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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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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초기2.2. 중기2.3. 후기
2.3.1. 고구려ㆍ백제의 신라 침공
2.4. 종결
3. 관련 사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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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백제의 관계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역사

2.1. 초기

백제의 창업군주인 온조왕동명성왕의 관계는 여러 전승이 있다. 일단 가장 시기가 앞선 한성백제 근처 고구려인들의 고고학적 자료는 2세기 후반이 한계고, 따라서 이들의 남하 시기는 최대한 상한을 올려보아도 2세기 중반이 되기에 정말로 주몽의 아들 온조가 백제를 건국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 누구도 확답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1] 어쨌든, 백제 왕실의 주류 집단이 고구려에서 왔음은 학계는 물론이고 기초적인 역사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두 나라는 백제가 강성해서 서로 각기 낙랑 및 대방의 영역을 나눠가져 국경을 맞대게 된 4세기까진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일단 한사군이 막고 있었으며, 옥저동예도 위치해 건국 초기 압록강과 두만강 위쪽에 있던 고구려가 한반도 중심부에 있던 백제와 교류할 수 없었다. 백제 2대 국왕 다루왕부터 8대 국왕 고이왕까지 직접적인 교류, 충돌은 없고,[2] 제9대 국왕 책계왕 때부터 시작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구원을 요청해[3]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온조왕 이후 접점이 없던 두 나라가 맞붙은 첫번째 기록이다. 이 사건 17년 후, 고구려 미천왕이 한사군 중 한반도 내에 남아았던 낙랑군대방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면서 두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갈등이 시작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 관계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두 나라가 뿌리가 같은 게 아니라 실은 백제 건국 집단이 고구려에서 나온 집단임이 고고학으로든 문헌학으로든 분명함과 백제의 공식 주장이 이와는 다르게 백제 건국 집단은 부여에서 나온 집단이라는 것이다. 한편 백제의 공식 주장에 고구려가 시종일관 철저하게 무시한 것 또한 의미가 크다. 두 나라는 이런 연원이 가까운 관계 탓에, 오히려 바로 그 이유로 애초부터 가깝게 지내기는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2.2. 중기

백제의 최전성기인 제13대 국왕 근초고왕 때, 두 나라는 전쟁을 시작한다. 고구려는 북서쪽인 요동 지방의 전연이 너무 강해 그쪽으론 영토를 넓힐 수 없어 떠오르는 백제를 공격하기로 한다. 고국원왕은 친히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치양을 기습 점령한다. 이후 벌어진 전투가 치양 전투로, 양 국간의 직접적인 물리적 충돌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전투이다. 이때, 고구려를 배신한 사기의 말을 듣고 백제는 붉은 깃발의 군대를 집중 타격했고, 해당 부대가 정예군이었는지 고구려군은 대패한다.

2년 뒤, 두 나라는 평양성에서 다시 맞붙는다. 이 전투를 평양성 전투라 일컫는다. 백제는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지만, 고국원왕이 백제의 눈 먼 화살에 눈을 맞아 죽는 등 엄청난 전과를 올렸으며, 이 전투로 대동강 주변까지 영향력이 미치게 되지만, 고구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피해 복구에 열중하게 된다. 이 전투 후에도 두 나라는 국경에서 계속 싸운다.

다만 고구려는 백제가 막 고대 국가로 발돋움해서 목지국을 쓰러뜨리던 3세기 후반 당시 비록 오와 촉한에게 전력을 분산했다한들 한반도 국가들 입장에서 볼 때는 엄청나게 강대한 위나라와 무려 야전에서 정면대결을 펼치던 강국이었고, 군사 동원력도 벌써 그때부터 25000명 정도는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한편 같은 시기의 백제는 적어도 마한 내에선 가장 강대한 국가였고 백제의 중심지였던 경기도 자체는 고구려가 장악한 함경도 및 남만주보다 인구부양력은 좋다고 볼 순 있었어도, 직접 중원 제국을 상대하며 국가 체제를 일신해가던 고구려보다 국가 운영 능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국력이 앞설 수는 없었다. 고국원왕이 어쩐지 암군 이미지가 있지만 고구려는 그 시기 즈음에서 체제를 한 번 더 일신하였었는데 마침 연나라에게 불운한 패배를 당해 국력이 깎인 상태였다. 즉, 근초고왕 당시 백제는 순간 침체기에 빠진 불운한 고구려를 상대해서 어쩌다 이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물론 근초고왕이 명군이어서 백제가 당시 꽤나 국력 신장을 하였으나, 여전히 고구려가 백제보다는 종합적인 국력에서 앞에 있었던 것.

결국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 진사왕의 백제는 포텐셜이 터진 고구려를 당해내기 어려워진다.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 북부를 잃었고, 고구려에게 연패하여 권위가 크게 떨어지고 만다. 이에 진사왕은 조카 아신에게 암살당하며, 고구려전 실패를 기회로 숙부에게서 잃었던 왕위를 되찾은 아신왕은 나름 의욕적으로 고구려에게 도전했지만, 여러 차례 패배하여 위례성까지 포위당했다. 이 당시 백제는 아예 인천까지 잃는 것에 더해, 고이왕 이래로 개척하여 근초고왕 때 확보했던 강원도 영서 지역과 충북까지 고구려에게 다 빼앗긴 초유의 상태였고, 아신왕은 별 수 없이 백제사 최초로 외국 군주에게 조건부 항복을 하는 굴욕을 당한다.

