | 장천 2호 ■ | 장천 4호 ■ | ||
* ■ 표시가 있으면 벽화분.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지 않은 왕릉, 귀족묘, 벽화묘 등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고구려왕릉 문서를 참고. ※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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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리 1호분 | 덕화리 2호분 | 덕화리 3호분 | |||
강서삼묘 | 덕흥리 벽화분 | 약수리 벽화분 | 수산리 벽화분 | 용강대총 | 쌍영총 | |||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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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 성과 요새
남한지역의 고구려 성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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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분지 고구려 보루군 | 양주 태봉산 보루ㆍ양주 독바위 보루ㆍ양주 천보산 보루군ㆍ양주 불곡산 보루군ㆍ양주 도락산 보루군 | |||||
아차산 일대 보루군 | 아차산 보루ㆍ용마산 보루ㆍ홍련봉 보루ㆍ시루봉 보루ㆍ수락산 보루ㆍ망우산 보루 | |||||
불암산 보루ㆍ배봉산 보루[a] | ||||||
한강 이남 고구려 점령 성곽 | 서울 몽촌토성ㆍ안성 도기동 목책 유적ㆍ대전 월평동 산성ㆍ청원 남성골 산성ㆍ진천 대모산성[b]ㆍ충주 장미산성[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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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연표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연표 문서 참고하십시오.17. 왕조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왕조 문서 참고하십시오.고구려 계루부 고씨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동명성왕 고주몽을 시조로,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있으며, 일본에는 보장왕의 아들인 고약광의 후손 고마씨가 있고,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 하는 요양 고씨가 있다.
18. 인물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9.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
20. 고구려부흥운동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부흥운동 문서 참고하십시오.고구려는 멸망 직후부터 활발하게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부흥운동에 투신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검모잠, 고안승, 고연무 등이 있다. 이때의 부흥운동 세력은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을 세우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30년 뒤에는 발해가, 200년 뒤에는 고려가 건국되며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한 부흥운동이 되었다.
21. 고구려/창작물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22. 기타
- 해외에서는 통일된 한국(Korea)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남한과 북한 지역의 역사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이유로 고구려도 북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147] 평양 등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도시를 비롯해서 상대적으로 남한보다 북한 지역에 고구려의 흔적이 훨씬 많은 것도 이러한 인식을 낳는 이유다. 실제 북한에서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한반도 북부의 고대 왕조를 계승한 것은 북한이라고 규정하고 교육 및 선전을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할 목적도 내포되어 있다.
-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148]가 10,000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149]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 1999년 4월 동양 철학을 전공한 교수인 김경일[150]은 유교 문화와 한국 사회를 비판한 책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을 출간하여 국내에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김경일 교수는 "고구려가 있던 만주는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가까우며, 아울러 만주의 중심 도시인 하얼빈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주에는 백인종인 슬라브인, 즉 러시아인들이 이주하여 살았으니 고구려인들은 러시아인과 혼혈이 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뉘앙스가 담긴 내용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아무리 세계사 전공자가 아니라고 해도 교수로서의 자질이 의심될 정도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우선 러시아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인 서기 9세기에나 등장한 국가이며,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된 때는 1860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였고, 러시아인들의 이주는 그 이후의 일이다. 아울러 시베리아에 러시아인들이 진출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서기 16세기 중엽에서야 가능했다. 그러니 고구려가 활동하던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7세기[151]까지 러시아인들의 조상격인 슬라브족들은 시베리아 차지도 못했을 때였으며, 고구려에 백인종의 유입자체는 있었지만 주로 토하라인, 소그드인 계통의 종족들이었지 슬라브족은 아니었다 , 당연히 고구려인들이 러시아인들과 혼혈이 될 일도 없었다. 아마 연해주나 시베리아 동부가 원래부터 러시아 땅인 것으로 잘못 알고서 이런 터무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듯하다.[152][153]
-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고구려 관련 사료가 많이 번역 및 정리되면서, 단순히 "진취적인 기상", "넓은 땅" 수준으로만 인식되던 고구려 역시 대중 사이에 독특한 인식 내지 그 시대 강대국 중 하나이자 진짜 상남자 국가(...)의 인식으로 자리잡았다. 안악 3호분의 마교를 연상시키는 괴물 그림과 빛이 바래 소름끼치게 변한 벽화 등을 두고 마교국가, 한민족 막나가던 시절(...)이라는 등과 같은 반응을 보이거나, 약탈지의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축제나 결혼할 때 수의부터 맞췄던 풍습 등을 두고 "내 조상이니까 웃지 진짜"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 고구려가 남하 정책할때 왜 삼국통일을 안했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때 나제 동맹으로 못 했다. 게다가 중국과 몽골계, 유목민족 등도 신경 써야하는데 마냥 전쟁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신라의 삼년산성만 보더라도 엄청난 요새성이다.
- 고구려의 멸망은 명백히 한민족의 역량을 축소시킨 비극이었다. 단순히 강역이 축소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의 귀중한 평야지대인 서북한과 함흥평야가 무려 2세기 이상 방기되어 전근대 국력의 지표인 인구의 성장에 제약이 걸렸고, 또 그 서북한을 지키는 방어선인 요동을 고구려라는 패권국가의 부재 속에 성장한 북방민족들로부터 영영 되찾지 못해 기껏 개발한 서북한이 다시 전란에 휩쓸리기를 장장 1천년 간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서북한 평야지대는 11세기 들어 어느정도 개척을 진행했지만 함흥평야를 온전히 한민족 국가의 강역으로 확보하는 것은 14세기 쌍성총관부의 수복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23. 같이 보기
2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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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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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매덕 · 고질전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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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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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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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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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만 근대적인 국기(國旗)의 개념이 없었던 만큼 국가의 상징은 아니었을 것이다.[2] 고구려 건국 연도에 대한 다른 견해는 고구려/역사 문서의 건국 연도 문서로.[3] 무진(戊辰)년 계해(癸亥)월 임신(壬申)일로, 음력 10월 21일, 율리우스력에서는 11월 30일이다(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변환계산). 제3차 고구려-당 전쟁 중 평양성 전투에서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했다.[4] 엄밀히 얘기하면 현도군은 지역민들의 반발로 기원전 75년경 치소인 고구려현을 포함하여 흥경 일대로 이현했고, 이후 압록강 유역에는 비류국, 졸본부여, 조나국, 구다국 등의 소국들이 군장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이후 졸본 지역에서 부여계 유민인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보고 있다.