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5-29 15:17:07

발해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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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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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란국
,926년~936년,

,(요나라괴뢰국),
정안국
,938년~986년,
연파국
,975년~995년,
올야국
,995년~996년,
흥료국
,1029년~1030년,
고욕국
,1115년,
대발해
,1116년,
후발해
,926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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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발해부흥운동.png

1. 개요2. 약사3. 올야국 또는 오사국 후발해4. 길지만 조용한 시작, 정안국5. 거란과 전면으로 맞선 흥료국6. 대발해국의 실패와 금나라의 건국7. 평가8. 발해의 후계 세력들9. 발해 부흥운동에 대한 참고 문헌

1. 개요

渤海復興運動
926년 ~ 1116년
926년 거란족 국가 요나라발해의 부여부와 상경용천부를 타격하며 발해를 붕괴, 멸망시킨 이후 요나라에게 정복당한 만주 일대에서 발해 계통의 반요 세력들과 발해의 후계 왕조들이 여러 번 등장한 것을 일컫는 용어. 이 시기를 한국사로 본다면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자칭 황제국들이 등장한 시기다.

결국 장기간 존속에는 모두 실패했고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대해 별 관심도 없는 편이고 사료도 부족하면서도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연구가 제대로 안 된 시대다. 일단 산발적인 반란이 아닌 나름의 국가 체제를 이룬 듯했던 후발해, 오사국, 정안국부터가 중구난방. 심지어 1998년에 몽골에서는 발해멸망 이후 발해 대씨 왕실과 지배층, 유민의 일부가 서발해(西발해)라는 왕국을 세웠다는 논문도 나왔을 정도였다. 이 문서의 서술 내용도 구체적인 존속 기간 등의 정보를 완전히 믿지 않는 것이 좋다.

2. 약사

한국 국사 교육에서는 여요전쟁 직전 부분에서 정안국을 살짝 언급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교육되지 않는데 이는 사실상 고려후삼국시대 통일과 일부 발해 유민들의 투항을 계기로 고려를 실질적인 한국사의 통합이라고 보려는 역사관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에 투항한 일부 발해 유민을 제외한 나머지 다수의 발해 유민들은 한반도와 관련없는 쪽으로 흘러간 '곁가지' 로서 대다수 거란, 여진족, 몽골,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기에 특별히 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보이며, 따라서 한국 내에서의 인지도도 낮다.

그래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어보면 "엉? 발해도 부흥운동이 있었어?"라는 반응이 많다. 오히려 고구려부흥운동,[1] 백제 부흥운동,[2] 신라부흥운동[3]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만큼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 역사에서 발해 운동이 의미를 가지는 부분은, 삼국시대로 대표되는 고구려백제, 신라의 부흥운동보다도 더 치열하고 더 오랜 기간동안 매우 끈질기게 일어났던 부흥운동이라는 것이다. 부흥운동 사례 가운데 고구려부흥운동 같은 경우 멸망 후 약 30여년만에 대신 고구려의 국통을 잇는 새 왕조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발해부흥운동은 거의 190여 년 동안 지속된 매우 장기적인 투쟁이었다.

3. 올야국 또는 오사국 후발해

발해가 멸망한 926년 이후에도 929년 5월에 고정사(高正詞)가 발해 사신으로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파견되는가 하면, 송대(宋代)에는 ‘오사성발해왕(烏舍城渤海王)’이란 칭호가 공식적으로 송나라에서 사용되어 후발해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오대(五代) 및 송대에 외교 활동을 벌였던 ‘발해’를 ‘후발해(後渤海)’ 또는 ‘오사성발해(烏舍城渤海)’라 부른다. 자료 부족으로 후발해의 건국 연대 및 지속 기간, 그리고 권력 기구 및 통치 세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견해들 모두 후발해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하고 있다.

그 존속 혹은 멸망 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일본의 학자인 와다 키요시(和田 淸)는 후발해의 중심을 압록강으로 보며 후발해의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을 별개로 보고 정안국의 건국 시점인 938년 무렵까지인 10여 년간 존속했다고 보고 있다.

