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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사군자(戰國四君子) 조승 趙勝 | ||
봉호 | <colbgcolor=#FFFFFF,#1c1d1f>평원군(平原君) | |
성 | 영(嬴) | |
씨 | 조(趙) | |
명 | 승(勝) | |
아버지 | 무령왕(武靈王) 조옹(趙雍)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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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전국사군자 중 두 번째로 알려진 인물. 조나라의 부흥을 이끌었던 무령왕의 아들로 이름은 조승(趙勝)이다.2. 생애
맹상군과 마찬가지로 식객들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평원군으로 봉해지기 전까지 호칭은 공자 승이었다.정벌을 적극 펼치며 한창 조나라의 세력을 키우던 조무령왕은 첩으로 들였던 맹요에게 빠져 그녀의 아들인 하를 태자로 세웠다. 이후 조무령왕이 왕위를 일찍 내려두고 주부(主父)라는 직위를 새로이 만들어 그 위치에 오르고 맹요 태생인 혜문왕을 세우고는[1] 섭정을 하였다. 그런데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조혜문왕에게, 다른 하나는 정실 태생 공자 장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한다.
이 일로 조무령왕은 아들 중 가장 똑똑한 조승을 불러 의견을 물었는데, 조승은 '진(晉)'이 둘로 나눠진 일[2]과 정나라 정장공(鄭莊公) 희오생(姬午生)이 동생을 죽인 일[3]을 빗대어 내전의 씨앗밖에 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기미를 읽은 불만 세력이 공자 장과 모의를 하고 결국 조나라에선 내란이 터진다. 조무령왕은 제환공과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고,[4] 조혜문왕의 승리로 난이 끝난다.
혜문왕이 혜안을 갖고 자신을 지지해준 이복형제 조승에게 평원땅을 주고 평원군에 봉하자, 평원군은 식객을 더욱 모으는 데[5] 주력하였다.
하루는 식객이었던 절름발이가 길을 가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격분한 식객은 애첩을 죽여달라 부탁해서 애첩을 베어주겠다고 말로만 했다. 그리고는 뒤로 가서는 "비웃었다고 사람을 죽여? 이상한 놈이군."이라면서 실행에는 옮기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식객들이 하나둘씩 곁을 떠나자 결국 애첩을 죽여 떠나간 식객들을 다시 붙잡았다. 식객들이 떠난 이유는 애첩을 베지 않아서 떠난 게 아니라 평원군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서 떠났던 것이다.
이 일이 진나라에 알려져 진소양왕은 평원군을 부르려 했는데, 마침 주변에서 제나라의 맹상군이 더욱 뛰어나다 귀뜸하자 맹상군을 불렀다. 덕분에 애먼 맹상군이 진나라에 붙잡혀 곤욕을 치를 뻔했기 때문에 이게 다 평원군 때문이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 물론 평원군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조나라 노래에 "제나라에 맹상군이 있으면 조나라엔 평원군이 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를 맹상군 다음가는 전국사군자로 꼽는 사람도 제법 많은 편이다.[6][7] 다만 어디까지나 고국인 조나라안에서의 평가가 이렇다는 거고, 실제적인 평가나 각종 사서 등 후대의 평가에서는 전국사군자 중 평가가 낮은 편이다.[8]
위의 절름발이 사건이나 후에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진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수도의 전사(傳舍)를 관리하던 사람의 아들이었던 이담(李談)[9]이 평원군에게 가족과 첩에게는 고기를 물리게 먹이고 비단 옷을 해 입히는 것을 지적한 것처럼 왕족 출신이라서 그런지 남에게 무신경한 면도 있었다. 이담은 수도가 함락당하면 당신도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이라고 충고하며 일족의 향락이 아니라 적을 물리칠 것을 권하자 이를 받아들여서 집안의 재물을 나눠줌으로써 결사대 3천 명을 조직, 진군의 포위를 풀어내는 업적을 이뤄냈다. 이후 주변국의 구원으로 한 숨 돌리게 되자 평원군은 이담을 찾았지만 그 결사대에 참여해 전사했으므로 그의 아버지를 이후(李侯)에 봉했다.
