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3:35:49

진개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진개
秦開
성명 진개(秦開)
가족 아버지 진씨(秦氏), 손자 진무양(秦舞陽)
참전 고조선-연 전쟁
주군 연소왕
생몰 ? ~ ?

1. 소개2. 생애
2.1. 활동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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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 때의 명장. 후일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수행원 진무양(秦舞陽)의 조부였다.

2. 생애

사기》와 《한서》의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개는 동호(東胡)에 볼모로 가서 신임을 얻었다가, 고국으로 복귀한 뒤 동호를 기습해 영토 1,000여 리를 정복한 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5개 군을 두었다.[1] 또한, 《위략》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고조선의 영토 2,000여 리를 정복하고 영토를 만번한(滿潘汗)까지 넓혔다(고조선-연 전쟁).

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고조선의 강역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진개가 점령했다고 하는 만번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반도 북부 박천 일대, 압록강 서쪽 등으로 의견으로 나뉘는 등, 그 위치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만번한'(滿潘汗)을 '만(滿)과 번한(潘汗)'으로 끊어 읽어야 하며,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요동군의 지명인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에 각각 대응한다는 학설도 있다.
그 뒤에 연나라에는 진개라는 현명한 장군이 있었다. 호(胡)에 볼모가 되었는데, 호가 그를 매우 믿었다. (연으로) 돌아오고 동호를 격파해, (동호가) 1,000여 리나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나라의 왕을 암살하러 떠났던 진무양이 바로 진개의 손자였다.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조양에서 양평까지 쌓았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어 호를 막았다. 이 무렵 의관과 속대를 할 줄 아는 곳이 전국(시대)에 일곱이었는데, 그중 셋[2]이 흉노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距胡. 當是時, 冠帶戰國七, 而三國邊於匈奴.
한서》 <흉노열전>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그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조선왕), 연나라는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에 조선이 약해졌다.
위략

2.1. 활동시기

《동북아역사지도》에서는 진개의 활동 시기를 기원전 281년이라 추측했는데(지도 사진), 지도 사업이 동북공정을 추종한 것으로 알려져 폐기되는 바람에 비정 근거가 알려질 수 없었다.

다만 진개의 활약 시기를 BC 281년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정황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 진개의 손자이자 형가의 진시황 암살시도로 알려진 형가의 동료,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라고 한다. 그리고 진무양은 이때 형가가 진시황 암살을 위하여 고용한 장사였다고 하는데,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노인은 아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조무령왕이 조나라 북부에 군을 설치하고 요새를 쌓은 이후, 진개가 흉노들을 격퇴했다고 적으며, 진개 이후에 조나라의 명장 이목이 흉노를 또 다시 무찔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목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그의 활동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BC 272년 전후로 추측된다. 조무령왕은 기원전 300년 즈음에 요새를 쌓았으며, 이목이 흉노를 격퇴한 시기는 조나라의 기록[3]과 그의 사망년도가 기원전 229년임을 생각하면[4] 기원전 272년~265년 즈음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진개의 활동 시기는 BC 300~BC 270년 사이로 추측되는데, 이는 연나라의 전성기이자 연나라 최고의 군주로 꼽히는 연소양왕의 재위 시기와 일치하므로, 연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시기도 적절하다. 왜냐하면 연나라는 연소왕의 즉위 전까지는 간신 자지가 날뛰는 등 매우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

또한 연소왕의 아들인 연혜왕은 명장인 악의를 쫓아내는 삽질에 집권하자마자 제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한, 위, 초 3개국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연혜왕 집권기엔 연나라 입장에서도 흉노에 신경쓸 시기가 아니기도 했다.

[1]자치통감》에서는 이 기사가 진 시황제 3년(기원전 244년) 조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 진개의 동호 공격이 꼭 이해에 있었다고 보장하긴 어렵다. 남송 때의 사서인 《대사기》에서는 《사기》와 《한서》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되 난왕 15년(기원전 300년) 조에 실었다. 청나라 때의 사서인 《주계편략》 또한 이 일을 소왕 12년(기원전 300년)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2] 연, 제또는진, 조.[3] 조나라의 기록에 마지막으로 흉노가 등장한 것은 《사기》 <조세가> -조혜문왕- 편에서 기원전 272년, 흉노의 이웃이었던 동호의 변경 불모지를 개간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 이후로는 흉노가 등장하지 않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목이 흉노와 전쟁을 벌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4] 이목은 심지어 자연사도 아니고, 당시 전쟁에서 싸우던 장수였으나 모함을 받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