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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高句麗 고려 | 高麗 Goguryeo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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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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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7년[2]~서기 668년 9월 21일 (704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고조선 | 현도군[3] 고구려현 | 안동도호부 | 발해 |
부여 원삼국시대 | 소고구려[4] 고구려부흥운동[5] | ||
신라[6] | |||
국호 | <colbgcolor=#fff,#1f2023>졸본부여[7] → 고구려[8] → 고려[9] | ||
위치 | 한반도 중 · 북부, 요동, 만주 일대[10] | ||
역사 | |||
수도 | 졸본성[13]→국내성[14]→평양성[15] | ||
삼경 | 국내성[16] · 평양성 · 한성[17] | ||
종족 | 예맥[18], 한(韓), 말갈[19], 거란, 실위 | ||
언어 |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 ||
문자 | 한자, 구결 | ||
종교 | 토속 종교[20], 불교[21], 도교[22] | ||
정치 체제 | 제가귀족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태왕(太王) | ||
주요 군주 | |||
국성 | 고(高)[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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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는 삼국시대 한국의 고대왕조 세 나라 중 북쪽에 위치했던 군주제 국가이다.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 당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도 발해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국가였다. 신라(992년) 다음으로 긴 기간(704년) 존속한 장수 왕조이기도 하며[24] 같은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전한, 후한에서 오호십육국을 거쳐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국가가 등장하였다.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남만주와 한반도 중남부에 동시에 적극 진출했던 국가이며 중국의 공세에 버틴 기간도 가장 길어 국방력, 국제적 위상 면에서 후대의 인식이 가장 좋은 국가이다. 비단 현대뿐만 아니라 전근대에도 검모잠, 대조영, 궁예, 왕건, 최광수에 이르기까지 삼국 중에서 부활 시도가 가장 잦았던 나라였다.
이 문단은
2. 국호
2.1. 표기
<colbgcolor=#000><colcolor=white> 언어 | 명칭 및 해설 |
한국어 | 고구려(高句麗, Goguryeo) / 고려(高麗, Goryeo) 장수왕 때부터 '고려'라고 고정하여 불렀지만 현대 한국에서는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여전히 '고구려'라고 부른다. |
중국어 | 가오거우리(高句麗, Gāogōulí) / 가오리(高麗, Gāolí)[25] 현대 관화 기준이다. '가오리'가 일반적이며, 굳이 '高句麗'라고 쓸 때는 '句'의 독음이 일반적인 '쥐(jú)'가 아니라 '거우(gōu)'가 된다. 이 독음법은 오로지 고구려라는 단어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중국인들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컴퓨터 입력기에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이 고구려를 '가우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결국 중국어 독음인 것. 그러나 이 독음 역시 결국은 현대 중국어의 독음일 뿐이며, 옛 중국어의 한자 발음은 현대 중국어보다는 오히려 한국식 발음과 상대적으로 더 가깝다.[26] 고구려의 경우 한나라에서 사용한 상고한어로는 Cə.[k]ˤaw [k]ˤ(r)os [r]ˤe-s, 당나라에서 사용한 중고한어로는 kɑu kəu liᴇ로 발음했다. 한글로 비슷하게 표기하자면 각각 "카우크로스레스" 및 "카우커우리에" 정도. 고려의 경우 상고한어로는 Cə.[k]ˤaw [r]ˤe-s (대략 "카우레스"), 중고한어로는 kɑu liᴇ (대략 "카우리에")로 발음했다. |
일본어 | 고쿠리([ruby(高, ruby=こう)][ruby(句, ruby=く)][ruby(麗, ruby=り)], Kōkuri) / 고라이([ruby(高, ruby=こう)][ruby(麗, ruby=らい)], Kōrai) / 고마([ruby(高, ruby=こ)][ruby(麗, ruby=ま)], Koma)[27] 때때로 '高麗', '狛(박)', '駒(구)' 등으로 써 놓고 '코마(こま)'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 |
고대 티베트어 | 케우리(Ke'u-li)[28] |
페르시아어 (11세기) | 마크란(مكران / Makraan, Mikraan)[29] |
고대 돌궐어 | 뵈클리(𐰋𐰇𐰚𐰠𐰃, Bökli)[30] |
그리스어 | 무크리(Moúkri)[31] |
산스크리트어 | 무쿠리(Mukuri)[32], 쿠쿠테스바라(Kukutesvara)[33] |
베트남어 | 고구려(Goguryeo)[34] |
'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 중 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麗縣)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상이하므로, '고구려'는 일대의 토착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마을 또는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 지명으로 추정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본래 오녀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압록강 지안시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흥경(신빈만주족자치구 일대)에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푸순현 일대)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이들도 '고구려'라는 고유명사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 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高離(고리), 高駒驪(고구려), 句麗(구려), 駒驪(구려) 등으로 서사되었는데 주로 高句麗(고구려)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35]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인들은 그냥 이 나라를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이래 700여 년 내내 전부 고구려라고 불렀던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때 국호를 바꿨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36]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句麗)보다는 고려(高麗)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 물론 초창기에도 '구려', '고례'(高禮) 등의 2음절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애초 이름이 '고려'와 비슷한 그 무엇이었고, 앞의 고(高)는 접두어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한자어 그대로 '높다', '숭고하다'는 의미로 붙인 것일 수도 있고 한자 문화권에서 정식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이듯이 또는 그것이 '고'와 발음이 비슷한 당시의 고유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주변의 말갈족들과 부대끼며 살던 역사를 생각해볼 때 만주어로 '나라'를 뜻하는 '구룬'과 연관이 있다는 설도 있다. 비슷한 예로는 신라의 왕호인 '간'과 유목민들의 왕호인 칸의 유사성이 있다.[37]