[5] 나당전쟁과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고구려 유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통치기관이다. 단, 아직 건재하던 때 약 22,800에서 33,200여 호(戶)에 달하는 고구려 유민들을 영주와 중원 일대로 강제 이주시켰다.[6] 영주 일대에서 탈출한 걸걸중상과 대조영의 고구려 유민 세력, 그리고 만주에 잔류한 고구려 유민들 외에도 속말말갈을 비롯한 친고구려 성향의 말갈 부족들이 힘을 모아 건국했다.[7] 소고구려의 실존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다만 발해의 선왕 대에 이르러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발해 건국 세력 이외에도 패서(浿西)와 요동(遼東)에서 활동한 남북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들. 남부에서는 한성의 검모잠과 안승이, 북부에서는 북부여성의 고정문과 오골성의 고연무 등이 있다. 나당전쟁 당시 부흥운동이 꺾이자 이들 대다수는 신라에 합류했다.[9] 잘 알려진 동예, 옥저를 비롯해 비류국, 조나국, 개마국, 구다국, 주나국, 해두국, 행인국, 황룡국, 대수맥, 소수맥, 양맥 등 수많은 소국들이 초기 고구려 형성 과정 중 병합되었다.[10] 전북 일대의 보덕국민, 호로하 일대와 그 이북인 패서의 고구려인, 영동 일대의 고구려 유민, 그리고 요동 등 북방에서 대량으로 귀부한 반당(反唐) 성향의 고구려인들이 있다. 신라에 합류한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고구려부흥운동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왕건 등 이들의 후손인 패서 호족들은 훗날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250여 년만에 부흥운동의 결실을 맺게 된다.[11] 동명성왕~동명성왕.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 《삼국유사》 〈고구려〉편 기록. 두 기록에 따르면 동명왕은 처음엔 국호를 졸본부여로 한 것으로 나온다. 반면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는 아예 처음부터 국호가 고구려로 정해진 것으로 나온다.[12] 동명성왕~장수왕. 구려, 고리 등. 초기 고(구)려는 신라처럼 국가명이 공인된 한자 표기가 없었고 구전으로만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13] 장수왕~보장왕. 이 국호는 고구려 멸망 후에도 700년 동안 발해 고왕, 태봉 궁예, 고려 태조가 이어갔으며, 그 이후에도 한자문화권 밖의 전 세계에서 한국의 대외적인 명칭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만일 충주 고구려비가 최근의 연구 결과대로 광개토대왕 대에 세워진 것이라면 '고려' 국호는 광개토대왕 대부터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14] 영남의 신라와 그 주변부 그리고 거란이나 실위, 말갈 등 내몽골, 헤이룽장성, 연해주 남부의 유목, 수렵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했었다. 고고학자 손보기는 몽골 동남부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강가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가늠되는 유적들을 발견한 바 있다. # 장수왕 대에 유연과의 지두우 지역 분할 시도와 연관짓기도 하는데 다만 후속 연구는 수십년 째 전무하다.[15] 건국 당시 내륙 국가였던 고구려가 비로소 서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서해 진출의 의의는 중국 및 백제 방향으로의 진출이 해상으로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며, 고구려가 수군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반면 고구려가 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하게 된 때는 57년 옥저를 복속했을 때이다.[16] 기원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설치된 이래로 장장 400여 년간 지속된 걸로 추정되는 이민족의 지배를 청산한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한 것이다. 한사군을 완전히 축출한 것은 404년 광개토대왕때지만, 광개토대왕이 마지막으로 축출한 현도군은 이미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고구려의 영토 밖에 있었다. 따라서 현도군은 축출했다기 보다는 침공해서 점령에 성공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다. 이 사건이 백제에 끼친 영향력도 상당한데, 낙랑군·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오던 백제는 낙랑인과 대방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대량으로 흘러들어온 신진 문물을 바탕으로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훗날 백제가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할 기틀을 이때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사건이 한반도 역사에 끼친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17]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으로 기록됨.[18] →환도성→국내성[19] →장안성. 국내성-환도성은 평시 수도-전시 수도의 개념으로 거의 일체화되어 있었으며, 고구려 장안성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동일하게 평양에 위치한 성이기에 애초에 《삼국사기》부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며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장안성을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기록엔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여 국내성, 평양성의 순서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같은 책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졸본에서 건국하고, 유리명왕 대에 국내성(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산상왕 대에 환도성으로 천도했고, 이후 동천왕 대에 조위의 관구검의 침공으로 환도성이 불타 평양성(장수왕 대의 평양성과는 다른 곳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의 남평양이 이곳일 가능성이 있다.)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국원왕 대에 국력을 회복하여 국내성을 수리하고 환도성으로 다시 도읍을 옮겨오나, 전연의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평양 동쪽 황성(혹은 평양 동황성)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이후 장수왕 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평원왕 대에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 멸망할 때까지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20] 《요사》 〈지리지〉에는 국내성 수도 시절 변란 때 임시 수도였던 환도성이 고구려의 중도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 기록은 '환도'(丸都)의 '환'(丸)을 '중'(中)으로 잘못 표기한 기록으로 보인다.[21] 패서 지역에 속하는 현재의 황해도 재령군 인근으로 비정된다. 평양성, 국내성과 함께 수도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 설치됐으며 안승과 검모잠이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나당전쟁이 끝나고서는 통일신라가 차지했고, 이후의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을 비롯한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이 지방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22] 지배층 및 주류민족.[23] 흑수말갈, 속말말갈, 백산말갈 등.[24] 거란, 실위, 선비 등[25] 고구려/종교, 무속 문서로.[26] 소수림왕 시기부터[27] 연노부 → 계루부. 건국 초기에는 연노부의 권력이 막강해 왕위를 맡았으나 계루부가 진입한 뒤, 초대 동명성왕 혹은 늦어도 제6대 태조대왕부터는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동명성왕 또는 태조대왕 이전의 군주들이 해(解)씨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해씨 고구려설 문서로.[28] 다만 영토로 놓고 보면 발해가 고구려보다 약 1.5배 더 넓다.[29]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전한, 후한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가가 등장했다.[30] '고려태왕'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충주 고구려비가 397년(영락 7년)에 건립되었다는 주장이 있다.[31]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인 '가오리방쯔'(高丽棒子)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욕설은 중국의 동북공정 기반 고구려 역사 왜곡을 반박하는 근거자료 중 하나로 쓰이게 된다.[32] 물론 상대적인 의미이다. 현재 한국의 한자음은 구어 사용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 중국 한자음과 달리 대체로 당나라 시절의 장안음이 큰 변화 없이 고착된 것으로 본다. 상세한 것은 아래로.[33] 삼국시대 고구려를 가리킬 때.[34] 돈황문서 〈북방 몇몇 나라의 왕통에 관한 기술〉(Pelliot Tibetain 1283)[35] 돌궐 〈퀼 테긴 비문〉[36] 《Historiam》, 자세한 설명은 해당 항목으로.[37] 8세기 후반에 쿠차 출신 승려 리언(利言)이 편찬한 《범어잡명》에 기록된 국명이다. 무구리(畝俱理)라는 음차 표기도 같이 기재되어 있다.[38] 한자 음차로는 '구구타의설라'(俱俱陀醫說羅), 의미는 '계귀'(鷄貴). 즉 '쿠쿠테'는 '닭'이라는 의미이고(닭의 울음소리에 대한 의성어라는 설이 있다.) '스바라'는 '귀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닭의 신을 받들어 모시기에 닭의 깃을 꽂아 장식으로 삼는다는 해설과 함께 기록된 호칭이다. - 《대당서역구법고승전》[39]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高禮)'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40] 한편 이병도 교수는 고(高)의 한국어 고유 어휘인 '수리'와, 고을을 뜻하는 '골'을 연결시켜 고구려의 고유어 명칭을 '수릿골'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41] 일각에서는 이를 현대 한국어 '고을'과 연관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중세 한국어에서 'ᄀᆞ옳'이었으며, 중세 한국어 자료인 용비어천가에서는 '조ᄏᆞᄫᆞᆯ(粟村)'이라는 지명 표기가 나와 본래 어형이 '*ᄀᆞᄫᆞᆯ'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ㅸ'이 'ㅂ'이었을 고대 한국어 시기의 자료에서도 기부리(己富利: 일본서기), 거벌(居伐: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으로 문증된다. 