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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칠웅의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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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국칠웅(戰國七雄)은 춘추전국시대 중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에 진입하면서 세력을 굳힌 7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춘추오패가 춘추시대에 강성한 나라들의 제후 개개인을 칭하는 반면, 전국칠웅은 나라라는 차이가 있다.2. 역사
이 시기에 저 7개국만이 있었던건 아니며, 중산(中山), 송(宋), 정(鄭) 등 3개국을 포함한 다양한 소규모 국가들이 존재했다. 다만 칠웅이라 불리는데서 알듯 저 나라들 대부분은 칠웅중 제일 약소국 취급받던 한나라만한 세력도 못 일구고 멸망하거나 다른 나라에게 흡수되기 일쑤였다.[1]전국시대 초기에는 각 나라간 격차가 크지 않아 균형이 잡혀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제일 이름을 떨쳤던게 위나라로, 위문후 때가 전성기였으며 그 후대에 바로 위혜왕이라 칭왕까지 하나 그와 동시에 혜왕 시기에 제나라에게 크개 패하는등 국력이 기울었다.[2][3]
위나라가 쇠퇴하며 주도권을 잡은 곳은 위나라를 찍어누른 제나라였다. 제위왕과 제선왕 부자가 왕위에 있을 동안 손빈이 활약하여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와 서로 동제, 서제 칭호를 나누어 갖자는 논의까지 했을 정도로 유례없는 최전성기. 그러나 선왕의 후대인 제민왕 시기에 민왕의 정치적 오판으로 주변 나라의 신뢰를 잃으며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이끄는 군대에게 대패하여[4] 제나라의 국력이 기울었다.
서쪽에 위치한 진나라는 관중을 포함한 지리적 이점을 기반으로 중원 인근에서 펼쳐진 각 국의 각축전에 끼어들지 않고 꾸준히 국력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5] 특히나 진효공과 상앙의 변법을 기점으로 국력을 크게 키우는데 성공했고 이는 전국시대 최후반부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진나라가 득세를 한 이후로는 사실상 진과 다른 6국과의 분쟁이 중심에 그 사이사이에 각 국간 여러 정치적/물리적 분쟁이 덤으로 끼어있는 형국이 된다. 이때 소진이 합종책을 통해 진나라를 크게 압박할 뻔 했으나, 장의의 연횡책에 의해 합종책이 결과적으로 실패했고 그나마 일국만으로 진나라와 비빌만했던 초나라는 장의의 농간에 초회왕이 놀아나 진나라의 포로로 잡힌 뒤 큰 두각을 내지 못했다.[6]
위에 언급되지 못했던 한나라와 위나라는 항상 강대한 진나라에 항상 눌려있었다[7]. 조나라는 조무령왕 시절에 군세가 강하였고 이후에도 인상여, 염파 등의 활약으로 잘 버틴 편이나 결국 진나라 백기에게 30만 대군이 떼죽음을 당한 장평대전 이후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제나라와 연나라는 상대적으로 평온하였으나 다른 나라들이 무너지자 버틸 수 없었다.
여담으로 결국 승자로 올라선 진나라와 달리 전국통일에는 실패해서 가려지는 부분이 있으나 사실 전국칠웅의 나머지 여섯 국가들도 전원이 상고시대의 천자국들이었던 하상주 세 왕조들의 국력을 훨씬 넘어선 상태였다. 전국칠웅에 해당되는 국가들은 모두 총력전 체제를 위한 대량 징집 등이 가능했는데 이것만으로도 사실상 성읍 국가들이었던 하상주 세 왕조들의 국력을 아득히 넘어선 것이다.
또한 천하통일에 성공한 진나라를 제외하면 전성기가 길게 이어지지도 못하고 진나라만큼 군주복이 좋지도 않았다. 진나라는 진효공부터 통일 전 진시황까지 즉위하자마자 죽어 뭐라 평가할게 없는 효문왕만 빼면 명군라인이 끊기지 않았고 또 그랬기에 전성기가 길게 이어진 것이나 나머지 육국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 초나라: 초도왕, 초선왕, 초위왕 시절에는 국세가 강성했지만 초회왕이 30여년간 뻘짓하며 국력이 크게 기울어 경양왕, 고열왕 시기가 되면 싸우면 늘 지는 나라가 되었다.
- 제나라: 제위왕과 제선왕 시기에 강했고 제민왕 시기에도 강성함이 이어졌지만 자국의 강성함에 제민왕이 지나치게 열국들에게 어그로를 끌어 결국 제민왕 말기에 5국 연합군의 침공으로 망할 뻔 하며 제양왕이 어찌저찌 되살렸지만 그 다음 왕이 제왕 건인 바람에...
- 연나라: 연소왕 시기 말고는 뭐 한게 없는 나라, 심지어 연왕 희 시절에는 구 수도인 진양을 상실하기까지 한 조나라에게 져서 땅을 뜯긴다.
- 조나라: 조무령왕과 조혜문왕 시기에는 잘 나갔지만 조효성왕은 장평대전으로 조도양왕은 조천(조유목왕)을 후계자로 세우며 나라를 말아먹는다.
- 위나라: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았던 나라, 위문후, 위무후 시절에 잘 나갔고 위혜왕 초기에도 어느정도 이어졌다. 그러나 위문왕은 삼진간의 관계를 꺴고 위혜왕은 너무 나대다가 국력을 깎아먹었다. 위혜왕 이후의 왕들의 자질도 영 아니올시다라서 위혜왕 이후 위나라는 전성기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다.
- 한나라: 칭왕 이전에는 그래도 좀 나갔던 나라였다. 그러나 소후는 옛 수도인 의양이 점령당할 정도로 위기상황에서도 사치나 즐기다 죽었고 소후 말부터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고 이후로는 맨날 지는 기록밖에 없다.