장수왕 때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조치들이 취해지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 부른다"는 기록에 미루어 고려라는 국호가 성을 뜻하는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는 '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명확한 기록이 아직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또 일각에서는 '뵈클리', '모크란' 등의 표현으로 미루어, '맥'(貊)과 '예'(濊)의 병치형 합성어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뵈클리'가 다시 '뵉(맥)'과 '리(예)'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관련 칼럼. 고구려=높은 성城으로 해석하고 있다. 맥구려는 맥의 성.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궁예가 세운 나라를 통째로 후고구려[38],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건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세한 건 후고구려, 태봉, 고려 문서 참고.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5대 10국 시대와 북송을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등으로 부른다.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o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39]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o로 표기했다.
왕건 고려 땐 句高麗(구고려)[40], 駒驪(구려)[41]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後高麗(후고려)[42]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我高麗(아고려), 즉 우리 고려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43]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이에 발해라는 국호는 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외교용 국호이고 발해의 공식적인 국호는 고려라는 학설도 있다.[44]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2.2. 발음
한편, 당나라 대의 음운학책에는 고울 려(麗)자의 발음으로 '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여말선초 사람들이 직접 참여한 용비어천가나 월인석보에도 麗는 '리'로 발음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처럼 '려' 음으로 바뀐 것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도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었다. 한편, 중국어의 경우에는 오늘날에도 이 글자를 /lí/로 읽는다.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가 다른 문헌에서 '고리(高離)'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나, 한국을 제외한 타국에서 부르는 '코리아(Korea)', '코리(Coree)'아라는 이름, 돌궐에서 뵈클리, 인도에서 무쿠리, 중국에서 가오거우리(가오리), 일본도에서 코우리 등으로 불렀던 것 '본디 발음이 고리였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추정할 수도 있다. 다만, 이는 당대 한국어 발음과는 상관없이 단지 고려를 가리키는 중국어 음가가 각국에 전파된 것으로도 볼 수 있어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고려의 원래 발음이 '고리'라는 주장에 대하여는 무시 못할 반론이 있다. # 조선시대 간행된 용비어천가나 월인석보에 '려'의 음가가 '리'라는 주석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삼강행실도언해》 등 동시대에 간행된 한글 서적에는 고구려와 고려의 이름이 한글로 '고구려', '고려'라고 분명히 적혀있기도 하다. 따라서 ‘고구려’, ‘고려’라는 발음 역시 상당한 역사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전술한 귀납적인 몇 가지 사례만으로 '고구리'라는 음가만이 정당한 발음이라고 제시하고 이를 단정하거나, 나아가 현대에 통용되는 발음까지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 것은 학문적으로는 위험한 일이다.[45]
3. 역사
4. 사회
5. 문화
6. 정치
7. 군사
8. 국력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영명 7년[46]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47]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47]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48]에 세종[49]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50]는 섭라[51]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52]
《위서》 〈열전〉 고구려
'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50]는 섭라[51]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
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52]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53]
《전당문》
《전당문》