따라서 어중에 ㅂ이 있었던 '고을'은 고구려어 '*고로(溝漊)' 및 '*골(忽)'과는 다른 어원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42] 단, 근래 한국 사학계에서는 후고구려 대신 최종 국호인 태봉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43] 구글 검색결과도 서로 비슷한 편이다.[44] 《고려사》 〈윤관 열전〉.[45] 《고려사》 〈묘청 열전〉. 대화궁 팔성당에 모신 신의 명칭에 붙어 있다.[46] 태자사낭공대사비, 《대각국사 문집》.[47]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38권 〈제소정방 장군문〉.[48] 《발해 국호 연구》, 발해유민 연구 저서 참조.[49] 지금은 단순히 그렇게 발전한 건 아니란 게 증명되었지만 사학, 고고학이 많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대에는 그렇게 여겨졌다.[50] 여기에서 평양성의 별칭을 마한의 수도라는 뜻의 마읍(馬邑)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발해 및 발해 부흥운동으로 생긴 후속국가들도 자신들이 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긴다.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장수왕대에 백제를 달달 털어서 대부분의 국토를 장악한 뒤, 마한도 (거의) 정복했다고 인식되면서 마한=고구려가 되었다는 가설도 있다.[51] 이 경우 그냥 삼한을 통틀어서 진한이라 지칭한 것 같다. 한반도쪽을 가리키던 진국+한국을 적당히 섞어서 그렇게 부를 수도 있기 때문.[52] 마한이 백제와 동치되었을 때는 삼한 중 남은 게 변한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변한에서 나왔다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53] 다른 권들에도 고구려가 언급될 때마다 려(麗/驪)자의 음가를 력(力)과 지(知)의 반절로 적은 주석이 달려있다.[54] 서길수, 「'高句麗'와 '高麗'의 소릿값(音價)에 관한 연구」, 『고구려연구』 27, 2007, 27-105.[55] 고대 튀르크어에서 b와 m의 발음은 통용되므로 정확한 발음은 '뫼퀼리(Möküli)'가 된다.[56] 비슷한 사례로 역사서 《삼국사기》의 제목이 사실 '삼국사'이며 '삼국사기'는 일제가 조작한 명칭이라는 주장도 궤를 같이한다. 삼국사기 문서 참고.[57] 통일 중국이 타민족과 총력전을 하고서 진 경우는 여수전쟁, 요송 전쟁, 금송 전쟁 등이 있다. 몽골계 민족인 요나라는 통일 중국인 송나라에 선빵을 쳐서 수도인 개봉부까지 점령했고, 여진계 민족인 금나라는 화북을 통채로 먹었다. 요, 금을 중국사로 넣어버리는 중국 중심적 사관 때문에 두 전쟁을 한족과 다른 이민족의 국가가 중국과 총력전을 벌였다는 인식을 잊기 쉽지만 요, 금부터는 이전의 한족으로 흡수된 침투왕조와 달리 한족과 다른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정복왕조라는 사관이 학계의 주류설이며, 송은 명백히 한족의 통일왕조로 중원에 영토를 걸친 요, 금이 공존한다고 해서 중국의 분열기라고 할 수 없다.[58] 고구려 이후로도 한반도 왕조 국가들의 힘은 충분히 강했고, 실제로 세계적으로 한반도 왕조보다 강한 국가는 몇 되지 않았지만, 고구려처럼 통일 중원 왕조와 대등하게 패권을 쟁패하려고 드는 패기를 부릴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중국 왕조들이 고구려 시대를 기준으로 한국의 국력을 평가하는 것은 시종일관 과대평가였다.[155] 고구려의 이후 왕조들 중 군사적으로 고평가받는 고려만 해도 거란의 침략에 멸망 직전까지 내몰렸는데, 고구려는 거란과 같은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제하고 제어했으며 심지어 복속시켜 번방으로 두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군사력도 세계 순위권에 들지만, 중국군과 직접 일대일 비교하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른다.[59] 그 예시로, 고구려가 억누르고 있던 주요 봉속국들이었던 거란, 실위와 고막해, 말갈은 예맥계 왕조가 북방 통제에서 손을 떼자마자 각각 요나라, 몽골 제국, 금나라로 분화하여 동북아시아 역사를 통째로 뒤집어 놨다. 이들을 직접 제어하고 심지어 복속시켰던 고구려의 저력은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에 온 나라의 국력을 쏟아부어도 모자랐던 고려, 조선 등 이후 왕조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60] 남제의 연호, 서기 489년, 장수왕 77년[61] 풀어쓰자면 남제가 '뭐? 북위면 모를까 고구려와 맞먹으라고?'라고 따지자 북위가 '이 정도도 많이 대접해주는 거니 고마운 줄 알어…'라고 면박을 주는 상황이다. 실제로도 따지고보자면 남조의 국력이 고구려 북위 어느쪽에 가깝냐면 전자에 훨씬 가깝기도 하고[62] 正始, 북위의 연호, 서기 504~507년, 문자왕 13~16년[63] 생몰년 499~515. 북위의 8대 황제 선무제[64] 마노 혹은 옥[65] 탐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66] 얼핏 보면 '백제랑 물길이 설쳐서 공물 못 바치겠습니다.'라는 고구려를 북위가 '니 구역은 니가 알아서 해야지…'라고 타이르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말갈과 백제를 포함한 중국 동쪽의 세계를 고구려가 관장한다는 인식도 은근히 드러나는 은유이기도 하다. 관념적으로는 천하에 중화질서 하나로만 흘러가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을 너도 나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67] 645년 당나라 태종의 고구려 침공 당시 고구려에서 이에 맞서 15만의 대병력을 동원한 모습이다. 중국의 기록은 물론 역사서에서 이와 같이 적군의 위용을 기록자 스스로도 공포스럽게 기술한 경우는 손에 꼽힌다. 대개 적군의 진영을 두고 어떤 진을 쳤다, 혹은 어디에 진을 쳤다는 식으로 기술하였고, 그 위용을 당대인들이 진심으로 두려워했다고 해도 대개 "~~하였으므로 XX가 두려워하였다"라는 식으로 기술하게 마련이다. 반면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의 15만 대군을 마주한 당나라는 직접적인 감평 없이 있는 그대로 자신들이 느낀 감정을 기록에 그대로 투영하였으며, 이것은 당시 당나라인들에게 고구려군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공포성이 매우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처럼 정사 기록에서 적군의 위용 자체를 직접적으로 공포스럽게 표현한 경우는 사서를 통틀어도 한나라 시기의 흉노에게서만 나타난다.[68] 단, 통일중원왕조와 반세기 이상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는 국력을 가진 나라자체가 동아시아에선 고구려 외엔 거의 없었다. 또 전쟁의 결과로 고구려만 국력을 소모한 것이 아니라 수나라는 아예 망했고, 당나라 역시 태종이후로 대외 전략에 막대한 소모와 지장이 생겨버렸다.[69] 그리고 강대국이 된 후기에도 이러한 시절의 전통에 따라 평시의 평지성과 전시의 산성의 이중적인 수도 체계를 유지하였고, 강력한 수성 능력과 방어 체제를 운영하였다.[70] 북쪽에 자리잡은 고구려가 남쪽의 백제, 신라에 비해서 단위 면적당 생산력이 떨어졌음은 자명하지만 하지만 워낙 영토가 넓은 탓에 실질적 가용 면적이 적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땅들 중에서도 요동과 서북한은 한반도 남부보다는 못해도 충분히 좋은 땅이었으며 전성기 한정으로는 한강 유역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까지도 보유했다. 동시대 중국의 하북 지역과 화춘 평야,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강남에 비했을 때 고구려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크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지만, 중국을 제외하면 손가락 안에 꼽힌다.[71] 지배 성격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들이 강성해지지 못하고, 상국으로 대접받으며 어떨 때는 고구려의 전쟁에 동원될 정도의 역량이다.[72] 북위는 고구려를 상대하기 위해 대륙 서쪽 농우 지역의 기병을 동원하려다가 그만두었고, 당나라도 서쪽과 남쪽 끝에 해당하는 사천성, 강남 일대까지 쥐어짜다가 이에 반발한 농민들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수나라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아예 나라가 멸망해버렸다.[73] 당나라가 고구려에 정신이 팔린 사이 토번이 급성장해 토번이 장안성을 초토화시키는 상황을 초래했으며, 이는 신라와 전쟁을 벌인 나당전쟁에서 열세인 신라에게 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한 당나라의 절도사 봉건화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74]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고 국호를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주변국들에게 사실상 고구려 시즌2로 여겼다. 이를 실리적인 이유로 인정하지 않은 나라가 바로 거란족의 요나라였고, 나중엔 외교 담판으로 인정하게 된다.물론 그렇다고 옛날 고구려 땅을 돌려주진 않았지만.[75] 고구려는 몽골의 직계조상인 몽올실위를 통제한 전적이 있기에 당대 몽골인들에게 있어 고구려는 '옛날 자기 상전 노릇하던 나라'이기도 했다. 쿠빌라이 칸이 고구려를 복속시켰다고 기뻐한 것은 단순히 고구려의 이름값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역사적 관계에서 기인한다.[76] 다만 이후 카다안의 침입 당시 쿠빌라이 칸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라고 디스당한다.[77] 다만 규모의 차이가 현격했을 뿐, 신라, 고려, 조선도 유목민 출신 용병을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성계의 가별초 역시 여진족과 왜구 등이 섞인 다국적 군사집단이었고, 사르후 전투 때에도 다수의 친조선파 내지 반 누르하치파 여진인들이 길잡이는 물론 전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고구려처럼 제후국으로 거느리고 수천 단위의 병력을 징집해 끌어오는 위력은 결코 아니었다.[78] 물론 이것은 21세기 국제질서와 6세기의 국제질서와 경제 체제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 것에 있다. 대한민국이 전근대적 내지 제국주의적으로 사고해, 상당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북한을 없애 버리겠다고 작정한다면, 북한은 단기간 안에 파멸을 면키 어렵다. 단지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그 정도의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다. 물론 그런 신경전을 중국 상대로 직접 했던 고구려와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말이다.