하지만 이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당한 약속 위반과 아신왕의 복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일단 위기를 넘긴 아신왕은 고구려와의 약속을 왜와 가야로부터 대규모 용병 혹은 지원군을 받아 북쪽 국경을 어떻게든 북쪽으로 밀려올려 경기도와 개성 일대까지 영역은 수복한다. 치세 말기에 간신히 체면 치레는 한 셈이었으나 이 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백제측에게 극심한 노여움을 품었을 개연성은 크며, 그럼에도 백제는 강원, 충북 일대를 끝내 되찾지 못했다. 이후 신라가 이 덕택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면서 고구려의 선진문물을 흡수해, 그렇지 않아도 진한 일대를 제패해 강해진 시점에서 한층 더 국력을 끌어올리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 때,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후 21대 국왕 개로왕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쳐달라 하다가 3년 뒤,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탈출하다 참수된다. 장수왕이 죽은 뒤, 고구려는 나제동맹가야의 연합 격퇴에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거의 10년 이상 같은 지역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흥군주 무령왕의 등장에 한성을 백제에게 잃게 되었다. 개성까지 백제가 밀고 갔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일단 이 시기에 경기도 일대까지 백제가 혼자 힘으로 수복한 건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도 백제는 정작 전략적으로 중요한 영서 일대 및 충북 일대는 되찾지 못했고, 529년 오곡원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대패하며 어렵게 수복한 한성 일대를 또 다시 잃게 된다.

2.3. 후기

나제동맹은 한강 지역 공격 이후 깨졌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백제는 양나라수나라에게 고구려를 협공하자고 제안까지 했고, 고구려는 성왕 사후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백제로 쳐들어왔다.

2.3.1. 고구려ㆍ백제의 신라 침공

7세기, 더 구체적으로는 642년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막기 위해 세워졌다는 동맹으로, 그 증거는 구당서 백제전에 있으나, 의심의 여지가 있다.

642년 의자왕은 신라를 치는 동시에 고구려에겐 화친을 제안했고, 당항성을 공격해 신라의 사신이 당에서 원조를 구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나당 중 한 나라가 자신의 나라를 공격하면, 여제 중 한 나라는 나당 중 다른 나라를 공격해 앞뒤로 전쟁을 벌이는 일을 없게 하자며 맺었다고 한다. 또한, 여제동맹은 백제가 망한 660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결정적인 사건이 655년에 백제ㆍ고구려ㆍ말갈의 신라 합동 공격이다.

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에 도움을 청하러 고구려에 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백제ㆍ고구려가 동맹을 맺었다면, 김춘추는 청병 시도조차 못 했을 것이다.

물론 김춘추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다 실패한 후 여제동맹이 맺어졌을 가능성 또한 있으며 설령 동맹을 맺지 않았다고 해도 당시 백제의 영토가 신라에 감싸져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우지 않고 신라와 싸우는 상황이었던 건 같다.

학계는 신라가 나당동맹을 빨리 이루려고 조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당서•신당서•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대당 외교 문서 요약 속에서 발견될 뿐이다.

2.4. 종결

삼국 중 백제가 660년 신라와 당의 공격으로 멸망하며 관계가 끊어졌고, 고구려 역시 8년 뒤 두 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며 두 나라의 관계는 끊어졌다. 하지만 약 240년 후 고구려와 백제는 통일신라의 영역 내에서 부활하게 되며, 부활한 두 나라는 한반도의 주인 자리를 놓고 다시 한 번 격돌하면서 오히려 그전 선배들에 비해 더욱 불꽃 튀는 대결을 짧은 시기 안에 치열하게 벌이게 된다.

한편 패서 호족들은 옛 백제 지역과는 달리 신라 왕실에게 그닥 반감이 있진 않았고, 백제에 대한 악감정 또한 고(구)려도 백제도 일단 망한 지 이백 여 년이 넘은 시점에선 의미 없는 얘기였으나, 고구려 VS 백제 간의 악감정은 뜻하지 않게 궁예가 부활시키게 된다. 주로 청주 지역 호족들을 친위 세력으로 낀 궁예가 패서 호족들과의 약속을 깨고 국호를 멋대로 마진으로, 태봉으로 바꾸더니, 옛 백제 지역 출신 호족들 참소로 패서 호족들을 마구 숙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전까진 백제에 대해 별로 감정이 없었던 패서 호족들이 백제 지역 호족들에게 심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왕건은 이를 최대한 막아보려 하였으나 억울하게 당한 패서 호족들의 기세가 워낙 험악하여 백제계 호족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고, 이에 안 되겠다 싶은 백제계 호족들이 후백제로 투항하면서 고구려 VS 백제의 악감정은 실로 오랜만에 부활하게 된다.

그렇게 350여 년 만에 재대결이 펼쳐져 고(구)려가 승리하여 (후)백제의 수도에까지 고려군이 난입하게 되었고, (후)백제의 모든 왕실 구성원은 고(구)려의 손에 떨어지면서 두 나라의 오랜 악연은 마침내 끝을 보게 된다.

3. 관련 사건

4. 관련 문서


[1] 실제로 남하한 백제의 창건자가 온조가 아닌 온조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창건자가 온조는 맞는데 실제로는 2세기 고구려의 방계 왕족이었거나, 아니면 실제로 온조가 기원전 1세기 삼국사기 기년대로 남하했는데 그러한 고고학적 흔적이 현재 모두 멸실되었거나 등등[2] 그나마 낙랑태수가 위나라의 장군들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서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정도?[3] 삼국사기에 따르면 책계왕의 아내는 대방왕의 딸 보과였다고 한다. 일단 대방군으로 추측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