3. 목록
3.1. 진(秦)
본디 서주(西周)가 있던 곳에 자리한 나라로 지리상 중원과 멀고 서쪽의 서융과 투탁거리며 성장한 나라로 때문에 순장 풍습이 남아있는 등 중원 국가들에게는 반오랑캐 취급을 받던 나라였다.[8] 춘추오패로 진목공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후술하는대로 진효공 재위 시기에 본격적으로 떠오르며 중원 국가들에게 경계되기 시작했다.3.1.1. 전성기
서쪽의 오랑캐가 있긴 했으나, 지리적 이점과 타국의 상대적 무관심등으로 인해 그 외 본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진효공은 이런 시기에 상앙을 중용하며 나라 발전의 기틀을 닦기 시작했고, 혜문왕 시기에 파촉정벌을 성공시키면서 이후 진소양왕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열게 된다.[9]무엇보다 타국이 암군이나 개혁에 반동적인 왕에 의해 나라가 휘청였던 것을 보면 암군이 나오지 않아 개혁을 줄곧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도 최고의 이점이었다.
3.1.2. 쇠퇴기
소양왕 이후 성공일로를 걸으며 시황제 시기 결과적으로 타 6국이나 소국을 정벌하는데 성공하며 명실상부 전국시대의 승리자가 되어 천하통일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복지의 민심을 다스리기도 전에 이루어진 진시황의 지나친 중앙집권적/일방적 지배방식은 타국 출신 사람들의 불만을 대거 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범국가적 반란과 부흥군들의 난립이 이루어지게 된다.진시황 서거 후 이를 수습해야 했던 2대 황제가 수습은 커녕 사치에 빠져 오히려 반란군을 반쯤 방조하면서[10] 결국 통일된지 20년도 지나지 않아 초나라에 항복하며 그 막을 내려야했다. 이후 초나라와 한나라, 그 외 몇몇 나라들이 다시금 세를 일으킨 초한지의 무대가 펼쳐진다.
3.2. 초(楚)
전국칠웅 중에서 유일하게 한족 출신 국가가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 국가. 초나라 자신은 주나라의 봉지를 받아 건국했다 주장하지만 여러 기록에서 초나라는 오랑캐마냥 대하며 나머지 육국과는 다른 취급을 받고 있다. 그 예시로 이미 초나라는 춘추시대 초인 기원전 8세기 중반에 이미 왕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춘추시대가 시작된지 불과 40여 년 후며 춘추오패의 첫 번째인 제환공 시절로부터 무려 1세기 전의 일이다.[11]3.2.1. 전성기
춘추오패로 초장왕이 꼽히듯 춘추시대부터 전통적인 강자로 자리매김하였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장강 중류부터 하류에 이르는 모든 땅을 지배하게 된다. 말하자면 오나라와 월나라에 이르는 땅을 병합했다.[12] 그중에서도 가장 강했을 때는 초도왕 시절로 보는 시각이 대부분인데 이때 재상이 다름아닌 오기(오자)였기 때문. 그러나 오기의 죽음과 함께 쇠퇴기가 찾아오는데, 오기와 초도왕이 시행했던 변법이 워낙에 급진적이었던 까닭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초도왕이 사망하자마자 오기를 살해했다.3.2.2. 쇠퇴기
오기가 죽고 나서 바로 쇠퇴기에 돌입하게 되고,[13] 장의의 말재간에 놀아난 초회왕은 급기야 진나라에 끌려가 죽기 전에는 초나라 땅을 밟지 못하게 되는 처지에 이른다. 그의 시호인 회(懷)가 영(靈)보다 더 안 좋은 뜻을 갖고 있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이 사건 이후,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춘신군 황헐이 개혁을 시도하지만 오기도 실패한 일을 황헐이 성공하지는 못했다.애초에 초나라는 전국칠웅이 되기 전부터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존재감이 강했으며[14] 땅도 넓고 인구도 많아 강국이 될만한 조건은 갖췄지만 제대로 개간이 되어 있지 않아[15] 진나라를 넘어서기에는 그 넓은 땅과 인구를 제대로 살릴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초도왕과 진효공, 오기와 상앙 초숙왕과 진혜문왕은 행적이 매우 비슷했지만 그 이후는 천차만별이라서 초나라는 모든 것이 원상회귀되고 귀족들의 세력도 남았지만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상앙과 오기는 둘 다 제거당하기는 했어도 상앙은 진혜문왕 자신이 나서서 제거한 반면 오기는 제거한 주체가 귀족들이라는 점도 초나라에서는 귀족의 위상이 진나라보다 더 높았고 그만큼 귀족을 제어하여 개혁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16]
결국 초나라는 초회왕 시절 왕이 진나라의 포로가 되는 것을 시작으로 경양왕 시절에는 수도를 잃어 천도하고 고열왕 시절에는 다시 또 천도를 하는 등 진나라에게 계속 밀리는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결국 멸망한다. 그래도 웅부추 이후 창평군이 새로이 왕으로 즉위해 맞서는 등 항전 자체는 제법 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3.3. 제(齊)
춘추오패의 첫번째 인물인 제환공 시절부터 이미 강국이었다. 제환공 사후에는 포스가 좀 죽기는 했어도 초나라와 함께 춘추시대부터 알아주는 전통적인 강호였다. 같은 전국칠웅인 연나라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비록 제환공의 강씨 제나라는 제태공에 의해 망했지만 제태공의 전씨 제나라도 이전처럼 강성했다.[17] 바닷가를 낀 산둥반도에서 나오는 풍부한 소금과 어족 자원에서 나오는 경제력은 내륙국인 한, 조, 위, 진은 꿈도 꾸기 어려운 혜택이었다.[18]3.3.1. 전성기
최고 전성기는 제위왕, 제선왕 때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이 시대에는 손빈병법의 저자인 손빈이 병권을 맡아 위나라를 공략했고. 위의 대장군 방연을 죽이고 위나라 혜왕[19]으로부터 땅을 할양받았다. 맹자가 찾아와 왕도를 권한 것도 제선왕의 시대이다.강세는 제선왕의 아들인 제민왕 시대까지 이어졌는데 전국사군자 중에 수위로 꼽는 맹상군 전문이 활약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진나라가 개나 소나 쓰던 왕 칭호 대신 서제(西帝)와 동제(東帝)로 서로 칭하자고 제나라를 꼬실 정도였다. 또한 송나라를 멸망시켜 다른 나라와 나누어 갖고 연나라를 묵사발내기도 한다. 하지만...