[79] 지방 5부의 경우 묘지명 및 각종 기록 등을 근거로 하여 후기에는 여러 개의 주(州) 제도로 확장 발전되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지방 각 부를 대표하는 장관이었던 욕살/도독이 매우 가까운 요동성과 건안성 등 근거리의 큰 성들에 동시에 배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정설은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국토를 동등하게 나누기에는 고구려의 인구 및 주요 도시는 주로 서쪽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주요 전선도 후기로 가면 북쪽과 동쪽은 이미 정리되고 서쪽과 남쪽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행정수요에 있어서도 편차가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80] 흑수말갈이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위치한다는 사료들의 기록들과는 상반되게 중국과 한국의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안거골부를 흑수말갈의 서남쪽에 비정하 것과 조금 다르게 그려져 있다.[81] 도독부에 직속한 현이 있어, 주 단위로 볼 경우 9도독부 역시 주에 해당한다.[82] 영양왕 본기에서 고구려로 진격하는 수군의 좌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방면으로, 우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 방면으로 나와있다.[83] 호당 구성원의 수를 5명으로 잡으면 약 350만의 인구가 집계된다.[84] 신라, 발해, 당.[85]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부흥군 수뇌부 일부와 당나라로 끌려간 12,807명을 제외한 인구의 절대 다수가 신라에 편입된 백제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백제인들처럼 고구려인들도 오늘날 현대 한국인, 나아가 한민족의 직계 조상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수'는 맞더라도 백제인들처럼 '절대 다수'가 한민족의 역사권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다.[86] 참고로 당나라에 끌려간 백제인들은 다시 고구려의 건안성으로 옮겨지는데(소백제), 이후 발해가 요동반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발해에 흡수되었다고 추정된다.[87] 정확히는 패서 호족과 주민. 검모잠 등이 주도한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의 실질적인 후계 집단이다. 전라북도 일대로 남하한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은 현지에 동화되었고 영동의 고구려인들은 패서의 고구려인들만큼 유의미한 세력체를 형성하지 못했다. 대개는 고려의 건국 이후 합류하는 식이었다.[88] 고구려인들이 삼한일통을 실질적으로 성공시켜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89] 호로하(瓠盧河), 즉 임진강 일대와 그 이북인 송악, 정주, 파해평사현 등을 비롯한 경기 북부, 고구려 삼경(三京) 중 하나인 한성(漢城)과 고구려의 수도권인 패서 지역에 해당되는 황해도 전체와 평안남도의 일부, 그리고 영동 일대 등이 있다. 진흥왕 대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신라에 귀속된 국원성(國原聖)이나 남평양(南平壤) 등 한강 이남의 고구려인들은 논외로 한다.[90] 삼국사기 기준으로 연정토의 망명 당시 따라나선 귀신(貴臣), 즉 고위 관료들은 집과 땅을 하사받고서 서라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91] 670년대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고구려부흥운동을 후원하던 신라에 귀부한 집단과는 별개의 무리로, 이들은 보덕국을 따로 세워 대당 항쟁을 남쪽 지역인 백제 영토에서 이어나갔다.[92] 검모잠의 무리들로 일컬어지는 패서와 요동의 고구려 부흥군. 당시 고구려부흥운동은 안시성부터 오늘날 파주까지 고구려 전역(全域)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만주 북부에 위치한 부여성(扶餘城)의 대수령(大守令)이었던 고정문(高定問)은 당나라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구려 백성 69만 8천여 호(戶)를 쉽사리 통제하지 못하면서 당은 계속 애만 먹다가 발해 건국을 시점으로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만다.[93] 신형식 교수의 『통일신라사』 및 각종 논문 근거 등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백산말갈 출신으로 비정된다. 신라에 합류해 구서당 중 흑금서당을 구성한 말갈족들도 있었으나, 예맥계 비중이 속말말갈보다도 대단히 높았고 아예 인구로 유입된 다른 말갈 계열까지 예맥화시켜버릴 정도로 토착 문화 발전도가 높은 백산말갈과 동일시되기에는 어렵다. 백산말갈 항목 참고.[94] 신문왕 대에 완성된 중앙군 체제인 9서당 가운데 말갈족의 흑금서당까지 합하면 총 네 서당이 고구려계들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셋은 신라인, 둘은 백제인으로 구성되었다. 고구려인들로 구성된 부대는 황금서당, 벽금서당, 그리고 적금서당이 있으며 고구려인들과 함께 신라에 망명한 말갈인들로 구성된 흑금서당도 있었다. 넓은 의미의 고구려계를 여러 분류로 구분했는데 신라에 언제 어떻게 유입됐는지에 따라 집단이 구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분할통치(디바이드 앤 룰, 소위 갈라치기)의 의도도 배제하기는 힘들다.[95]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의 여파로 수많은 백성들이 전쟁으로 내몰려 사상당한 것을 감안하면 신라로서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삼국을 통일할 실리적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인구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의 개입 이전까지 양면전쟁을 치를 수 있었던 데에는 유능한 명군들과 뛰어난 명장들의 활약, 그리고 소백산맥이라는 험준하고 강력한 방어망으로 둘러싸인 덕택이 컸다. 하지만 김유신이 사망하고 그와 함께했던 신라의 황금세대도 늙어가자 나당 전쟁을 기점으로 그 단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신라 본토 바깥의 전쟁에서는 소맥산맥의 도움은커녕 오히려 동고서저라는 한반도의 지형 특성상 지리적 방어막 역할을 제한적으로밖엔 못 해주는 구릉지나 평야에 최대한 인구를 때려박으며 전쟁을 치러야 했다. 나당전쟁 초창기 부족한 인구를 메우기 위해서 신라가 당장 조치한 일로는 투항한 고구려와 백제 귀족에 대한 관등 및 관직 하사 외에도 김품일, 김문영, 천존, 죽지 등을 위시로 한 웅진도독부 정벌이 있었다. 이들 넷이서 옛 백제의 심장부이자 수도권이었던 웅진도독부의 82성(城)을 취한 뒤 해당 성읍들의 지배층과 백성들을 모조리 신라 내지로 이주시켰을 정도로 신라는 나름 절박했다.[96] 황해남도 재령군으로 비정. 고구려의 삼경(三京) 중 하나로서 평양성, 국내성과 어깨를 나란히했던 대성(大城)이였기 때문에 다수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었다. 현대 한국과 비교하자면 경인 지역의 일부로 취급되는 인천광역시 같은 위상이라고 보면 쉽다.[97] 서울특별시하고 인천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 수도권 지역인 경기도 같은 위상이다. 본래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영역이었지만 미천왕 대에 고구려가 정복하면서 성장한 배후지다. 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됨에 따라 요동, 국내성 일대와 더불어 고구려의 핵심 영토이자 실질적인 수도권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98] 북부에서는 부여성(扶餘城)의 고정문(高定問)이나 오골성(烏骨城)의 고연무(高延武)와 같이 책성 • 안시성 • 요동성 • 신성 등 일대의 대성(大城)과 성읍들이 고구려 부흥세력으로서 대당 항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99] 주로 요동(遼東)과 압록강 일대, 그리고 책성(柵城) 등 동만주(東滿州)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로, 고구려부흥운동과 나당전쟁을 촉발시킨 신라군의 요동 공격 및 일시적 점유 과정에서 고연무(高延武)가 이끌던 오골성(烏骨城) 주민들처럼 신라로 남하한 이들이다. 이들은 나당전쟁 기간에 걸쳐 꾸준히 신라에 대거 유입되었다.[100]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이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ㅡ 예군 묘지명 中[101]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이후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 부흥군 세력 등.[102]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한 무리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무리와 더불어 안동도호부에 잔류하던 요동의 고구려인들.[103] 역설적이게도 나말여초에 이르러 신라가 잦은 민란, 천재지변(가뭄, 홍수, 지진 등), 삼림파괴, 그리고 혼란한 정치 상황으로 쇠락하고 인구가 급감할 때, 패서 일대는 비교적 번영을 구가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윤순옥, 황상일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104] 선덕왕 시절에 신라인들을 일부 패서로 사민시킨 바 있지만 원(原)신라 지역이 쇠락하면서 찰산후 박직윤(朴直胤)처럼 패서(浿西)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왕경인(王京人)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경우 현지의 고구려계 주민 사회에 동화되면서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大謨達)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고구려 유민 사회에서도 신라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면서 후에는 박(朴, 백제계지만 반남 박씨와 순천 박씨가 차용 사례의 대표로 들어진다), 김(金, 동주/서흥 김씨) 등의 신라식 성씨들을 차용하는가 하면, 신라식 관등 체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왕건의 아버지였던 패서의 고구려 유민인 왕륭은 사찬을 지냈다. 마찬가지로 왕건의 조상이면서 고구려 유민이었던 자 가운데 스스로 골품제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각간(角干)을 자처한 두은점 등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를 무려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다.[105] 예를 들어 신라의 오소경(五小京) 가운데 하나인 남원소경(南源小京)이 보덕국 유민들을 이치시키면서 설치되었다. 