초기 고구려는 졸본의 성읍 국가였으며 이후 4세기까지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의 유력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를 거치면서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과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강대한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전성기 때 고구려는 한반도 중·남부의 패자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한편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그 곳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내정에까지 간섭해 사실상의 속국 취급하였으며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말갈 세력 대부분과 요서, 내몽골 일대의 거란 세력 일부를 복속시켜 고구려에 동화시키거나 임의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할만큼 위상이 매우 높았고 세계로 시야를 넓혀도 당대 손가락 안에 넉넉히 들만큼[54]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방의 지역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70여 년 가량 막아내면서 국력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진흥왕 이후 급성장해 백제를 밀어내고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함과 동시에 군사 면에서도 신라 방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좌절로 인해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의 분열이 겹치면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크게 발생했으며 결국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 생산력
- 군사력
- 국제적 위상
9. 영역과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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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영토 | 고구려의 주요 도성 |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누었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었던 5부족(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이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을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했고,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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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000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 본기〉 제5(미천왕)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000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 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太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태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20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太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태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 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광개토대왕)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태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20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太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태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 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太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태왕이 친히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장수왕)
(재위 63년) 9월, 태왕이 친히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쪽으로는 북부여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고 일대의 말갈 및 실위를,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의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왜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충주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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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가지도집에 실린 강역도 |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구당서》
《구당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후한 때에 사방 2,000여 리였다. 위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000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000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후한 때에 사방 2,000여 리였다. 위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000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000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북벌을 지양하고 남진에 몰두했다는 통념과는 다르게 고구려는 전성기 이래로 요하~송화강 선을 국경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거란, 말갈, 실위, 지두우 등을 복속시키거나 군사적인 영향권 안에 두고 중원 세력과 요서의 지배권을 다투면서 동몽골, 북만주, 요서 등지의 진출을 단행하였다.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고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구체적인 비정에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팽창 시도는 역사 기록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말갈 영역 상당부분이 고구려에 포함된 지도[61] |
고구려의 강역은 성곽을 깔아놓고 조밀하게 통치하는 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거점을 두고 통치하는 구역, 세력들의 복속을 통한 간접지배를 통해 통치되는 구역도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상이한 강역 비정이 나오곤 하는데 이 지도는 후기 부여, 말갈이 위치한 연해주와 동북만주 일대에만 신경을 썼지만 흥안령, 동몽골, 요서 등 다른 지역에도 비슷하게 견해 차이로 강역 비정이 달라지곤 한다.
북한의 경우에는 말갈, 거란, 실위 등 북방 민족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통합시켜 매우 방대한 영토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62]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 동부, 북-흑룡강 남쪽 류역, 동북-우쑤리강 류역을 넘어 흑룡강 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 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조선력사》
-《조선력사》
아래 표는 《삼국사기》에서 확인가능한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시대의 성이다.