3.3.2. 쇠퇴기
교만하고 난폭했던 제민왕이 결국 쇠퇴기를 이끌었다. 재위 기간 동안 초나라를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두고 합종책으로 다른 나라들과 연합하여 진나라를 치기도 하는 등 국력을 떨쳤다. 하지만 맹상군을 시기해서 재상직에서 내려오게 하고 결국 두려워서 조나라로 도망가도록 만드는 등 내부적으로 악정을 펼쳤고, 대외적으로도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천하를 상대로 혼자 어그로를 끌었다. 특히 송나라를 치면서 삼진의 힘을 빌렸음에도 송나라 땅을 나눠갖는 게 아까워 뒷통수를 쳤는데, 이 일은 외교적 고립을 가져왔다.결국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5국 연합군을 구성하여 침공했다. 제는 거와 즉묵을 제외한 모든 영토가 제압당하면서 칠웅 중에서 제일 먼저 제나라가 멸망당할 뻔 했다. 하지만 그 유명한 전단의 화우지계가 나오면서 수명을 연장했고[20], 이후에는 진나라가 세력을 넓혀 가는 와중에 동쪽 끝에 있는 관계로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지냈다.[21][22]
하지만 결국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게 멸망했다.[23]
3.4. 연(燕)
연나라는 춘추시대 기록이 부실하다. 하지만 이웃나라인 제나라가 제환공과 그 이후로도 나름 잘나간 것에 비해 연나라는 장공 시절에는 산융족의 침공을 제나라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고 제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등 제나라에 비하면 약한 나라였다.[24] 그나마 장공 시대 전에는 후작을 칭한 것을 보면 연나라도 춘추시대부터 어찌저찌 강해져서 전국칠웅의 반열에 오른듯.3.4.1. 전성기
연나라의 전성기는 연왕 자지가 죽은 이후에 연왕 쾌의 아들인 연소왕이 집권하고, 그 유명한 악의를 등용한 이후부터다. 연소왕은 악의를 참소하는 세자에게 되려 매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당시 진나라와 나란히 할 정도의 강대국이었던 제나라를 멸망 일보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하였고, 거기에 진개[25]가 고조선을 관광시켜 2천 리 가까이 되는 요동지역 일대를 확보했으며 동호도 굴복시켰다.3.4.2. 쇠퇴기
연소왕이 죽은 이후에 악의가 참소당하고 제나라가 즉묵을 기점으로 다시 국토를 회복하면서 연나라는 아예 전국역사에 힘을 쓴 일이 전혀 없다. 그제서야 악의를 다시 데려오려 했지만 악의는 조나라에 망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심지어 장평대전 이후 쇠망 일보직전까지 몰린 조나라를 공격했다가 되려 역관광당했다. 이후 그나마 비중있게 나오는 건 태자 단과 번오기, 형가가 중심이 되는 진왕 암살미수사건. 이때는 거의 진나라가 살짝 쳐도 망할 수 있는 약소국 취급. 물론 이 때는 연, 제 두 나라 뺀 다른 육국이 사실상 멸망한지라 당연하지만3.5. 조(趙)
본디 조나라는 삼진 성립 당시에는 삼진 중에서 최약체였지만[26] 무령왕 시기에 이르러 왕호를 사용하고 강성해지게 된다.3.5.1. 전성기
무령왕 때 흉노의 일부를 토벌하고 장성을 쌓았으며 이 시기 조나라는 함곡관 옆 동네임에도 진나라와 전면전을 벌인 일이 없었다. 또한 무령왕의 아들 중 하나가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평원군 조승이고, 무령왕 사후 뒤를 이은 혜문왕도 집권 초기에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혜문왕 시절에는 혜문왕의 동생인 평원군뿐만 아니라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3군인 염파, 인상여, 조사 등 걸출한 인재들이 함께 있었다. 게다가 인재들의 수준도 대단하여 염파는 전국시대 당시 손꼽히는 명장이었고, 조사는 그 염파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다. 인상여는 진나라 역대 최강의 군주 소양왕과 그 신하들을 입으로 개관광을 보내며 기죽인 인재였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진나라와 인접국이면서 전면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조나라-진나라 양측의 대군이 격돌했던 적이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와의 전쟁은 엄밀히 말하자면 조나라 영토에서 싸운 것이 아니다. 한나라의 영토였던 연여(혹은 알여)에서 싸운 것이라 조나라 본토에는 피해가 전무했기 때문에 진나라에 대한 피해는 매우 적었다.