요충지인 소경이니만큼 친신라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민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금마저와 마찬가지로 남원소경의 전신인 고룡군도 백제 유민들의 저항이 거셌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남원소경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했고, 거문고 명인 등의 예술인들 또한 많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계가 아니라 출셋길이 막히고 지방호족으로 전락한 고구려계 귀족들이 보덕국을 통해 남원소경에도 전수된 고구려의 유산을 거름삼아 문화예술 및 종교 분야로 많이 진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06] 물론 일부는 전주 최씨나 일부 성씨들처럼 뿌리가 북방에 기인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대략 당대쯤부터 시작하면서 중국을 기원으로 삼는 한국 성씨들의 대부분은 고구려, 백제 유민 계열의 성씨라는 견해가 있는데, 유민 출신으로서 보다 유리한 대우를 받기 위해 중국계를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다. 심지어 당시 당나라로 망명한 고위 귀족이었던 고흠덕(高欽德) 가문의 경우도 상나라의 충신 비간의 후손을 자처한 바가 있다.[107] 통일신라 당시 영동 지방은 원(原)신라 지역이 아닌 예맥의 땅 혹은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사실 이쪽 지역은 실직국이라는 독자적인 나라가 있기도 했고 영서 지방의 맥국을 비롯해 기원을 따지면 동예의 후예로 엄연히 고구려의 가까운 친척이긴 해도 약간 다른 정체성 또한 있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에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을 주장한 패서호족과는 별개로 태봉이라는 아예 다른 정체성을 주장한 궁예의 홈그라운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신라 정부에서는 상기했다시피 그냥 예맥인들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옛 영역으로 봤고 궁예가 몰락한 뒤에는 좀 남쪽에 있던 왕순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려에 흡수되었다.[108] 사천 전투와 평양성 전투 당시 전쟁 포로로 유입된 집단 등.[109] 송악 출신의 고구려계 해상 호족인 왕륭의 아들로, 고려도경 등에 따르면 고구려 귀족의 후예다.[110]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세워진 고려는 고구려가 이전에 달성하지 못했던 신라와 백제의 병합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발해 유민들을 짧게는 수십년에서 길게는 이백여년에 걸쳐 대거 수용하면서 삼한 내의 개별적인 종족 정체성을 고구려쪽에 가깝게 단일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고려 후기로 가서는 삼국을 모두 일정하게 계승했다는 의식이 강해지면서 고구려에 편중된 계승 의식은 희석되고 특히 고조선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고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였기에 몽골 제국의 침탈로 인한 우울하고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유구하다는 자존심을 위해 더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조선 또한 역시 평양을 기반으로 했던 왕조였기에 후대에도 삼국 중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가장 강조되었고 그래서 해모수는 아예 시조 단군과 동일한 신격으로서 합쳐지게 된다. 이런 인식에 힘입어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로서 같은 사당에 합사되었다. 또한 고구려 당대에도 이미 단군에게 고조선을 이어받았다는 전설이 있던 기자를 신으로서 섬기기도 했다.[111] 고구려를 정신적으로나 영토적으로나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된 북진 정책, 서경 중시, 강동6주 획득, 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자처하고 멸망 이후에도 이백여년 동안 부흥 운동을 전개한 발해 만큼이나 고려도 끈질기도록 선조들의 유산을 되찾고자 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해 주변국들을 복속했듯이, 고려도 이를 그대로 답습해 전성기 시절 요나라와 북송을 상대로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외교 정책을 취하는 동시에 탐라국, 여진족 부족들, 일본계 호족들 등을 밑으로 두어 조공을 받는 해동천하를 일구었다. 고려의 사신들이 북송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궐에서 요나라 사신을 모욕해도 두 강대국들이 고려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북송의 유명한 시인 소식은 아예 고려인들을 '고구려인 도적'이라는 뜻의 맥적이라 깐 적이 있다.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일대를 호령하던 여진족의 금나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으며 고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와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려 하였을 정도로 고려를 경계하였다.[112] 발해 유민들이 고려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잡았음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주체인 고려의 건국 세력, 즉 신라 출신의 고구려인들에게 합류하는 형식이었다.[113] 혈연 및 정신적인 계승의식은 차치하고서 논하자면, 오늘날 한민족의 전통문화 가운데 전해지는 것들로 상당수는 고구려에서 유래하였다. 김치, 불고기, 젓갈, 된장 등의 식문화가, 온돌, 치성 등의 건축 문화가, 한복 등의 의복 문화가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 악기로는 대표적으로 대가야의 가야금과 함께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거문고가 있으며, 무형(無形) 문화로는 한때 고려 시대 때 무신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수박의 후신으로 씨름 등이 전해진다. 언어의 경우 이병도와 이기문의 학설을 주류로 취급하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현대 한국어가 신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강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이나 제임스 웅거 같은 해외의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논증한 바로 신라어가 아닌 고구려어가 한국어의 뿌리라는 주장이 2013년부터 유력시된다.[114]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여전히 반도 일본어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잖은 상황이기도 하다. 반도 일본어설은 한반도를 원향(原鄕)으로 삼던 고대의 일본어족이 고조선과 부여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족에 의해서 일본 열도로 밀려난 것을 골자로 한다.[115] 여담으로 알다시피 국내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三韓)을 모두 이었다고 해서 정한 대한(大韓)이라는 명칭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가리킬 때 한국인(韓國人)이라고 부르지만, 애초 해외에서의 한민족의 명칭은 신라인(Sillan)도, 백제인(Baekjean)도 아닌 고려인(Korean), 즉 고구려인(高句麗人/高麗人)이다.[116] 주로 속말말갈, 백산말갈 출신 등. 이들은 '퉁구스계'가 아니라 소위 '예맥계 말갈'이다.[117] 대연림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한 유민들.[118] 고모한, 고청명, 곽약사처럼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자리잡은 유민들.[119] 금나라에 합류한 발해인들의 경우, 금나라 황제에게 시집가 황실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금나라, 더 나아가 중국사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해릉양왕의 어머니는 발해 왕족인 대씨(大氏)였으며, 또한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금나라 세종도 어머니가 발해인 추와지(雛訛只)의 딸로 발해계 혈통이었다.[120] 당시 고려는 발해인들의 인심을 얻고 반(反)거란 의식을 고취시기 위해서 거란의 사신들을 유배보내고 만부교에서 낙타들을 굶겨죽인 적이 있었다. 만부교 사건 문서로.[121] 상술했다시피 고구려계라는 의식이 강했던 초기 고려인들은 발해인들을 동족으로 여겼던만큼 출신지가 고려인 이상 따로 발해 출신으로 적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예시가 유충정(劉忠正)이다. 발해 유민으로서 국내(고려)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고영기(高英起), 고적여(高積餘), 양규(楊奎), 지채문(智蔡文) 등과 달리, 유충정은 사료에서 발해 출신이라고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상 유충정 혹은 그의 선대가 당시 발해로 여겨지던 정안국에서 979년 고려로 망명한 수만명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이름을 전한 발해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면서 고위 관직을 신라계 • 백제계와 대등한 조건으로 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우와 조치들은 고려인들이 한국어족 계열의 탐라인을 여겼던 방식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것들이다. 1105년 숙종 시기, 탐라군(耽羅郡)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탐라인들은 발해인과는 달리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 외국인들만이 응시하는 빈공과를 거쳐야 했다. 설령 빈공과를 통과해 중용되었어도 태자 고말로의 아들로 전해지는 고유의 사례처럼 탐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관직을 겸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고유는 심지어 한낱 속국에 불과할지라도 엄연히 자견왕의 혈통을 잇는 왕족 지위에 탐라인 최초로 관직을 얻은 인재였음에도 말이다. 고유가 탐라인 최초로 임용된 1057년 이전에 등장하는 고씨들은 사실상 고구려계 • 발해계로 보아도 무방하다.[122] 934년 한해에 귀부한 세자 대광현의 무리만 해도 그 규모가 수만이 아니라 수만 호(戶)였다.[123] 정몽주의 시(詩)인 발해고성(渤海古城)에서도 발해 유민들의 귀부를 언급하고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渤海昔爲國, 於焉遺址存, 唐家許相襲, 遼氏肆幷呑, 附我全臣庶, 于今有子孫, 遺民那解此, 嘆息住歸軒.'