다음으로 또 다른 일본 학자인 히노 카이사부로(日野 開三郞)는 후발해에서 정안국으로 바뀐것이 아니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한 대광현과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4]를 중심으로 한 대인선의 동생,[5] 즉 대광현의 숙부가 있었고 두 세력의 갈등관계에서 대광현이 패배하여 934년 고려로 망명하였고 이후 오사성를 거점으로 한 올야(兀惹) 정권이 후발해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해 남해부의 열씨 정권이 대광현의 공백을 틈타 압록강에 정안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또한 동란국이 요양으로 이동한 까닭도 후발해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때문에 올야정권이 거란(契丹)의 공격으로 붕괴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후발해의 멸망을 1007년으로 보고있다.

발해라는 이름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1003년경에 후발해가 소멸되었다고 보거나 북한의 학자인 박시형은 요사(遼史)에서 1114년경에 올야, 성주, 빈주, 양주등이 여진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으로 그 소멸 시기로 보고 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발해유민들이 살던곳으로 추정된다. 1115년 금나라가 세워졌지만 곧 1116년에 요동에 대발해가 세워졌기 때문에 전혀 가능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박시형 역시 후발해의 중심을 오사성으로 보고 있다.남한의 학자인 이용범은 와다 키요시의 견해를 따르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한국사》에도 후발해를 10여 년간 존속한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으로 한규철은 고려사에 기록된 1050년경을 후발해의 멸망으로 보고있다. 그 이유는 발해 멸망후 많은 발해 유민들이 거란,여진으로 불려왔고 11세기 까지 발해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이들은 발해의 후속 국가소속의 유민들이기 때문이다. 1029년과 1030년 사이에 내투한 발해인들은 흥료국의 실패로 내투한것이고, 1116년 내투한 발해인들은 대발해의 실패로 내투한 이들이다. 그래서 1050년 고려로 내투할때 스스로 발해인이라 한 이들은 후발해인들일 것이고 흥료국, 대발해와 관계없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내투한 시점을 후발해의 멸망으로 보고있다. 그리고 1114년경에 여진에 들어갔다는 올야, 성주, 빈주, 양주등은 후발해의 잔당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 중국 학자인 량위둬(梁玉多)는 올야국과 정안국을 같은 세력으로 보고있다. 올야족이 발해 멸망후 반거란 투쟁으로 정안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송은 정안국을 인정했지만 거란은 이를 인정하지 않아 정안국이 있음에도 올야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올야(정안국)의 중심지는 상경용천부와 가까운 수분하의 중상류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히노 카이사부로, 박시형, 한규철과 같은 다른 학자들과도 비슷한 견해다.

중심지는 후발해·정안국이 모두 자리잡은 압록강 유역으로 비정하기도 하고, 과거 대발해(大渤海)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지역 혹은 옛 부여부(扶餘府)에 가까운 곳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후발해의 발전은 군사·외교적인 면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975년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 온 발해 유민 출신의 장수 연파(燕頗)와 함께 발해의 옛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또한 발해의 옛 장령부(長嶺府) 지역이었던 휘발하(輝發河: 回跋河) 유역에서의 싸움에서도 원군 7천명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979년경에는 정안국의 일부 세력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고정사, 성문각(成文角) 등을 후당에 7차례나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발해와 중국과의 관계는 954년 7월 발해 호족〔酋豪〕 최오사(崔烏斯) 등 30인이 후주(後周)에 귀화했던 기록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의 후발해는 주로 내정과 거란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았던 것 같다.

후발해인들은 주변 국가로 정치적 망명이나 이주도 했다고 생각되는데, 934년 고려에 내투한 대진림(大陳林)과 938년에 내투한 박승(朴昇) 등과 같이『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나는 ‘발해’인들의 상당수도 후발해인일 개연성이 크다.

자세한 내용은 올야국 항목을 참조

4. 길지만 조용한 시작, 정안국

2대 48년으로 발해부흥운동한 국가 중에서는 가장 오래 지속된 나라. 928년에 옛 고구려의 수도였고 발해의 주요도시였던 국내성(國內城) 지역에서 정안국(定安國)이 건국되었다. 정안국도 후발해(後渤海)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세력을 갖췄으나 결국은 요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로 전락, 결국 986년 요가 고려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여요전쟁)을 계획하면서 중간에 끼어 있던 정안국은 장애물 없애는 겸해서 없어지고 만다. 정안국의 멸망과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시점이 맞물리기 때문인지 한국사 교육과정에서는 발해후계국가 중 유일하게 간단히라도 언급되는 나라다. 항목 참조.