조나라의 위치가 진나라 바로 옆 동네였기 때문에 진나라와 매번 전쟁을 했지만, 인상여, 염파, 조사와 함께 조나라 사군의 일원으로 적절하게 대처했기 때문에 장평대전 이전까지 나라가 제법 안정되었으며 이 같은 공적을 의심하는 사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백기를 투입해 집중적으로 한나라를 공략해 병합하고 있던 진나라의 파상공세 전략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염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합병해 장평대전으로 조나라를 몰락시킨 것도 엄연한 사실. 사마천은 평원군을 가리켜 "귀공자였다."라고 평했는데, 이는 그의 안목 등을 은근히 비꼰 것이다.[10] 사실 사서에 기록된 것만 봐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고 훗날 귀족적인 면을 과시하다 위나라의 신릉군과 제대로 비교가 되면서 자신의 평판을 깎아먹게 된다.[11]게다가 장평대전의 전개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대국적 안목이 상당히 부족한 면모도 보인 것을 감안하면 사마천의 평가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장평대전과 신릉군을 비웃은 일로 평원군의 식객은 결국 절반 이상이 떠났다. 그 숫자만큼 신릉군의 식객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결론적으로 옳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융통성과 관대함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지만, 좀 귀족적인 성향이 강하고 다른 사군자들에 비해 전략적 식견이나 정치가로서의 기량은 다소 떨어지는 인물. 그래도 위제 일화에서 보듯 그 소양왕을 보고도 안 쫄고[12] 효성왕과 도양왕 같은 무령왕과 혜문왕 이후 함량미달의 군주들이 넘쳐나던 위기의 시기에 왕이 되었으면 조나라에 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신릉군의 누이와 결혼해 매부 처남 관계였고, 둘의 사이 역시 돈독했다. 나중에 맹상군과 신릉군 사이의 친교를 맺어주기도 했다.
평원군 밑의 식객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모수로, 장평대전 이후 멸망의 문턱까지 밟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나라와 초나라의 새로운 동맹을 말 한마디에 끝내버렸다. 본래 평원군은 문무 모두에서 뛰어난 20명을 참모로 쓰려고 했으나, 마지막 인원이 채워지지 않아 식객 모수가 스스로를 천거하자 평원군은 "뛰어난 사람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법인데 당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면서 거절했으나 모수가 "내가 주머니속에 있지 않았을 뿐이다" 라는 말로 평원군을 설득하여 20명의 인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주머니속 송곳을 비유한 고사성어 낭중지추와 보잘것없는 식객인 모수가 주인의 어려움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스스로 추천하였다 하여 모수자천이란 말이 생겨났다. 모수의 활약으로 초나라는 춘신군에게 구원군을 맡겨 파견했고 위나라 또한 신릉군이 왕명을 위조하여 응원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하지만 진군의 공격이 거세서 초군과 위군이 도착하기 전 한단이 함락될 지경이었는데 전술한 이담이 3천 결사대를 조직, 진군을 물리쳐 포위를 물리고 전선을 30리 밀어낸다. 그 사이 초군과 위군이 도착, 조나라는 멸망의 위기를 극복한다.
이 밖에도 평원군과 관련된 고사성어는 삼국동맹을 위해 초나라에 갔을 때 '조나라가 멸망하면 다음은 위나라와 초나라 차례'라는 뜻으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순망치한이 있다.[13] 하지만 평원군이 아무리 순망치한 드립을 쳐도 소용없다가 상술한 모수가 한마디하고 나서야 효과를 봤다는 게 함정.
그의 후손들은 무성(武成)에 봉해졌기에 이를 성씨로 삼았다.
3.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 13 |
삼국지 12의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통솔력 74/무력 63/지력 80/정치력 77. 전법은 전법봉인
삼국지 13에서도 등장. 스텟은 전작과 같다. 전법은 문관과 어울리지 않게 맹장돌격. 특기는 농업5 / 훈련7 / 순찰6 / 설파8 / 교섭4 / 언변2 / 인덕1 / 위풍4 / 신속3 특이하게도 고대무장 주제에 인연이 조옹과 연동이 되어있는 게 아이러니하다.
