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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東牟山
발해의 첫 수도. 약 32년(698년 ~ 730년대) 기간 동안 발해의 수도였다.2. 기록
...때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해서 도로가 막히게 되어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조영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의 계루부가 있던 땅을 차지하여 동모산(東牟山)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되었다.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絕,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絕,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高麗滅,率衆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里,南比新羅,以泥河爲境,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高麗逋殘稍歸之。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高麗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씨(大氏)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 바다, 서쪽은 거란(契丹)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신당서』 북적열전 발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高麗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씨(大氏)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 바다, 서쪽은 거란(契丹)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신당서』 북적열전 발해
武后時,契丹攻北邊,高麗別種大乞乞仲象與靺鞨酋長乞四比羽走遼東,分王高麗故地,武后遣將擊殺乞四比羽,而乞乞仲象亦病死。仲象子祚榮立,因并有比羽之眾,其眾四十萬人,據挹婁,臣于唐。
측천무후(武后) 때에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이진충의 난),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하니, 무후가 장수를 파견하여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고, 걸걸중상은 병들어 죽었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이 즉위하여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서 읍루(挹婁)에 웅거하며 당의 신하가 되었다.
『신오대사』 발해
측천무후(武后) 때에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이진충의 난),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하니, 무후가 장수를 파견하여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고, 걸걸중상은 병들어 죽었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이 즉위하여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서 읍루(挹婁)에 웅거하며 당의 신하가 되었다.
『신오대사』 발해
조영은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동모산에 근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祚榮遂帥其衆東據東牟山, 築城居之.
『자치통감』 개원원년(開元元年:713년) 기사
祚榮遂帥其衆東據東牟山, 築城居之.
『자치통감』 개원원년(開元元年:713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