5. 거란과 전면으로 맞선 흥료국

세월이 지나 발해 왕족이었던 대연림(大延琳)은 1029년 8월 3일, 요나라의 제2도시인 요동의 동경(東京) 요양부[6]흥료국(興遼國)을 세워 발해부흥운동을 벌였다. 자세한 것들은 항목 참조.

6. 대발해국의 실패와 금나라의 건국

이후 1116년 대원국(大元國)이 세워지는 등 발해부흥운동이 몇 차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거란 반대 운동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좀 성공한 운동으로는 "대발해국"이 있는데, 1116년 1월에 고영창이 8천명으로 동경 요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했으며, 건국 10여일만에 거란 동경도 관할하에 있던 요동의 79주 중 50여주를 지배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금나라와의 지원군 협상에서 금나라가 고영창에게 요동에서 물러날것과 칭제를 물릴것을 요구했지만 황제를 고집하다가 건국 5개월 만에 멸망해버린다... 사실상 금나라의 요구는 요동에서 물러나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것인데 고영창이 들을리가... 같은 요동에서 발흥했던 흥료국과 비교하면 대발해는 흥료국에 비해 국가 체제도 갖춰지지 못했고, 같은 원군이 될수도 있을 고려에게 오히려 자신에게 표를 올리하는 등, 그 한계가 명확했다. 또한 발해가 없어진지 200년이 넘었기 때문에 발해인 스스로의 정체성도 희미해졌고, 때문에 발해부흥운동을 진압하는데 앞장선 이들도 발해유민출신들이었다. 즉 대발해에는 국제적 안목과 발해유민들을 통합할 리더십이 부족했던 것이다.

발해부흥운동은 주로 요나라 시기에 지속되다가 말갈이 바탕이 된 금나라의 건국과 함께 이들이 발해 유민들을 포용 / 이주하면서 사라졌다고 보는 게 통설이다. 특히 마지막 부흥운동인 대원국이 요말금초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초기의 금은 발해 유민을 포용하였다. 이는 완안아골타가 "발해와는 본시 동일한 집안"이라고 말한 데서 근거하나, 이런 포용은 금태조 때만 있었다. 더구나 대발해국 운동이 터져버려서(...) 결국 금은 건국시에는 발해 유민을 북송 공격군의 선봉으로 활용하다가[7] 이후 맹안모극 집단에서 배제하여 거란, 여진과 달리 한족과 동일 취급하고 산동으로 내몰면서(1141년, 금희종 신유년) 발해 유민은 차츰 정체성이 사라지게 된다.[8][9] 특히 금세종 때는 한족과 함께 발해인의 형사취수를 금지하고 삼년상을 강요하며 양자 제도를 불허하는 등 철저하게 한족 취급했다. 그리고 몇백 년 뒤에는 자기네 후손그짝이다.

당시의 상황은 당대 사료인 송막기문에 꽤 자세히 나와있다.

허나 이때 죄다 한족에 동화된 것만은 아니라서 금나라가 멸망한 뒤로 심왕 자리에 고려 왕족이 내정되었다는 기록이나 요동에 고려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 그래도 조선초기까지도 요동에 예맥인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많이 살았다는것을 추론할수있는데 결과적으로 고려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요동 복속에 실패하면서 그 자리를 명나라가 차지하면서 부질없이 끝나게 되었고, 결국 랴오닝 성 일대는 현재까지도 중국의 영토로 남아있게 되었다.

