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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儉城
1. 개요
고조선의 도성. 고조선의 본래 수도는 아사달이라고 전해지는데 기원전 3세기 경 고조선-연 전쟁에서 연에게 참패하고 중심지를 옮긴 후의 도성이다. 기원전 194년 위만이 반정으로 준왕을 몰아 내 위만조선이 된 후, 기원전 108년 왕검성 전투에서 한(漢)나라의 군대에 포위되어 수개월 동안의 항전 끝에 결국 투항하여 고조선은 멸망했다. 기록에 따라서는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한다.왕검성이라는 이름은 왕검을 임금이라는 말로 해석해 ‘임금의 성’ 즉, 도읍이라는 뜻의 일반 명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검성이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의 명사라면 그 지역이 어디인지는 의문이 된다.
2. 역사
왕검성이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관련 유물 역시 불분명한지라 역사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아사달과 장당경을 거쳐서 왕검성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는데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연나라의 소왕이 진개를 보내 고조선을 격파한 기원전 3세기 무렵에 고조선은 요동 지방을 상실하여 기존의 중심지인 요동 지역에서 평양 일대로 수도를 옮겼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이후 준왕 시기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이 국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세력을 키워서 위만의 정변을 일으키고 왕위를 빼앗아 왕검성에 도읍하였다고 반고의 이십사사 조선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다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왕검성 전투를 치르며 버텼지만 내부 분열로 우거왕이 암살되었다. 왕이 죽은 후에도 성기 장군이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성기마저 왕자 장항과 니계상 삼에 의해 암살되면서 결국 왕검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설치하는데 왕검성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주장을 따를 경우 군현의 중심인 왕검성 일대에 낙랑군이 자리를 잡은 것이 된다.
3. 위치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지금의 평양지역이라는 설, 지금의 요동지역이라는 설이 있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다만 학계의 주류설은 평양설이고, 요동설이나 기타 지역설은 소수설이다.3.1. 평양설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설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왕검성이 현재의 평양 지방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을 따른다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수도로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평양에서 도성이라고 입증할만한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대동강 남안에서 낙랑토성이 발굴되어 낙랑군의 치소였음은 확실시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고조선 시대의 유물,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동강 북안의 청암리 토성을 왕검성으로 보는 견해가 제출되었는데, 청암리 토성에서 고조선 시기의 유물이 발견되었지만 그곳이 왕검성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다만 한사군 중에서도 으뜸이였던 낙랑의 치소가 평양이고 그 당시 평양의 지명이 고조선에서 유래한 조선현이라는 점, 그리고 고려시대 이후 평양이 단군의 도읍으로 전승된 점을 미루어 봤을때 왕검성이 평양이 아닐까 하고 추정되고 있다.[1] 평양이 이미 10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주요 도시의 자리를 차지한지라 도시개발이 될대로 되었고 북한 고고학계의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향후 성과가 별로 밝지는 않다.
여담으로 왕검성의 위치가 평양인지의 여부와는 관련이 없지만 평양에 단군릉이 있는데[2] 북한 당국에서 본래 평이했던 무덤을 피라미드 형태로 개건했다.
3.2. 요동설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천도 전 중심지가 요동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평양으로 천도 없이 멸망할 때까지 쭉 요동이 도읍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왕검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를 인용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기의 왕험성(왕검성)으로 비정해 단군조선부터 위만조선의 멸망까지 도읍이 계속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고고학자 정인성은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에 대해 반박하며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위치를 랴오둥 반도 즉,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며 “위만조선 왕검성은 오히려 요동 반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군현이 설치되면서 대동강 유역권으로 옮겨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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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했듯이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는 논란이 많아 평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5. 여담
과거 KBS 1TV에서 방영한 역사 교양 프로그램인 역사스페셜에서 중국과 북한 현지 답사를 통해 제작한 방송이 있었다.해당 영상사적 제446호에 등재된 영월 정양산성의 이칭도 왕검성이다. 이 산성이 고조선 시대의 왕검성과 관련이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한자까지 王儉城으로 같은 걸로 보아 이름을 따왔을 가능성은 있다.
[1] 물론 서한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의 영토 중 다른 곳에 낙랑군의 치소를 만들고 옛 조선의 이름을 따 '조선현'이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있으나, 상식적으로 예전에 이미 중심지이던 곳에 치소를 설치하고 옛 국명을 유지시켰을 개연성이 더 높다.[2] 남한학계에서는 고구려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일단 고려시대부터 단군의 무덤으로 알려졌다.[3]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인성 역시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은 동의한다는 것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유물은 있어도,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왕검성의 요동설을 주장하는 것. 이 견해가 아주 일리가 없지는 않은데, 한나라가 남월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아홉 군의 중심지도 남월의 수도 번우(番禺)가 있었던 남해군(南海郡)이 아니라 지금의 베트남 북부 일대(정확히는 하노이가 위치해 있는 홍강 삼각주 일대)에 있었던 교지군(交趾郡)이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