대진부에서 조나라 승상으로 등장하며[14], 본인의 조카인 효성왕을 보좌한다. 작품 자체가 진나라와 시황제 시각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다소 재수없고 사악하게 그려지지만 조나라에 염파, 이목 등 일부 노장들을 제외하면 워낙 머저리같은 인물들이 많아서(...) 제일 상식인처럼 보인다. 진나라에 시황제와 조희를 돌려주며 동맹을 청하러 찾아와 성 6개를 주고 동맹을 맺는다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는데, 이미 조나라는 연나라 군을 격파한 상태였고 동맹을 맺을 이유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평원군은 함양에 있는 동안 진나라 측 공작으로 이 정보를 알지 못했다. 효성왕이 대전에서 이 점을 질책하면서 염파를 승상으로 겠다고 폭언을 하자 충격을 받고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데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킹곤타의 만화 달인전에서는 주인공 붉은 삼협 일행을 지원하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온다. 다만 사기의 평가에도 나오듯 귀공자라는 모습때문인지 전쟁에서는 그다지 뚜렷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무쪽으로는 부족한 것을 보여주기도. 첫 등장은 진에 인질로 올때이며, 이후 귀국하는 과정에서 붉은 삼협과 만나고 조사가 죽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붉은 삼협 일행이 조나라 위주로 활동하게 되자 자연스레 자주 등장하고 한단을 지키는 전투에서는 염파와 더불어 군을 지휘한다. 하지만 군사쪽 전문가는 아니라서 대부분의 일은 염파가 담당. 하급 관리인 이담이 평원군은 조나라가 위기인데도 식객을 다스리는 일에 몰두한다며 날이선 비판을 하자, 자신은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며 무언가를 쌔닫기 시작한다. 여기에 식객인 모수가 당연한 것이 뒤집힐때라며, 죽음을 각오한 삼천 결사대에게 투자하는 것은 충분하다 라고 하자 결심을 세운다. 다음날 자신의 모든 식객을 돌려보내고 가진 보물을 전부 여불위에게 팔아 이담의 삼천 결사대를 지원한다.[15] 동시에 이전에 평원군이라 불린 자신을 장사지낸다며 소복을 입고,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지로 향한다는 평가를 여불위에게 받는다. 탁세의 귀공자라는 평은 이때도 받고 있었듯이 전쟁에는 크게 어울리지 않는 위인이라는 스탠스를 계속 보여주지만, 이담과 모수로 인해 완전히 변모하게 된 셈.
삼천 결사대의 활약을 보고 자신도 전투를 하고 싶다며 염파에게 전투를 가르쳐달라며 부탁하지만 염파는 평원군은 평원군 나름의 전투 방법이 있다며 군사들을 돋우는 역할을 맡긴다. 결국 이담과 염파, 신릉군 등의 활약으로 한단을 지켜내자 눈물을 흘리며 춘신군과 신릉군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시간이 지나 진 소양왕이 죽고 조문을 보내야할 시기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병이 꽤 진행되어 쇠약해진 모습으로 나온다. 붉은 삼협을 자신들의 대리로 진으로 보낸 뒤, 병상에 누워 죽음을 직감하고 모수와 신릉군에게 유언을 남긴다. 한동안 조나라에서 탱자탱자 머물던 신릉군은 눈물을 흘리며 진에 할거할 힘을 모으는 것은 신릉군 뿐이라며 생명의 불꽃을 맡기자 무언가 깨달은듯 위로 돌아가 진에 맞설 준비를 하게 된다. 이후에도 더 살아있지만 붉은 삼협이 돌아오기 직전 꿈에서 신릉군이 진의 도읍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며 사망한다.