3.5.2. 쇠퇴기
많은 사가들이 장평대전을 조나라의 멸망과 가장 많이 연관짓는데, 중국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고대사를 통틀어서 하룻밤새 40만이 넘는 군사가 생매장으로 몰살된 사례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평대전이 발발한 시기는 조나라의 재상인 인상여가 병으로 재상에서 물러나고, 염파와 동급으로 평가되는 마복군 조사는 아예 세상을 뜬 상태였다.그나마 다행히도 백기를 견제하려던 범수와 조나라를 도우러 온 신릉군 덕에 일단 당장에 나라가 망하는 것은 면했고 장평대전으로 휘청이는 틈을 탄 연나라의 침공도 막아내었으며 조효성왕의 뒤를 이은 조도양왕 역시도 어찌저찌 나라를 잘 유지했다. 오히려 이 시기에도 조나라는 연나라를 쥐어패는 등 국력에 손실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위나라나 한나라처럼 완전 약체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은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조도양왕과 뒤를 이은 조유목왕은 사고를 치고 만다. 특히 조도양왕의 병크가 가장 심했다.
쇠퇴기에도 불구하고 염파를 이어 조나라를 지켰던 이목이 진나라를 역관광보내면서[27] 조나라의 수호신이 되었지만, 조나라 최고의 간신이었던 곽개와 곽개를 총애하던 유목왕 때문에 이목은 허무하게 제거당했고,[28] 이목이 떠난 그 이듬해 조나라는 빛의 속도로 멸망했다. 그 잔존세력이 남아 조가가 '대' 지역에서 몇년간 더 명맥을 이어갔고 조나라의 교훈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간신배에게 망하지는 않았으며 연나라와 연합해서 어찌저찌 싸워보려 했던 것 같은데 사료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데다 그나마도 6년만에 멸망해 조나라는 완전히 소멸한다. 그래도 나머지 육국과 비교하면 초나라와 더불어 제법 끈질기게 맞서긴 했다.
3.6. 위(魏)
삼진에서 분열한 위나라는 아래의 전성기에서 보이듯 전성기가 가장 먼저 찾아온 나라였다. 이는 중원 한복판이라는 위나라의 지리적 이점과 위문후, 위무후라는 명군 덕으로 물자와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나라이니 그만큼 부강해져 주변 소국들을 병탄하며 강국이 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중원 한복판이라는 지리적 이점은 정작 위나라가 강성해진 후에는 약점이 되었고 특히 삼진 중 유일하게 전성기에도 월경지가 많았던 약점이 방어에도 불리하게 작용해 몰락 또한 빨랐다.3.6.1. 전성기
특이하게 7웅 중에서 전성기가 왕호를 칭하기 전에 있었는데, 위문후 시절에 중산국을 점령했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29] 당시에는 악의의 조상인 악양이 중산국을 점령함으로써 그 시기에는 제나라와도 비견할 정도. 또한 위문후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거물들이 즐비했는데, 예를 들면 사마는 오기, 재상은 이극, 사구[30]로는 서문표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도 인재보는 데 당대 일인자라고 해도 무방한 책황이 있어서 위문후 시절이 가장 강성하였다고 봐도 좋다. 당장 책황이 추천한 인물이 병법의 달인 악양과 당대 먼치킨 오기이다. 거기다 위문후는 재위기간만 50년 가까이 되기에 이런 위나라의 최고 전성기가 십수년 정도 짧막하게 유지되고 끝도 아니었다. 위문후 치세는 1명의 치세였지만 웬만한 왕 2~3명 정도는 되었으니 정말 길긴 길었다.위무후 시기에도 이 기세는 이어졌는데 일단 서쪽의 진나라를 상대로 대부분 이겼고[31] 삼진이 연합해서 제나라로부터 연나라를 구해주기도 했으며 조나라와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였다. 이렇게 위문후, 위무후 시기의 일로 인해 위혜왕 초기에 실질적인 국력은 가장 강했을 것이나...
3.6.2. 쇠퇴기
위무후 사후 그의 아들 위앵과 공중완이 임금 자리를 두고 싸우다가 외국 군대까지 끌어오는 소동을 벌이면서 이미 조짐이 심상치 않았지만... 결국 위앵이 군위를 이어받고 나서 왕호를 사용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혜왕(혹은 양혜왕)이다. 일단 벌인 사업으로는 조, 제나라와 싸워 이기고, 도성을 옮기고,[32] 맹자를 초청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런데 상앙이 위나라를 떠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을뿐더러 그 상앙이 위나라의 상어 땅을 뺏아 버리고, 월형을 받은 손빈이 제나라로 가버리게 하고 제나라에 선빵을 후렸다가 그 손빈에게 마릉에서 대군이 전멸에 가깝게 관광당하는 등(마릉 전투)완전히 굴욕의 나날을 보내며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한다.사실 위나라의 쇠퇴기는 위문후의 뒤를 이은 위무후가 오기를 견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좋지만,[33] 양혜왕 때는 가히 화룡점정급이라...[34] 이후부터 위나라가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일은 아예 없다.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진나라의 땅셔틀화.[35] 그나마도 안희왕 시절에는 신릉군의 활약으로 망하기 일보직전이던 조나라를 구원해주고 합종군을 결정하기라도 했는데 다음 대인 경민왕 시절의 기록은 정말로 진나라에게 꼬박꼬박 땅바친 기록이 대다수다.
결국 위나라는 그나마 걸출했던 신릉군마저 경질된 후 18년 뒤 망한다.[36]
3.7. 한(韓)
전성기와 쇠퇴기가 뚜렷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 바꿔 말하면 대체 이 나라가 딱히 뭘 한 게 없다(...).[37]지리적인 위치가 좋지 못해서[38] 옛 수도인 의양을 진나라에게 따이자 길이 막혀 나라가 세 토막나고 급속한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사실 지도에서 한나라 위치만 봐도 답이 없지만. 애초에 진(晉)나라에서 갈라져나온 나라라 한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덕분에 사방이 적국이라 전국시대 후기 진나라와 싸우면 진나라에게 성을 바치고, 제나라와 전쟁하면 데꿀멍하는 게 이 나라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 토목공사로 진나라의 국력을 소진하기 위해 토목기사 정국을 보내 대운하를 건설하게 했지만 도중에 발각되어 진나라의 어그로를 끌어버렸고, 그럼에도 계속 건설된 운하는 도리어 진나라의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만들어주는 돌이킬 수 없는 삽질이란 결과로 되돌아오고 만다.