조리비서 | 북부여성 | |
무자홀 | 절성 | |
초파홀 | 풍부성 | |
구차홀 | 신성/돈성 | 안동도호부 신성주도독부 |
파시홀 | 도성 | |
비달홀 | 대두산성 | |
오열홀 | 요동성 | 안동도호부 요성주도독부 |
옥성 | ||
백석성 | ||
다벌악성 | ||
안십홀 | 안시성/환도성 | 안동도호부 안시주 |
양암성 | 안동도호부 창암주 | |
목저성 | 안동도호부 목저주 | |
수구성 | ||
남소성 | 안동도호부 남소주 | |
감물이홀 | 감물주성 | 안동도호부 가물주도독부 |
능전곡성 | ||
거시압 | 심악성 | |
국내성/위나암성 | ||
초리파리홀 | 설부루성 | |
골시압 | 후악성 | |
자목성 | ||
내물홀 | 연성 | |
면악성 | ||
개서압홀 | 아악성 | |
감미홀 | 취악성 | |
적리홀 | 적리성 | 안동도호부 적리주 |
소시홀 | 목은성 | |
가시달홀 | 이산성 | |
갑홀 | 혈성 | |
절홀 | 은성 | |
소시홀 | 사성 |
10.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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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멸망 이후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이후 유민들은 신라, 발해, 당, 돌궐, 말갈, 왜 등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일부는 고토에 잔류하다가 궁극적으로 고려, 요나라, 금나라 등에 편입되었다.첫째로는 신라에 흡수된 일파이다. 이는 지금의 개성, 장단군, 파주시 등을 비롯한 경기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남부 지역처럼 신라가 영역화해서 그대로 편입된 인구, 멸망 직전 연정토가 바친 고구려 남부의 12성 700호의 주민 3,543명, 그리고 검모잠과 안승을 따라 남하한 집단, 전쟁 포로로 유입된 집단, 670년대 고구려부흥운동이 호로하 전투 패배를 기점으로 실패한 이후 부흥운동을 후원하던 신라로 피신한 집단, 그리고 발해 건국 운동 당시 당나라 영주에서 탈주한 고구려 유민 총 네 집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신라에서 출신지별로 구성한 군부대인 9서당만 해도 고구려인(황금서당), 보덕국인(벽금서당, 적금서당), 말갈인(흑금서당)으로, 넓은 의미의 고구려계를 여러 분류로 구분했는데 신라에 언제 어떻게 유입됐는지에 따라 집단이 구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네 집단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신라가 지배하게 되면서 편입시킨 고구려 영토의 유민들과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이다. 고구려가 멸망하기 직전에 신라가 무탈하게 차지해서 편입시킨 한성(漢城) 일대[65]와 패서(浿西) 지역[66]은 고구려의 심장부이자 내지(內地)로 일컬어지는 인구 밀집지였다. 이러한 이상적인 조건 때문에 고구려 멸망 이후 남부의 부흥운동 세력[67]이 한성과 패서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고, 먼 훗날에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패서 호족들이 태동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직접 통치를 피해 달아난 반당(反唐) 성향의 고구려인들, 고구려 부흥운동의 잔당 세력, 당나라에서 이탈해 신라로 탈출한 무리들까지 합세하면서 임진강 이북은 사실상 고구려 유민들을 주류로 하는 반자치적인 보금자리 혹은 엔클레이브로 남게된다. 한편, 안승과 고연무를 위시로 한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한 일파는 구 백제의 수도권 지역인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우면서 존속하다가 신문왕에 의해 서라벌과 남쪽 변방[68] 등으로 철저하게 사민당한 탓에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상술한 두 부류의 고구려 유민들에 비하면 존재감은 낮지만 영동의 고구려계 유민들도 신라에 편입되면서 존속하다가 훗날 고구려계 호족들이 세운 고려에 합류하였다. 종합해보면, 신라에 흡수된 고구려인들 중 보덕국을 구성했던 이들과 전쟁 포로로서 서라벌로 사민된 이들 외의 대다수는 현재의 임진강 이북인 패서 지역에서 통일신라의 구성원으로 살다가 몇백년 뒤 신라가 흔들릴 때 일어나서 후고구려(태봉)를 세웠고, 이는 왕건[69]이 세운 고려로 이어진다. 발해가 멸망한 뒤로 고구려의 적통은 사실상 신라에 편입되어 훗날 고려를 건국한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서 계승된다.[70][71]
둘째로는 발해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다만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30년 뒤에 건국되었고, 발해 건국의 주체들은 한때 당나라 내지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켰음에도 결과적으로 당은 서쪽 토번의 위협으로 옛 고구려의 땅인 요동을 계속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고, 영주에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은 퉁구스계 말갈족[72]과 함께 탈출, 동쪽으로 이동해 동만주 일대에 발해를 건국한다. 이후 발해가 초기 영역을 중심으로 확장하면서 요동과 동만주 일대에 머물러 있던 옛 고구려 유민들을 흡수하고 주변 말갈족들을 복속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발해인들은 보통 세 갈래로 또다시 갈라져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자신들을 정복한 새로운 열강인 요나라에 귀속된 부류, 한반도의 후삼국을 통일한 남방의 또다른 고구려계 왕조인 고려에 대규모로 이주한 부류, 발해 고토에 잔류해 요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금나라 건국 이후 말갈의 후신인 여진족에 동화된 부류가 그것이다.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 유민들은 성향에 따라서 정체성을 유지한 쪽[73]과 거란족 혹은 여진족에 협조하면서 동화된 쪽[74]으로 또 나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발해인들의 지속적인 저항이 꾸준히 일어나 내부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다만 발해인들이 해당 나라 내에서 전체 인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한인(漢人)들과 더불어 선진 문물의 전수를 통해 요나라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주도한 점은 특기할만 한 점이다. 이들의 대다수는 최종적으로 여진족이나 거란족, 그리고 한족 집단으로의 동화를 거치면서 궁극적으로는 융화된다. 한편, 고려에 투화한 발해 유민들은 요나라나 금나라에 복속된 발해인들과는 달리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질감과 고려 태조 대부터 지속적이고 일관된 포용 정책 덕분에 쉽고 빠르게 고려 사회에 적응하였다. 규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발해 유민들의 수[75]에도 불구하고 신라계나 백제계처럼 부흥을 명분으로 한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고려 내의 발해인들이 일찍이 주류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주로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다시금 개척된 북방 지역[76]과 패서 지역[77]에 정착, 훗날 한민족의 원류에 흡수되어 현대 한국인들의 조상이 된다.