'먼 옛날 발해가 세워졌던 곳. 아직도 그 자취가 남아있구나. 당에선 왕위 계승 허용했는데, 요것들이 함부로 병탄하였네. 우리의 신하와 백성이 되어, 여지껏 그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거늘. (옛 발해 땅에) 남은 백성들은 이 사실을 어찌 알리오? 탄식하며 수레를 멈춰보노라.'[124] 고려에 귀부했다가 죄를 지어 다시 거란으로 도망친 고모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모한의 출신지인 요동성부터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忽汗城)에 이르기까지 발해 유민들의 귀부는 소수의 거란군이 점유한 일부 지역까지 모두 포함해 일어나고 있었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125] 대표적으로 고려 목종 대의 신료였던 유충정(劉忠正), 여요전쟁 당시 맹활약한 대도수(大道秀), 대회덕(大懷德), 고적여(高積餘) 등이 있었다. 무신정권 때는 권력자이자 간신배로 이름을 남긴 대집성이, 여몽전쟁 때는 고려군의 군관으로 활약한 대금취(大金就) 등이 전해지고 있다.[126] 각자 사병들을 거느리던 호족들이 난립하던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로지 왕건 본인에게만, 즉 고려 왕실에게만 직속으로 신속된 발해 유민들이라는 기반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127] 서경 일대와 그 이북인 강동 6주 등.[128]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북인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일대.[129] 특히 구 후백제 영토.[130] 그러나 건국 주체(고구려인)와 이념(고구려 계승), 그리고 역사적 연고권(패서와 평양성)이 분명했던 고려의 정통성과 연속성 덕분에 온전히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정받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건국 주체부터 속말말갈인지 고구려인인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부터 시작해서 예맥계인 고구려인과 숙신계인 말갈족의 인구 구성에 대한 토론이 결론나지 않아 국내외에서 순전히 한국사로서만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을 이용해서 중국인들의 넷상에서의 역사왜곡이 가장 빈번하기도 하다.[131]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발해는 고구려계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주도권을 쥔 지배계층으로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끌어간 나라였다. 속일본기의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발해에서 발해인(예맥계)과 말갈인(숙신계)이 따로 구분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발해인들의 통역을 맡았던 이들이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역관들이었음을 보면, 적어도 말갈인이 아닌 발해인들은 신라인들과 말이 통하는 한국어족 집단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곧바로 지배층의 다수를 포함한 인구의 상당수가 고구려계 국가인 고려에 귀부한 점, 고려의 왕건이 이들을 친척의 나라 혹은 혼인한 나라로 여겼다는 점,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발해의 말왕(末王)이었던 대인선을 구출하기 위해 후당측에 협공을 제의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인과 발해인은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류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계만의 영향력을 앞세울 수도 없는 것이, 발해에서는 인구의 상당을 말갈족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의 고려악(高麗樂)에 포함된 발해 음악의 제목도 다름아닌 신마카(新靺鞨)다. 이는 발해의 건국세력이 비단 고구려계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향유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도 포함되어서 그런 것도 있다.[132] 오늘날 전해지는 나말여초 대의 성씨들만 보아도 대씨(大氏) 외에도 사료상 신라에는 없었고 발해에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지씨(智氏), 곽씨(郭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기씨(奇氏)(이쪽의 경우 1033년 11월 발해인 기질화(奇叱火) 등의 내투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기씨는 이미 후삼국시대 고려에 속한 호족으로 여러 명이 등장한다. 奇라는 한자의 단순한 음가상 고유어나 말갈식 이름을 음차하다 보니 우연히 그 한자가 쓰인 것일 수도 있고 발해에도 이전부터 기씨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나타내는 걸 수도 있다), 오씨(吳氏) 등 여러 성씨들, 하물며 뿌리가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성본(性本)들이 발해계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씨(李氏)와 고씨(高氏)의 경우 일부 본관들이 정황상 발해인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오늘날 남한의 1만 태씨(太氏)들만이 발해의 후손인 것은 실상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히 가장 수가 적었을 왕족만 1만이 넘는다는 걸 나타낸다.[133] 연남생의 묘지명만 봐도 아무리 배신했다지만 본인은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의 증손자인 연비의 묘지명에는 스스로 경조 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 썼을 정도로 세대가 지나면서 차차 동화되는 정황이 나타난다.[134] 자치통감 기준으로 최소 28,200여 호(戶).[135] 중국인들이 활동하는 영문 위키백과나 바이두에서는 약 40만의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이주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낭설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자주 써먹는 역사왜곡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안동도호부의 영문 항목에서 약 78,000여 호(戶)가 끌려갔다고 하는 등 중국인 학자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용하면서 크게 문제시되고 있다. 다만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로 자의든 타의든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대개는 유력한 민호 출신들이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의 상당수가 청나라로 끌려간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조선의 경우에는 지배층 한정으로 본국으로 거의 대부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고구려도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의 사례처럼 당나라를 탈출한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이 말갈이나 신라로 피신했지만 조선과는 달리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 모두가 고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136] 당나라의 문인인 장작(張鷟)이 지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평양성 출신의 절세미녀로 당나라로 끌려가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정일(郭正一)의 종이 된 옥소(玉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곽정일의 독살을 시도하고 그의 전택(田宅)을 벗어나, 연인으로 추정되는 무명의 고구려인,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착마노(捉馬奴)라는 곽정일의 노비(본명이 아니라 마굿간지기라는 뜻)와 함께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나란히 참수당했다고 한다.[137] 국내성, 평양성, 한성.[138] 사실상의 수도권.[139] 다른 게 아니라 서해의 섬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 부흥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육지로 돌아온 뒤 전쟁 중 지나가면서 (아마도 그가 나고 살았을) 평양성 일대를 보고 폐허가 되고 사람이 얼마 안 남았다고 슬퍼한 기록이 적혀있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기 전 시점으로 나당전쟁 이전에 고구려의 각 방어선이 무너지며 전황이 악화되자 이미 상당한 고구려인들이 이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40] 말갈로 탈출한 이들은 발해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41] 이성계도 출전했던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고려군에게 귀부해 고국으로 다시 돌아간 1만여 호(戶)를 제외하면 사실상 나머지 전부라고 보아도 좋다.[142] 천막 만여 개의 규모.[143] 다만 이 정체성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구려인 선조를 두었음을 인식하고 그들을 기린다는 의식에 가까운 것이다. 고구려인 선조들을 두었고 그들의 혈연적, 문화적, 의식적 유산들을 민족적인 차원에서 계승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과는 결이 180도 다르다.[144] 몇몇 진짜(상당부분은 중화사상으로 인한 사칭이고 한국 토성(土姓)이지만 일부분은 진짜 중국에서 온 조상을 두고 있다) 중국계 본관 성씨의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옛 중국계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음과 같은 맥락이다.[145]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 다만 멸망을 전후로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들은 얼마 안 되며 이전부터 교류나 이주 목적으로 왜국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수가 더 많다.[146] 고구려의 신라 구원과 신라의 침공을 계기로 왜국으로 대거 망명한 가야인들. 가장 대규모로 이주했던 경우로 추정된다.[147] 같은 이유로 한반도 북부, 만주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북한의 역사로, 남부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남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도 많다. 요컨대 고대에 별개의 국가였던 북부 왕조와 남부 왕조가 고려시대부터 하나가 되어 통일을 유지하다가 냉전 이후 다시 분리됐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북한인과 남한인이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인지하지 않고 그저 이념과 사상, 정치적 이해에 따라 분리됐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급한 관점일 수도 있다. 애당초 두 국가 전부 헌법상으로 상대국은 국가가 아니라 영토를 강제 점유 중인 괴뢰 세력이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북한이 정통성이 있든 남한이 정통성이 있든 한반도의 역사는 남북 구분 없이 한민족의 역사이다.[148] 사학계에선 직업군인으로 본다. 고구려군 항목 참조.[149]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다.[150] 도올 김용옥 교수처럼 동양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를 비롯한 동양 철학을 굉장히 낮게 평가하고,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이다.[151] 고구려의 후계 국가인 발해의 연도를 넣으면 서기 10세기 초반, 그래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보다는 훨씬 오래 전이다.[152] 출처: 《르네상스의 어둠》,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73~274쪽[153] 사실 이밖에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 많았는데, 로마가 외국인들을 개처럼 멸시해서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배타적인 태도 때문에 망했다는 황당한 내용을 버젓이 집어넣기도 했다.# 서로마의 역사까지만 보아도 1,200년, 동로마까지 합치면 무려 2,000년 동안 존속했던 로마가 외국인들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받아들였는지를 감안한다면, 세계사에 너무나 무지한 소리다.[154] 교명이 고구려대학교였던 시절이 있다.