[1] 장자인 공자 장(章)을 폐했다.[2] 진목후(晉穆侯)의 맏아들은 군위를 계승한 뒤 동생에게 당시 진나라 영토의 반에 육박하는 곡옥땅을 영지로 봉했는데, 후대에 이 곡옥이 커지면서 도리어 본가의 수도를 병탄해 버렸다.[3] 춘추오패의 롤모델이나 다름없는 유능한 군주로, 어머니가 동생 단(段)을 편애해서 정장공을 끌어내리고 대신 단을 군위에 앉히려 했다. 정장공은 짐짓 단에게 영지를 주고 세력을 키워줘 모반을 유도한 뒤 잡아죽였다. 그 기간이 20년이었다. 이 때문에 천하의 간웅으로 부르는 이도 많다.[4] 유폐당해 굶어죽었다.[5] 일설에 식객 3000명을 거느렸다고 한다.[6] 당시 조나라에 유행하던 노래에 齊孟嘗 趙平原이라는 동요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에서 따와 고문진보에서는 齊有孟嘗 趙有平原 楚有春申 魏有信陵 此四君者皆名智而忠信 寬厚而愛人 尊賢重士라고 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7] 한편으로 이런 면은 조나라가 제나라를 의식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맹상군 활동기의 제나라 왕은 민왕으로 재위 말엽 전까지의 제나라는 선대들로부터 축적된 국력으로 이 시기에는 진나라로부터 흔해터진 왕 말고 동제, 서제 만들어서 각자 나누어 가지자는 제안을 받을 정도였다. 헌데 평원군 활동기의 조나라도 혜문왕 시기까지는 전성기였으며 혜문왕과 제민왕은 재위기간이 많이 겹친다. 즉 둘 다 잘나가는 나라인데 제나라는 진나라로부터 특별 제안까지 받던 나라였으니 그 꼴을 본 조나라에서 제나라를 의식하여 이런 노래가 나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8] 실제로도 신릉군, 춘신군은 합종을 이끌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었으나 평원군은 고작 조, 위, 초 삼국동맹만을 이루어냈을 뿐이다. 그나마도 그 삼국동맹을 자기가 이끈 것도 아니다. 맹상군의 경우에는 이런 합종군을 이끈건 없지만 진소양왕이 평원군 대신 맹상군을 부르려 한 점이나 맹상군의 인재보는 능력을 감안해 보면 평원군보다 아래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제민왕 말기 있었던 5국침공도 맹상군이 위나라 재상일적 이야기이기도 하다.[9]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과 동명이라 사기에서는 이동(李同)으로 피휘되었다.[10] 귀공자의 풍모가 있으니 좋은 말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이 시대와 잘 맞지 않고 안목이 국가 지도부가 되기에는 짧다는 것을 은연히 비판한 것이다. 시대가 혼란상인 전국시대인 만큼 귀공자 스타일이 국가 지도부가 될 일이 아니니 말이다.[11] 평원군의 부인은 신릉군의 누이 위씨인데, 평원군의 판단 미스로 장평대전이 터지고 조나라가 처참히 패배하면서 한단은 함락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때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찡찡거려 진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신릉군은 조나라에 머물게 되는데 그동안 재야인사들과 교류에 열심이었다. 그런데 평원군은 그것을 보고 신릉군이 천한 것들과 어울린다며 부끄러워했고, 이에 화가 난 신릉군이 조나라를 떠나려 하자 평원군은 신릉군을 부랴부랴 만류했다. 이 사건이 알려진 이후 평원군의 평판은 대폭 하강하게 된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평원군의 식객 절반 정도가 평원군을 떠나 신릉군에게 가버린다.[12] 당시 위제는 그의 식객이었고 범수를 위해 위제를 죽이고자 한 소양왕이 평원군을 초청한 후 위제를 내놓지 않으면 조나라로 못 돌아갈 줄 알으란 협박을 받았는데 평원군은 거절했다. 그러나 소양왕은 방법을 바꿔 조효성왕을 협박해서 결국 위제는 죽었다.[13] 순망치한의 원조는 우나라의 궁지기다.[14] 본격적인 등장은 앞 시즌인 대진제국지굴기에서부터이며 이 때도 같은 배우인 유내예가 평원군 역을 맡았다.[15] 이 결사대에는 훗날 조를 지키는 이목과 방난 등이 속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