셋째는 일본으로 이주해 간 집단으로, 《신찬성씨록》에서 52개의 고구려계 씨족이 확인된다. 대부분은 일본인에 동화됐지만 코마 후미야스처럼 일부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78][79] 고마 신사 등이 일본에 귀부한 고구려 유민의 흔적이다. 다만 지리적 여건도 여건이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상 위아래로 나당 연합군에게 공격당하는 고구려의 상황 때문에 일본으로 이주한 고구려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멸망을 전후로 적지 않은 수의 백제인[80]과 가야인[81]이 왜국으로 피신했을 때의 규모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넷째로는 당나라 내부로 옮겨진 인구 중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집단으로, 연개소문의 아들들 및 연비 등 그 후손들, 그리고 당나라 군인으로 활동한 고선지나 이정기가 여기에 해당한다. 당나라는 나당전쟁으로 갈라선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지 않아 725년 당현종의 태산 봉선의식 때까지도 고구려와 백제의 구 왕족을 '고려조선왕'과 '백제대방왕'으로 형식상 존치시켜 당나라 경사(장안)에 거주시키는 등 내신지번으로 삼아 이용했다. 이들은 당에서 대를 거듭하고 8~9세기를 거치면서 당나라 사회에 동화, 중국인 집단으로 스며들었다.[82] 당 내지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의 수[83]가 수인만큼 당시 고구려인들의 존재는 당 내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낳았다. 당장 고선지나 이정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이들은 당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당의 팽창과 발전에 기여했고, 반대로 자치적인 항거 세력을 구축해 당 조정에 도전하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처럼 상당수가 당에서 이탈해 발해, 신라, 말갈 등에 투화하였다. 궁극적으로 신라나 발해에 편입되었던 대부분의 고구려인들과 달리 당 내의 고구려인들은 고구려인으로서의, 나아가 고구려의 유예(流裔)로서 최소한의 정체성조차 없는 채로 한족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다섯째로는 요동 및 평양, 평안도 지역에 계속 남은 집단인데 여기는 본래 황해도/평안남도와 함께 고구려의 3경을 이루는 핵심 지역[84] 중 하나였지만 수나라-당나라와 고구려 부흥군, 신라군이 얽히고 설킨 오랜 전쟁과 혼란으로,《신당서》에 의하면 나당전쟁까지 끝난 시점의 요동에는 늙고 빈곤한 자만 남겨두고(弱窶者留安東), 나머지는 당나라 내지로 가능한 이주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이 지역의 고구려계 유민 사회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특히 수도였던 평양성은 황폐화되었다. 거주 인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훗날 고려가 복원하기 전까지 비중은 다소 떨어진다. 평안도 일대의 이들은 고려 왕조에 의해 수복되어 한국인의 원류에 합류하였지만 발해 멸망 당시 고려에 귀부하지 않았던 요동의 잔류 고구려계들은 이민족 치하를 거치며 만주, 중국인 집단에 동화되었다.[85]
여섯째로 몽골 고원 방면 북방 유목민 사회인 돌궐 제국으로 유입된 집단으로 고문간, 고공의 등이 이끌던 집단이 이에 해당한다. 고구려의 강토에서 먼 만큼 그 인구 비중이 낮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후일 고문간과 고공의 모두가 돌궐의 혼란을 틈타 당나라에 망명할 때 규모가 모두 합해서 만여장(萬餘帳)[86]에 달했음을 보면 적어도 일본으로 이주한 무리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동아시아사에 남긴 발자취와 비중은 꽤 크다. 고구려는 만주 지역에서 최초로 700년간 통합된 고대국가를 존속한 나라로 이후 이 지역에 할거, 등장한 갖가지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금나라, 후금, 청나라로 이어지는 여진족, 만주족, 일본 제국#에게도 모델이었다.
12.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13. 관련 사료 목록
고구려 관련 사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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