"이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ㅡ 예군 묘지명 中[101]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이후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 부흥군 세력 등.[102]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한 무리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무리와 더불어 안동도호부에 잔류하던 요동의 고구려인들.[103] 역설적이게도 나말여초에 이르러 신라가 잦은 민란, 천재지변(가뭄, 홍수, 지진 등), 삼림파괴, 그리고 혼란한 정치 상황으로 쇠락하고 인구가 급감할 때, 패서 일대는 비교적 번영을 구가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윤순옥, 황상일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104] 선덕왕 시절에 신라인들을 일부 패서로 사민시킨 바 있지만 원(原)신라 지역이 쇠락하면서 찰산후 박직윤(朴直胤)처럼 패서(浿西)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왕경인(王京人)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경우 현지의 고구려계 주민 사회에 동화되면서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大謨達)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고구려 유민 사회에서도 신라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면서 후에는 박(朴, 백제계지만 반남 박씨와 순천 박씨가 차용 사례의 대표로 들어진다), 김(金, 동주/서흥 김씨) 등의 신라식 성씨들을 차용하는가 하면, 신라식 관등 체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왕건의 아버지였던 패서의 고구려 유민인 왕륭은 사찬을 지냈다. 마찬가지로 왕건의 조상이면서 고구려 유민이었던 자 가운데 스스로 골품제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각간(角干)을 자처한 두은점 등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를 무려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다.[105] 예를 들어 신라의 오소경(五小京) 가운데 하나인 남원소경(南源小京)이 보덕국 유민들을 이치시키면서 설치되었다. 요충지인 소경이니만큼 친신라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민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금마저와 마찬가지로 남원소경의 전신인 고룡군도 백제 유민들의 저항이 거셌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남원소경은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했고, 거문고 명인 등의 예술인들 또한 많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계가 아니라 출셋길이 막히고 지방호족으로 전락한 고구려계 귀족들이 보덕국을 통해 남원소경에도 전수된 고구려의 유산을 거름삼아 문화예술 및 종교 분야로 많이 진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06] 물론 일부는 전주 최씨나 일부 성씨들처럼 뿌리가 북방에 기인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대략 당대쯤부터 시작하면서 중국을 기원으로 삼는 한국 성씨들의 대부분은 고구려, 백제 유민 계열의 성씨라는 견해가 있는데, 유민 출신으로서 보다 유리한 대우를 받기 위해 중국계를 자처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다. 심지어 당시 당나라로 망명한 고위 귀족이었던 고흠덕(高欽德) 가문의 경우도 상나라의 충신 비간의 후손을 자처한 바가 있다.[107] 통일신라 당시 영동 지방은 원(原)신라 지역이 아닌 예맥의 땅 혹은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사실 이쪽 지역은 실직국이라는 독자적인 나라가 있기도 했고 영서 지방의 맥국을 비롯해 기원을 따지면 동예의 후예로 엄연히 고구려의 가까운 친척이긴 해도 약간 다른 정체성 또한 있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에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을 주장한 패서호족과는 별개로 태봉이라는 아예 다른 정체성을 주장한 궁예의 홈그라운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신라 정부에서는 상기했다시피 그냥 예맥인들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옛 영역으로 봤고 궁예가 몰락한 뒤에는 좀 남쪽에 있던 왕순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려에 흡수되었다.[108] 사천 전투와 평양성 전투 당시 전쟁 포로로 유입된 집단 등.[109] 송악 출신의 고구려계 해상 호족인 왕륭의 아들로, 고려도경 등에 따르면 고구려 귀족의 후예다.[110]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세워진 고려는 고구려가 이전에 달성하지 못했던 신라와 백제의 병합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발해 유민들을 짧게는 수십년에서 길게는 이백여년에 걸쳐 대거 수용하면서 삼한 내의 개별적인 종족 정체성을 고구려쪽에 가깝게 단일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고려 후기로 가서는 삼국을 모두 일정하게 계승했다는 의식이 강해지면서 고구려에 편중된 계승 의식은 희석되고 특히 고조선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고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였기에 몽골 제국의 침탈로 인한 우울하고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유구하다는 자존심을 위해 더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조선 또한 역시 평양을 기반으로 했던 왕조였기에 후대에도 삼국 중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가장 강조되었고 그래서 해모수는 아예 시조 단군과 동일한 신격으로서 합쳐지게 된다. 이런 인식에 힘입어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로서 같은 사당에 합사되었다. 또한 고구려 당대에도 이미 단군에게 고조선을 이어받았다는 전설이 있던 기자를 신으로서 섬기기도 했다.[111] 고구려를 정신적으로나 영토적으로나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된 북진 정책, 서경 중시, 강동6주 획득, 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자처하고 멸망 이후에도 이백여년 동안 부흥 운동을 전개한 발해 만큼이나 고려도 끈질기도록 선조들의 유산을 되찾고자 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해 주변국들을 복속했듯이, 고려도 이를 그대로 답습해 전성기 시절 요나라와 북송을 상대로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외교 정책을 취하는 동시에 탐라국, 여진족 부족들, 일본계 호족들 등을 밑으로 두어 조공을 받는 해동천하를 일구었다. 고려의 사신들이 북송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궐에서 요나라 사신을 모욕해도 두 강대국들이 고려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북송의 유명한 시인 소식은 아예 고려인들을 '고구려인 도적'이라는 뜻의 맥적이라 깐 적이 있다.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일대를 호령하던 여진족의 금나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으며 고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와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려 하였을 정도로 고려를 경계하였다.[112] 발해 유민들이 고려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잡았음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주체인 고려의 건국 세력, 즉 신라 출신의 고구려인들에게 합류하는 형식이었다.[113] 혈연 및 정신적인 계승의식은 차치하고서 논하자면, 오늘날 한민족의 전통문화 가운데 전해지는 것들로 상당수는 고구려에서 유래하였다. 김치, 불고기, 젓갈, 된장 등의 식문화가, 온돌, 치성 등의 건축 문화가, 한복 등의 의복 문화가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 악기로는 대표적으로 대가야의 가야금과 함께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거문고가 있으며, 무형(無形) 문화로는 한때 고려 시대 때 무신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수박의 후신으로 씨름 등이 전해진다. 언어의 경우 이병도와 이기문의 학설을 주류로 취급하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현대 한국어가 신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강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이나 제임스 웅거 같은 해외의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논증한 바로 신라어가 아닌 고구려어가 한국어의 뿌리라는 주장이 2013년부터 유력시된다.[114]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여전히 반도 일본어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잖은 상황이기도 하다. 반도 일본어설은 한반도를 원향(原鄕)으로 삼던 고대의 일본어족이 고조선과 부여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족에 의해서 일본 열도로 밀려난 것을 골자로 한다.[115] 여담으로 알다시피 국내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三韓)을 모두 이었다고 해서 정한 대한(大韓)이라는 명칭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가리킬 때 한국인(韓國人)이라고 부르지만, 애초 해외에서의 한민족의 명칭은 신라인(Sillan)도, 백제인(Baekjean)도 아닌 고려인(Korean), 즉 고구려인(高句麗人/高麗人)이다.[116] 주로 속말말갈, 백산말갈 출신 등. 이들은 '퉁구스계'가 아니라 소위 '예맥계 말갈'이다.[117] 대연림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한 유민들.[118] 고모한, 고청명, 곽약사처럼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자리잡은 유민들.[119] 금나라에 합류한 발해인들의 경우, 금나라 황제에게 시집가 황실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금나라, 더 나아가 중국사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해릉양왕의 어머니는 발해 왕족인 대씨(大氏)였으며, 또한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금나라 세종도 어머니가 발해인 추와지(雛訛只)의 딸로 발해계 혈통이었다.[120] 당시 고려는 발해인들의 인심을 얻고 반(反)거란 의식을 고취시기 위해서 거란의 사신들을 유배보내고 만부교에서 낙타들을 굶겨죽인 적이 있었다. 만부교 사건 문서로.[121] 상술했다시피 고구려계라는 의식이 강했던 초기 고려인들은 발해인들을 동족으로 여겼던만큼 출신지가 고려인 이상 따로 발해 출신으로 적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예시가 유충정(劉忠正)이다. 발해 유민으로서 국내(고려)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고영기(高英起), 고적여(高積餘), 양규(楊奎), 지채문(智蔡文) 등과 달리, 유충정은 사료에서 발해 출신이라고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상 유충정 혹은 그의 선대가 당시 발해로 여겨지던 정안국에서 979년 고려로 망명한 수만명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이름을 전한 발해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면서 고위 관직을 신라계 • 백제계와 대등한 조건으로 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우와 조치들은 고려인들이 한국어족 계열의 탐라인을 여겼던 방식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것들이다. 1105년 숙종 시기, 탐라군(耽羅郡)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탐라인들은 발해인과는 달리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 외국인들만이 응시하는 빈공과를 거쳐야 했다. 설령 빈공과를 통과해 중용되었어도 태자 고말로의 아들로 전해지는 고유의 사례처럼 탐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관직을 겸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고유는 심지어 한낱 속국에 불과할지라도 엄연히 자견왕의 혈통을 잇는 왕족 지위에 탐라인 최초로 관직을 얻은 인재였음에도 말이다. 고유가 탐라인 최초로 임용된 1057년 이전에 등장하는 고씨들은 사실상 고구려계 • 발해계로 보아도 무방하다.[122] 934년 한해에 귀부한 세자 대광현의 무리만 해도 그 규모가 수만이 아니라 수만 호(戶)였다.[123] 정몽주의 시(詩)인 발해고성(渤海古城)에서도 발해 유민들의 귀부를 언급하고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渤海昔爲國, 於焉遺址存, 唐家許相襲, 遼氏肆幷呑, 附我全臣庶, 于今有子孫, 遺民那解此, 嘆息住歸軒.'
