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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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고구려와 당나라는 618년 당나라의 수립부터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관계가 있었다.2. 역사
2.1. 초반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벌어진 4차례의 전쟁 이후 618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섰다. 고구려는 619년과 621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622년에는 수나라 출신 포로들을 일부 모아 당나라로 송환하였다. 624년, 당나라의 고조 이연은 당나라가 스스로 존대하면 고구려가 칭신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대신들에게 물었으나, 배구와 온언박은 당나라는 태양과 같고 고구려는 뭇별과 같으므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반박하였다. 당고조의 치세 동안 고구려와 당나라는 겉으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2.2. 중반
그러나 626년에 발생한 현무문의 변으로 태종이 즉위한 이후, 신라와 백제에서 각각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 입조하려고 하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다고 항의하였다. 태종은 원외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를 고구려로 파견하여 고구려와 신라, 백제에게 화해를 권하였고 삼국 사이의 문제에 관여하였다. 동돌궐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영류왕은 국가기밀에 해당되는 고구려의 봉역도를 태종에게 바쳤고, 태종은 장손사(長孫師)를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쌓은 경관을 파괴하였다. 당나라의 태도가 달라지자, 당나라의 행동을 두려워한 영류왕은 천리장성의 축조를 지시하였고 당나라와의 사이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영류왕은 640년에 왕태자인 고환권을 파견하여 정세를 살폈다. 한편 당나라에서도 641년 진대덕을 보내 고구려의 정세를 살폈다.642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고구려 정벌의 명분을 얻었고 상리현장을 고구려에 파견하여 신라 공격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연개소문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신라가 빼앗은 고구려의 땅 500리를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대답하면서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선언하였다.
태종이 고구려 정벌을 선언할 때 대신인 장량은 여러 차례 고구려 정벌에 대해 간언을 했으나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수행을 자청하며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고 해로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한편 이세적은 태종에 의해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어 요동으로 진군하였고, 태종 또한 후속부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진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