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대외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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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2. 역사적 관계
2.1. 성립
668년에 고구려가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뒤, 수많은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와 신라로 끌려갔다. 신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땅이 된 고구려 영토에 정착했다. 698년에 대조영이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이기면서 동모산에서 발해 건국을 선포했다.2.2. 초반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당나라와는 갈등이 있었다. 2대 국왕 무왕때부터 발해가 영토를 확장하자 당나라는 발해와 갈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발해 왕족 대문예가 당나라로 넘어가자 발해측은 대문예를 발해로 돌려주라고 요구했다. 당나라가 발해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양국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서 마도산 전투가 일어났고 당나라는 신라에도 출병을 요청했다. 신라는 폭설로 인해 발해 출병을 중단했다. 발해 3대 국왕 문왕이 즉위한 뒤, 당나라는 발해와 관계를 개선했다. 문왕때에는 당나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였고 교역이 자주 이뤄졌다.2.3. 중반
발해와 당나라는 문왕때부터 관계가 개선되면서 여러 문물들을 받아들였다. 빈공과에 급제하는 발해인들이 늘어났고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불리기도 했다.[1] 발해 10대 국왕 선왕때에는 흑수말갈의 영토가 발해의 영토로 편입되고 요동 일대는 발해의 영토가 되었다. 발해에 대한 기록이 구당서, 신당서 등에도 기록되었다.[2]발해와 당나라는 조공도를 통해 교역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