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2 21:27:21

진애공(영성)

진(秦)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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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나라 14대 국군
애공
哀公
영(嬴)
조(趙)
실전
아버지 진경공(秦景公) 영석(嬴石)[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01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36년 ~ 기원전 501년

1. 개요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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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秦)나라의 14대 군주. 진 경공(秦景公)의 아들. 진 혜공(秦惠公)의 할아버지. 초 소왕이 이끄는 초나라를 도와 오나라를 물리쳐서 멸망할뻔한 초나라를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록에 따라서 시호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기》 <진시황 본기>에는 '진 필공'(秦畢公),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진 필공'(秦㻫公),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진 백공'(秦栢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

진 애공 원년(기원전 536년), 당시 초나라는 장왕전성기를 이룩했지만 장왕의 아들인 공 와때부터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고 [2] 손자인 평왕때에 이르러서는 오나라의 부상으로 고전 중이었다.

진 애공 11년(기원전 527년), 초 평왕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진 애공의 여동생인 맹영[3]을 태자비로 삼아 도움을 받고자 했는데, 간신 비무기의 농간 때문에 결국 맹영은 초 평왕이 대신 차지했고 태자 웅건에게는 맹영을 따라온 제나라 출신 시녀를 진(秦) 나라 공주라고 속여 맺어주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비무기는 태자 건과 그 스승인 오사, 그리고 오사의 아들인 오상과 오운(伍員) 형제까지 해치려고 했다. 오사와 오상 부자는 도망치지 않고 처형당했지만, 오운은 태자 건과 그 아들 공자 승을 데리고 정나라로 갔다. 그러나 태자 건이 정나라의 정공을 죽이고 국군이 되려다가 오히려 들켜서 잡혀 죽었다. 그리하여 오운 즉 오자서는 오나라로 달아나 공자 광의 신임을 받고 오왕 료를 시해하며 공자 광을 왕으로 올리니 그가 바로 합려(闔閭)였다. 합려는 오자서는 물론 대병법가 손무(孫武)와 초나라에서 망명한 백비(伯嚭) 등을 등용해 국력이 매우 커졌다. [4]

진 애공 31년(기원전 506년), 합려가 초나라를 쳐서 초소왕은 달아나고 수도인 영이 점령되어 오군의 노략질로 개판, 나라 멸망직전까지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초나라의 충신 신포서는 소왕의 외가인 진(秦) 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했는데(참고로 오자서의 굴묘편시 이후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한 오자서를 꾸짖은 이후), 진 애공은 초나라가 신의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려고 했다.[5] 그러나 신포서가 7일 동안 정성으로 요청을 하니 [6] 결국 진 애공은 그 정성에 감복해 결국 초나라에 원군을 보내 초나라는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7][8]

진 애공 36년(기원전 501년), 애공이 병으로 죽었다. 아들인 진이공이 일찍 죽었기에 진이공의 아들이 뒤를 이으니 그가 진 혜공이다.


[1] 기록마다 이름이 다르다. 문서참조[2] 대표적인 사례로 진(晉)나라와 싸운 언릉 전투에서 패배했다.[3] 孟嬴, 백영(伯嬴)이라고도 함[4] 이 과정이 전부 진 애공 10년의 일은 아니다. 그저 요약일 따름이다.[5] 정략결혼이지만 아끼던 누이를 미래의 왕태후로 삼아줄 줄 알았는데 늙은 평왕이 태자에게서 빼앗아 진나라 왕족을 정비가 아닌 측실로 삼았으니 이거 하나만으로도 진 애공이 화날만했다. 후대의 각색판에선 진 애공이 신포서에게 이점을 지적했을 땐 신포서조차 부끄러워할 말이 없다고 했다. 다만 초소왕은 어리고 진 애공의 조카라고 대답했다.[6] 아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소설은 한층 더 각색해 자신은 개돼지만도 못하다며 자책한 신포서가 발가벗고 머무는 관저에서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진 애공이 몰래 찾아가 확인하고 감격해 마음을 바꿨다는 내용도 있다.[7] 물론 합려의 동생인 부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가 회군한 것도 큰 이유다.[8]공자 신같은 저항군이 연일 승리로 해이해진 오나라 군을 상대로 게릴라를 펼친 것도 한몫했다.