한때는 연나라보다 강성했고, 왕호 또한 빠르게 사용했으나[39] 결국 전국시대의 헤게모니를 이끈 역사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런 나라 꼴을 보다 못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저작이 그 유명한 한비자다.
3.7.1. 전성기
그래도 이 나라의 전성기를 뽑아보자면 신불해가 재상으로 있었던 기원전 355년부터 기원전 341년까지로, 초나라와 위나라가 초도왕과 위문후의 사후에 쇠퇴하기 시작했고, 조, 연, 진이 아직 강성하기 이전 15년 동안 부흥해 진나라와 일시적으로 비슷한 수준의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40]신불해는 정나라의 천민이었지만, 기원전 375년에 정나라가 멸망하자, 한나라로 와서 재상이 되었으며, 법가 사상을 정비해 이후 한비자의 법가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절망스런 국력을 지녔던 한나라지만 한애후 시절, 정나라를 정복하고 정나라의 수도, 신정으로 천도했을 때 당시 전성기의 끝무렵을 달리던 위나라에게는 부담감을 안겨주었고 이는 결국 마릉 전투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비록 위나라의 전성기를 끝장낸 나라는 제나라였지만 발단은 한나라가 제공한 것
그리고 소후 시기만 잘나간건 아니고 문후, 애후, 의후 시기도 소후 이후의 한나라와 비교하면 매우 잘나가서 문후 시기에는 제나라와 2번 싸워 땅을 빼앗았고[41] 애후 시기에는 경후와 열후 시기에 대립했던 정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의후 시절에는 위나라의 도읍인 안읍을 공격하기도 했는데 당시 위나라가 내란 중인 것과 조나라, 한나라가 동시에 쳐들어온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전성기를 달리던 위나라를 털어버린 것이고 조성후 시기의 조나라는 위나라에게 압박을 많이 받던 국가인걸 감안하면 나름 잘나간 시절이라고 볼 수도 있다.
3.7.2. 쇠퇴기
기원전 341년[42] 신불해가 죽자 가뭄에도 정신 못 차리고 사치하던 한소후는 브레이크 없이 계속 폭주하며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신불해가 죽은 지 2년만에 의양을 점령당했다.한소후 다음 대인 한선혜왕 시기에 드디어 칭왕하게 되지만 이미 진나라는 강해질대로 강해진 상태였고 결국 진나라의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43] 전국칠웅 중 가장 먼저 멸망한다.[44]
4. 기타 국가들
- 주나라: 춘추시대부터 꾸준히 추락중이던 권위와 국력이 이 시기에 바닥을 기어버리고 고왕 시기에 이르면 안 그래도 작았던 주나라가 서주와 동주, 둘로 쪼개져 버린다. 그러다 보니 주변국들의 눈치를 보며 전국시대 최약체급인 한나라에게도 무시당하다가 서주는 기원전 256년, 진나라 소양왕에 의해 멸망하고 남은 동주마저 기원전 249년, 진나라 장양왕에 의해 멸망한다.
- 기나라: 전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인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 노나라: 춘추시대부터 밖으로는 주변국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하고 안으로는 '삼환' 이라 불리는 실권자 가문들이 좌지우지하고 이들과 공실간의 권력다툼이 잦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오래 살아남았으나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256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 등나라: 맹자의 등문공 편에 등장하는 나라, 송강왕 시기의 송나라에게 멸망했다.
- 설나라: 전국시대 초기에 멸망했다.
- 성나라: 초나라에게 멸망당했다.
- 송나라: 송양공의 송양지인 이후 국세를 회복하지 못해 주변국들에게 휘둘린다. 그러다가 전국시대 중엽에 송나라 왕가가 송씨에서 대씨로 교체되고 대씨의 2대 군주인 송강왕 시기에 송나라는 갑자기 강해져 강군을 길러내 주변국들을 병탄하고 이에 힘입어 타 칠웅들처럼 왕호를 사용하는 등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송강왕은 후기로 갈수록 교만해졌고 결국 기원전 286년, 제, 위, 초 3국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 월나라: 춘추시대 말기인 윤상왕 시기에 왕호를 칭하고 구천 시기에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잠시 잘나갔지만 구천 사후 국력이 계속해서 약해져간다. 그래도 월왕 예 초기에만 해도 증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국력이 남아있었지만 예 재위 후기에 도읍을 낭야에서 고소로, 무전 대에는 다시 옛 월나라 수도인 회계로 천도하는 등 수도를 중원에서 멀리 옮겼으며 또한 예 이후 월나라 왕들이 제명에 못 죽을 정도로 정치가 혼란해진다. 결국 기원전 306년에 초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 위(衞)나라: 서주시기나 춘추시대 초만 해도 제법 강했으나 점차 주변국의 성장을 따라잡지 못해 약소국화 된 나라, 전국시대에 이르면 그 처지가 더 추락해 이웃한 전국칠웅 위나라의 종속국이 되었고 군주의 칭호마저 성공 이후에는 후로 격하되고 위나라의 압박에 의해 성후를 끝으로 위씨의 치세가 끝나고 자남씨의 치세가 시작된다. 국력은 더 기울어서 평후 이후에는 아예 군으로 깎여나갔다. 그러나 명목상으로 위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지 않은 채 시황제 시기에도 남아있다가 호해 즉위 후인 기원전 209년에 완전히 사라진다.[45]
- 정나라: 춘추시대 초기인 정장공 시기에 잠시 잘나갔던 나라, 이후로 자산이 재상으로 있던 시기만 빼면 별볼일 없는 나라로 전락해 주변국에 돌아가며 얻어맞거나 기는 신세로 전락했다. 춘추시대 후기에는 진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육경에 의해 심심하면 얻어맞았고 삼진 분열 후에는 한나라에게 공격당하다가 기원전 376년에 멸망당한다. 그래도 무력하게만 당한 게 아닌 한나라에게 반격이라도 시도는 해봤다는 점에서는 타 소국에 비해 체면치례는 한 경우이다.