'먼 옛날 발해가 세워졌던 곳. 아직도 그 자취가 남아있구나. 당에선 왕위 계승 허용했는데, 요것들이 함부로 병탄하였네. 우리의 신하와 백성이 되어, 여지껏 그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거늘. (옛 발해 땅에) 남은 백성들은 이 사실을 어찌 알리오? 탄식하며 수레를 멈춰보노라.'[124] 고려에 귀부했다가 죄를 지어 다시 거란으로 도망친 고모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모한의 출신지인 요동성부터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忽汗城)에 이르기까지 발해 유민들의 귀부는 소수의 거란군이 점유한 일부 지역까지 모두 포함해 일어나고 있었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125] 대표적으로 고려 목종 대의 신료였던 유충정(劉忠正), 여요전쟁 당시 맹활약한 대도수(大道秀), 대회덕(大懷德), 고적여(高積餘) 등이 있었다. 무신정권 때는 권력자이자 간신배로 이름을 남긴 대집성이, 여몽전쟁 때는 고려군의 군관으로 활약한 대금취(大金就) 등이 전해지고 있다.[126] 각자 사병들을 거느리던 호족들이 난립하던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로지 왕건 본인에게만, 즉 고려 왕실에게만 직속으로 신속된 발해 유민들이라는 기반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127] 서경 일대와 그 이북인 강동 6주 등.[128]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북인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일대.[129] 특히 구 후백제 영토.[130] 그러나 건국 주체(고구려인)와 이념(고구려 계승), 그리고 역사적 연고권(패서와 평양성)이 분명했던 고려의 정통성과 연속성 덕분에 온전히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정받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건국 주체부터 속말말갈인지 고구려인인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부터 시작해서 예맥계인 고구려인과 숙신계인 말갈족의 인구 구성에 대한 토론이 결론나지 않아 국내외에서 순전히 한국사로서만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을 이용해서 중국인들의 넷상에서의 역사왜곡이 가장 빈번하기도 하다.[131]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발해는 고구려계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주도권을 쥔 지배계층으로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끌어간 나라였다. 속일본기의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발해에서 발해인(예맥계)과 말갈인(숙신계)이 따로 구분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발해인들의 통역을 맡았던 이들이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역관들이었음을 보면, 적어도 말갈인이 아닌 발해인들은 신라인들과 말이 통하는 한국어족 집단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곧바로 지배층의 다수를 포함한 인구의 상당수가 고구려계 국가인 고려에 귀부한 점, 고려의 왕건이 이들을 친척의 나라 혹은 혼인한 나라로 여겼다는 점,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발해의 말왕(末王)이었던 대인선을 구출하기 위해 후당측에 협공을 제의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인과 발해인은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류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계만의 영향력을 앞세울 수도 없는 것이, 발해에서는 인구의 상당을 말갈족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의 고려악(高麗樂)에 포함된 발해 음악의 제목도 다름아닌 신마카(新靺鞨)다. 이는 발해의 건국세력이 비단 고구려계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향유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도 포함되어서 그런 것도 있다.[132] 오늘날 전해지는 나말여초 대의 성씨들만 보아도 대씨(大氏) 외에도 사료상 신라에는 없었고 발해에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지씨(智氏), 곽씨(郭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기씨(奇氏)(이쪽의 경우 1033년 11월 발해인 기질화(奇叱火) 등의 내투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기씨는 이미 후삼국시대 고려에 속한 호족으로 여러 명이 등장한다. 奇라는 한자의 단순한 음가상 고유어나 말갈식 이름을 음차하다 보니 우연히 그 한자가 쓰인 것일 수도 있고 발해에도 이전부터 기씨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나타내는 걸 수도 있다), 오씨(吳氏) 등 여러 성씨들, 하물며 뿌리가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성본(性本)들이 발해계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씨(李氏)와 고씨(高氏)의 경우 일부 본관들이 정황상 발해인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오늘날 남한의 1만 태씨(太氏)들만이 발해의 후손인 것은 실상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히 가장 수가 적었을 왕족만 1만이 넘는다는 걸 나타낸다.[133] 연남생의 묘지명만 봐도 아무리 배신했다지만 본인은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의 증손자인 연비의 묘지명에는 스스로 경조 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 썼을 정도로 세대가 지나면서 차차 동화되는 정황이 나타난다.[134] 자치통감 기준으로 최소 28,200여 호(戶).[135] 중국인들이 활동하는 영문 위키백과나 바이두에서는 약 40만의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이주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낭설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자주 써먹는 역사왜곡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안동도호부의 영문 항목에서 약 78,000여 호(戶)가 끌려갔다고 하는 등 중국인 학자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용하면서 크게 문제시되고 있다. 다만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로 자의든 타의든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대개는 유력한 민호 출신들이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의 상당수가 청나라로 끌려간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조선의 경우에는 지배층 한정으로 본국으로 거의 대부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고구려도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의 사례처럼 당나라를 탈출한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이 말갈이나 신라로 피신했지만 조선과는 달리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 모두가 고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136] 당나라의 문인인 장작(張鷟)이 지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평양성 출신의 절세미녀로 당나라로 끌려가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정일(郭正一)의 종이 된 옥소(玉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곽정일의 독살을 시도하고 그의 전택(田宅)을 벗어나, 연인으로 추정되는 무명의 고구려인,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착마노(捉馬奴)라는 곽정일의 노비(본명이 아니라 마굿간지기라는 뜻)와 함께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나란히 참수당했다고 한다.[137] 국내성, 평양성, 한성.[138] 사실상의 수도권.[139] 다른 게 아니라 서해의 섬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 부흥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육지로 돌아온 뒤 전쟁 중 지나가면서 (아마도 그가 나고 살았을) 평양성 일대를 보고 폐허가 되고 사람이 얼마 안 남았다고 슬퍼한 기록이 적혀있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기 전 시점으로 나당전쟁 이전에 고구려의 각 방어선이 무너지며 전황이 악화되자 이미 상당한 고구려인들이 이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40] 말갈로 탈출한 이들은 발해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41] 이성계도 출전했던 공민왕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고려군에게 귀부해 고국으로 다시 돌아간 1만여 호(戶)를 제외하면 사실상 나머지 전부라고 보아도 좋다.[142] 천막 만여 개의 규모.[143] 다만 이 정체성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구려인 선조를 두었음을 인식하고 그들을 기린다는 의식에 가까운 것이다. 고구려인 선조들을 두었고 그들의 혈연적, 문화적, 의식적 유산들을 민족적인 차원에서 계승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과는 결이 180도 다르다.[144] 몇몇 진짜(상당부분은 중화사상으로 인한 사칭이고 한국 토성(土姓)이지만 일부분은 진짜 중국에서 온 조상을 두고 있다) 중국계 본관 성씨의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옛 중국계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음과 같은 맥락이다.[145]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 다만 멸망을 전후로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들은 얼마 안 되며 이전부터 교류나 이주 목적으로 왜국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수가 더 많다.[146] 고구려의 신라 구원과 신라의 침공을 계기로 왜국으로 대거 망명한 가야인들. 가장 대규모로 이주했던 경우로 추정된다.[147] 같은 이유로 한반도 북부, 만주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북한의 역사로, 남부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남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도 많다. 요컨대 고대에 별개의 국가였던 북부 왕조와 남부 왕조가 고려시대부터 하나가 되어 통일을 유지하다가 냉전 이후 다시 분리됐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북한인과 남한인이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인지하지 않고 그저 이념과 사상, 정치적 이해에 따라 분리됐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급한 관점일 수도 있다. 애당초 두 국가 전부 헌법상으로 상대국은 국가가 아니라 영토를 강제 점유 중인 괴뢰 세력이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북한이 정통성이 있든 남한이 정통성이 있든 한반도의 역사는 남북 구분 없이 한민족의 역사이다.[148] 사학계에선 직업군인으로 본다. 고구려군 항목 참조.[149]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다.[150] 도올 김용옥 교수처럼 동양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를 비롯한 동양 철학을 굉장히 낮게 평가하고,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이다.[151] 고구려의 후계 국가인 발해의 연도를 넣으면 서기 10세기 초반, 그래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보다는 훨씬 오래 전이다.[152] 출처: 《르네상스의 어둠》,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73~274쪽[153] 사실 이밖에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 많았는데, 로마가 외국인들을 개처럼 멸시해서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배타적인 태도 때문에 망했다는 황당한 내용을 버젓이 집어넣기도 했다.# 서로마의 역사까지만 보아도 1,200년, 동로마까지 합치면 무려 2,000년 동안 존속했던 로마가 외국인들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받아들였는지를 감안한다면, 세계사에 너무나 무지한 소리다.[154] 교명이 고구려대학교였던 시절이 있다.
[155] 이것과 얽힌 웃픈 사연이 바로 임진왜란 초반에 있었는데 조선이 1달만에 자신들의 수도인 한양을 빼앗기는 등 왜군의 북상 속도가 너무 빠르자 명나라는 '고구려의 후예가 이렇게 약할 리가? 왜군이랑 짜고 우릴 치려는 거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고, 최세신(崔世臣)과 임세록(林世祿)을 파견하여 전황을 파악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