7. 평가

발해부흥운동을 마지막으로, 부여 - 고구려 - 발해라는 굵직한 줄기로 이어지는 북방 예맥계의 역사가 단절되고 만다.[10][11] 그러나 그 기간 자체는 매우 길고 끈질겼는데, 그 원동력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피지배층 다수의 말갈인과 소수의 지배층 고구려인이 지배하는 발해의 사회로는 이러한 발해부흥운동은 도저히 해석이 안된다. 요사에 기록된 발해인과 말갈인이 원수지간이라는 말에서 여기서 지칭하는 말갈인들은, 일찍이 발해 건국의 주체로 참여한 속말부와 백산부 말갈이 아니라 선왕대에 새로 편입된 흑수부와 기타 연해주의 퉁구스 계열 말갈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요즘 학계에서는 피지배층 대다수가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학자는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차라리 대조영의 출신 성분에 관한 논란이 있을지언정, 피지배층 상당수도 기존에 만주 지역에 살던 고구려인으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사람들이 자꾸 후대의 관점으로 이 시기를 바라봐서 착각과 오류가 생기는 것인데, 발해의 수도 지역인 두만강 일대는 고구려 시대 때부터 천년 넘게 예맥 계통의 민족들 즉 한국인의 조상들이 살던 곳이다. 초기 고구려와 부여 판도를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물론 두만강 북쪽의 훈춘 즉 지금의 연변 지역은 말갈인들도 많이 살았지만, 이곳에서 거주하던 백산부 말갈은 일찌감치 고구려인으로 편입되었고 서쪽의 길림성에 거주하던 속말부 말갈은 심지어 자신들이 고구려 계승을 내세우며 발해 건국의 주체 세력이 될 만큼 이미 뼛속까지 고구려인이었다. 즉, 발해의 수도 지역 두만강과 그 일대는 발해 전성기 시절에도 이미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계 주민들이 다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피지배층으로서의 말갈인들'은 아마 선왕 대에 새로 편입된 연해주와 아무르강 일대의 퉁구스 계열 말갈인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게다가 위의 금나라 시절의 사료를 확인하면 애초에 금나라의 여진족들은 발해인들을 이질적인 집단으로 취급하며 차별하였다. 만약 발해의 피지배층 상당수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금나라의 여진족과 동류의 집단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발해 주민 상당수는 엄연히 고구려인의 후손이었기에 이토록 길고 끈질긴 항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끈질기고도 긴 항전을 계속했는데도 실패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 첫째로는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결국 한때 같은 식구였던 여진족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인데, 이미 선왕 시절의 복속으로 서로 원한 관계가 깊이 지속되었다는 것이 기록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여진족들은 당연히 금나라의 조상인 흑수부 말갈 계열의 여진일 것이다.
  • 둘째로는 각 부흥운동 세력간의 통합적인 전선 구축이 안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지도에서도 보듯 이곳저곳에서 부흥운동이 시간차로 일어났지만 결국엔 통합되지 못하고 와해되고 만다. 고구려 부흥운동 당시 대조영과 같은 통합적 리더십을 가진 걸출한 인물이 필요했을 텐데 아마 그런 인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셋째로는 위의 이유와 연계되는 설명인데, 남쪽에서 같은 동류 집단인 고려가 지속적으로 발해 유민들을 흡수한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던 곳을 떠나 다른곳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재산이 풍부한 귀족층들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고려가 흡수한 발해인들은 아마 상당수가 발해의 엘리트 계층들 즉 핵심 인적 자원들이었을 것이며, 위에서 발해부흥운동이 대조영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지 못한 것도 고려로 이미 유능한 인재풀들이 많이 유출되었던 게 원인일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실제로 내부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 식의 분석에 그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발해부흥운동 역시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안이니만큼 앞으로 관심있게 지켜볼 만한 사항이다.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여진족 부흥의 실마리를 찾을 커다란 단서가 될 수도 있는 만큼, 그 역사적 의미가 깊다. 그리고 동족인 이들을 지원하지 않은 고려와 왕건에의 비판은 역사를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다. 당시 왕건이나 고려는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왕건이 죽을 뻔했다. 그리고 왕건 사후에도 혜종 정종 등 후대왕들이 5년을 못 넘기고 죄다 요절했던 데다가 왕건의 호족우대정책으로 왕권이 불안정했고 당시 중앙제도나 군사제도 등이 정비되지 않아 군사파병은 어림도 없었다. 애초에 고려에게 지원만 바란 이들 나라가 문제였다 그나마 고려는 4대왕인 광종이 호족들을 정리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동족이라 마음이 걸렸는지 흥료국을 지원하거나 정안국과 통교하고 이들과 연합 요나라에 대해 군사공격을 감행하는 등 어느 정도는 할 도리를 했다. 게다가 이들 나라를 신경쓰느라 고려는 요나라와 3차례의 치열한 전쟁을 해야 했다.