- 주(邾)나라: 초나라에게 멸망당했다.
- 중산국: 기원전 406년 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했으나 기원전 380년에 부활했고 이후 기원전 296년에 조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다.
- 촉나라, 파나라: 파촉 지역에 위치한 나라로 기원전 316년, 진나라의 사마착에 의해 멸망했다.
- 허나라: 초나라에게 멸망당했다.
5. 대중매체에서
5.1. 킹덤
만화 킹덤의 배경은 전국칠웅의 패권 다툼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5.2.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2 PS3, 엑스박스 360버전, 파워업키트의 시나리오로 등장했다. 다만 징기스칸 4처럼 전국칠웅의 유명한 일부 사람들만 나온다.[46] 진시황, 한무, 위앵, 웅의, 조옹, 전인제, 희평이 군주로 나온다(각각 진, 한, 위, 초, 조, 제, 연). 국가가 7개이라서인지 장수 배치가 영 웃기고 이상한데, 위나라는 군주의 성이 위씨라서 위연이 위나라 소속이고, 조운은 조씨라서 조나라 소속이고, 한현(!), 한호, 한충은 성씨가 한씨라서 한나라에 소속된 것은 좀 웃긴다.그리고 이상한 곳에서 고증을 살린 것이 있는데, 예를 들어 마등일족은 조나라 땅 업의 재야로 나온다. 그 이유는 마원은 조사의 후손이기 때문. 손오는 제나라 소속인데 손빈의 후손들[47]이라서 그렇다. 장막, 장익은 낙읍의 재야로 나오는데, 그 이유는 바로 한삼걸 장량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벤트까지 있으니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다른 세력들이 모두 중원이나 하북 쪽에 몰려있는 것에 반해서, 진나라와 초나라는 남쪽에 위치한 익주 및 형주, 양주를 쉽게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6. 같이보기
[1] 그나마 송나라가 송강왕시기 주변 약소국을 흡수하고 전국칠웅급 세력을 일구고 칭왕하기도 했지만 기원전 286년 제위초 연합군에게 멸망당했고 월나라도 전국시대 초창기엔 나름대로 큰 세력을 유지했으나 초나라에 밀려 전국시대 중기에 멸망당했다. 반대로 주나라 왕실은 관심 받지도 못할 정도로 세력이 작아져서 그렇지 두개로 쪼개진 뒤에도 전국시대까지 그 명맥은 유지하고 있었다. 즉 위 지도와 전국칠웅에 들어간 이름은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강대국들만 드러냈을 뿐이지 실제로는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2] 유명한 손빈과 방연의 일화나 맹자의 첫 구절인 맹자현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 유명하다.[3] 사실 애초 위혜왕이 왕을 칭한 시기부터가 위나라가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이미 칭왕 7년 전에는 마릉 전투에서 제나라에게 대패하여 방연과 태자 신이 전사하는 참극을 겪었고 그 1년 뒤에는 하서 지역을 잃고 도읍인 안읍이 위태로워져 대량으로 천도했다. 이 점에서는 한나라와 비슷해서 한나라도 이미 한소후 말기에 옛 수도였던 의양을 잃는 등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다.[4] 송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위, 초 2국과 연합을 맺었는데 송 멸망 이후 국력만 믿고 본디 나누기로 했던 송의 영토를 나누지 않고 제나라가 홀로 독식했다. 결국 이게 원인이 되어 과거 제나라에 기습당해 가장 원한이 컸던 연나라를 중심으로 5국 연합이 맺어지게 하는 단초를 제공한다.[5] 물론 위 지도를 보면 알듯 칠웅과 맞부딪히지 않는대신 이민족과 자주 분쟁이 벌어졌다. 특히나 그중 서주시대를 끝낸 견융족과의 분쟁중 국군도 몇명이나 사망했을 정도로 이들도 나름대로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단지 아예 나라의 존망을 걸고 소모전을 벌였던 타 칠웅보다는 비교적 덜했을 뿐이다.[6] 그나마 장편대전 이후 악화일로를 걷던 조나라를 위나라와 연합해 구해내기는 했으나, 이마저도 장평대전의 결과에 위축되어 있던 고열왕을 모수가 협박에 가까운 방법으로 설득한 끝에 이뤄낸 성과다.[7] 그래도 위나라는 신릉군의 활약 덕분에 장평대전으로 망하기 직전의 조나라를 구하고 합종군을 이루어 진나라의 동진을 저지하기도 했다.[8] 정확히 말해 순장은 동시기의 타 제후국에도 없지는 않았다.[9] 진효공 시기에도 쇠락해가던 위나라에 결정타를 날리는등 나름의 활약을 했으나, 장의의 연횡책이나 초회왕을 포로로 잡는등 '칠웅'으로서 본격적으로 부상하며 당시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학설이 사학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다.[10] 이는 단지 향락에 빠진것만이 아니라 사실상 치트키나 다름없던 장한이 있던 점도 있었다. 실제로 여러 부흥군 및 반란군 세력을 흡수하거나 동맹을 맺은 항우만 아니었어도 장한 선에서 반란이 정리될뻔 했으니... 사실상 황실이 작정하고 반란 제압에 관심을 가지고 처음부터 장한을 밀어줬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정도.[11] 왕을 빨리 칭한다면 그만큼 강한 나라인 거 아니야? 