8. 발해의 후계 세력들

국명존속 기간비고
동란국(926년 ~ 936년)1대 10년(혹은 6년)[12]
후발해(926년 ~ ?년)?대 ?년
정안국(938년 ~ 986년)2대 48년
연파국(975년 ~ 995년)1대 20년[13]
올야국(995년 ~ 996년)2대 1년[14]
흥료국(1029년 ~ 1030년)1대 1년
고욕국(1115년 2월 ~ 7월)1대 4개월[15]
대발해(대원국)(1116년 1월 ~ 5월)1대 4개월

9. 발해 부흥운동에 대한 참고 문헌



[1] 검모잠, 고연무, 고안승, 걸걸중상, 대조영 등이 주도.[2] 부여풍, 흑치상지, 복신, 지수신 등이 주도.[3] 신라 왕조가 멸망한 이후 고려 시대 초, 중기 때 옛 신라 지역인 경상도 일대에서 신라 부흥을 내건 몇번의 반란, 봉기들(동경민란, 김사미, 효심의 난 등)이 존재했다. 일각에서는 신라 부흥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일으킨 민란이란 반론이 있으나, 어차피 모든 부흥운동의 대부분은 멸망당한 옛 왕조의 유민, 백성들이 일으키는 민란에서 시작한다는 전제를 대단히 무시하는 일방적 견해일 뿐이다.[4] 히노 카이사부로, 박시현, 이용범, 한규철 같은 학자들은 발해 멸망후 이곳을 오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5]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6] 당연히 일본 도쿄가 아니다.[7] 이는 여진이 거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랬다. 여진인과 발해인이 서로 원수였기 때문이다(거란국지 1116년 기사).[8] 물론 금 건국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듣보잡이긴 하지만 딱 한번 일어나기는 했다. 발해의 옛 정리부에서 항쟁을 일으킨 적이 있다.[9] 그리고 발해 후손들의 경우에는 금나라에서 황후가 된 경우도 있고, 해릉양왕은 어머니가 대씨였다.[10] 하지만 압록강 이남의 남방 예맥계는 고구려, 백제를 통해 고려로 역사가 이어지게 되므로 예맥계 자체의 역사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예맥과 한(韓)의 구분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뚜렷하지 않으며 현재 사학계에서는 한인(韓人)은 한반도 남부에서 토착화된 예맥인이라고 보고 있다.[11] 발해가 건국된 이후 흑수 말갈을 제외한 다른 말갈족들을 거의 전부 정복하면서 통합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발해가 멸망할 시기쯤 되면 여진인과 발해인이 서로 원수지간 이라는 기록은 많이 있다. 더군다나 금나라를 세운 후 여진족들은 발해인을 한족 취급하며 산동반도로 강제 이주를 자행했고, 이후 한족보다 못한 취급을 하면서 엄연히 자신들과는 구분된 인식을 보여주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분이 된 이유는 언어와 생활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았는데, 여진인은 수렵을 주 생활수단으로 삼았으나 고구려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예맥인의 주 생활수단은 농경이었다.[12] 요의 괴뢰국이라는게 통설이다.[13] 燕頗國. 연파라는 장수가 부여부에서 항거를 일으켰다. 그 후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서 반란을 하다가 995년 올야에 도망친 뒤 올야와 함께 거란에게 저항했다고 한다.[14] 兀惹國. 1년간 지속되었지만 2대까지 갔다. 발해계 귀족 오소경이 발해의 고도가 위치한 상경용천부 주변에서 일어났다. 오사성 발해국 혹은 오사국이라고도 불린다.[15] 古欲國. 다만 한국사로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 발해부흥운동이고 고욕을 비롯한 발해 유민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발해의 옛 땅이 아닌 거란의 한 주에 일어났던 반란이었기 때문이다.[16] 김육불(金毓黻) 저, 화문서국(華文書局),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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