싶겠고 실제로도 오나라도 월나라도 꽤 강해진 후에 왕호를 사용했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춘추시대만 해도 주나라식 질서가 미약하게나마 살아 있어서 패자들도 심지어 초장왕을 제외한 춘추오패들조차 감히 왕을 칭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는 오히려 초나라가 주나라식 질서에 제대로 편입된 나라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 예시로 오나라는 왕가만 주나라 국성이었지 나머지는 다 이민족인 국가였고 월나라는 초나라와 비슷한 상황으로 역사적 기록에는 주나라에게 분봉받아 건국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주류 민족은 비한족계라고 추정하고 있다.[12] 본디 초나라는 오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월나라랑 친하게 지냈는데 오나라 멸망 후 딱히 월나라를 챙겨줘야 할 이유가 없어졌고 월나라도 구천 사후 그에 맞먹는 왕조차 안 나와 쇠망테크를 타고 있었다. 여기에 옛 오나라 귀족들과의 갈등, 부족국가 수준을 못 벗어난 후진 정치체계 등으로 결국 월나라는 초나라에게 밀리다가 멸망한다.[13] 물론 초위왕 시절에 월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마냥 쇠락만 한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특별한 쇠락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걸 감안하면 초도왕~초위왕 시절 전체가 전성기로 봐도 좋을지도? 그나마 숙왕 시절에 촉나라와 서로 한방씩 주고받고 위나라에게 패배한 기록이 있다. 즉 초도왕 사후 바로 쇠퇴기에 돌입한건 좀 비약인 감이 있다. 숙왕, 선왕, 위왕 시절의 기록만 봐도 회왕 시절의 기록과는 천지차이다.[14] 당장 춘추오패들은 보통 주나라를 섬기지 않는 초나라를 제압하고 패자의 지위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의 패자인 제환공부터가 그러했는데, 이러다보니 타국에선 형식적으로나마 주나라 왕실을 존중해 공을 칭하는 와중 왕호를 쓰면서 대놓고 구정의 무게를 묻는 등 사실상 다른 모든 나라들의 어그로를 끌면서도 강대한 국력으로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야만스런 적국의 이미지였다.[15] 당장 수백년 후인 삼국지의 오나라 시절에도 강남지방은 이민족들과 습지가 넘쳐나서 활용하기 어려운 지역이 많았는데 전국시대때는 어떤 상태였는지 대충 상상이 갈 것이다. 강남지방의 개발은 꾸준히 진행되었으나, 강북과 강남의 경제력이 역전된 것은 보통 당나라 멸망 이후 송나라 시절로 본다. 특히 송나라 이전에는 중국 전 인구의 75%가 양쯔강 북쪽에 살았으나, 남송시기 들어서는 반대로 75%의 인구가 강남에 살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6] 오기가 아무리 새로 즉위한 초숙왕과 특권을 잃은 귀족들의 미움을 샀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는 선왕인 초도왕이 임명한 신하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초숙왕에게 '오기를 죽여야 합니다.' 라는 상소를 올릴 것이지(실제로도 상앙의 경우 진효공 사후 진의 원로세력 등이 상앙을 탄핵했고 이것이 상앙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병을 동원해 살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는 결국 왕이 직접 임명한 신하를 귀족들이 작당하고 죽일 정도로 귀족들의 힘이 셌다는 의미다. 초나라는 방대한 영토를 자랑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넓은 영토를 제어할 만한 강한 왕권은 부재했다. 진이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관중과 파촉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뽑아내 국력을 일취월장 시킨 것과 대비된다.[17] 이미 제위왕이 즉위하기도 전에 제나라가 연나라를 치자 삼진 전체가 합심하여 막아냈다. 그만큼 제나라는 전성기 전에도 강했다.(혹은 그만한 역량이 있거나)[18] 심지어 초나라도 월나라를 정복하기 전에는 내륙국이었다.[19] 훗날 위나라가 대량(大梁)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양으로 바꿨기 때문에 양 혜왕이라고도 한다. 맹자의 오십보 백보 고사에 등장하는 양혜왕이 바로 이 사람.[20] 그 전에 이미 이간계를 펼쳐서 명장 악의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만약 악의였다면 이런 술수에 놀아나지는 않았을 것이고.[21] 다만 제민왕 말기에 털린 여파가 가시지 않아서 이미 제양왕 시절에 조나라, 진나라에게 땅을 뻇기기도 했다. 그래도 제나라가 털린 수준은 진나라와 이웃한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의 정도와 비교하면 귀여운 수준[22] 그리고 이 평온이 꼭 좋은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너무 평온하게 지냈던 만큼 제나라의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이미 삼진을 통합한 진나라를 상대로 처절하게 싸우다 멸망한 초나라에 비해, 제나라는 뭘 한것도 없이 항복해버리고 만다.[23] 이 때 가장 큰 문제는 제왕 건으로 후승을 지나치게 총애했다. 오죽하면 제나라 백성들이 제나라가 망한 후 전건을 비난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을 정도[24] 특히나 변방에 위치했기에 이민족의 침공을 받을 일이 더 많았을 것이다.[25] 훗날 형가의 진시황 암살에 참여하게 되는 진무양이 이 사람의 손자가 된다.[26] 왜 최약체냐면 조양자 시절 지양자와의 전쟁에서 수도인 진양까지 공격당했는데 이 기간이 무려 3년, 반면 한, 위는 지씨의 강요로 조씨를 공격하다가 조양자의 설득에 조씨와 함께 지씨를 멸하고 지씨의 땅을 셋이서 갈라먹었기에 아무 피해없이 세력만 불렸으며 조나라의 초대 군주인 조열후가 조양자가 죽은 지 고작 17년 뒤에 즉위한 만큼 초기에는 조나라가 최약체일 수 밖에 없다. 다만 이는 삼진이 성립한 직후의 이야기고 한, 위나라가 짧은 전성기를 누린 이후 수도를 빼앗기는 등 급속도로 쇠락하는 동안 조나라는 진나라와 치고 받으면서도 꿀리지 않는 강성한 국가로 발돋움한다.[27] 진나라의 첫 정복 대상은 조나라였는데 무려 4차례나 침공했는데도 그걸 다 물리치는 저력을 보여준다. 하다하다 안 되겠다 싶은 진나라도 방향을 잠시 바꿔서 한나라부터 멸망시킬 정도, 그나마 이 덕에 조나라의 멸망이 몇년 늦춰졌다.[28] 이목의 최후는 출처마다 다르다.[29] 근데 정작 중산국은 위나라와 너무 멀어 결국 조나라가 차지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위나라가 차지했으나 도로 독립했고 이 독립한 중산국을 완전히 정리한게 조나라다.[30] 현 기준으로 본다면 대법관이 이에 해당한다.[31] 위혜왕 이후부터 맨날 지는 것과 대조적이다.[32] 다만 이는 진나라에 의한 압박의 결과다.[33] 이미 위무후 시기부터 문제가 생겼는데 우선 조나라와는 원래는 사이가 좋았는데 위무후 쪽에서 먼저 조나라를 쳐서 사이가 금이 갔고 이에 조나라에서 위나라의 속국을 건드려 서로 사이가 더 나빠졌다.[34] 이 뿐만 아니라 양혜왕 시기에 접어들면서 위나라에도 한계점이 생겨났다. 자세한 내용은 마릉 전투 문서 참조[35] 특히 위군 12만명이 전사한 이궐 전투에서의 참패가 제일 뼈아팠다고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이궐 전투 전만 해도 그래도 왕년의 위세는 없어지지 않았는지 위양왕 대에는 위, 한, 제 3국이 힘을 합쳐서 진나라를 상대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궐 전투 후에는 진나라에게 땅 400리나 떼어주는 조건으로 화친하는 등 완전히 힘이 빠져버렸으며 그나마도 1년 뒤 진나라가 재침공해 성 61개나 털어갔다고 나온다(...) 즉 마릉 전투가 위나라 쇠퇴의 시작이라면 이궐 전투는 그 쇠퇴를 완전히 확정짓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안희왕 대의 일도 결국 신릉군의 업적이다. 실제로 안희왕대의 기록도 신릉군과 관련되지 않으면 진나라에게 졌다, 진나라에게 땅이 넘어갔다. 정도밖에 없다.[36] 마지막 왕인 위왕가가 수도인 대량에서 그나마 저항을 했지만 왕분의 수공으로 인해 결국 패하였다.[37] 애초 국력부터가 타국에 비해 그다지 뛰어난 면이 없어서 진나라 왕이 죽었을 때도 다른 나라들은 다들 대신이 와서 조문한 반면 한나라는 왕이 직접 조문을 왔을 정도다.[38]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딱 다른 나라들 중간에 위치해 있다. 말 그대로 '나 좀 침략해줍쇼' 라고 말하는 위치에 있던 것 게다가 제일 작으니 얻어맞기에도 딱 좋다.[39] 다만 한나라가 칭왕한 시기는 위나라, 진나라와 일치한다. 딱히 특별히 빠르지도 않았고 연나라도 이 세 나라가 칭왕한지 고작 2년 뒤에 칭왕한다.[40]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보면 진나라는 진효공 재위기로 당시 상앙의 변법으로 강성해져가고 있었고 초나라는 초선왕 재위기로 쇠퇴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강성한 편이라서 호가호위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초선왕이다. 제나라는 제위왕 시절로 당시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으며 연나라는 연후문공 시절로 대내외적으로 소진의 합종책 외엔 별 일 없었고 조나라는 성후와 숙후 시절로 성후 시절에는 수도가 함락당하고 숙후 시절에는 위, 제 두 국가와 투탁거리는 수준이었으며 위나라는 위혜왕 시절로 크게 국력약화가 심하진 않았지만 딱 기원전 341년에 마릉 전투에서 진나라에게 대패한다. 즉 진과 제는 강해지고 조와 연은 별달리 대단한 일 없이 지내고 초는 좀 강함을 유지하고 위는 약해지던 시기였다.[41] 이 때 제나라 군주는 제후 섬이다.[42] 참고로 이 해 위나라의 전성기를 끝장낸 마릉 전투가 벌어졌다.[43] 특히 이궐 전투에서 대패한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한나라판 장평대전 수준 이 전투에서 전사한 위나라+한나라 병력이 무려 24만이나 되었다 하니 장평대전에 버금가는 대참사다.[44] 그나마 한나라는 진나라가 천하통일의 첫 목표로 조나라를 꼽았고 몇 차례에 걸친 조나라 정벌이 실패로 돌아갔기에 몇 년 정도 더 살 수 있었다.[45] 물론 이미 위나라는 군주의 칭호가 군으로 깎였을 때부터 독립국으로서 기능하지 않았다.[46] 특히 풍환, 모수, 조사, 상앙 같은 인물들은 나오지 못했다.[47] 다만 진수는 손오는 손빈의 후손들 것라고 추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